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22년 김남섭 교수가 번역한 제프리 로버츠의 저서인 『스탈린의 전쟁(Stalin's Wars: From World War to Cold War, 1939-1953)』의 내용을 바탕으로 겨울전쟁을 요약한 글입니다.)


세계사를 공부한 사람들이라면, 1939년 8월 몰로토프와 리벤트로프가 맺은 독소 불가침 조약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할 것이다. 또한 스탈린 정부의 폴란드 분할과 핀란드 침공에 대해서도 당연히 부정적으로 볼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한 서방의 입장은 “1939년 히틀러와 스탈린은 동맹이었고, 부당한 제국의 팽창을 했다.”로 요약된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반론은 없는 것일까? 당연히 반론도 존재한다. 오늘은 소련의 핀란드 침공의 또 다른 면에 대해 얘기해보고자 한다.

(겨울전쟁 당시 전선 지도)


1930년대 당시 이오시프 스탈린의 일관된 정책은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의 팽창에 맞서 국방력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1935년 코민테른 제7차 대회를 통해 이른바 인민전선 노선을 채택한 것도 파시즘에 맞선 새로운 전략이었고, 실제로 1936년 프랑코가 파시스트 쿠데타를 일으키자 공화파를 지원했다. 스탈린은 프랑코의 파시즘에 맞서 싸우기 위해 약 2,000명의 소련군을 파병했으며, 보병의 지원을 중심으로 이루는 탱크 부대도 보냈다.


스페인 내전 뿐만 아니라 스탈린은 겨울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도 아시아와 유렵에서 전쟁을 치렀다. 우선 만주와 몽골 쪽에선 하산호와 노몬한에서 일본군에 맞서 승리를 거두었고, 1939년 폴란드 분할 당시 소련군은 병력을 보내 폴란드의 절반을 접수했다. 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사실이지만, 사실 스탈린은 핀란드와의 겨울전쟁을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제프리 로버츠에 따르면, 스탈린은 갈등을 촉발한 국경과 안보 문제를 협상으로 해결하고 싶어 했다. 안타깝게도 정치협상은 파탄이 났고, 그 결과가 군사적 행동이었던 것이다.

(스탈린과 보로실로프)


1939년 10월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를 방문한 핀란드 대표단은 협정에 대한 요구만 받은 것은 아니었다. 소련은 핀란드에게 해군 방어 시설을 구축하기 위해 핀란드만의 몇몇 섬을 조차하거나 임차하고 싶다는 요구를 내밀었다. 가장 중요한 사항으로 스탈린은 레닌그라드에서 30km 정도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소련-핀란드 국경을 북서쪽으로 옮기기를 원했으며, 그 보상으로 핀란드에 극북의 소련령 카렐리야 영토를 주고자 했다.


협상을 준비하면서 소련 외무부는 일련의 최대 요구와 최소 요구를 세밀하게 작성했다. 최대 요구에는핀란드에서의 군사기지, 북부 핀란드의 페차모 니켈 광산 지역 양도, 발트해 연안의 핀란드 군사 시설에 대한 거부권이 포함되었다. 물론 핀란드 대표단은 양보를 하더라도 아주 조금만 할 준비가 되어 있었을 뿐이었다. 반면 소련은 소련-핀란드 상호 원조 협정까지 포기하며 최소한의 영토를 요구하는 쪽으로 물러났다. 즉, 소련은 핀란드에게 협상에서 양보를 하는 쪽으로 노선을 정했던 것 같다.

(소련-핀란드 전쟁 관련한 영문 서적)


그러나 협상은 궁극적으로 깨졌으며, 어떤 긍정적인 결과를 내놓지 못했다. 오히려 핀란드는 10월 중순에 군대를 동원했고, 핀란드 내에 있는 공산주의자들을 다수 체포했다. 핀란드가 이렇게 나가자, 스탈린과 소련 국방 인민 위원 보로실로프는 결과적으로 전쟁의 길을 선택했다. 보로실로프는 11월 20일까지 소련군을 레닌그라드 지역에 완전히 집결시켰고, 지역 사령관들은 11월 21일까지 기동 준비를 끝내라고 명령했다. 소련군은 핀란드군 사이에서 벌어진 국경 충돌에서 개전 이유를 찾았으며, 11월 28일 몰로토프는 1932년에 맺은 소련과 핀란드의 불가침 협정을 폐기했다. 이렇게 해서 소련과 핀란드 사이의 전쟁이 벌어졌고, 소련은 1,500대의 탱크와 3,000대의 항공기 지원을 받는 100만 명의 병력을 동원했다.

