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엔비엔푸 - 1945~1954 베트남 독립전쟁 회고록
보응웬지압 지음, 강범두 옮김 / 길찾기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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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 프랑스를 패배시킨 디엔비엔푸 전투(The Battle of Dien Bien Phu)20세기 역사에 있어 식민지 지배를 종결시킨 상징과도 같은 사건이다. 디엔비엔푸 전투의 승리는 프랑스의 제국주의적 야욕으로 8년간 지속되던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종결시켰고, 베트남이 독립국가로서 공식적으로 등장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제네바 협정에 따라 남북으로 분단된 베트남은 20년 동안 또 다른 전쟁을 치러야 했지만,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의 승리는 식민주의에 맞서 자유와 독립을 쟁취하고자 했던 대다수의 베트남인들에게는 영광적인 승리였다. 식민주의에 맞서 영광적인 승리를 거둔 이 전투를 보다 더 자세히 알고 싶었던 필자는 이번에 길찾기 출판사에서 출간한 보 응우옌 잡(Vo Nguyen Giap)장군의 회고록 디엔비엔푸를 읽게 됐다.

 

작년 12월 밀리터리 관련 책들을 많이 출간하는 길찾기 출판사에서 출간한 보 응우옌 잡(Vo Nguyen Giap)장군의 회고록 디엔비엔푸는 그의 또 다른 회고록인 디엔비엔푸로 가는 길디엔비엔푸의 합본이다. 책 디엔비엔푸는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프랑스 식민주의에 맞서 자유와 독립을 위해 싸웠던 호치민(Ho Chi Minh)을 포함한 베트남 공산당 인사들과 민중들이 전개한 투쟁의 기록으로써, 당시 베트남인들이 어떻게 프랑스 제국주의에 맞서 승리를 쟁취했는지를 알려주는 책이다. 그렇다면 디엔비엔푸 전투가 종결시킨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어떤 전쟁이었을까?

 

책의 시작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중국의 지원을 받아 반격에 나서던 동케 전투(Battle of Dong Khe)’부터 시작한다. 동케 전투를 시작으로 책은 홍강 삼각주 전역, 드라트르 장군의 반격, 호아빈 전투, 응이하로 점령, 라오스와 캄보디아에서의 전투들, 베트남 북부와 중부 그리고 남부에서의 투쟁과 마지막으로 디엔비엔푸 전투까지 포괄한다. 1950년부터 1954년까지 약 4년간 베트민군이 치렀던 수많은 전투들은 디엔비엔푸 전투까지 가는 하나의 과정이었다. 이 과정 속에서 잡 장군 휘하의 베트민군은 무수히 많은 프랑스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고 이들의 사기를 저하했으며, 각 전투 마다 수백 명 내지는 천명 이상 단위의 프랑스군을 사살하거나 생포했었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베트민군은 무수히 많은 프랑스군을 사살하거나 생포했고,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이 궁극적으로 영광스러운 디엔비엔푸 전투의 승리로 이어졌다.

 

위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주로 북베트남 지역에서 치러줬지만, 라오스와 캄보디아, 베트남 중부와 중부고원지대 그리고 베트남 남부를 포괄한 인도차이나 반도 전역에서 전투가 전개된 전쟁이었다. 물론 베트남을 침략한 프랑스의 주력은 베트남 북부에 있었지만, 다른 전선에 있던 베트민들 또한 강력한 프랑스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고, 많은 물자와 무기를 노획하기도 했었다. 1950년 당시 베트남 남부에서 있었던 전과를 예시로 들 수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남부에서는 제7구역에서 7번 국도와 14번 지방도로를 차단할 목적으로 투저우못(Thu Dau Mot)에서 벤깟(Ben Cat) 작전을 전개해 게릴라전 수행을 위한 여건을 조성하고, 메콩 삼각주 보급로를 소통시켰다. 작전사령부는 사령관 토끼(To Ky), 참모장 레득아인, 정치지도원 응우옌 주 아인(Nguyen Duy Anh)이 보직되었다. 그 작전은 남부 베트남의 동부지방에서 프랑스에 대한 저항으로 시작된 최초의 작전이었다. 한 달 동안 지속된 작전 기간 중, 우리 군은 전술기지에 대한 38회의 공격, 증원군에 대한 2차례의 매복 공격 및 차량화 부대에 대한 43회의 공격을 감행했다. 그들은 두 차례 소탕작전과 204회의 강습작전을 통해 사살 509, 부상 155, 생포 120, 10여 개소의 감시초소 및 검문소, 12개의 교량, 84대의 차량, 5대의 오토바이 및 7대의 모터보트를 파괴했으며, 총기류, 탄약, 장비 및 식량을 노획했다.”

