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미국의 군사 개입과 사회문제

(로드니 킹 사건 당시 촬영된 영상)


1990년대 미국은 세계 제1의 초강대국이 되었다. 1991년 소련의 해체로 인하여 구공산권 국가들은 대부분 몰락의 길을 걸었고, 걸프전쟁에서의 승리는 미군의 신화를 다시 만들었다. 미국은 걸프전쟁과 냉전에서 승리했다. 거기다 1980년대부터 대중화되기 시작한 컴퓨터가 1990년대에 들어서 더 대중화됨과 동시에 인터넷(Internet)이 발달하면서 미국 힘을 더 편리하게 전달할 수 있었다. 미국은 제1의 초강대국이 된 것에서 자부심을 느꼈겠지만, 보통 자유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문제가 매우 많은 나라였다. 1950, 60년대만큼은 아니더라도 여전히 미국내의 인종갈등은 존재했다.

(LA 폭동 당시 불타는 거리)


1991년 가을 로스앤젤레스 경찰이 흑인 운전자인 로드니 킹(Rodney King)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도로에 눕혀 50차례 이상 구타를 가해 빈사 상태에 이르게 했는데, 이 구타 장면이 비디오로 촬영되어 전국적으로 알려지면서 인종 갈등이 극심해졌다. 무엇보다 1992년 4월 백인만으로 구성된 배심원단이 폭행에 가담한 4명의 경찰관 전원에게 무죄 판결을 내리자 흑인과 히스패닉은 분노했고 그들은 거리로 나와 폭력적인 시위를 전개했다. 1992년 LA 폭동은 이렇게 시작됐다. 이 과정에서 LA에 있던 한인타운 또한 큰 피해를 보기도 했는데, 이것은 한국인들이 오랫동안 같은 소수민족임에도 불구하고 흑인들을 멸시한 결과이기도 했다. 이 폭동은 로스엔젤레스에서 5일간 전개되었고, 51명의 사망자와 2000명의 부상자 그리고 4500건의 방화 사건과 10억 달러 달하는 재산 피해를 초래했다. 로스앤젤레스 경찰이 흑인 운전자인 로드니 킹을 체포한 것에 대해선 여러 의견이 분분하지만, 흑인들이 이렇게까지 분노한 데에는 미국 지배계급들과 백인들이 흑인들을 멸시하고 차별해왔다는 반증일 것이다.

(오클라호마 연방청사 폭파 사건)


 

(영화 아메리칸 히스토리 X에서 나온 네오나치)


인종갈등이 극심한 미국사회의 지도층들은 그 시기에 소위 ‘세계화(Globalization)’를 주장하며 공식적으로 다문화 사회를 추구했지만, 이러한 움직임은 규모는 작지만 미국의 극단적 인종차별주의자들의 무차별적 테러가 일어나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기도 했었다. 1995년 4월 19일 아침 오클라호마시티의 연방 건물 앞에 주차되어 있던 노란색 렌터카 트럭이 폭팔하면서 9층짜리 연방 건물이 붕괴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 폭탄 테러로 어린이를 포함한 168명의 사망자와 80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당시 미국인들은 이 테러를 중동의 극단적 이슬람 세력이 일으킨 것으로 의심했지만, 사실 이 테러는 네오나치(Neo Nazi)가 저지른 것이었다. 이 폭탄 테러를 저질렀던 맥베이를 조사해본 결과 그는 소위 아리안 인종우윌주의자(Aryan Supremacists) 조직하고 연결고리가 있었다. 이렇듯 미국은 지배계급들이 탄생시킨 인종주의의 폐해가 곳곳에서 드러났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1990년대 미국 사회는 그야말로 감옥 및 교도소 수감자가 무수히 많았었다. 올리버 스톤이 집필한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The Untold History of the United States)에 따르면 “1980년 50만 명이었던 교도소 수감자 숫자가 20년 후, 빌 클린턴의 두 차례 임기가 끝나는 시점에는 200만 명을 기록했다.”라고 한다. 이중 수감자의 45%가 흑인이고 15%가 히스패닉이었다. 1997년 8월 16일자 FLT-AP 통신의 단신 기사에 따르면 “1996년 미국에서는 역사상 가장 많은 550만 명이 감옥에 갇혔다”라고 보도했었다. 스웨덴 공산당원 마리오 소사가 쓴 책 ‘진실이 밝혀지다’에 따르면 “이는 1995년보다 20만 명이 증가한 수치로서, 미국의 범죄자 수가 성인 인구의 2.8%에 해당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 자료는 미연방 법무부의 통계에 따른 것이다”라고 한다. 그리고 이것은 스탈린 시기의 굴라그(Gulag)에 가장 많이 수용되었던 시기의 죄수 숫자보다 300만이나 더 많은 숫자였다. 즉 이 통계가 사실이라면 미국은 소련의 굴라그 수용소보다 훨씬 더 많은 죄수를 수용했었다는 얘기가 된다.