(소련-핀란드 전쟁 당시 소련군의 진격을 재현한 사진)


초기 공격은 실패했고, 준비된 핀란드군 또한 제법 잘 싸웠다. 로버츠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쁜 날씨에 소련군의 공격은 서툴렀고 조율도 억망이었다. 그러나 그해 2월 스탈린이 세묜 티모셴코를 소련의 핀란드 공격 총사령관으로 임명하면서, 핀란드가 만들어 놓은 만네르하임선을 깨뜨리는 데 성공했고, 핀란드군을 잘 갖추어진 전선에서 후퇴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군의 사상자가 핀란드군 보다 많았다는 점을 보자면, 군사적 손실 측면에서 핀란드가 이겼다고 보는 것도 아주 불가능한 표현은 아닐 것이다.


제프리 로버츠에 따르면, 1940년 3월까지 소련의 붉은 군대는 핀란드 방어의 남은 부분을 붕괴시키고 수도 헬싱키로 진격한 다음 온 나라를 짓밟고 점령할 수 있었다. 하지만 스탈린은 그걸 선택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스탈린은 핀란드의 평화 협상 타진에 반응하여, 종전 조약을 협상해서 체결하기로 했으며, 1940년 3월 12일에 맺은 조약의 조건에 따라 핀란드는 소련의 주요 영토 요구를 들어주었으나 독립과 주권을 보전했고, 여느 발트국가들과는 달리 상호 원조협정을 맺는 일과 본토에 소련 군사기지를 설치하는 일은 하지 않아도 됐다. 스탈린은 비교적 겨울전쟁 종전에 대한 온건한 입장을 취했다고 할 수 있다.

(소련-핀란드 전쟁 당시 소련군의 T-26 전차)


제프리 로버츠의 책 『스탈린의 전쟁』에서는 비교적 짧게 언급된 부분이 있다. 앞서 언급한 핀란드 정부의 공산주의자 탄압이다. 많은 사람들이 정말 모르는 사실이지만, 현재 우리가 아는 핀란드는 레닌 시절 적백내전 속에서 탄생한 국가였다. 당시 핀란드는 레닌을 지지하는 볼셰비키 좌파와 반공성향의 우파가 내전을 벌였는데, 1948년의 대한민국처럼 우파가 승리했다. 내전 당시 양측의 민간인 학살이 있었는데, 적색테러로 죽은 사람이 1,650명인 반면, 백색 테러로 죽은 사람은 무려 8,250명에 달했다고 한다. 즉, 백색 테러의 규모가 적색 테러보다 몇 배는 더 컸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배경에서 보자면, 핀란드 정부는 명실상부 반공 성향의 우익 정부였다. 일각에서는 소련의 부당한 침공을 지적할 수 도 있겠으나, 그렇다고 해서 겨울전쟁 이후 핀란드가 나치 독일에 협력한 역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핀란드는 나치 독일에 빌붙은 아주 충실한 반공 성향의 동맹국가였다. 겨울전쟁 이후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하자, 핀란드는 나치 독일을 돕기 위해 수많은 병력을 파병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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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dvs117 2024-03-25 22: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북유럽 복지국가의 대명사로 알려진 핀란드도 추축국이었다니!
 