 

출처 : 디엔비엔푸 p.98~99

 

194611월 프랑스의 하이퐁 폭격과 12월 하노이 전투를 시작으로 일어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The First Indochina War)은 전쟁 초기 프랑스군에게 아주 유리하게 돌아가는 전쟁이었다. 전쟁 초기 프랑스는 하이퐁에서 무차별 함포사격으로 6000명의 민간인을 학살했고, 12월에는 베트남 민주 공화국의 수도인 하노이를 점령했으며, 194710월에는 레아 작전(Operation Lea)’이라 하여 10,000명 이상의 병력을 투입한 대규모 공세를 전개했다. 그 공세는 호치민과 베트민의 해방구인 비엣박을 대상으로 한 공격이었지만, 초반의 신속한 습격과는 달리 전선이 교착되었다. 이후의 전선은 점차 베트민에게 유리해지기 시작했고, 1949년 중국 혁명의 승리와 더불어 1950년에는 베트민 군대가 프랑스군에 맞선 대대적인 반격을 개시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1950년 당시 잡 장군 휘하의 베트민 군대는 가을과 겨울에 걸쳐 수많은 프랑스군을 섬멸했는데 동케 전투에서만 최소 300명 이상을 사살하거나 생포했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의 정예부대들이 축출되었고, 그 부대들 중에는 프랑스 해방 전쟁에서 라인강을 건넜던 최초의 부대이자 북아프리카에서 명성을 떨쳤던 타보르 부대도 있었다.

 

잡 장군의 회고록 디엔비엔푸를 읽다보면 프랑스군이 식민지 지배를 유지하기 위해 온갖 악행들을 일삼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프랑스군은 베트민을 축출하기 위해 인근 마을로 들어가 민간인들을 죽이고 학살했다. 아이와 노인들이 프랑스군의 총에 희생되기고 했고 여성들은 강간당했으며, 마을에 있던 물소는 사살되고 식량은 약탈당했다. 반면 베트민들은 민중을 존중했고, 그들과 함께 연합하여 프랑스 식민주의자들에 맞서 싸웠다. 당시 프랑스군이 베트민군을 타격하기 위해 어떤 행동을 했는지 책에 아주 명확하게 나와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프랑스는 우리 식량 보급을 고사시키고 의 가치를 평가절하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냈다. 그들은 베트남의 인력과 식량의 주 근원인 메콩 삼각주와 홍강 삼각주를 점령하고, 임시 피점령지역에서 해방 구역으로 가는 모든 길을 차단했다. 그리고 많은 지역에서 추수를 마친 농민들에게 벼를 특정한 장소로 집하하도록 하고, 가족의 수를 기준으로 필요 최소한의 양만 되돌려줬다. 그리고 평정작전을 수행할 때는 베트민군을 찾는 한편으로 농작물과 생산기구들을 파괴했다. 그들은 물소 한 마리를 죽이는 것을 게릴라 두명을 죽이는 것과 동일시했다. 벼나 다른 곡식을 발견하면 불태우거나 강에 쏟아버렸다. 프랑스인들은 항공기와 대포를 사용해 논을 파괴하고, 농부들이 논에서 일하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상륙용 장갑차로 논을 깔아뭉개기도 했다. 더 야만적인 것은 탁후옹(Thac Huong), 바이트엉(Bai Thuong), 퐁락(Phong Lac), 반타익(Ban Thach) 및 도르엉(Do Luong)의 댐에 대한 폭격으로, 이로 인해 200,000헥타르 이상의 논이 말라버렸다.”

 

출처 : 디엔비엔푸 p.197~198

 

위에서 상술한 바와 같이 베트민은 민중과 함께 혁명투쟁을 했다. 혁명투쟁을 하던 베트민들은 마을에 머물 경우 민간인들의 의사를 존중했다. 베트민은 절대로 민가에서 약탈하지 않았고, 마을 사람들과 친해지기 위해 그들을 인격적으로 존중했다. 소수민족 마을의 경우 그들의 종교와 관습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베트민은 민중에게 혁명전쟁의 대의가 무엇인지 아주 명확하게 알려줬다. 즉 베트민은 민중에게 우리가 왜 프랑스에 싸워야 하는지 그리고 왜 이 전쟁을 지지해야 하는지를 알려줬다. 베트민이 민중과 공동투쟁을 했다는 사실은 호치민 주석의 연설에 아주 잘 드러나 있다.

 

농민계급은 국가의 토대입니다. 그들이 인민의 대다수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저항전쟁을 승리로 매듭지으려면, 그리고 인민의 민주주의를 실현하려면, 농민들의 경제적 이익이 현실적으로 증진되고 경작지는 농민들에게 할당되어야 합니다.”

