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사진을 담은 통합 사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년 뒤, 아시아에서 일어난 전쟁이 있었다. 그 전쟁은 식민지를 유지하려는 세력과 식민지 지배에 맞서 독립을 쟁취하려는 세력의 싸움이었다. 그 전쟁이 바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The First Indochina War)이다.

(1954년 당시 인도차이나 반도 지도)

 

1. 배경

(1945년 9월 2일 베트남의 독립을 선포하는 호치민)

1945년 8월 15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맞은 일본 제국주의가 연합국에게 항복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미국의 OSS와의 협력을 구축해 나가던 호치민(Ho Chi Minh)의 베트민(Viet Minh)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항복하기가 무섭게 베트남 전역에서 ‘총 봉기’를 일으켰고, 일본군을 자체적으로 무장해제 시켰다. ‘총 봉기’를 일으켜 일본군을 무장해제 시킨 호치민은 1945년 9월 2일 대략 100만 명의 인파가 거리로 몰려나온 하노이 바딘광장에서 베트남의 독립을 선포했다.

(1945년 7월 포츠담 회담)

 

그러나 1945년 7월 포츠담 회담에서 연합국들은 베트남을 북위 16 도선을 기점으로 분할 점령하기로 합의를 보았고, 16도선 이북에는 장제스의 중국 국민당군이 16도선 이남에는 영국군이 들어왔다. 중국 국민당의 경우 1946년 사이에 베트남에서 철군했으나, 영국군은 달랐다. 영국군은 베트남 남부에 입성하면서, 19세기 당시 베트남을 식민지로 지배했던 프랑스를 끌어들였고, 그 과정에서 꼭두각시 황제인 바오다이(Bao Dai)를 내세웠다. 프랑스를 베트남에 개입하도록 만든 영국은 베트남 문제를 프랑스에게 넘긴 채 베트남에서 철수했다. 프랑스가 베트남에 다시 들어온 이유는 명확했다. 베트남을 다시 식민지화하겠다는 목적이었다. 베트남에 다시 들어온 프랑스는 1946년 2월 중국이 베트남 북부에서 철수하자, 베트남 북부지역으로 들어갔고, 호찌민의 베트남은 프랑스군의 진주를 반대하지 않는 대신 베트남을 독립국으로 인정하는 것과 같은 요구사항들을 프랑스에게 요구했다.

(1946년 퐁텐블로 당시 협상)

 

이 과정에서 호찌민의 베트남과 프랑스측은 베트남 문제에 대한 협상을 전개하는데, 이게 바로 퐁텐블로 협상이다. 퐁텐블로 협상은 1946년 7월에 시작됐다. 호찌민을 비롯한 베트민측 인사들은 프랑스까지 이동하여 협상을 진행하였으나, 양측은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고, 협상은 어떠한 성과물 없이 1946년 9월 10일 결렬됐다. 당시 미국은 나름대로 중립적인 시각을 유지하려고 했으나, 프랑스의 샤를 드골 정부는 미국에게 “우리를 돕지 않으면 소련 편을 들 것이다.”라고 강력하게 협박했기에, 대체로 프랑스 편을 들었다. 따라서 미국은 언제든지 개입할 가능성이 있는 상태였고, 인도차이나 문제를 지켜보고 있었다.

 

2. 전쟁의 시작과 프랑스의 기선제압

퐁텐블로 협상이 결렬되고 나서 2달이 지난 1946년 11월 프랑스는 베트남의 항구도시 하이퐁을 무차별 포격했다. 프랑스군 함대의 포격을 받은 하이퐁은 당일날 최소 6000명의 민간인이 사망했고, 하이퐁을 무차별 포격한 프랑스군은 1946년 12월 수도 하노이에 입성하여 베트민군과의 전투를 치렀다. 1946년 12월 19일 호치민과 그의 공산당 동료들은 프랑스와의 더 이상 타협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결론을 내리고, 전쟁에 돌입하게 되었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하이퐁을 포격하고 있는 함대)