혁명과 일상 - 해방 후 북조선, 1945~50년
김수지 지음, 윤철기.안중철 옮김 / 후마니타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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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 책이 번역됐다고? 정말 놀랍네. 또 읽어야할 책이 이리 늡니다. 명저에겐 별이 아깝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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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보지 못한 한국전쟁, 초토화 폭격
전갑생 외 지음 / 뉴스타파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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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타파가 정말 훌륭한 일을 했습니다. 이런 책은 꼭 사서 소장해야합니다. 다시한번 뉴스타파에게 큰 감사함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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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냉전에 반대한다 - 워싱턴이 벌이는 신냉전과 절멸주의에 관한 노트
데보라 베네치알레.존 로스.존 벨라미 포스터 지음, 비자이 프라샤드 엮음, 심태은.이재오. / 두번째테제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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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월이었다. 나는 국제전략센터에서 개최한 인도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비자이 프라샤드의 북콘서트에 참가했다. 거기서 난생 처음 비자이 프라샤드를 만났고, 감명 깊은 강연을 들은 이후, 의미있는 질문을 할 수 있어서 참 좋았다. 사실 그 북콘서트는 2022년 초에 번역한 워싱턴 불렛과 그해 말에 번역한 신냉전에 반대한다관련한 북콘서트였다. 아는 페친 동지 덕분에 참가하게 된 이 북콘서트는 표지부터가 끌렸다. 신냉전에 반대한다라는 제목이 너무나도 와 닿았었다. 그 이유는 현실을 살아가는 진보좌파가 고민하고 생각해야할 주제이기 때문이다.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됐다. 사실 나 또한 푸틴이 정말로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리라 예상하지는 못했다. 물론 나는 이 전쟁에서 가장 나쁜 놈이 전쟁범죄를 운운하는 모습에 참으로 역겨움을 느꼈다. 왜냐하면, 미국이 어떠한 짓거리를 했는지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20세기와 21세기를 통틀어 미국이 자행한 악행은 이루 헤아릴 수 가 없이 많다. 이승만과 박정희의 반공주의 망령이 아직도 살아있는 한국에서야 미국은 자유민주주의를 지켜준 고마운 존재로 여전히 인식되지만, 미국은 자본주의와 자본가를 위해선 그 어떤 범죄도 저지를 수 있는 나라다. 물론 이러한 사실들은 한국인들 스스로가 쉽게 망각하지만, 2003년 이라크 침공만 보더라도 미국의 제국주의적 폭력성을 보여주는 사료적 근거는 밤하늘의 별만큼 많다.

 

2022년 말 국제전략센터에서 번역한 신냉전에 반대한다는 바로 이러한 미국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또 다른 소책자다. 나는 지금까지 국내에 번역된 프라샤드의 책은 갈색의 세계사를 빼놓곤 다 읽었다. 3세계의 붉은 별, 워싱턴 불렛, 물러나다는 내 서재에서 절대로 빠질 수 없는 책들이다. 마찬가지로 신냉전에 반대한다도 내 서재에 꼭 있어야만 하는 책이다. 다만 이 책의 내용은 비자이 프라샤드가 쓰지 않았다. 프라샤드와 비슷한 역사관과 문제의식을 공유한 세 명의 전문가들이 집필했다.

 

책의 구성은 비자이 프라샤드가 쓴 서문으로 시작하여 중국 인민대학교 금융연구소 선임연구원이자 영국인 출신인 존 로스의 미국이 세계에서 더 많은 군사 침략 행위를 벌이는 이유라는 글로 주 내용의 첫 번째 장을 시작한다. 이탈리아 언론인이자 트리컨티넨탈 연구소 연구원인 데보라 베네치알레의 미국을 전쟁으로 이끄는 것은 과연 누구인가?”, 미국 오리건대학교의 사회학과 명예교수이자 먼슬리 리뷰 편집장인 존 벨라미 포스터의 “21세기 생태와 평화 운동을 위한 절멸주의에 관한 노트’”로 구성되어 있으며, 마지막으로 이 책이 한국의 진보주의자들에게 주는 것들이라는 국제전략센터의 감수글이 실려 있다.

 

책은 미국의 제국주의적 침략과 2013년 유로마이단 당시 미국의 개입과 우크라이나 네오나치즘의 성장을 적나라하게 비판했고, 냉전 이후 21세기에 급부상한 미국의 경쟁국 중국에 대한 미국의 냉전주의적 태도에 대해서도 심도 있게 다룬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점은 과거 냉전 시기 미국의 적대국이던 소련은 미국에게 경제적으로 미치는 영향이 그리 크지 않았다. 반면에 현재의 중국은 미국이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며, 조만간 중국이 미국의 경제력을 초월할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예상이 나올 정도다.

