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제네바 협정에 따라 베트남은 북위 17도선을 기점으로 남북으로 분단됐다제네바 협정에 따르면 2년 이내에 남북통일을 위한 총선거를 실시해야 했지만민중의 80%가 호치민과 공산당을 지지할 것을 알고 있던 미국의 아이젠하워 정부는 이를 거부했다그 과정에서 아이젠하워는 17도선 이남에 자신들의 꼭두각시 정권을 세우는데 그것이 바로 응오딘지엠을 대통령으로 한 베트남 공화국(Republic of Vietnam) 즉 우리가 알고 있는 월남 혹은 남베트남이다.

(남베트남군 관련 서적, 부제목을 보아선 남베트남을 찬양하는 서적으로 보인다.)

 

사실 남베트남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프랑스가 자신들의 식민주의 전쟁을 자유주의 대 공산주의의 구도로 포장하기 위해 세운 바오다이 황제의 베트남국의 연장선상이었다이른바 바오다이 해결책을 통해 프랑스는 베트남 남부에 베트남국을 세웠는데이는 미국에서 매카시즘이 확산되던 1949년의 일이었다당시 프랑스군은 안정화 전략(Pacification)이라는 명목 하에 자신들의 하수인을 기반으로 한 밀집촌을 세우고베트민이 활동하는 지역으로 의심이 되면 마을 주변에서 무차별 폭력과 부녀자 강간 그리고 집단 양민학살을 저질렀다또한 마을의 가축을 죽이고 불태우며 미국으로부터 지원받은 네이팜 폭탄을 투하했다이러한 프랑스군의 전략은 미국과 남베트남이 하나도 빠짐없이 이어받게 된다.

 

여기에는 프랑스군 휘하에 있는 군대가 있는데 그게 바로 바오다이 국가 소속의 괴뢰 베트남군이었다이 군대의 기지는 보통 남베트남 지역에 있었으며응우옌반티에우나 응우옌까오끼 그 외의 남베트남 측 군부나 지도부들 또한 달랏(Da Lat)에 있는 프랑스측 육군사관학교 출신들이 많다추가적으로 구정 공세 시기 베트콩 용의자를 재판도 없이 처형한 남베트남군 경찰 총장 응우옌응옥로안 또한 이쪽 출신이다.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제네바 협정에 따라 남북 분단되자 미국은 남베트남의 바오다이에서 자신들의 괴뢰 앞잡이 응오딘지엠으로 바꾸는 전략을 수립했고미국으로부터 막강한 지원과 후원자를 얻은 응오딘지엠은 토착 세력인 빈쑤옌과 까오다이 세력 그리고 호아하오 세력들을 하나둘씩 숙청하거나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전략을 썼다이런 과정 때문에 일각에서는 응오딘지엠이 친불파를 숙청했다.”는 말 안되는 소리를 하기도 하는데결과적으로 토착 친프랑스 세력의 힘을 약화시킨 것이지이것이 식민주의자들에 대한 인적청산을 의미하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남베트남군 관련 서적2, 베트남 전쟁 참전용사가 쓴 책이다.)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미국의 남베트남군에 대한 전략은 이러했다. 1971년 대니얼 엘스버그가 폭로한 펜타곤 페이퍼(Pentagon Papers)에는, “미국은 24만 명에 달하는 남베트남 정규군(ARVN)을 훈련시키는 한편재정 지원을 지속하고 필요한 경우에는 프랑스와도 협력하기로 결정했다.”라고 나온다이런 점에서 보더라도 남베트남은 말 그대로 프랑스 제국주의에서 미제국주의의 하수인 국가가 된 것 뿐이다.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된 이후 지배자 미제가 들어와 한반도 이남을 미제국주의 반공기지로 세운 것과 일맥상통한다한국에는 미제국주의 앞잡이 이승만이 있었다면남베트남에는 미제국주의 앞잡이 응오딘지엠이 있었던 것이다.

 

1954년 9월 제네바 회담 결과에 따라 인도차이나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군에 대한 남베트남의 원조가 사라지자 남베트남군에 대한 군사원조는 과거 한국군을 훈련시켰던 미국 오다니엘(O’Daniel)이 지휘하는 군사원조고문단이 맡게 되었다. 6개월 뒤인 1955년 2월에는 훈련교육단이 활동하기 시작했으며이러한 시점부터 미국은 남베트남을 자신들의 반공군사기지화 했다. 1954년 시점에서 남베트남군(ARVN)은 최소 20만 명 이상의 병력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1951년에는 공군, 1952년에는 해군 그리고 1954년 10월에는 해병대가 창설됐다적어도 공군과 해군은 프랑스 식민지배 기간에 만들어진 것이다즉 이런 행정기반에서 남베트남군은 군대 규모를 확장했다.