 

출처 : 디엔비엔푸 p.338~339

 

프랑스군은 무수히 많은 마을에서 베트남인들과 소수민족들을 괴뢰군대에 징집했고, 꼭두각시 황제인 바오다이를 내세워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민주주의 대 공산주의의 대결로 포장하고자 했다. 이런 프랑스의 전략은 전쟁에서 미국의 도움을 받기 위한 하나의 책략이었고, 냉전이 격화됨에 따라 미국은 프랑스에게 식민지 지배를 유지 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었다. 개인적으로 책을 읽으면서 이 부분에서 많은 분노를 느꼈다. 당시 미국은 반공의 논리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접근했다. 특히나 1950년 한국전쟁은 미국에게 있어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반공주의 전쟁으로 보게 되는 하나의 분수령이었다.

 

미국의 군사물자 원조는 19511,490억 프랑에서 19521,960억 프랑으로 증가했고, 인도차이나로 항공기, 전투차량, 중화기, 탄약, 상륙함, 차량, 무전기, 네이팜탄, 연료를 신속히 보내주었다. 미국은 19521월까지 항공기 178, 각종 함정 170, 다수의 전투차량, 탄약 및 통신장비룰 포함해 120,000t의 전쟁 물자를 인도차이나에 보급했다. 그들은 인도차이나 전쟁의 전체 전비 가운데 40%를 담당했다고 볼 수 있다. 1950년 동케 전투를 시작으로 북부 베트남의 홍강 삼각주 지역을 장악했던 베트민이 1951년 초에 프랑스군을 향한 총 반격에 나섰을 때 그들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이유는 바로 프랑스의 드 라트르 장군이 미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은 네이팜 폭탄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런 미국의 지원은 1954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됐고, 전쟁 말기 미국은 프랑스 전쟁비용의 80%를 부담했다.

 

잡 장군이 역사적인 디엔비엔푸 전투를 전개하기 까지, 프랑스군을 상대로 치렀던 전투는 대부분 승리의 기록이었다. 비록 1951년 잡 장군이 주도했던 총 공격은 프랑스군이 미국에게 지원받은 네이팜 폭탄을 사용하면서 일시적인 후퇴로 끝났지만, 1952년 호아빈 전투에서 베트민군은 수개월간의 전투 끝에 대략 6000여 명의 적군을 소멸(사살, 포로, 실종)시켰다. 이 전투는 미국의 역사학자인 버나드 폴(Bernard Fall)호아빈 전역에서 프랑스가 입은 병력과 무기의 손실은 국경 전역이나 이후 발생한 디엔비엔푸 전역의 피해와 비교해도 결코 작지 않았다.”고 얘기했을 정도였다. 호아빈 전역을 시작으로 베트민군은 응이하로에서도 승리를 거뒀다.

 

1953년 춘하 기간 중 베트민군은 홍강 삼각주에서는 7,200명을, 연합구역에서는 5,970명을 소멸시키는 성과를 이룩했다. 1952년과 1953년 북베트남 지역에서 많은 승리를 이룩한 잡 장군의 베트민군은 라오스 지역에서도 수파누봉 왕자를 포함한 라오스 공산주의자들이 이끄는 라오스 혁명군과 연합하여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이룩했다. 특히나 삼네우아의 해방은 크나큰 승리였다. 수파누봉 왕자는 삼네우아 해방은 침략자들에 대한 라오스 모든 민족들의 수년간에 걸친 투쟁의 결과입니다. 베트남-라오스 결속의 결과이며, 공동의 적에 대항해 싸운 베트남 인민과 군의 무조건적인 지원의 결과입니다.”라고 말했다. 20세기 최고의 명장 보 응우옌 잡 장군은 책에서 다음과 같이 얘기하고 있다.

 

“1953517, 98연대는 제148연대와 협조해 무옹코아를 두 번째로 공격했다. 무옹코아는 남오우강 우안으로 디엔비엔푸에서 50km가량 떨어져 있었다. 우리는 약 300명의 적을 소멸 또는 생포했다. 무옹코아 지휘관인 뙬리에(Teulier) 대위도 포로 중 한 명이었다. 베트남과 라오스 군은 북부 라오스 작전에서 약 2,800명의 적을 소멸시켰는데, 이는 라오스에 있던 적 병력의 1/5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이와 같이 4,000이상의 지역과 수십만 명의 주민들을 해방시켰다. 이 지역은 삼네우아 전역과 시엥쿠앙 및 퐁살리성의 일부를 포함했으며, 북부 라오스 지역의 1/5에 해당했다. 마강 및 추강 유역의 땅도 해방되었다. 라오스 저항군은 처음으로 광활한 혁명기지를 갖게 되었다. 라오스 혁명 후방은 우리의 북쪽 해방구역 및 제4구역과 인접했다. 그래서 중국과 인접한 북베트남 국경지역의 광대한 지역이 해방된 후, 이제 라오스와 인접한 서쪽 변경의 일부가 해방된 것이다.”

