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시국에 조금 어렵지만, 베트남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나서 집에 돌아와 PBS 베트남 전쟁을 다시 보게 됐다. 4년 전에 이미 봤지만, 한 번 더 정주행할 가치가 있는 작품이라 다시 보게 됐다. 1편당 1시간 30분에서 2시간이라는 긴 러닝타임을 보유한 작품이라 사실상 책 한 권의 분량이지만, 그래도 다큐멘터리로 보는 재미가 제법 있는 작품이다. 1화는 19세기 프랑스 식민지 시절부터 1961년 존 F. 케네디가 미국 대통령이 당선되는 시점에서 끝났다면, 2화는 존 F. 케네디 집권 2년 동안의 베트남 전쟁을 심층적으로 다루고 있다. 본격적으로 미국이 개입한 베트남 전쟁을 다큐멘터리가 분석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Riding the Tiger 오프닝, 맥나마라와 케네디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그리고 베트남 전쟁은 20세기 미국 현대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정말 중요한 전쟁일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40만 명의 전사자를 낸 미국은 자신들이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사실에 아주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나치독일과 일본을 무찔렀다는 자부심일 것이다. 물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역할은 결코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자신들이 개입한 전쟁을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논리를 적용했다는 데 있다. 즉 미국은 오류가 없는 ‘선’이고, 미국의 적국은 오류가 많은 ‘악’인 것이다. 이러한 선악구도식 논리는 특히 소련이라는 사회주의 세력과 냉전시기 경쟁하면서 많이 악용됐고, 베트남 전쟁도 그런 구도에서 미국이 침략한 전쟁이었다.


1967년 DMZ 근처에 있는 콘티엔에 배치된 미 해병대 참전용사인 존 머스그레이브는 자신이 젊은 시절 아버지나 삼촌 세대들에 대한 자부심과 존경심이 대단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조종사로 참전했었고, 이웃 아저씨나 집 근처 교회 목사님 그리고 선생님들 또한 제2차 세계대전이나 한국전쟁에 참전한 참전용사들이었다. 즉 그러한 사회 배경 속에서 자랐다는 것이다. 존 머스그레이브의 젊은 시절 사례는 적잖은 미국인들에게도 적용될 것이다. 영화 <7월 4일생>을 보면, 주인공인 론 코빅 또한 그들에 대한 존경심과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며, 베트남 전쟁 참전용사이자 영화감독인 올리버 스톤 또한 어린시절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적잖게 회고했다. 이러한 생각들이 결국 베트남 전쟁이라는 명분없는 전쟁에서 깨진 것이라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존 F. 케네디와 최고의 인재들, 1961년 존 F. 케네디는 미국 최고의 인재들을 모와 베트남 정책을 추진했다.)


1960년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존 F. 케네디는 미국인들에게 많은 각광을 받았다. 무엇보다 잘생겼고, 똑똑하며 많은 이들에게 강한 미국을 이끌어 갈 수 있다는 이미지를 부각시켰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다큐멘터리에 나온 한 참전용사는 “당시 나에게 존 F. 케네디는 신과도 같은 존재였어요.”라는 찬양어린 발언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존 F. 케네디가 집권하던 1960년대 초반 냉전이라는 시대적 흐름은 미국을 베트남 전쟁의 수렁으로 점차 당기고 있었다. 존 F. 케네디 본인은 고문단 지원을 통한 베트남에서의 단계적 철군을 원했지만, 그가 고문단을 파병할수록 오히려 상황만 악화됐다.

(남베트남군을 사열하고 있는 응오딘지엠, 친미반공주의자인 그는 남베트남 민중을 탄압했다.)


남베트남에서 독재정치를 자행하던 응오딘지엠 정부는 이른바 전략촌이라는 반민중적인 계획을 미국의 지원을 받아가며 실행에 옮겼다. 무엇보다 베트콩을 죽인다는 명분으로 죄없는 민간인을 죽였다. 이들이 죽인 베트콩들 중 대다수는 민간인이었다. 사실 베트콩과 민간인의 명확한 구분은 없었다. 베트콩에게는 제대로된 군복이 없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응오딘지엠 정부의 반민중적 정책은 오히려 대다수 남베트남 농민들을 베트콩 편으로 만들었다. 응오딘지엠 정부가 야심차게 건설한 전략촌 대다수는 베트콩에 의해 파괴됐고, 응오딘지엠 정부는 민중과 거리가 점차 멀어졌다. 심지어 남베트남의 군대는 제대로 싸우지도 않았다. 1960년에 창설된 베트콩은 무기나 물자 훈련면에서 당연히 남베트남 정규군보다 항상 열악했다. 그러나 남베트남군은 게릴라전을 전개하는 베트콩과의 교전을 회피했다. 부정부패를 자행하는 남베트남군 장성들은 응오딘지엠에 대한 충성심 경쟁에만 몰두했지, 베트콩과 싸우려는 의지조차 보이지 않았다.

(호치민과 레주언, 1959년 북베트남은 아이젠하워와 응오딘지엠이 제네바 협정을 위반하자, 남부통일을 시킬 계획을 논의했다. 남부에서 혁명투쟁을 했던 레주언은 호치민보다 더 무력통일을 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1960년에 창설된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은 응오딘지엠 독재정권에 맞서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존 F. 케네디는 반공국가 남베트남을 유지하기 위해, 제2차 세계대전을 경험한 세대를 정부에 결집시켰다. 월트 로스토, 맥스웰 테일러, 로버트 맥나마라, 맥조지 번디 등 미국 정치계나 경제계 그리고 군사계에서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가진 인사들이었다. 소위 존 F. 케네디는 남베트남을 유지하기 위해 ‘최고의 인재들(The Best and the Brightist)’을 결집시킨 것이다. 그러나 존 F. 케네디는 이 점을 간과했다. 케네디 본인은 최고의 인재들을 결집시킨 것에 자부심을 가졌지만, 케네디의 적이었던 호치민은 케네디가 그러기 20년 전에 이미 자신만의 최고의 인재들을 결집시켰다. 거기다 그들은 일본과 프랑스에 맞서 베트남의 독립투쟁을 전개하고, 또 독립을 쟁취한 이들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민중 대다수의 지지를 받았다. 그런 점에서 케네디의 정책은 실패한 것이나 다름없다. 당시 북베트남군으로 참전했던 응우옌응옥(Nguyen Ngoc)과 카오슈안다이(Cao Xuan Dai)는 다큐멘터리에서 북베트남의 지도자 호치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응우옌 응옥, PBS 다큐멘터리에 출현하여 많은 증언을 했다.)


(카오슈안다이, PBS 다큐멘터리에 출현하여 많은 증언을 했다.)


“호치민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줄 알았어요. 베트남 사람들이 노인을 공경한다는 것을 알았죠. 그리고 일부러 더 나이 들어 보이려고 수염을 길렀어요. 모두에게 자신을 호 삼촌이라고 부르라 했어요. 일부러 아주 겸손한 이미지를 만들었고요. 항상 간단한 말을 썼어요. 사람들과 소통할 땐 상황 판단이 아주 빨랐습니다.”


“호치민은 사람들에게 조국을 지켜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호치민은 우리에게 말했어요. 전쟁은 10년, 20년 혹은 그 이상 진행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베트남 사람들은 겁먹지 않을 겁니다. 독립과 자유보다 소중한 건 없기 때문입니다.”