(구정 공세 시기 남베트남군)

 

1959년 이후 남베트남은 군대의 숫자가 확장되었는데, 1960년에 이르러 디엠 정권은 정규군 17만 5,000명과 민병대 10만 명자경단 6만 명 그리고 경찰력 4만 5,000명으로 병력 숫자가 급증했다. 1963년에는 50만 명의 규모를 자랑하는 군대로 성장했다그러나 이러한 군대 숫자의 증가가 주민이 남베트남 정권을 지지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비슷한 시기 응오딘지엠 정권은 가족정치를 실행하여 자신의 동생 응오딘누에게 경찰력을 부여했고누는 비밀경찰을 통해 공산주의자로 의심되는 이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하고 학살하는 야수적인 만행을 저질렀다그렇게 해서 죽게 된 사람이 수만 명에 달한다.

 

또한 응오딘지엠 정권은 케네디 행정부의 대통령 비서인 로버트 맥나마라의 기획에 따라 전략촌 계획(Strategic Hamlet)을 세웠다이 전략촌 건설 계획을 통해 과거 프랑스가 했던 전략을 그대로 이용했고이는 당연히 민중의 반발을 샀다쉽게 말해 아무런 이유도 없이 마을 단위의 코호트 격리를 공산주의자들 막는다는 핑계로 마구잡이로 한 것이다그 결과 1963년 말 기준에서 베트콩은 남베트남 지역의 75%를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베트남 근현대사를 연구한 저명한 역사학자 버나드 폴(Bernard Fall)에 따르면 1957년부터 1965년 4즉 남베트남에서 처음으로 북베트남 대부대가 발견된 것으로 전해지는 시기 이전까지이 사이에 15만 명이 넘는 베트콩이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이는 사실상 1965년 이전 미국과 남베트남이 저지른 대량 학살이라 주장했다즉 이 과정에서 죽은 건 베트콩뿐만 아니라 민간인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는 주장이다폴에 따르면 베트콩들은 미군 기갑부대네이팜탄제트폭격기그리고 구토유발 가스 등의 치명적인 환경 속에서 싸웠고이런 최신식 군사력 앞에서 베트콩과 무수히 많은 민간인들이 이 폭력의 희생자가 되었다.

(M-16 소총을 들고 있는 남베트남군)

 

응오딘지엠 정권이 급격한 군대 증가에도 불구하고 남베트남군이 민중에게 전혀 지지받지 않았다는 사실과 무능하다는 사실이 한 전투에서 밝혀졌는데그게 바로 1963년에 치러진 압박 전투(Battle of Ap Bac). 1963년 1월 2일에 치러진 압박 전투에선 최소 1/5이나 1/6의 우월한 병력과 최신식 APC 장갑차 그리고 헬리콥터와 미군 고문단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남베트남군은 83명이 전사하고 100명 이상이 부상당했다투입되었던 헬기 15대 중에서 14대가 손실을 입었으며이중 5대는 전투 현장에서 파괴되었다투입되었던 10대 이상의 APC 장갑차 중 3대가 파괴되었다반면 무기와 화력 그리고 병력에서 밀렸던 베트콩은 18명의 전사자와 39명의 부상자만 나왔다.

 

그 외에도 남베트남군은 1964년 12월에 치러진 빈지아 전투나 1965년에 치러진 동쏘아이 전투에서 베트콩에게 대패했다. 1964년 12월엔 수도 사이공으로 부터 30km 정도 떨어진 빈 지아에서 베트콩은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병력상으로 2.5배나 많은 남베트남군에게 큰 타격을 주고 전투에서 승리했는데베트콩은 32명이 전사했지만미군사고문단에 지원을 받는 남베트남군은 압도적인 장비와 화력에도 불구하고 201명이 전사했다심지어 빈지아 전투 소식을 들은 호치민은 작은 디엔비엔푸 전투라 표현할 정도였다. 1965년 5월 말에는 베트콩 부대가 꽝응아이 근처에 있던 남베트남군 여단을 매복 공격하여며칠 동안의 전투 끝에 남베트남군 2개 대대를 완전히 괴멸시키기도 했으며, 1965년 6월 남베트남군은 동쏘아이 전투에서 미정규군의 지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베트콩보다 3.5배나 더 많은 전사자를 내고 대패했다추가적으로 당시 전투에 참가했던 미군 20명도 같이 전사했다.

