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미국에 묻다
허호준 지음 / 도서출판선인(선인문화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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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43일 한라산을 중심으로 유격대의 봉화가 타올랐다. 43일에 시작된 봉화는 1954921일 제주경찰국장 신상묵의 명의로 포고문을 발표하며 한라산에 내려진 금족령이 해제되면서 공식적으로 끝났다. 194843일에 시작된 봉기는 결과적으로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진압됐고, 그 과정에서 무차별 민간인 학살이 동반됐다. 4.3 사건 당시 목숨을 잃은 사람은 대략 인구의 1/1030,000명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추산이다. 현재 북한에서도 30,000명 이상으로 추산하며, 제주 4.3사건 진상보고서도 대략 3만 명 정도로 보고 있다. 지금까지 진상조사로 확인된 사망자만 하더라도 최소 10,000명을 넘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숫자보다 더 높은 사망자 추산도 존재한다. 1949년 당시 제주지사가 미 정보국에 전달한 자료에 따르면, 제주도민의 사망자가 6만 명이라고 나와있다. 한국전쟁의 기원으로 유명한 미국의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2016년 제주4.3평화포럼에서, “보다 최근의 연구 자료에 따르면 제주 4.3으로 8만 명 정도가 사망했다는 추정치도 있다.”고 말했다. 이 두 가지 추산을 종합해보자면, 제주 4.3사건으로 억울하게 학살된 민간인의 숫자는 60,000~80,000명으로 제주도 인구의 1/5에서 1/4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제주도 인구의 4명 중 1명이 1948년과 1949년 사이에 있었던 무차별 학살로 목숨을 잃었다는 얘기다.

 

위에서 보는 것과 같이 제주 4.3사건은 명명백백하게 국가가 국민에게 무차별 적으로 행한 제노사이드에 해당한다. 호로위츠에 따르면, 제노사이드라는 개념은 국가기구에 의해 무고한 사람들을 구조적이고 체계적으로 파괴하는 것을 의미한다. 호로위츠가 규정한 정의를 고려해서 보자면, 제주 4.3사건 당시 발생한 무수히 많은 죽음들은 명명백백히 제노사이드(Genocide)라고 할 수 있다.

 

과거 전두환 정권 당시가 학창시절인 이들은 단체관람 했던 영화 중 킬링필드(Killing Field)라는 헐리우드 영화를 기억할 것이다. 이 영화는 1970년대 캄보디아의 폴포트 정권에서 일어난 제노사이드를 다룬 영화다. 영화를 보면, 캄보디아인 주인공 디스 프란은 크메르 루주가 세운 강제 수용소를 탈출한 이후 사람들의 시신과 해골로 이루어진 곳을 목격한다. 당시 전두환 정권이 이 영화를 국민들에게 단체 관람하도록 한 목적은 반공주의를 합리화하기 수단이었고, 실제로 이런 영화를 통해, 북한에 대한 대북적대의식을 강화할 수 있었다.

 

우리 사회는 박정희 시절 똘이장군이나 헐리우드 영화 킬링필드를 보며, 반공주의적 의식을 길렀지만, 정작 우리 현대사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지는 오랜 시간 동안 얘기를 하지 못했다. 우리 현대사의 크나큰 비극인 제주 4.3사건도 마찬가지였으며, 피해자들은 반공이라는 어두운 그늘 아래 침묵했다. 결과적으로 한국의 킬링필드라 불려도 손색이 없는 제주 4.3사건이 국민들 사이에서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한 것도, 87년 민주화를 쟁취한 이후이며 수많은 진상조사와 활동들을 통해 현재는 적잖은 국민들이 인식하는 비극의 사건으로 기억되는 자리까지 올랐다고 말 할 수 있다.

 

나는 제주 4.3사건이 일어난 지 70주년이 되는 2018년에 제주도를 방문했고, 첫날에 제주 4.3 박물관을 가족이랑 함께 들렸다. 당시 제주 4.3에 대해 단편적으로나마 알고 있었지만, 학살의 과정과 잔혹성에 진심으로 분노하고 경악했다. 제주도에서 벌어진 학살의 피해자들 중에는 도저히 남로당 게릴라라고 판단될 수 없는 여성과 노인, 어린이, 심지어 갓난아기까지 있었다. 도저히, 남로당측의 봉기군이라 판단할 수 없는 무고한 민간인들이 제주 4.3의 희생자였다는 점에서 분노를 금할 수 없었다.

 

학살을 주도한 세력은 미군정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던 대통령 이승만과 초대 경무부장인 조병옥 그리고 미군정과 우익들이 파견한 친일경찰과 서북청년단 대원들이었고, 이들이 바로 제주도 대학살을 주도했다. 제주 4.3사건 당시 파견된 경찰과 우익 청년단 그리고 군대는 말 그대로 제주도라는 섬에서 광란의 학살극을 자행했고, 학살의 피해자는 순전히 제주 민간인들이었다. 심지어 학살 피해자의 80~90%는 이들이 저지른 것이었다.

