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 다니며 엄청 바쁘게 살다보니, PBS 베트남 전쟁을 리뷰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5화를 연재한지 3개월 만에 6화를 리뷰하게 되네요. 간혹 여유로울 때, 이 다큐멘터리도 지속적으로 리뷰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Things Fall Apart 인트로 영상 장면)
베트남 전쟁 당시 헬리콥터 승무원장이었던 참전용사 론 페리지(Ron Ferrizzi)의 이야기다.
“헬리콥터는 놀라운 장비입니다. 공중에 뜰 수 있으니까요. 마치 신이 된 것처럼 말입니다. 전 150m 아래로만 비행했습니다. 그 위로는 살상지대였거든요. 가능하면 60m 아래로 머무는 게 좋습니다. 낮을수록 더 안전하니까요. 제 임무는 공격받는 거였습니다. 제 임무는 적들의 사격을 유도하는 미끼 역할 같은 것이었죠. 사격을 많이 받았죠. 적군과의 교전이 빈번했거든요.”
(전장터에 투입된 미군 헬기들, 이들이 제공하는 화력은 막강했다.)
(헬리콥터를 조종하는 미군 조종사)
베트남 전쟁은 최초의 헬리콥터 전쟁이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었다.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헬리콥터가 투입된 전쟁이었고, 가장 많은 헬리콥터를 잃은 전쟁이기도 했다. 베트남 전쟁을 통틀어 당시 헬리콥터의 출격 숫자는 3,600만 번이다. 이 중에는 대다수 베트콩 소탕 작전과 미군의 화력지원을 위한 목적이 있었지만, 승무원들은 적진에 선전용 전단을 뿌리기도 했다. 또한 전투에서 부상당한 미군들을 후방으로 옮기는 역할도 했다. 그 때문에, 미군의 생존률이 제2차 세계대전이나 한국전쟁 때 보다 더 증가했다.
(1967년 말 기준 베트남 주둔 미군 병력 숫자)
이러한 최신식 헬리콥터의 투입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전쟁에서 이긴다고 말 할 수 없었다. 1967년이 지나고 1968년 원숭이의 해가 되었지만, 여전히 베트콩들은 남베트남 전역에 확산되어 있었으며, 농촌은 여전히 게릴라의 해방구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미국의 존슨 대통령은 전쟁에서 이기고 있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적군은 연전연패하고 있습니다. 적은 미국이 가진 불굴의 의지가 결국엔 꺾일 것이라고 희망하지만, 그건 완전히 헛된 희망이죠.”
(구정 대공세를 위해 결집한 베트콩들)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1968년 1월 베트남에 있던 미군의 숫자는 대략 485,600명이었고, 미국의 지도부는 앞에서 인용한 존슨의 연설문처럼 베트남 전쟁에서의 승리가 눈앞에 보인다고 하면서, 길고 힘든 상황이 거의 끝났다고 했다. 존슨은 전쟁이 거의 자신들의 승리로 끝났다고 말했지만, 북베트남은 자신들이 패배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1968년 새해가 다가오자, 북베트남의 지도자인 호치민(Ho Chi Minh)은 다음과 같은 시를 낭독 했는데, 그 연설에는 여전히 독립과 통일에 대한 의지가 담겨있다.
“북과 남이 서로 경쟁하며
미제 침략자에 맞서 싸우세!
전진하세!
완전한 승리는 바로 우리의 것이네!”
레주언(Le Duan)을 포함한 북베트남의 지도부는 비밀리에 남베트남을 대상으로 한 대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특히나 레주언은 당 내부에서 총 공격을 강력하게 주장했고, 이 총공격으로 전쟁이 끝날 것이라 믿었다. 북베트남군이 지원하는 베트콩 부대들도 동시에 남베트남 전역의 도시와 군 기지를 공격할 예정이었다. 레주언은 만약 자신들이 공격을 시작하면, 남베트남의 민중들이 들고 일어나 사이공 정부를 무너뜨릴 것이라 장담했다. 1945년 8월 베트남 민중이 공산당의 지도 아래 일본 제국주의를 패퇴시키고, 베트남민주공화국의 선포를 알렸듯이 말이다. 만일 그렇게 해서 남베트남 정부가 패배하면 미군도 철수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 레주언의 생각이었다.
