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당시 태평양은 미국과 일본이 교전을 벌인 전투 장소였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공격 하자, 미국은 일본에게 선전포고 했다. 1939년 9월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한 시점부터 미국은 27개월 동안 중립주의 노선을 유지했지만, 진주만 기습 공격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진주만 기습 공격 이후 일본은 홍콩과 말레이시아 싱가폴, 버마(현재 미얀마), 괌, 필리핀, 인도네시아, 파푸아뉴기니 등을 단기간에 점령했고, 더 나아가 태평양의 중간인 미드웨이와 미국령 알래스카주의 알류샨 열도까지 점령했다. 1941년 12월 당시 일본은 영국령 길버트 군도의 타라와 환초와 타라와 근처에 있는 마킨 환초를 점령했다. 오늘은 타라와 전투가 어떻게 전개되었고, 이곳이 한국 역사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타라와의 위치: 말 그대로 아시아쪽 태평양 한 가운데에 위치한 섬이다.)
사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이 점령한 태평양 영토를 보면 매우 광범위하게 걸쳐 있다. 서쪽으로는 영국령 인도를 위협했고, 남쪽으로는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를 위협했으며, 북서쪽으로는 미국령 알래스카를 위협했다. 또한, 일본 해군은 1941년부터 1942년 초까지 미국과 영국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뒀다. 대표적으로 1942년 2월 27일 인도네시아 자바해에서 일본은 영국·미국·네덜란드·오스트레일리아를 상대로 경순양함 2대와 구축함 3대를 격침시키고, 중순양함 1대(당시 투입한 연합군 전력은 중순양함 2대 경순양함 3대 구축함 9대다.)에 심각한 손실을 야기했다. 또한, 연합군 병사 2,300명이 전사했다. 반면에 일본군은 36명이 전사하고 구축함 한 대가 심각하게 손실 당했다.
(타라와 해변의 모습)
(상공에서 촬영한 타라와의 모습)
그러나 이처럼 일본이 승승장구하던 전황이 바뀐 것은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이 미 해군에게 대패하면서였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군은 11척의 전함과 8척의 항공모함(이 중 4척이 주력 항공모함) 22척의 순양함, 65척의 구축함, 21척의 잠수함을 동원했다. 이 해전에서 일본 해군은 주력 항공모함 4척을 잃고, 중순양함 1대를 잃었으며, 350대의 항공기를 잃었다. 이렇게 되면서 일본은 태평양 전쟁에서 점차 패배하기 시작했다. 미드웨이 해전 이후 2달 뒤 치르게 된 과다카날 전역은 일본이 미국과의 지상전에서도 패전하고 있음을 시사했다. 과다카날 전역에서 미군은 7,000명이 전사하고 일본군은 2만 명 가까이 전사했으며, 결국 일본군은 과다카날 전투에서 철수했다.
미군이 과다카날 전투에서 승리한 것은 1943년 2월 쯤이었다. 사실 이 시점은 전세가 추축국에서 연합국으로 유리해지는 시점이었다. 1943년 당시 전황을 보면,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이 소련에게 패배했고, 더 나아가 소련은 8월에 쿠르스크 전투에서 대규모 전차전을 치른 뒤 승리했다. 또한, 에르빈 롬멜의 북아프리카 전투가 영미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고, 그해 7월에 연합군이 이탈리아의 시칠리아섬과 본토에 상륙했다. 이 과정에서 히틀러의 동맹인 무솔리니가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에게 축출당하고 연합군이 접수한 이탈리아 남부에는 피에트로 바돌리오가 이끄는 정부가 세워졌다.
(타라와 전투 관련 그 당시 미국의 보도)
따라서 1943년는 제2차 세계대전에 있어서 전황이 뒤바뀐 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일본이 마킨 환초와 타라와를 점령한 것은 1941년 12월이었다. 비록 1942년 8월 중순에 미군이 마킨 환초섬에 있는 일본군 기지를 급습한 적은 있지만, 이 곳을 점령하지는 못했다. 1943년 전황이 급변하면서 미 해군 지도부는 일본 본토 및 일본이 점령한 필리핀이나 인도차이나 혹은 대만이나 오키나와를 거쳐 일본 본토로 가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었다. 즉, 그 과정에서라도 반드시 점령해야 하는 곳이 바로 길버트 제도였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1943년 11월 20일 미군은 타라와 섬과 마킨 섬 두곳을 그날 동시에 상륙 및 공격했다. 그 당시 미군은 2척의 항공모함, 1척의 경항공모함, 5척의 호위항공모함, 3척의 전함, 8척의 순양함, 14척의 구축함, 17척의 수송선에 미 해병 2사단을 동원했다. 이런 화력을 동원했음에도 미군은 첫날 상륙에서 일본군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혔다. 그 당시 타라와에는 일본군 5,000명이 주둔하고 있었고, 미군이 일본군의 대포와 기관총 공격에 고전했다. 이날 상륙한 미군 중 500명이 전사하고, 1,000명이 부상당했다.
