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35월 북아프리카 전역이 미국·영국·자유 프랑스·호주·뉴질랜드군의 승리로 끝났다. 북아프리카 전역은 이탈리아의 졸전에서 비롯된 전쟁이었다. 전쟁을 통틀어 무려 35만 명 이상의 이탈리아군이 연합군의 포로로 붙잡혔다. 히틀러는 동맹국인 무솔리니의 이탈리아를 돕기 위해 에르빈 롬멜(Erwin Rommel) 장군을 보냈지만, 1942년 엘 알라메인 전투(Battle of El Alamein)에서 패전하면서 후퇴를 거듭했다. 한때 롬멜의 독일 국방군은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Cairo)까지 진격하는 것이 아니냐는 얘기가 있었지만,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버나드 로 몽고메리(Bernard Montgomery)의 영국군이 승리를 거두면서 후퇴를 반복하게 됐다. 결국 북아프리카 전역은 513일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다.

(허스키 작전 지도)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승리한 영국과 미국은 이탈리아에 상륙하기로 결정하고 작전을 구상했다. 작전을 세우는 과정에서 영국과 미국의 의견차이는 있었지만, 그해 여름 이탈리아의 시칠리아섬(Sicily)에 상륙하기로 결정한다. 그 당시 독일군은 아프리카 뿐만아니라 동부전선에서도 밀리고 있었다. 19432월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군은 소련군에게 대패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 소련군은 동부전선에서 독일군을 상대로 반격에 나섰다. 19437월 독일군은 최신식 전차인 티거를 앞세워 반격에 나섰지만, 결과적으로 쿠르스크 전투는 소련의 승리로 끝났다.

(허스키 작전에 투입된 미군 제82 공수부대 대원들)


(시칠리아 해안에 상륙하고 있는 연합군)

 

194379일 영미 연합군이 이탈리아의 시칠리아 섬에 상륙했다. 영미 연합군은 총 10개 사단을 작전에 투입했다. 이 중 8개는 바다에서 그리고 나머지 2개는 하늘에서 데리고 왔다. 여기서 언급한 2개 사단은 미 제82공수사단과 영 제1공수사단이다. , 공수부대를 작전에 투입시킨 것이다. 이는 독일 국방군 최고사령부가 예측한 연합군의 상륙 능력치를 넘어섰을 뿐만아니라, 시칠리아 섬에 배치된 추축국의 병력을 규모로 능가했다. 물론, 이탈리아군은 12개 사단이 있었지만, 이 중 절반인 6개 사단은 기동성이 없는 군대였고, 나머지 4개 사단도 연합군의 병력을 상대하기에는 무리인 병력이었다. 사실 이탈리아군은 제2차 세계대전 내내 졸전을 거듭한 군대였고, 그나마 유능한 군대도 이미 독일을 돕겠다며 동부전선에 투입한 상황이었다. 물론 그 군대가 동부전선에서 독일군에게 크게 도움이 된 것도 아니었다.

(1943년 7월 21일 시칠리아 전선 상황)

 

물론 연합군이라 해서 작전이 처음부터 성공적인 것은 아니었다. 미군 제82공수사단과 영국군 제1공수사단의 공수부대들은 경험이 없는 항공기 조종사가 부대원을 바다에 떨어뜨리고 신경이 곤두선 대공포 사수가 자기편 항공기를 쏘아 떨어뜨리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영국군 공수부대는 독일군 공수부대의 역공에 부딪혀 큰 희생을 치렀다. 비록 공수부대는 작전 중 이런 어이없는 일을 겪었지만, 해안에 상륙한 부대들은 한결같이 상륙하는 데 다 성공했다. 영미 연합군이 시칠리아에 상륙하자, 흥미롭게도 히틀러는 만슈타인 장군에게 시칠리아에 상륙한 영미 연합군에 맞서기 위해 기갑 군단 일부를 이탈시켜 보낼 것을 명령했다. 이에 따라, 쿠르스크 전선에 있던 독일군 기갑부대 일부가 이탈리아 쪽으로 배치되기도 했다.