(레주언, 그는 구정 대공세를 강력히 밀었던 인물이다.)
(남베트남의 DMZ와 케산 기지)
1968년 1월 DMZ하고 라오스와 가까운 미군의 케산(Khe Sanh) 기지에는 대규모 미군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다. 주월미군 총 사령관인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는 북베트남군이 케산에 미군을 고립시켜 몰살하려 한다고 생각했다. 14년 전 베트민이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에게 했던 것처럼 말이다. 1월 21일 북베트남군이 케산에 있는 미군기지를 포격했다. 케산 포위전이 시작된 것이다. 당시 케산 포위전에 참전했던 베트남측 참전용사 카오슈안다이(Cao Xuan Dai)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미 해병대는 북베트남군한테 포위되어, 큰 난관에 빠지게 됐죠. 웨스트모어랜드는 이게 미국판 디엔비엔푸 전투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베트남 전쟁의 승패가 달린 전투라고 한 것이죠. 하지만, 당시 북베트남군은 병력 대부분을 이미 다른 곳으로 이동시킨 상태였어요.”
(북베트남군의 포격을 피해 숨은 미 해병대 대원)
(기지에서 포격을 지켜보는 미군들)
미 해병대는 케산 기지를 지키기 위해 온갖 화력을 쏟아 부었다. 미군 전투기가 포격을 가하는 북베트남군 진지에 맹렬한 폭격을 가했고, 미 해병대와 남베트남군 또한 포를 발사하여 북베트남군에 맞대응 했다. 그러나 사실 케산 기지에 대한 공격은 하나의 속임수였다. 사실 북베트남측은 남베트남 전역에서 총 봉기를 위한 준비를 비밀리에 준비하고 있었고, 남베트남 전역에 있는 혁명 세력에 무기와 물자가 비밀리에 전달됐다. 당시 공세에 베트콩으로 참전했던 베트남측 참전용사 응우옌 응옥(Nguyen Ngoc)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상부에서는 대대적인 도시 공격을 준비하라고 했어요. 그건 총 공세를 뜻하는 것이었죠. 우리는 도시 외곽에 자리를 잡고 있었기에, 수월하게 드나들 수 있었죠. 그래서 총 공세가 성공할 줄 알았어요.”
(구정을 즐기는 베트남인들)
(구정을 미리 즐기는 북베트남 군인들)
1월 30일 구정을 맞이하여, 베트남 전쟁은 잠시나마 비공식 휴전이 성립된 후였다. 따라서 남베트남군 중 수천 명이 설날에 휴식을 하러 고향으로 휴가를 떠났지만,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아니었다. 베트남측 참전용사 응우옌반통(Nguyen Van Tong)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는 설을 미리 기념했어요. 명절용 과자며 고기에 절인 숙주까지 먹었죠. 정말 맛있었고 다들 만족스러워했습니다. 우린 다음 날 밤에 사이공 강을 건너서 도시 서부로 행군했어요.”
(DMZ에 배치됐던 로저 해리스, 그는 13개월의 근무를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흥미롭게도 그날 미 해병대 상병 로저 해리스(Rogger Harris)는 13개월간의 근무를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는데, 비행기에 타고 돌아가던 중 북베트남군이 쏜 포탄이 빚발치는 모습을 보게 됐다. 이거는 북베트남측의 공격이었다. 당시 해리스는 북베트남군의 포격으로만 생각했고, 비행기에 이륙하여 상공에 뜨자 기뻐했다. 그렇게 무사히 다낭의 미군 비행장에 도착했고, 놀랍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다낭 비행장에서 베트콩 측의 화력 공세로 포격을 받고 있음을 알게 됐다. 드디어 베트남 전쟁의 터닝 포인트 중 하나인 구정 대공세(Tet Offensive)가 시작된 것이다.