(타라와에 상륙한 미군 사진: 미군은 사흘간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타라와를 점령했다.)
(타라와에 상륙한 미군과 수륙양용 장갑차)
(타라와 해변에 널부러진 미군 시신들)
미군 군함의 함포가 일본군 진지를 공격했지만, 일본군 거점을 부수지 못했기에, 결국 거점을 점령하는 것은 미 해병대 병사들이었다. 상륙한 다음날의 전투는 탱크와 수륙양용 장갑차의 지원을 받는 미 해병대가 일본군의 거점을 점령하는 식의 전투가 벌어진 것이다. 영국의 군사사학자인 존 키건은 책에서 “타라와는 일본군이 지키는 가장 작은 섬을 차지하려는 싸움조차도 얼마나 무시무시할 수 있는지를 미 해병대에 가르쳐준 전투였다.”고 서술했다. 미 해병대는 일본군의 토치카와 벙커 그리고 참호의 방어를 돌파하여 점령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적잖은 전사자가 속출했다. 그러나 숫자로 보면 미군이 일본군 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다. 일본군은 5,000명인데 반해, 총 상륙한 미군은 18,000명이었기 때문이다. 타라와 전투의 치열함은 종군기자 로버트 셰로드의 다음과 같은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는데, 아래의 내용을 보자.
“해병대원 한 명이 방조제를 뛰어넘어 코코넛 통나무로 만들어진 특화점 안에 TNT(폭약) 몇 덩이를 던져 넣기 시작했다. 해병대원 두 명이 화염방사기를 들고 방조제를 기어올랐다. TNT 또 한 발이 특화점 안에서 터져 연기와 먼지가 뭉게뭉게 솟았고, 카키색 군복을 입은 사람이 옆 출입구에서 뛰어나왔다. 그를 기다리고 있던 화염방사기에서 뿜어 나온 강렬한 불길이 그를 휘감았다. 화염이 그에게 닿자마자, 그 일본놈이 필름 조각마냥 확 불타올랐다. 그는 즉사했지만, 까만 숯이 되어 거의 아무것도 남지 않은 다음에도 그가 찬 탄대 안에 든 총탄이 꼬박 60초 동안 폭발했다.”
(게임 메달오브아너 퍼시픽 어썰트에 등장한 타라와 상륙 장면-1)
(게임 메달오브아너 퍼시픽 어썰트에 등장한 타라와 상륙 장면-2)
(게임 메달오브아너 퍼시픽 어썰트에 등장한 타라와 상륙 장면-3)
타라와 전투 상륙 이틀째 되던 날 미 해병대원은 1,000명이 죽고 2,000명이 부상당했다. 이 무렵 일본군 일부가 바리키리 섬에서 타라와의 베티오 섬으로 지원차 접근하고 있었지만, 미리 정보를 입수한 미 해병대가 항공 지원과 전차, 곡사포의 지원을 등에 업고 이들이 상륙하려는 순간 공격하여 일본군 부대를 전멸시켰다. 타라와 전투가 후반부로 접어들 무렵 일본군은 미군에 맞서 이른바 반자이 돌격(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면서 총검을 찬 소총을 들고 자살돌격을 하는 행위)을 감행했다. 당연히 총기 화력에서 일본군보다 압도적인 미군은 일본군의 반자이 돌격을 무력화했다. 결국 타라와 전투는 11월 23일에 종결됐다.