 

이처럼 남베트남군은 군대로써도 허접하기 짝이 없었다베트남 전쟁 기간 남베트남군의 탈영병 숫자도 결코 만만치 않았다미 국방부 자료에 의하면, 1966년 한 해에 12만 4000명의 남베트남 병사들이 탈영했다남베트남 지상군의 21%에 해당되는 숫자였다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 남베트남군의 탈영병 숫자는 수십만 명에 달했다한마디로 무능력하기 짝이 없는 군대였다역사학계와 군사학계를 막론하고 미국의 개입이 없었으면 1965년이나 1966년에 남베트남이 패망했을 것이라는 것이 지배적인 학설이다즉 남베트남이라는 나라는 1965년 린든 존슨 정부의 대대적인 군사개입을 통해 목숨이 10년 더 연장된 것뿐이었다.

 

1973년 파리 평화회담 1년 후인 1974년 북베트남 공산당은 통일을 위한 총 공세를 논의하여 1975년 3월에 실행했다실행하자마자 남베트남군의 주요거점인 부온마투옷이 5일만에 함락되고다낭과 후에 호이안 퀴논 나짱 등이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진격으로 단기간에 함락되었다최후로 형성된 쑤언록 방어선은 레민다오 준장 휘하의 남베트남군이 방어를 했지만얼마 지나지 않아 함락되었고북베트남군 총공세 개시 1달 만인 4월 30일 수도 사이공이 함락되면서 전쟁이 끝나고 남베트남이 패망했다마치 한국전쟁때 인민군의 진격에 1달 만에 임시수도 부산까지 밀렸던 그 역사가 비추어질 정도다한국의 경우 정부수립 2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일어난 일이라 최소한의 변론이 가능할지 몰라도 남베트남의 경우 군사력이나 장비면에서도 북베트남군에게 밀렸고미국의 막대한 지원을 받고서도 패망했다는 점에서 말 그대로 답이 더더욱 없는 국가였다.

(깃발을 들고 있는 남베트남군 대열)

 

거기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응오딘지엠을 초대 건국 대통령으로 세웠던 남베트남 공화국의 군부는 육군 중령 한 사람만 빼놓고 죄다 프랑스 식민군 출신의 민족반역자들이었다당시 100만 이상의 병력을 자랑했던 남베트남 군대의 대다수는 프랑스 식민지 시절 프랑스군에 복무했던 반역자들이었다. 1963년 압박 전투에서 남베트남군을 지휘했던 후인반까오(Huỳnh Văn Cao)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 프랑스군에 복무했고위에서 언급한 응오딘지엠을 죽인 즈엉반민(Dương Văn Minh) 또한 식민지 시절과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 프랑스군에서 복무한 인물이었으며남베트남의 4성장군이었던 까오반비엔(Cao Văn Viên)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 프랑스군에서 복무했던 인물이었다이처럼 남베트남군의 지도부는 프랑스에 빌붙어 민족반역의 길을 걸었던 반역자들의 집합체였던 것이다.

 

이러한 점을 보았을 때남베트남군은 그냥 미국의 지원으로만 간신히 버티던 부정부패하고 무능하기 짝이 없으며정통성이라곤 1%도 존재하지 않는 집단이었다이런 군대가 1954년 디엔비엔푸에서 승리를 쟁취한 호치민의 군대에게 패배하게 된 데에는 이러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이러한 이유에는 당연하게도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라는 문제가 들어가 있으며베트남 전쟁 참전 혹은 침략전쟁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한국의 반공주의자들이 항상 외면하는 아주 불편한 진실이다또한 이런 한심한 군대와 국가를 기념하며 미국과 호주 등에서 활동하는 보트피플들은 말 그대로 답이 없는 똥멍청이들이다.

 

참고문헌

 

미국의 대외정책론노엄 촘스키 에드워드 해르먼임채정(), 일월서각, 1985

 

전환시대의 논리리영희창비, 1999

 

베트남 10000일의 전쟁마이클 매클리어유경찬(), 을유문화사, 2002

 

새로 쓴 베트남의 역사유인선이산, 2002

 

호치민 평전윌리엄J.듀이커정영목(), 푸른숲, 2003

 

베트남과 한국의 반공독재국가형성사윤충로선인, 2005

 

리영희 평전김삼웅책보세, 2010

 

최고의 인재들데이비드 핼버스탬송정은 황지현(), 글항아리, 2014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올리버 스톤 피터 커즈닉(공저), 이광일들녘, 2015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I올리버 스톤 피터 커즈닉(공저), 이광일들녘, 2015

 

디엔비엔푸보 응우옌 잡강범두(), 길찾기,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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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엔비엔푸 전투 승리 67주년을 생각하며.🇻🇳🇻🇳🇻🇳

1954년 5월 7일 디엔비엔푸 요새가 함락되었다. 프랑스군 사령부가 있던 베아트리스 기지가 베트민에 의해 함락됐다. 사령관 드 카스트리를 포함한 디엔비엔푸의 프랑스군 사령부 인사들이 전부다 포로로 붙잡혔다.