 

출처 : 디엔비엔푸 p.367~368

 

1953년 새로 임명된 프랑스군 사령관 앙리 나바르(Henri Navarre)는 그해 11월 라오스 국경지대에 있는 디엔비엔푸 요새에 군대를 배치하게 되는데, 10,000명 이상의 군대를 투입했다. 그 이후에도 병력을 지속적으로 증강하고 지원하여 디엔비엔푸 병력 규모가 16,200명까지 증가했다. 잡 장군이 책에서 쓴 표현을 빌리자면 디엔비엔푸는 완전히 무장된 방어체계로서 전반적인 조직을 갖추고 있었고, 미국과 프랑스는 베트민이 디엔비엔푸를 공격할 수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그들이 예상과는 달리 탁월한 전략가였던 보 응우옌 잡 장군은 디엔비엔푸를 공격할 계획을 세웠고, 연공연진의 접근법으로 디엔비엔푸 요새를 함락시키고자 했다.

 

잡 장군이 지휘하는 5만 명 이상의 군대는 200문 이상의 대포를 산에다 배치했다. 트럭이 이동할 수 없는 곳으로는 대포를 인력으로 진지까지 끌고 갔다. 대포를 배치하기 위해 일부 병사들은 대포가 굴러 떨어지자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여 이를 막기도 했다. 절대로 포를 적 집단전술기지 근처까지 옮길 수 없다는 프랑스인들의 예상과 달리 베트민들은 수백 톤에 달하는 대포와 탄약을 가파른 경사와 깊은 계곡을 극복하며 전장으로 옮겼다. 심지어 옮겨진 대포는 프랑스군의 105mm, 155mm 야포 공격에도 견딜 수 있는 유개포상이 구축된 곳에 배치됐다. 또한 수만 명의 민간인이 디엔비엔푸 전선에서 베트민군을 자발적으로 도왔다. 민간인들은 식량과 물자를 인력이나 자전거 내지는 말이나 당나귀를 이용하여 옮겼다. 이렇게 만발의 준비를 끝낸 베트민군은 195431317:00시에 포격을 개시했고, 점진적으로 프랑스군의 진지와 거점을 무너뜨렸다. 초기 베트민군의 포격으로 프랑스군은 비행장을 잃었고, 물자를 비행기로 수송 받으며 점차 고립되어 갔다. 잡 장군이 지휘하는 베트민군은 19545756일간의 포위 끝에 디엔비엔푸 요새를 함락시키는데 성공했다. 잡 장군은 이 영광적인 승리를 책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총공격을 위한 준비가 끝났다. 195457일 오전, 작전 성공을 보장하기 위한 준비가 한창 진행 중일 때, 적이 이상한 행동을 보였다. 극소수의 항공기가 식량만을 공수투하할 뿐, 탄약을 운반해 온 항공기들은 하노이로 돌아갔다. 적 지역 여기저기서 무기를 파괴하는 것 같은 폭발음이 들려왔다. 일련의 병사들이 무기와 탄약을 넘롱강에 던져 놓고 있었다. 우리는 적이 혼란에 빠졌다고 판단했다. 아군은 준비 명령을 수령했다.

 

14:00, 어느 아군 부대가 507번 거점을 공격했다. 적은 미미한 저항 끝에 항복했다. 이 승리에 이어 우리는 넘롱강 좌안의 508, 509번 진지를 소멸시켰다. 적이 큰 혼란에 빠져 전투 의지를 상실했음이 명백해졌다. 백기가 여기저기에 내걸렸다. 15:00, 우리는 밤이 올 때까지 기다릴 필요 없이, 집단전술기지에 대한 총공격을 곧바로 실시하라고 명령했다. 아군 여단들은 동쪽과 서쪽에서 상호 협조 하에 적 지휘소를 직접 타격했다. 비록 적은 아직 10,000명이나 남아있었지만 완전히 사기가 저하된 상태였다. 아군이 가는 곳마다 적은 백기를 들고 항복했다.

