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PBS 베트남 전쟁 7화 전반부 리뷰를 7월 초에 했는데, 후반부를 2달 뒤에 올립니다. 사실 한국전쟁 정전 70주년 맞아서 미국도 갔다오고, 미국인 친구와 중국 백두산도 갔다오느라 방학기간 동안 바쁜 일정을 소화했네요. 앞으로 이 다큐는 8910화만 하면 끝나는데 더 전진해야겠습니다.

(The Veneer of Civilization에서 나오는 인트로 영상)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미국이 가장 많이 비판 받아야 하는 부분이 있다면, 아마도 전쟁의 명분일 수도 있다. 당시 미국이 민주주의를 빙자하여 지원한 소위 자유민주주의 국가 베트남 공화국 즉 남베트남은 인간의 상식으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국가였다. 속된 말로 정신나간 국가였다고 보면 된다.

(1960년대 후반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의 모습)

 

(남베트남 상인에게서 물건을 사는 미군)

 

이 사실은 1960년대 후반 당시 남베트남의 경제와 일반인들의 생활을 보면 알 수 있다. 미국이 남베트남이라는 나라를 창조하면서부터 남베트남은 미국의 시장경제가 들어왔고, 미국식 자본주의는 1960년대 전쟁이라는 혼란 속에서 확장을 거듭했다. 그러나 이것은 남베트남 경제가 전적으로 미국 자본주의에 의존하게 만들었고, 사실상 미국이라는 나라에 종속되었다. 경제 상황이 처참한데, 아래의 미국 방송 보도를 보자.

 

올해에는 남베트남의 물가가 25%만 올랐으니 사이공은 좋은 시절이라고 합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남베트남에는 수백억 달러의 미국 돈이 들어왔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미국의 달러는 남베트남을 변모시켰다. 미군에게 완전히 의존하는 경제체제로 남베트남을 변모시켰다. 미국이 1960년대 중반 남베트남에서 경제를 크게 확장한 이후, 수백만 달러 가치의 상품이 매달 남베트남에 들어왔다고 한다. 일구 경제학자들에 따르면, 들어온 화물의 최소 10% 이상이 암시장으로 들어갔다고 추정했다.

(남베트남군을 사열하고 있는 응우옌반티에우와 응우옌까오끼)

 

(남베트남에 들어온 미군 물품들, 미군이 대규모로 주둔하게 되면서 남베트남의 경제 시스템은 사실상 미군에 종속됐다.)

 

미국의 자본이 홍수처럼 휩쓸자 당연히 남베트남 정치인과 군인 그리고 관리의 부패와 사회 범죄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응우옌반티에우의 정부 관계자들은 뇌물 받는 것을 당연시 했고, 남베트남군을 지휘하는 장교나 사령관들도 마찬가지였다. 당연한 얘기지만 남베트남 경찰 역시 전혀 믿을 수 없었다. 응오딘지엠 정권 시절 민주화 운동을 했던 남베트남 출신인 판쾅투에(Phan Quang Tue)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전쟁에서 재정적으로 혜택을 받는 건 누구겠어요? 남베트남의 장성들입니다. 이건 절대 부인할 수 없어요. 그자들이 돈을 받으니 더 부유해지겠죠. 우리가 쓰는 용어가 있습니다. 그들은 전쟁 부당 이득자였습니다. 이는 티에우와 끼까지 모든 계층에 해당됩니다.”

(당시 남베트남의 빈민촌, 말 그대로 남베트남 빈민들은 이런 누추한 곳에서 살았고, 이 마저도 없는 사람들은 그냥 노숙자였다. 남베트남은 너무나도 찢어지게 가난한 국가였던 것이다.)

 

(미군을 상대로 구걸을 하던 남베트남의 어린이들)

 

(미군을 상대로 몸을 팔던 남베트남의 매춘부 여성들, 베트남 전쟁 당시 남베트남에는 대략 50만 명 이상의 매춘부가 존재했다고 한다. 1968년 당시 남베트남 주둔 미군 병력이 549,000명이었으니, 거의 비슷한 숫자의 매춘부가 남베트남에 있었던 셈이다.)

