[세트] 한국전쟁의 기원 1 + 2-1 + 2-2 - 전3권 현대의 고전 16
브루스 커밍스 지음, 김범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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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나왔다. 너무나도 기대가 되는 책이다. 특히나 사학전공자다 보니 너무 기쁘다. 원서는 4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현대사 공부에 있어서 너무나도 중요한 책이다. 전권을 다 사서 꼭 완독할 생각이다. 많은이들이 이 책을 읽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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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종백제인 2023-04-26 21: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월서각에서 86년에 출판한 책이었는데 오타가 많아 짜증나긴 했어도 기대합니다
 

현재 우리나라를 정치지형만 놓고 보면, 민주당은 전라도 국민의힘(이라 쓰고 국민의짐 혹은 국민의암이라 읽는다.)은 경상도로 분리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대선에서도 특히나 대구 경북 지역은 국민의힘 후보인 윤석열이 압도적으로 많은 득표율을 얻었다. 사실 우리나라의 정치지형이 진보는 전라도 보수는 경상도로 등식화 된 계기는 아마도 박정희 시절 야당 후보인 김대중과의 대립의 산물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대구는 과거에 조선의 모스크바라고 불리던 도시였다. 해방 이후 미군정의 폭력과 착취에 맞서, 민중들이 봉기하기도 했었다. 대구 10.1항쟁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한국전쟁 시기 이승만 정부가 자행한 천인공노할 민간인 학살이 벌어져 무수히 많은 보도연맹원이 산골짜기에서 학살당했다. 심지어 이승만 정부는 이들을 집단학살 해놓고서, 시신을 콘크리트로 덮어버리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이승만 정권 시절을 보면, 대구를 포함한 경북지역은 현재와는 달리, 야당 성향도 제법 강했다. 1956년에 치러진 선거를 보면, 비록 민주당의 신익희가 열차에서 급사하기는 했지만, 진보당 소속이던 조봉암이 이승만과의 선거대결에서 210만 표를 득표하기도 했다. 흥미로운 건 당시 선거에서 경상도 일부 지역은 조봉암이 승리를 거두었다. 대구와 경주 그리고 진주에서 진보당 후보인 조봉암이 많은 득표율을 얻었고, 이는 이승만보다도 높은 득표율이었다. 사실 이승만의 득표율은 부정선거였기에, 정당한 득표율이 아니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조봉암의 득표율이 이승만 보다 높았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다.


선거가 끝난 이후 조봉암은 새로운 당을 창당했다. 그 당이 바로 진보당이다. 당시 조봉암이 주장한 것은 사실상 사회민주주의에 가까운 것이었다. 조봉암은 1956년 11월 10일 진보당 개회사에서 “자본주의 세계도 날로 수정되어 사회민주주의적인 전법을 쓰고 있고, 공산주의 세계도 날로 변해서 사회민주주의적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수렴론을 펴면서 사회민주주의 사회로 가자고 호소했다. 즉, 진보당의 강령은 1951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선언에 기반을 두었다. 흥미로운 건 당시 진보당원의 대다수가 사회민주주의도 프랑크푸르트선언도 몰랐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승만의 반공국가는 그러한 가치 마져도 절대 인정하지 않는 사회였다. 진보당은 각 지역에서 도당 결성대회를 가졌는데, 유지광과 같은 정치깡패들의 테러에 시달렸다. 심지어 전남도당 결성대회 때는 괴한들이 권총과 단도를 가지고 단원들에게 테러를 하는가 하면, 당시 야당 쪽에 있는 인사들도 이를 두둔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심지어 진보당의 평화통일에 대해 문제 삼았던 것이 바로 당시의 민주당이었다.


결국 진보당은 1958년 1월 12일부터 정부에 의해 검거되기 시작했다. 조봉암은 자진 출두하기로 했다. 당시 검사였던 조인구는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을 북괴 남침구호로 단정했으며, 신문들은 매일같이 조봉암이 북괴지령문을 보고 불태웠다거나 간첩과 접선했다는 식의 가짜뉴스들을 보도했다. 1958년 1월 21일자 동아일보의 사례를 들자면, 조봉암 관련 기사 제목이 바로, “조봉암씨 김일성과 모종내통”이다. 기사 내용의 핵심은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이 공산당이 부르짖는 노선 및 방법과 똑같은 것을 문구상 합리화시켜 놓은 것”이었다.