(미국이 프랑스 침략자와 다를 것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참전용사 바오닌, 국내에도 번역된 <전쟁의 슬픔> 저자이기도 하다.)


(존 F. 케네디와 니키다 흐루쇼프)


(미군의 네이팜 폭격)


(맹독성 고엽제인 에이전트 오렌지를 살포하는 미군 수송기)


(남베트남군을 훈련시키는 미군고문단)


이처럼 베트남인들은 독립운동가인 호치민을 믿었다. 반면 존 F. 케네디의 대베트남 정책은 사실상 대다수 농민을 적으로 규정한 응오딘지엠의 반공정책의 연장선상에서 진행됐다. 케네디가 보낸 미군사고문단은 응오딘지엠 정부의 군대를 지원하여 베트콩을 소탕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즉 응오딘지엠 정부가 반공정책으로 죄다 적으로 만든 이들을 죽이고 학살하고 구금하고 폭격하는 임무를 수행한 것이다. 실제로 케네디는 네이팜 폭탄 투하와 고엽제 살포 그리고 전략촌 건설을 진행했다. 이러한 정책은 당연히 1954년에 체결한 제네바 협정을 위반하는 것이었고, ‘인권’이라는 부분에서도 문제가 심각한 행위였다. 

(전략촌에 대해 발표하고 있는 로버트 맥나마라)


(닐 시핸 기자, 1962년 베트남에 파견되어 많은 심층보도를 했다.)


(존폴밴, 1962년부터 1972년까지 베트남에서 복무했다. 남베트남의 현실을 제법 현실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미군이었다. 그의 이야기는 닐 시핸기자가 쓴 <A Bright Shinning Lie>라는 책으로 출판됐으며, 영화도 만들어졌다.)


당시 미군사고문단으로 파견되었던 이들은 남베트남을 지지했지만, 남베트남군의 문제를 깨닫게 된 이도 있었다. 그가 바로 1962년부터 1972년까지 고문단 및 주월미군에서 여러 직책을 맡았던 존폴밴(John Paul Vann)이다. 존폴밴은 전형적인 미국 군인이었지만, 베트남 전쟁의 본질을 잘 파악했던 인물이다. 그는 미국이 전쟁에서 이겨야한다고 생각했지만, 남베트남 정부의 부정부패와 대중성 결여의 문제점을 아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존폴밴은 주로 메콩강 삼각주에 있는 고문단 기지에서 초기에 근무했는데, 대다수 농민들이 왜 베트콩을 지지하는지 정확히 파악했다. 존폴밴이 보기에 남베트남군은 너무나도 부정부패한 집단이었지만, 그의 적이던 베트콩은 농민들에게 쌀을 나눠주며 대중과 소통하는 세력이었다. 밴은 당시 주월미군 총사령관이던 폴 하킨스에게 이러한 사정을 여러번 보고했지만, 하킨스는 이를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은폐했다.

(압박 전투 당시 남베트남군의 작전도)


(압박 전투에 베트콩으로 참전했던 레콴콩, 1951년 12살의 나이때부터 항불전쟁에 참가했으며, 이후 미국에 맞선 전쟁에도 참전하여 베트콩으로 활약했다.)


(베트콩에 의해 격추된 헬리콥터)


(압박 전투 관련 북베트남의 스탬프)


결국 문제는 1963년 1월 2일에 벌어진 압박 전투에서 터졌다. 남베트남군은 미군고문단의 지원을 받은 15대의 헬기와 10대의 장갑차 그리고 최소 1,700명 이상의 남베트남군을 동원하여 베트콩 소탕에 나섰다. 그러나 놀랍게도 전투의 패배자는 미군과 남베트남군이 됐다. 심지어 베트콩들은 미군이 남베트남군에게 지원한 총기와 박격포 그리고 기관총으로 무장하고 있었고, 15대의 헬기 중 14대에게 손실을 가했다. 이 중 5대는 완전히 파괴됐으며, 장갑차 또한 막았으며 파괴했다. 당시 베트콩의 병력은 300명도 채 안됐다. 거의 1/6이나 적은 병력으로 화력과 병력이 뛰어난 남베트남군을 상대로 영광스럽게 승리했다. 당시 베트콩으로 참전했던 레콴콩은 다큐멘터리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그 순간부터 우린 적이 무섭지 않았어요. 그리 용감하지 않은 자들을 더는 두려워하지 않았죠.”


압박 전투를 통해 응오딘지엠 정부의 지방 통제능력이 사실상 바닥이었음이 드러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킨스는 압박 전투가 남베트남군의 승리였다고 오보를 했다. 압박 전투에 대한 진실을 보도하기 위해 존폴밴은 자신과 친분이 있는 기자인 닐 시핸과 말컴 브라운 그리고 데이비드 핼버스탬에게 이를 알렸지만, 결국 본국으로 잠시 송환되어 베트남을 떠나게 됐다. 압박 전투의 처참한 패배와 더불어 응오딘지엠 정부는 자국 내 불교도와 학생들의 반정부 시위에 직면했다. 애초에 민중과 전혀 소통할 생각이 없던 응오딘지엠과 그의 동생 응오딘누 그리고 제수인 쩐레쑤언은 가족 독재정치를 하며 자신들 사리사욕을 채우기 바빴다.

(소신공양을 하는 틱광둑 스님)


(1963년 11월 쿠데타군에게 총살당한 응오딘지엠)


이들이 자행한 반민주주의적 탄압은 특히나 불교도들의 불만을 많이 샀다. 응오딘지엠 일가친척이 가톨릭 주교가 된 것은 축하해줬지만, 불교도들이 석가탄신일을 맞아 기념행사를 하자 이들을 총기와 경찰력으로 진압했다. 불교도들을 탄압하며 이들이 공산주의자 혹은 베트콩이라는 논리를 내세웠다. 이런 불교도 탄압에 맞서 1963년 6월 13일 수도 사이공에서 한 승려가 분신자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불교도인 틱광둑이 소신공양을 하자, 뒤를 이어 적잖은 남베트남의 승려들이 소신공양을 했고, 도시에 있는 학생들도 민주화 운동을 전개했다. 민주화 운동을 전개한 이들 중에는 남베트남 의회정치의 민주주의를 요구한 이들도 있었지만, 그것마져도 지엠 정권에겐 공산주의 동조자였다.


이들에 대한 지엠 정부의 대응은 너무나도 기가막혔다. 그의 제수인 쩐레쑤언은 방송에 나와 “중놈이 한 일은 바비큐가 된 것 뿐이다.”라는 망언을 했고, 이는 미국의 정치인마져 경악하게 만들었다. 학생들과 불교도들의 시위는 계속됐지만, 응오딘지엠 정부는 이를 탄압하는 데 사력을 다했다. 결국 존 F. 케네디는 일부 남베트남군 장성과 쿠데타를 논의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과거 미국은 이란의 모사데그나 과테말라의 아르벤스 그 외에도 여러번 레짐 체인지를 한 적이 있었다. 물론 미국의 레짐 체인지 사례는 사회주의 성향의 지도자 제거라는 성격을 많이 가졌지만, 응오딘지엠의 사례는 “이 지도자가 계속 통치하면 남베트남이 공산화 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결국 쿠데타는 게시됐고, 응오딘지엠과 그의 동생 누는 쿠데타군에게 총살된다. 