 

남베트남의 암시장 비율은 상당했다. 암시장으로 미군이 대략 20억 달러의 손해를 봤다고 한다. 암시장을 통해, 미국 물건들이 PX 뒷문으로 외부에 유통됐다. 인구 이동도 전쟁 시기 급격했다. 전쟁 이전 남베트남인 10명 중 8명은 시골에서 살았지만, 1960년대 말에는 대략 절반 이상의 남베트남인이 도심 지역으로 나왔다.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의 인구는 300만 명으로 늘어났는데, 이는 전쟁 전보다 3배나 증가한 셈이다. 당시 남베트남 난민의 최소 절반은 영구 거주지가 없는 사실상 노숙자였으며, 최소 수천 명이 콜레라나 장티푸스 같은 질명에 노출되어 사망했다. 굶주린 아이들은 거리를 배회하며 동냥을 했고, 수만 명의 젊은 베트남 여성들은 시골집을 떠나 사이공과 같은 도심의 술집 여성이나 매춘부가 됐다.

(북베트남의 한 병사)

 

(경기관총을 발사하는 북베트남군 병사)

 

다큐멘터리에서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당시 남베트남인들의 급진적인 도시화에는 아무래도 미군의 무차별 폭격이나 민간인을 가리지 않는 군사작전이 상당부분을 차지했을 것이다. 시골에 있다보면, 여성이나 아이들도 베트콩으로 몰려 학살당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도시로 몰려온 것일 수 있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만 전쟁은 인간의 야만성과 잔혹성을 보여준다. 이에 대해선 북베트남군 참전용사 출신인 응우옌응옥(Nguyen Ngoc)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전쟁이 사름들 속의 야만성을 깨웁니다. 전 오랫동안 정글에 있었어요. 동물들은 그리 사납지 않습니다. 호랑이도 그렇고요. 호랑이는 먹으려고 죽여요. 그러나 사름들이 서로 죽이는 건 배고파서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서로 죽이고 신체를 훼손하는 건, 전쟁의 야만성을 뜻합니다.”

(헬리콥터에서 발사된 미사일이 폭발하는 장면)

 

(초고속 작전 당시 남베트남 상공을 날라다니는 미군 헬기, 초고속 작전 당시 미군 헬기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에다가 기관총과 로켓 미사일을 발사했고, 마을을 폭격했다. 그 결과 엄청난 민간인 사망자가 속출했다.)

 

1960년대 후반 미군은 인구가 밀집한 메콩델타 지역에서 또 다른 대규모 군사작전을 벌였다. 그리고 이 군사작전은 앞의 인용문과 같은 엄청난 잔혹성을 보여줬다. 그 작전이 바로 오퍼레이션 스피디 익스프레스 즉 초고속 작전(Operation Speedy Express)이다. 초소속 작전은 사이공 남부 쪽에 있는 베트콩들을 소탕하는 것이 본 목적이었다. 초고속 작전에 대한 다큐멘터리의 설명을 들어보자.

 

삼각주에서 베트콩의 제어와 두려움을 이기는 유일한 방법은 폭력을 쓰는 거다.라고 말합니다. 정찰대가 적군을 밤낮으로 쫓았습니다. 밤하늘은 헬리콥터로 가득 찼고, 일부는 탄소와 암모니아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장비를 써서 사람이 밑에 있다는 걸 알아냈습니다. 물론 어느 편인지 모르고서요. 통행금지 시간 후 자유 사격 지대에선 누구든 총에 맞을 수 있었고, 낮 동안에는 달리는 누구든 미군의 사격 표적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 지역 베트남 양민들은 미군 헬기만 봐도 그리고 헬기에서 미군이 착륙만 해도 공포에 질렸다. 왜냐하면, 이들이 자신들을 죽일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초고속 작전 당시 통계를 보면, 6개월 동안 미군이 사살한 베트콩의 숫자는 11,000명이다. 반면 미군 전사자는 242명이었다. 말 그대로 45 1이라는 믿을 수 없는 통계가 만들어졌다. 미군이 만든 자료에는 적군 전투원만 사살한 것처럼 보도했지만, 그러나 미국 육군 감찰관은 마지못해, 사살된 11,000명 중 최소 절반 이상이 무고한 양민이었음을 인정했다.

