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의 고백
이덕일 지음 / 휴머니스트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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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사부일체!

  "임금과 스승과 부모는 한몸이다."

  군위신강, 군신유의 모두 유가에서 말하는 기본 이야기이다. 그러나 조선은 이 질서가 무너졌다. 그렇게 성리학의 나라라 말하는 조선이지만 실상 그 내면은 질서와는 거리가 멀다. 이성계라는 무인에게서부터 시작한 조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대두된 사림파들. 그들의 이상은 임금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내리누르는 것이다.

  임금도 우주의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다. 성군이라는 말은 임금의 권위를 깎아 내리는 말이다. 성군이라 말하기 위해서 임금은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한다. 성리학에 의한 통치를 꿈꾸던 이들은 임금의 권위를 깎아 내리기 시작했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이것을 가속화 하였다. 임금의 권위는 바닥을 쳤고 급기야는 신하가 임금을 택하는 택군의 질서가 성립되었다. 말은 하늘의 뜻을 저버린 왕을 백성들을 위하여 교체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자신들의 이상에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익에 반하는 왕은 제거할 수 있다는 말이다. 요즘 많은 역사 드라마들이 나오긴 하지만 "8일"이라는 드라마가 이러한 생각을 가장 잘 표현하는 것이리라.

  택군의 시초는 광해군 이후의 인조반정일 것이다. 그동안 많은 임금들이 바뀌는 과정이 있었지만 그래도 그 가운데에서 왕족들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였지만 인조반정은 말이 反正(바름으로 돌아간다.)이지 사실은 친명을 부르짖는 사림파의 이익을 위하여 임금을 택한 택군이다. 다음 택군이 영조요, 그리고 그 다음 택군이 사도세자이다. 정조또한 택군을 피해갔다가 마지막에는 똑같은 결말을 맞이한 불쌍한 왕이다.

  노론과 소론의 싸움에서 자식도 부모도 없는, 임금도 신하도 없으며, 인륜마저 없어져버린 비정한 현실을 날것 그대로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사도세자의 고백이라는 말은 사도세자의 삶을 통하여 고루하면서 비현실적인 모습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는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이들의 삶을 비참하게 만들어 놓는지를 알고 있게 만들어 준다.

 

  이책을 보고 조금더 깊이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은 "선비의 배반"이라는 책을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군사부일체가 택군으로 변하여 버린 모습이 사도세자의 고백의 핵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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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와 선동 사이에서 정용섭의 설교비평 2
정용섭 지음 / 대한기독교서회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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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유명 목사들의 설교를 비평하다.

듣기에도 생소한 설교비평학...

글쎄 과연 설교 비평학이라는 것이 존재해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설교 비평학이라는 것이 자기 설교를 살펴보면서 끊임없이 반성하는 것이라면 모르지만 왠지 이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대안없는 안티, 안티를 위한 안티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은 무엇일까? 오직 설교 하나만 가지고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정죄하는 것은 어찌보면 작가가 그렇게 말하던 공격적인 모습이 아닐까? 설교비평학이라는, 이 시대의 진정한 설교를 위해서 희생한다는 대의명분을 가지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면서 많은 목사들의 설교를 비평하는 모습을 보면서 오만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게 느껴지는 것은 나뿐인가?

설교의 현장도 모두 무시하고, 설교자의 생각도 무시하고 오로지 설교만 가지고 제단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설교자의 인격까지도 규정하는 것은 율법을 가지고 모든 사람들의 가치를 평가하던 바리새인의 모습과 똑같지 않을까? 부분부분으로 보면 일견 옳은듯 보이지만 전체를 놓고 볼 때에는 설교의 범위와 형식을, 그리고 성령의 능력을 제한하는 모습은 아니었을까? 참된 설교는 행동도 필요없고, 윤리도 필요없고 오로지 성경에만 깊이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context는 성공이나 일류를 지향하면 안되고 오로지 실패하고 무너져야 하며 FTA와 미국의 패권주의를 공격해야만 하는 것이다. 

송기득 같은 신학자들의 글은 아주 훌륭한 설교요 유명 대형교회 목사들의 설교는 신학이 빠진 아전인수라는 평가는 신학자 특유의 오만은 아닐까? FTA와 미국의 패권주의를 옹호하면 안된다는 것에 동의하면서도 이것만이 진정한 설교의 방향이라는 데에는, 생명을 살리는 설교의 방향이라는 데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보는 내내 왠지 "기독교는 나의 도움을 받아서 새롭게 살아나야 한다."는 똘선생의 오만이 떠오르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일단 1권도 마저 사봐야겠다. 과연 여기에서는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어쨌든 신학자들의 독선과 오만의 한 단면을 본 씁쓸함과 그렇지 말자라는 반면교사를 본 느낌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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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 2008-07-21 1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모든것을 무시하고 이정도의 비판을 받을 만한 것이 한국 기독교입니다....
한심하다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왜냐면, 신학을 공부하지 않은 사람이 봐도 대충 이해될 정도이니,
신학을 공부한 분들이 보면 어떨지...
그렇다면, 비판을 받은 분들은 어떤 신학을 공부 하셨는지....

아마 삶이나 그들의 교회의 내부로 들어가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을거라는 생각이 들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생각해보면)한국교회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해 옵니다...
 