(소말리아 내전 당시 작전을 전개하는 미군)


냉전이 끝난 이후에도 미제국의 군사 개입과 위협 행동은 계속되었다. 전편에서 다루었던 걸프전쟁 이후에도 미국은 1993년 소말리아 내전에 개입했었다. 1993년 10월 미국의 클린턴 정부는 소말리아 내전 당시 가장 세력이 큰 군벌 모하메드 아이디드(Mohamed Aidid)를 체포하기 위해 군사작전을 전개했다. 그러나 그 작전은 19명의 미군과 2000명 이상의 소말리아인이 사망하는 결과만 낳았다. 2001년 미국에서 개봉했던 어떤 영화는 미국의 이러한 군사적 도발 행위를 미화했는데, 그 영화가 바로 블랙 호크 다운(Black Hawk Down)이다. 미국의 소말리아 내전 개입은 명백한 내정간섭이었다. 소말리아 내전은 군벌들 간의 전쟁이었고, 이런 전쟁에 미국은 인권과 평화라는 수식어를 붙여 군사 개입을 감행했고 정당화했다.

(영화 블랙 호크 다운, 이 영화는 미국의 소말리아 내전 개입을 미국주의로 옹호했다.)


그 시기 미국은 동북아시아에 있는 북한을 상대로 여러 전쟁 위협 및 도발을 했었다. 사실 미국이 적잖은 군사적 위협과 협박을 가했던 나라 북한은 1985년 12월 핵확산금지조약에 가입했었다. 물론 북한은 미국의 위협을 인식해서였는지 핵안전조치협정에는 체결하지 않았었다. 1989년 9월 프랑스의 인공위성이 북한의 영변 핵시설을 촬영하자 미국은 핵시찰을 하기 위해 국제원자력기구와 한국을 동원하여 북한에게 압박을 가했었다. 이러자 북한의 김일성은 1991년 미국과의 협상을 통해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했고, 당시 대통령이었던 부시는 9월 27일 주한미군의 전술핵무기 철수를 선언했다.

(1994년 한반도 전쟁 위기 당시 한국의 뉴스 기사)


이처럼 미국과 북한은 서로 양보하는 모습을 보이며 1992년에는 비정기사찰이 순조롭게 진행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미국은 군사시설에 대한 특별사찰을 북한에게 요구했다. 당연히 북한은 주권침해라 여기고 이를 거부했지만, 이에 불만을 품은 미국은 1993년 2월 25일 원자력기구관리이사회를 통해 특별 사찰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하게 하고 북한이 끝까지 거부할 경우 유엔 안보리에 상정하여 전쟁까지도 불사하겠다는 거만한 태도를 보였다. 이렇게 갑자기미국과 북한의 관계가 나빠진건 민주당의 클린턴 정부가 들어서면서였다. 클린턴 정부는 팀스피리트 훈련을 재개했다. 팀스피리트 훈련엔 미군과 한국군 20만이 동원되었고, 평양에 대한 핵폭격 훈련, 원산과 흥남항에 대한 대규모 상륙훈련 등이 진행되었다. 1994년 미국의 클린턴 정부는 실제로 북폭 계획과 북한을 상대로한 전쟁까지 실제로 계획했었다. 즉 북한을 군사적으로 전복시키려 했던 것이다. 물론 이런 전쟁 위협은 당시 한국의 대통령이던 김영삼이 강력히 반대하면서 실행되지 않았다. 어쨌든 그 시기 미국은 실제로 북한을 군사적으로 공격하려 했던 폭력성을 보여주었다.

