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돌프 히틀러 결정판 1~2 세트 - 전2권 아돌프 히틀러 결정판
존 톨랜드 지음, 민국홍 옮김 / 페이퍼로드 / 2019년 4월
평점 :
절판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악의 대명사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는 전 세계인들에게 악인으로 각인된 인물이다. 미국 헐리우드 영화에서 외계인, 악마, 좀비, 로봇과 더불어 5대악으로 봐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히틀러의 나치 독일은 대중매체에서 악의 대명사로 등장하기도 한다. 이것은 그가 일으키고 저지른 제2차 세계대전과 유대인 학살 즉 홀로코스트와 연관이 있다. 무엇보다 그가 1939년에 일으킨 제2차 세계대전은 6500만 명 이상의 인명을 죽게 만들었고, 그의 편협한 인종적 사고관은 최소 600만 명 이상의 유대인을 학살하는 반인륜적 전쟁범죄를 저지르는 원동력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입각해서 보더라도 아돌프 히틀러가 많은 이들에게 강력한 비판을 받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악의 대명사 아돌프 히틀러는 다른 의미에서 얘기해보자면, 학술적으로 많이 연구가 된 인물이다. 일단 국내에 출판된 그의 두꺼운 연구서만 보더라도 존 톨랜드가 쓴 책까지 합쳐서 총3권이다. 그만큼 연구가 많이 된 인물이다. 그가 집권하던 나치 독일에 관한 연구는 말 그대로 정말 많다. 또 다른 의미에서의 아돌프 히틀러는 20세기 역사에서 이 많은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매주 일요일마다 MBC에서 방영하는 신비한 TV 서프라이즈를 보면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 독일에 대한 내용들이 음모론적인 차원에서 많이 소비가 된다. 나치의 UFO 제조설, 히틀러 여자설, 히틀러 고자설, 히틀러 생존설, 나치의 타임머신 프로젝트(어떤 타임머신 루트를 찾아 과거로 돌아가 전쟁을 다시 일으킨다는 얘기), 나치의 비밀 남극기지, 나치와 외계인 협력 그리고 나치의 달 기지와 같은 이야기도 나온다. 심지어 나치의 달기지 음모론은 2012년 영화 아이언 스카이(Iron Sky)’로 만들어져 패러디가 되기도 했다.

 

그 뿐만 아니라 히틀러가 12년간 통치하던 나치 독일은 여러 부분에서 많은 기행(奇行)을 했었고, 기행이라는 말로 표현될 수밖에 없는 일들에 많은 자금을 투자하기도 했었다. 앞에서 서술한 음모론들이 나오게 된 이유는 히틀러 개인이 매우 독특한 인물이었다는 점도 있지만, 그의 나치 독일이 과학기술 분야에서 타국에 비해 상당히 앞서 있었던 것도 한 몫 하는 것 같다. 이처럼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 독일은 많은 분야에서 여러 가지의 학술적 연구와 더불어 수많은 에피소드들을 후세대에게 양산해내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나치 독일과 아돌프 히틀러를 공부해보는 일은 참으로 호기심을 자극하는 일이다.

 

물론 현대에 들어서 대중매체의 의도와는 다르게 나치 독일과 히틀러라는 소재가 악용되는 사례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네오나치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사례는 2017년 당시 샬러츠빌 사태와 같은 아주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었다. 따라서 이런 점에 있어서 나치 독일과 히틀러에 대해 흥미를 가지는 것은 이데올로기 혹은 정치적으로 매우 조심해야할 부분이기도 하다. 사실 내가 역사를 좋아하게 되고, 대학교 전공까지 역사학을 선택하게 된 계기에는 중학교 시절 감상했던 히틀러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한 몫 했다. 그 다큐멘터리를 감상한 내가 히틀러에 대한 이야기가 상당히 흥미롭게 다가왔었다. 그리고 철없던 시절의 나는 보았던 다큐멘터리나 대중매체의 의도와는 다르게 아돌프 히틀러라는 인물에 매력을 느끼기도 했다. 물론 그런 부분은 지적으로 성장하면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말이다.