1958년 6월 검사는 조봉암과 양명산에게 중형을 구형했으며, 7월 2일 유병진 판사는 불법 무기 소지 등으로 조봉암에게 5년을, 양명산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5년을 선고하고, 나머지 진보당 간부들한테는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판결 3일 후인 7월 5일 소위 반공청년을 자처하는 괴한 300명이 법원에 난입하여, “친공 판사 유병진을 타도하자”, “조봉암을 간첩죄로 처형하라”라고 외치며 시위했다. 또한 이승만의 정당인 자유당은 산하 단체들로 하여금 친공판사규탄대책위원회를 구성케 하여 사법부를 위협했다. 


1심 판결 후 이승만은 국무회의에서 분통을 터뜨렸다. 2심 재판은 결국 김용진이라는 인물이 맡았다. 그는 1심과는 반대로 양명산이 혐의 사실을 부인했는데도 조봉암과 양명산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진보당 간부들에게도 실형을 선고했다. 대법원 주심은 김갑수였다. 이 판결이 있기 전 홍 법무장관은 국무회의에서 김갑수 대법관 등은 신국가보안법에 대한 견해가 우리와 같고, 정부로서 그에 대해 특별한 대우를 해왔고, 본인으로서도 그를 설득시킬 자신이 있다고 말한 것으로 국무회의 기록에 쓰여 있다. 1959년 2월에 있은 대법원 판결에서는 결과적으로 조봉암은 사형을 나머지 진보당 간부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물론 당시 미국도 이 사건을 주시했다. 다울링 주한미대사는 이기붕을 만나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했다. 그러나 조봉암은 미국한테 아무래도 위험한 인물로 비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시대를 앞서간 현실정치가였지만, 민족을 냉전보다 위에 놓고 냉전을 타넘고 가려고 했기 때문에 역풍의 정치가라는 말을 들었다. 결국 1959년 7월 31일 조봉암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버렸다. 조봉암이 죽기 전 남긴 말은 다음과 같다.


“나는 이 박사와 싸우다 졌으니 승자로부터 패자가 이렇게 죽음을 당하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다만 내 죽음이 헛되지 않고 이 나라의 민주 발전에 도움이 되기 바랄 뿐이다.”


죽산 조봉암의 죽음은 이승만식 파시스트 독재가 얼마나 비민주적이고 폭력적인지를 보여주는 또 다른 예시다. 한국전쟁이 휴전협정으로 마무리 된 1950년대 중반, 이 사회는 조금이라도 좌파 내지 진보적 색채를 띤 사람들은 철저히 학살당하거나 북으로 가거나 아니면 지리산으로 들어가 죽거나 감옥에 갇힌 상태였다. 전쟁의 결과는 한반도 남쪽에 만들어진 멸균실 수준의 반공사회였다. 전 독립기념관장 김삼웅의 말대로 조봉암은 이승만의 반공 히스테리의 희생물이었다.


사실 이승만에게 도전하는 사람들은 죽음이 따랐다고 할 수 있다. 제헌의원 선거 때 이승만과 대결한 독립운동가 최능진은 국가보안법이 적용되어 처형당했고, 잠재적 라이벌 관계였던 백범 김구도 암살됐으며, 그 이전에는 여운형 또한 이승만의 지지자에 의해서 암살당했다. 1950년대 당시 야당 대통령 후보 신익희와 조병옥은 선거 도중 병사했고, 현직 부통령 장면도 이승만의 수하들이 총을 쏴서 죽을 뻔했다. 결국 조봉암 또한 그런 사례였던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반공과 안보를 내세워 조봉암을 죽음으로 그리고 형장의 이슬로 몰고 간 이들의 출신성분이다. 조봉암을 사법살인으로 몰고 간  관료, 청지인, 검사, 판사 중에는 과거 일제 때 친일을 했던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누대를 두고 잘 먹고 잘 살았다. 조봉암의 죽음을 큰 틀에서 보자면, 이승만을 지지하는 친일파 세력들이 독립운동가를 빨갱이로 몰아 사법살인한 사건이었다. 따라서 조봉암의 죽음은 결국 이승만과 일본 제국주의 협력자 무리배들이 독립운동가를 죽인 천인공노할 범죄인 것이다.


