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제국의 중남미 침략사

(미국의 침략 본성을 나타내는 그림. 그림에서 보여주는 것과 같이 미국이라는 독수리는 남미에 대한 지배욕을 여러차례 드러냈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중남미 국가들을 제국주의적으로 지배하고자 했던 것은 19세기부터였다. 서부로의 영토 팽창 과정에서 미국은 멕시코의 영토를 무력으로 침략하여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Treaty of Guadalupe Hidalgo)’을 멕시코로 하여금 강제로 체결하게 함으로써 드넓은 멕시코의 영토를 강탈했었다. 19세기 초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추구하여 일어났던 아이티 혁명에서 미국은 아이티의 독립에 반대했다. 1898년에 쿠바 영토를 두고 일어났던 ‘미서전쟁(Spanish-American War)’에서 승리한 미국은 쿠바에게 자유와 독립을 보장해주는 척을 하면서 쿠바를 미제국의 경제적 식민지 국가로 만들어 버렸다. 그 외에도 미국은 하와이와 푸에르토리코 괌을 자신들의 지배하에 놓기 위해 강탈했고, 필리핀을 정복하기 위해 야만적인 젅쟁을 수행했었다.


미국은 현대식 대포로 일본을 위협하여 무역을 위한 개방을 요구했었고, 서방 제국주의 세력에 반대하여 중국에서 일어났던 ‘의화단 운동’을 영국과 프랑스 독일 일본 러시아 제국 등과 같은 열강들과 연합하여 진압 군대를 보내 잔인하게 진압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던 시기 러시아에서 일어났던 적백내전에서 볼셰비키 혁명 세력을 진압하고 방해하기 위해 12000명의 미군을 블라디보스토크와 아르한겔스크에 상륙시켰다.


1900년대부터 파나마 운하 건설에 많은 투자를 했던 미국은 파나마 운하를 건설하고 장악하기 위해 콜롬비아에 대항하는 혁명을 아주 교묘하게 부추겨 파나마라는 ‘독립국가’를 만들어 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진행 중이던 1916년 미국은 도미니카공화국의 문제에 개입하여 8년 동안 군대를 주둔시켰고, 1915년에는 아이티에 개입해서 19년 동안 군대를 주둔시켰다. 1912년 니카라과를 침략했던 미국은 니카라과의 보수기득권 세력들과 결탁하여 1933년 아우구스토 산디노에게 쫓겨날 때까지 약 20년 동안 실질적인 주인행세를 했었다. 1900년~1933년 사이 미국은 쿠바에 네 차례, 니카라과에 두 차례, 파나마에 여섯 차례, 과테말라에 한 차례, 온두라스에 일곱 차례 개입했다. 1924년 기준으로 라틴아메리카의 20개 국가 가운데 절반의 국가 재정이 미국에 의해 어느 정도 좌우되고 있었으며 1935년에는 미국의 철강과 면화 수출의 절반 이상이 라틴아메리카에서 판매되는 상황이었다.

(냉전부터 현재까지 미제국의 중남미 국가 침략 및 방해공작을 보여주는 지도)


이처럼 중남미와 전 세계에서 침략과 간섭을 일삼았던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이후에도 중남미에 대한 자본주의적 탐욕주의를 버리지 않았었는데, 이것은 중남미 인민들에게 큰 고통과 상처를 안겨주었다. 냉전시기 소련과의 경쟁을 이어나가던 미국은 중남미 지역에서 적잖은 개입을 했다. 라틴아메리카 경제와 국제관계사를 전공한 학자인 존 코츠워스의 계산에 따르면, 1948년에서 1990년 사이에 미국 정부는 “라틴아메리카에서 적어도 24개의 정부를 전복시켰는데, 4건은 직접적으로 미 군대를 동원해서, 3건은 CIA 주도의 반란이나 암살을 통해서, 그리고 17건은 미국이 직접 참여하지 않고 그 지역의 군대나 정치세력을 부추기는 방식으로 대개는 군사적 쿠데타를 조장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일어난 개입 중 미제국이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를 전복한 사례”는 대표적으로 3가지를 들 수 있는데, 첫 번째는 1954년에 과테말라에서 발생했던 사건이고, 두 번째는 1964년 브라질에서 발생한 사건이며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1973년에 일어났던 칠레에서의 사건이었다. 1945년 3월 14년 동안 과테말라에서 독재정권을 유지했던 유비코 정권을 숙청하고 민주적 총선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아레발로는 노조 설립 등과 같은 소수 기득권층 위주의 사회제도를 개선하고 인민의 귄익을 신장시키기 위한 진보적인 정책들을 추구했다.


