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우리나라를 정치지형만 놓고 보면, 민주당은 전라도 국민의힘(이라 쓰고 국민의짐 혹은 국민의암이라 읽는다.)은 경상도로 분리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대선에서도 특히나 대구 경북 지역은 국민의힘 후보인 윤석열이 압도적으로 많은 득표율을 얻었다. 사실 우리나라의 정치지형이 진보는 전라도 보수는 경상도로 등식화 된 계기는 아마도 박정희 시절 야당 후보인 김대중과의 대립의 산물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대구는 과거에 조선의 모스크바라고 불리던 도시였다. 해방 이후 미군정의 폭력과 착취에 맞서, 민중들이 봉기하기도 했었다. 대구 10.1항쟁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한국전쟁 시기 이승만 정부가 자행한 천인공노할 민간인 학살이 벌어져 무수히 많은 보도연맹원이 산골짜기에서 학살당했다. 심지어 이승만 정부는 이들을 집단학살 해놓고서, 시신을 콘크리트로 덮어버리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이승만 정권 시절을 보면, 대구를 포함한 경북지역은 현재와는 달리, 야당 성향도 제법 강했다. 1956년에 치러진 선거를 보면, 비록 민주당의 신익희가 열차에서 급사하기는 했지만, 진보당 소속이던 조봉암이 이승만과의 선거대결에서 210만 표를 득표하기도 했다. 흥미로운 건 당시 선거에서 경상도 일부 지역은 조봉암이 승리를 거두었다. 대구와 경주 그리고 진주에서 진보당 후보인 조봉암이 많은 득표율을 얻었고, 이는 이승만보다도 높은 득표율이었다. 사실 이승만의 득표율은 부정선거였기에, 정당한 득표율이 아니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조봉암의 득표율이 이승만 보다 높았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다.


선거가 끝난 이후 조봉암은 새로운 당을 창당했다. 그 당이 바로 진보당이다. 당시 조봉암이 주장한 것은 사실상 사회민주주의에 가까운 것이었다. 조봉암은 1956년 11월 10일 진보당 개회사에서 “자본주의 세계도 날로 수정되어 사회민주주의적인 전법을 쓰고 있고, 공산주의 세계도 날로 변해서 사회민주주의적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수렴론을 펴면서 사회민주주의 사회로 가자고 호소했다. 즉, 진보당의 강령은 1951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선언에 기반을 두었다. 흥미로운 건 당시 진보당원의 대다수가 사회민주주의도 프랑크푸르트선언도 몰랐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승만의 반공국가는 그러한 가치 마져도 절대 인정하지 않는 사회였다. 진보당은 각 지역에서 도당 결성대회를 가졌는데, 유지광과 같은 정치깡패들의 테러에 시달렸다. 심지어 전남도당 결성대회 때는 괴한들이 권총과 단도를 가지고 단원들에게 테러를 하는가 하면, 당시 야당 쪽에 있는 인사들도 이를 두둔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심지어 진보당의 평화통일에 대해 문제 삼았던 것이 바로 당시의 민주당이었다.


결국 진보당은 1958년 1월 12일부터 정부에 의해 검거되기 시작했다. 조봉암은 자진 출두하기로 했다. 당시 검사였던 조인구는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을 북괴 남침구호로 단정했으며, 신문들은 매일같이 조봉암이 북괴지령문을 보고 불태웠다거나 간첩과 접선했다는 식의 가짜뉴스들을 보도했다. 1958년 1월 21일자 동아일보의 사례를 들자면, 조봉암 관련 기사 제목이 바로, “조봉암씨 김일성과 모종내통”이다. 기사 내용의 핵심은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이 공산당이 부르짖는 노선 및 방법과 똑같은 것을 문구상 합리화시켜 놓은 것”이었다.


1958년 6월 검사는 조봉암과 양명산에게 중형을 구형했으며, 7월 2일 유병진 판사는 불법 무기 소지 등으로 조봉암에게 5년을, 양명산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5년을 선고하고, 나머지 진보당 간부들한테는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판결 3일 후인 7월 5일 소위 반공청년을 자처하는 괴한 300명이 법원에 난입하여, “친공 판사 유병진을 타도하자”, “조봉암을 간첩죄로 처형하라”라고 외치며 시위했다. 또한 이승만의 정당인 자유당은 산하 단체들로 하여금 친공판사규탄대책위원회를 구성케 하여 사법부를 위협했다. 