(구정 대공세 당시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공격 지역)
(AK-47을 들고 시가전을 벌이는 베트콩)
(지붕 위에서 AK-47을 발사하는 베트콩)
1968년 1월 31일 새벽 8만 4,000명의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이 남베트남 44개 도의 수도 중 36개 도의 수도와 미군과 남베트남군 기지 수십 군데와 후에, 다낭, 사이공을 포함한 베트남의 6대 도시를 공격했다. 명절 기간에는 공격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미군과 남베트남군의 허점을 찌른 공격이었고, 그들의 예상을 완전히 빛나가게 한 공격이었다.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도 양측의 치열한 전투지대로 급변했다. 이로 인한 충격은 남베트남 사람들에게도 상당히 컷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상황을 지켜봤던, 즈엉반마이 앨리엇(Duong Van Mai Elliott)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시가전을 벌이는 남베트남군)
(시가전 도중 안전한 곳을 찾아 도망치는 민간인들)
(사이공 대통령궁에 배치된 남베트남군 탱크)
“우린 도심에서 총성을 들었습니다. 처음엔 다시 한 번 쿠데타가 일어난 줄 알았어요. 그러다가 베트콩이 사이공을 공격했다는 것과 아직도 공격이 진행 중이라는 것을 들었죠. 이에 충격을 심하게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우린 사이공이 남베트남에서 가장 안전한 줄 알았기 때문이죠.”
(지프차 밑에 엄폐한 미군 헌병)
(미 대사관을 되찾기 위해 전투를 벌이는 미군들)
(대사관 잔디밭 앞에서 시가전을 벌이는 미군 헌병)
(구정 대공세에 대해 발표하는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
사이공 전투에선 한 베트콩 부대가 대통령궁 근처까지 접근했지만, 남베트남군 측의 탱크에 저지당했다. 아무래도 남베트남측 화력에 못 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이공 전역은 이미 양측의 교전이 벌어지는 전쟁터였고, 베트콩들은 도심에서 시가전을 벌였다. 미군과 남베트남군은 이들을 차례대로 소탕해나갔고, 베트콩의 사상자도 급증했다. 그러나 전투 시작 몇시간 후 베트콩들 중 특공대 19명이 사이공에 있는 미국 대사관을 점거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들은 미국 대사관 벽을 로켓포로 쏴서 파괴한 다음 구내로 침투했으며, 1층을 점거한 뒤 총격전을 벌였다.
(베트콩 용의자를 즉결 처형하는 남베트남 경찰청장, 이 장면은 베트남 전쟁을 통틀어 유명한 사진 중 하나다.)
미군은 이들을 죄다 사살하거나 체포하는 데 궁극적으로 성공했다. 그러나 베트콩에 의해 미 대사관이 점령당하는 것이 사이공 현장에 있던 기자들에 의해 생중계가 됐고, 미국 전역으로 그 영상이 퍼졌다.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구정 공세 과정에서 일부 베트콩 부대가 계획적으로 남베트남 측 관리나 정부요인 그리고 군 장교와 그 가족들을 암살 및 살해하는 일이 벌어졌다고 한다. 이를 실행했던 인물 중 한 명인 응우옌반렘(Nguyen Van Lam)은 남베트남군 측에 포로로 붙잡혔고, 남베트남 경찰청장인 응우옌응옥로안(Nguyen Ngoc Loan)은 가차 없이 리볼버 권총으로 즉결처형했다. 응우옌반렘의 처형은 서방측 기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생중 됐고, 사진과 영상자료가 남게 되었으며, 서방 사회에선 베트남 전쟁의 부도덕성을 보여주는 증거물로 작용했다.