로버트 맥나마라가 자신의 베트남 전쟁 관련 자서전에서도 밝힌 일이지만, 케네디는 지엠을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다. 그래서 지엠 사후 몇일 만에 이러한 살해를 우려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케네디는 베트남을 유지할 방안에 대해 계속 생각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또한 암살범에게 총에 맞서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존 F. 케네디가 죽자 베트남 문제는 부통령이었던 린든 B. 존슨에게 이어졌고, 남베트남에는 16,000명 이상의 미군고문단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제 베트남의 상황은 점차 암흑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다큐멘터리 마지막에 닐 시핸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며, 다큐멘터리를 끝낸다. 

(추락한 헬기에서 뛰어 나오는 미군 병사)


(헬기 부대, 남베트남에 이렇게 많은 헬기를 투입했지만, 미국은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했다.)


“우리는 우리 미국인들이 역사에서 예외라고 생각했어요. 역사는 우리에게 적용되지 않는다고 말이죠. 우리에게 못 이기는 전쟁은 없으며, 나쁜 대의명분을 나타낼 수도 없다고 말이죠. 우린 미국인이었어요. 그러나 베트남에서는 우리도 예외가 아닌 게 증명됐죠.”


1부에 비해 2부는 미국 케네디 정부의 베트남 개입을 아주 심층적으로 분석했다. 1부는 베트남 근현대사를 간략하게 소개하는 소개서에 가까웠다면, 2부는 이 다큐멘터리의 메인 주제를 다뤘다고 할 수 있다. 여러모로 많은 것을 분석하고자 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만하다. 베트남 전쟁의 초기 케네디 정부가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고, 또 어떻게 실패했는지를 1시간 30분 동안 많은 이들의 증언과 인터뷰 그리고 여러 자료를 통해 잘 알 수 있다. 미국의 대 베트남 정책이 민중을 무시하는 정책이었음을 다큐멘터리가 잘 입증했다고 생각한다. 케네디 사후 베트남 전쟁은 부통령 린든 B. 존슨이 계승했다. 그러나 이는 암흑 터널로의 행진이나 마찬가지였다. 미국 케네디 정부의 대베트남 정책은 실패했으며, 결국 대규모 지상병력 파병의 징검다리 역할을 한 셈이다. 다음에 3부 리뷰를 올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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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다수 국민이 한국전쟁 당시 미군을 자유민주주의 용사로 찬양하는 한국사회에서 미국의 본질인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20세기 당시 여러 역사적 증거들이 입증해주듯이,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트루먼 독트린(Truman Donctrine)에 따라 신제국주의(New Imperialism) 국가였다. 예를 들어 미국은 1946년 그리스 내전에 개입하여 과거 나치에 협력했던 왕당파를 지원했고, 해방 이후 한반도에서도 친일 경찰과 친일파들을 앞세워 민중을 탄압하는 이승만을 지원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한 이후 패망한 일본을 제국주의자들을 앞세워 재건한 것도 미국이었으며, 프랑스가 과거 자신의 식민지였던 베트남을 침략하여 식민지 전쟁을 일으키자, 제국주의 국가 프랑스를 위해 전쟁비용 80%를 대신 부담한 나라도 바로 미국이었다.

(미국 CIA의 과테말라 개입을 다룬 영어 서적)


미국의 중남미 지역 내정간섭은 미국의 제국주의적 행보를 알 수 있는 아주 좋은 예시다. 니카라과, 칠레, 엘살바도르, 브라질, 멕시코, 쿠바, 아이티, 아르헨티나, 콜롬비아, 그레나다 등 수많은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이 미국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굶주림과 독재정치, 학살, 빈곤, 영양실조에 시달려야 했다. 말 그대로 미국의 중남미 통치는 대다수 중남미 민중에게 노예와 같은 삶을 강요하고 협박했다. 미국이 이러한 짓을 자행한 이유는 너무나도 분명했다. 그것은 바로 연합과일 회사(United Fruits Company)와 같은 자국 기업의 이익을 마음껏 보장해줘야 했기 때문이다. 오늘 얘기하고자 하는 과테말라 또한 미국에 의해서 주권과 인권 그리고 권리가 무참히 짓밟혔으며, 미국의 제국주의가 얼마나 추악한지를 알 수 있는 아주 좋은 예시일 것이다.

(미국의 해리 트루먼 대통령, 진성 반공주의자로 공산주의를 막겠다는 이유를 들어 무수히 많은 나라의 주권을 침해했었던 인물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던 1945년 3월 과테말라에서는 미국이 후원했던 유비코 정권이 종결되고, 새로운 내각이 등장했다. 유비코 정권은 14년 동안 미국의 지원을 받아가며 독재정치를 자행하다가, 전국적인 시위로 대통령 자리에서 쫓겨났다. 당시 미국이 후원한 유비코 정권 하에서의 삶은 아주 열악했다. 전 국민의 2%가 과테말라 전체 토지의 60%를 소유하고 있는 반면 국민의 50%는 전체 토지의 3%를 경작하면서 살았다. 심지어 원주민들의 경우 50센트도 안되는 일당으로 살아가는 수준이었다.

(하코보 아르벤스 대통령의 사진, 그는 아레발로 정권을 이어 과테말라를 더 진보적이고 정의로운 국가를 만들고 싶어했다.)


그러던 1950년 과테말라 국민은 38세의 젊은 대통령인 하코보 아르벤스(Jacobo Árbenz)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아르벤스는 소수 기득권층 위주의 사회를 개선하여 인민위 권익을 성장시키기 위한 진보적인 정책들을 추진하고자 했다. 사실 유비코 정권 이후 집권한 아레발로도 개혁을 실행했지만, 아르벤스는 이보다 더 급진적인 정책을 추구했다. 1951년 3월 과테말라의 대통령이 된 아르벤스는 취임사에서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


“우리 과테말라가 가진 모든 부를 다 합쳐도, 대부분의 평범한 국민의 생명과 자유, 품위와 건강 그리고 행복만큼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그 부를 우리는 잘 분배해야 합니다. 덜 가진 사람들은 더 혜택을 보고, 더 가진 사람들도 혜택을 누리되 덜한 정도로 하자는 것이지요. 무슨 방도가 있겠습니까? 우리 국민이 처한 가난과 열악한 건강 상태, 교육의 결핍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출처: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 p.434~435


아르벤스는  법령 900을 발표해 272헥타르보다 크고 경작하지 않는 토지를 유상으로 몰수하기로 했다. CIA의 1952년도 비망록에는 과테말라의 상황이 “사회 개혁과 민족주의적 정책을 호전적으로 지지하는 공산주의자들의 영향” 때문에 “미국의 이해와 상반되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을 정도다. 르벤스는 대규모 토지개혁 정책을 예고하고, 그 첫 단계로 유나이티드 프롯 컴퍼니 소유 토지 947㎢(2억8,646만 평)에 대한 국유화에 착수했다. 이 회사가 소유한 전체 토지 2,226㎢는 과테말라 전체 경작지의 약 1/5이었는데 놀랍게도 이 중 90% 이상이 놀리는 땅이었기 때문에 농민들이 분노할 수 밖에 없었다. 아르벤스 대통령은 유나이티드 프롯 컴퍼니에 보상금으로 60만 달러를 주겠다고 제안했지만, 미국 입장에서는 가만히 눈 뜨고 토지를 몰수당하는 것 그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곧 에드워드 버네이즈를 이용해 미국 본국에 찌르고 CIA를 이용해 쿠데타를 계획했다.