에너지 버스
존 고든 지음, 유영만.이수경 옮김 / 쌤앤파커스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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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이 네이트 온 아이디가 Energy Bus인지라 서점에 갔다가 이 책을 보고 아무생각 없이 집어들었다. 이 책을 봤나라는 생각에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꼬박 2시간에 걸쳐서 마지막가지 다 읽었다. 그리 어려운 내용은 아니고 양이 많은 것이 아니지만 우리에게 많은 화두와 교훈을 던져주는 책이다. 에너지를 나누어 주는 에너지 CEO가 되기 위해서 해야할 열가지 계명. 우리의 삶을 기쁨과 활력으로 가득채울 교훈들이다.
 
1. 당신 버스의 운전사는 당신 자신이다.
2. 당신의 버스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것은 ‘열망’, ‘비전’, 그리고 ‘집중’이다.
3. 당신의 버스를 ‘긍정 에너지’라는 연료로 가득 채워라.
4. 당신의 버스에 사람들을 초대하라, 그리고 목적지를 향한 당신의 비전을 공유하라.
5. 버스에 타지 않은 사람들에게 에너지를 낭비하지 마라.
6. 당신의 버스에 ‘에너지 뱀파이어 탑승 금지’ 표지판을 붙여라.
7. 승객들이 당신의 버스에 타고 있는 동안, 그들을 매료시킬 열정과 에너지를 뿜어라.
8. 당신의 승객들을 사랑하라.
9. 목표를 갖고 운전하라.
10. 버스에 타고 있는 동안 즐겨라.

마지막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눈에 들어온 글귀는 이것이다.

"목표란 다른 사람보다 더 나아지는게 아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어제의 너'보다 나아지는 걸 목표로 삼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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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란트 이야기
이종선 지음 / 토네이도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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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뜻보면 기독교적인 것 같기도 하고, 또 어찌보면 불교 같기도 하고...도대체 종잡을 수 없는 이야기. 그러나 확실한 것은 짧다는것, 그리고 에너지 버스와 비슷한 구조라는 것. 마지막으로 읽어볼만하다는 것. 연휴 끝에 어머니 모셔다 드리고 오면서 읽었다. 마침내 다 읽고 이렇게 서평 한마디 남긴다. 여러가지 이야기 가운데에서 다음의 글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선한 욕망을 실현한다는 건 불편한 일일세. 불편한 길을 가가이 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꿈꾸는 성공은 어떻겠는가? 그게 바로 선한 성공이겠지. 선업으로 닦은 성공, 이것이 바로 위대한 성공이 아닐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에 대하여 고민한다. 어느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 고민한다. 내게 있는 여러가지 가능성 가운데에서 어느 것이 하나님의 뜻일까 알지 못해서 고민한다. 그러한 가운데 내게 조언해준 준구형의 이야기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내가 선택한 방법이다. 내게 불편하고 손해가 가는 길을 선택하는 것, 이것이 내가 하나님의 길을 묻는 방법이다. 청년들에게 선물해 주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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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김훈 지음 / 학고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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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왜란 이후의 2차 호란.

도대체 조정은 무엇을 한 것이며 위정자들은 무엇을 한것일까?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고 그렇게 내분만 겪을 것을....

도대체 인조의 반정은 진정 바른 것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을까?

바른 것이란 무엇인가? 명분론에 빠져서 사대주의를 하는 것 이것이 진정 바름인가? 그 가운데에서 죽어가는 민초는 과연 무엇인가? 대를 위한 희생? 과연 그들이 희생을 바랬을까? 보는 내내 답답했다. 도대체 무엇을 답답해 함인가? 과거를 답답해 함인가 아니면 과거와 흡사한 오늘을 답답해 함인가? 명을 숭배하던 사대주의가 미국을 숭배하는 사대주의로 바뀌었을뿐  위정자들은 명분쌓기에 주력할 뿐이다.

  그래도 당시에는 이시백이 있었지만 오늘은 누가 할 것인가? 차떼기당, 그밥에 그나물 통합신당(도대체 다시 모일 것이면 무엇하러 그렇게 흩어지며 탈당을 했던가? 그밥에 그 나물인 것을), 아직도 DJ의 망령을 벗어던지지 못한 민주당, 어느새 기득권이 되어버린 민노당, 일신의 욕심을 위해 고향까지 버리고 돌아온 무소속 회창씨, 국민을 중심으로 한다는 국민 중심당(국민이 중심이긴 한 것일까?), 기업 정신으로 이윤 창출하듯이 이미지 창출하고 있는 창조한국당, 듣도 보도 못한 찬민주연합, 경제공화당, 새시대참사람연합(도대체 맞는 말인가? 좌인가 우인가? 말도 안될 중도좌파나 개혁신당은 집어치워라) 등 대선을 중심으로 당은 많이 생겼지만, 나라와 국민을 위한다지만 진정 이시백 같은 인물은 없다.

답답하다. 울고싶다. 서날쇠의 말이 생각난다.

"조정이 나가야 성이 삽니다."

그대로 돌려주고 싶다.

"정치인이 나가고 당이 나가야 나라와 국민이 삽니다."

 12월 19일 대선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은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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