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제국 패망사 - 태평양전쟁 1936~1945 걸작 논픽션 17
존 톨랜드 지음, 박병화.이두영 옮김, 권성욱 감수 / 글항아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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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한번 읽어보고 싶다. 재밌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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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택동 인민의 배신자 - 모택동은 왜 일본군의 進攻에 감사했나
엔도 호마레 지음, 박상후 옮김 / 타임라인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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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학문적 검증이 안된 일본 극우 파시스트 학자가 쓰고, 왜곡과 선전 모략질의 달인 조선일보 논설위원이 번역한 책이라는 점에서 신뢰도 안가고, 읽을 가치도 못느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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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17, 북한의 최고 지도자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그가 사망한 지 2일 뒤인 1219일 오전 10, 북한 정부는 현지지도의 길에서 급병으로 사망했다라고 보도했고, 김정일의 죽음을 듣게 된 북조선 인민들은 지도자를 잃었다는 슬픔에 빠졌다. 20111228일 김정일의 국장이 거행되었고, 그 다음날인 1230일 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회의에서 김정은을 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서 높이 모시었다라고 선포했음을 발표했다. 이로써 김정일의 시대가 끝났다.

 

김정일의 사망 소식은 전 세계적으로 큰 화제가 되었다. 무엇보다 김정일은 사망한 해만 보더라도 현지 활동을 활발하게 했었을 정도로 나름 건강했기 때문이다. 오사마 빈라덴이 미군에 의해 사살되던 20115월에는 대략 1주일을 거쳐서 중국을 방문했고, 그해 8월에는 시베리아를 방문하여 러시아의 메드베데프 대통령과 회담했기 때문이다. 또한 10월부터 12월까지 군시찰을 12, 경제시찰을 20회나 실시할 정도였다. 즉 이랬던 김정일이 심근경색으로 급사하고, 아들 김정은에게 권력을 물려주게 됐기 때문이다.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포격 사건이 있던 2010년부터 김정일이 첫째아들인 김정남을 제쳐놓고, 김정은을 후계자로 내세운 사실이 세상에 공개되었지만, 그 누구도 이렇게 빨리 아들 김정은이 정권을 물려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예상치 못했다. 왜냐하면 김정일의 경우 아버지 김일성에게 대략 20년 내지는 25년에 걸쳐 지도자로서의 교육을 받았던 역사가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김정일의 사망을 기점으로 북한 권력에 내분이 생겨 정권이 붕괴될 것이라는 추측이 나왔었다. 물론 이런 추측은 허황된 망상이었다. 쉽게 말해, 김정은 자체를 매우 과소평가 했던 것이다.

 

2011년 김정일 사망 이후 4개월 동안은 김정은 최고사령관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집단체제가 북한을 이끌었다. 북한의 노동신문에는 매일같이 전당, 전군, 전민이 일심 단결하여 선군의 위력을 더 높이 떨치자라는 구호가 실렸다. 그리고 2012411일 제4차 당대표자회에서 김정일은 영원한 총비서로 추대되고, 김정은은 당 제1비서, 정치국 상무위원, 당중앙군사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리고 2일 뒤 최고인민회의에서 김정은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으로 추대하면서 북한 국가기관의 모둔 부문에서 최고지도자의 지위를 획득했다.

 

북한의 최고권력 자리에 오른 김정은은 2012415일 평양광장에서 열린 김일성 탄생 100주년 퍼레이드에서 세상을 향해 첫 공개연설을 했다. 그는 연설에서 "최후의 승리를 향하여 앞으로"라는 구호로 연설을 마쳤다.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는 김정은의 목소리가 세상에 처음 공개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김정은은 그해 초여름에는 가수 출신인 리설주와 함께 모란봉 악단의 공연을 감상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버지를 이어 북한의 지도자가 된 김정은은 그 해 7월 리영호를 제거함과 동시에 인공위성 제작에 박차를 가했고, 20121212일 인공위성인 광명성 3호를 성공적으로 쏘아 올렸다. 이걸까지고, 핵무기를 발사했다는 지나친 중상모략도 있었으나, 그냥 인공위성일 뿐이었다. 20133월 대한민국과 미국은 키리졸브 군사훈련을 실시하자 북한의 김정은은 정전협정 백지화를 언급하며, 강경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고, 한 때 북한 전문가들이 김정은 정권에 대대적으로 영향을 주며 큰 힘을 발휘할 것이다.”라고 생각했던 장성택이 숙청되면서, 소위 북한 전문가들의 예상을 빗나가게 했다. 장성택이 처형되자 대한민국과 서방 세계는 북한을 향해 비난을 하고, 근거 없는 루머를 퍼뜨려 북한과 김정은에 대한 악마화를 진행했는데, 심히 3류 소설급 뇌피셜이 버젓이 기사로 실리기 까지 했다. 이는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미국이나 서방 세계도 마찬가지였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가장 어이가 없던 기사는 김정은 정권 장성택을 발칸포로 처형했다는 기사와 김정은이 일부러 셰퍼드 무리를 풀어 장성택이 개들에게 물려 죽도록 했다라는 말같지도 않은 저질스러운 기사들이었다.