그는 6년이라는 재임기간 동안 비민주적인 제도와 악습 그리고 식민지 자본의 횡포에서 민중을 구하는 데 모든 열정을 보여주었다. 그는 토지 국유화 강령을 내세웠고 그것은 당연히 남미를 자본주의적으로 지배하던 유나이티드 프루트 사(United Fruit Company)의 이윤에 커다란 위협이 됐다. 이런 아르벤스 대통령의 정책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있었다. 그 반대세력은 바로 과테말라의 기득권층과 남미민중을 착취하던 유나이티드 프루트 사 그리고 그 기업의 이윤을 통해 이득을 보던 미국이었다. 결국 미국은 과테말라에서 민중의 지지를 받는 아르벤스 대통령을 제거하기 위한 공작에 착수했다.

(과테말라의 하코보 아르벤스 대통령. 그는 민중의 염원에 따라 진보적인 정책들을 실행했었다.)


1951년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피비 포춘PB Fortune’이라는 비밀공작을 승인하면서 아르벤스 정부의 정복공작은 시작되었고, 미국의 CIA는 과테말라의 우익 군부 잔당들과 접촉하여 아르벤스 정부의 전복을 위한 구체적인 작전계획을 수립했다. 1954년 6월 결국 미국의 공작으로 아르벤스 대통령은 사임하게 되었다. 그 결과 과테말라에서는 미국의 원조를 받은 군부가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았다. 권력을 잡은 과테말라의 군부는 소위 반공법을 제정하여, 아르벤스에 동조하는 양심세력과 가난한 인민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무차별 학살했다. 195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후반까지 약 36년 동안 과테말라에선 군부의 야만적이고 잔혹한 고문과 학살로 인하여 20만 명에 달하는 민간인이 살해되었다.


1961년 브라질의 대통령이었던 ‘주앙 골라르트(João Goulart)’는 브라질의 경제회생을 위해 정유산업을 국유화하고, 외국기업 소유의 유휴토지를 개발하여 빈곤층 등에게 공급하며, 다국적기업의 과다한 이윤 유출을 억제하여 국민자본을 형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전임자인 콰드로스 대통령처럼 비동맹 자주노선을 지향했고 소위 제3세계와의 외교 통상관계를 증대했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있던 미국의 쿠바 침공과 쿠바 봉쇄에 대해 강력한 반대 의사를 표명하기도 했다. 백만장자의 아들인 그는 결고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고 오히려 친미적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그의 자주노선이 자신들의 이익과 반대되었다고 느꼈기에 그를 축출하기로 했다.


1962년에 치러진 브라질 총선에서 CIA의 공작을 통하여 극우 성향의 후보들에게 약 2000만 달러의 선거 자금을 지원했다. 또한 미국은 브라질 내에 퍼지는 반미의식을 막기 위해 학생과 부녀자 단체 등을 동원해 친미그룹을 조직했고, 극우 언론사에 대한 자금지원도 동시에 실행했다. 결국 미국은 1964년 3월 친미성향의 군부 합창의장 브랑코를 통해 쿠데타를 일으켰다. 미국은 소위 ‘엉클 샘 작전(Operation Uncle Sam)’이라고 명명한 쿠데타 계획을 실행하기 위한 자금, 무기, 연료 등 주요 전략물자를 비밀리에 브랑코 장군에게 지원했다. 1964년 3월 미국의 지원을 받은 브라질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키자 골라트 대통령은 우루과이로 망명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미국은 자신들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 브라질의 자주적 정권을 전복시킬 수 있었고, 그 이후 브라질에선 수천 명의 골라트 지지자들이 공산주의자나 동조세력으로 몰려 체포되었으며 쿠데타에 반대하는 시위는 진압군의 발포로 무차별 학살당했다.