(구정 대공세 당시 미군 폭격으로 파괴된 베트남의 어느 마을)
구정 대공세는 점차 미군과 남베트남군이 막강한 화력 공세를 기반으로 반격에 나서면서, 베트콩이 점령했던 지역을 하나 둘씩 탈환해나가는 양상으로 변모했다. 물로 이 과정에서 폭격을 포함함 미군 화력에 의한 희생자가 만만치 않았다. 예를 들어 미군은 엄청난 공군력과 화력을 투입해서 메콩강 삼각주 벤쩨(Ben Tre)시에 머물던 베트콩 1개 연대를 몰아냈다. 그 일이 있은 이후 한 기자는 미군 소령의 말은 인용하며, “마을을 구하려면 파괴할 수 밖에 없았다”고 기사에 썼다. 나머지 지역들은 보통의 경우 며칠 안에 탈환됐지만, 남베트남의 중요한 도시인 후에(Hue)는 달랐다.
(후에 전투 당시 양측의 점령 지역)
(기관총과 포를 발사하는 미군 탱크)
후에는 역사적으로도 베트남의 중요한 도시로 당시 남베트남의 대도시 중 하나였다. 응우옌 왕조의 황궁이 여기에 있으며, 또한 남베트남 측 반지엠 반티우 시위가 빈번히 일어나던 곳이기도 하다. 그런 지역이 1968년 구정 대공세에서 전쟁터로 변모했다. 후에 전투는 1942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의 독일군과 소련군처럼 양측의 아주 치열한 공방전 속에서 1달간 전개됐다. 당시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의 목적은 후에에 임시혁명정부를 수립하고 재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군과 남베트남군은 이 지역을 폭격으로 파괴해서라도 되찾겠다는 의지를 보였으며, 이로 인해 전투가 격화되고 치열한 양상을 보였다. 당시 후에 전투에 참전했던 미 해병대 대원 빌 에어하트(Bill Ehrhart)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후에 전투 당시 미군 병사들)
(잔해 속에서 진군하는 미군 병사들)
“저는 베트남에서 12개월을 사살할 자를 찾으며 지냈는데, 그럴 기회가 없었거든요. 그런데 여기 와서 보니 저와 제 동료들을 죽이려는 세상의 모든 북베트남군이 여기에 다 모인 것 같더군요. 아주 차원이 다른 전투였죠.”
무튼 후에에서 미 해병대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 전선과 한국전쟁에서 경험했던 치열한 시가전을 다시 경험했다. 당연히 이 과정에서 베트콩을 몰아낸다는 이유를 들어 대규모 융단 폭격도 가했다. 양측의 총격전은 치열했고, 정말 근거리에서 적군을 사살하는 일이 빈번히 벌어졌다. 당시 여성이면서 베트콩으로 후에 전투에 참전했던 참전용사 응우옌티호아(Nguyen Thi Hoa)의 얘기도 들어보자.
“그들이 공격했을 때, 우리가 쏘지 않았더라도 분명히 그들이 우릴 쐈을 겁니다. 그래서 먼저 쏠 수밖에 없었어요. 그들이 보이면 먼저 총을 쐈죠. 3m 정도 떨어진 멀지 않은 거리에 있던 한 미군이 먼저 사격을 시작했는데, 저도 AK-47소총을 들어 조준한 후 총을 쏴서 그 병사를 사살했죠.”