 

아무튼 김정은 정권은 김정일이 사망했을 때 이상한 중상모략 및 뇌피셜을 주장하며 북한이 망하기를 바랬던 대한민국의 극우세력이나 자칭 북한 전문가들의 주장과는 달리 권력을 잘 이끌어 나갔다. 따라서 북한이 자체적으로 망하기를 바라며 대북 고립 정책을 펴야한다는 일각의 주장은 아직도 극우반공주의적 사상과 대한민국 친일친미제국주의 세력들이 퍼뜨린 농간에 놀아나는 짓일 뿐이다. 앞으로의 우리는 김정은과 북한을 바르게 알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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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사라지지 않는다 - 베트남과 전쟁의 기억
비엣 타인 응우옌 지음, 부희령 옮김 / 더봄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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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 출판된 베트남 전쟁 관련 서적들은 생각한 것 그 이상으로 그 수가 적다. 미국에게 있어서 베트남 전쟁이란 자신들 역사에서 사상 최대의 흑역사이자 실책이다 보니 그것이 베트남 전쟁 그 자체에 관한 연구이든 전쟁 소설(혹은 문학 작품)이든 개인의 자서전이든 간에 베트남 전쟁을 주제로 한 서적들이 많지만, 정작 미국 다음으로 많은 군대를 파병했던 대한민국의 경우 그 수가 아주 적다. 따라서 올해 5월에 출간된 비엣 타인 응우옌이 쓴 저서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는다: Nothing Ever Dies Vietnam and the Memory of War>가 출간되었을 때, 필자는 신간에 대한 기대가 내심 생겼었다.

 

이 책은 베트남 전쟁을 겪었던 사람들의 기억과 전쟁을 겪었던 국가들이 어떤 식으로 전쟁 그 자체를 기억하는지를 분석한 심리학 서적이다. 이 책의 저자에 대해 얘기하자면, 1975년 베트남의 통일 이후 남베트남을 탈출하여 미국에 정착한 보트피플 출신이다. 물론 저자는 1971년 남베트남의 부온 마 투옷(Buon Ma Thout)에서 태어나 1975년 보트피플이 되어 미국에 정착한 베트남계 미국인이기에, 한때 자신이 살았던 남베트남에 대한 추억 혹은 기억이 부정확하거나, 남는 것이 없다는 점에서 다른 보트피플들하고 차이를 보인다.

 

작년 10월과 11월 대략 한 달 동안 미국여행을 다녔던 필자는 필라델피아에서 베트남 타운에 들려 베트남계 미국인들을 봤었고, 워싱턴에서 머물던 숙소에서도 보트피플 출신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으며, 여행을 최종적으로 마치고 로스엔젤레스에서 한국으로 귀국하는 비행기에서 옆자리에 앉은 보트피플 출신의 대학교수와 적잖은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대략 12시간의 기나긴 비행시간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이지만, 그 대화는 여러모로 보트피플들이 가지고 있는 베트남에 대한 관점을 알 수 있던 기회였다. 귀국행 비행기에서 필자와 대화를 나누었던 베트남계 미국인 아저씨는 하버드 대학교 의과대학 교수였고, 미국 보스턴에 살면서 미국과 베트남을 자주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베트남을 자신의 고향 및 조국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여러 얘기를 나누던 중 필자는 그 사람과 호치민 주석에 관한 얘기도 나눴었고, 필자가 알고 있는 베트남 역사에 대해서 얘기해줬다. 참으로 흥미로웠던 것은 그분 또한 필자가 감명깊게 읽었던 윌리엄J듀이커의 호치민 평전을 2000년대 초에 읽었었다는 사실이다.(국내에는 2003년에 출간되었다) 듀이커의 호치민 평전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그 책은 호치민을 반은 간디 반은 레닌이라고 하며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책이다. 그런데 그런 책을 보트피플 출신 아저씨가 나름 괜찮은 책이라 얘기한 것은 꽤나 흥미로운 답변이었다. 하지만 이런 대답을 들은 다음에 들었던 그 아저씨의 답변은 아 역시 보트피플이구나하는 결론을 내리게 했다. 듀이커의 책에 대해 좋은 책이라 얘기했던 것과는 달리 호치민 자체에 대해선 긍정적인 시각보다 부정적인 시각이 앞섰다. 그가 자유와 독립을 위해 제국주의에 투쟁한 것에 대해서 과연 가치가 있었던 일인지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그 아저씨가 내리는 남베트남의 독재자 응오딘지엠에 대한 평가는 부정보단 긍정의 시각이 앞섰다. 그 아저씨는 필자에게 (응오딘지엠은)는 분명 애국자였습니다. 하지만 잔인하기도 했죠.”라고 답변했는데, 이 점에서 역시 보트피플 다운 결론이라는 생각이 아주 많이 들었고, 여기서 필자는 남베트남계 보트피플들의 한계를 알 수 있었다.