20세기 최고의 명장 보 응우옌 잡 장군의 천재적인 지략과 강철같은 불굴의 정신은 20세기 세계사를 다시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전투에서 2,293명이 전사하고 11,721명의 최정예 부대 프랑스군이 포로로 붙잡혔는데, 아주 영광스러운 승리다.

100년간의 프랑스 식민지배를 끝낸 전투이자 위대한 승리가 바로 디엔비엔푸 전투다. 이 전투에서 베트남은 프랑스 뿐만 아니라, 부도덕한 식민주의를 지원한 미국도 무찔렀다. 민주주의라는 이름하에 부도덕한 개입을 한 미제국주의의 기만성을 아주 잘 보여줬다.

보 응우옌 잡 장군의 말대로 이 전투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제국주의에 맞서던 전 세계 사회주의 진영에겐 환영할 일이었고, 식민주의를 유지하려던 이들에겐 불행한 일이었다. 디엔비엔푸 전투는 지금도 제국주의에 맞서는 진보진영에게 자부심을 갖게 하는 위대한 승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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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 지하디스트 그리고 이슬람 - 한국인의 시각에서 보는
곽영완 지음 / 애플미디어(곽영완) / 2015년 3월
평점 :
절판


2014년과 2015년 전 세계를 놀라게 한 단체가 있다. 그 단체가 바로 테러리즘의 상징인 ISIS. ISIS는 이라크와 시리아 그리고 중동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사실상 국가 하나를 만들었었다. 또한 수많은 자원자를 전 세계로부터 끌어들였으며, 유럽과 서방지역에서도 ISIS에 가담하는 이들이 적잖게 있었다. 심지어 20151월 한국에 살던 김모군이 ISIS에 가담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한국 사회 또한 경악과 놀라움을 금치 못했었다. 거기다 이들은 청소년들이 즐겨하던(지금도 많은 이들이 즐겨하는) 게임인 GTA 5를 이용하여 청년들을 끌어들이는 시도도 했었다.

 

이들이 주도했던 사건 중에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2015년에 일어났던 프랑스 파리의 총기 테러였는데, 544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중에서 최소 130명이 사망했다. 당시 이 소식을 접했던 나 또한 충격 받았었다. 왜냐하면 그 사건이 일어나기 1년 전에 프랑스 파리를 관광했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요르단 조종사를 산채로 화형하거나 서방측 인질들을 참수하는 영상 등은 참으로 잔혹하고 충격적이었다. ISIS의 급부상과 더불어 이슬람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이나 혐오도 급상승했던 것 같다. 그 예시로 2018년 예맨 난민이 한국에 들어왔을 때, 난민수용을 반대하는 측에선, “이슬람이 테러를 일으킬 거다.”라는 허무맹랑하고 인종혐오적인 모습을 보였었다. 물론 옳지 못한 관점이지만, 이것은 ISIS의 부정적 영향 때문이기도 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모습들이 대중매체를 통해 사람들에게 전파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ISIS는 왜 발생한 것이고, ISIS가 활동하는 지역 중동은 전투지역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이슬람은 무엇일까? 이들의 역사는 어떠한 과정을 거쳤을까? 왜 이들은 자살폭탄테러를 포함한 각종 테러 그리고 무자비한 살상을 일삼는 것일까? 누군가는 ISIS를 생각하다보면 이러한 질문에 답을 찾고 싶어 할 것이다. 나 또한 그러하고, 실제로 그러한 답을 찾고자 할 때가 있었던 것 같다. 확실한 건 질문에 대한 답변을 모르는 사람들이 매우 많다는 사실이다.