 

앞에서 상술한 바와 같이 나치 독일이나 히틀러를 다룬 연구나 서적들은 상당히 많다. 일단 국내에 출판된 책들도 무수히 많은 편이다. 하지만 나는 나치 독일이나 히틀러에 대해 관심을 가지면서도 정작 히틀러를 다룬 전기를 지금까지 읽어본 적이 없었다. 그랬기에 나는 2019년 페이퍼 로드 출판사에서 출간한 존 톨랜드의 아돌프 히틀러 결장판을 읽게 되었고, 장기간에 걸쳐 완독했다. 2부작으로 구성된 책이라 분량이 워낙 많았기에 일부러 1,2권을 나눠서 읽었었다.

 

아돌프 히틀러 결정판의 원서는 냉전이 끝나지 않았던 1976년 정확히는 베트남 전쟁 종결 1년 후에 출간된 책이다. 이 책의 저자 존 톨랜드는 일본 제국 패망사‘6.25전쟁사등으로 국내에서 유명한 논픽션 작가로 자료조사 특히 인물 인터뷰라는 측면에선 방대한 자료를 통해 여러권의 책들을 집필한 인물이다. 마찬가지로 저자는 이 책을 집필하며 수많은 인물의 인터뷰를 토대로 책을 집필했다. 비록 국내에 먼저 번역된 책들보단 과거의 책이긴 하지만, 상당히 많은 자료를 소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 읽어볼 가치가 높은 책이었다.

 

나는 이 책을 작년 8월과 12월 그리고 올해 1월에 걸쳐, 1,2부를 나눠 읽었다. 1부는 작년 여름에 읽었고, 2부은 작년 12월과 올해 1월 초까지 읽었다. 아돌프 히틀러 전기를 읽어보지 못했기에 보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독서를 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번역도 매끄러워서 원 저자의 매끄러운 문장이 눈에 잘 들어왔다. 비록 방대한 분량이지만 내용 자체가 마치 문학이나 소설책 읽듯이 술술 읽혔다. 이런 점은 학술적인 연구를 보다 바탕으로 한 책들보단 일반인들에게 진입장벽이 한 단계 낮아진다는 장점도 있는 것 같다.

 

저자는 최대한 아돌프 히틀러라는 인물을 과거의 인물 그러니까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는 정치적인 입장을 최대한 배제하려고 했다. 즉 히틀러라는 인물이 가지는 정치성을 보다 배격하려 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히틀러에 대한 반인륜적 범죄를 부정한다는 의미는 절대로 아니다. 그는 히틀러의 생애 그러니까 독일 총통이 되기까지의 히틀러의 모습을 최대한 사실에 가깝게 묘사하려고 노력했다. 즉 히틀러라는 인물이 어떤 과정을 거치며 나치 독일의 지도자가 되었고, 어떻게 해서 그런 반인륜적 범죄를 저질렀는지를 정치적 판단을 배제하고 접근하려 했다. 또한 저자는 히틀러 측근들이 본 히틀러는 어떠했는지도 얘기하고자 했다. 따라서 상당히 많은 인터뷰 자료를 책에서 참고하고 인용했다.

 

비록 전부라고 하기는 힘들지만 인터넷상에 퍼져있는 히틀러에 대한 여러 가지 들도 제법 적잖게 다루고 있다. 그리고 그런 썰에 대한 저자의 해설과 해석 혹은 추측도 담고 있다. 아돌프 히틀러의 생애를 총체적으로 다루고 있지만, 냉전 시기에 나온 책이라 사료적 한계도 돋보인다. 특히나 동부전선에 대한 내용은 상당히 빈약하다. 이 점에 있어서 톨랜드도 과거 나치 독일 군 장성들의 회고록이나 인터뷰에 의존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2부는 수정의 밤부터 히틀러의 자살까지를 다루는데, 당연하게도 동부전선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그러나 책에 있는 동부전선에 대한 내용들은 상당히 축소된 느낌을 받는다.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하는 과정부터 스탈린그라드 전투까지는 제법 분량을 할애하지만, 그 이후는 전혀 그렇지 않다. 즉 이런 점은 시대상의 사료적 한계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재밌게 읽었다. 세계 최악의 반인륜적 학살자인 아돌프 히틀러의 생애을 생각보다 재밌게 읽을 수 있었다. 비록 분량이 많아서 시간이 좀 걸렸지만, 그만한 가치는 있었다. 히틀러에 대해 알고 싶은 이들 특히나 히틀러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쉽게 알고 싶어하는 이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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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선생이 쓴 저서 전환시대의 논리가 출간되던 1974년은 박정희가 유신헌법을 선포하고 계엄령을 선포하면서까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해나가던 시절이었다. 19615.16일 그가 단행한 군사 쿠데타는 반공을 제1의 국시로 삼을 정도로 1940,50년대 미국에서 유행하던 매카시즘 그 이상의 반공주의 정신을 국민들에게 강요했다. 이에 따른 억압과 공포는 지식인들에게 말도 못했고, 리영희 선생의 표현을 빌리자면 지적 사상적 암흑기에 가까웠다. 1975년 베트남 전쟁이 혁명적 농민 군대의 승리로 끝나고 난 뒤, 박정희는 이른바 긴급 조치 9호를 발동하여 민주화 인사들에 대한 탄압을 가속화했다.