 

17:30, 우리는 지휘소를 탈취했다. 드 카스트리와 참모들은 모두 생포되었다. 계곡에 있던 모든 적들이 나와서 항복했다. 그들은 포로로서 잘 취급되었다. ‘결전필승이라는 구호가 적인 깃발들이 디엔비엔푸 상공에 휘날렸다. 우리는 바로 그날 야간에 남부구역을 공격했다. 그곳에 있던 2,000여 명의 강력한 적들은 북부 라오스로 철수를 시도하고 있었다. 아군은 추격을 단행해 20:00시까지 따라잡았다. 우리는 자정까지 그들 모두를 생포했다. 55일간 지속된 전투 끝에, 디엔비엔푸에 있던 적 집단전술기지는 완전히 궤멸되었다. 우리의 역사적인 디엔비엔푸 작전은 완전한 승리였다. 1953~1954 동춘 기간의 전략적 공세가 위대한 승리로 끝을 맺은 것이다.”

 

출처 : 디엔비엔푸 p.491~493

 

보 응우옌 잡 장군의 자서전 디엔비엔푸는 자유와 독립을 위해 싸운 베트민 투사들의 투쟁 과정과 디엔비엔푸에서 영광스러운 승리를 쟁취하는 과정을 보다 자세히 알 수 있다. 책에 기술되어 있듯이, 1950년부터 1954년까지의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기록은 베트민군이 쟁취한 승리의 연속이었고, 최종적인 전쟁 승리인 디엔비엔푸 전투 승리를 향해 나아가는 연속된 과정이었다. 이 역사적인 디엔비엔푸 전역은 베트민 군과 인민이 이룩한 가장 위대한 승리였다. 디엔비엔푸 전투는 거의 1세기에 걸친 항불전쟁에서 호치민과 보 응우옌 잡, 베트남 공산당 지도부들 그리고 베트남 민중이 거둔 가장 위대한 승리였다. 역사상 약소국이 제국주의자, 식민주의자들의 침략군을 상대로 거둔 가장 위대한 승리 가운데 하나였다.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베트민군은 총 16,000명 이상의 적을 사살하거나 생포했고, 집단전술기지의 최고사령부를 전부 포로로 잡았으며, 거기에는 장군 1, 대령과 중령 16, 장교와 부사관 1,749명이 포함되었었다. 또한 62대의 미군 폭격기, 전투기, 수송기를 격추시켰다. 다른 전선에서는 177대를 격추했다. 프랑스군 병력은 17개 정예 보병대대(7개 공정 대대)뿐만 아니라 3개 포병대대와 약 1개 공병대대가 있었는데, 베트민은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이런 프랑스 최정예부대를 섬멸했다. 따라서 디엔비엔푸 전투는 엄청나게 위대한 승리였다고 할 수 있다. 보 응우옌 잡 장군은 앙리 나바르가 패배한 이유를 자유와 독립을 위해 싸우던 베트민군의 의지를 간과했다는 사실에서 찾았다. 필자 또한 이와 같은 잡 장군의 주장에 동의한다. 잡 장군의 명언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나바르는 디엔비엔푸를 보강하고 우리 정규군을 상대로 전투를 수행한다는 전략적 결심을 확고하게 견지했다. 그리고 이 일대를 우리가 계곡을 공격하더라도 심각한 손실을 입힐 수 있는 이상적인 전장으로 여겼다. 나바르가 이 진지에 집중한 이유는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저지른 실수는 디엔비엔푸의 장점에만 주목했을 뿐, 약점을 보지 못했다는 데 있다. 더 큰 실수는 부르주아 전략가의 개념에 골몰하여 국가의 독립, 자유, 그리고 사회주의를 구하기 위해 싸우고 있던 인민군과 전 인민들의 어마어마한 가능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우리 인민과 군의 진화와 괄목할 만한 성장, 그리고 필승의 신념을 가진 인민군의 불굴의 투쟁정신을 깨닫는 것은 나바르에게 여전히 매우 어려운 과제였다.”

 

출처 : 디엔비엔푸 p.452~453

 

따라서 프랑스 최정예부대가 디엔비엔푸에서 패배한 이유에는 이러한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이 문제의 근원을 찾자면 프랑스 제국주의 그 자체에 있었다. 디엔비엔푸 전투는 베트남 민중과 자유와 독립을 위해 싸우던 공산당 지도부와 베트민 병사들에겐 영광스러운 승리였지만, 다른 한편으로 전쟁을 일으켰던 프랑스 제국주의자들과 이를 지원하던 미국의 제국주의자들 그리고 식민주의에 협력한 베트남의 식민주의자들에게는 뼈저린 패배였다. 뼈저린 패배를 경험한 베트남의 식민주의자들은 제네바 협정 이후 남베트남에 정착했고, 이들이 남베트남 사회의 지배세력이 됐다. 따라서 디엔비엔푸 전투는 이들에 맞서 싸운 민족해방투쟁이자, 1차 인도차이나 전쟁 이후 이들이 치르게 될 ‘20년의 전쟁또한 민족해방투쟁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역사다.