 

‘IS 지하디스트 그리고 이슬람ISIS의 존재와 그들이 추구하는 사상, 시아파와 수니파의 갈등, 중동의 역사 그리고 이슬람에 대한 역사 및 종교에 대해 개략적으로 서술한 책이다. 책의 저자는 복잡 다다한 이 내용들을 일반인들이 알기 쉽도록 쓰기 위해 자신 나름의 노력을 했다. 나는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이슬람교에 대한 지식이 너무나도 없었다. 나는 이슬람교의 기본적인 교리가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 조차 몰랐다. 그저 돼지고기를 더럽게 여겨 먹지 않고, 여자들은 히잡을 강요당하며, 금식날이 있다는 단편적인 지식 정도였다. 이들이 금지된 행위라 여기는 하람에 이자 받기가 금지돼 있다는 것과 이슬람교도의 기본적인 의무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수입의 일정 부분 기부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책은 중동사의 개략적인 역사를 담고 있는데 그 범위는 현재 유라시아와 중동 그리고 이집트 리비아를 포함한 아프리카까지 역사를 포괄시키고 있다. 중동의 역사도 서구 열강의 침탈과 미소냉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된다. 특히 중동의 현대사적인 측면에서 1948년 건국된 이스라엘은 아랍민중에게 여러 가지 해악을 끼쳤다. 이스라엘이 끼친 해악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이는 단순히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서 전개한 인종청소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1차부터 4차까지 전개된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전 아랍 국가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미국으로부터 지원받은 군사력을 토대로 아랍 연합군을 괴멸시키는 무시무시한 모습을 보였다. 6일 전쟁이라고 불리는 제3차 중동전쟁에선 이스라엘이 이집트 나세르 측의 항공기 수백 대를 한 번에 격파하는 무시무시한 모습을 보였다.

 

그 외에도 아프가니스탄 전쟁이나 특히 미국이 일으킨 이라크 전쟁의 경우 ISIS를 등장하게 된 계기였다. 사실 ISIS는 오사마 빈라덴이 이끌었던 알카에다의 한 분파에 속했던 집단인데, 2011년 오사마 빈라덴이 사망하면서 급부상했다. 또한 2003년 미국이 일으켰던 이라크 전쟁은 아무런 성과 없이 4,500명의 미군 전사자와 최소 2조 달러 비용을 내고 끝났다. 거기다 이라크 전쟁 명분으로 내세웠던 신무기는 거짓말이었고, 시아파와 수니파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한 채 통치 또한 막장으로 해서 바트당 해체 이후 혼란과 분란만 만들어 놓았다. 즉 이라크 침공은 모든 면에서 실패한 전쟁이었으며, 매우 부도덕한 전쟁이었다. 이러한 미국의 무책임한 행위도 ISIS의 등장원인이었다.

 

정리해보자면 중동문제의 결정적인 원인에는 항상 미국과 이스라엘이 있다. 이들이야말로 평화와 안정을 망치는 제1의 요소이다. ISIS의 등장도 그러하다. 책에서 아주 짧게 언급되지만 2011년 민주화 시위를 가장한 친서방 폭동이었던 반카다피 운동도 결국 부유했던 리비아를 말 그대로 개판5분전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 결과 현재 리비아 민중 70%는 카다피를 그리워하고 있는 상황이다. 나머지 중동 국가들도 서방의 농간과 개입으로 피해를 많이 보았다. 그리고 서방의 개입 이후 ISIS라는 문제도 그 나라에 같이 남게 되었다. 이라크, 리비아, 시리아 등이 그러하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이 책은 ISIS와 더불어 중동과 이슬람의 문화와 역사 그리고 현재상황과 앞으로의 전망을 설명한 책이다. ISIS가 급부상할 때 나온 책이라 근래의 중동 상황을 알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는 다소 부족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중동과 이슬람의 문화와 역사 그리고 분쟁의 기본적인 배경과 맥락을 쉽게 알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ISIS와 중동 그리고 이슬람에 대해 잘 모르지만,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 입문서로서 이 책의 일독을 권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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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 시기 한국군이 자행한 민간인 학살이 국내에 공론화 된 것은 1990년대였다. 1990년대 이 민간인 학살을 공론화한 인물은 바로 베트남에서 유학하며 이 문제에 대해 깊이 연구했던 구수정 박사를 통해서였다. 구수정 박사에 따르면 대략 9,000명 이상의 베트남 민간인이 학살당했고, 베트남 전쟁 시기 한국군이 주둔했던 꽝남과 꽝응아이 그리고 빈딘성 일대에서 학살이 벌어졌다고 주장했다.

