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시바타 마사요시 지음, 사상과 정치 경제 연구소 옮김, 『동유럽 인민민주주의 혁명사』 2권, 소나무, 1991.을 참고하여 작성됐습니다.)
루마니아(Romania)하면 많은 사람들이 떠올리는 이미지는 무엇일까? 아마 우리말로 흡혈귀를 뜻하는 벰파이어(Vampire)일 것이다. 아니면 역사를 조금 아는 사람이라면, 루미니아의 정치인 니콜라 차우셰스쿠(Nicolae Ceausescu)를 들어봤을 것이다. 루마니아는 나라 이름답게, 고대역사에서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았으며, 중세 시기에는 투르크계 유목민과 불가리아인들의 지배를 받았고 몽골 제국의 침공도 받았었다. 14기에는 왈라키아 공국, 몰다비아 공국, 트란실바니아 공국 등이 나타났으며,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기도 했다. 루마니아가 자본주의 발전의 길에 들어선 것은 1848년 이후이며, 1877~1878년 발발한 러시아-터키 전쟁에 러시아 측에 참전하여 승리함으로써 국가의 독립을 이룩했다.
루마니아는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참이던 1916년 8월에 협상국 측에 참전하여 독일에 맞서 싸웠지만, 경제적으로 커다란 손실을 받았다. 1918년 12월 루마니아와 트란실바니아가 통일됨으로써 루마니아는 통일 민족국가가 됐다. 루마니아는 자본주의적 공업 수준이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낙후되었고, 정치체제는 입헌 군주제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루마니아에서 파시스트 정당의 중심세력은 1930년대 초에 힘을 발휘했다. 이들은 나치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로부터 지원을 받았고, 1938년 1월 루마니아 국왕이던 카를 2세에 의한 친파시즘적인 국가가 형성됐다. 1921년 러시아 혁명의 영향을 받은 좌익들이 루마니아 공산당을 창당했지만, 당연히 이들은 자국 내에서 탄압받았다.
1938년 나치 독일의 지원을 받은 이온 안토네스쿠(Ion Antonescu)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그는 헌법을 폐지하고 입법권과 행정권을 자신의 손에 넣었으며, 히틀러를 따라 자신을 총통이라고 칭했다. 즉, 루마니아에는 왕이 있었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안토네스쿠가 장악했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초기 시점이던 1940년 9월에서 10월 안토네스쿠는 독일군의 루마니아 주둔을 승인했으며, 다음해인 1941년 2월에는 독일·이탈리아·일본이 중심이 된 추축국에 가담했다. 1941년 6월 22일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하자, 안토네스쿠 또한 다음 날인 23일 소련에 대한 침략전쟁을 게시하기에 이르렀다.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반파시즘 운동에 가담했으며, 루마니아 인민 공화국 초대 서기장이다. 이후 그를 이은 것이 그 유명한 니콜라 차우셰스쿠다.)
루마니아의 반파시즘 해방운동은 일본학자 시바타 마사요시에 따르면, 총 4기로 구분된다. 제1기는 1941년 6월부터 1943년 6월에 걸친 시기로 지하 공산당의 지도 아래 노동자의 사보타지를 주요한 투쟁수단으로 하는 투쟁을 중심으로 인민 각층의 투쟁이 점차 발전하여 반파시즘 민족해방 통일전선의 결성이 준비되던 시기다. 제2기는 1943년 6월부터 1944년 봄에 걸친 시기이며, 공산당과 사회민주당 간의 통일 행동의 합의가 이루어지고, 안토네스쿠 세력이 고립되는 시기이다. 제3기는 1944년 봄부터 8월까지로 소련군에 의한 루마니아 해방 과정의 개시와 루마니아 인민의 저항운동이 발전하며 무장투쟁도 전개되기 시작하는 시기다. 이를 통해 안토네스쿠 파시스트 세력의 고립화가 정점이 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제4기는 1944년 8월 23일 봉기이며 소련군에 의한 국토 해방의 진전과 결합하여 인민의 반파시즘 민족해방운동이 인민민주주의 혁명으로 성장 전화하여 안토네스쿠 군사 파시스트 독재를 타도하는 데 성공하는 시기다.