참고문헌


서중석, 『이승만과 제1공화국』, 역사비평사, 2007.

김삼웅, 『죽산 조봉암 평전』, 시대의창,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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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dvs117 2023-07-16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고 이는 박정희-전두환-노태우 군사독재 시기 민주항쟁 탄압으로 이어졌다가, 21세기에는 MB, 윤석렬, 국짐당 등 現 수구세력들의 민주인사 박해 및 노동운동 탄압, 통일운동 탄압으로 이어지고 있지요! (역사는 반복된다)
 
빈곤의 역사 - 교수대인가 연민인가 역사도서관 8
브로니슬라프 게레멕 지음, 이성재 옮김 / 길(도서출판)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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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듣는 수업 덕분에 읽게 됐다. 발표분담을 하게되면서 읽게 됐고, 어쩌다보니 생각 이상으로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원생이라 참으로 바쁜 인생을 살고 있지만, 그래도 이렇게 책에 대한 리뷰를 한번 남겨본다.

사실 나는 이 책의 제목에 제법 끌렸다. 자본주의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인 ‘빈곤‘의 역사를 다룬다고 하니 제법 끌렸다. 물론 이 책 저자의 이력을 보니 내가 싫어할만한 이력을 가지고 있긴 하다.

우선 냉전시기 폴란드에서 미국의 지원을 받으며 반공투쟁을 했던 자유노조 운동의 제법 급이 있는 일원이었고, 냉전 이후에도 폴란드 정계에서 활동한 것이 확인된다.

물론 인물의 이력은 내가 싫어할만한 점이 있지만, 책 자체는 그래도 읽을만 했다. 저자는 빈곤의 문제에서 현대의 빈곤을 너무 짧게 다룬다는 한계가 분명있지만, 중세나 근대 과정의 빈곤에 대해선 상당히 상세히 다룬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유럽 역사에서의 빈곤이 중세와 근대에 어떤 형식으로 나타났는지 알 수 있었다. 기득권에 있으면서 표면적으로 종교를 앞세우며 보시행위를 하는 것과 농촌의 소외화 그리고 도시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부재한 생계보장 및 빈민들의 슬럼화 등 중세와 근대의 빈민들 삶을 배우는데 제법 공부가 됐다.

근대 시기 감옥 제도도 마찬가지다. 나는 감옥에 대해 단편적으로 범죄자의 처벌만 생각했는데, 빈민들을 감시하고 탄압하고 수용하기 위한 존재로 사용한다는 사실에서 제법 놀랐다. 책에 따르면 영국과 미국의 처벌식 감옥은 19세기쯤 자리 잡았다고 한다.