 

이를 통해서 베트남 전쟁 한국군 민간인 학살은 한국과 베트남 양국간의 외교적인 문제로 비화되기도 했다. 이를 통해 국내에 한국군 민간인 학살이 벌어졌던 마을에는 주민들이 세운 증오비나 위령비가 있고, 그 피해자들이 적잖게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이에 따라 한국 내에는 우리도 가해자였다는 인식이 생겼고, 베트남 전쟁 민간인 학살 문제는 일본의 침략이나 위안부 문제와 더불어 같은 선상에서 이슈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국내에서 사회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인 측면에서 한국군 민간인 학살이 끊임없이 문제제기가 되고, 국민들 사이에서 반성해야 한다는 인식이 생겼지만, 인터넷 상에선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을 부정하는 인식이나 여론이 생겼다. 대표적인 예가 현재 위키 사이트들 중에서 가장 접속률이 많은 나무위키가 그러하다.

 

나무위키에 있는 '베트남 전쟁/한국군/논란' 문서에 들어가 보면 굉장히 긴 장문의 글이 적혀있다. 이 장편의 문서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은 증거가 없고, 대부분 거짓 증언이나 과장증언에 기반한 것이다."라는 주장이다.

 

대표적으로 이들이 드는 예시 중 하나가 빈안 학살 중 일부인 '고자이 학살'이 그러하다. 이들이 고자이 학살에 대해 하는 이야기중 하나가 현재 고자이 학살 현장 벽화에 그려진 맹호부대 군인의 마크가 맹호부대 마크가 아닌 남베트남군 특수부대인 레인저 부대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고자이 학살이 한국군이 한 학살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의 출처를 찾아보면 베트남 전쟁 참전용사들의 일부 주장에 기반한 것이다. 물론 마크를 자세히 보면 그렇게 보이기도 하지만, 고자이 학살 현장 근처에 살던 주민들이나 피해자 대다수가 한국군이 했다고 주장하기에, 남베트남군이 벌였다고 결론내리는 것은 옳지 않다.

 

또한 이들은 베트남 전쟁 당시 주월한국군 총사령관인 채명신의 말을 인용하기도 한다. 즉 채명신이 "한국군은 100명의 베트콩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한명의 양민을 보호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이 한국군의 기본적인 구율로써 자리잡은 것은 아니었다. 한홍구 교수의 저서 <대한민국사>에 따르면 1966525일 주월한국군사령부가 발간한 전훈집에는 부락은 모든 적활동의 근거지이며, “게릴라의 보급, 인적자원 및 정보수집의 근원은 부락에 놓여 있으며 베트콩 하부구조의 기반은 부락과 주민이다라고 강조했다. 또한 당시 베트콩 포로를 무단으로 처형했던 참전용사 김영만은 "채명신의 주장은 병사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라고 증언하기도 했다.

 

거기다 나무위키 측 자료들을 읽어보면 인용된 출처가 명확하지 못하다. 한국어 위키백과에 있는 퐁니퐁넛 학살이나 빈호아 학살 그리고 하미마을 학살 등을 살펴보면, 최소한 부정론자들이 비하하는 한겨레나 그외의 다수 서적들이 인용되어 있는 반면 나무위키 파일은 그런 수고조차 없다. 또한 가끔씩 '빨갱이'와 같이 자극적인 감성적 단어들도 자주 보인다. 이러한 매체의 영향을 받아 유튜브나 네이버 뉴스 등에서는 한국군 민간인 학살을 부정하는 댓글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이들이 퍼오는 자료들 또한 나무위키에 있는 내용들이 대다수다. 쉽게 말해 나무위키에서 만들어진 반공주의적으로 각색된 가짜뉴스들이 재생산 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영향으로 위키피디아에서도 학살 부정론자들의 반달행위가 도를 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한국어 위키피디아에서 토론할때 가져오는 자료는 사실상 없는 수준이고 나무위키에서 하는 일반적 주장들을 그저 앵무새 처럼 반복하는 수준이다. 출처가 있는 자료를 퍼와봤자, 채명신의 언급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점을 생각해보았을 때, 나무위키를 포함한 일부 인터넷 사이트의 내용들은 상당히 출처가 부족한 내용들이고, 일부 극우주의자들의 주장들을 사실인 것 처럼 포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한국군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이 문서상으로는 부족한 건 맞다. 그러나 미국의 미라이 학살도 공론화 되기 전에는 100명 이상의 베트콩 사살로 간주되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실제로 당시 베트남인들은 한국군에 대해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프랑스군의 용병으로 와서 잔혹한 짓을 했던 아프리카측 병사들을 보는 입장과 비슷했다. 응우옌 비엣 타인의 저서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는다>에 나온 내용을 인용하겠다.