(칠레의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 그는 세계최초로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정권을 잡은 사회주의자 대통령이었다. 사회주의적 성향을 싫어하는 미국에게 있어서 그는 제거되야할 대상이었다.)


남미 국가들 중에서 가장 긴 면적을 자랑하는 칠레는 1932년 이후 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했다. 세계 최대의 구리 생산국인 칠레는 그 구리 생산이 미국계 양대 기업 케니코트구리와 아나콘다 구리가 장악하고 있었다. 1964년 칠레의 대통령 선거에서 미국 CIA는 에두아르도 포레이 후보를 지원함으로써 사회주의자인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 후보를 물리쳤다. 이후 수년간 미국은 수백만 달러를 써가며 반공 그룹들을 지원했고 군사원조 1억 3600만 달러를 제공함으로써 칠레를 라틴아메리카에서 브라질 다음가는 동맹국으로 만들었다. 파나마 운하 지대에서 미군이 운영하는 기지에선 칠레군 장교 4000명에게 게릴라 소탕 전술훈련을 시켰다.


아옌데는 1970년 다시 대선에 도전했다. 그는 “부를 재분배하고 통신회사 ITT를 비롯해 칠레 경제를 장악하고 있는 미국 기업들을 국유화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아옌데를 우려한 미국은 그가 당선되지 못하게 하려고 노력했지만, 1970년 9월 살바도르 아옌데는 역사상 최초로 선거에 의한 사회주의 정권을 출범하는데 성공했다. 아옌데 정부는 토지개혁을 실시했고 미국 기업들이 소유하고 있던 구리광산 등에 대한 국유화를 단행했으며, 의료 및 교육 부문에 대한 공공서비스를 확대하고 사회적 불평등과 빈부격차를 줄이기 위해 사회주의적인 노선을 실행에 옮겼다.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리처드 닉슨은 이 선거 결과를 존중한다고 공개적으로 밝혔지만, 실제로는 CIA에게 “아옌데가 집권하지 못하도록 저지하거나 혹은 정치 권력에서 축출”하는 작업을 허용했다. 미국 CIA는 정치적으로 중립을 유지하던 칠레군 최고사령관 레네 슈나이더(Rene Schneider)를 암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슈나이더의 암살이 CIA의 공작으로 밝혀지자 칠레 국민은 격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제국의 CIA는 아옌데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지속적인 공작을 감행했다.


아옌데 정권은 결국 친미제국주의자인 ‘아우구스토 피노체트(Augusto Pinochet)’가 이끄는 군부 쿠데타에 의해 무너지고 말았다. 1973년 9월 11일 피노체트가 이끄는 군부의 쿠데타 음모가 칠레 국민에게 공식적으로 알려졌다. 쿠데타 계획에 따라 미 해군은 그 전날인 1973년 9월 10일 밤 자국 전함들을 발파라이소항에 정박시켜 아옌데 정부와 칠레 인민을 향해 무력시위를 벌였다. 아옌데 대통령은 집무실 밖에서 들려오는 총성을 들으며 “역사가 반란군을 심판할 것이다. 칠레 만세! 칠레 인민 만세! 칠레 노동자 만세!”라는 말을 남긴 뒤, 피노체트 일당들에게 현장에서 사살되었다. 미국과 결탁하여 아옌데를 사살한 피노체트는 칠레의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대략 17년간 독재정권을 유지했고, 신자유주의적 정책에 따라 칠레의 빈부격차는 극에 달하게 되었다. 또한 피노체트는 쿠데타가 발생한 3개월 동안 CIA의 지원을 받아 좌파로 의심되는 사람 수천 명을 처형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의 군사정부 기간 동안 총 3만 5000명이 처형되었다.