(미군 폭격으로 파괴가 된 후에의 일반적인 모습)
미군 폭격의 양상도 극심했기에, 한 미 해병대원은 “모든 집의 담을 뚫고 앞으로 나가야 했어요. 그처럼 아름다운 도시를 망가뜨려야 한다는 게 안타까웠습니다.” 26일 간의 교전 끝에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후에에서 후퇴했고, 이로써 후에 전투도 끝났다. 미군의 폭격으로 폐허가 된 도시에서 최소 6,000명 이상의 민간인이 죽었고, 전체 인구 14만 명 중 11만 명이 집을 잃었다. 심지어 어떤 기자는 후에 도시에 남은 게 강으로 나뉜 파괴된 잔해들뿐이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후에 주변을 수색하는 미군 병사들)
(학살된 민간인의 시신을 찾기 위해 땅을 파는 사람들)
(시신을 옮기는 이들)
후에를 탈환하고 난 이후 대략 3월 쯤 미군들은 모랫바닥에 뭔가가 파묻힌 것을 발견했는데, 놀랍게도 민간인의 시신들이었다. 이들 중 일부는 뒤통수에 총을 맞고, 손이 묶여 있었다. 이런 시신이 발견되자, 미국과 남베트남 측에선 후에 전투 당시 도시를 점령했던 이들이 학살을 벌였으며, 이 과정에서 2,800명 이상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다고 주장했다. 다큐멘터리에서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당시 미국과 남베트남측이 발표된 숫자가 현실보다 지극히 과장되어 추산되었고, 심지어 미군의 폭격으로 죽은 이들까지 베트콩의 학살로 둔갑되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구정 대공세 당시 부상당한 병사들과 시신들)
현재 베트남 측에선 이에 대해 적잖은 반론을 내놓기도 한다. 거기다, 한국전쟁 당시 좌익들의 학살이 진상조사 과정에서 우익들이 한 것으로 상당히 많이 밝혀지기도 했으니, 후에 탈환 이후 남베트남군이 자행한 보복이 있었다는 점에서 진상조사 과정에서 또 다른 사실이 밝혀질 수도 있다. 그러나 숫자가 과장되었다 하더라도 베트콩이나 북베트남군에 의한 처형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닌 것으로 확인된다. 다큐멘터리에 나온 북베트남군 참전용사 호후란(Ho Huu Lan)는 후에 점령 당시 일부 남베트남 관리들에 대한 처형이 있었다고 얘기한다. 아래 그의 증언을 보자.
“후에에서 사이공 관리에 대한 진압과 숙청은 잔혹했습니다. 그 얘긴 잘 안 꺼내요. 전 기꺼이 얘기하지만, 보통은 다들 꺼리죠. 저는 제가 아는 진실을 얘기하는 겁니다. 제게 문제가 생길 수도 있으니 다큐멘터리를 신중하게 만들어 주십시오.”
1개월간 지속된 구정 대공세는 군사적 측면에서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참담한 실패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미군은 2,500명이 전사한 데 비해,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37,000명이 전사했다. 거기다, 남베트남 도시 민중들이 이 봉기에 적극 가담한 것도 아니었으며, 역으로 병력의 위치가 노출되면서 미군과 남베트남군이 효율적으로 소탕작전을 벌이는 역효과가 났다. 병력면에서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큰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장기적인 측면에서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정치적으로 승리했다. 왜냐하면 미국 내의 반전여론을 자극시킬 수 있었고, 여러 나라들에서도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는 반전운동이 강화됐기 때문이다. 구정 대공세 당시 현장을 직접 취재했던 CBS의 뉴스의 앵커 월터 크론카이트(Walter Cronkite)는 다음과 같은 보도를 했다.
“우린 베트남과 워싱턴에 있는 미국 지도자들의 낙관론 때문에 너무나 자주 실망해 왔기에 어려움 속에도 희망이 있다는 그들의 말을 더는 믿기가 어렵습니다. 이 모든 증거에도 불구하고, 승리가 가깝다고 말하는 건, 과거에도 틀렸던 낙관론입니다. 그렇다고 패배 직전이라고 말하는 건, 터무니없는 비관론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교착상태에 빠졌다는 게 흡족하진 않더라도 유일하게 현실적인 견론인 것 같습니다.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상태에서 빠져나올 유일한 합리적인 길은 승자로서가 아니라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아온 지조 있는 사람으로서, 협상에 임해야 한다는 겁니다.”
(베트남 전쟁에 대해 비관적으로 방송하는 월터 크론카이트)
(절망에 빠져있는 미국의 존슨 대통령)
구정 대공세로 인해 존슨 대통령은 대선에서도 위기를 겪게 됐다. 그는 재선하기 위해 다시 대선에 도전했는데, 민주당 선거에서 유진 매카시(Eugene McCarthy)를 겨우 꺾었으며, 그 다음에는 존 F. 케네디의 동생 로버트 케네디(Robert Kennedy)하고도 경쟁해야 했다. 이 둘은 존슨 정부의 베트남 전쟁 정책을 비판하며 지지를 끌어 모았었다. 20만 명 이상을 추가적으로 증강하려던 존슨은 13,500명만 베트남에 추가로 파병하는 것에 동의했고,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을 워싱턴으로 소환해 육군참모총장으로 임명했으며, 부사령관 크레이튼 에이브람스(Creighton Abrams)가 주월미군사령관을 맡도록 결정했다. 또한 부분적으로 북베트남에 대한 폭격을 중지한다고도 밝혔다.