 

1946년 12월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가 프랑스군에 의해 점령당하자 베트민은 게릴라전을 전개하였다. 베트남 정부는 다가올 전쟁은 3단계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내용의 공개 성명을 발표했다. 공개 성명에 따르면 제1단계에서 베트남군은 방어에 치중하며 산악 요새에서 전력을 강화하고, 제2단계에서는 혁명군은 굴에서 나와 적의 노출된 시설을 기습하며, 제3단계에서는 전면 공세로 들어가 적군(프랑스군)을 바다로 내모는 최종공세를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프랑스는 이 전쟁에 프랑스인 233,467명, 외인부대 72,833명, 북아프리카인 122,920명, 아프리카인 60,340명 등 막대한 병력을 투입했다. 베트민을 지휘하던 보 응우옌 잡(Vo Nguyen Giap) 장군은 1947년 1월 탄라오로 완전히 철수할 때까지 하노이의 후방 교란적전을 계속했다. 1947년 1월 중순 프랑스 부대가 중국인 구역의 가장자리에 있는 시장까지 도착하자, 베트민군은 많은 지역 주민과 더불어 그 지역을 버리고 홍 강(Hong River)을 건너 북쪽으로 달아났다. 그 전투에서 대략 수백 명의 베트민이 전사하고 프랑스군 100명 정도가 전사했다. 아무튼 전쟁 초기 남부 증원군의 확보와 화력의 절대적 우세로 프랑스군은 1947년 3월 남 딘까지 점령하면서, 호치민 정부는 곳 괴멸할 것 같았다. 그러나 베트민들은 이에 굴복하지 않고, 산악과 정글에서 베트민들이 농민들과 소수민족들을 규합하여 세력을 확장해나갔다.

 

1947년 10월 프랑스군은 이른바 ‘레아 작전(Operation Lea)’으로 교착된 난국을 타개하려 했었다. 이 작전은 박 칸이라는 지역에 낙하산 부대를 투하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프랑수군은 빠르게 진군하여 곧 베트민 본부를 찾아냈다. 프랑스군이 레아 작전을 개시했을 때, 호치민은 사령부에서 회의를 주재하고 있었지만, 프랑스군은 호치민을 체포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레아 작전은 큰 틀에서 실패했고, 1948년 1월 인도차이나공산당 상임위원회는 혁명에 유리한 쪽으로 상황이 변하고 있다고 판단했으며, 전쟁 초기에 발표했던 공개 성명의 제1단계가 끝났고, 제2단계가 시작되었다고 선언했다.

2. 중국의 지원과 베트민군의 반격

 

레아 작전 실패 이후 프랑스 정부는 다시 정치적 해결을 모색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는데, 이번에는 호치민 정부에 대항하는 민족주의 정권을 수립하여 이와 협상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 바로 ‘바오다이 해결책(Solution Bao Dai)’이었다. 이렇게 바오다이를 내세웠던 프랑스는 1949년 3월 프랑스 엘이제궁에서 바오 다이와 협정을 맺어 베트남은 코친차이나까지 통합한 하나의 국가임을 인정해 주었다. 이는 베트남준국가의 수립을 뜻했고, 프랑스는 자신들이 일으킨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자유주의 대 공산주의의 대결’ 구도로 이끌어 가려고 했다.

 

1949년이 되면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점차 호치민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프랑스군은 베트민군의 게릴라전에 고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1949년 10월 1일 베트남에게 있어 더 좋은 일이 일어났다. 마오쩌둥(Mao Tse Dong)이 이끌던 중국 공산당이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것이다. 국공내전에 승리한 중국 공산당은 중월 국경지대와 북베트남 지역에서 프랑스군에 맞서 항전하던 베트민군을 물적 인적으로 돕기 시작했다. 더 나아가 1950년에는 마오쩌둥의 중국과 이오시프 스탈린의 소련이 호찌민의 베트남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중국 공산당의 지원으로 1953년 말까지 베트민은 중국으로부터 지원받은 800문의 무반동총과 기관총 6000정의 반자동 소총과 자동 권총 그리고 600만 발의 탄환을 보유하고 있었다.