1심 판결 후 이승만은 국무회의에서 분통을 터뜨렸다. 2심 재판은 결국 김용진이라는 인물이 맡았다. 그는 1심과는 반대로 양명산이 혐의 사실을 부인했는데도 조봉암과 양명산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진보당 간부들에게도 실형을 선고했다. 대법원 주심은 김갑수였다. 이 판결이 있기 전 홍 법무장관은 국무회의에서 김갑수 대법관 등은 신국가보안법에 대한 견해가 우리와 같고, 정부로서 그에 대해 특별한 대우를 해왔고, 본인으로서도 그를 설득시킬 자신이 있다고 말한 것으로 국무회의 기록에 쓰여 있다. 1959년 2월에 있은 대법원 판결에서는 결과적으로 조봉암은 사형을 나머지 진보당 간부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물론 당시 미국도 이 사건을 주시했다. 다울링 주한미대사는 이기붕을 만나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했다. 그러나 조봉암은 미국한테 아무래도 위험한 인물로 비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시대를 앞서간 현실정치가였지만, 민족을 냉전보다 위에 놓고 냉전을 타넘고 가려고 했기 때문에 역풍의 정치가라는 말을 들었다. 결국 1959년 7월 31일 조봉암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버렸다. 조봉암이 죽기 전 남긴 말은 다음과 같다.


“나는 이 박사와 싸우다 졌으니 승자로부터 패자가 이렇게 죽음을 당하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다만 내 죽음이 헛되지 않고 이 나라의 민주 발전에 도움이 되기 바랄 뿐이다.”


죽산 조봉암의 죽음은 이승만식 파시스트 독재가 얼마나 비민주적이고 폭력적인지를 보여주는 또 다른 예시다. 한국전쟁이 휴전협정으로 마무리 된 1950년대 중반, 이 사회는 조금이라도 좌파 내지 진보적 색채를 띤 사람들은 철저히 학살당하거나 북으로 가거나 아니면 지리산으로 들어가 죽거나 감옥에 갇힌 상태였다. 전쟁의 결과는 한반도 남쪽에 만들어진 멸균실 수준의 반공사회였다. 전 독립기념관장 김삼웅의 말대로 조봉암은 이승만의 반공 히스테리의 희생물이었다.


사실 이승만에게 도전하는 사람들은 죽음이 따랐다고 할 수 있다. 제헌의원 선거 때 이승만과 대결한 독립운동가 최능진은 국가보안법이 적용되어 처형당했고, 잠재적 라이벌 관계였던 백범 김구도 암살됐으며, 그 이전에는 여운형 또한 이승만의 지지자에 의해서 암살당했다. 1950년대 당시 야당 대통령 후보 신익희와 조병옥은 선거 도중 병사했고, 현직 부통령 장면도 이승만의 수하들이 총을 쏴서 죽을 뻔했다. 결국 조봉암 또한 그런 사례였던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반공과 안보를 내세워 조봉암을 죽음으로 그리고 형장의 이슬로 몰고 간 이들의 출신성분이다. 조봉암을 사법살인으로 몰고 간  관료, 청지인, 검사, 판사 중에는 과거 일제 때 친일을 했던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누대를 두고 잘 먹고 잘 살았다. 조봉암의 죽음을 큰 틀에서 보자면, 이승만을 지지하는 친일파 세력들이 독립운동가를 빨갱이로 몰아 사법살인한 사건이었다. 따라서 조봉암의 죽음은 결국 이승만과 일본 제국주의 협력자 무리배들이 독립운동가를 죽인 천인공노할 범죄인 것이다.


참고문헌


서중석, 『이승만과 제1공화국』, 역사비평사, 2007.

김삼웅, 『죽산 조봉암 평전』, 시대의창,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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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dvs117 2023-07-16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고 이는 박정희-전두환-노태우 군사독재 시기 민주항쟁 탄압으로 이어졌다가, 21세기에는 MB, 윤석렬, 국짐당 등 現 수구세력들의 민주인사 박해 및 노동운동 탄압, 통일운동 탄압으로 이어지고 있지요! (역사는 반복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