 

그러나 제주 4.3사건에는 또 다른 책임자가 존재했다. 국부론을 집필한 애덤 스미스의 표현을 빌려 얘기하자면, 제주 4.3사건에는 보이지 않는 손이 존재했다. 그것은 바로 미국(the United States)이었다. 1948년 제주에서 일어난 대학살에는 소위 미국이라는 존재가 아주 깊숙이 개입해있었다. 허호준의 표현을 빌려 얘기하자면, 제주 4.3사건 관련한 영상물에서는 상공을 날아다니는 미군 연락기, 미군 함정이 내뿜는 해안의 검은 연기, 낯선 이방인이 산야를 누비며 작전을 진두지휘하는 모습, 그 옆에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두려운 눈빛의 제주사람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말은 미국이라는 존재가 제주 4.3사건에 얼마나 깊이 개입했는지 알 수 있는 방증일 것이다.

 

19484월 말에서 5월 초 진압군을 지휘한 김익렬과 유격대를 지휘한 김달삼 사이에서 잠시나마 휴전 및 총성을 멈추기 위한 평화협상이 있었다. 물론, 글쓴이는 이 협상이 지켜질 것이었다고 보지는 않지만, 일단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려고 했다는 점에선 큰 의의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평화적 노력을 단번에 산산조각을 내버린 존재가 바로 하지가 이끄는 미군정이었다. 하지 사령관이 제주도에 보낸 브라운 대령은 원인에는 흥미가 없다. 나의 사명은 오직 진압 뿐이다.”라는 태도로 토벌작전에 임했다. 양측의 협상이 깨진 것도 바로 브라운 소령의 이러한 태도 때문이었다.

 

제주 4.3을 대하는 미군정과 미국의 태도는 항상 일정했다. “공산주의자들을 뿌리 뽑아야하고, 제주 4.3은 스탈린과 소련 그리고 북한의 사주를 받은 공산주의자들의 적화와 테러를 막기 위한 것이다. 트루먼 행정부가 창조해낸 냉전이라는 이분법적인 반공주의 사고방식이 결국 제주도를 양민의 시체와 피로 뒤덮인 피바다로 만들어 버렸다. 미국의 이런 반공주의 정책은 제주도 사태를 강경진압을 추진한 이승만이나 우익세력들과 항상 같은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반공주의 국가에 불만을 제기하거나 적응하지 못한 이들을 미국이 어떻게 처리했는지를 아주 명확히 보여준 사건이 바로 제주 4.3사건이었다.

 

미국은 제주 4.3사건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었다. 당시 대통령이던 해리 트루먼은 주한미군사령부와 주한미대사관 등이 본국에 보낸 각종 정보와 보고서를 통해, 제주도에서 어떠한 일이 벌어지는지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미 국무부는 제주도에서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하고 있었으며, “제주도에서 일어난 공산반란으로 최소 15,000명 이상이 공산주의자들이 살육되었다.”고 알고 있었다. 트루먼을 포함한 미국 지도부들에게 있어 제주도에서 희생된 사람들은 그저 공산주의자들이었고, 인권이 유린되든 말든 무조건 죽여 마땅한 존재였다.

 

제주 4.3사건 당시, 미국은 이 사건에 개입하여 진압하는 데에도 아주 열정적이었다. 미국은 제주도에 파견된 경찰과 군대에게 물자와 장비를 지원했다. 심지어 제주도에서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던 극우 테러단체 서북청년단을 경찰과 군대에 편입시키는 것에도 매우 적극적이었다. 또한 유격대를 진압하기 위해 만든 군대 안에도 장교 출신의 미군고문단들이 적잖게 배치됐고, 실제로 이들은 군사작전을 지휘했으며, 진압군이 민간인들을 체포하고 사살하도록 적극적으로 도왔다.

 

무엇보다, 제주도에 투입된 미군들과 그 미군들을 지휘하는 미군정 및 주한미군사령부 등은 진압군의 무자비한 학살과 진압으로 무고한 민간인들이 죽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면서도, 강경진압을 막는 그 어떠한 행동에도 착수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러한 학살을 군사작전 상에서 적극 지원하고 도왔다. 그들에게 있어 진압군이 죽이고 체포하는 대상은 공산주의자들일 뿐이며, 이 공산주의자들은 소련과 북한의 지령을 받고 자유민주주의 진영을 파괴하려는 존재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트루먼식 반공의 논리는 공산주의자 민간인은 대량으로 죽여도 된다는 인식을 미군들에게 심어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948년 당시 미군정이 제주 4.3사건을 어떻게 대응했는지, 책에 있는 내용을 보자.