 

사상의 은사라고 불리는 리영희 또한 군사정권에 의해 감옥살이를 하게 됐다. 정부가 그를 구속시킨 수단은 바로 반공법(Anti-Communist Law)’이었다. 특히나 그가 쓴 전환시대의 논리에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서술과 더불어 또 다른 서술이 문제가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당시 우리가 적으로 여기던 중공 그러니까 현대중국에 대한 서술이었다. 그는 전환시대의 논리에서 당시 중공이라고 불리던 국가에서 단행된 일들과 그 나라의 근현대 역사를 민중혁명사적인 관점에서 해석했고, 당연히 반공을 강요하던 정부는 이것을 빌미로 반공법을 적용시켜 그를 감옥에 보냈다.

 

그 외에도 리영희는 중국 8억인 과의 대화에서 중국 일반인민들이 현재 미국 사람들 보다 보편적으로 더 많은 의료 혜택을 받는다고 서술했으며, 1960년대 마오쩌둥이 단행한 이른바 문화대혁명을 새로운 혁명 사회를 창조하는 것으로써 해석했었다. 물론 문화대혁명의 경우 여러 논란과 더불어 현재 중국 공산당에서도 그 과오를 인정하고 있기에, 균형적으로 보아야할 역사지만, 당시 리영희의 시각은 새로운 패러다임의 제시라는 측면에서 높게 평가할 만한 부분이다.

 

그의 저서 전환시대의 논리를 보면 마오쩌둥의 중국의 탄생과정을 생생히 알 수 있다. 그가 보기에 당시 한국 사람들이 싫어하던 중공의 역사는 민중혁명사였다. 1842년 아편전쟁과 같은 서구열강의 침략에서부터, 1850년대 태평천국운동, 1900년 의화단 운동, 1911년 손문의 신해혁명과 1912년 중화민국의 탄생과 같은 중국 근현대사의 일련의 사건들이 반봉건 반외세에 입각한 투쟁들이었던 것이다. 이후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중국 지역 점령과 19195.4운동 그리고 1921년 중국 공산당의 탄생 또한 이런 민중혁명의 과정속에서 일어난 것이었으며, 손문 사망 이후 장제스가 일으킨 제1차 국공내전도 중국인민의 민중투쟁이었던 것이다.

 

1931년 일본의 만주사변과 1937년의 중일전쟁도 그러한 민중혁명적 성격을 띄고 있으며, 2차 세계대전 이후 일어난 제2차 국공내전도 민중투쟁이었고, 그 민중투쟁의 최종 결과물이 바로 1949년에 건국된 중화인민공화국 그러니까 중공이라는 것이 리영희의 주장이었다. 당시 이러한 관점은 중국을 단순히 북한 괴뢰의 협력자 혹은 빨갱이로만 배워왔던 한국의 지식인들에게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리영희의 일방적인 주장만은 아니었다. 그는 상당히 많은 외국자료들을 출처로 삼아 중국의 이러한 민중투쟁사를 조명해냈다. 그리고 이러한 시각은 1980년대 학생운동권에게 사회주의와 마오쩌둥 그리고 중국혁명을 재해석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하기도 했다. 이런 점을 생각해 보았을 때, 중국 혁명에 대한 리영희 선생의 시각은 상당히 충격적이었고, 새로운 전환점을 제시해준 위대한 흐름이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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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NamGiKim > [100자평] 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 100

전쟁사 입문으로 괜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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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년 전에 올린 글을 좀더 보강한 것입니다.)


(1940년 본토 항공전 당시 보초를 선 경비대원, 중간에 세인트 폴 대성당도 보인다.)