 

개인적인 경험 얘기는 여기까지 하고, 이제 책에 관해 얘기하겠다. 필자는 이 책을 읽으며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을 동시에 느꼈다. 우선 필자가 책에서 부정적으로 느꼈던 점을 얘기하겠다. 아까 위에서 얘기한 필자의 경험담에서 느낄 수 있는 시각이 이 책에도 아주 심하게는 아니지만, 약간은 반영된 느낌을 받았다. 물론 위에서 상술한 것처럼 응오딘지엠을 애국자로 옹호한다거나, 남베트남의 부정부패상을 옹호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긴 하나, 베트남 전쟁 자체에 북베트남 측의 책임론을 주장한다.

 

저자는 1960년대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을 지원하면서 주변국인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끌여들였다고 주장하며, 따라서 북베트남 또한 이에 대한 막중한 책임이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이런 관점은 필자의 관점으로 보자면 절대 동의할 수 없는 결론이다. 베트남의 주변국이던 라오스를 보면 1960년대 활동을 하던 민족해방조직인 파테트 라오(Pathet Lao)에 대한 라오스 인민의 대중적 지지는 압도적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남녀평등과 계급해방 그리고, 지주의 재산 및 식량을 몰수하여 가난한 인민들에게 나누어줬기 때문이다. 따라서 라오스 인민들이 북베트남과 베트콩을 도와 미제국주의에 맞서 싸운 것은 이런 이유였다. 1975년 이후 광적인 킬링필드를 주도했던 폴포트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시각이 앞서고, 그를 매우 싫어하는 필자가 이에 관해 얘기하자면 당시 캄보디아 인민들이 친미제국주의자 론 놀(Lon Nol)이나 부패한 왕조인 노로돔 시아누크(Norodom Sihanouk)를 지지하지 않고, 크메르루주를 지지하며 미제국에 맞서 싸웠던 것 또한 그런 맥락에서 봐야 한다. 당시 크메르 루주는 마오이즘적 사상을 기반으로 반제국주의 투쟁을 했기에 이 또한 캄보디아의 민족해방투쟁이었다. 따라서 단순히 호치민루트를 라오스와 캄보디아까지 연결했다는 이유를 들어 전쟁의 책임을 북베트남에게도 있다고 하는 저자의 시각은 필자 입장에선 절대 동의할 수 없는 주장이다.

 