타라와 전투에서 미군은 총 1,700명이 전사하고 2,000명 이상이 부상당했다. 추가적으로 호위 항공모함 1척이 침몰했다. 그에 반해 타라와에 주둔했던 5,000명 가까이 되던 일본군은 사실상 전멸했다. 타라와 전투는 태평양 전쟁을 통틀어 일본군 생존율이 가장 낮은 전투였다. 1970년에 미국에서 태평양 전쟁 통사를 집필한 존 톨랜드의 저서에 따르면, “5,000명의 일본 방어병력은 거의 다 전사했고, 미군에게 포로로 붙잡힌 일본군은 17명 밖에 안됐다.”고 한다. 이걸 일본군 생존자 비율로 계산하면, 0.34%다. 말 그대로 병력 전부가 전멸했다고 봐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그 외에 일본군 뿐만 아니라 노동 병력 및 비전투원 병력의 생존률을 합쳐도 0.6%를 넘지 않는다. 이것이 어느 정도로 처참한 비율이냐면, 이후 치르게 될 이오지마 전투에서 일본군의 생존률은 1.2%였고, 타라와 이전에 치른 과다카날 전투가 2.8%였으며, 태평양 전쟁의 미군-일본군의 마지막 전투인 오키나와 전투가 12%를 기록했다. 말 그대로 타라와 전투는 일본군 전원이 옥쇄했다는 말이 과장이 아님을 보여준 참혹한 전투였다.
(비디오 머그에서 보도한 타라와 전투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 관련 영상)
(2019년 타라와 관련 한겨레 기사)
타라와 전투는 잘 알려지지 않은 전투지만, 우리에게 있어 절대로 잊지 말아야할 역사가 있는 전투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 전투에서 죽은 사람은 일본군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강제징용으로 끌려온 식민지 조선인들도 전쟁 속에서 죽었다. 타라와 전투에서 미군은 포로 145명을 붙잡았다. 즉, 앞서 언급한 17명의 일본군 포로를 제외한 나머지 128명이 조선인 강제징용 노동자들이었다. 존 톨랜드에 따르면, 이것보다 1명이 더 많은 129명의 조선인 노동자가 포로로 잡혔다고 한다. 최소 1,000명 이상의 조선인이 이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는데, 기록에 따라선 타라와로 끌려온 조선인 노동자가 1,400명이 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즉, 1,200명 이상의 조선인 노동자가 전투 과정에서 사망한 것이다.
(2023년 12월 국내에 열린 타라와 전투 강제징용 희생자 추모제)
2019년 10월부터 타라와 지역에서 전사한 조선인들의 유골을 찾아오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2019년 한국의 한겨레 기사에 따르면, 일본 정부가 공식 확인한 한국인 희생자는 586명이라고 한다. 2018년 12월 행안부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은 타라와 전투 강제동원 피해자의 유가족 391명에게 유전자 정보 채취를 요청했고 이 가운데 184명이 동의해 참여했다. 그렇게 해서 2019년 3월 법의학·법유전자·법화학 전문가를 유해가 보관된 타라와와 하와이에 보내 아시아계 희생자 유해 시료(뼛조각) 150여개를 가져왔으며, 유해를 국내로 가져올 계획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2020년 코로나 바이러스가 퍼지면서 연기되었다가, 2023년 12월에 이르러 그 당시 희생된 조선인 유골을 봉환했다. 한국과 타라와의 거리는 6,100km로 알려졌다. 이 거리만 보더라도 얼마나 멀리서 그들이 끌려왔는지 짐작이 된다.
(메달오브아너 퍼시픽 어썰트 CD 케이스 정면과 후면)
이 글을 쓴 필자는 타라와 전투를 처음 알게 된 것은 놀랍게도 10대 때였다. 그 당시 필자는 FPS 게임(총쏘는 게임)을 상당히 좋아했는데, 아는 사람에게 CD게임 하나를 선물받았다. 그 게임의 이름은 메달오브아너 퍼시픽 어썰트(Medal of Honor Pacific Assualt)였다. 그 게임의 시작과 끝이 바로 1943년 타라와 전투였다. 타라와 전투가 수미상관적 구조를 이룬 게임이었기에 게임을 하면서 이 전투에 대해 알게 됐다. 반일 불매운동의 여파가 한참이던 때, 존 톨랜드가 쓴 책인 ‘일본 제국 패망사’의 존재를 알게 됐고, 그 책을 코로나 초기에 3달에 걸쳐 완독했다. 그리고 이 책에서 타라와 전투 당시 포로로 붙잡힌 사람들 중에 조선인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이후 인터넷을 통해 찾아보게 됐다. 컴퓨터 게임으로 알게 된 역사적 사건이 이렇게 연관이 있다는 것은 상당히 아이러니하다. 아무튼 이 글을 읽은 사람들은 일본 강제 징용으로 죽은 조선인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