 

"미국인들보다 더 위험한 것은 미국인 관할을 순찰하던 한국인들이었다. 왜냐하면 우리 마을 출신의 한 아이가 그들의 부대로 걸어 들어가 몸에 묶고 있던 베트콩 폭탄을 폭발시켰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은 마을 아이들에게 끔찍하게 보복했다. 그 사건 이후에, 한국인 병사들이 학교로 가서 소년 몇 명을 끌고 나와 우물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본보기로 삼기 위해 그 속에 수류탄을 던져 넣었다. 이런 짓을 하는 한국인들이 마을 사람들 눈에는 프랑스인들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따라다니면서 더 거칠고 비열하게 굴었던 모로코인들처럼 보였다. 2차 대전 때의 일본인들처럼, 한국인에게는 양심이 전혀 없어 보였고, 무자비한 살인기계로서 임무를 수행하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나라를 지저분한 거래를 할 수 있는 딱 알맞은 장소 정도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출처: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는다 p.198~199

 

베트남 전쟁 한국군 민간인 학살에 대한 부정론은 매우 비양심적이여 절대로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이들의 태도나 주장은 박정희 시대 형성된 반공주의적인 입장과 똑같다. 이러한 태도를 가져선 안된다. 따라서 나무위키를 포함한 일부 인터넷에 있는 내용들은 사실이 아니며, 비판의 대상이 되야할 문제다. 따라서 한국군 민간인 학살에 대한 부정론은 비판해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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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가 대학에 들어가 1학년이 되었을 때에는 군부대 입소 훈련이라는 것을 받아야 했다. 마침 변화의 조짐이 드러나는 때였던지라 처음에는 거부해야 한다는 의견이 우세했지만, 결국 선배들은 더 큰 목적을 위해 눈물을 머금고입소 훈련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결정을 내렸다. 주로 낮에는 군사 훈련을 받고 저녁에는 정신 교육을 받았는데, 어느 날 저녁 베트남의 이른바 보트피플과 관련된 이야기를 영상으로 틀어주었다. 보트피플이란 베트남 통일 이후 작은 배로 베트남을 탈출한 난민을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강당 스크린에는 어떤 보트피플이 지나가던 큰 배에 구조를 애걸하던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아마 거기에, 봐라, 북베트남이 적화통일을 하고나니 저 사람들은 고국에서 쫓겨나왔을 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받아주지 않아 바다 한가운데서 오갈 데 없는 꼴이 되지 않았느냐, 하는 내레이션이 붙었을 것이다.

 