(연설하고 있는 아르벤스 대통령)


사실 미국이 주도한 과테말라의 쿠데타는 1951년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피비 포춘(PB Fortune)’이라는 비밀공작을 승인하면서 개시됐다. 이에 따라 진보적인 아르벤스 정부의 정복공작은 시작되었으며, 1951년 6월 미국의 <뉴욕 타임스>는 “과테말라라는 암 덩어리” 운운하며 "아르벤스 대령이 대통령이 된 지 2달밖에 안된 시점에 이미 과테말라 정치에 대한 깊은 실망과 환멸"이 넘쳐나고 있다고 주장했을 정도였다. 미국의 정치공작은 참으로 집요했다. 유나이티브프루트는 과테말라가 공산주의의 위협을 받는다는 기사를 활용해 의회에 로비하는 데 당시 돈으로 50만 달러를 썼고, 이를 통해 미국 의회와 여론을 자신들 편으로 만들었다.


미국 정부가 과테말라에 무기 공급을 중단하자 아르벤스 정부는 동구권 국가인 체코로 부터 무기를 사들였는데, 미국은 서구 언론사에 이러한 무기 거래의 영향을 과장해서 전달했다. 제10회 미주대륙회의에 참석하고자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에 갔던 존 포스터 덜레스는 과테말라를 강조하며 "공산주의 세력의 침입"을 규탄한다는 내용의 결의안을 추진했으며, 결과적으로 과테말라만 결의안에 반대표를 던지도록 정치공작을 했다. 심지어 NBC 방송 중계는 과테말라의 붉은 정권이라고 공공연하게 떠들어 댔다. 아르벤스 정부에 대한 미국의 공작은 이러한 여론 및 정치공작에 바탕을 둔 것이다. 아래는 인도 역사학자인 비자이 프라샤드가 쓴 <워싱턴 불렛>에서 인용한 내용이다.


“유나이티드프루트는 최고의 PR 전문가인 에드워드 버네이스를 고용해 미국 의회에 공산주의 음모론을 퍼트리도록 했다. 그는 "공산주의 선전물에서 유나이티드프루트라는 이름이 나올 때마다 이를 미국으로 대체해서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라고 썼다. 버네이스는 유나이트드프루트와 미국이 유의어이며, 그렇기에 유나이티드프루트를 공격하는 것은 미국을 향한 공격으로 봐야 한다는 논리를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것이 핵심이라고 보았다. 버네이스는 <시카고트리뷴>, <뉴스위크>, <뉴욕타임스>, <타임> 등의 기자들에게 유나이티드푸르트의 자금을 뿌려 과테말라의 공산주의자에 대해 보도하도록 했다. <뉴욕타임스>에 게재된 1951년 7월 14일자 무기명 보도에서, 기사 작성자는 고산지대에 있는 고대 마을에 사는, 글도 모르고 주류 세계의 흐름과 동떨어진 마야인이 공산주의가 또 다른 형태의 노예제임을 본능적으로 깨닫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고 썼다. 이 기자는 고산지대에 사는 그 누구도 직접 취재하지 않았고, 누군가의 말을 인용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유나이티드프루트가 준 보도자료를 갖다 썼다.”


출처: 워싱턴 불렛 p.88~89


미국의 CIA는 과테말라의 우익 군부 잔당들과 접촉하여 아르벤스 정부의 전복을 위한 구체적인 작전계획을 수립했다. 아르벤스가 1953년 8월 12일 2차 토지 수용을 단행한 후, CIA 작전조정위원회(Operation Coordinationg Board)는 아르벤스를 최우선 순위로 놓고 작전을 진행할 것을 명령했다. CIA는 300만 달러를 투입해 카스티요 아르마스(니카라과의 독재자 소모사의 지원을 받앗던 인물)의 용변단을 훈련시키고 전체 군 수뇌부가 아르마스를 지지하도록 만들려고 시도했다. 미국이 과테말라 체제 전복 시점부터 현재까지 이용하는 정권 교체 매뉴얼을 간단하게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고 할 수 있다.


1.‘여론’을 공작하라

2. 현지에 적임자를 임명하라

3. 군 장성을 준비해라

4.경제가 비명을 지르도록 만들라

5. 외교적으로 고립시켜라

6. 대규모 시위를 조직하라

7. 청신호

8. 암살 연구

9. 부인하라


더 나아가 CIA는 1953년 9월 11일, 대과테말라 하이브리드 전쟁 보고서를 작성했는데, 이 보고서의 핵심 내용은 경제적 압박이었다. 보고서는 과테말라 정부의 경제가 압박에 취약한 점을 고려해 석유 공급, 해운업, 주요 수출입 물품 등 가능한 부문을 겨냥한 비밀 경제 전쟁 방식이 적용될 것이라고 써 있는데, 아래에 후술된 칠레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미국의 닉슨 정부가 아옌데 정부에게 가했던 살인적인 경제제재 계획 및 국가 뒤흔들기 방식은 과테말라에서 선행학습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54년 6월 CIA에서 훈련받은 용병들이 온두라스와 니카라과 소재 기지를 떠나 과테말라로 침투했고, 미국은 항공지원을 해가며 이들을 도왔으며, 아르벤스 정권을 전복하고자 했다. 6월 27일 아르벤스는 저항해봐야 소용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사퇴했다. 정권을 무너뜨렸다.

(미국의 지원한 과테말라 군부 쿠데타를 표현한 풍자화)


(과테말라 독재자와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


쿠데타로 인해 지도자 자리에서 사임한 아르벤스는 고별 라디오 연설에서 지금 우리가 당하고 있는 일은 유나이티드 프룻 컴퍼니가 미국 고위층과 결탁해 벌인 일이며, 앞으로 20년간 피로 얼룩진 파시스트 독재가 계속될 것이라고 경고했는데, 놀랍게도 아르벤스의 발언은 현실이 됐다. 과테말라에서의 체제 전복이 성공한 이후 미국의 덜레스 국무장관은 미국 대중에게 연설하는 자리에서 소련 공산주의에 대한 민주주의의 승리라는 말이 안되는 발언을 하며 쿠데타를 극찬했다.


쿠데타 이후에는 친미정부가 개혁을 깡그리 되돌렸지만 1960년부터 쿠바와 니카라과의 지원을 받은 좌파 반군들이 속속들이 일어나기 시작해, 1996년까지 자그마치 36년간이나 내전이 지속되었다. 과테말라 정부 공식기관인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Histrorical Charification Commision)’는 1999년에 발표한 보고서에서 과테말라 정부군이 다수의 마야 원주민 마을에서 저지른 626건의 대량학살사건을 상세히 설명하고, 이를 “제노사이드”로 규정했는데, 이 보고어에 따르면 CIA를 비롯한 미국 정부기관들이 정부군의 학살행위를 직간접적으로 지원했으며, 학살행위로 인한 전체 사망자는 20만 명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물론 미국 정부는 당시 과테말라의 친미적인 정권이 미국이 기본적인 인간의 가치를 옹호하는 국가라고 믿었지만, 문제는 1980년대 레이건 행정부만 보더라도 실상은 딴판이었다. 당시 뉴욕 타임스의 칼럼니스트 앤서니 루이스는 칼럼에서 소위 반송이라는 명분 아래 미국이 라틴 아메리카의 독재자들을 지원하고 있다고 주장했으며, 과테말라의 경우 정부군이 헬기를 타고 농촌 마을에 들이닥쳐 벌초용 칼로 여성들을 난도질하고 오두막을 불태우고 주민들의 눈알을 뽑아내는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는 보도를 상세히 소개했다. 루이스는 당시 과테말라 친미 정부의 게릴라 소탕작전을 제노사이드에 가까운 대량학살로 규정했다. 뻔뻔스럽게도 미국은 이후 자신들이 세운 친미 정부 하에서 자행된 학살을 돕고 방조했지만, 자신들의 관여한 행위를 부정했었다. 아래는 <워싱턴 불렛>에 나오는 내용이다.