 

2차 세계대전의 초반전은 독일군의 승승장구였다. 1939년 9월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아돌프 히틀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유럽 정복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1940년 4월에는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단순에 점령했다그해 5월에는 벨기에와 네덜란드룩셈부르크프랑스까지 진격에 나섰으며결국 영국과 프랑스벨기에네덜란드캐나다군 그리고 자유 폴란드군까지 프랑스 덩케르크 해안에서 철수를 해야 했다철수라는 목적에선 분명히 성공적인 철수였고총 33만 8,226명의 연합군이 소형 선박을 타고 영국으로 철수했다그러나 독일은 서유럽을 장악해버렸다그 결과 1940년 6월 22일 프랑스의 수도 파리가 함락됐고, 6월 25일에는 프랑스가 공식적으로 항복했다.

(1940년 당시 독일의 영토, 전격전이라는 작전을 구사하던 독일군은 단기간에 유럽 전역을 접수했다.)

 

독일군의 서부 진격 당시 활약했던 군대에는 독일공군도 포함되어 있었다헤르만 괴링이 총 사령관으로 있던 루프트 바페(Luftwaffe)는 벨기에와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그리고 프랑스에서 진가를 발휘했다특히나 슈튜가(Ju 87) 전투기는 독일군 3호 전차보다 강한 프랑스군 전차를 괴멸시키는 것에 능수능란했다또한 항공기를 이용한 독일의 공수부대원들의 활약도 막강했다글라이더 부대의 침투 또한 획기적이었다덩케르크 철수 작전 당시에도 영국의 스핏파이어(Spitfire) 전투기들의 활약 덕분에 철수할 시간을 벌었지만독일군의 진격을 막지는 못했다.

(원스턴 처칠, 처칠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에 맞서 저항했다. 그는 루스벨트 스탈린과 더불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을 대표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아돌프 히틀러,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그는 프랑스를 점령한 이후 영국 침략을 계획했었다. 그러나 실패했다.)

 

이후 독일은 고립된 영국과 협상하고자 했다프랑스까지 점령한 나치독일의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는 영국과의 강화조약을 요구했다그러나 덩케르크 철수작전때부터 결사항전을 주장한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은 히틀러가 요구하는 것을 절대로 들어주지 않았다그걸 알게 된 히틀러는 1940년 7월 4일 영국을 공격한다.”고 선언했다이렇게 해서 1940년 7월 10일부터 독일의 영국 공습이 시작됐다.

(영국 전투기 스핏 파이어, 덩케르크 철수작전에서도 활약했던 종으로 본토 항공전에서도 활약했다. 특히나 독일 공군에겐 공포와도 같은 존재였다.)


(하인켈 폭격기, 독일이 영국을 공습할 당시 주로 사용한 중폭격기다.)


(메서슈미트 전투기, 독일 공군의 전형적인 전투기다. 이들도 영국을 공습할 때 많이 사용됐다.)

 

서유럽 침공 이후 나치 독일은 군사를 재정비했다독일 공군은 2개의 항공함대를 새로 얻은 공군 기지로 이동 배치해야 했고이 과정에서 3,000대 이상의 항공기와 그 운용에 필요한 모든 인원장비보급품 등을 재정비했다영국도 독일군의 침공에 대비했다영국의 마을에선 많은 이들이 군사훈련을 했고아이들 또한 시골로 피난가기도 했다경우에 따라선 대서양을 건거기도 했다또한 해외출신의 병사도 많았다. 1940년 6월 말경 다우딩 예하의 전투조종사는 1,300명이 남짓했는데이중 다우딩 예하 전투조종사 중에는 오스트레일리아인 21뉴질랜드인 102캐나다인 90남아프리카인 21로디지아인(백인) 2자메이카인(백인) 1아일랜드인 9미국인 7폴란드인 141체코인 86벨기에인 29프랑스인 13명 그리고 팔레스타인 출신 유대인 1명이 있었다고 한다.

(영국 상공을 날고 있는 전투기들)

 

1940년 7월부터 시작된 항공전은 해협 인근에서의 전투를 넘어 8월에는 말 그대로 본토 항공전으로 규모가 확장됐다. 1940년 8월 10일부터 독일 공군은 이른바 독수리 작전을 실행하여 영국의 공군기지를 공격했다최초 독일공군의 폭격은 제공권 장악을 위한 전술폭격즉 비행장레이더기지항공운수 관련 공장 폭격이었다이로 인해 영국 공군은 극심한 피해를 받았다영국의 수많은 스핏파이어와 허리케인 전투기가 지상에서 파괴되었다이때 길을 잃은 독일의 독일군 폭격기가 이전까지 목표가 아니었던 런던을 오폭하는 사건이 발생했다물론 이것은 히틀러의 명령에 반하는 행위였다이에 분노한 처칠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같은 날 밤 81대의 폭격기를 보내 독일의 수도 베를린을 공격했다.

