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20년에 출간된 소병국 교수의 동남아시아사에 있는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됐습니다최근에 미얀마에서 쿠데타가 일어나고 아웅산 수치의 복권을 통한 민주주의의 열망이 불타오르고 있습니다그런 상황이라 한 번 아웅산 수치의 아버지가 어떠한 인물인지 알아보는 것도 좋겠다는 차원에서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19세기 당시 동남아시아의 역사를 보면 태국을 제외한 모든 나라들이 서구 제국주의자들의 식민 지배를 받은 역사다현재 미얀마라고 불리는 버마 또한 19세기 중반부터 영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이것도 영국령 인도제국으로서 병합 당했으며, 19세기 중후반 영국의 식민지배가 강화되면서 이에 저항하는 독립운동이 거세졌다. 1900년대부터 버마에서는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며, 1930년대에 접어들었을 무렵 미국발 경제 대공황으로 인한 영향과 더불어 민족주의 운동이 다소 괴격해지기도 했었다. 1915년 영국령 버마에서 한 남자아이가 태어났는데그가 바로 아웅산(Aung San)이었다.

(아웅산, 그는 버마의 독립영웅으로 인정받고 있다. 또한 최근에 쿠데타로 체포된 아웅산 수치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버마 독립을 위해 영국을 방문했을 당시의 사진이다.)

 

버마 건국의 아버지로 유명한 아웅산은 1932년 양곤대학에 들어가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인물이다그 또한 마르크스주의에 영향을 받았고, 1939년 1월 31일 버마공산당을 창설하여 민족해방활동을 이끌었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일본이 동남아시아에서 세력을 확대하기 시작했다당시 동남아시아에 있던 독립운동 세력들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을 해방자로 받아들이는 치명적인 실수를 했었다.(물론 베트남의 호치민의 경우는 시작부터 항일투쟁을 했지만.) 버마의 독립영웅 아웅산 또한 마찬가지였다그들은 일본의 도움을 받아 BIA라는 독자적인 단체 및 군대를 만들었다.

(BIA 깃발을 흔들고 있는 버마 시민들과 버마군인들, 아웅산을 비롯한 이들은 당시 대동아공영권을 부르짓던 일본을 해방자로 맞이했다. 물론 그것은 크나큰 실책이었다.)

 

1941년 진주만 기습 공격으로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그러자 일본의 지원을 받아 독립을 이루고자 했던아웅산과 BIA는 일본의 버마 침공을 도왔다. 1942년 3월 일본은 버마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고그해 7월에는 버마 전역이 일본에게 넘어갔다물론 일본의 지원을 받았던 BIA의 규모는 1942년 3월에는 1만 명이었지만 4개월 뒤에는 2만 3000명에 이르렀다물론 일본 군정은 BIA를 해산하고 아웅산을 총사령관으로 소수 정예인 버마방위군(BDA)를 창설해 감시와 통제에 들어갔다.

 

이와 더불어 일본은 카렌족과 같이 영국 식민지 시절 분할통치로써 이용된 소수민족들을 이용하여 본인들의 통치를 강화했으며버마의 대중종교인 불교의 유물들을 가져가기도 했다또한 일본군의 점령으로 버마인들의 생활이 전반적으로 처참해졌으며, ‘죽음의 철도라 불리는 콰이강 교량 건설과 같은 일들을 저질렀다또한 이 과정에서 항만이나 교통시설 등 대부분의 기반시설이 파괴되어 버마 경제는 나락으로 떨어졌으며일본은 화폐 개혁을 통해 일본 화폐를 쓰도록 강요하고 이를 어길 시에는 고문을 가하게 했다이로 인한 인플레이션이 심화됐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태평양 전쟁의 전황은 일본에게 불리해져 갔고, 1942년 일본의 잔인한 점령이 시작되자 아웅산은 이른바 버마 독립을 위한 독립투쟁에 나섰다이 과정에서 아웅산은 일본과 맞서 싸울 연합전선 구축에 노력을 쏟아 부었다그는 버마의 좌파 독립운동 단체인 공산당과 민중혁명당하고 손을 잡았다이렇게 연합한 이들은 1944년 자유와 독립을 위해서는 파시스트 일본을 몰아내야 한다는 강령을 채택했다버마 내 반파시스트기구가 결성된 것이다반파시스트기구는 일본의 패망이 임박하자 아웅산을 국군 총사령관으로 내세웠고일본 파시스트 정권을 완전히 몰아내고자 했다또한 이들은 버마 내에서 무장봉기를 준비했으며, 1945년 3월 27일 대대적인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

(1942년 수도 양곤에 입성한 버마 독립군, 당시는 일본군에 의해 군대가 사라지기 전이었다.)