“아르벤스가 타도되고 공산주의자들이 살해당했을 때 미국은 관련 책임을 부인했다. 그러나 내심으로는 전율했다. CIA 국장 앨런 덜레스는 주 온두라스 미국 대사 화이팅 윌로어에게 쿠데타(실제로 덜레스는 혁명이라고 불렀다.) 전문을 보냈다. 나중에 월로어는 덜레스가 보낸 전문이 사실상 나 아니었으면 혁명은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고 말했다. 미국 정부는 1966년 제정된 정보공개법에 따른 언론인의 정보 공개 요청을 거부하거나 무시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활동을 은폐해 왔다. 소련이 붕괴하기 전까지 그 어떠한 문서도 공개되지 않았다. 이러한 문서 공개 거부는 과테말라군이 반대 세력에게 자행한 학살을 미국이 조장하고 관여하며 공모한 것과 함께 이루어졌다. 미국 국무부의 바이론 바키는 1968년 3월 내부 비망록에 CIA가 과테말라에서 용인하고 자행한 폭력이 라틴 아메리카 내에서 우리의 이미지, 우리가 대의명분으로 내세우는 것의 신뢰도 측면에서 지대한 문제를 가져다주었다고 적었다.”


출처: 워싱턴 불렛 p.117~118

(과테말라에서 자행된 학살을 표기한 지도)


(이후 진상규명 과정에서 발견된 학살당한 이들의 유해)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미국의 덜레스 국무장관은 과테말라가 공산 제국주의에서 구원됐으며, 이는 미주 국가들의 위대한 전통에 영광스러운 새 장을 추가한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러한 덜레스의 발언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미국은 뻔뻔스럽게도 자신들이 정치공작과 독재정치 수립을 이러한 방법으로 옹호하고 미화했다. 과테말라 정부 전복작전에 참여했던 한 예비역 해병대 대령은 이후 책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미국)의 성공은 결국 31년간의 억압적인 군부 통치와 과테말라인 10만여 명의 죽음을 가져왔다.”


출처: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 p.441


놀랍게도 당시 과테말라 정부 전복애 참여했던 일부 인사들은 1961년 존 F. 케네디가 주도했던 피그스만 침공작전 때도 모습을 드러냈다. 미국에 맞서 진보적인 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던 하코보 아르벤스는 사임하면서 “20년간 피로 얼룩진 파시스트 독재”가 계속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러나 이는 지나친 낙관이었다. 피로 얼룩진 과테말라의 파시스트 독재는 40년이나 지속됐기 때문이다. 과테말라 사건 당시 이를 직접 두눈으로 지켜본 젊은 아르헨티나의 젊은 여행객이 있었다. 그는 쿠데타군이 학살극을 벌이자 아르헨티나 대사관으로 피신했다. 결국 그는 혁명에서는 무장투쟁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됐으며, 몇 년 뒤 이를 실천하게 됐다. 그가 바로 피델 카스트로와 더불어 쿠바 혁명을 주도한 체게바라다(Che Guevara).


참고문헌



노엄 촘스키, 김보경, 『미국이 진정으로 원하는것』, 한울, 1997


노엄 촘스키, 황의방, 『패권인가 생존인가』, 까치, 2004


올리버 스톤 피터 커즈닉, 이광일,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 들녘, 2015


올리버 스톤 피터 커즈닉, 이광일,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I』, 들녘, 2015


김남기, 『반공주의가 외면하는 미국역사의 진실』, 어깨걸고, 2021


비자이 프라샤드, 심태은, 『워싱턴 불렛』, 두번째테제,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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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국내에서 개봉한 영화 <강철비 2: 정상회담>을 보면미국과 일본이 한 팀이 되어 중국과 대립하려는 구도로 나온다영화상에서 일본의 정치계를 사실상 사로잡고 있는 모리 신죠라는 한 인물이 나온다그는 일본 내 극우 단체의 물질적 지주 역할을 하는 야마토 재단의 총수로 아베 신죠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인물로 보인다모리 신죠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일으킨 태평양 전쟁을 정의의 대동아 전쟁이라고 믿으며 원자폭탄 투하를 얘기하며전형적인 일본의 역사왜곡 인식을 가지고 있다하지만 그는 어제 죽은 아베와 마찬가지로 미국이라는 존재를 일본의 이익에 맞게 이용하고 싶어 하는 인물로도 작중에서 비추어 진다.

(욱일기와 성조기를 같이 들고 있는 일본 자위대)

 

대다수 한국 사람들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을 패망시킨 나라가 미국이라고 생각할 것이다태평양 전쟁에서 미국의 막강한 군사력으로 일본의 침략을 무찌르고, 1945년 8월 원자폭탄을 투하하여일본을 항복시켰다는 것이다물론 태평양 전쟁 당시 미국이 기여한 공로가 큰 것은 사실이다그러나 실제로 일본 대본영이 1945년 8월에 조기 항복한 이유는 원자폭탄 때문이 아니라 소련의 대일전 참전 때문이었다소련의 진격을 워낙 신속했고일본의 저항의지를 완벽히 꺾었다대다수 일본 제국의 전쟁광들은 미국이 300대의 항공기와 수천 발의 폭탄으로 도시들을 쓸어버리느냐한 대의 비행기와 한 발의 폭탄으로 그렇게 하느냐에 대해 별로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미국과 함께하는 일본 자위대 행사)

 

물론 소련의 대일전 참전이 일본의 신속한 항복을 불러온 것은 사실이지만태평양 전쟁 당시 미드웨이 해전이나 과다카날 전투펠렐리우 섬 전투와 레이테만 해전 등 미국의 전쟁 공로가 없는 것은 아니다. 1945년 8월 일본이 조기 항복한 이후미국은 일본을 점령했다일본 본토에 미군이 주둔했으며더글라스 맥아더를 중심으로 GHQ가 창설됐다이후엔 도쿄 군사재판도 열고 일부 전범들이 처벌받기도 했으나대다수 전범들은 살아남았다. 731 부대로 유명한 이시이 시로 같은 전쟁범죄자들이 맥아더와 결탁하여 살아남았다.

(욱일기를 바탕으로 서서 웃고 있는 미군 병사)

 

미국은 1946년과 1947, 1949, 1952년에 치러진 조기 선거를 지도했다맥아더가 통치하는 미점령군은 극우 세력(자유당)과 자유주의 세력(민주당)이 연정을 통해 사회주의자와 대적하도록 만들었고, CIA로부터 상당한 자금을 지원받은 민주당과 자유당이 함께 민주자유당을 창당했다이 민주자유당이 바로 1955년 일본의 자유민주당 즉 자민당이 된 것이다당시 민자당에는 일본의 파시스트들이 결집했다하토야마 이치로나 기시 노부스케 등이 바로 그들이며일본 극우 CIA요원 고다마 요시오를 포함하여 일본의 극우주의자들은 친미주의자들로 변모했다.