 

“5.10 선거가 가까워지면서 제주도 사태는 미군정 수뇌부의 직접 개입뿐 아니라 외신을 통해 보도되면서 국제문제로 비화되고 있었다. 딘과 워드의 제주도 동시 방문과 군정 수뇌부의 제주도 현지회의 뒤 미군정은 제주도 사태를 전면적인 유격전(full-scale guerrilla warfare)’으로 보고 진압을 강화했다.”

 

출처: 4.3, 미국에 묻다 p.163

 

아래는 진압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공공연히 말하던 미군정의 브라운 대령에 대한 책의 내용이다.

 

미군정 주도 하에서 전개된 토벌작전의 절정은 제6사단 제20연대장 브라운 대령의 제주도 파견이다. 5.10 선거 실패 이후 경찰의 증강에도 불구하고 무장대의 공세가 수그러들지 않자 미군정은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아시아 대륙을 누볐던 야전군 출신 브라운 대령을 제주도 최고 지휘관으로 임명해 제주도 작전을 총지휘하도록 했다. 그는 고문관은 물론 제주도 주둔 경비대와 경찰의 작전을 지휘통솔하는 명실상부한 제주도 총사령관이었다.”

 

출처: 4.3, 미국에 묻다 p.180

 

2003년에 나온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이승만의 발언도 나온다. 아래 인용된 책의 내용을 보자.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미군도 진압작전에 나섰다. 미군이 어느 정도 작전에 참여했는지는 불확실하나 미 해군이 기항하여 호결과를 냈다는 이승만의 발언을 통해 미군의 역할을 일부 엿볼 수 있다라고 분석했다.”

 

출처: 4.3, 미국에 묻다 p.235

 

위의 세 가지 인용문만 보더라도 제주 4.3사건에서의 학살에 미군정과 미군 그리고 미국 정부가 크나큰 책임이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놀랍게도 미국의 이러한 개입은 1949년에도 지속됐고, 1950년에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미국은 제주 4.3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여순사건을 진압하는 데에도 열정적이었다. 전라남도에 위치한 여수와 순천에서, 진보적 성향의 군인들이 이승만 정부의 무차별 폭력과 제주 4.3학살에 반대해 봉기를 일으켰는데, 미국은 이승만 정부와 더불어, 진압에 아주 열정적이었다. 여순사건은 군사고문단이 채택한 시스템에 대한 하나의 시험무대였는데, 한국군이라는 파트너에게 적절히 충고와 자문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줬다. , 미국은 이 여순사건에 아주 깊숙이 개입했다.

 

미국은 진압작전을 수행중인 송요찬의 부대가 해안선에서 5km 이외의 내륙지역을 적성지역으로 간주에 모든 것을 죽이고 불태우고 약탈하는 작전을 벌이고 있었던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학살극을 막으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다. 심지어 이 작전은 중일전쟁 당시 만주에서 일본군이 모택동의 홍군을 토벌하기 위해 사용한 작전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었다. 미국은 대통령 이승만이 19481117일 이른바 계엄령을 선포하여, 제주도민에 대한 무차별 민간인 학살을 정당화 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만들었음에도 이를 막으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런 학살극에 책임이 있는 이들을 반공국가의 수장으로 치켜세웠고, 민간인 학살을 동반한 진압작전을 수행한 군인들에게 훈장 및 상을 줬다.

 

제주 4.3사건 당시 악랄하기 짝이 없는 서북청년단을 비호한 것도 바로 미국이었다. 사실 이 서북청년단 대원들을 경찰과 군인에 편입시키도록 적극적으로 노력을 보인 주체가 바로 미국이었으며, 이들의 작전으로 적의 사살자 숫자와 무기의 숫자가 불균형 상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차별 민간인 학살을 중단시키기는커녕 이들의 토벌을 고무 및 장려했다. 심지어 미군들은 수차례에 걸친 제주도 정찰비행을 통해, 유격대의 집결지와 사령부 그리고 정부군과 반군간의 전투상황을 속속히 알려줌으로써, 학살극을 아주 적극적으로 도왔다. 아래에 있는 책 인용문을 보자.

 

미군 수뇌부의 제주도 사태에 대한 인식은 군에 의한 무차별 학살을 합리화했을 뿐 아니라 조장했다.”