 

1945년 5월 3일 영국 인도연합군이 버마의 수도 양공을 탈환했다당시 아웅산이 이끌던 반파시스트기구는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즉각 독립할 것을 기대했다당연하게도 전 지배자인 제국주의 영국은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다따라서 양측의 전쟁은 불가피한 것으로 기정사실화 되었다당시 영국은 아웅산이 주도하는 반파시스트기구의 후신인 반파시스트인민자유연맹을 해산하려고 했다이런 과정속에서 아웅산은 영국과 담판을 벌여 버마의 독립을 쟁취하고자 했다.

 

1946년부터 아웅산은 버마의 독립을 논하기 위해 영국과의 협상을 시작했다이러한 영국과의 협상과정에서 이슈가 되었던 것은 독립된 버마가 영국연방에 남는가 하는 문제였다. 1947년초부터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고, 1월 13~27일 아웅산은 영국 수상 클레멘트 애틀리의 초대로 런던에서 독립 회담에 참석했다이 회담의 결과로 다음과 같은 합의 사항이 버마에 발표되었다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버마는 1년 내에 독립을 달성할 것이며독립 버마가 영연방에 남을지는 스스로 결정한다. 1947년 4월 의회 선거를 실시하고 5월에 의회가 개원하며과도기에는 각료회의가 정부 기능을 한다변방의 소수민족들이 새 버마에 합류할지는 스스로 결정한다.”

 

귀국한 이후 아웅산은 1947년 2월 12일부터 버마의 일부 소수민족 지도자들을 만나 협상을 시도했으며이들과의 통합 협상에서 성공을 이끌었다다만 최대 소수민족인 카렌족의 경우는 달랐지만대다수의 소수민족과의 합의를 본 것은 사실이었다선거는 예정대로 치루어졌다아웅산의 조직은 210석 중 204석을 얻어 압승했다이로써 반파시스트인민자유연맹은 정통성을 확보했고새로 구성된 의회에서 헌법을 제정했다또한 영국연방에 가입하지 않고신생 독립 국가를 수립하는 안을 의결했다그러나 버마의 완전한 독립을 앞두던 1947년 7월 19일 그는 각료 회의실에서 암살당했다그의 나의 32세였고아이러니 하게도 해방 이후 좌우합작운동을 이끌었던 여운형이 괴한의 총탄에 암살당한 날이기도 했다.

(현재 버마에 있는 아웅산 동상, 그는 지금까지도 버마에서 독립영웅으로 기억되고 있다.)

 

1947년 9월 24일 새 정부의 제헌의회가 새 헌법을 채택했고, 10월 17일에는 영국과 협의한 협정서를 바탕으로 작성된 독립 문서에 서명했다아울러 버마-영국 간 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었고영국은 버마의 부채 4000만 달러를 탕감해주었다. 12월 영국 의회가 독립 문서를 비준했다. 1948년 1월 4일 버마는 드디어 독립을 선언하기에 이른다하지만 아웅산 암살 뒤 탄생한 독립국가 버마에서는 영국과의 협의과정에서 서방의 지원을 받기 위해 탄압받았던 공산당과 카렌족과 같은 소수민족들이 무장투쟁을 벌이면서 내전에 돌입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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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당시 중국 연안에 온 딕시 사절단의 데이비드 배럿 대령과 주더 그리고 마오쩌둥)


