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양 선생 서거 45주년에 이기형 선생께서 낭독한 시입니다.)

분노와 눈물로 돌이켜봅니다
45년 전 오늘을!
긴 장마철 쌀도 돈도 떨어졌을 때
여 선생을 찾아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이름깨나 있다는 자들이
겨레와 나라를 팔아먹는 글을 썼을 때
여 선생의 말씀을 듣고 싶었습니다
저 일제 민족말살 암흑 시기
여운형은 3·1운동의 뿌리요
상해 임시정부 수립에 큰 몫을 담당했던 겨레의 기둥이었습니다
아시아 천지에서, 조국의 품에서,
그 번듯한 외모가 보입니다
그 유창한 사자후가 들립니다

일제 총본산 우두머리들 앞에서 불을 뿜은
현하의 변
청사에 남을 ‘독립투쟁의 예술’ 이었습니다
해방의 감격과 환호 속에 솟은
저 ‘건국준비위원회’의 깃발
백두산과 한라산에 비춘
민족소생의 햇발인저!
친일잔재 민족 배반자들이
반탁을 외칠 때
찬탁으로

임시정부 수립에 심혈을 기울였건만.
이승만의 분단노선에 맞서
좌우합작 통일노선을 치켜들었건만,
아아,
그대의 천재적 정견에 따랐더라면
반 세기 민족분단 비운은 막았을 것을!
거성도 가고 세월도 갔지만
역사는 똑바로 기록합니다
‘여운형 노선이 겨레 살리는 길이었다’
당신의 생애는 광휘롭고 웅혼했습니다

오늘은 묘비도 세우고
유덕과 위업을 우러르며
추모의 정을 나누고 있습니다
귀여운 딸 연구는, 지금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세계 도처에서 조국통일을 위해 밤낮 뛰고 있습니다
저번, 조화를 안고 46년 만에 서울에 왔건만
아버님 묘소에 바치질 못하고
눈물을 뿌리며 돌아갔습니다
처참한 현실이지요

가슴이 아플 뿐입니다
역사적 남북합의서가 이미 채택되었습니다
겨레와 역사는 거스르는 반역을 물리치고
당신의 높은 가르침대로
남북형제는 기필고 자주통일을 이룩하고야 말 것입니다
선생은 우리 민족의 해방과 독립뿐 아니라
인간해방이라는 인류의 높은 이상까지 펼쳐 보이고 가르쳐 주신
대선각자 대애국자였습니다
몽양 여운형 선생,
천계에서도 저희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세요 이끌어 주세요
조국통일의 그날까지
인류해방의 그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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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호치민 주석 묘와 집무실 그리고 박물관까지 풀코스로 돌았습니다. 워낙 존경하는 인물이다 보니 더욱 감동적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여전히 베트남 인민의 영웅입니다. 한 평생을 투쟁으로 살아온 그를 존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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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후에 황궁을 방문했습니다. 1802년에 탄생한 응우옌 왕조의 옛 황궁인 후에는 1945년 3월 일본 제국주의가 내세운 꼭두각시 황제 바오다이까지 이어졌습다. 그리고 후에 황궁은 베트남 전쟁 당시 구정 공세가 있을 때 미군의 폭격으로 70%가 파괴되었었죠. 개인적으론 후에 황궁이 약간 자금성하고 비슷한 느낌도 있지만 뭔가 자신들 만의 독특한 것이 있어 보이네요. 확실히 후에는 옛 전통을 강조하는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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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니퐁넛 학살 증오비를 방문하며

구정 공세 52주년인 오늘 아침 1월 31일, 나는 꼭 들려보고 싶은 곳을 들렸다. 그 장소는 바로 1968년 2월 12일 한국군 청룡 부대에 의하여 수십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한 곳이다. 구정 공세가 한참이던 1968년 2월 12일 꽝남성 디엔반현에서 작전을 수행하던 한국군들은 작전도중 부대원이 희생당한 사건이 있자 소위 안전 구역으로 알려진 퐁니 퐁넛 마을에 들어가서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다.

당시 그 마을에 들어간 한국군은 여자와 아이 노인을 대상으로 무차별 학살을 함으로써 대략 74명의 민간인이 희생되었다. 희생당한 이들중 가장 나이가 많은이는 80살이었고, 가장 어린사람은 임산부 배속에 있던 아이었다. 퐁니 퐁넛 학살이 국내에 이슈가 된건 1990년대 구수정 박사께서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 민간인 학살 문제가 공론화 시키면서 부터였다.

베트남 전쟁에 대해 공부를 한 필자는 다낭을 방문하게 되면 학살 증오비를 방문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그 무차별적인 학살의 진실을 알기 때문이다. 어제 다낭에서 만난 베트남 페친과 함께 오토바이를 타고 30분을 달려 퐁니 퐁넛 학살 한국군 증오비가 있는 곳에 방문하게 되니 나는 저절로 마음이 숙연해졌다.

증오비에는 한국군에게 학살당한 피해자들의 명단이 나이순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시작은 1890년 생이었지만 끝은 1968년 생이었다. 참으로 마음이 아프다. 따라서 난 증오비 앞에서 무릎꿇고 사죄했다.

왜 한국군은 이토록 잔혹한 범죄를 베트남에서 저지른 것일까? 나는 그것이 해방후 제주4.3 항쟁과 여순항쟁, 한국전쟁시기의 민간인 학살 그리고 1980년 광주학살까지 이어지는 연장선상이라 생각한다. 즉 한국군의 뿌리는 해방 후 친일세력의 뿌리를 두었고, 그런 역사와 경험이 있었기에 베트남에서도 참혹한 학살이 일어나 많은 베트남인들에게 상처를 준것이다.

근래에 들어서 많은 한국 사람들이 먹고 즐기기 위해 다낭을 찾고 있다. 그러나 놀고 먹는 곳 근처에서 52년 전 한국군에 의해 베트남 민간인이 학살당했다는 사실을 아는이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런 민간인 학살을 벌였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베트남 분들에게 항상 죄송함을 느낀다. 최근들어 수구세력들이 베트남 전쟁 당시의 한국군 민간인 학살을 부정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난 그들에게 이 증오비들을 꼭 보고 오라고 얘기해주고 싶다. 기회가 생긴다면 나는 한베평화재단에서 하는 평화기행에 꼭 참여할 것이다.

다시 한번 베트남 분들에게 머리 숙여 사죄합니다! 항상 죄송스럽습니다! 미안해요 베트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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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31 17: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7-21 23: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현재 베트남 다낭에 있습니다. 그냥 생각없이 잡은 호텔에서 엄청 가까운 거리에 1965년 미해병대 3500명이 상륙했던 해변이 있더군요. 참고로 오늘 베트남 페친과 참으로 의미있는 대화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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