 

현재 한국에 만연한 혐중정서와 마찬가지로 미국과 서유럽은 혐중정서에 빠져 있다. 미국은 항상 자유민주주의를 외치지만, 정작 중국에 대해 다른 의견을 표출하는 학자들에 대해선 상당히 견제를 하고 있고, 소위 진보운동 단체들 또한 중국의 티베트나 위구르 문제를 통해 인권 문제를 운운하고 있는 실정이며, 중국에 대해 비호하는 발언을 한 학자나 정치인은 사회에서 철저히 매장당하는 수준이라는 것이 책에서 주장하는 내용이다.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은 자신들이 사용할 수 있는 자본력과 기업을 동원한다는 점도 눈여겨 볼만하다. 이번에 신냉전에 반대한다를 읽으면서, 서구가 가진 자본력과 인터넷 장악력에 대해 생각해봤다. 생각해보니, 서구는 자신들의 경쟁상대인 중국이나 러시아에 비해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의 인터넷 파급력과 전파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이 지적하듯이, 신냉전의 시대에서 미국은 중국과 러시아의 단결을 강화시키도록 유도하고 있다. 그리고 자본주의를 유지함으로써, 세계적 경제 문제나 위기에 대한 큰 대안을 내놓지도 못하고 있다.

 

문제는 여기에서 생긴다. 미국은 궁극적으로 소련과 동유럽을 자본주의화 하는데 성공함으로써, 냉전에서 승리했다. 냉전이 끝난 이후 미국은 소위 만만치 않은 도전자가 없던 시기를 대략 10~15년간 보냈다. 그러던 도중 다시 러시아와 중국의 견제를 받게 됐고, 2010년대 들어서면서 이러한 모습이 더욱 심화됐다. 거기다 2000년대 미국의 침략으로 시작된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전쟁은 미국의 사실상 패전이나 완전한 패전으로 종결됐다.

 

책의 표현을 빌려 얘기하자면, 미국은 100여 개국을 상대로 침략하거나 군사작전을 벌였지만, 외국 정부의 침략을 받거나 대규모 민간인 사상자가 나온 적이 없다는 점에서 전쟁 도발에 더욱 대담해졌다. ,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도 엄밀히 따져 보자면, 미국의 대담한 전쟁 도발로 인해 일어났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냉전이 끝나거나 끝나갈 무렵에 태어난 세대들은 경쟁자가 없는 초강대국 미국의 모습을 봤다. 이에 따라, 미국의 정치와 엘리트 계층은 몰역사적인 세계관을 가지게 되었으며 과대망상에 사로잡혀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책은 강조한다.

 

생각해보면 그렇다. 현재 미국식 애국주의에 빠진 극성 네오콘들과 민주당 매파들이 딱 그러한 관점에서 국제정치를 바라본다. 그러다 보니 자신들이 저지른 전쟁범죄와 학살을 망각한 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규탄하는 아주 어이없는 짓거리를 하는 것이다. 물론 이들에게 있어 이러한 행위는 미국의 전쟁범죄 옹호 및 합리화라는 아주 편리하고 간단한 방어도 된다. 네오콘들은 러시아가 국제법적으로 금지된 무기들을 사용한다고 비난하지만, 정작 미국은 유로마이단 이후 돈바스 내전에서 우크라이나 네오나치 군대를 키우면서, 집속탄과 같은 국제법적으로 금지된 무기들을 우크라이나에 지원했다. 따라서 미국이 러시아의 전쟁범죄를 규탄한다는 말 자체가 속된 말로 내로남불인 셈이다.

 

또한 신냉전을 반대한다는 미국의 핵무장과 기후변화의 문제도 심층적으로 다루고 있다. 기후문제 및 핵문제에 대한 지적은 아마 이 책이 가진 또 다른 장점일 것이다. 미국이 보유한 핵폭탄의 숫자와 미국 자본이 유도하는 환경 파괴 및 기후 변화 그리고 전쟁 도발을 통한 지속적인 자연에 대한 훼손 등을 읽는 이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든다. 따라서 환경 문제에 관심이 많은 진보주의자라면, 존 벨라미 포스터의 글 “21세기 생태와 평화 운동을 위한 절멸주의에 관한 노트’”를 꼭 읽어야 할 것이다.