2차 세계대전 초기 중립국의 위치를 고수하던 미국은 1941127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 공격을 받게 되면서 전쟁에 참전하게 됐다. 2차 세계대전에서 유럽과 태평양 전선 양측에서 전투를 치렀던 미국은 미드웨이 해전에서의 승리가 있던 19426월 새로운 조직 하나를 창설하는 데, 그게 바로 현재 CIA의 전신인 OSS 즉 전략사무국이었다. 전략 사무국은 유럽과 태평양 전선에서 반파시즘 연합전선을 구축하는 차원에서의 활동을 전개했었다. 쉽게 말해 전 세계적인 차원에서 활동했던 조직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당시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우던 중국은 미국으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았었다. 특히나 랜드리스(Land Lease)라 하여 미국은 중국 국민당 정부에게 결코 적잖은 물자와 탄약을 지원했었다. 장제스 휘하의 중국 국민당군이 전통적인 전투를 많이 치렀던 것은 사실이지만, 미국인들에게는 무능하고 부패한 집단으로 보였다. 물론 장제스와 국민당 측의 부정부패는 매우 심각한 수준이었고, 전투에서의 무능함을 보였던 점이 미국인들 눈에 들어왔던 것도 있었다. 중국 내 미군 총사령관이었던 조지프 스틸웰 중장의 경우 국민당 군대는 일본군과 싸우는 데 최소한의 물자만 쓰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분명 국민당군은 전통적인 군사작전에 있어서 결코 적잖은 전투를 치렀지만, 본인들이 기존에 부각시켰던 이미지를 결정적으로 다시 한 번 미국에게 부각시켰다. 바로 1944년 일본이 전개한 대규모 군사작전인 이치고 작전에서였다. 60만 명의 병력과 800대 이상의 탱크가 동원되었던 이 작전에서 장제스의 국민당군은 참패를 거듭했었다. 이것은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이 장제스 정권을 권위적이며 부패하고 무능한 정권으로 인식하고, 국민당에 등을 돌리게 된 이유였다. 여기서 미국은 중국에서 또 다른 세력과 접촉을 시도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마오쩌둥이 이끄는 연안지대의 중국 공산당이었다.

 

2차 국공합작 이후 대장정에서의 명성과 민심을 토대로 세력을 확장했던 마오쩌둥은 제2차 세계대전이 진행되는 과정속에서 군대와 당원의 숫자를 기하급수적으로 증강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장제스군은 1941년 이른바 신사군 사건을 일으켜 1만 명에 달하는 중국 공산당 정예부대인 신사군을 포위하여 궤멸시키기는 짓을 벌이기도 했었다. 그래도 마오쩌둥은 세력을 확장했다. 1942년부터 시작한 당내 권력투쟁 및 계급투쟁이었던 정풍운동은 1943년 마오쩌둥이 중국 공산당에서 세력을 공고히 하면서 마무리 되었으며, 연안에 근거지를 둔 중국 공산당 또한 국민당이나 일본에게 있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성장했다. 거기다 마오쩌둥은 좌파적 저널리스트인 에드가 스노의 저서 <중국의 붉은 별>을 통해 명성을 얻기까지 했었다. 따라서 미국은 이러한 중국 공산당과 접촉하고자 했던 것이다.

 

아무튼 루스벨트 정부는 장제스와 중국 국민당 정부에게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게다가 장제스는 공산당과 싸움을 완전히 끝내기 전에는 일본과 전쟁하지 않는다며 고집을 꺽지 않는 모습도 보였다. 또한 실제로 버마 전투 당시 장제스는 미국의 지원하는 장비의 상당량을 공산당과의 싸움을 대비하는 용도로 사용하기도 했다. 따라서 1944년 미국 군부와 정보기관 일각에서는 중국공산당과의 협력을 공개적으로 주장하기 시작했다.

 

1944722일 미국 C-47 항공기 한 대가 연안 상공아 나타났다. 창륙하는 과정에서 왼쪽 바퀴가 앞에 있는 무덤에 부딪혀 휘청거리며 프로펠러까지 떨어져 나가는 불상사가 있었지만 활주로에 착륙했다. 이 비행기에는 OSS 출신 인사들이 있었다. 이들이 바로 딕시 사절단(Dixie Mission)이었다. 딕시 사절단은 중국 공산당의 저우언라이의 영접을 받았고, 이 사실을 알게된 마오저둥은 해방일보에 우리의 친구들이란 제목의 글을 게제 함으로써 환영 분위기를 조성했다. 딕시 사절단은 마오를 비롯한 공산당 지도자들에게 헐리우드 영화들을 보여주었으며, 특히나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스가 반응이 좋았다고 한다.