 

출처: 4.3, 미국에 묻다 p.222

 

이처럼 미국은 제주 4.3사건에 깊이 개입했고, 학살과 진압작전을 도왔으며, 군사적인 측면에서 진압군을 적극 지원했다. 종합적으로 보았을 때, 제주 4.3학살은 미국의 학살로 봐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이러한 학살을 지휘하고 돕고 지원한 주체가 바로 미국이었기 때문이다. 이번에 읽은 허호준의 4.3, 미국에 묻다COVID-19가 한참이던 2021년 초에 출간됐다. 따라서, 기존에 제주 4.3사건 관련 자료에서 찾지 못했던 미국의 개입 관련 최신 자료들도 제법 보여주고 있으며, 한국 현대사를 공부하는 나에게 훌륭한 자료를 제공해주고, 많은 공부를 할 수 있게 만들어준 책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 책이 제주 4.3사건 당시 미국의 역할을 제대로 규명하고, 상당히 의미있는 자료들을 통해서 사태의 본질을 추론했지만, 저자의 말대로 이를 직접적으로 명확히 입증할 수 있는 몇몇 자료를 확보하지 못했다. 책의 저자인 허호준은 김익렬과 김달삼 간 평화협상과 그 이후 사태 전개에 대한 주한미군사령부와 미군정의 지시 내용, 미 국무부와 군부의 제주도 사건 관련 지시 여부 등에 대한 새로운 사료가 더 발굴되야한다고 역설한다. , 이 말은 제주 4.3사건 당시 미국의 책임을 묻기 위해선 앞으로도 발굴되고 연구되어야할 자료와 사건들이 많이 남아있다는 얘기다.

 

책을 읽으면서, 많은 공부가 되었지만 유난히 흥미롭게 다가온 사실이 있다. 그것은 바로 제주 4.3사건 전후로 미국 및 서방권 언론들이, 자신들의 경쟁자인 소련 및 사회주의권을 악마화하기 위해, 근거 없이 퍼뜨렸던 가짜뉴스들이다. 당시 미국과 서방의 반공주의자들에 의해 각색되어 보도된 내용만 따진다면, 제주 4.3사건은 소련이나 북한에 의해 조작되어 만들어진 사건으로 판단할 수 있을 정도다. 물론 이러한 기사들은 제대로 된 근거를 밝히지 못했으며, 당연히 가짜뉴스였다. 아니 오히려 제주 4.3사건 관련해서는 소련의 보고가 더 정확했다. 1950년 당시 소련은 제주 4.3사건 당시 미군 고문관들의 명령에 의해 남한 정부가 35,000여 명의 주민들을 죽이고 1만여 채의 집을 파괴했다.”고 보고했다.

 

거기다, 1945년 이후부터 미국이 제주도에서 했던 정책들을 보면, 미국이 제주도민의 불만을 자극시킬만한 일들을 벌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946년부터는 제주도에다가 과거 일본에 협력했던 친일경찰들을 임명했고, 19473.1사건에서 시민 6명 이상을 죽인 책임이 있는 당사자들을 제대로 처벌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오히려 극우성향의 인사들을 임명함으로써, 제주도민의 불만을 자극했다. 더 나아가, 경제 문제에서도 민생을 파탄에 빠뜨리는 정책을 추진했고, 가뜩이나 먹을 게 없어서 굶주리던 제주도민들의 생활을 더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당연히 민생은 제주 4.3을 거치면서 더 악화됐다. 19504월 기준으로 대략 10만 명이나 되는 제주도민들이 심각한 기아에 빠져 풀을 뜯어먹고 연명하는 수준이었다. 미국의 제주도 정책이 얼마나 반민중적임을 보여주는 또 다른 근거다.

 

저자 허호준은 그리스 내전과 제주 4.3사건을 비교한 박사학위논문을 쓴 인물이다. 그는 1946년부터 1949년까지 미국이 개입했던 그리스 내전과 제주 4.3사건을 비교했다. 나는 제주 4.3사건이 과거에는 그리스 내전 그리고 미래에는 베트남 전쟁으로 이어졌다고 본다. 그리스 내전 당시에도 미국의 트루먼 행정부는 그리스 민간인들이 좌파 게릴라를 지지하지 못하도록, 민간인에게 테러를 가하는 정책을 사용했다. 이 과정에서 민간인들의 대량 강제이주, 노조파괴, 체포, 구금, 네이팜탄 투하가 동원된 폭격 그리고 대량의 민간인 학살이 발생했다.

 

제주 4.3사건 이후에 벌어진 베트남 전쟁 또한 마찬가지다. 베트남 전쟁 초기 남베트남 군인들이 베트콩 가족을 살해한 데 대해 미군들은 그들은 게릴라의 친척이었고, 의심의 여지없이 베트콩에 동조적이었으며, 그들을 지원했다. 그들은 비전투원의 신분이 아니다라는 태도로 전투에 임했다. 이것은 초기 미군사고문단 개입시절에 있던 일이었다. 무엇보다 베트남 전쟁 초기 미국과 남베트남의 평정작전 이론은 농민들을 베트콩을 지지하지 못하도록 테러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점에서 제주 4.3사건 당시 미국과 이승만 정부가 자행한 양민학살과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

 

이제 2022년이 끝나가고, 2023년이 다가오고 있다. 이번 학기에 대학원 생활을 시작하면서 많이 바빴다. 그래서 예전보다 내가 읽고 싶은 책을 읽을 기회가 많이 줄어들었다. 영화 및 다큐멘터리 감상도 그러한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시간을 내어 허호준의 저서 4.3, 미국에 묻다를 읽은 것은 여러모로 많은 지적 호기심을 제공하고, 공부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무엇보다, 반공주의가 사회 전체를 맴돌고 있는 상황에서도 미국이 자행한 폭력과 학살에 대해 이렇게 용기 있는 책을 써준 점에 대해 저자에 대해 깊이 감사한다.