 

지난 학기 대학원 생활 도중에도 촘스키와 프라샤드의 대화를 다룬 물러나다를 읽었지만, 이번에도 정말 좋은 책을 읽었다. 미국과 제국주의 전쟁,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중국과 중국의 경제 및 경쟁 등을 포괄적으로 담고 있으며, 주제에 비해 내용도 그리 어렵지 않은 편이다. 거기다 소책자여서 읽는데 크게 시간이 걸리는 것도 아니다. 마음만 먹으면 하루 만에 완독할 수 있는 책이다. 그에 반해, 책에서 얻어가는 지식은 많고 값지다. 따라서 현재 통일과 평화 그리고 반전을 생각하는 진보주의자라면 이 책을 필수적으로 읽어야 한다 생각한다.

 

많은 이에게 이 책의 일독을 적극 권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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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dvs117 2023-08-02 15: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무엇보다 미국에 진정한 진보정당/진보언론이 없고 우익-친기업-군사력강화주의자들이 미국 정계와 언론을 지배하기 때문에 미국의 중동 침략사에 대해 아는 사람들이 극소수라죠(!)
 

유신독재자 박정희가 부하 김재규에게 총에 맞고 사망한 해는 1979년이다. 대다수의 한국 사람들은 잘 모르는 사실이지만, 박정희가 총맞아 죽어버리기 몇 달 전 지구 반대편에서는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미국의 식민지 지배를 사실상 받았던 나라 니카라과에서 혁명이 성공한 것이다. 놀랍게도 이 니라카과 혁명은 과거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와 체게바라(Che Guevara)가 쿠바에서 성공시킨 민족해방 혁명이자 사회주의 혁명의 성격의 투쟁이었다. 이 산디니스타 혁명을 성공시킨 지도자의 이름은 다니엘 오르테가(Daniel Ortega)였고, 오르테가는 현재까지도 적잖은 니카라과인들에게 지지를 받고 있는 중이다.

 

니카라과의 혁명사를 알기 위해선 혁명이 성공하기 이전의 니카라과 역사를 알 필요가 있다. 20세기 초, 그러니까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2년 전 미국은 니카라과를 식민지배했었다. 당시 미국은 미 해병대 병력을 주둔시켰고, 미국의 식민지 지배는 니카라과인들의 민족주의 감정을 자극했다. 미국의 식민지 지배에 맞서 무장투쟁을 벌인 이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아우구스토 산디노(Augusto Sandino)였다. 그가 반미 구국 항전의 첫 깃발을 든 것은 1926년의 일이었다. 당시 미국은 친미주의 군부 정권을 후원하고 있었고, 산디노는 농업 노동자, 빈농, 광산 노동자를 중심으로 독립군을 조직하여 무장투쟁을 벌였다.


산디노의 독립군이 무장투쟁을 벌이자, 미국의 캘빈 쿨리지(Calvin Coolidge) 대통령은 혁명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니카라과에 미군 병력을 더 파병했다. 당시 미 해병대가 동원한 전투기들은 게릴라의 해방구로 의심되는 마을을 무자비하게 폭격했다. 미군의 이러한 폭격으로 최소 수백 명 이상의 니카라과 민간인이 학살당했는데, 19271127일 미 해병대가 폭격한 한 마을에서는 32명의 여성과 11명의 어린이를 포함한 도합 43명이 폭격으로 학살당했다. 리우스라는 멕시코 만화 작가가 쓴 만화 산디니스타 니카라구아에 따르면, 최소 300명 이상의 니카라과 민간인이 미군 폭격으로 사망했다. 미군의 이러한 학살은 혁명의 열기를 꺾지 못했고, 초기 2,000명 정도의 게릴라는 1931년에 그 규모가 6,000명으로 증가했다. 이처럼, 산디노의 정의로운 투쟁은 대중들의 지지를 받았으며, 미국의 식민 지배에 큰 타격을 주었다.