(콘도르 작전 풍자 그림, 미국이 진행했던 콘도르 작전으로 수많은 남미 민중이 고문 받고 학살당했으며, 감옥에 갖혔다.)


이처럼 냉전 시기 미제국의 중남미 문제 개입은 공식 또는 비공식적으로 지속되었다. 미국은 1960년대 후반부터 시작해서 1980년대 후반까지 대략 20년간 소위 ‘콘도르 작전(Operation Condor)’을 남미에서 전개했다. 미국은 콘도르 작전을 통해 아르헨티나, 칠레, 우루과이, 브라질, 파라과이, 볼리비아, 페루, 엘살바도르 등에서 독재정권 사이에서 행해졌던 국가 간의 공동 첩보 활동, 체포와 납치, 송환, 심문, 고문, 암살, 비사법적 처형 등을 자행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콘도르 작전으로 5만 명에서 6만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살해되거나 ‘실종’된 것으로 파악되고, 수도 없이 많은 사람이 감옥에 갇혔으며 대다수가 고문에 시달렸다.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 그들은 18년간이라는 기나긴 투쟁 끝에 니카라과에서 정권을 잡았다.)


위에서 인용한 과테말라, 칠레, 브라질 등이 그랬듯이 남미에 있는 여러 나라들은 미국의 주도하는 정책에 반기를 들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니카라과가 그러했다. 1960년대 니카라과에서 자체적으로 조직된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은 18년간 미국에 맞서 투쟁했다. 1979년 그들은 니카라과에서 미국의 하수인이던 소모사와 그 일당들을 몰아내어 정권을 잡았다. 니카라과에서 정권을 잡은 산디니스타 게릴라 세력들은 소모사 정권에게 유린당한 재산을 모두 국유화했고, 토지개혁을 통해 땅을 분배했다. 은행, 광산과 니카라과의 천연자원 등 그 동안 소모사 정권의 부패 근거지였던 자산들도 국유화했다. 또한, 문맹퇴치 운동을 벌여 1년도 안되는 짧은 기간 동안 문맹률을 12%로 줄이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

(미국에서 열린 미국의 베네수엘라 경제제제 및 간섭 반대 집회, 지금까지도 수많은 남미국가에선 반미감정이 사라지지 않았다. 당연히 이러한 문제의 책임은 미국에게 있다.)

그러나 니카라과의 이런 사태를 좋게 보지 않던 미국은 니카라과 문제에 개입했고, 경제적으로 고립시켰다.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정권은 미제국주의와 그들의 나팔수 세력인 반혁명군 콘트라(Contra)에 대한 군사원조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렇듯 미제국은 중남미 민중을 끊임없이 자신들에게 대항하는 세력들에게 온갖 방해와 악행 그리고 학살과 범죄를 저질렀다. 1970년대 중반 베트남 전쟁에서 쓰라린 패배를 맞보았던 미국은 좌절감에 휩싸여 있었다. 그런 과정에서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미국은 남미에서 제국주의적 침략을 통해 승리의 단비를 맛볼 수 있었다. 1983년에 있었던 ‘그레나다 침공(Invasion of Grenada)’이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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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02-20 11: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과테말라의 아르벤스 정권 전복
은 이란의 모사데그 정부 전복과
함께 1950년대 미국 CIA가 자랑하는
결과물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습니다.

악질 소모사 부자를 축출한 산디
니스타 투쟁!~

쿠바 혁명에 놀란 미국이 유난히
중미 진보 정권에 경기를 일으키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NamGiKim 2020-02-20 13:43   좋아요 0 | URL
쿠바 혁명에서의 충격이 클겁니다. 오죽하면 피그스만 침공과 쿠바 봉쇄까지 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