(1960년대 당시 미국 민간 항공기들)
(당시 미국 공항의 모습)
(당시 미국의 택시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저격당한 당시의 사진)
구정 대공세 초기에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 로저 해리스(Rogger Harris)는 캘리포니아에 도착한 후, 자신이 살던 미국 보스턴으로 다시 돌아갔다. 보스턴 로건 공항에 도착한 후, 택시를 타고 집에 가려고 하는데, 택시들이 해리스를 무시했다. 한 백인 경찰관이 그를 위해 택시를 세우고 태워달라고 얘기했지만, 택시 기사들은 태워주질 않았다. 즉, 그 택시기사는 베트남에서 돌아온 해리스를 군인으로 보지 않고, 검둥이로 보며 인종차별을 한 것이다.
(킹 목사의 죽음을 밝히는 로버트 케네디)
(암살자에 의해 죽은 킹 목사, 이 사건으로 미국 내 인종전쟁이 심화됐다.)
(흑인 시위대를 진압하고자 투입된 미국 주방위군)
(체포작전을 같이 전개하는 미군과 미국 경찰)
(콜롬비아 대학교를 점거한 반전성향의 대학생들)
이처럼 여전히 미국에는 인종차별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해 4월 흑인인권운동을 위해 투쟁을 했던 마틴 루터 킹이 암살자가 쏜 총에 맞아 사망하는 일이 발생했다. 마틴 루터 킹이 암살당하자, 미국 내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분노했다. 미국에서 최소 100곳 이상의 마을과 도시로 나와 시위를 했다. 워싱턴 DC에선 백악관이 떨어진 두 곳이 불에 탔다. 미국 정부는 수만 명의 병력을 배치하며 시가지를 순찰하도록 했고, 이 과정에서 46명의 미국인이 사망하고 2,600명이 다쳤으며, 나머지 20,000명이 체포됐다. 그리고 같은 달 반전성향의 대학생들이 콜롬비아 대학교 건물 여러 채를 점거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로써 미국은 인종전쟁과 반전운동이라는 미국 내부의 갈등과 격렬한 전쟁도 동시에 치르게 된 셈이다.
(북베트남군의 두 번째 대공세 지도)
(반격하는 미군 병사들)
(워싱턴 DC에 있는 베트남 전쟁 메모리얼, 전쟁에서 앞으로 더 죽을 이들을 다큐멘터리가 암시하고 있다.)
(베트콩 용의자를 지목하는 남베트남군, 저 베트콩 용의자는 어떻게 됐을까?)
(잔해 속에서의 전투)
1968년 5월 5일 북베트남은 또 다른 공세를 게시했으며, 남베트남에 있는 119개의 목표물을 공격했다. 이는 작은 구정 대공세라고 불렸으며, 이 공격도 미군과 남베트남군이 차례대로 제압하면서 끝이 났다. 북베트남군과 베트콩 측에선 이 공격으로 3만 6,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러나 이것이 통일에 대한 북베트남과 베트콩의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한편 미국 본토에선 민주당 의원인 로버트 케네디가 인기를 끌며, 대선 유세를 했는데 그 또한 암살당했다. 여전히 베트남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앞으로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이 철수하게 되기까지 27,184명의 미군과 수십만 명의 라오스인과 캄보디아인 그리고 남북 베트남인이 더 목숨을 잃게 된다는 점에서, 비극은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6화 리뷰가 쓰다 보니 평소보다 많이 길어졌네요. 다음에 7화를 리뷰 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