 

그해 8월 초 딕시 사절단의 두 번째 파견 인원이 도착했으며, 외교관인 레이먼드 러든이 사절단을 이끌었다. 당시 미국의 목적은 분명했다. 미국은 중국공산당과 합의를 이룸으로써 국민당과 공산당이 힘을 합쳐 일본을 물리치는 계기를 만들고 싶어 했다. 1944117일 패트릭 헐리 소장이 루스벨트 대통령의 특사 자격으로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를 중재하기 위해 연안을 출발했고, 마오쩌둥을 만나게 됐다. 당시 헐리는 국민당과 공산당의 협정문 초안을 직접 작성하여 마오쩌둥에게 제시하기도 했다. 비록 조항 몇몇 부분에서 마오쩌둥의 입장과 부딪혔지만 서로 신뢰를 보이는 의미에서 양측이 최종안에 정식으로 서명까지 했었다.

 

실제로 그들은 많은 것을 약속했었다. 마오쩌둥은 미국의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1944년 공산당의 명칭을 신민주주의당으로 바꾸는 것을 생각하기도 했었다는 이야기가 존재할 정도다. 또한 19457월 말에는 이른바 미국 감시단(American Observer Group) 32명이 연안을 방문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미국 OSS가 마오쩌둥의 중국 공산당과 협력관계를 늘려나가면서 중국 공산당에 대한 물자지원도 행해졌다. 또한 마오쩌둥은 OSS의 총책임자 윌리엄 도노반에게 정보와 자금 그리고 무기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으며,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겨냥한 중대 신호를 보내기도 했었다. 더 나아가 OSS와 중국 공산당 군대가 일본이 장악하고 있는 산둥반도에 대한 공동 상륙작전을 추진하기로 합의까지 했었다.

 

미국이 주도하는 국공연합 정책 아래 마오쩌둥은 미국 루스벨트 정부와의 관계 개선에 심혈을 기울였다. 루스벨트 정부는 소련과의 협력 아래 중국 대륙을 국민당과 공산당으로 분할하여 관리하는 방향으로 협력하고 있었지만, 19454월 그가 서거하면서 강경한 반공주의자인 해리 트루먼이 권력을 승계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당연히 미국과 중국 공산당의 관계는 멀어졌고, 냉전의 조짐이 보이면서 미국도 중국 국민당 정부를 지원하는 방향으로 갔다. 1946년 제2차 국공내전이 장제스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되자, 미국은 제2차 국공내전에서 20억 달러의 원조를 장제스에게 제공하기에 이른다.

 

참고자료

 

마오쩌둥 평전, 알렉산더 판초프 스티븐 레빈, 심규호(), 민음사, 2017

 

마오쩌둥 2, 필립 쇼트, 양현수(), 교양인, 2019

 

일본 제국 패망사, 존 톨랜드, 박병화() 이두영() 권성욱(감수), 글항아리, 2019

 

미중 패권전쟁은 없다 (G2 시대 한국의 생존 전력), 한광수, 한겨레출판사,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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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대기근이 스탈린이 대학살이라는 우크라이나 친나치 반동들의 새빨간 거짓말을 듣다보면 진심으로 빡이 돈다. 스탈린 동지의 집산화가 오히려 미래의 기근을 막았다. 우크라이나 반동들은 날조의 신화를 만들어 내면서 사악한 거짓말들을 재생산하는 것이다. 스탈린 동지에 대한 중상모략을 중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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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헛소리.

제발 북한은 이런것좀 만들지좀 말았으면 좋겠다. 본인들이 체제를 유지하는 것과는 별개로 이런거 만들면 그냥 웃음거리로 밖에 안된다는 거를 왜 생각 못하는 걸까? 나도 평소에 북한을 이해하려 하지만 이건 진짜 뻥이 너무 심한건 둘째치고, 남한 민중에게 1도 안먹히고 조롱만 당하잖아. 솔직히 이 영상에 달린 댓글들만 봐도 조롱밖에 없는데...... 거기다 과거에는 이라크 전쟁때 이런 얘기를 했으면서.