 

많은 이들이 이 책을 끝까지 완독했으면 좋겠다. 이를 통해, 우리 현대사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보다 다양한 관점에서 역사를 접근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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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일기 - 우크라이나의 눈물
올가 그레벤니크 지음, 정소은 옮김 / 이야기장수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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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를 옹호할 이유를 못 느끼겠습니다. 네오나치 아조프가 학살한 것에 대해 눈을 감고 있다가, 전쟁 터지고 나서 혐러주의를 퍼뜨리는게 옳은 일인가요? 전 이 책 논조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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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dvs117 2023-07-16 2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더군더나 우크라이나 네오나치들이 오데사에서 노동자들을 집단학살하고,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대통령이 노동법을 개악시켜(노동조합 권리 축소 및 박탈 + 노동자의 임금 지불 및 해고 여부를 고용주가 마음대로 결정) 노동자들을 비국민 취급하는 것을 보면...!
 

서방 사회에서 소련에 대한 온갖 악의적인 비방과 비난 그리고 거짓말들은 차고 넘친다. 특히 레닌 사후 소련의 지도자가 된 이오시프 스탈린에 대한 온갖 비방과 악선전들은 조금 과장하여 밤하늘의 별만큼 많다고 할 수 있다. 우크라이나 대기근, 대숙청, 굴라그 수용소, 독-소 불가침 조약, 핀란드 침공, 발트 삼국 합병, 트로츠키 죽음, 카틴 대학살, 소련군의 인명 경시 전략 전술, 소련군의 약탈과 아녀자 강간, 동유럽의 위성국화, 한국전쟁 책임자 등등등, 말 그대로 서방이 스탈린에게 하는 악선전은 끝이 없는 수준이다. 그 중에서 이 글에선 스탈린 시절 굴라그에 대해 얘기해보고자 한다.


소련의 굴라그 수용소의 존재가 서방에서 비난의 대상이 된 것은 아마 극우 망명자인 알렉산드르 솔제니친(Aleksandr Solzhenitsyn)에 의해서일 것이다. 국내에서도 <수용소 군도> 시리즈로 유명한 솔제니친은 자신의 소설에서 말 그래도 소련에 대한 거짓된 소설들을 끊임없이 양산해냈다. 솔제니친이라는 인물이 얼마나 제국주의적이고 친서방적이며 친식민지주의적인에 대해 서방 사회는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는 1975년 베트남 전쟁이 북베트남과 해방전선의 승리로 끝나자, 전적으로 미국을 옹호하던 인물이었다. 또한 포르투갈에 맞서 앙골라에서 민족해방운동이 일어나자, 포르투갈의 식민지 지배를 옹호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솔제니친의 반동적이고 악의적인 이데올로기 따위는 철저히 외면당했다.


솔제니친은 소련 시기 굴라그에 수감된 인원이 도합 5,000만 명이라는 희대의 거짓말을 진실로 포장했다. 영미 제국주의 국가들도 이런 새빨간 거짓말을 진실이라고 우겨댔다. 솔제니친과 더불어 소련에 대한 온갖 악의적인 거짓말을 퍼뜨린 인물이 있다면 아마도 로버트 콘퀘스트(Robert Conquest)를 뽑을 수 있을 것이다. 로버트 콘퀘스트는 스탈린이 단행한 대숙청 시기 수백만 명의 소련인이 목숨을 잃었다는 거짓말을 했다. 대숙청이 한참이던 1937년에서 1938년 콘퀘스트는 700만에서 900만 명이 체포되었고, 1934년 당시 500만 명이 굴라그에 억류되었으며, 대략 합쳐서 1,200만 명의 희생자가 나왔고, 이 중 3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했다. 이 통계를 바탕으로 콘퀘스트는 1939년부터 1953년까지 1,260만 명이 굴라그에서 죽었다고 말했으며, 이러한 거짓말들을 총합해서 콘퀘스트는 스탈린이 집권기간 동안 2~3천만 명을 학살했다는 거짓말까지 했다. 