(나니아연대기에 나온 장면, 영화 나니아연대기의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을 보면 독일군이 런던을 공습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후 아이들은 시골로 떠나게 되어, 그 시골에 있는 어느 한 교수님 집에서 지내면서 옷장으로 들어가 나니아에 도달한다. 영화 나니아연대기에 나왔듯이 당시 도시에 사는 어린이들은 시골로 갔다. 왜냐하면 독일 공군이 시골은 폭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하철로 숨은 런던 시민들)


이렇게 되자 분노한 히틀러는 폭격의 목표를 영국의 군사기지에서 런던과 같은 대도시들 까지 확장했고영국의 함대와 군사기지를 폭격하던 독일 공군은 영국의 대도시를 폭격하는 것으로 바꿨다그것이 1940년 9월 6일의 일이었다영국 정부는 아이들이라도 살리기 위해 도시에 살던 어린 아이들을 시골로 보내어 우선적으로 보호할 정도로 상황은 급박해졌다이런 이야기는 2005년에 개봉한 영화 <나니아 연대기 사자마녀 그리고 옷장>에서도 묘사되기도 했다당시 독일은 영국을 폭격하기 위해 2500대 이상의 항공기들을 동원했었다이는 영국이 동원한 것 보다 600대 이상 더 많았다거기다 독일 공군들의 경우 1930년대 스페인 내전과 2차세계대전 초반기에 전투를 치른 경험이 있었던 데에 비해 영국측 공군은 실전 경험이 독일보다 부족했다.

(런던 상공에 있는 조색기구들)


(런던 대공습 당시 불타는 런던)

 

그러나 영국은 이점에 있어서 독일에 비해 유리했다바로 레이더(radar)라는 기술을 활용한 조기 경보 시스템과 독일의 기존 전투기 보다 성능이 우수한 스핏파이어(Spitfire) 전투기를 대량으로 소유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1940년 8월 24일부터 9월 6일까지의 항공전에서 독일군의 항공기 손실은 286:380의 비율로 영국군보다 더 컸다. 1940년 9월 14일 괴링은 공군 3개 군을 모두 출격시켰다이때까지 거의 500회에 가까운 출격이 있었지만주로 레이더와 암호 해독기 울트라 때문에 영국의 피해는 경미했고 독일의 손해는 막심했다.

(세인트 폴 대성당과 불타는 런던, 영국 드라마 닥터후 시즌 1에 나온 장면으로 1941년 1~2월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

 

45대의 독일 비행기가 격추된 반면 영국 비행기는 고작 13대만 격추되는 수준이었다. 9월 14일 날 출격한 항공전에서도 독일군 비행기는 75대가 격추되었지만영국군 비행기는 34대만 격추되었다. 1940년 9월 15일 영국과 독일 양국의 공군은 런던 상공에서 항공전을 벌이는데독일은 이날 런던에서 벌어진 공중전에 투입했던 1100대 중 10%가 넘는 165대의 항공기를 잃었던 데에 비해영국의 손실은 독일이 입은 손실에 1/5인 30대 안팎이었다. 9월 17일의 전적은 70대 27로 그 격차가 늘어났다물론 이 과정에서 842명의 런던 시민들이 독일군의 무차별 공습으로 사망하기도 했다.

(런던을 폭격하는 독일 항공기들, 마찬가지로 닥터후에서 나온 장면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독일 공군의 손실이 영국 공군보다 더 많았던 것일까그 이유는 바로 독일 공군의 전략에 있었다독일이 유럽의 수많은 나라들을 점령하기 위해 사용했던 전술은 전격전이라 하는 것인데독일 공군은 지상군을 지원하는 형식이었다즉 독일의 공군기들은 전략적으로 항공전과는 맞지 않았다거기다 영국의 스핏파이어라 불리는 전투기는 독일의 매서슈미트 보다 성능이 더 좋았다따라서 독일 공군이 손실이 영국보다 더 많았던 것이다당시 히틀러는 영국 침공을 목표로한 이른바 바다사자 작전을 준비했었다그러나 항공전에서의 손실이 많아지면서 이 작전을 연기했고히틀러가 영국 침공을 연기한다고 결정 하면서 본토 항공전은 1940년 10월 31일 공식적으로 끝났다.