필자가 저자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았던 또 다른 얘기는 북베트남은 재교육과 보트피플 난민들이 도망친 것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고 있다.”라는 주장인데, 이 또한 동의할 수 없는 관점이다. 물론 필자 또한 재교육으로 고통을 받았을 일부가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러한 청산 작업은 북베트남에게 있어서 당연히 필요했던 작업이었다. 베트남 전쟁에 대해 공부해본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는 사실이겠지만, 남베트남 정권은 부패한 가톨릭 세력과 식민지 시절 프랑스에 협력하여 나라를 팔아먹던 민족반역자들의 집합체였다. 따라서 북베트남이 그들을 재교육 시키고 청산하는 작업은 필수적인 것이며,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한 작업이었다. 반대로 대한민국은 1949년 이승만 정권이 노덕술 같은 악질 친일파들을 한 사람도 남김없이 살려주는 바람에 지금까지도 친일파 세력들이 대한민국에서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됐던 역사적 사실을 생각해 보면, 그런 재교육 및 청산작업은 당연히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보트피플에 관해 얘기하자면, 보트피플은 제1차와 제2차를 나눌 수 있는데, 1975년 베트남을 떠난 베트남인들이 제1차에 속한다. 이들의 경우 주류는 친프랑스 계열 민족반역자들 사이공 정부의 관료나 공무원, 자본가 그리고 가톨릭 목사들이었다. 즉 북베트남 정부에게 있어서 큰 과오 및 안좋을 짓을 한 인물들이었고, 자신들이 한 부끄러운 행위들이 있으니 탈출한 것이다. 통일 후 베트남에서 재교육 및 처벌과정이 대규모의 보복성 학살 없이 끝났다는 사실과 1975~1986년까지 대략 100만 명 이상의 보트피플이 탈출했다는 것을 생각해 봤을 때, 베트남을 떠나고 안 떠나고는 순수히 그들 선택이었다. 당시 그들의 지도자나 다름없었던 응우옌 반 티에우(Nguyen Van Thieu)가 남베트남이 몰락할 위기에 놓이자, 비행기 6대에 금괴 2톤을 싣고, 미국으로 도주했던 것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그 자체를 북베트남에게 뭍는 것은 필자가 보기에 너무 과한 결론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 외에도 일반적인 베트남인들이나 필자의 관점에서 보면 다소 불편할 내용이 적잖게 보였다.

 

물론 위에서 상술한 부분은 당연히 고려하더라도, 이걸 제쳐놓고 책을 긍정적으로 볼만한 부분이 꽤 있다. 이 책은 단순히 베트남과 미국의 기억만을 얘기하지 않는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편에서 싸웠던 소수민족과 미국 다음으로 가장 많은 병력을 파병했던 한국에 관한 내용을 포괄하여 베트남 전쟁에 대한 기억을 얘기한다. 이 책에서 언급되는 소수민족이 있는데,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 편에 서서 싸웠던 몽족(Hmong)이 그러하다. 저자는 몽족들의 경험 및 역사를 토대로 베트남 전쟁과 그들의 기억을 얘기한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편에 서서 싸운 몽족들은 결국 베트남 전쟁이 끝나면서 아주 철저하게 버려졌다. 물론 그들 중 일부가 미국으로 건너와 최소 17만 명 이상이 미국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그들은 아주 철저히 잊혀졌다. 대표적으로 미국에 살던 몽족 베테랑인 방파오(Vang Pao) 장군의 이야기를 얘로 들 수 있다. 방파오 장군은 자신이 죽으면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알링턴 묘지(Arlington National Cemetery)에 묻히기를 바랐고, 다른 몽족 군인들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들은 미국에 있는 알링턴 묘지에 묻히지 못했다. 미국 정부가 그들을 외면했고, 그들의 존재를 부각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현재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남베트남군 베테랑 또한 마찬가지다.

 

여기서 더 나아가 필자는 몽족을 주제로한 영화를 언급함과 동시에, 그안에 들어가 있는 미국식 제국주의 혹은 애국주의를 비판한다. 아이언맨으로 유명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Robert Downey Jr)와 멜 깁슨(Mel Gibson)이 출연한 영화 에어 아메리카(Air America) 그리고 클린트 이스트우드(Clint Eastwood)가 감독과 배우로 이중작업한 영화 그랜 토리노(Gran Torino)가 그런 애국주의 혹은 미국식 국수주의를 전파하는 영화였다. 전자의 경우는 노골적인 미국식 국수주의 전파 영화라면 후자는 교묘한 미국식 국수주의 전파 영화였다. 그리고 그 영화엔 서양권이 가지고 있는 동양권에 대한 오리엔탈리즘도 들어가 있다. 1968년에 존 웨인이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 그린베레(The Green Beret 1968)가 그랬듯이 말이다. 필자는 에어 아메리카와 그랜 토리노를 보진 않았지만, 저자의 통찰력이 감격스러웠다.

