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의 시작과 매카시즘

(냉전 시기를 표현하는 한 포스터. 불곰은 소련 자본가는 미국이다)


 

(1945년 7월 포츠담 회담 당시 트루먼과 처칠 그리고 스탈린)


1945년 8월 15일 추축국의 마지막 세력인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은 미, 영, 소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다.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에 맞서 반파시즘 전선을 구축했던 미국과 소련은 전쟁이 끝난 후 서로 추구하는 것이 달랐고, 그러한 이해에 따라 세계는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갈라서게 되었다. 그 시대가 바로 냉전이다. 냉전시기 세계는 미국을 중심으로한 자본주의 세력과 소련을 중심으로한 사회주의 세력으로 나뉘었으며, 두 체제가 경쟁하는 체제였다.

(1946년 3월 윈스턴 처칠이 발언했던 철의 장막을 표현한 만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신호가 있었다. 그것이 바로 영국의 지도자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의 ‘철의 장막(鐵의帳幕, Iron Curtain)’ 연설이었다. 윈스턴 처칠은 그 연설에서 소련 휘하에 놓여 있는 동유럽 국가들을 예로 들었다. 그는 “발트해부터 아드리아해까지 철의 장막이 대륙을 가로질러 드리워져 있다.”라고 하며 소련과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1948년 베를린 봉쇄 당시 물자를 공수하는 미군 수송기)

(냉전 시대 당시 유럽 지도)

당시 루스벨트의 급격한 사망 이후 부통령에서 대통령 자리에 오르게 된 미국의 해리 트루먼(Harry Truman)은 전형적인 반공주의자였다. 미국의 지도자 트루먼이 보기에 제2차 세계대전으로 폐허가 된 유럽은 모든 상황에서 최악이었다. 당시 미국 휘하의 서유럽의 상황은 공장에는 사람이 없고, 철도는 전쟁으로 파괴되어 제대로 운행되지 못했고, 1946년 말에는 서유럽에 강추위까지 몰아닥쳤었다. 거기다 서유럽권인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는 그 나라 공산당이 민중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따라서 미국은 유럽에서의 소련과 공산주의 세력 확산을 막아야 한다는 목적의식을 가지게 되었고, 소련과 공산주의를 적대시하는 정책으로 나아갔다.

(그리스 내전 당시 지도)

따라서 미국은 자신들의 세계 패권을 장악하고자 1946년 윈스턴 처칠이 했던 연설을 이용하여 ‘공산주의 팽창 반대’ 바람을 일으켜 냉전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리하여 1947년 3월 미국의 해리 트루먼은 소위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을 발표하여 “소련과 공산주의에 맞선 강경한 외교 정책”을 표방하게 되었다. 그러한 좌우익 갈등은 터키와 그리스에서 터졌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 우익 군주독재 국가였던 그리스는 영국의 노골적인 군사개입으로 좌익 게릴라 운동이 민중의 지지를 받으며 성장했는데, 그것이 그리스 내전으로 이어졌다.

(그리스 내전 당시 병사들)

1946년에서 47년 그리스 내전이 격해지자 미국은 무기와 군사고문단을 지원하는 형식으로 그리스 내전에 개입했다. 미국은 그리스의 우익 정부를 돕기 위해 대포와 폭격기, 네이팜 폭탄 등 74000톤의 군사 장비를 지원했고, 제임스 밴 플리트(James Van Fleet)가 이끄는 250명의 군사고문단을 투입하여 “농촌 및 마을 지역의 그리스인 수천 명을 강제로 소개하는 정책”으로 좌익의 씨를 말렸다. 쉽게 말해 그 과정에서 많은 그리스인이 우익들에 의해 학살당했다. 미국의 대대적인 지원으로 그리스 내전은 1949년 그리스 우익 정부의 승리로 끝이 났고, 그리스에는 오랫동안 야만적인 우익독재 정부가 들어섰다. 미국의 대통령 해리 트루먼은 트루먼 독트린에서 “나는 미국의 정책이 무장한 소수 세력이나 외부의 압력이 시도하는 예속에 저항하는 자유민을 도와야 한다고 맏는다”라고 했지만, 실제로 가장 큰 외부의 압력을 행사한 나라는 미국이었다.