사실 일반인들이 읽기에는 조금 어려울수도 있는 내용들이 제법 나오는 것 같다. 뭐 그래도 다 읽었고 모르는 사실도 제법 알게 됐으니 그거대로 만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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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의 전쟁 -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냉전까지, 스탈린은 소련을 어떻게 이끌었나
제프리 로버츠 지음, 김남섭 옮김 / 열린책들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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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시프 스탈린. 한국 사회에서 이오시프 스탈린 하면 가장 강조되는 이미지는 무엇일까? 아마도 스탈린에게 붙는 수식어는 학살’, ‘독재’, ‘숙청’, ‘폭군과 같은 부정적인 표현들이다. 당장 세계사 관련 강의에서 스탈린 관련 강연을 들어보면, 하나같이 하는 얘기들이 앞서 말한 수식어에 전부 다 끼어 들어간다고 할 수 있다. 우크라이나 대기근, 대숙청, 고려인 강제 이주, 독소 불가침 조약, 냉전의 시작 등 이러한 소재는 스탈린 개인을 강력히 비난하기 위한 서방측의 소재 중 하나다. 그런 이미지와 더불어 한국에서 강조되는 스탈린에 대한 인식은 “1950625일 김일성의 불법 남침을 허용한 분단의 원흉이라는 주장이다. 마찬가지로 서방 사회가 가진 스탈린에 대한 이미지 또한 앞서 언급한 수식어들에 다 맞아 들어간다. 이들이 하는 주장을 보면, 스탈린은 항상 학살자여야만 하고, 독재자여야만 하며, 긍정적으로 서술돼야 할 부분이 하나도 없는 인물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이오시프 스탈린은 소위 서방 사회가 주장하는 그러한 이미지만 가지고 해석이 가능한 인물이 아니다. 특히나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승리를 생각해보면 말이다. 한번 생각해보자, 1941622일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한 시점부터 194559일 독일이 공식적으로 연합국에게 항복하는 시점까지 스탈린이 지휘했던 소련군은 과연 무엇을 했는지 말이다. 히틀러의 소련 침공으로 세계 역사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파괴와 살상을 경험했다. 히틀러의 군대는 현대화된 수만 대의 항공기와 수만 대의 탱크와 장갑차 그리고 서부전선에서 훈련된 수백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소련을 침공했다. 나치의 진격으로 소련은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 그리고 스탈린그라드까지 전선이 밀렸으나, 모스크바 전투와 스탈린그라드 전투 그리고 쿠르스크 전투에서의 승전을 통해, 동부전선 곳곳에서 파시스트 침략자들을 격퇴했고, 1945년에 궁극적으로 승리했다.

 

이 모든 과정에서 단순히 소련군과 소련군 장성들 그리고 이들과 함께한 민중들의 힘으로만 가능한 일이었을까? 이런 점을 생각해보자면, 이오시프 스탈린은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소련의 지도자였다. 스탈린을 비난하기 바쁜 인물들은 1939년 독소 불가침 조약과 1941년 독일군의 침공으로 밀린 전선과 그에 따른 막대한 인명피해를 지적한다. 그러나 이러한 비난은 어떤 면에선 서구사회의 단편적인 역사해석에 가깝다. 우선 독소 불가침 조약을 예로 들자면, 과거 서구 학계는 1939년 독소 불가침 조약이라는 소재를 통해 스탈린을 히틀러와 같은 폭군이자 학살자로 묘사하고 싶어 했다. 여기에는 냉전시대 소련에 대해 흑색선전과 비난을 하던 인사들도 합류했다.

 

하지만 독소 불가침 조약의 맥락에는 파시즘 위협을 대비하기 위한 시간벌기라는 목적이 있었다. 1938년 뮌헨 협정 이후 나치 독일에게 양보만 보이던 서방의 모습에 스탈린은 그 누구보다 비판했던 인물이었으며, 스페인 내전 당시에도 적어도 서방보다 지원을 더 많이 했다. 1930년대 파시즘이라는 위협속에서 스탈린은 어떻게든 이들에 맞설 시간을 벌고자 했고, 그 과정에서 체결한 것이 소위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으로 알려진 독소 불가침 조약이었다. 물론 이것이 나치독일과 소련 양국의 군사적 혹은 이데올로기적 동맹을 뜻하는 것은 전혀 아니었으며, 스탈린은 독일의 침공을 대비하기 위해 최신식 전차와 항공기 등의 생산가동을 강화했으며, 1938년 당시 150만 명이었던 붉은 군대는 1941년엔 500만 명으로 증가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이 생길 것이다. 왜 스탈린은 예상되는 전쟁을 대비했음에도, 독일군의 기습 공격 시점 자체를 빗나갈 정도로 파악하지 못했을까? 답은 간단하다. 당시 히틀러는 영국과의 전쟁을 끝내지 않은 상태였다. 1940년 프랑스 점령 이후 독일은 영국을 상대로 항공전을 벌였고, 결과적으로 항공전에서 패배했다. 항공전에서 승리하지 못한 상태에서 독일이 곧바로 침공하지 않을 거라는 게 스탈린의 판단이었다. 생각해보면, 스탈린의 판단은 제법 합리성을 가지고 있었다. 1812년 러시아를 침공한 나폴레옹과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빌헬름 2세가 겪은 양면전선은 결국 패배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히틀러는 스탈린의 합리적인 판단을 초월하는 전무후무한 침략자였다. 그래서 1941622일 독소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스탈린의 지도력은 탁월했다. 비록 스탈린은 소위 대테러라 불리는 대숙청을 단행하여, 무고한 희생자를 불러오긴 했지만, 독소전쟁 시점에선 소련의 장성 및 군사 전략가들과 협력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스탈린은 개인적으로 매우 부지런하게 일하는 사람이었고, 오히려 밑에 있는 사람이 그 열정을 따라가기 힘든 예도 있었다. 적어도 독일군이 모스크바 외곽까지 진격했음에도 탁월한 용기와 지도력을 보여, 소련 인민들을 파시스트에 맞서 단결시켰고, 독일군에게 쓰라린 패배를 맞보게 했다. 그 이후에도 스탈린의 보인 지도력 덕분에 소련의 군사전략가들은 자율적이고 창의적으로 군사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스탈린에 대한 제프리 로버츠의 평가를 보자.