 

미군은 1933년까지 니카라과에 해병대 병력을 주둔시켰는데, 이들은 새로운 대통령인 사까사(Sacasa)가 대통령이 되자 철군했다. 당시 산디노는 무장해제를 요구하는 사까사에게 안전보장을 비롯한 몇 가지 조건을 요구했고, 사까사는 이를 수락했다. 그러나 이는 속임수였고, 산디노는 참모들과 함께, 1934221일 밤 모두 사살됐다. 1933년 미국은 자신들의 이익을 방어해줄 인물로 아나스타시오 소모사(Anastasio Somoza)를 국가방위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는데, 소모사는 쿠데타를 일으켜, 정부를 전복시켰으며 궁극적으로 산디노와 그 참모들을 살해했다. 더 나아가 독립군 전사였던 사람들을 색출하여 투옥 및 살해했고, 산디노에 협력한 농민들을 체포·탄압했다.

 

이렇게 되면서, 니카라과에는 친미 독재자 일당인 소모사가 3대에 걸친 세습을 하는 시대가 열렸다. 물론 형식적으로 소모사는 대통령 직을 차지했다. 그러나 대통령제는 말이 대통령제지 군부권력에 기반한 철권 통치였다. 사람들은 북한에서 3대가 세습한다고 욕을 하지만, 정작 미국이 이러한 세습 독재자를 후원했다는 사실과 부패하기 짝이 없는 왕조 세력(사우디아라비아)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후원한다는 사실은 관심조차 가지지 않는다. 소모사 일가의 재산은 어마어마 했다. 1974년 기준으로 이 일가의 재산은 9억 달러였고, 소모사 일가의 엄청난 부의 축적과 니카라과에 진출한 미국 기업들의 엄청난 외국 투자액에도 불구하고, 당시 니카라과는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다. 당시 니카라과의 실업률은 36%였고, 문맹율은 74%였으며, 60%가 영양실조였다. 전국민의 50.2%가 문맹이었고, 전국민의 70%가 의료혜택을 받지 못했으며, 4살이 되기 전에 사망하는 유아사망률은 최소 20% 이상이었다.

 

따라서 이런 소모사의 독재 세습 정치는 민중의 저항을 불러 일으켰다. 특히나 1959년 쿠바 혁명의 승리는 혁명 세력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었다. 니카라과 민중들은 이 승리에 고무되어 60여 차례나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그러나 무장봉기 조직들은 소모사의 국가방위군을 상대하기에는 부족함이 많았다. 학생운동 출신의 아마도르와 마르티네즈가 주축이 된 청년 애국단은 쿠바 혁명의 포코 이론과 체게바라의 무장투쟁론을 받아들였고, 몇몇 소규모 무장조직을 통합하여 1961년 새로운 조직을 만들었다. 그게 바로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The National Liberation Front of Sandinista)였다.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의 산디니스타는 과거 미국의 식민지배에 맞서 싸웠던 아우구스토 산디노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 , 산디노주의자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산디니스타는 쿠바와 코스타리카 정부의 지원을 받아 농촌과 해방구 그리고 도시에 비밀리에 조직을 확대해나가면서 게릴라전을 벌였다. 정치투쟁과 무장투쟁을 동시에 벌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러나 초기 포코 이론을 받아들여 무장투쟁을 벌였던 산디니스타들은 니카라과 정부군과의 전투에서 적잖은 인명손실이 발생하기도 했다. 1967년 수도 마나과 중심가에서 소모사의 선거결과 조작에 항위하는 시위대는 니카라과 정부군의 무차별 총격으로 400명이나 학살당하기도 했다. 당시 니카라과의 정부군은 미 군사고문단에게 훈련을 받았고, 무장력도 결코 만만치 않았다. 또한 미국은 고문단과 더불어 니카라과 정부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에 맞서 산디니스타 또한 초기 포코 이론에 따른 노선을 수정했다. 1960년대 후반부터 이들은 군대를 모으는 전략을 도시 조직의 대학생을 끌어들이고, 은행 강도를 통해 돈을 모았으며, 니카라과 북중부 산악지대에 은거하여 농촌 지역을 지원기지로 만들어 대비했다. 이것이 바로 당시 산디니스타가 채택한 10여 년에 걸친 장기인민전쟁 노선이었다. 당시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 개입하여 베트남이라는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렸는데, 산디니스타가 채택한 장기인민전쟁 노선은 미국의 침략에 맞선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The National Liberation Front in South Vietnam)의 혁명 승리 전진 과정에서 이루어진 인민 전쟁 전략을 경합한 결과물이기도 했다.