(헬기에서 기관총을 발사하는 장면)

 

(초고속 작전 당시 베트콩 사망자 숫자와 미군 사망자 숫자, 45 1이라는 말이 안되는 비율이 나왔다.)

 

(초고속 작전으로 사살된 사망자, 이들 중에 최소 절반 이상은 민간인이었다.)

 

초고속 작전으로 학살당한 베트남 민간인의 경우 최소 5,000명에서 최대 10,000명까지 추정한다. 촘스키나 허만의 경우 민간인 16,000명이 살던 곳에 미군이 군사작전을 벌인 결과, 오직 1,600명만이 살아남았다고 하니, 초고속 작전 당시 은폐된 민간인 살상이 무수히 많았음을 보여준다.

(미국 대학생들의 시위)

 

(시위 진압을 위해 투입된 미국 경찰)

 

다른 한편 미국 내에서는 학교에서도 반전운동의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다. 영화 ‘74일생을 보면 알겠지만, 당시 미국의 가정도 베트남 전쟁을 놓고 분열했다. 미국을 믿는 사람과 미국을 믿지 않는 사람으로 말이다. 대학교에서도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입장들이 점차 늘어갔다. 마틴 루터 킹 암살 이후 흑인 인권도 거세지고 있었으며, 베트남 전쟁을 피한 이들 중에는 미국에서 아예 캐나다로 도주하여 망명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그래서 캐나다로 도주한 젊은 아들이 있는 미국인 집안은 FBI 측의 불심검문을 갑작스레 집에서 당하기도 했다.

(1960년대 후반 샌프란시스코 골든 게이트)

 

(미국에서 캐나다로 가는 자연 풍경)

 

(미국과 캐나다 국경 지대의 검문초소, 실제로 베트남 전쟁 당시 징병을 피해 캐나다로 망명한 사람들도 있다.)

 

캐나다로 도주한 이들이 그렇게 한 이유는 그만큼 전쟁에 참전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물론 이들은 미국 내에서 배신자로 취급받기도 했다. 1960년대 후반 미국은 여전히 무차별 폭격을 하고 있었다. 특히나 베트콩의 보급 루트인 호치민 루트에 무수히 많은 폭탄을 투하했다. 당시 미국은 거의 200만 톤을 호치민 루트에 투하했는데, 이는 미국과 서방 연합군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사용한 폭탄보다도 많은 양이었다.

(호치민 루트에 투입된 북베트남 트럭, 당시 북베트남은 소련으로부터 트럭을 지원받았고 실제로 소련제 트럭이 호치민 루트를 거쳐 베트콩에게 보급품을 전달했다.)

 

(호치민 루트에서 보급 임무를 수행했던 북베트남 여군 참전용사 응우옌응우옛 안, 젊은 시절 상당한 미인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러한 무차별 폭격이 독립을 이루겠다는 베트남인들의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북베트남측은 여전히 호치민 루트를 통해 베트콩에게 물자를 보급했다. 물자 보급을 위해 투입된 북베트남의 병력은 미군이 만든 지옥도에서 그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당시 물자 보급을 위해 투입된 병사들 중에는 수백 수천의 젊은 북베트남 여성 군인들도 있었다. 북베트남군으로 참전한 여군 참전용사 응우옌응우옛 안(Nguyen Nguyet Anh)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북베트남의 지도자들은 문제 지역에서 끔찍한 폭격을 맞았던 젊은 남자들을 격려하라고 했어요. 우리가 함께 가면 용기가 날 거라면서요. 우린 위험한 뒷길을 달렸습니다. 구불구불하고 미끄럽고 가팔랐죠.”