(동케 전투 당시 호치민)

 

1950년 9월 중순 베트민 부대들은 국경지역 전체에 걸쳐 프랑스의 취약시설에 대한 일련의 기습을 개시했다. 중월국경지대에 있는 도시 동케를 베트민군이 점령했을 때, 프랑스 정보부는 베트민군이 바주카포, 박격포, 그리고 무반동총으로 무장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동케에 주둔하던 프랑스군은 패주했고, 수백 명의 사상자가 속출했으며, 1만 톤이 넘는 탄약까지 버리고 갔다. 동케 전투(Battle of Dong Khe)에서 베트민군이 프랑스군을 무찌른 것이다. 1950년 10월 말 중월 국경 지대 전투가 끝이 나면서 베트민의 공격은 홍 강 삼각주 북쪽의 광대한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1950년 12월 이에 힘입은 보 응우옌 잡 장군과 공산당 지도자들은 홍 강 삼각주의 가장자리에 있는 세 지역을 잇따라 공격한다는 계획을 세웠고, 1951년 초에 이를 실행에 옮겼다. 1951년 2월 베트민군은 홍 강 삼각주를 완전히 차지하기 위한 대공세를 했지만, 처참히 실패하고 말았다. 그 이유는 프랑스군이 미국으로부터 지원 받은 네이팜 폭탄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네이팜 폭탄의 위력)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 미국은 프랑스가 식민지 유지를 위해 베트남에서 전쟁을 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지만, 1949년 중국의 국공내전이 마오쩌둥의 승리로 끝나고 1950년 북한의 공격으로 한국전쟁이 시작되면서, 미국은 매카시즘이라는 반공주의에 빠지게 되는데, 이러한 영향으로 미국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식민지 세력 대 민족해방세력의 전쟁이 아닌 자유주의 대 공산주의라는 시각에 근거하여 보게 됐기 때문이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프랑스를 돕게 된 미국은 전쟁이 끝나가던 1954년 대략 10억 달러에 달하는 자금과 1400대의 탱크와 340대의 비행기, 350대의 정찰 보트, 24만 정의 소총 및 기관총, 1500만 발의 탄약 등을 프랑스에게 지원했다. 이는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프랑스가 지불하던 전쟁 비용의 80%에 달했다. 미국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 군대를 파병하지 않았을 뿐, 사실상 미국이 대신 전쟁을 치렀다고 봐도 무색할 정도로 프랑스에게 상당한 물자를 제공했다.

 

아무튼 보 응우옌 잡 장군이 생각했던 홍 강 삼각주 공격이 실패하면서, 베트민 측에선 엄청난 사상자가 속출하였다. 베트민군 총 1만 명 가운데 3500~4000명의 사상자가 속출했다. 반면 프랑스군은 전사자 400명에 부상자 1200명이었다. 베트민군은 마오 케와 다이 강 공격에서는 더 큰 패배를 기록했으며, 결국 많은 사상자를 내고 산 속으로 철수했다.

 