 

1940년 10월 31일 본토 항공전은 공식적으로 끝났지만독일군의 산발적인 야간 공습은 지속됐다해가 넘어 1941년 초에도 독일군의 무차별 폭격은 수도 런던을 중심으로 대도시에 감행되었다즉 1940년 9월부터 1941년 5월까지는 영국 도시에 대한 독일의 공습이 일상적이었다고 보면 된다. 1941년 5월 10일 독일공군은 대략 500대 이상의 폭격기를 동원한 폭격을 런던에 감행했다그러나 5월 10일 이후 갑자기 런던에 대한 폭격울 중지하기에 이르렀다왜냐하면 대다수의 독일 군대는 동쪽으로 이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거기다 1941년부터는 그리스와 유고슬라비아 알바니아 등의 동유럽과 남유럽을 점령하는데도 신경을 썼다따라서 독일군의 전력분산이 있었던 것이다이 때까지 독일은 총 1977대 이상의 전투기를 잃었던 데에 반해 영국은 1542대의 항공기를 잃었다고 한다독일은 1941년 5월까지 런던코번트리버밍엄리버풀맨체스터 등의 도시에 약 5만 톤의 폭탄을 투하했고총 4만 2000명의 영국 민간인이 사망했다.

(B-17 폭격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공군이 사용한 폭격기로 유럽 전선에서 독일의 산업시설과 군사시설을 초토화 했다. 별명은 하늘을 나는 요새였고, 폭격기 내부에는 전투기를 방어하기 위한 기관총이 많이 배치되어 있었다.)


(하늘을 나는 B-17 폭격기)

 

독일군의 마지막 런던 대공습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의 전황이 뒤바꼈다. 1941년 6월 22일 독일이 소련을 침공한 것이다그러면서 독일군은 영국과의 항공전에 신경 쓸 겨를이 없어졌다또한 1941년 11월 13일 영국 또한 폭격작전을 일시적으로 중단하였다거기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 공격으로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자 미국도 영국의 항공 작전에 같이 협력하게 되었고동부전선에서의 고전과 더불어 독일은 1942년부터 영국과 미공군의 대대적인 폭격에 휩싸여야 했다특히나 미국의 B-17 폭격기 그러니까 이 하늘을 나는 요새라는 별명을 가진 폭격기는 독일과 그 주변 점령지역의 군사시설들과 보급시설을 타격했다이처럼 1942년부터는 독일이 본토 항공전을 치르게 된 것이다.

(바데커 공습, 1942년 4월과 5월에 독일은 영국의 몇몇 도시를 상대로 폭격을 한 적이 있다.)


(스타인복 작전, 1944년 1월부터 5월까지 독일 공군은 영국을 공습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일어나기 1달 전까지 말이다.)

 

물론 독일도 이를 인식했는지 1942년 4월과 5월에 바데커 공습(Baedeker Blitz)이라 하여 엑세터와 바스노리치요크 등 영국의 주요 도시를 폭격했다이 작전에서 총 1,637명의 영국 민간인 사망자가 나왔고총 5만 채 이상의 집이 불에 탔다그 외에도 독일 공군이 영국을 타겟으로 한 대규모 폭격은 1944년에 있었다그게 바로 스타인복 작전(Operation Steinbock)이다. 1944년 1월부터 5월까지 전개된 작전으로 총 500대 이상의 독일군 항공기가 동원되었다수도 런던과 브리스톨헐 그리고 카디프에 총 14번의 공습이 있었다당시 런던 사람들은 이를 작은 공습이라 불렀는데총 1,500명의 민간인이 사망하고 3,000명이 부상당했다고 한다.

(스타인복 작전 당시 격추당한 슈투카 급강하 폭격기의 잔해, 영국 에식스 주에서 촬영된 사진이다.)


(V-1 로켓 미사일)


(V-2 로켓 미사일, 1944년 9월에 발사된 독일제 로켓 미사일로 1969년 미국 아폴로 달 착륙에 기여를 한 과학자 베르너 폰 브라운이 나치 과학자 시절에 만들어 냈다.)