 

냉전 초기 미국의 직간접적 내정간섭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이후 지속되었는데, 동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45년 필리핀에서 급진주의자들이 세력을 확장하였지만, 이에 미국은 개입하여 이들을 분쇄했고, 1950년대 마르코스 우익독재 정부를 수립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중국에서 마오쩌둥을 중심으로 한 공산당 운동이 대중적 지지를 받았다. 중국 민중에게 인기가 없었던 장제스 정권은 부정부패했다. 1946년 중국에서 제2차 국공내전이 일어났는데, 미국은 1949년까지 장제스 군대에 20억 달러나 원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트루먼과 이오시프 스탈린)

 

아무튼, 1947년 3월 해리 트루먼이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하면서 미국과 소련의 갈등은 심화되었다. 미국이 이러한 반소련 반공정책을 고수하자, 소련 또한 이에 가만히 있지 않았고, 1948년 베를린을 봉쇄하는 방법으로 이에 대응하였다. 그러자 미국은 소위 ‘마셜 플랜(Marshall Plan)’이라 하여 서유럽 경제를 대대적으로 회복시키고 원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며 서베를린에 대규모의 수송기를 동원하여 물자를 공수했다. 그 결과 미국은 소련의 봉쇄를 풀었고, 1949년 독일은 동독과 서독으로 나뉘었다. 베를린 봉쇄 사건 이후 미국은 군사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1949년 북대서양 조약 기구로 불리는 NATO를 창설했다. 나토 창설의 목적 중 하나는 소련에 맞서기 위함이었다. 이에 맞서 1955년 소련은 바르샤바 조약 기구를 창설했다. 이렇듯 냉전은 군사적 혹은 경제적으로 우위에 서 있던 미국이었기에 소련보다 더 위협적이었고, 당시 소련은 이에 대응하는 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마샬 플랜을 통하여 미국의 지원을 받은 국가들에서 사회주의 세력들은 보다 약화되었다.

(1949년 소련의 핵개발을 알리는 뉴스 기사)

 

반공정책을 고수해나가던 1949년 트루먼 정부를 발칵 뒤집어 놓을 일이 두가지가 일어났다. 하나는 소련이 자체적인 기술을 통해서 원자폭탄보다 더 강한 수소폭탄을 개발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1949년 10월 1일 중국의 국공내전이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당의 승리로 끝났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사건이 있자 미국 사회는 충격에 빠졌다. 마오쩌둥이 이끌던 중국 공산당이 중국을 통일하자 미국의 공화당 세력들은 “우리는 중국을 잃었다”와 같은 발언을 하며, 민주당을 비판했고, 소련의 핵개발에 충격을 받은 미국은 소위 간첩 색출에 나섰다. 그러는 사이에 1950년 6월 25일 지구 반대편에선 한국전쟁(Korean War)이 일어났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미국 내의 반공주의는 극에 달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을 나타내는 중국 포스터)

 

(한국전쟁 당시 38선)

 

이러한 반공적 분위기에 힘입어 미국을 아주 극단적인 반공주의 국가로 몰고간 인물이 있었고, 그가 바로 조지프 매카시(Joseph McCarthy)였다. 1950년 초 그는 웨스트버지니아 주 휠링에서 공화당여성클럽을 대상으로 연설하면서 종이 몇 장을 보여주며 얘기했다. 그는 “자기 손에 205명의 명단이 있는데, 공산당원이라는 사실이 국무장관에게 알려졌음에도 계속 국무부에서 일하면서 국무부 정책을 입안하는 사람들의 명단이 있다”라고 주장했다. 물론 그가 만든 명단은 거짓말과 과장으로 얼룩져 있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매카시가 보여준 극단적 반공주의는 미국사회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미국의 반공 프로파간다)