 

책에는 나오지 않는 이야기지만 디엔비엔푸 전투는 우리하고도 연관이 있다. 당시 미국 정부는 한국의 이승만 정부가 19541월에 자청한 한국군 1개 사단의 파병도 재검토 했었다. 이승만 정부는 한국전쟁에서 유엔군으로써 도와줬던 프랑스에 대한 보답과 동남아시아에서의 반공정신 고취 및 강화하고자 파병하려 했었다. 물론 미국이 거절해서 실행되지 않았지만, 식민주의 전쟁에 군대를 파병하려 했던 이승만 정부의 행동은 참으로 부끄러운 역사라 할 수 있다.

 

길찾기 출판사에서 출간한 디엔비엔푸는 베트남의 명장 잡 장군의 입장 즉 전쟁을 승리로 이끈 당사자인 베트남인들의 입장에서 바라본 디엔비엔푸 전투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장점을 가지고 있다. 또한 이 책이 잡 장군의 두 회고록인 디엔비엔푸로 가는 길디엔비엔푸의 합본으로서 디엔비엔푸 전투뿐만 아니라 영광스러운 승리를 만들어낸 일련의 전투 과정(1950년부터 1954년까지 인도차이나 반도 전역에서 벌어진 전투들)을 보다 자세히 알 수 있다는 점에서도 아주 좋은 자료다. 무엇보다 2020년 기준으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과 디엔비엔푸 전투를 주제로 한 유일무이한 책이라는 사실에서 그 중요성과 상징성이 매우 높다. 특히나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 대해 관심이 많은 필자로선 이 책을 읽을 수 있어서 크나큰 영광이었다. 베트남 전쟁의 진실을 알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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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의 뉴라이트 세력을 포함한 친미 극우세력들이 찬양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는 인물이 있다. 대표적인 인물 3명을 뽑자면, 3명은 각각 대한민국과 미국 그리고 영국출신이다. 한명은 건국의 아버지로 미화시키는 최악의 학살자 이승만이고, 다른 한명은 1980년대 미국 사회를 반공주의화 시킨 영화배우 출신의 대통령인 로널드 레이건이며, 또 다른 한명은 조선일보를 포함한 어용매체들이 영국병을 고친 위대한 여인으로 평가하는 마가렛 대처(Margaret Thatcher).

 

2013년 당시 영국 총리었던 데이비드 캐머런(David Cameron)은 마가렛 대처가 그냥 나라를 이끌기만 했던 것이 아니라, 나라를 구원했다라고 하며 찬양했다. 당시 박근혜 정권에 놓여있던 한국의 극우언론들 또한 대처를 찬양해대기 시작했다. 특히나 박근혜를 숭배하던 한국의 조중동(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영국병을 치유했다”, “영국을 구했다더나아가 노조를 파괴하고 운동을 탄압한 대처의 위대한 리더십을 배워야 한다는 망언을 일삼았다. 심지어 대통령 자리에 오른 박근혜는 예전부터 한국의 대처가 되겠다라고 자처해 왔었다. 그러나 영국의 극우보수주의자들과 한국의 극우보수주의자들이 찬양하는 인물인 마가렛 대처는 참으로 사악하고도 잔인한 통치자이자 제국주의자였다.

 

대처는 집권 기간 동안 영국 자본주의의 경쟁력을 높이려고 했다. 1930년대 경제대공황으로 매장되었던 자유시장주의를 다시 부활시키고자 했고, 임금을 낮추고, 노동 강도를 높이고, 공공지출을 줄이고, 노동조합을 탄압했다. 1980년대 영국에서 광원들의 파업이 일어났을 때, 이들을 고립시켜 이들의 투쟁을 패배하게 만들었다. 그 때문에 광산 마을 주민들은 1년 내내 고립된 싸움을 계속하다 패배했다. 대처는 아일랜드에서 더러운 전쟁을 계속했다. 아일랜드공화국군 수감자들이 양심수 지위 인정을 요구하며 단식투쟁을 벌였을 때, 양보는 전혀하지 않고 그들이 굶어 죽도록 내버려두었다. 대처는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과 더불어 1980년대 신자유주의을 개척했다. 대처는 노동자들의 투쟁과 파업을 강력한 물리적 힘과 고립을 통해 탄압하려 했고, 소수의 부유층들을 위한 정책을 선호했으며, 그 혜택은 결국 극소수의 상류층들에게만 돌아갔다.