 

하지만 독일은 이미 1942년부터 공습을 당했고, 1943년과 1944년에는 그 공습이 독일 전역으로 퍼져서 수도 베를린을 포함하여 그 피해가 극심했다여기서 독일은 영국을 상대로 또 다른 공습을 시도 했는데그게 바로 미사일을 이용한 공습이었다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독일은 V-1 로켓 미사일을 수도 런던에 발사했다. 1944년 6월과 8월 사이에 대략 1만 개의 V-1 미사일이 영국에 발사되었다효율성은 그리 좋지 않았다발사된 1만 발 중에 2,500발만 명중했다. 1944년 9월부터 독일은 V-1 대신 새로운 로켓 미사일을 발사했는데그 미사일이 바로 V-2 로켓 미사일이었다. 1944년 9월 8일부터 1945년 3월 27일까지 총 1,400개의 V-2 로켓 미사일이 수도 런던과 노리치에 발사되었고총 3,000명이 사망했으며 6,500명이 부상당했다.

(런던에 모여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를 환호하는 런던 시민들)


(성조기와 유니온 잭 깃발을 같이 흔드는 영국인, 승리의 기쁨을 표현한 듯 하다.)

 

많은 사람들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공습을 얘기하면 1940년부터 1941년까지 있던 영국에 대한 대공습을 떠올린다이 사례들이 대중매체에서 압도적으로 더 많이 등장하는 것도 영향력이 클 것이다앞에서 언급한 나니아연대기나 피터팬 등등그러나 영국에 대한 독일의 공습은 항공기를 동원한 경우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1달 전인 1944년 5월까지였고그 공습의 범위를 V-1과 V-2 미사일까지 포함시키면 1945년 3월 27일까지로 확장된다즉 이 얘기는 독일이 1942년부터 연합군의 공습을 받으면서도 폭격을 계속했으며전쟁에서 패배하기 두 달 전까지 공습을 가했던 것이 된다물론 독일은 그 이후 아무런 영향력이 없었고 1945년 5월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했다.

 

참고자료

 

전쟁영화로 마스터하는 2차세계대전(유럽전선), 이동훈가람기획, 2007

 

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 100, 정토웅가람기획, 2010

 

폭격김태우창비, 2013

 

영국 전투마이클 코다이동훈열린책들, 2014

 

아돌프 히틀러 결정판 II, 존 톨랜드민국홍페이퍼로드, 2019

 

London: The Baby Blitz and V-Weapons, 19411945, Historic England(인터넷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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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우르바노 2세는 10951127일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첫 번째 십자군 원정을 개시하며 이렇게 말했다.

 

신실한 자들에 맞서 방자하게 개인적인 전쟁을 발이는 데 익숙해진 사람들이여! 이교됴들을 향해 진격하자... 오랫동안 약탈자였던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병사가 되게 하자. 한때 형제들과 친지에 맞서 싸우던 사람들을 이제 당당하게 야만인과 맞서 싸우게 하자. 몇 푼의 은 조각 때문에 용병이 됐던 사람들에게 이제 영원한 보상을 받게 하자.”

 

교회는 서유럽 전역에 영지를 보유한 거대한 봉건 기업이었다. 교회는 권력과 부를 놓고 속세의 봉건 군주와 경쟁했다. 봉건 지배자와 마찬가지로 주교들은 해외에 폭력을 수출함으로써 자국의 평화를 유지하고 싶어 했다. 십자군 원정을 요청하자 반응은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수천 명이 즉각 부름에 응했다. 엄청난 봉건 군대가 1097년 시리아로 들어갔고 1098년 안티오크를 함락했으며 예루살렘을 정복했다.

 