(조지 패튼)


(버나드 몽고메리)

 

시칠리아에 상륙한 이후 미군과 영국군은 진격을 지속했다. 조지 패튼(George S. Patton) 장군은 시칠리아의 서쪽 절반을 점령하는 데 기여했다. 반면 몽고메리의 군대는 에트나 산 동쪽을 지나 짧은 경로로 메시나를 가고자 했지만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몽고메리 예하사단은 재전개하여 서쪽을 지나가야 했다. 720일 영국군의 해롤드 알렉산더(Harold Alexander)는 패튼에게 팔레르모와 트리파니에 가할 공격을 늦추고 대신에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해안도로를 따라 내달려 메시나로 가라고 명령했다. 히틀러는 공수부대와 앞서 언급한 기갑사단을 보내 시칠리아의 방어를 강화했다. 이 때문에 연합군의 전진이 느려졌다. 결국 패튼과 몽고메리는 82일이 되어사야 이어지는 진지선을 형성했다. 816일 이후에야 추축군을 강력한 방어진지에서 몰아냈고, 그제서야 겨우 앞으로 전진할 수 있었다. 817일 연합군이 메시나에 입성하자 독일군은 빠져나가고 없었다.

(팔레르모에 입성한 미군 기갑병력들)


(작전에 참여한 영국군 병사들)

 

허스키 작전은 1943817일 영미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다. 그 외에 자유 프랑스와 캐나다 그리고 호주의 군대가 이 작전에 참여했다. 허스키 작전 기간 동안 영국군은 총 2,938명이 전사하고 9,212명이 부상당했으며, 2,782명이 실종됐다. 미군은 2,811명이 전사하고 686명이 실종됐으며, 6,471명이 부상당했다. 반면에 이탈리아군은 4,678명이 전사, 32,500명이 부상당했고, 11만 명 이상이 포로로 붙잡혔다. 독일의 경우 4,325명이 전사하고, 13,500명이 부상당했으며, 1만 명이 포로로 붙잡힌 것으로 나온다. 흥미롭게도, 독일군은 811일부터 단계적으로 이탈리아 본토로 철수했다.

(허스키 작전 관련한 영문 서적)

 

허스키 작전으로 시칠리아를 점령한 연합군은 사실상 지중해를 거쳐 중동으로 들어가는 연합군의 병참선을 확보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영국의 군사사학자 존 키건(John Keegan)이 때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전쟁이 끝났기 때문에 이것이 실속없는 성취였다.”라고 평가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독일군 사단 병력 일부가 동부전선에서 이탈하여 이탈리아 전선에 투입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히틀러가 빼낸 사단은 주로 서부전선에서 온 사단들이었고, 앞서 언급한 쿠르스크 및 동부전선에서 온 기갑 병력은 얼마 되지 않았다. 따라서 동부전선에 큰 영향력을 주지 못했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방 연합군은 한 가지 성취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를 축출한 것이다. 허스키 작전이 진행될 당시, 이탈리아의 국왕 비토리오 이마누엘레왕은 파시스트인 디노 그란디와 함께 무솔리니 탄핵 결의안을 통과시켜 무솔리니를 해임했다. 그런 다음 후임 총리로 피에트로 바돌리오 원수를 임명했다. 결국 무솔리니는 사임한 후 전범 혐의로 체포되어 애인 클라라 페타치와 함께 아펜니노 산맥 골짜기의 그란 삿소에 있는 산장에 연금됐다. 이것은 결국 히틀러가 무장 친위대 출신의 오토 슈코르체니가 이끄는 대원들을 보내 구출하게 만들었고, 이탈리아 일부가 추축국에서 연합국 쪽으로 서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때를 전후로 이탈리아 전역에서는 소위 빨치산 운동이 일어나 독일군과 독일의 꼭두각시인 이탈리아 사하 공화국의 파시스트 군대들에 맞서 투쟁하게 됐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이탈리아 내의 진영을 나누어 내는 데 성공한 셈이다.

 

허스키 작전으로 시작된 이탈리아 전역은 이후 2년을 더 끌었다. 그동안 서방 연합군은 1944년 노르망디에 상륙했고, 1945년 독일 본토로 진입했으며 결국 동부전선에 있던 소련군과도 만났다. 히틀러가 사망하기 이틀 전 무솔리니 또한 애인과 함께 처형당했고, 이탈리아 전역도 55일이 되어서야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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