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폭풍 작전(Operation August Storm)

1945년 5월 7일 아돌프 히틀러를 이어 2대 총통이 된 카를 되니츠는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했다. 1941년 6월 22일 히틀러의 300만 대군이 소련 전역에서 진격하며 시작된 독소전쟁은 4년간의 전쟁 끝에 소련의 승리로 끝이 난 것이다. 유럽에서 전쟁이 끝나자 연합국에 대항하는 세력은 일본 밖에 남지 않았다. 당시 일본은 중국과 미국을 상대하고 있었는데, 미군의 폭격으로 본토가 쑥대밭이 되어가고 있는 상황에서도 일본은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1945년 4월부터 6월까지 전개되었던 오키나와 전투를 보면 일본군의 거센 저항과 끈질김에 직면해 있던 미군 또한 12,000명 이상의 전사자가 나올 정도였다.(물론 일본군은 이에 6,7배 이상의 전사자가 속출했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극심한 손실을 경험했던 미국은 일본으로 상륙하겠다던 ‘본토 상륙 작전’을 미루고 있었다.

1941년 4월에 일본과 중립조약을 맺었던 소련은 전쟁이 끝나가던 1945년 4월 6일 일소 중립 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했다. 독일과의 전쟁이 자신들의 승리로 끝이 나자 소련은 일본과의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했고, 소련의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은 1945년 7월 극동방면군 사령부 창설과 더불어 1945년 6월부터 유럽에 있던 소련군을 시베리아 열차를 통해 극동에 배치했다. 그리고 그 극동방면군 사령부에는 알렉산드르 바실레프스키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소련군이 6월과 7월 안에 병력 배치와 사령부 창설을 완료한 이유는 이오시프 스탈린이 시켰기 때문이다.

이오시프 스탈린이 극동에 대규모의 군대를 배치하는 사이 1945년 7월 16일 미국 뉴멕시코 주의 사막에선 인류 최초의 핵폭탄이 터졌고, 핵실험까지 완료한 미국은 1945년 8월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일본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다는 사실을 안 스탈린은 만주에 있던 소련군들을 진격시켰고, 극동에 배치되었던 소련군들은 만주에 있던 일본 관동군을 상대로 전투를 개시하게 되었다. 8월 폭풍 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8월 폭풍 작전은 1945년 8월 9일에 시작되었다. 만주와 소련 국경 전역에서 실행된 소련군의 대규모 공세엔 대략 80개의 소총사단과 4개의 전차군단 그리고 3개의 항공군(대략 항공기 3개 사단 정도)등 총 150만 명 이상이 동원되었고, 이는 26,000문의 야포와 5,300대의 전차 그리고 4,500대에 달하는 항공기가 투입된 규모였다. 그리고 여기엔 16,000명의 몽골 기병도 포함되었다. 소련군의 공세가 시작되자 일본군의 방어선은 맥없이 무너졌다. 소련군의 공격을 받자 통신이 마비된 일본군은 후퇴를 거듭하게 되었고, 소련군은 대규모의 전차 부대를 앞세워 삼면에서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가며 일본군을 압박했다. 대부분의 일본군들은 소련군의 기습을 받아 통신이 마비된 상태에서 제대로 된 저항을 해보지도 못했지만, 하이라얼 요새의 일본군 부대나 북만주 최대의 일본군 방어 요새였던 아이훈의 경우는 조금은 달랐다. 일본군이 견고히 방어하고 있던 후터우 요새도 그러했다. 그러나 만주에 배치되었던 일본 관동군들은 독일과의 전쟁에서 전투 경험을 쌓은 소련군의 전략 전술과 화력 면에서 상대가 되지 못했다.

결국 일본은 1945년 8월 15일 연합국에게 무조건 항복했다. 그리고 8월 16일에는 모든 전투를 중지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이 명령을 하달 받은 일본군인들 중에는 일본의 항복 이후에도 저항을 멈추지 않은 이들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후터우 요새를 방어하던 일본군이었고, 후터우 요새의 일본군은 8월 22일 소련군에 의해 요새가 함락될 때까지 저항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 이후에도 소련군은 진격을 계속 했다. 8월 말까지 만주 전역을 장악한 소련군은 만리장성이 있는 곳에서 멈추었고,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 반도까지 진격하였다. 1945년 8월 11일 청진에 상륙한 소련군은 15일 까지 대략 4일간 전투를 치렀고, 21일부터 23일 사이에는 원산과 함흥 그리고 개성까지 진격해 들어왔다. 뿐만 아니라 소련군은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에게 양보했던 사할린의 절반을 차지하기 위해 8월 18일 시무슈 섬을 공격했다. 사할린 공격에서 소련군은 대략 9천 명 이상의 병력을 투입했고, 사할린 절반을 완전히 접수했다.

1945년 8월 9일부터 20일 까지 대략 11일 간 소련군은 대략 1만 2천 명의 전사자를 낸 반면에 일본군은 대략 2만 명에서 8만 3천 명 이상의 전사자가 속출하였다. 어쨌든 소련군은 8월 폭풍 작전에서 짧은 시간 동안 일본 관동군 부대를 섬멸하였다. 이는 독소전쟁 당시 반파시즘 전쟁에서 소련군의 쌓은 경험과 그것을 토대로 한 제병 협동 전술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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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9-06-02 16: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잘 몰랐던 역사네요.
감사합니다. ^^

NamGiKim 2019-06-02 18:36   좋아요 1 | URL
독소전쟁사 쓴 데이비드 글랜츠의 논문이 ‘8월 폭풍 작전‘이라는 제목을 달고 번역되어 책으로 출간됐습니다. 관심 있으시면 읽어보시길 추천합니다.

유승현 2019-06-05 10: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8월의 폭풍』역자로서 말씀드리자면 ˝8월의 폭풍˝은 작전명이 아니라 책 제목이었습니다. 소련군은 그러한 작전명을 사용한 적이 없는데 글랜츠 본인이 자기 책 제목이 작전명으로 인식되어서 당황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책을 사서 읽어보시면 아실 일입니다.

NamGiKim 2019-06-05 11:01   좋아요 0 | URL
역자님께서 댓글 달아주실줄은 몰랐습니다.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