산디니스타에게 있어 이 혁명 승리의 전략 최종 목표는 사회주의 혁명이었다. 사회주의 혁명으로 전진 하는 데에 가장 큰 장애물은 소모사 3대 세습 독재였으며, 최종적으로는 미제국주의와의 투쟁이 과제였다. 물론 1970년대 들어서 산디니스타들은 미군 고문단의 지원을 받는 니카라과 정부군과의 전투에서 많은 대원을 잃었고, 적잖은 지역에서 조직이 와해되기도 했지만, 민중속으로 들어가 조직활동과 방어적 전투를 계속한 결과 혁명 무장세력은 급격히 그 역략을 성숙시킬 수 있었다. 1970년대 초반의 경우 당시 소모사 일당들은 산디니스타들이 사실상 전멸했다고 믿었다.

 

1974년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은 본격적으로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1974년 이후 산디니스타는 두 차례의 게릴라식 기습공격으로 소모사 정권에 큰 타격을 입혔고, 19741227일에는 미국 대사의 부임을 축하하는 연회장을 기습하여 미국 대사와 정부 고위관리들을 인질로 삼아, 정치범 석방과 노동자들의 임금인상 등을 비롯해 산디니스타의 존재와 강령 그리고 대의를 만 천하에 알렸다. 물론 1975년의 경우 정부의 대대적인 토벌작전으로 산디니스타의 창설자이자 장기인민전쟁 노선을 수립한 지도자 폰세카 아마도르가 전투에서 전사하는 등 피해도 막심했다. 이에 따라 산디니스타는 1977년에 이르러 파벌이 3개로 나뉘었다. 첫 번째는 장기인민전쟁 노선을 따라 농민들과 연대하는 마오주의 파벌, 두 번째는 주로 공장의 노동자들과 연대하는 마르크스-레닌주의 파벌,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모든 반정부 세력들과 연대하는 제3의길 파벌이었다. 이 제3의 길 파벌이 바로 다니엘 오르테가와 그의 동생 움베르토 오르테가가 이끈 세력이었다.


오르테가 세력의 전략은 1978110월 발생한 라프렌사 편집장 페드로 호아킨 차모로 암살사건을 계기로 결실을 맺었다. 오르테가 세력은 2월 초 도시들을 공격하고 8월에는 마나과의 국회의사당에서 2천명에 달하는 인질을 붙잡아 산디니스타의 존재를 니카라과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알렸다. 소모사는 몸값 50만 달러를 지불하고 정치범 59명을 석방하며 전국민적 봉기를 선동하는 산디니스타의 선언문을 방송하고, 파나마로 이어지는 안전통로를 보장하는 등 엄청난 굴욕을 당했다. 며칠 뒤인 9월 마테갈파, 마나과, 마사야, 레온, 치난데가, 에스텔리에서 반 소모사 봉기가 발생했으며, 오르테가 세력은 마테갈파를 제외한 나머지 도시의 헌병군 초소를 공격했고, 경무장한 다수의 민간인들이 봉기에 참여하여 마테갈파와 마나과를 제외한 나머지 도시의 헌병군 요새를 포위했다. 9월 봉기는 수천 명의 사망자를 내고 처참히 진압되었지만, 혁명운동의 고양 속에서 내부적인 통일을 이룩했다.