(동일본 대지진 당시 미군 마크)   


1949년 중국의 공산화와 1950년 한국전쟁을 통해일본은 미국의 전쟁물자 보급기지 및 수리기지로 변모했다이를 바탕으로 경제성장에도 성공하여세계적으로 막강한 경제 대국으로 발전했다일본의 자유민주당은 친미외교노선을 추구하며냉전시기 일본을 동아시아 반공주의 라인을 형성하는데 주력했으며이러한 기조는 현재도 이어지고 있다분명 미국은 일본 제국주의를 무너뜨렸지만그 일본제국주의적 잔재를 가지고 반공국가 일본을 만든 것 역시 미국이었다따라서 미국과 일본은 한패며현재 일본의 극우들이 북한에 대해 적대적인 감정을 한국 극우들과 궤를 같이하는 것도 아마 이러한 점 때문일 것이다.

 

이번에 암살 당한 아베 신죠는 일본 제국주의와 미국 제국주의가 결합된 하나의 작품이라고 생각한다일본 제국주의자 아베가 미일동맹을 굳건히 유지하며일본의 과거사를 부정하며 한국과 북한중국 등의 아시아 국가들을 자극했던 것도 따지고 보면미국 제국주의가 아베 정부를 지지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미제국주의는 아베 신죠와 같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자신들의 전쟁범죄를 극구부정하는 정권이어도 일단 친미주의만 한다면 받아들인다미국의 부시 정부와 버락 오바마 정부 그리고 조 바이든 정부까지 이들은 일본의 극우주의자들과 사이가 좋았고한일관계에 있어서 항상 일본편에 섰었다.

(주일미군 해군 마크)

 

많은 사람들이 일본의 과거사 문제를 얘기할 때반성하지 않는 일본의 모습을 지적한다그러나 이런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일본군 위안부나 난징 대학살, 731일 부대와 같은 제국주의적 범죄를 부정해도 아무런 불이익이 없고세력이 견고한 이유에는 자신들의 동아시아 패권을 위해 이들을 지원하는 미국이 있다는 사실은 쉽게 외면하고 있다또한 이 미국이 일본 제국주의자들을 반공주의 라인을 형성하기 위해 일본 제국주의자들을 이용했다는 사실도 항상 외면받는다.

 

한국 사회도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문제가 많지만이제는 본질을 알아야할 때다한국의 반공주의도 일본의 반공주의 및 제국주의도 사실 따지고 보면 미제국주의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이제는 알아야 한다이번에 아베 신죠가 일본의 한 극우주의자에게 사망하자미국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을 포함하여미국 및 서구 세계의 언론들은 아베의 명복을 빌어주고 있다일본 제국주의적 침략과 전쟁범죄를 미화하는 아베를 마치 민주주의자로 미화하고 있다왜 그러겠는가이것은 결국 미제국주의가 가지고 있는 반공주의 친미주의의 문제가 아니겠는가이런 점에서 아베의 죽음은 미제국주의의 추악한 민낯을 다시한번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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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dvs117 2023-08-02 15: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러고 보니, 미국은 대통령이 공화당(리차드 닉슨, 로날드 레이건, 조지 H.W. 부시, 조지 W. 부시, 도날드 트럼프 등)이건 민주당(죤 F. 케네디, 린든 B. 죤슨, 지미 카터, 빌 클린턴, 버락 오바마 등)이건 항상 한일갈등에서 일본 편을 들어왔죠.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유럽에서 미국은 항상 영국 편을 들고, 영국 중심의 유럽정책을 편다. 중동에서 미국은 항상 이스라엘 편을 들고, 친이스라엘적인 중동정책을 편다. 동북아시아에서 미국은 항상 일본 편을 들고, 동북아 패권정책에서 일본 중심적인 정책을 편다‘!

게다가 앞서 설명하신 것처럼, 악랄한 전쟁범죄를 자행하고도 하나도 반성하지 않는 사악한 국가 일본이 국제제재를 받고 매장되기는 커녕 큰소리치고 떵떵거리며 ‘아시아 유일 선진국‘으로 자신을 치장하고 있는 것 역시, 미국을 비롯한 서방 패권국가들이 일본을 지원하고 있음에 있다는 것도 알면 좋습니다.

역시 미국이나 일본놈들이나 우리 민족의 아픔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들 패권에만 관심이 있다는 것은 똑같군요!
 

(PBS Vietnam War 배경사진)

 

2017년에 미국 PBS에서 방영했던 베트남 전쟁 시리즈를 4년 만에 다시 보게 됐다총 10개로 구성된 이 다큐멘터리는 한 편당 1시간 30분에서 2시간 정도의 러닝타임을 자랑하는 다큐멘터리로 총 20시간이나 되는 길이를 자랑하는 장편 다큐멘터리다사실 정주행을 한번 마친 다큐멘터리긴 하지만워낙 잘만든 다큐멘터리라, 1번 정주행으로 끝내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운 작품이라 다시 보게 됐다물론 미국에서 만든 다큐멘터리라 미국 특유의 편향된 관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북베트남과 남베트남반전운동가참전군인 등 수많은 이들의 인터뷰와 관점을 반영했다는 점에서 제법 베트남 전쟁을 객관적으로 접근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받을 수 밖에 없는 작품이다.

(Déjà Vu 오프닝)

 

첫 에피소드인 1화는 1858년부터 1961년까지의 베트남의 근현대사를 간략하면서도 제법 자세하게 다룬다다큐멘터리는 1858년 프랑스가 베트남을 침략하던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프랑스는 베트남을 식민지화하기 위해가혹한 통치를 일삼았다프랑스 제국주의자들의 통치가 억압적이면 억압적일수록 베트남인들은 과거 자신의 조상들이 중국에 맞서 독립을 쟁취했던 것처럼 이에 저항했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난 이후 서구 열강들은 베르사유에서 전후처리 문제를 논의했다이 시기 프랑스 파리의 베르사유 궁전에 가서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에게 프랑스인과 베트남인의 평등한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청원서를 보내고자 했던 젊은 베트남인이 있었다그가 바로 그 유명한 베트남의 국부 호치민(호찌민, Hồ Chí Minh)이다.

 

현재 베트남의 국부로 평가받는 호치민은 1890년 베트남 응에안 성에서 가난한 관리의 아들로 태어났다그는 20대 초반에 베트남을 떠났으며프랑스와 영국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일을 했었고프랑스에서 베트남 독립운동의 길을 걸었다프랑스 공산당 창당에 관여했던 그는 볼셰비키 혁명가 레닌이 쓴 글을 읽고 이에 감명받아 소련의 모스크바로 가서 코민테른 요원으로 훈련받았고이후 중국에서 활동하며 1930년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창당했다호치민은 공산주의 이념보다 민족이라는 가치를 더 우선시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그에게 있어서 베트남의 독립은 항상 최우선 과제였다.