 

또한 대처는 전쟁이라면 물불을 안가리는 인물이었다. 그는 1982년 식민지를 무력으로 되찾겠다는 터무니 없는 생각을 가지고, 포클랜드 전쟁(Falkland Islands War)을 일으켜 영국군 수백명 뿐만 아니라 아르헨티나인 수백 수천명을 죽게 만들었다. 또한 대처는 199011월 자신이 총리자리에서 쫓겨나게 됐을 때에도, 미국이 사담 후세인과 이라크를 상대로 벌인 걸프전쟁이 끝날 때까지 총리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이처럼 대처는 로널드 레이건처럼 침략전쟁이 필요하다면 마음껏 해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이다.

 

대처가 추구한 신자유주의는 극심한 빈부격차와 경제불황을 동반했다. 대처는 1989~1990년 인두세를 도입하여 백만장자와 빈민에게 세금을 똑같이 부과하려 했고, 신자유주의 시대 최초의 금융 거품 호황을 부추겼으며, 그게 결국 경제침체로 이어졌다. 대처는 자본주의의 근본적 문제를 해결하지도 못했고, 이를 양극화시켰다. 대처는 포클랜드 전쟁을 일으키는 제국주의적인 침략전쟁을 자행했고, 미국 레이건 정부와 더불어 반공주의를 강화했다. 또한 걸프전쟁에서도 아주 큰 욕심을 부렸다. 한국의 극우세력들이 미화하는 대처는 제국주의자였다. 2013년 대처가 사망했을 때, 대다수의 영국인들은 이를 기뻐했다. 앞으로도 사회의 정의를 추구하는 이들에게 마가렛 대처는 리더십이 뛰어난 여인이 아닌 살인자이자 제국주의자로 기리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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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패스트푸드 회사 맥도날드에서 ‘1955 버거를 텔레비전과 유튜브 광고를 통해 홍보하기 시작했다. 광고를 보면 백인 남성이 1950년대 스타일의 클래식 카를 타고 가다가 맥도날드 드라이브 스루에 들려 1955년 버거를 주문한다. 남성이 주문을 하자 갑자기 정전현상이 일어나더니 강력한 전파에 맞아 2019년 대한민국 서울로 순간 이동하여 1955년 버거를 먹게 된다. 버거를 먹은 남성은 와우! 미래의 1955년 버거네라는 대사를 치며 광고는 햄버거 신메뉴를 홍보하며 끝난다.

 

참으로 흥미로운 광고였다. 햄버거 이름에 1955년이라는 연도가 붙은 것이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다. 1955년이라는 이름이 붙은 데에는 맥도날드의 역사하고 크게 연관이 있는 것 같았다. 지난학기 미국 역사를 공부하면서 왜 맥도날드가 홍보한 1955 버거에 1955라는 연도가 붙는지 생각해보니 참으로 흥미로운 결론을 도출해볼 수 있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선 미국의 현대사를 알 필요가 있다. 우선 1955년은 미국이 가장 큰 호황을 누리던 1950년대다. 1950년대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을 겪으며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경제 대호황을 누렸고, 1920년대 미국을 능가하는 풍요와 번영을 누렸다. 영화 플레전트 빌(Pleasantville)’을 보면 당시의 풍요로움과 번영을 잘 알 수 있다.

 

1950년대 미국의 풍요로움은 당시의 중산층 계급에서 나타났다. 미국의 중산층들은 넓은 마당을 가진 주택에서 살며 자동차를 최소 2~3대 이상이나 보유할 수 있었고, 대형마트에서 쇼핑을 마음껏 즐겼으며, 미국의 상징과도 같은 음식인 햄버거와 감자튀김 그리고 음료수 콜라를 즐겼다. 또한 텔레비전의 보급도 늘어 1957년에는 대략 4000만 대의 텔레비전이 미국인들에게 보급되었고, 그러한 풍요로움은 텔레비전을 통해 홍보됐다. 당시 미국 사람들이 즐겨먹던 햄버거는 어떻게 보면 자본주의적 풍요로움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패스트푸드가 미국 부의 상징처럼 비쳐졌고, 특히나 한국전쟁 이후 가난에 허덕이던 한국이나 다른 자본주의 국가에게는 이상적인 미국으로 비쳐줬기 때문이다.