 

1978128월 산디니스타는 공동성명을 발표했고, 세 노선이 각 3인 위원으로 구성되는 9인 중앙상임위원회를 구성함으로써 혁명의 승리를 향한 거보를 내디딜 수 있었다. 더 나아가 통일전선 구축이라는 과제를 이룩하기 위해 나섰다. 197921일 산디니스타는 진보적인 소부르주아 정당인 독립자유당과 기독교 인민사회당이 연합하여 결성한 민족애국전선을 통해 최종적인 승리를 향해 전진했다.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의 전투원은 19795월에 5,000명을 넘겼고, 대중들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19796월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은 승리를 향한 총 공세를 개시했다. 공세는 단순한 군사 공격 뿐만 아니라 전술적인 민중 봉기와 총파업으로 국가 방위군 병력을 최대한 분산시키고 자본제 사회의 재생산 과정을 일시에 정지시킴으로써 소모사 독재권력의 물질적 토대를 일격에 붕괴시키고자 했다. 총공세 게시 1개월 19일 만인 1979719, 산디니스타는 수도 마나과에 입성하여 임시 혁명정부를 구성했다. 소모사 3대 세습 독재정권은 물러갔고, 인민을 대표하는 새로운 혁명정부가 니카라과에 탄생했다.

 

18년간 지속된 내전은 참혹했다. 유엔의 보고서에 의하면, 내전을 통틀어 최소 4만 명 이상의 사망자, 20만 채의 가옥 파괴, 4만 명 이상의 고아, 75만 명의 기아상태, 100만 명의 난민, 16억 달러의 외채 그리고 국내 전산업의 1/3의 파괴됐다. 그리고 이것은 소모사 3대 세습 정권이 벌인 만행이었다. 놀랍게도 1979년 기준으로 니카라과의 인구는 371만 명이었는데, 미국에게 지원을 받던 소모사 정부는 이렇게 모든 것은 파괴 및 무너뜨려 놓고 자신의 이익만 챙겼던 것이다. 이에 대한 리우스의 평가를 들어보자.

 

이러한 파괴에도 불구하고 민중들은 비로소 행복을 맛보았다. 그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들을 해방시킨 것이다. 소모사의 40년 독재로부터, 또한 북쪽의 괴물 미제국주의자들로부터....”

 

이렇게 해서 산디니스타 혁명을 최종적인 성공으로 이끈 다니엘 오르테가와 혁명가들은 국가경제의 재건을 위해 소모사 일가와 국가방위대의 고위 지휘관, 정부 고위 관리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은행, 보험회사, 광물, 임업 자원을 국유화했다. 또한 1979년부터 1983년까지 토지개혁을 시행하여 약 7만 명의 농부들과 약 4,000개의 협동농장에 토지를 분배했다. 그리고 1980년에는 문맹률을 낮추기 위해서 문맹퇴치 십자군을 조직했고, 많은 의료시설을 설립했다. 이와 함께 산디니스타 혁명정부는 소모사 정권하에서 저질러진 고문과 무고한 죽음을 확인하고 그들의 명예를 회복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혁명정부의 내무상 토마스 보르헤의 나는 산디니스타의 모토를 기억한다. 싸울 때는 가차없이, 그러나 일단 승리하면 관대하라는 내용의 연설을 통해서 국가방위대의 병사들에 대한 어떠한 보복행위도 금지했다. 그러나 이러한 이상적인 사회 건설은 1980년대 난항을 겪게 되는데, 바로 미국이 니카라과에게 끔찍한 범죄를 자행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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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dvs117 2023-07-17 01: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국이 니카라과에게 자행한) 그 범죄는 다름아닌 ‘이란 콘트라 사건‘이죠(!). 1986년에 터진 이란 콘트라 사건은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로날드 레이건이 (미국 기준으로) ‘적성국‘ 이란에 무기를 판 대금을 니카라과의 극우반군 ‘콘트라‘에게 갖다주고 그들(콘트라)을 지원한 사건입니다.

NamGiKim 2023-07-17 09:43   좋아요 1 | URL
네 유명하죠. 심지어 백무현 작가의 ‘만화 전두환‘에도 묘사됩니다.

2023-07-17 01: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NamGiKim 2023-07-17 09:4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상당히 흥미로운 역사죠. 저도 공부하며 많이 놀랐습니다.

2023-10-10 16: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NamGiKim 2023-10-10 18:0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