(스탈린은 미국이 무너지길 원한다는 미국측 포스터)

1950년 미국 공화당은 소위 ‘국가보안법(Internal Security Act)’을 발의했고, 공산주의자들을 투입하고 구금하기 위한 수용소 논의도 활발하게 진행되었으며, 실제로 그런 수용소가 세워져 사용되기 직전까지 갔었다. 당시 미국의 영화나 만화, 역사 수업과 신문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미국은들에게 공산주의와의 싸움을 부추겼다. 미국의 많은 영화 배우나 유명 인사들이 공산주의자인지를 사회적으로 의심받았다. 그들중 일부는 아주 적극적이어서 어린이 만화 제작으로 유명한 월트 디즈니(Walt Disney)의 경우 매카시즘의 협력자로서 많은 사람들을 FBI에게 밀고했다. 자본주의를 비판한 영화 모던 타임즈(Modern Times 1936)의 주연을 맡았던 찰리 채플린(Charlie Chaplin)도 공산주의자라는 의심을 받기도 했으며, 맨해튼 프로젝트에서 많은 공로를 세웠던 로버트 오펜하이머(Robert Oppenheimer)도 매카시즘의 희생자가 되었다.

(조지프 매카시. 그는 아주 극단적인 반공주의자의 표상과도 같은 인물이다.)

 

(착한 공산주의자는 죽은 공산주의자 뿐이라는 팻말을 들고 있는 미국의 반공주의자)

 

매카시즘 사건 중 억울한 피해사건을 뽑자면 1950년 여름에 있었던 줄리어스 로젠버그와 이설 로젠버그 부부(Julius and Ethel Rosenberg) 사건을 들 수 있다. 로젠버그 부부는 간첩 혐의로 기소됐다. 그 혐의는 로젠버그 부부가 소련에 원자폭탄의 비밀을 알려줬다는 것이었다. 1951년 3월 6일 방첩법에 따라 사형을 선고 받고, 악명높은 싱싱 교도소에서 처형됐다. 그러나 당시 미국 정부가 내세웠던 로젠버그 부부가 간첩이라는 증거는 거의 없었고, 나중에 이루어진 조사에 따라 그 사건이 완전히 잘못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매카시즘의 억울한 희생자인 로젠버그 부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소련과 경쟁하면서 반공주의를 내세웠고, 그리스 내전이나 중국의 국공내전과 같은 곳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하며, 공산주의를 막는다는 명분하에 테러와 학살을 방조하거나 도왔다. 또한, 적잖은 무기를 반동세력들에 팔았다. 그런 시대적 분위기에 따라 미국은 매카시즘이라는 극단적 반공주의 사회로 변화했고, 그러한 매카시즘적 반공주의는 1960년대까지 강력히 미국사회를 지배했다고 할 수 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시기 미국은 즉각적으로 군사개입을 했다. 그러나 그 전쟁은 1953년 휴전으로 끝났고, 어쨌든 미국은 한반도에서 승리하지 못했다. 한국전쟁은 미국인들 사이에서 조용히 진행되었고, 미국인들에게 잊혀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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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12-29 22: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리스내전은 영국의 뒤를 이어
세계의 패자로 등장한 미국의 개입
으로 우파의 승리로 귀결되었군요.

오래 전에 리더스 다이제스트에서
<이리니>라는 그리스내전의 비극
을 다룬 소설의 압축판을 읽었습
니다.

희미하지만 철저하게 오른쪽에서
기술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자신들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서는
일절 말하지 않고, 오로지 좌익게
릴라들의 만행에 대해서만...

NamGiKim 2019-12-29 22:39   좋아요 0 | URL
그런 소설이나 기록은 어디든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한국전쟁 시기 우익이 한건 싹다 빼먹으면서 마치 빨치산만 한 것 처럼 얘기한다던지, 베트남 전쟁때 베트콩이나 북베트남군이 더 했다며 물타기 하는거나 비슷하죠. 사실 두 전쟁(한국, 베트남) 다 우익들과 미국이 한게 압도적으로 많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