 

따라서 1955버거는 과거 미국이 풍요로웠던 시기를 단편적으로 나마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국내에서 만든 맥도날드 광고에선 미국 중산층들이 타는 클래식 자동차를 탄 백인 남성이 햄버거를 주문하는 장면이 나왔고, 이를 통해 미국이 번영했을 시기의 모습을 단편적으로 나마 보여줬다. 어떻게 보면 맥도날드의 광고는 그 시기의 풍요로움이 다시 한 번 왔으면 좋겠다는 희망적인 메시지가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1950년대가 미국 보수층에게는 매우 이상적인 사회로 비춰지는 시기이기에 이런 유추방법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라 생각한다. 햄버거를 통해 시대적인 의미를 생각해보니 참으로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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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dvs117 2023-06-29 2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론 지금은 단종되었지만, 맥도날드(McDonald‘s)가 2019년에 출시한 이 ‘1955 버거‘를 통해 그 속에 숨은 미국의 1950년대 생활사를 탐구해 보는 것도 쏠쏠한 재미가 있겠네요!
 

알라딘 페친 여러분, 여러분이 보기에 저는 어떤 사람입니까? 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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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24 19: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5-25 16: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어제 유튜브에서 유명한 영화 유튜버인 ‘거의없다‘님의 4월 15일 투표독려 영상을 봤다. 거의없다의 투표독려 영상의 시작은 베트남 전쟁부터 시작한다. 수많은 영화들을 통해 베트남 전쟁을 설명하던 거의없다는 수백만의 민간인을 죽인 이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를 설명하면서, 영화 ‘더 포스트(The Post)‘에 대해 이야기 한다.

영화 더 포스트는 1971년 베트남 전쟁 참전용사이자, 미국 국방부(펜타곤)에서 근무하던 양심적인 지식인 대니얼 엘스버그(Daniel Ellsberg)가 미국의 1급 기밀문서인 펜타곤 페이퍼(The Pentagon Papers)를 언론에 폭로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70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이 기밀문서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미국내의 베트남전 반전여론은 더 격화되었고, 미국이 베트남에서 철군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오늘은 펜타곤 페이퍼에 대해 얘기해볼까 한다.

펜타곤 페이퍼는 1960년대 초 미국의 존 F.케네디 대통령의 최고의 인재들 중 한 명이자, 베트남 전쟁의 주범인 로버트 맥나마라(Robert McNamara)가 주도하여 18개월에 걸쳐 작성됐다. 문서의 공식 명칭은 《미합중국-베트남 관계, 1945년~1967년》(United States–Vietnam Relations, 1945–1967)였다. 이 문서에서 미국이 한 짓거리를 대표적으로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1. 프랑스와 베트남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을 때 트루먼 정부가 프랑스에 군사 원조를 제공했으므로, 미국은 베트남 사태에 직접 개입했다.

2. 1954년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북베트남의 공산주의 정권을 붕괴시키기로 결심했다.

3.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전임자에게서 인계받은 제한 전쟁 전략을 대대적인 전쟁 개입정책으로 전환했다.

4. 존슨 대통령은 베트남에서의 비밀 전쟁을 확대하는 한편, 미국의 개입 정책이 국민에게 공식적으로 알려지기 1년 전인 1964년에 공개적인 전쟁을 개시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5. 존슨 대통령은 1965년 북베트남 폭격이 남베트남에서 베트콩의 활동을 위축시키는 데 별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라는 정보 조직의 판단을 무시하고 폭격 명령을 내렸다.

미국 대통령들은 1945년부터 베트남 문제에 지속적으로 개입해왔고, 필요하다면 국민들에게 거짓말까지 하는 대 사기극을 벌여왔다. 특히나 1964년 8월 북베트남의 어뢰정이 공격을 했다고 알려진 통킹만 사건도 미국의 조작이었다는 사실에서 이 전쟁이 미국에 의해 일어난 침략전쟁이라는 사실을 감출 수 없게 되었다.

진실을 폭로한 사실을 알게된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이를 용서하지 않으려 했다.이 문서를 처음 유출한 대니얼 엘스버그는 기밀 유출 혐의로 검찰에 기소되었고 재판에서 징역 115년형을 구형받았었다. 그러나 전쟁을 끝내고자 했던 반전운동가들과 양심적인 언론인들의 노력으로 미연방 대법원으로부터 무죄 판결을 받아 풀려났다. 이 내용은 민주화 운동가 리영희 선생께서 집필한 ‘전환시대의 논리‘의 초반부분에도 나온다.

펜타곤 페이퍼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진실은 절대로 숨길 수 없다는 사실이다. 전쟁은 아주 강력한 선동과 선전을 동원한다. 미국의 침략전쟁인 베트남 전쟁도 그러했다. 그러나 진실은 매우 추악했다. 최근들어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많이 조용해졌지만, 한국 정부는 미국의 요구에 따라 호르무즈 해협에 파병을 감행했다. 잘못된 분쟁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전쟁 책동에 휘말려서도 안되고, 반대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펜타곤 페이퍼를 통해 깨달아야 할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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