 

이런 저자의 통찰력은 한국의 베트남 전쟁 기억 속에서도 드러나는데, 참으로 뛰어난 분석력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1994년 정지영 감독이 제작한 영화 <하얀전쟁>2004년에 나온 <알포인트> 2008년에 나온 <님은 먼곳에> 그리고 20141천만 영화인 <국제시장>을 비유하며, 베트남 전쟁을 주제로한 한국 영화가 어떻게 변해갔고, 베트남인들의 고통을 어떻게 외면하는지를 아주 철저하게 분석했다. 이 점에 있어서 필자는 이렇게 명확히 분석한 저자의 글에 감탄했다. 더 나아가 이 책의 분석을 통해서 2014년에 나온 영화 국제시장이 베트남 전쟁을 어떤 식으로 교묘하게 왜곡했는지도 생각해보았다. 더 나아가 이 책에선 대한민국의 극우 세력들이 보면 매우 불편해할 내용들이 나온다. 그것은 바로 한국군 민간인 학살과 부패에 대한 내용이다. 이 책에선 베트남인들이 한국군을 긍정보단 부정적으로 인식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심지어 같은 편인 남베트남도 한국군을 부정적으로 인식했고, 남베트남의 공군 총사령관인 응우옌 까오 끼(Nguyen Cao Ky)가 한국군을 부패와 암거래로 고발했다는 내용도 나온다. 또한 저자는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인 하미 마을 학살(Hà My massacre)을 언급하며, 과거 베트남전 참전용사들이 이 증오비의 기록을 지우기 위해서 피해자 및 마을 측을 돈으로 매수하려 했던 추악한 사실을 언급한다. 따라서 이 책이 입증하듯이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을 긍정적으로만 보는 시각은 당연히 잘못됐고, 후세대는 베트남 전쟁 당시의 한국군 참전을 깊이 반성해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더 얘기하자면 필자는 이 책의 저자가 무수히 많은 영화들을 토대로 베트남 전쟁의 기억을 분석하고자 했던 점에서 나름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이 책에서 자주 언급되는 영화가 있는데, 지옥의 묵시록(Apocalypse Now)가 바로 그것이다. 책의 저자는 영화 지옥의 묵시록에서 많은 것을 느꼈던 것 같다. 그 외에도 전쟁의 사상자들(War of Casualties), 풀 메탈 자켓(Full Metal Jacket) 등 많은 헐리우드 영화들이 언급된다. 뿐만 아니라 필자는 베트남 전쟁을 주제로한 컴퓨터 게임을 언급하기도 하는데, 110억 달러를 벌어들인 콜오브듀티 블랙옵스(Call of Duty Black Ops)가 바로 그것이다. 저자는 블랙옵스를 언급하며 미국식 영웅주의와 반공주의를 비판한다. 이러한 저자의 평가 및 언급은 당연히 이 게임을 해보았다는 증거일 것이고, 고등학생 시절 이 게임을 여러 번 해본(그리고 지금도 가끔 하는) 필자로선 이 게임이 언급된 것이 나름 반가웠다. 전쟁의 기억을 보는 작업에서 단순히 참전용사들이나 당사자들뿐만 아니라 여러 매체와 문화에 나타나는 것들을 심리학적으로 분석한 저자의 노력은 참으로 높게 평가해줄 만하다. 물론 위에서 언급한 보트피플식 한계도 있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런 한계점도 다른 극우반공주의에 매몰되어 있는 보트피플들에 비하면 상당히 나은 편일 것이다. 아무튼 보트피플이 쓴 책이라 감회가 새로웠고, 보트피플 치고는 의외였던 점도 있었던 것 같다. 재밌게 읽었으니 그것으로 만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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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멜 장군)

 

1940년 5월 히틀러의 군대는 전격전(Blitz Krieg)을 통해서 벨기에와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그리고 프랑스를 단기간에 함락시켰다. 1940년 여름 히틀러가 프랑스를 함락시키는 모습을 본 이탈리아의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는 과거 로마 제국의 영광을 생각하며 북아프리카의 이집트와 남유럽의 그리스를 침공했다. 무솔리니는 히틀러와는 달리 전략도, 계획도 없고 보잘것없는 군대로 서투를 공격을 했다가 도리어 연합국의 반격을 받아 곧 패배하고 있었다. 이에 당황한 히틀러는 1941년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를 침공하고, 다른 한편으로 에르빈 롬멜(Erwin Rommel) 장군 휘하의 1개 기갑군단 즉 아프리카 군단을 파견해 리비아에 주둔하던 이탈리아군을 지원하도록 했다.