 

스탈린은 매우 유능하고 대단히 성공적인 전쟁 지도자였다. 스탈린은 많은 실수를 저질렀고 야만적인 정책을 추구하여 수많은 인민의 죽음을 야기했지만, 그의 리더십이 없었다면 소련은 나치 독일에 맞선 전쟁에서 패배했을 것이다. 처칠, 히틀러, 무솔리니, 루스벨트, 그들은 모두 군사 지도자로서 대체 가능한 인물이었지만 스탈린은 그렇지 않았다.”

 

출처: 스탈린의 전쟁 p.7

 

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은 군인 1,000만 명과 민간인 1,700만 명을 포함해 2,700만 명에 달하는 인명이 목숨을 잃었다. 독소전쟁으로 무려 2,500만 명의 소련인이 집을 잃었고, 1,700여 개의 도시와 소읍, 7만 이상의 촌락, 32,000개 이상의 공장, 65,000km의 철도, 10만의 콜호즈와 소호즈가 파괴 또는 소실됐다. 히틀러의 침공으로 소련 국부의 1/3이 날아가버렸다. 이러한 인명손실에 가려지기는 했지만, 독일이 동부전선에서 받은 군사적 손실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동부 전선에서 전쟁을 치르는 동안 소련군은 600개 이상의 적군 사단(독일군은 물론이고, 이탈리아, 헝가리, 루마니아, 핀란드, 크로아티아군을 포함해)을 괴멸시켰다. 특히 독일의 경우 동부전선에서 300만 명의 사망자를 포함해 1,000만 명의 사상자를 냈고(독일 총 전쟁 사상자의 75%), 히틀러의 추축 동맹국들은 100만 명을 잃었다. 붉은 군대는 48,000대의 적군 탱크, 167,000문의 대포, 77,000대의 항공기를 파괴했다.”

 

출처: 스탈린의 전쟁 p.45~46

 

1942년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1943년 쿠르스크 전투 그리고 1944년 레닌그라드 포위전에서의 승리는 스탈린과 소련군 장성 그리고 소련군대가 군사적으로 탁월한 군대로 성장해나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19446월부터 8월까지 소련군이 동부전선 전역에서 반격한 일명 바그라티온 작전에는 제1, 2, 3 벨라루스 전선군들과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이 동원됐다. 4개의 전선군은 240만 명의 병력과 5,200대의 탱크, 36,000문의 대포, 5,300대의 항공기로 구성됐다. 이 과정에서 소련군은 벨라루스의 수도 민스크를 탈환했고,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를 탈환했으며, 우크라이나의 중심지인 리보프를 탈환했다. 그 결과 동부전선 전역에 있는 수많은 곳이 소련군에 의해 해방됐고, 독일의 추축국 동맹은 점차 와해되기에 이르렀다. 소련군이 이렇게 많은 지역을 파시스트 침략자에 맞서 해방할 당시, 영미 연합군은 그해 6월 프랑스 북부 해안 노르망디에 상륙하여 겨우 제2 전선을 구축했을 뿐이었다. 소련군의 이러한 군사적 성공에는 스탈린의 지도력이 한몫했다.