이런 거짓말들을 바탕으로 극우 네오콘 정치학자인 루돌프 럼멜은 한술 더 떠서 스탈린이 집권기간 동안 4,500만에서 6,200만 명을 학살했다는 말이 안 되는 소리를 사실인 양 통계화하기까지 했다. 물론 그 통계는 루돌프 럼멜의 자의적인 덧셈 뺄셈이지만 말이다. 럼멜의 주장은 워낙 말이 안되는 소리라 언급할 가치마저 못 느낄 정도이다. 심지어 1990년대 문서고 혁명으로 거짓말이 다 들어난 이후 콘퀘스트가 200만 명이 대숙청으로 희생되었다고 했을 때, 비슷한 시기 럼멜은 430만 명이 희생됐다고 뻥쳤다. 그러니까 스탈린이 4천만 명을 죽였다느니, 6천만 명을 죽였다느니 하는 소리의 원출처가 극우 네오콘인 루돌프 럼멜의 헛소리인 셈이다.


콘퀘스트에 따르면 1939년부터 1953년까지 연평균 사망률이 대략 10%였다고 말했다. 그리고 1934년 당시 정치범이 500만 명이라고 했다. 그러나 실제로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공개된 무서를 보면 실제 정치범의 숫자는 12만 7,000명에서 17만 명 사이였다. 그리고 강제노동수용소에 억류된 모든 이들의 정확한 수치는 대략 51만 307명이었다. 이 중 정치범의 비율은 25~35%였다. 즉 콘퀘스트는 15만 명의 억류자라는 현실적인 수치에 485만 명이라는 엄청난 부풀림을 한 것이다. 독소전쟁이 진행중이던 1941년에서 1942년 굴라그 수감자의 숫자는 50만 명 사이에서 오르내렸다. 무튼 콘퀘스트나 솔제니친 그리고 럼멜 등은 실제 숫자보다 수십 배는 부풀려 소련에 대한 악의적인 거짓말을 한 것이다.


콘퀘스트에 따르면 대숙청 시기 200만 명에서 300만 명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희생된 사람은 벨기에 노동당 당수이자 역사학자인 루도 마르텐스(Ludo Martens)에 따르면, 11만 5,922명이라고 한다. 즉 마르텐스에 따르면 실제 죽음 11만 6,000명에 콘퀘스트는 188만 4,000명을 추가하는 악의적인 반공 시체놀이를 한 셈이다. 거기다 굴라그 수감자도 가장 많던 1951년만 보더라도 실질적으로 195만 명에서 250만 명 내외였다. 이 중에서 정치범은 57만 명 정도다. 또한 이 정치범 57만 명 중 33만 명은 주로 나치 협력자들이었다. 이러한 맥락과 사실따위는 콘퀘스트나 럼멜 같은 이들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았고, 외면당했다.


전쟁 당시 굴라그 수용소의 석방자가 늘어났다가, 전쟁 이후 수감자가 증가한 것은 나치 협력자들 및 여러 잡범들을 수용하면서 생긴 일이었다. 그리고 굴라그의 생활은 우리가 생각하는 무슨 철조망 처진 곳이 아니었다. 대다수의 수용소의 인원들은 인근 마을과 수용소를 이동할 수 있었으며, 숙식이 제공됐다. 물론 강도 높은 노동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기본적으로 당시 소련은 8시간 노동제를 고수했다. 굴라그 최대 수용 인원은 200~250만 명 정도인데, 사실 1990년대 미국의 감옥 수감자 숫자보다 300만 명이나 적은 수치다. 그러나 이런 사실에는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대숙청만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아래로부터의 혁명이라는 측면이 존재했으며, 숙청 또한 지극히 과장됐다. 서방세계에서 수정주의 학자로 유명한 아치게티(Arch Getty)가 <대숙청의 기원(Origins of the Great Purges)>에서 쓴 글을 보자.


“이런 증거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숙청의 시기로 인식하는 예조프 시기가 다시 정의되어야 함을 시사한다. 그것은 경직된 관료주의가 반대파를 짓밟고, 고참 급진 혁명주의자들을 절멸시킨 결과가 아니었다. 사실, 그것은 완전히 정반대였을 것이다. 예조프 시기는 관료제에 대항하는 다소 과격하고, 심지어 히스테릭한 대응이었다는 주장은 증거와 상반되는 것이 아니다. 변화할 줄 모르는 관료들은 주의주의와 혁명적인 청교도주의로 요동치는 혼란스언 정국 속에서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파괴되었다.”


마지막으로 미국의 수감자 숫자를 얘기하겠다. 스웨덴의 사회주의 활동가인 마리오 소사(Mario Sausa)는 <진실이 밝혀지다>에서 “1996년 역사상 가장 많은 550만 명이 미국의 형벌체계 하에 있다”는 1997년 AP통신의 기사를 인용하며, 전쟁 직전의 스탈린의 소련과 미국을 비교했다. 이 숫자는 당사 미국 성인 인구의 2.8%에 상당하는 규모다. 형벌체계 하에 있다는 것은 교도소 수감자와는 다소 다른 의미다. 여기에는 보호관찰까지 포함된다. 그렇다고는 해도 2007년 말 기준 미국 법무부 통계는 730만 명이 교도소 수감, 보호관찰 등의 형태로 교정기관의 관리대상인 것으로 파악되었다. 2007년 말 기준 미국 성인의 3.2%가 수감되어 있거나 지역 공권력의 감시 하에 있다. 