그때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둔한 편이었던 옮긴이는 아무 생각 없이 그 화면에 상당히 감명을 받았던 것 같다. 그냥 감명만 받는 것으로 끝냈으면 좋았을 텐데, 둔할 뿐만 아니라 경솔하기까지 했던 옮긴이는 그런 느낌을 입 밖에 내어 말로 표현했던 것 같다. 그러자 근처에 앉아 있던 예리한 친구가, 아니, 어떻게 그런 무지한 이야기를 할 수가 있느냐, 여태 전환시대의 논리도 안 읽어보았느냐, 하는 취지의 이야기를 했다. 무안을 당한 꼴이라 그 자리에서는 무시하는 척했지만, 둔하고 경솔할 뿐만 아니라 귀까지 얇았던 옮긴이는 얼마 후에 그 전환시대의 논리라는 책을 구해 보았고, 물론 당시의 다른 많은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머릿속에 들었던 것들이 물구나무를 서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옮긴이가 경험한 것을 당시 유행하던 말로 의식화라고 부를 수 있다면, 정부와 전환시대의 논리-저자의 의도와는 관계 없이-는 한 젊은 대학생의 의식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했던 셈이다. 물론 공정한 경쟁은 아니어서, 정부는 저자를 가두고 책을 판매 금지하는 폭력을 불사했다. 뒤집어 생각하면 당시 정권은 폭력을 행사해서라도 베트남 전쟁에 대하여 정부의 해석과는 다른 해석이 들어설 여지를 남기고 싶어하지 않았고, 그만큼 이 문제를 중시했던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실제로 베트남전을 둘러싼 정부의 선전은 엄청났던 것 같다. 지금이나 그때나 노래 가사 외우는 일에 결코 유능하달 수 없는 옮긴이가 가시는 곳 월남땅 하늘은 멀더라도 한결같은 겨레 마음 님의 뒤를 따르리라하는 노래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도 그 증거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겠다. 단지 말과 노래로 하는 선전뿐이었으랴. 아버지가 월남에 갔다온 친구네 살림은 뭔가 모르게 윤택하게 바뀌었고, 가전제품도 상표와 광택이 눈부셨다. 물질에 별 관심이 없었을 어린아이 눈에 그런 것이 보였을 정도이니, 당시 어른들에게 월남을 통해 유입되는 는 어떤 선전보다 강력한 힘을 발휘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에 대한 해석이 중요했던 것은 월남 파병의 정당화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무엇보다도 베트남 상황과 한반도 상황이 여러모로 비슷해 보인다는 점이 문제였는데-사실 한반도와 베트남은 근대 이전 중국과의 관계에서 겪었던 고통에서부터 근대의 분단과 전쟁에 이르기까지 비슷한 점들이 금방 눈에 들어온다.-이 닮은꼴에 주목한 사람들에게는 한쪽의 상황 해석을 다른 쪽 상황에 그대로 적용하고 싶은 유혹, 또는 한쪽의 상황 전개를 다른 쪽에서 이후에 전개될 상황에 대한 예시로 받아들이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사실 누구보다도 이 유혹에 깊이 빠져든 쪽, 또는 이 유혹을 반긴 쪽은 바로 당시의 정권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1975년에 남베트남 정부가 무너지자 이것을 구실로 민주적 권리들을 억압하는 긴급조치 9호를 발동한 것이 그 증거이다. 바다 건너 나라에 이데올로기 문제를 구실로 파병을 한다는 것도 그렇지만, 그 먼 나라에서 발생한 사건을 이유로 정변에 가까운 사태를 일으킨 것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은 아닌 만큼, 당시 정권의 남베트남과의 동일시는 상당한 수준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당시 정권만큼은 아니겠지만 옮긴이도 이 책을 번역하면서 베트남 역사와 우리 역사의 비슷한 점에 새삼 놀랐고, 또 그런 유사성을 배경으로 우리와 다른 점들이 더욱 도드라지게 부각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 두 가지를 비교해 가며 이 책을 읽는 것이 상당히 자극적인 독서 경험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런 맥락 덕분에, 즉 이 책을 읽는 우리의 의식 속에서 우리나라의 역사가 계속 참조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호치민이라는 인물 역시 좀더 생생하게, 강한 환기 효과를 발휘하며 다가온다. 이 점에서는 이 전기의 저자인 윌리엄 J. 듀이커에게 고마워해야 할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듀이커가 유물을 세심하게 붓으로 털어내어 발견된 모습 그대로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작업을 한 전기 작가라는 점이다. 바랜 부분을 채색하거나 떨어져 나간 부분을 땜질하는 대신 바랬으면 바랜 대로, 조각이 떨어져 나갔으면 떨어져 나간 대로 그대로 두기 때문에 그가 그린 초상에는 빈 곳이 많으며, 그 빈 곳은 읽는 사람이 상상력으로 채워나가야 한다. 이것은 특히 베트남이나 호치민처럼 우리와 각별한관계에 있는 대상의 경우에는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 된다는 것이 옮긴이의 판단이다.

 

옮긴이를 포함한 우리나라 독자들이 우리나라 상황을 배경에 깔고 읽는 것처럼, 저자인 듀이커 역시 학자로서 엄밀성중립성을 지킨다 하지만, 베트남과 나름대로 특별한 관계를 가진 미국의 학자로서 이 전기를 써나갔다는 점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이 책이 저자가 자신의 관점 또는 특정한 미국인 집단의 관점을 강요하려 한 삼류 전기가 아님은 이미 말한 바 있다. 그러나 따지고 들자면, 저자가 30년에 걸쳐 호치민이 한 식구로 느껴질 정도로그 인물과 베트남을 연구해온 동기 자체가 객관적이지는 않으며, 미국인의 입장을 의식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 자체도 의식하는 한 방식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따라서 독자들은 이 일급의 전기를 읽는 도중 가끔 으슥한 곳에서 안경을 쓴 미국인 노학자의 모습과 마주치게 될 텐데, 그것은 독자에 따라 반가운 만남이 될 수도 있고 불쾌한 만남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만남의 종류가 어떠하든, 또 저자가 집요하게 파고드는 민족과 계급의 관계 같은 어려운 문제에 대한 답이 무엇이든, 시대의 과제를 감당하며 정직하고 겸허하게 살다간 사람들의 긍지는 그 무엇으로도, 심지어 세월로도 훼손할 수 없다는 옮긴이의 독후감에 독자와 저자가 흔쾌이 동의할 것으로 믿는다.

 

번역 과정에서 베트남어와 베트남 문화에 대해 조언해주신 최귀묵 선생님에게 감사드린다.

 

호치민 평전 후기

역자 정영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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