(호치민 루트에 투입된 북베트남측 병사들, 아마도 이들은 호치민 루트 복구 인력인 듯하다.)

 

(야간에 호치민 루트 늪지대를 지나가는 소련제 트럭)

 

(호치민 루트에서 보급 임무를 수행했던 북베트남 참전용사 쩐콩탕, 응우옌응우옛과 약혼한 그 또한 호치민 루트에서 생사를 오가며 보급 임무를 수행했다. 상당히 미남이다. 전쟁이 끝난 이후 이 둘은 결혼하게 된다.)

 

응우옌응우옛 안은 3년 동안 호치민 루트에서 보급 임무를 수행했다. 그녀는 무기와 자원을 남베트남으로 옮겼고, 부상자를 화물칸에 실어 북베트남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당시 응우옌응우옛 안에게는 약혼자 쩐콩탕(Tran Cong Thang)이 있었다. 그 또한 호치민 루트에서 군 복무를 했다. 놀랍게도 이 둘은 부대가 분리되어 있었는데, 1975년 베트남 전쟁이 끝나고 난 이후 다시 만나 결혼했다. 쩐콩탕은 당시 미군 전투기가 어떤 만행을 저질렀는지도 빼놓지 않고 다큐멘터리에서 언급한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가끔 동료들 묻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미군 전투기가 또 공격해요. 그렇게 해서 그 사람들을 두 번 씩이나 죽이는 거죠.”

(미군의 폭격으로 폐허가 된 호치민 루트,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투하한 폭탄의 량을 이 호치민 루트에 투하했다.)

 

(호치민 루트에서 전사한 이들을 묻은 무덤, 엄청나게 많은 병력 손실과 인명피해가 있었음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사진이라 할 수 있겠다.)

 

(호치민 루트에 투하되는 폭탄)

 

(투하된 폭탄이 폭발하는 장면, 아마도 네이팜탄으로 추정된다.)

 

다음은 베트남 전쟁에 공군 장교로 참전하여 이후 걸프전쟁까지 참전한 미군 참전하여 2005년에 퇴역한 메릴 맥피크(Merrill McPeak)의 얘기다.

 

우린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떨어뜨린 것보다 더 많은 폭탄을 베트남에 투하했습니다. 대부분 호치민 루트를 겨냥한 것이었습니다. 루트에서 차량을 멈추진 않았습니다. 그건 좀 실망스럽긴 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게 절 괴롭히네요. 이 전쟁의 진짜 실패는 정책 단계에서 생겼습니다. 우린 잘못된 편에 서서 싸웠습니다. 남베트남 정부는 정말 부패했습니다. 베트남 사람들도 알았고, 미국인들도 알았죠. 제가 한마디 하자면 북베트남의 트럭 운전사들은 정말 잘 싸웠습니다. 이들이 나랑 같은 편이었다면 정말 자랑스러웠을 겁니다. 따라서 전쟁을 하게 될 때 해야 하는 건 옳은 편을 고르는 것입니다. 옳은 편과 동맹을 맺어야 하는 것이죠.”

(메릴 맥피크, 그는 1960년대부터 군에서 복무하여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고, 이후 걸프전쟁에도 참전했으며, 2005년 장성으로서 군 복무를 마쳤다.)

 

1969년 미국에서는 공화당 후보였던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이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당시 리처드 닉슨에게는 계획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마오쩌둥이 다스리는 공산주의 국가 중국과 정상적인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잠시 중국에 대해 얘기하겠다. 중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을 거쳤고, 1949년 마오쩌둥이 지휘하는 공산당 세력이 승리했다. 그러자 미국은 중국과의 관계가 단절되었는데, 매카시즘 열풍에 적극 동조했던 닉슨이 1960년대 후반에 들어선 적으로 간주하던 중국과 외교관계를 맺고 싶어 한 것이다. 또한 닉슨은 소련의 브레즈네프 정부하고도 긴장을 완화하고 싶어 했다.