(아래는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에 나오는 내용)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이라크의 최대 실수는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라크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었다면 미국은 절대 이라크를 치지 못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핵 관련 사찰도 무장해제도 절대 수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못 박았다. “그런 타협을 해서 제국주의자들과 그 추종 세력이 제기한, 핵 사찰 및 무장해제 요구를 수용했더라면, 우리는 벌써 이라크와 같은 비참한 운명을 맞았을 것이다. 우리에게 조금만큼의 양보나 타협도 기대하지 말라”

출처 :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I p.32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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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주의로 이끈 길(The Path Which Led Me To Leninism)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저는 파리에서 생활했습니다. 사진관에서 일하기도 했고, ‘중국고미술’ 화가로도 일했습니다. 가끔은 프랑스 식민주의자들이 베트남에서 자행한 범죄를 비난하는 내용의 간단한 인쇄물을 배포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저는 자연스럽게 10월 혁명을 지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10월 혁명의 역사적 중요성을 모두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 레닌은 자신의 동포들을 해방시킨 위대한 애국자였기에 저는 그에게 반했으며 그를 존경했습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그의 저서를 읽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제가 프랑스사회당에 가입한 이유는 사회당의 ‘신사 숙녀, 여러분’께서 저를 포함해서 억압받는 인민들의 투쟁에 공감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때까지 당이 무엇인지, 노동조합이 무엇인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당시 사회당 세포조직 사이에서는 제2인터내셔널에 남아 있어야 하는지, ‘2.5인터내셔널’을 건설해야 하는지, 아니면 레닌이 만든 제3인터내셔널에 가입해야 하는지를 두고 열띤 토론이 진행되었습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세 번씩, 정기적으로 모임에 참가했고 발표자들의 말을 경청했습니다. 처음에는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 이처럼 토론이 심각해지지? 제2인터내셔널이든, 2.5인터내셔널이든, 제3인터내셔널이든, 혁명을 수행할 수 있지 않은가? 왜 이처럼 언쟁해야 하나? 그럼 제1인터내셔널은 어떤가? 그것은 어찌되었을까?

어떤 인터내셔널이 식민지 국가 인민들의 편에 서 있는 가야말로 가장 궁금해 했던 문제이지만 모임에서는 논의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이 질문을 한 모임에서 제기했습니다. 일부 동료들은 제2인터내셔널이 아니라 제3인터내셔널이라고 대답해주었습니다. 누군가 저한테 《뤼마니테》에 실린 레닌의 「민족과 식민지 문제에 관한 테제」를 읽어보라며 건네주었습니다.

이 논문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정치적 개념들이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반복하여 읽고 또 읽었고, 마침내 핵심을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이 논문을 통해 위대한 감성과 열정, 계몽, 그리고 자신감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저는 기쁨에 겨워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방에 혼자 앉아서 군중들에게 연설하듯이 외쳤습니다. “순교한 애국자들이여,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필요로 했던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해방을 위해 나아가야 할 길입니다.”

그때부터 저는 레닌과 제3인터내셔널을 완벽하게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그 전에는 세포조직 토론에서 주로 이야기를 듣기만 했습니다. 저는 발표자들의 논리를 분명히 이해할 수 없었고, 누가 옮고 그른지 판단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논문을 읽고 난 후부터, 저는 논쟁에 뛰어들었고 열정적으로 토론에 참여했습니다. 비록 제 프랑스어 실력이 부족하여 모든 생각을 표현할 수는 없었지만, 저는 레닌과 제3인터내셔널을 공격하는 주장들을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저의 유일한 논증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만일 당신이 식민주의를 규탄하지 않는다면, 만일 당신이 식민지 인민들의 편에 서지 않는다면, 도대체 당신이 하고자 하는 혁명이란 어떤 것입니까?’

제가 소속되어 있는 세포조직 모임에만 참여한 것이 아니라, 다른 당 세포조직 모임에도 참여하여 저의 입장을 변호했습니다. 여기서 마르셀 카섕, 베이앙 쿠튀리에, 몽무소를 비롯한 여러 동지들 덕분에 저의 지식이 확장되었다는 점을 꼭 언급해야겠습니다. 결국 저는 투르 회의에서 그들과 함께 제3인터내셔널 가입 안에 찬성표를 던졌습니다.

제가 레닌과 제3인터내셔널을 신뢰하게 되었던 까닭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애국심 때문이었습니다. 투쟁 중에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학습하고 실질적인 활동에도 참여하면서, 저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만이 전 세계의 억압받는 민족들과 인민들을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킬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중국과 우리나라에는 마법의 ‘브로케이트 가방’에 관한 전설이 있습니다. 큰 어려움에 부딪혔을 때 이 가방을 열면 해결책을 얻을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레닌주의는 우리 베트남혁명가들과 인민들에게 신비한 ‘브로케이드 가방’이자 나침반이며,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궁극적인 승리를 향한 길을 밝히는 태양과 같습니다.

1960년 4월
호치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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