십자군은 어딜 가든 살육과 약탈과 파괴를 일삼았다. 남자, 여자, 아이 할 것 없이 함락된 도시의 거리에서 학살됐다. 포로들은 수시로 처형당했다. 십자군은 이슬람 사원, 유대교 회당, ‘이단교회를 샅샅이 뒤졌다. 수레는 강탈한 물품들로 가득 찼다. 네 개의 십자군 국가가 세워졌다. 봉건시대의 중강기갑부대가 전술적으로 투입된 덕분이었다. 그러나 십자군은 작은 규모의 군사 엘리트로 유지됐다. 500명의 기사들이 안티오크 공국을 지켰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군사력에 투자해야만 했다. 그만큼 집중적인 잉여 축적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들은 아랍 소작농을 극단적으로 착취했고 무역 대상들을 약탈했으며 이웃한 이슬람 국가들과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십자군은 중동에 아주 쉽게 침입했다. 그곳은 민중의 신망을 잃은 왕궁의 독재자들이 지배하는 몇몇 개의 라이벌 국가로 이미 뿔뿔이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에 시민사회와는 결별한 상태였다. 이슬람 통치자들은 대부분 십자군들과 합의하려 했다. 그러나 지속적인 평화는 불가능했다. 두 가지 모순이 작동했기 때문이다. 첫째, 봉건 정착민 국가들의 체제는 취약하고 불안정했기 때문에 합병되길 원했다. 더 많은 기사를 지원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토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는 이슬람 통치자들에게 직접적인 위협이 됐다. 둘째, 십자군 국가 내부에서 군사적 축적이 더 필요해지자 원주민들에게 더 무거운 세금, 임대료, 노동 부역을 받아야만 했다. 그 결과 십자군들은 무슬림 속국들에게 미움을 받았고 전쟁에서 자신들을 방어해 줄 원주민 군대를 키워낼 수 없었다.

 

첫 번째 십자군의 충격과 공포는 한 세대 동안 이슬람의 저항을 무너뜨렸다. 그러나 이슬람 국가 통치자에 대한 십자군의 위협이 다가오자 이슬람은 정치적으로 중앙집권화 과정을 밟았다. 북시리아와 북이라크는 1128년에 통합되었다. 그 후 근처의 십자군이 지배하던 에데사 카운티를 탈환, 1144년에 합병했다.

 

2차 십자군 전쟁(1146~1148)은 이슬람의 부활에 맞서 일으킨 전쟁이었지만 엄청난 실패로 끝났다. 무적의 십자군 신화는 무너졌다. 다마스쿠스와 남시리아는 이슬람 국가로 편입되었고 안티오크 십자군 공국의 영토는 작은 해안 지역으로 밀려났다. 마침내 1183년 살라딘의 영도 아래 이집트가 시리아와 합쳐졌다. 이슬람의 저항이 폭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살라딘은 봉건 십자군에 대항해 인민의 성전 지하드를 소집했다. 바야흐로 이슬람 세력은 선제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118774일 하틴 전투에서 살라딘은 3만 명을 이끌고 예루살렘 십자군 왕국의 군대 전원을 무찔렀다. 곧 이어 예루살렘 도시 전체가 함락됐다. 몇 차례 원정이 더 있었지만 십자군 국가는 되찾을 수 없었다. 이 모든 과정이 한 세기가 넘도록 이어졋지만 그들의 성과 영토는 하나둘씩 줄어가기만 했다.

 

심바군 왕국들은 중동 지역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통치자들은 힘과 공포에 의존하는 잔인한 착취자였을 뿐이다. 이슬람 통치계급이 분열하고 타락했던 시기에만 십자군 왕국들은 그곳을 지배할 수 있었다. 그들의 폭압적인 침략은 오히려 이슬람인들에게 투쟁을 위한 단합이 필요하다는 것을 일깨웠고 정체성을 확립시켜줬으며 이슬람 부흥의 촉매제가 되었다.

 

십자군 전쟁은 또한 서구 봉건주의의 한계를 드러냈다. 기사와 성을 유지하는 비요ᅟᅧᆼ이 너무 많이 들었다. 그만큼 엄청난 착취가 필요했다. 전사 계급의 폭력은 민중의 재산과 안전에 영구적인 위협이 됐다. 봉건제의 폭력으로 이런 모순들을 억누를 수는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다. 봉건주의는 합의가 바탕이 되는 안정적인 사회질서를 만들어 낼 수 없는 체제였다.

 

본국에서는 이런 모순을 틈타 새로운 사회세력이 구질서 안에서 생겨났다. 왕들은 봉건 영주 보다 높은 지위로 올라섰다. 각 계층별 세력들 역시 위세를 더 키워갔다. 젠트리(Gentry), 요먼(Yeoman, 자작농)은 귀족들의 무정부 상태에 맞설 왕실의 질서를 지키기 위해 모였다. 새로운 사회세력은 새로운 방식의 전쟁을 도입했다. 창과 활, 총으로 무장한 보통 남자들은 봉건시대 기사가 누린 전쟁터의 패권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출처: 좌파세계사 p.204~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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