(호치민과 보응우옌잡)

 

1939년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전 세계는 다시 전쟁의 먹구름에 휘말렸다. 1940년 히틀러는 프랑스를 포함한 서유럽을 점령했고나치의 동맹국인 일본 제국은 아시아 침략을 위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점령했다일본 제국주의의 본질을 잘 알고 있던 호치민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프랑스 제국주의자들과 다를 것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았고, 1941년 30년 만에 베트남에 귀국하여 독립운동 단체인 베트민을 팜반동과 보 응우옌 잡과 같은 동지들과 함께 창당했다2차 세계대전 말기 일본과 전쟁을 치르고 있던 미국은 호치민과 접촉하고자 했고실제로 미국 CIA의 전신인 OSS는 베트민을 훈련시켰다.

(즈엉반마이 엘리엇)

 

1945년 일본의 착취로 수십만에서 많게는 200만이나 되는 베트남인들이 기근으로 목숨을 잃었는데식민 정부가 아무런 대처를 하지 않고 있을 때호치민은 베트민을 동원하여 일본군 창고를 습격한 뒤식량과 곡식을 농민들에게 나눠줬다이에 따라 베트민은 베트남인들에게 대중적인 지지를 받았으며일제가 패망한 이후 봉기를 일으켜 하노이 바딘 광장에서 독립을 선언했다.

(도미노 이론을 보여주는 지도)

 

그러나 얄타와 포츠담에서 베트남의 분단을 합의본 강대국들은 베트남의 독립과 통일을 원하지 않았다이에 따라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 된 이후 베트남 북부에는 국민당군이 남부에는 영국군이 입성했다거기다 과거 루스벨트가 약속했던 식민지국들의 독립은 강경한 반공주의자 해리 트루먼에 의해 지켜지지 않았고베트남 또한 그러했다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이었던 프랑스는 베트남을 다시 점령하고자 했다프랑스의 대통령 샤를 드골은 프랑스의 베트남 지배를 미국이 인정하지 않으면소련에게 붙겠다고 미국 트루먼에게 협박하기도 했었다프랑스는 베트남의 남부와 북부를 재빨리 점령했고이는 결국 1946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프랑스-베트민 전쟁)으로 확산됐다.

(1951년 사이공을 방문한 케네디)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발발하자호치민은 라디오 연설을 통해 지지자들에게 저항할 것을 결의했고수많은 지지자들이 베트민에 합류하여 침략자 프랑스에 맞서 싸웠다프랑스는 막강한 화력을 동원하여 전쟁을 끝내고자 했지만민중은 베트민 편이었고 전쟁이 장기화 될수록 프랑스군의 사상자는 급증했다. 1953년 까지 프랑스군은 최소 10만 명의 사상자가 속출했다한때 베트남 문제를 중립으로 바라보던 미국은 1949년 스탈린의 핵개발과 중국의 공산화에 따라 프랑스에 대한 원조를 승인했고, 1950년 북한의 침공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군고문단을 프랑스 점령지역인 사이공에 보냈다이에 따라 미국의 프랑스 식민전쟁 원조는 급증하여 1954년에는 프랑스 전쟁비용의 80%를 미국이 지원했다.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대중들에게 환영받는 베트민)

 

프랑스는 전쟁에서 패배하고 있었다이에 따라 강대국들은 한반도 문제와 더불어 베트남 문제를 스위스 제네바에서 합의하고자 했다프랑스는 전쟁을 치르며 사령관이 7번이나 바뀌었는데이들은 하나같이 전쟁의 승리를 부르짖었고, 1953년에 임명된 앙리 나바르 사령관 또한 마찬가지였다프랑스와 베트민은 라오스 국경지대에 있는 디엔비엔푸를 놓고공방전을 벌였다당시 베트민을 지휘하던 보 응우옌 잡 장군은 5만 명의 병력으로 프랑스군 최정예 부대를 상대했다. 1954년 5월 디엔비엔푸 전투는 베트민의 승리로 종결됐다놀랍게도 미국은 비밀리에 CIA인사들을 민간업자로 위장시켜프랑스군을 위해 민간 항공기로 물자를 지원했다그렇지만패배했다.

(제네바 회담에 따른 남북 분단)

 

1954년 제네바 회담은 결과적으로 베트남의 분단을 합의봤고미국은 남베트남에서라도 어떻게는 자신들의 정부를 만들고 싶어했다바오다이 황제는 너무나 명분이 부족했고따라서 미국은 극우 반공주의자인 응오딘지엠을 남베트남의 대통령으로 만들었다미국에 의해 만들어진 이 정부는 당연하게도 베트민에 대한 탄압을 가속화했고남베트남 내부에선 지엠 정부에 맞선 내부의 민중봉기가 일어났다미국은 남베트남에 소수의 고문단을 보내 남베트남군 창설에 깊이 관여했고당연하게도 이들의 목적은 과거 항일 항불전쟁 시기 독립운동을 했던 베트민을 소탕하는 것이었다북베트남 지도부는 항불전쟁 이후 나라를 재건하는 사업에 착수하는 한편남부 통일을 위해서도 앞장섰으며일부 인사들이 남베트남에 다시 월남하기도 했다그렇게 해서 1960년 남베트남에서 베트민을 대체하는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이 창설됐고이들이 바로 베트콩이었다.

(응오딘지엠)

 

다큐멘터리는 1960년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존 F. 케네디의 연설을 들려주며끝이 난다. 1화는 어디까지나 베트남 근현대사의 간략한 설명에 초점을 둔 것 같다사실 미국이 참전한 베트남 전쟁을 이해하려면이러한 배경지식 없이는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일 것이다일부 참전용사들의 증언과 베트남 전쟁 당시의 영상을 그 이전에 벌어진 베트남 근현대사와 더불어 같이 대조시키는 다큐멘터리의 기법은 생각보다 괜찮았다그리고 베트남에서 왜 이러한 전쟁이 일어났고어떠한 역사적 모순을 가졌는지 밝히는 점도 높이 평가받을만 하다그러나 앞에서 잠시 언급한 바와 같이이 다큐멘터리는 일부 미국 중심적인 혹은 미국 편향적인 사고관을 극복하지는 못했으며베트남 전쟁의 민족해방전쟁적이고 민중해방전쟁적인 성격을 다소 외면하는 듯 하다즉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1960년에 창설된 베트콩)

 

다큐멘터리에서 남베트남 측 인사들의 인터뷰들을 보면베트남 전쟁의 식민주의적 모순점들을 잘 볼 수 있다그들은 항불전쟁 시기 베트민이나 베트남 전쟁 초기 베트민 지지자들에 대해 부정적으로 얘기하며 잔혹성을 강조하지만다큐멘터리에서 소개되는 그들의 입장을 통해 알 수 있는건이들이 프랑스 식민당국에 협력했다는 사실이다예를 들면비록 보트피플 출신이지만베트남 민족해방운동에 대해 제법 객관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즈엉반마이 엘리엇의 경우본인의 가족이 친프랑스 협력자였고바로 그렇기 때문에 가족들이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제네바 회담 시기 월남했다고 증언한다또한 베트민이 자신의 아버지가 프랑스 식민당국의 고위직 협력자이기에 암살하려고 했었지만마음을 돌리고 살려줬다고도 언급한다.