(보스니아 내전 당시 폐허가 된 거리)


1990년대 미국은 또 다른 사태에 개입했었는데, 그게 바로 보스니아 내전(Bosnian War)이다. 1980년 유고슬라비아의 지도자 요시프 브로즈 티토(Josip Broz Tito)가 사망한 이후 유고슬라비아에서는 소위 민족갈등이 일어났다. 유고슬라비아는 6개의 연방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민족갈등으로 분열되었고, 1992년에는 보스니아 지역에서 내전이 일어났다. 이 전쟁은 끔찍한 인종청소(Ethnic Cleansing)를 불러왔고, 3년 동안 26만 명 이상이나 되는 사람이 전쟁으로 목숨을 잃었으며, 많은 여성이 전쟁 동안 강간당했다. 구 유고슬라비아 지역에서 유혈이 낭자하자 미국은 NATO국의 일원으로 대략 2만 명의 군대를 파견했다. 미군의 임무 중에는 폭격 지원 임무도 있었다. 대략 비슷한 규모로 민간 기업 직원들이 그 지역에 동행했는데, 이들은 기업 부정행위를 저질렀고 세르비아 마피아로부터 동거 성노예를 구매하는 일을 하기도 했다.

(코소보 내전 당시 유고슬라비아를 폭격하는 장면, 이런 무차별 폭격으로 수많은 민간인이 죽었다.)


클린턴의 임기 마지막 해인 1999년 구 유고슬라비아 지역인 발칸반도에서 위기가 다시 반발했다. 1999년 3월 미군이 주도하는 나토군은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폭격을 개시했다. 당시 미군의 폭격 명분은 코소보에서 벌어지는 인종청소를 막는다는 것이었지만, 이런 미군의 무차별 폭격은 유고슬라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를 포함하여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민간인 사상자를 낳았다.

(9.11 테러를 보도한 잡지)


이처럼 냉전에서 승리자가 된 미국은 사회적으로도 많은 문제가 있었고, 인종주의적 갈등은 1950, 60년대 만큼은 아니더라도 극심했다. 그들은 세계화와 다문화를 외쳤음에도 미국에선 인종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그들은 구공산권 국가들이 몰락하는 모습을 보자 같은 시각으로 동북아시아에 있던 북한 또한 같은 길을 걸어 스스로 붕괴할 것이라고 잘못 예측했고, 북한을 대상으로 경제적 제제와 군사적 위협을 강행했다. 1993년에는 소말리아 내전에 간섭하여 무고한 인명피해를 초래했고, 구 유고슬라비아 지역에서 일어난 보스니아 내전과 코소보 내전에 개입하여 무차별 폭격을 감행함으로써 무수한 인명피해를 초래했다. 1990년대가 끝나고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미국은 21세기라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다. 그러나 21세기가 시작되기 무섭게 미국은 다시 한번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다. 2001년 9월 11일 뉴옥에 있는 세계 무역 센터에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저지른 비행기 테러는 미국에게 진주만 기습공격 이래로 큰 충격을 주었다. 미국은 21세기를 충격과 공포를 맞보며 시작하게 되었고, 그 충격과 공포를 무차별 폭력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2001년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2003년 이라크 전쟁에서 미제국은 9.11 보다 더한 폭력성과 잔인성을 있는 그대로 보여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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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인96 2020-03-15 00: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항상 좋은 글 감사합니다.

NamGiKim 2020-03-15 00:15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