 

스탈린그라드 때부터 쭉 있었던 일은 스탈린이 더 많이 귀를 기울였고, 자문이 좋을수록 그것을 더 잘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스탈린뿐 아니라 소련 장군들도 전쟁 1일 차부터 가파른 학습 곡선을 그리고 있었는데, 바로 이 쓰라린 패배 경험을 통해 장군들은 더 좋은 사령관이 되었고 스탈린은 더 나은 최고 사령관이 되었을 뿐이다.”

 

출처: 스탈린의 전쟁 p.278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이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에 맞서 승리할 수 있는데 크게 기여한 지도자는 바로 이오시프 스탈린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오시프 스탈린이 제2차 세계대전 승리에 기여한 역사는 서방세계에서 아직도 공정하게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따라서, 이런 문제점을 아주 잘 잡아주는 책이 이번에 열린책들 출판사에서 번역한 제프리 로버츠의 책 <스탈린의 전쟁>이다.

 

사실 글쓴이는 이 책이 국내에 출판되기 전 제프리 로버츠에 대해 알고 있었다. 이 책이 출판되기 몇 년 전 국내 언론사가 보도한 기사를 읽었는데, 그 기사가 바로 제프리 로버츠가 내리는 스탈린에 대한 평가였기 때문이다. 제프리 로버츠는 소련의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이 잔혹한 독재자이지만, 2차 세계대전 당시 가장 뛰어난 전시 지도자였고, 전쟁 이후 평화를 추구했다고 얘기했다. 그래서 제프리 로버츠라는 인물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러던 중 올해 베트남을 여행하다가 우연히 페친을 통해 제프리 로버츠의 책이 국내에 번역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글쓴이는 귀국하자마자 책을 구매했고 너무나도 흥미롭게 이 책을 읽었다.

 

사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군의 업적을 재평가한 책은 국내에 있긴 하다. 리처드 오버리의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이나, 데이비드 글랜츠의 <독소전쟁사 1941-1945>가 대표적인 예시다. 그러나 이 책들은 주로 군사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추었지, 당시 소련군을 총괄적으로 지도하며 승리에 기여한 스탈린의 헌신과 노력은 크게 다루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다. 그런 점에서 제프리 로버츠의 책은 여러모로 큰 의미를 지니는 책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로버츠의 책은 스탈린 인물에 대한 평가를 담은 국내 출판물 중에 가장 읽어볼 만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로버트 서비스의 <스탈린 강철권력>이나 올레크 흘레브뉵의 <스탈린 독재자의 새로운 얼굴> 등은 이오시프 스탈린 개인에 대한 비판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스탈린이 보인 지도력과 냉전시기 평화를 위한 노력 등은 기본적으로 생략된 느낌을 지우기 힘들었다. 반면에 로버츠의 책은 스탈린의 노력을 드러내고자 하는 노력과 헌신이 보였다. 그런 점에서도 참으로 훌륭했다.

 

특히나 냉전시대에 대한 제프리 로버츠의 평가는 상당히 탁월하고 훌륭하다. 냉전시기 서구사회는 냉전의 책임을 소련에게 전가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나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이 저서들에서 주장한 바와 같이 소련과 스탈린은 반파시즘 인민전선 투쟁에서 얻은 전유물 한에서만 세력을 넓혔지, 다른 곳에 깊숙이 개입하지는 않았다. 이것이 바로 소련의 경쟁자 미국과는 분명히 달랐다. 로버츠 또한 냉전의 책임은 스탈린이 아닌 영국과 미국에게 책임이 더 있다고 본다. 1946년 처칠의 철의장막 연설이나 1947년 트루먼 독트린의 선포는 스탈린을 전적으로 자극하는 행위였다. 처칠의 철의장막 연설이 있고나서, 스탈린은 이에 대한 항의의 반박문을 프라우다지 등 소련 기관지에 실었다. 19466월 몰로토프는 미국과 서방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항의하기도 했다.