(리처드 닉슨, 1969년 미국의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이후 그는 이른바 데탕트 시대를 열었지만, 그 이면에는 베트남 전쟁 확전과 중남미에서의 비밀 군사작전 등 온갖 악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헨리 키신저, 1923년 출생으로 2023년인 현재도 살아있다. 그는 젊은 시절 나치 독일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미국에 온 인물이며, 2차 세계대전 이후 정치에 뛰어들어 닉슨 보좌관 자리까지 올랐다. 2023년인 현재도 가끔식 언론에 얼굴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닉슨은 비판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미국이 일으킨 베트남 전쟁을 계속 전개했기 때문이다. 닉슨은 베트남화 정책을 발표하여 베트남에서의 단계적인 철수를 국민들에게 약속했다. 비록 존슨 정부에서 하던 북폭은 멈췄지만, 닉슨은 19693월부터 캄보디아에 대한 폭격을 계획했고 또 실행했다. 그가 집권하기 시작했을 때, 이미 37,563명의 미군이 전사했다. 당시 닉슨의 국가 안보 보좌관은 아직까지도 살아있는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였고, 이들은 베트남 전쟁이라는 큰 숙제가 남아 있었다.

(캄보디아를 폭격하는 미군 B-52 폭격기)

 

(닉슨 정부의 불법적인 무차별 폭격을 보고한 미국의 뉴욕 타임스)

 

그러나 이들은 그 숙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캄보디아를 폭격하여 확전했고, 또 비밀리에 실행했다. 당시 뉴욕타임스는 캄보디아 폭격에 대해 비판했지만, 닉슨 정부는 폭격 사실을 부인했다. 아니 오히려 몰래 도청까지 해서 자신들의 기밀을 폭로한 이들을 잡으려 했다. 매우 부도덕한 짓을 이 두 사람이 한 것이다. 따라서 아직도 전쟁은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베트남에서의 살육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다. 미군 참전용사이자, 당시 전공으로 해군 수훈장을 받은 칼 말렌테스(Karl Marlantes)는 전쟁에서의 기쁨을 이렇게 표현한다.

 

전투는 코카인 같습니다. 정말 짜릿한데 대가도 정말 크죠.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코카인을 하지 않겠죠. 전투가 그렇습니다. 겁나고 두려우며 비참합니다. 근데 싸움이 시작되면, 갑자기 모든게 위험해집니다. 자기 목숨과 친구의 목숨도요. 인간을 초월하는 것 같아요. 더는 인간이 아니니까요. 그냥 감각을 잃어버립니다. 그냥 소대일 뿐이에요. 지지 않는 소대인 거죠. 그리고 적을 이겼을 때, 야만적인 기쁨도 있습니다. 정말 말 그대로 야만적인 기쁨이죠. 우리가 이렇게 말하면 큰 실수일 것 같아요. 전쟁은 지옥이야! 그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전쟁에는 정말 굉장히 기분 좋은 부분도 있습니다.”

(PBS 베트남 전쟁 7화 엔딩 장면, 마치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여기서 말렌테스가 말하는 기분 좋은 부분이란 아마도 인간 내면에 숨겨져 있는 폭력성이 발현되어 이를 성취했을 때를 뜻하는 것 같다. 이렇게 하면서 7화는 끝이 난다. 이번에 7화 후반부를 리뷰하면서 가장 인상적으로 다가온 것은 남베트남의 경제 상황이다. 나는 남베트남의 경제 시스템을 보면서 사실상 미국의 신식민지라는 생각 밖에 안 들었다. 거기다 민생을 전혀 책임지지 않았으며, 차라리 그 점에서 친미독재여도 한국이 남베트남 보다 나았다는 생각이 합리적으로 들기까지 했다. 이제 석사 3학기 시작인데, 시간 날 때, 8화 전반부도 이렇게 리뷰해볼 예정이다.

 

긴 글 읽어주시느라 고생 많았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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