1941년 9월 루마니아의 지하 공산당은 “파시스트 점령자와 배신자 안토네스쿠를 비롯환 파시스트 집단에 대한 루마니아 인민의 통일 민족 전선 강령”을 발표했으며, 이 시기 인민의 저항 운동은 인민의 모든 계급과 계층에 걸쳐서 전개됐다. 특히 독일의 전쟁기계를 생산하는 군수공장에서는 공산당원의 주도 아래 특별 사보타지 그룹이 조직됐고, 그들은 항공기 생산을 축소하거나 불량품을 생산했다. 철노 노동자들은 군용 열차를 연착시키거나 정지시키기도 했다. 노동자 파업도 벌어졌는데, 1941년부터 1944년에 걸쳐 183건의 노동쟁의가 일어났고 5만 4,000명 이상이 이 투쟁에 참가했다. 이 중 파업은 39건 정도다.
1943년 2월 소련군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계기로 제2차 세계대전의 전황이 변하자 1943년 6월 루마니아에서는 공산당, 농민 전선, 애국자 동맹, 사회민주당 등이 같이 반히틀러 애국전선을 결성했다. 제2차 세계대전 전황이 독일에게 불리해지자, 루마니아 내부에선 안토네스쿠의 친나치 친히틀러적 노선에 의문을 품는 이들이 생겼는데, 이는 한편 좌파세력에 대한 탄압에 대한 그들의 자신감을 흔들리게 했다. 거기다 1943년 독일과 루마니아 사이에 맺어진 경제협정은 독일에 의한 루마니아 경제의 수탈 강화를 불러왔고, 이것은 역으로 반파시즘 진영의 세력 확장에 도움을 줬다.
(게오르기우데지 집권기 나온 노동절 관련 포스터)
1944년 3월 26일 소련 붉은군대 중 하나인 제2우크라이나 전선군은 소련-루마니아 국경을 넘어 루마니아로 진입했고, 5월 4일 소련군은 40만 명의 인구와 9,997㎢의 루마니아 영토를 해방했다. 참고로 루마니아는 소련군에 의해 해방된 파시스트 진영 국가들 가운데서 최초였다. 따라서 루마니아에는 강력한 독일 파시스트 군단이 포진해 있었고, 루마니아의 최종적인 전면적 해방은 10월 25일이 되어서야 이루어졌다. 1944년을 거치며 루마니아 공산당이 강화됐는데, 그해 8월에 옥중에서 운동을 지도하고 있던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Gheorghe Gheorghiu-Dej)와 기타 당 활동가들이 탈주에 성공했다.
이들은 테러로부터 당 조직을 방위하는 데 주의함과 동시에 단기간 내에 모든 당 조직을 재건하고 선전 활동을 강화시키는 한편, 노동자 대중과의 결합을 굳건히 했다. 그와 아울러 군사부를 재편성하고 군대 내에서의 활동을 강화했다. 여러 애국 단체들의 활동을 강화하고 개선시키는 조처들이 취해졌다. 이리하여, 공산당은 당의 통일이 급속히 진전되었으며, 활동이 개선되고 당의 지도적 역할이 고양됐다. 이들은 노동자의 긴급한 요구로써, “8시간 노동제 실현, 급등한 물가 수준에 상응하는 임금의 즉시 인상, 노동조합과 정치단체를 결성할 권리 보장, 언론의 자유, 정치적 신조와 애국 및 반히틀러 투쟁으로 인한 체포자의 즉각적 석방, 노동자 통제하의 사회보장 확립, 무상교육과 무상의료 실현, 노동자용 저렴한 주택의 실현”등을 내세웠다.