 

세계에 미국이 안 보이는 구석이라곤 없습니다. 미국은 가는 곳마다, 아이슬란드, 그리스, 이탈리아, 튀르키예, 중국, 인도네시아 등지에 공군기지가 있고, 태평양에는 더 많은 공군 기지와 해군 기지가 있습니다. 소련의 군대는 중국을 비롯해 다른 외국 영토들에서 철수했습니다만, 미국은 아이슬란드 정부에 항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이슬란드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중국에서도 병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는 진정한 팽창주의의 증거로, 제국주의 정책을 꾀하는 어떤 미국 집단의 노력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출처: 스탈린의 전쟁 p.506

 

당시 소련과 스탈린이 미국과 달리 개입주의적 성격을 띠지 않은 이유에 대해 제프리 로버츠에 따르면 냉전 초기 유럽 내에서 사회주의 세력이 급증했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알바니아는 전쟁 전에 비해 공산당원이 1,000명에서 12,000명으로 급증했다. 중립국으로 유명한 오스트리아는 16,000명에서 132,000, 벨기에는 1만 명에서 12만 명, 영국은 15,000명에서, 5만 명, 프랑스는 34만 명에서 100만 명, 독일은 30만 명에서 80만 명 등으로 증가했다.서유럽만 해도(알바니아는 동유럽이니 여기서는 논외) 공산당원의 숫자가 급증했으며, 동유럽에서의 당원 증가비율은 어마어마했다. 전쟁 이후 유럽에서 실행된 선거 결과를 보자.

 

유럽 공산주의자들이 보여준 이 인상적인 전후의 실적은 전쟁 후 실시된 선거 결과에서도 그대로 되풀이되었다. 동유럽 수치만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불가리아의 경우, 194511월 선거에서 공산주의가 이끄는 조국전선이 투표의 88%를 득표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경우, 19465월 공산주의자들은 투표의 38%를 획득했다. 헝가리에서 공산주의자들은 194511월에는 불과 15%의 투표만 획득했지만 19478월 선거에서는 22%까지 증가했고, 당이 이끄는 좌익 블록은 의석이 66%를 얻었다. 19471월 폴란드 선거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이끄는 민주블록은 80%의 표를 받았다. 루마니아의 경우, 194611월에 공산주의자들이 이끄는 민주주의 정당 블록이 투표의 80%를 득표했다. 유고슬라비아의 경우, 194511월에 야당이 선거를 보이콧하여 대안 후보가 없었음에도 유권자의 90%가 공산주의자들의 인민전선에 투표했다.”

 

출처: 스탈린의 전쟁 p.422~423

 

비록 책 본문에서는 크게 강조하지 않았지만, 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은 반식민주의 해방운동과의 연관성을 땔 수 없는 것 같다. 1943년 코민테른은 해체되었지만, 그것을 구성하던 조직적 요소들 중 많은 요소는 이전처럼 계속 기능을 했다. 또한 1947년 쯤 코민포름이라는 것이 구성되면서, 식민지 해방운동과도 연계가 됐고, 식민지 지배로부터 해방된 지역에서의 인민민주주의 정권이 들어서게 되는 요소로도 작용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인도차이나 반도나 한반도 이북에서 인민민주주의적 개혁이 이루어졌던 것을 생각해보면,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1935년 코민테른 제7차대회에서 결정된 인민전선이 식민지 해방운동 속에서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반면에 미국이 지원한 세력들은 지주와 자본가를 중심으로 하는 친식민주의 혹은 친파시즘적 세력이었다는 점에서 소련과는 명확한 차이점을 보인다. 아래는 안드레이 즈다노프가 코민토름 회의에서 한 연설이다.

 

우리가 전쟁의 종결로부터 멀리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전후 국제 정치에서 두 가지 기본 지향이 더욱더 분명히 두드러지는데, 이는 두 개의 기본 진영으로의 분열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제국주의ㆍ반민주주의 진영이 하나이고 반제국주의ㆍ민주주의 진영이 다른 하나입니다. 제국주의 진영을 이끄는 주요 세력은 미국입니다. 제국주의 진영의 근본적인 목표는 제국주의를 강화하고 새로운 제국주의 전쟁을 준비하고 사회주의와 민주주의에 맞서 싸우고 반동적ㆍ반민주주의적ㆍ친파시즘 체제와 운동을 전면적으로 지지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 제국주의 진영은 모든 나라에서 반동적ㆍ반민주주의적 분자들에 의지하고, 자신의 전시 동맹국들에 반대하여 이전의 전쟁 적국들을 지지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반제국주의ㆍ반파시즘 세력은 다른 진영을 구성하는데, 이 세력의 중추는 소련과 신민주주의 국가들입니다. 이 진영의 목표는 새로운 전쟁과 제국주의 팽창의 위협에 맞서 싸우고 민주주의를 공고히 하며 파시즘 잔재를 뿌리 뽑는 것입니다.”