미국의 수감자 인권이 심각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숫자일 것이다. 2005년 ‘시사저널’에 실렸던 정문호의 “미국 교도소에서는 엉덩이 지키기 어렵다” 기사의 일부 내용을 보자.


“지난 2000년 미국의 교도 행정 전문 잡지인 <프리슨전 저널>이 4개 주 7개 교도소를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재소자 중 21%가 최소 한 번 이상 강간 위협을 당했으며 그중 7%는 실제 강간을 당했다. 이 같은 수치를 근거로 따져보면 매년 최소 14만 명이 미국 내 교도소에서 강간당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미국의 감옥인권 문제는 굴라그 그 이상으로 심각한 것을 알 수 있다. 근데 왜 우리는 미국의 이런 인권유린은 보지 못하며, 스탈린 시기 굴라그에 대해 비난하기 바쁜 것일까. 마찬가지로 실체조차 불분명한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 얘기는 거짓말하는 태영호류 탈북자들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미국의 감옥 인권은 전혀 보지 않을까? 필자는 이것이야말로 서방 스스로가 자의적으로 만들어낸 반공세뇌 시스템이라고 본다. 그러한 세뇌 시스템에 서방의 대다수 민중들은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고, 마찬가지로 반북주의로 무장한 한국의 대다수 일반인들도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솔제니친, 콘퀘스트, 럼멜이 한 거짓선전을 믿지 않고 비판적으로 분석할 때, 그런 세뇌된 반공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며, 서구 제국주의자들의 악의적인 여론조작과 언론검열의 추악한 민낯을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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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찌민 시집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시선집
호찌민 지음, 안경환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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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치민의 시를 읽으며

대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구경하던 중, 안경환이 번역한 <호찌민 시집>을 찾았다. 몇년 전 같은 저자가 번역한 <옥중일기>를 읽은 적이 있다. <옥중일기>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인 1942년 8월부터 1943년 9월까지 호치민이 중국 감옥에서 옥중생활을 하며, 4행시 형태로 남긴 문학작품이다.

감옥생활을 하며, 호치민이 겪은 열악한 감옥사정과 대우 그리고 부당함 등이 시안에 들어가 있다. 시를 읽으며, 일제시대 당시 재판받고 복역하던 우리나라의 독립운동가들이나, 해방 이후 국가보안법으로 장기수로써 인생을 감옥에서 보낸 억울한이들이 유난히 생각나게 한달까. <옥중일기>의 한 구절을 보자.

˝4개월간 배불리 못먹고,
4개월간 잠 한 번 제대로 못자고,
4개월간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4개월간 씻지도 못했기 때문이라.˝

이 4행시에는 감옥생활의 열악함이 그대로 담겨있다.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 활동을 했던 분들을 만나서 옥살이 얘기를 들어보면, 이러한 경험을 들을 수 있다. 나 또한 그분들을 만나본적이 있으며, 얼마나 고생했는지 잘알고 있다. 호치민의 <옥중일기>는 혁명투사의 고된 옥살이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번에 읽은 책은 같은 저자가 번역한 <호찌민 시집>이다. 안경환씨가 2018년에 번역한 <호찌민 시집>은 <옥중일기>에다가 이후 호치민이 쓴 시와, 글, 편지, 그리고 연설을 추가했다. 베트남의 독립운동가이자, 국부인 호치민이 애국애족 정신이 담겨 있으며, 자유와 독립을 향한 그의 의지가 시 안에 잘 담겨있다.

한국에서 호치민하면 20세기 공산권 지도자인 스탈린이나 마오쩌둥 그리고 김일성 등과 비교했을때 제법 긍정적으로 평가받는 몇안되는 인물일 것이다. 한국과 베트남의 외교관계에 따른 그 영향이 있는 것도 한몫할 것이다. 물론 호치민에 대한 해외에서의 평가도 다른 공산권 지도자들보다 좋은 편이다. 아무튼 호치민은 세계가 인정하는 베트남 건국의 아버지다.

그러나 한국에서 호치민에 대한 인식은 베트남의 정치인 정도에서 못 벗어났다고 본다. 미국을 상대로 전쟁에서 승리한 지도자 정도에서 평가가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호치민에 대해서 깊게 공부해보면, 그가 한 평생을 베트남의 독립운동에 헌신했고, 조선의 독립운동가들 못지않게 투쟁했음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그는 베트남 혁명을 성공시킨 인물이다. 미국에 맞서 승리하기 이전에, 일본과 프랑스 제국주의를 무찌른 인물이며, 그것도 혁명투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했다. 미국이 베트남 전쟁을 일으키기 전에, 호치민을 포함한 지도부는 이미 1945년에 일본을 무찔렀고, 1954년에 디엔비엔푸 전투를 통해 프랑스를 무찔렀다. 그런 점에서 베트남 전쟁은 참전용사 출신인 미 정치인 콜린 파월도 인정하듯이, 미국에 명분이 너무나도 없는 전쟁이었다.