홍 강 삼각주 공격이 실패로 끝난 뒤 전쟁은 점차 교착 상태에 빠져들었다. 1951년 2월의 총공격은 베트민군의 처참한 패배로 끝났지만, 전열을 재정비한 베트민군은 다시 전세를 역전 시키기 위해 홍 강 삼각주의 남쪽 변두리에 있는 한 도시를 공격하게 되는데, 이게 바로 ‘호아 빈 전투(Battle of Hoa Binh)’다. 1951년 11월 이후 사실상 호아 빈을 점령한 베트민은 프랑스 진지에 대대적으로 공격을 감행했고, 1952년 2월 프랑스군은 진지를 버리고 삼각주로 물러났다. 또한 1951년 10월 초 프랑스군 15개 연대가 두옌하, 훙난 그리고 띠엔 훙 지구에서 대규모 전투를 시작했는데, 격렬한 전투를 치르기도 했다. 꽁호와 안미 그리고 안빈 이 세 지역에선 500명의 프랑스군이 전사하기도 했었다. 호아 빈 전투가 베트민의 승리로 끝난지 몇 달이 지난 1952년 말 베트민군은 하노이 근처 논들을 자유롭게 다녔고, 삼각주 마을 곳곳에서 혁명 조직들이 재건되었다. 1952년 10월 중순엔 베트민 3개 사단이 응이아 로의 프랑스군의 기지를 공격했고, 점령했다. 심지어 베트민은 국경을 넘어 라오스 북부로 들어가 성도 삼 네우아를 점령하고, 라오스의 수도 루앙 프라방에서 프랑스군을 위협하기도 했었다.

 

3. 디엔비엔푸 전투와 전쟁의 종결

(프랑스의 앙리 나바르 장군)

 

이처럼 1950년대 초에 접어들면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미국의 막대한 물적 지원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는 점차 패배하고 했었다. 한국전쟁이 끝나가던 1953년 인도차이나 프랑스 원정군 사령관이 된 앙리 나바르 장군(Henri Navarre)은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작전을 구상하게 되는데, 그 작전은 라오스 국경지대 근처에서 진행될 예정이었다. 만약에 베트민이 라오스와 카보디아까지 진출하여 남부의 게릴라 부대와 힘을 합해 사이공을 점령하게 된다면, 프랑스에게 더 불리해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대포를 산으로 옮기고 있는 베트민)

 

1953년 11월 나바르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라오스 국경 산간지대에 있는 디엔 비엔 푸의 대규모 요새를 구축하고 11000명의 병력을 주둔시켰다. 이 디엔비엔푸 요새의 약점은 오로지 비행기로만 병력과 물자의 수송이 가능하다는 데 있었는데, 나바르는 우세한 화기와 공군력으로 베트민군을 막아낼 수 있다고 믿었다. 보 응우옌 잡 장군은 비밀리에 디엔비엔푸를 포위했다. 대략 4개의 보병 사단과 1개의 기갑 사단으로 이루어진 5만명의 병력은 비밀리에 디엔비엔푸로 움직였다. 이 대규모 전투부대가 필요로 하는 중화기와 식량은 동원된 수만 명의 농민이 멀리 떨어진 기지에서부터 등짐을 날랐다. 여기에는 중국 공산당 정부가 지원한 수백대의 화물 자동차도 동원 되었다. 또한 베트민들은 대략 250대 정도의 대포를 순수인력으로 산 곳곳에다가 설치해놓았고, 디엔비엔푸 요새를 4방으로 포위했다.

(디엔비엔푸 전투 당시 사진)

 

프랑스군이 만들어 놓은 디엔비엔푸 요새를 비밀리에 4방으로 포위한 베트민군은 1954년 3월 13일 집중포화를 퍼부으며 공격을 개시했다. 2~3일 만에 프랑스군의 주요 전진기지가 함락되고 비행장 또한 폭격으로 사용할 수 없어졌으며, 프랑스측은 4천 명의 공수부대를 급파하기도 했지만, 전세를 역전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디엔 비엔 푸 요새가 베트민군에게 포위당하자 당시 미국의 아이젠하워 정부는 디엔비엔푸 전투에 미군의 파병을 고려했었다. 미국은 ‘독수리 작전(Operation Vauture)’이라 하여 오키나와와 필리핀에 주둔한 미국 공군기지의 전투기를 출격시켜 디엔비엔푸 요새를 공격하는 베트민 부대를 폭격하는 방안을 검토했지만, 실행되진 않았다.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승리한 베트민)