 

이러한 사실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호치민 휘하에 있던 민족해방 세력이 당시 대변했던 이들이다즉 베트민과 베트콩은 대다수 민중을 대변했다는 사실을 사실상 프랑스 식민 당국 협력자들의 처지에 의해 입증되는 것이다즉 그러한 모순점을 다큐멘터리를 통해 명확히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참고로 즈엉반마이의 부모님은 프랑스 식민당국 협력자였지만그의 언니와 형부는 베트민의 열렬한 지지자였다바로 그렇기 때문에 즈엉반마이 엘리엇이 베트남 근현대사에 대해 생각보다 객관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연설하는 미국의 대통령 존 F. 케네디)

 

오래만에 다시 보니시간가는 줄 모르고 몰두해서 다큐멘터리를 봤다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은 의원 시절 프랑스 치하의 베트남을 방문하며, “호치민과 베트민이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고프랑스가 식민주의 전쟁을 치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그러나 정작 베트남이 제네바 회담에 따라 분단되자미국식 반공주의와 도미노 이론에 빠져반공주의자 응오딘지엠의 적극적인 지지자가 되었다결국 케네디 또한 근본적으로 미국의 반공주의와 제국주의라는 모순점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물이었던 것이다그의 잘못된 남베트남의 정책은 결국 의도와는 다르게 베트남 전쟁을 더욱 잔혹하게 만드는데 기여했고베트남 민중은 항불전쟁 이후 그것보다 더 잔혹한 전쟁을 20년이나 치르게 된 것이다.

 

나중에 2화 리뷰도 올리겠다. 1화 리뷰는 여기에서 마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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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게 타오른 1917 - 만화로 보는 러시아 혁명
존 뉴싱어 지음, 팀 샌더스 그림, 김원일 옮김 / 책갈피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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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게 타오른 1917 서평: 세계를 뒤흔든 1917년

1917년은 세계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 일어난 해이다. 세계최초로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했기 때문이다.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 세력은 자본가 계급과 제국주의에 맞서, 혁명을 성공시켰다. 이들은 과거 봉건적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와 봉건귀족들이 독점하고 있던 부를 억압받고 착취당하던 이들에게 돌려주고자 했다.

이것이 바로 러시아 혁명이었으며, 1917년 러시아 혁명은 짧은 기간안에 그러한 것들을 이루었다. 비록 내전이 일어나, 기반이 초토화되어 복구작업을 거쳐야 했지만,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인류에게 준 희망과 꿈은 실로 거대했으며, 그 자체만으로도 위대했다.

레닌과 볼셰비키들은 노동자들이 권력을 독점해야한다 생각했다. 자본주의 사회는 이윤과 경쟁을 위해 작동하는 사회다. 따라서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투입해서 창출한 가치를 제대로 보상받지 못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그러한 자본주의 사회를 혁명으로 타파해야 한다 생각했으며, 레닌은 이를 봉건적인 국가 러시아에서 성공시켰다.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게 되는 역사적 배경을 본다면, 혁명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다. 19세기 후반 들어서 급속한 자본주의화른 거치던 러시아에선 노동자 계급이 탄생했고, 이런 노동자들은 착취와 인권유린에 시달렸다. 1905년 러일전쟁을 전후로 노동자들이 봉기했지만, 차르의 군대에 의해 잔인하게 진압됐다.

차르는 자본가와 봉건 귀족계급만을 대변했으며,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무모한 제국주의 전쟁을 지속했다. 차르 또한 영국이나 프랑스 독일 등의 제국주의 국가들 처럼 자국의 노동계급을 총알받이로 내세웠으며, 독일과의 전쟁에서 거듭해서 패배했다. 식량과 물자는 떨어지지만, 부유층들은 여전히 호화롭게 살았던 반면, 노동자 계급은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렸다.

이렇게 해서 1917년 2월 페트로그라드의 여성 노동자들의 시위로부터 시작된 2월 혁명이 발발했다. 2월 혁명을 통해 과거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서 볼셰비키와 경쟁했던 멘셰비키가 권력을 잡았다. 그러나 멘셰비키 주도로 구성된 케렌스키의 임시정부 내각은 사실상 차르의 목적을 이루고자 했고, 이는 당연히 민중의 반발을 샀다.

이때 레닌은 스위스에서 열차를 타고 페트로그라드로 가서 4월 테제를 발표했으며, 3개월 뒤 7월 봉기를 주도했다. 7월 봉기는 임시정부의 진압으로 실패했지만, 임시정부는 코르닐로프의 반혁명적 반란과 더불어 민중들의 불만을 사고 있었다. 결국 10월 레닌과 트로츠키 그리고 볼셰비키가 주도한 혁명이 시작됐고, 이들은 10월 혁명을 성공시켰다. 이렇게 해서 이들은 소련을 탄생시켰다.

이 만화는 1917년 2월부터 1917년 10월까지 대략 8개월간 혁명의 도시 페트로그라드에서 벌어진 일을 한 여성 노동자와 병사를 통해 전개해 나가는 구도를 가지고 있다. 이들에게 있어 혁명은 과거 지배계급들이 강요하던 억압체제에 맞선 저항이었고, 진정한 해방을 이루는 방법이었다. 여성에게는 여성의 권리를, 노동자에게는 노동자의 권리를, 배고픈 이들에게 빵을, 토지가 없는 이들에게 토지를 주고자 했던 것이 바로 러시아 혁명이었던 것이다.

러시아 혁명은 이러한 것들을 단기간에 이루고자 했던 하나의 시도였고, 실제로 그러했다. 책의 서문에 따르면, 제1차 세계대전 100주년을 맞이하던 2014년 영국에서 출판되거나 방영된 제1차 세계대전 관련 책이나 다큐멘터리 등은 영국 제국주의에 대한 미화로 가득찼었다고 한다. 마치 영국이 참전한 이 전쟁이 제국주의 전쟁이었음에도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은 커녕 오히려 미화되었다는 얘기다.

이러한 문제점은 단순히 영국만의 문제점은 아닐 것이다. 당장 한국 사회만 하더라도 제국주의적 모순성이 강한 한국전쟁을 다룬 책이나 다큐멘터리 대다수는 한국전쟁이 가지고 있는 그 제국주의적 문제가 항상 거세당해 있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2014년 영국에서 나타난 문제와 현재 한국사회가 한국전쟁을 바라보는 문제점은 비슷하다.

올해는 러시아 혁명 105주년이자, 소비에트 연방 선포 100주년이다. 많은 이들이 사회주의는 실패했다고 주장한다. 단순히 1991년 미국과 경쟁했던 사회주의 국가 소련의 해체만을 보고서 하는 얘기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전 세계 곳곳에서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여러 좌파들의 목소리와 반미 국가의 목소리를 무시하는 관점이기도 하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준 자본주의 보다 더 나은 사회를 향한 진보의 꿈은 폐기되어야할 유물이 아닌, 계승되어야할 진보적 과제이다. 따라서 1917년 러시아 혁명은 그 자체만으로도 전 인류적 과제의 기본적 틀인 것이다. 미국이라는 제국주의적 모순이 살아있는 현재의 세계가 그 모순적 구조를 자각하면 할수록 세계인들은 1917년 러시아 노동자 농민이 자각했던 것을 자각할 것이며, 이러한 해답은 사회주의의 길임을 인식하게 될거라 믿고 있다. 사회주의는 실패한 것이 아닌, 우리 인류가 야만주의에 맞서 추구해야알 과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일독을 권하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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