안경환씨가 번역한 <호찌민 시집> 내용 중 디엔비엔푸 전투 승전관련 시와 베트남 전쟁 당시 새해 연설들이 유난히 기억에 남는다. 베트남 사람들이 그를 아직도 존경하는 데에는 그가 진심으로 베트남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헌신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호치민은 자유와 독립의 소중함을 알았고, 진심으로 인민을 사랑했던 지도자라고 생각한다. 일각에서는 그의 모습이 연기된 것이라 말하지만. 연기라고 하기엔 그가 실천적으로 보인 모습에서 근거가 부족하다. 따라서 나는 베트남 인민에 대한 호치민의 사랑은 거짓됨이 없다고 보며, 현재 베트남 사람들이 보이는 호치민에 대한 사랑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안경환씨가 번역한 <호찌민 시집>은 인간 호치민의 인간적인 감정과 인민에 대한 사랑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는 책이다. 호치민의 말과 행동에는 적어도 진심이 담겨있다. 그런 점에서 <호찌민 시집>은 인간 호치민의 진심을 보기에 부족함이 없는 문학작품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호치민이 서거하기 전, 발표했던 1969년 신년 연설을 인용하겠다.

˝작년의 승리는 찬란했으니,
금년에도 갈수록 전선에서 분명히 대승을 거두리라.
독립을 위해, 자유를 위해,
미국을 깨끗이 몰아내자, 꼭두각시를 쳐부수자.
진군하자!
전사, 동포들이여!
남북이 함께 모여, 새해마다 더 즐겁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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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우크라 헤르손철수 평가>

논자마다 그 숫자는 조금씩 다르지만 약 3만 러군이 2-3일사이에 드네프르강 서안에서 동안으로 깜쪽같이 이동했다. 장비도 다들고 말이다. 알려지기로 고철이 된 헬기 한 대와 파괴된 T90전차 한 대만 남겼다 한다. 실로 감탄을 금치 못하겠다. 철군하면서 강의 동서를 연결하던 교량 2개도 마치 가위로 오려 내듯 파괴해 마지막 마무리도 왼벽했다.

작전상 철수와 패전후 후퇴는 추격이 있는 지 여부가 결정적 차이가 아닐 까 싶다. 왜냐하면 대개 전투에서 최대의 병력 손실은 등을 보인 적에 대한 추격전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추격은 없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군사적 관점이다. 예상했던 그대로 우크와 미는 대대적인 선전전을 개시했다. 이를 역사적 승리라고 했다. 아마 제2의 부차 연출도 예상된다. 프로파만 가지고 전쟁이 결정된다면 나는 우크가 이긴다고 본다. 우크의 네오나치는 아주 숙련된 프로파 기술자들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헤르손이 어딘지도 모르는 한국언론도 따라 붙는다. 그렇다. 이게 한국언론의 사명이다.

종합적인 평가는 여전히 다른 문제다. 전쟁에서 정치적 관점과 군사적 괸점은 무엇이 우선되는가? 참으로 난제 중 난제다. 이번 헤르손철수는 정치적 부담에도 불구 군사적 합리성을 선택한 것이다. 푸틴도 당연히 동의했다.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계속이다. 이번 철수의 정치적 부담이 이번 전쟁의 정치적 목표달성에 그 어떤 치명적인 장애가 아니라고 보기 때문에 동의했을 거로 본다.

전쟁은 자신의 문법Grammar은 가져도,자신의 논리Logik를 갖는 것은 아니다. 클라우제비츠의 유명한 말이다. 그렇다. 이번 철수는 전쟁의 ˝문법˝에 충실한 결정이었다. 그렇다면 그 ˝논리˝는? 그 논리는 전쟁의 목표에서 나온다. 우크라 중립, 돈바스, 무장해제, 나치제거... 동남4주의 러연방가입으로 돈바스문제의 정치적 해결은 가닥은 잡았지만 아직 군사적으론 아니다. 나머지도 여전히 아니다. 갈 길이 한참 멀다. 평화는 아직 요원하다.

미국군사평론가 빅서지big serge의 평가인데 읽어 볼 만하다. 헤르손철수에 대한 네개 가설을 따져 본다. 1.러 패배설 2.러의 함정설 3.미러 밀약설 4.러 작전상 선택설 이 네가지다.

출처
https://m.facebook.com/story.php?story_fbid=pfbid0KBugo6e9ARqgSNpN2LLZgACzAo8JPSR6ewWhNyeeqpH1WBT7TVnwUnTECdTFJDuyl&id=100080442895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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