미국이 참전을 고려하고 있을 때 보 응우옌 잡 장군 휘하의 베트민군은 디엔비엔푸 요새의 포위망을 조금씩 좁혀들어갔다. 5월 초 베트민은 디엔 비엔 푸에 있던 프랑스군의 외곽 방어선을 뚫고 내부 방어선 까지 포격했고, 5월 6일에는 사기가 꺾인 프랑스군 병사들을 향해 라 마르세예즈(La Marseillaise)를 부르며 프랑스군의 사기를 더 저하시켰다. 1954년 5월 7일 프랑스군은 마침내 항복했다.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대략 2300명의 프랑스군이 전사했고, 11000명이 포로로 붙잡혔다. 베트민군은 대략 23000명의 사상자가 나왔고, 작전 중 10000명이 전사했지만, 위대한 승리를 쟁취했다. 아무튼 디엔비엔푸 전투가 끝이 나면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베트민군의 승리로 끝났고, 베트남은 프랑스 제국주의를 꺾었으며 독립을 쟁취했다.

 

4.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의의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1946년부터 1954년까지 대략 8년간 베트남에서 전개되었다. 특히 베트남 북부지역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베트남인들은 단결하여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을 몰아냈다. 8년간의 전쟁 기간 동안 베트민은 대략 17만에서 20만 명 정도의 사상자가 속출했다. 프랑스군은 대략 7만 명이 전사했다. 그리고 전쟁 기간 동안 민간인도 15만 명이 사망했다.

(제네바 회담)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스위스에서 제네바 회담이 열렸다. 제네바 회담에 따라 베트남은 북위 17 도선을 기점으로 다시 남북으로 나누어졌다. 그러나 이 분단에는 조건이 있었다. 분단 2년 이내에 베트남 전역에서 통일을 위한 총선거를 시행한다는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이 총선은 미국과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이 일방적으로 파기하면서 무산됐다.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프랑스군은 6월 말에 베트남 중부고원지대 자라이 성에서 마지막 전투를 치렀다. 안케 전투(Battle of An Khe)가 그러했다. 그리고 프랑스는 이 전투에서도 대패했다.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망중한을 즐기고 있는 호치민)

 

아무튼 프랑스군은 자신들의 식민지배를 위해 일으킨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대패했고, 결국은 철수해야 했다. 베트남은 자신들의 독립을 위해 프랑스 제국주의에 맞서 독립을 쟁취했다. 이는 1858년 프랑스가 다낭을 점령하며 시작했던 100년간의 프랑스 식민지배체제에 종지부를 찍는 역사적 쾌거였다. 따라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전 세계적 민족해방투쟁의 역사에서 길이 남을 업적이자 자랑스러운 승리의 역사다.

 

5. 참고문헌

 

1.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마이클 매클리어 저, 유경찬(역), 을유문화사 출간, 2002

2. 호치민 평전, 윌리엄 J 듀이커 저, 정영목(역), 푸른숲 출간, 2003

3. 새로 쓴 베트남의 역사, 유인선 저, 이산 출간, 2002

4. 전환시대의 논리, 리영희 저, 창비, 2006

5. 호치민 식민주의를 타도하라, 호치민 저, 윌든 벨로 (서문), 배기현 (옮김), 프레시안 북, 2009

6. 미국민중사 2, 하워드 진 저, 유강은 (역), 이후,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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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인 2019-09-29 02: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대착오적인 식민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프랑스가 결국 자신들의 몰락을 자초한것이라 생각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NamGiKim 2019-09-30 10:30   좋아요 1 | URL
네 애초에 프랑스가 베트남과 알제리를 식민지화 하겠다는 시대착오적인 발상에서 시작된 전쟁이었죠. 프랑스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했으니, 자신들에게도 승전국으로써의 떡고물이 떨어지길 원했던 것 같습니다. 그게 결국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과 알제리 독립 전쟁으로 이어졌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