 

출처: 스탈린의 전쟁 p.526~527

 

앞서 강조했듯이 제프리 로버츠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스탈린이 보인 리더쉽에 대한 재평가와 냉전시대에 대한 재해석이다. 그러나 글쓴이가 보기에 로버츠의 책 또한 몇몇 부분에서는 한계를 보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스탈린이 1930년대 단행했던 강제 이주 정책에 대해 인종청소라고 표현한다든지, 1943년 나치 독일이 주장한 카틴 대학살에 대해 소련 측 학살만을 주장하는 자료만 인용한다든지, 전쟁 말기 소련군의 전시 강간을 다루는 부분에서 유고슬라비아의 친미 반공주의자인 밀로반 질라스의 검증되지 않은 증언을 액면 그대로 인용한다든지 하는 것을 들 수 있다. 이런 부분에선 제프리 로버츠 또한 역사해석에 있어서 한계가 있다.

 

또한 냉전을 다루는 파트에서 한국전쟁을 다루는 파트도 너무 서구의 일방적인 시각으로 집필된 느낌을 버리질 못했다. 저자 제프리 로버츠가 서양 현대사에서 소련사를 전공으로 하고 스탈린에 관해 주로 연구한 사람이다 보니, 한반도 상황에 대해서 너무 단편적으로만 접근했다. 한국전쟁에 대해 스탈린의 실패라는 구절을 쓰는 건 둘째치고, 굳이 김일성의 침공 부분만 강조할 필요가 있었을까? 로버츠 또한 김일성의 증언을 토대로 일부 남로당들의 무장투쟁을 잠시나마 언급했는데, 최소한 해방 이후 미국이 이승만 정부를 세우는 과정에서 저지른 제주 4.3학살을 포함한 서방 쪽의 심각한 폭력에 대해선 왜 언급조차 안 했는지 다소 불편했다. 저자가 이쪽으론 비전공자니 보이는 한계라고 단순히 생각해야 하는 건지 정말 모르겠다.

 

물론 제프리 로버츠가 이러한 한계점을 보인다고 해서, 책 자체를 헐뜯고 싶지는 않다. 다만 그런 한계점들은 여전히 좀 아쉬움이 남을 뿐이다. 책의 저자는 현재까지도 서방 사회가 무작정 폄하의 대상으로만 보는 이오시프 스탈린의 또 다른 이면을 조명하기 위해 큰 노력을 했고, 그러한 노력의 결실이 책을 통해 보였다. 특히나 스탈린이라는 인물을 주제로 다룬 국내 번역서 중에 2·3차 가공된 책이 이 정도로 스탈린에 대해 재평가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로버트 서비스나 올레크 흘레브뉵의 경우만 봐도 스탈린에 대해 재평가는커녕, 비하하기 바쁘다. 반면에 로버츠는 스탈린의 리더쉽과 외교술을 조명하기 위해 여러 자료와 근거들을 인용하고자 한 것이 보인다. 그런 점에서 로버츠의 <스탈린의 전쟁>은 서방 사학자가 쓴 스탈린 관련 책 중에 제법 읽어볼 만한 가치가 높은 책이라 생각한다. 또한, 이 책을 통해 제법 얻을 만한 점들도 많다고도 본다.

 

따라서 세계사와 역사에 관심이 많은 이들과 스탈린에 대한 재평가가 궁금한 이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적극적으로 권하는 바이며, 앞으로도 이런 훌륭한 스탈린 관련 서적이 국내에 많이 나오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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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맞습니다. 키이우는 평온합니다. 건물이 멀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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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dvs117 2023-06-29 21: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끼이프(Киев)는 폭격 없이 도시가 버텼습니다. 왜냐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전선이 대부분 동부 우크라이나 쪽에 있기 때문에 전선에서 꽤 떨어져있기 때문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