1944년 공산당의 전면적인 활동은 4월부터 시작되었으며, 이들은 전단 살포, 나치에 복무하는 노동현장 결근, 파업, 사보타지 등을 이용하면서, 무장투쟁도 시작했다. 그 투쟁은 단순히 경제적인 투쟁에 그치지 않고, 정치적 요구와 결합됐다. 이와 같은 노동자 계급의 투쟁과 더불어 농민들의 투쟁도 발전했다. 루마니아 농민들은 농산물의 공출거부, 납세거부, 작물의 수확 사보타주, 자신들의 지역에 독일군을 배치하는 조치에 대한 항의 등을 수행했다. 지역에 따라선 독일군에 맞선 농민들의 무장투쟁도 전개됐다. 대학 교수, 기술자, 의사, 작가, 예술가 등 인텔리겐치아도 공산당의 호소에 호응하여 투쟁에 나섰고, 군대 내부에서도 병사와 장교 사이에 동요가 커지면서 탈영이 속출했다.
(1944년 8월 수도 부쿠레슈티에 입성한 소련군 탱크)
1944년 초 소련의 원조를 받아 루마니아 국내 공산당 지도하에 빨치산이 조직되고, 이들은 나치 독일과 루마니아 파시즘 세력에 맞서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참고로 1943년 10월 소련군의 원조를 받아 루마니아 인민군이 편성됐는데, 이는 루마니아 망명자와 포로 중의 지원자들에 의해 편성되었으며, 총 병력은 9,589명에 달했다. 이 병력은 제1 루마니아 의용 사단으로 불렸다. 이들은 소련군과 공동으로 전선에서 전투에 참가했다. 1945년 3월에는 제2 루마니아 의용 사단이 편성됐는데, 이들의 경우 실전에 참가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1944년 6월 15일 기준으로 보자면, 루마니아에는 대략 6만 명의 독일군 병력이 주둔했다. 루마니아 공산당은 1943년 봄에 무장 봉기 준비를 결정했는데, 실행은 1944년 8월에 이르러서였다.
1944년 8월 5일 루마니아 파시스트인 안토네스쿠는 히틀러와 회담하여 독일군과 운명을 같이 할 것을 맹세했다. 그로부터 15일 후인 8월 20일 소련군의 진격이 다시 강화됐으며, 대규모 봉기를 결정한 공산당은 23일 국왕에게 안토네스쿠를 포함한 파시스트 각료를 체포할 것을 결의했고, 이에 따라 안토네스쿠를 포함한 파시스트들이 체포됐다. 파시스트 정부 각료가 체포되었다는 정보에 따라 봉기 세력들은 독일군 기관과 부대를 점거하고 있는 건물을 탈취했으며, 파시스트 군대에게 항복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독일군은 다음 날인 24일 수도 부쿠레슈티를 폭격하면서 역습을 시도했다. 그러나 4일 뒤인 28일 부쿠레슈티의 독일군은 섬멸됐다.
(사회주의 시절 루마니아에서 나온 해방기념일 포스터)
1944년 8월 24일부터 28일까지 부쿠레슈티에서 발생한 시가전을 포함하여 여러 전투에서 루마니아군과 공산당이 주도한 무장 애국대는 독일군 장군 14명, 장교 1,200명 이상을 포함한 53,159명을 포로로 붙잡은 것으로 추정되며, 8월 31일 소련군과 루마니아 제1의용사단은 인민의 손으로 해방된 수도 부쿠레슈티에 입성했다. 이후 루마니아군과 소련군은 공동작전을 벌여 10월 25일 특히 전투가 격렬했던 북부 트란실바니아를 포함한 전전의 루마니아 전영토를 해방했다. 이후 루마니아군은 반파시즘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여, 특히 헝가리와 체코슬로바키아의 해방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1944년 국토가 해방된 이후 루마니아에서는 전후재건과 인민민주주의 정권 수립의 길로 들어섰다. 1946년 11월 19일에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공산당, 사회 민주당, 자유당 분파, 농민 전선, 민족 인민당(애국자 동맹)은 통일 블록을 조직하고 격심한 선거전을 전개했다. 선거 결과에서 통일 블록은 유효 투표의 71.8%, 총 의석 414석 가운데 347석을 획득함으로써 대승을 거두었다. 민족 농민당은 33석, 자유당은 3석의 의석밖에 획득하지 못했다. 이후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가 집권했으며, 공산당은 1947년 말 당원 수 80만 명에 달하는 국내 최대의 가장 강력한 정당으로 성장하기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