(진격하는 영국군 병사)

 

194126일 소장으로 진급한 롬멜은 히틀러가 있는 베를린 총리 관저를 찾아갔고, 롬멜 장군은 히틀러로부터 북아프리카 사령관으로 발령받았으며, 212일에 북아프리카에 도착했다. 당시 북아프리카의 이탈리아 군영은 이미 짐을 싸 놓고 이탈리아로 돌아갈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 북아프리카에 도착한 롬멜은 독일군의 사열식을 이탈리아군에게 보여줌으로써 이탈리아군의 사기를 높였고, 이를 바탕으로 331일 대대적인 반격을 시작했다. 독일군 1개 기갑사단과 이탈리아 1개 기갑사단이 한 팀을 이루어 영국군에게 공세를 퍼부었는데, 영국군은 제대로 방어도 해보지 못하고 1주일도 안 되어 300km를 후퇴했다. 또한 46일에는 영국군 제8잡단군 사령관 오코너가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히기도 했다.

(영국의 몽고메리 장군)  

  

투브루크(Tuburq) 항구를 제외한 넓은 지역을 독일군이 점령하자 영국군은 이를 지키기 위해 북아프리카에 대규모의 지원군을 보냈다. 1941615일 영국의 주력 기갑사단인 제7 기갑사단까지 동원한 영국군은 롬멜군대에게 대대적인 공격을 시도했는데, 역으로 롬멜장군은 기갑부대를 이용하여 영국군을 무너뜨렸다.

(아프리카 전선에서 활약했던 독일의 3호 전차)   

 

19411118일 영국군은 십자군 전사라는 작전명으로 독일군에게 선제공격을 가했다. 사막의 여우 롬멜을 잡기 위해 영국군은 1000대 이상의 전차를 투입했는데, 이는 롬멜 휘하의 독일군이 보유하고 있던 전차보다 4배나 많은 숫자였다. 결국 독일군은 많은 사상자를 낸 채 후퇴했고, 19421월에는 리비아의 브레가 항까지 밀려났다. 이곳에서 롬멜은 다시 반격에 나서 영국군의 전략적 요충지를 연달아 격파했다. 그리고 6월 초 독일군은 다시 투브루크 항 근처까지 치고 올라갔다. 620일 롬멜은 투브루크 항을 향한 총 공격을 명령했다. 그 다음날 새벽 독일군은 방어가 삼엄한 영국군 요새를 함락시키고, 영국군 35000명을 포로로 붙잡았다. 그 공로를 인정한 히틀러는 롬멜을 원수급으로 진급시켜주었고, 롬멜 장군의 승리 소식을 들은 독일 베를린은 온통 축제 분위기가 되었다.

(FPS 게임인 콜오브듀티 2에서 나온 북아프리카 전투. 사진속에 있는 인물은 프라이스 대위고, 전차는 영국의 크루세이더 전차다.)  

  

하지만 독일군은 전쟁을 치르는 동안 수많은 탱크와 탄약을 잃었고, 병사들은 지쳐만 갔다. 이 시점에선 독일군은 더 이상 진격하기엔 무리가 생긴 시작했다. 영국의 처칠도 이집트까지 밀리자 새 장군을 북아프리카 전선에 보내는데, 그 사람이 바로 버나드 로 몽고메리(Bernard Law Montgomery)였다. 몽고메리가 부임한 이후 독일과 영국은 전력면에서도 차이를 보이는데, 몽고메리 휘하의 영국군이 탱크 1400대 비행기 1300대 그리고 23만 명 이상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던 반면 롬멜은 9개 사단에도 못미치는 병력에 540대의 탱크와 350대의 비행기가 전부였다. 즉 수적인 면에서도 2.51로 독일군이 불리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결국 롬멜 장군은 194210월 알 알라메인 전투(Battle of Al Alamein)에서 참패하고 말았다. 거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드와이트 아이젠 하워(Dwight Eisenhower) 장군 휘하의 미군이 카사블랑카에 상륙했다. 즉 전세는 롬멜 장군에게 불리해졌다. 알 알레메인 전투에서 대패한 이후로부터 롬멜 휘하의 독일군은 이집트와 리비아 그리고 튀니지에서 미군과 영국군에게 밀렸고, 1943년 봄 쯤에는 튀니지에서 영미연합국을 상대로 방어만 하고 있었다. 결국 롬멜의 북아프리카 군대는 19435월 초 튀니지에서 이탈리아의 시칠리아섬으로 철군하면서 완벽히 철수한다. 1940년 이탈리아 무솔리니가 시작한 북아프리카 전투는 영미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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