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간의 조건이란 무엇일까?

노동, 복지, 환경? 도대체 인간의 조건이 무엇일까? 이책을 보는내내 한가지 생각을 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흑야"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가졌다. 물론 비슷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똑같이 유태인으로서 2차대전을 아우슈비츠에서 살아야했으니 말이다. 모두 다 2차대전을 지나면서 유태인으로서 살아남기 위해 노력을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이들의 삶을 바라보면서 인간이란 무엇인가 고민을 해본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의 조건을 자기 인생의 비전의 실현으로 본다. 어떤 사람들은 사회가운데에서, 어떤 사람들은 노동으로, 어떤 사람들은 여러가지 조건들로 인간을 규정한다. 그러나 2차대전을 겪었던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물론 이 책의 저자인 프레모 레비를 비롯해서 인간의 조건을 생존으로 본다. 일단 살아남는 것, 이것이 인간의 조건이다. 어찌보면 동물과 하등의 차이가 없다 생각을 하겠지만 일단 살아남는 것이 인간의 최소한의 조건이다. 이것이 무너지는 순간 그는 인간이 아닌 것이다. 그저 쓰레기요, 연료로 취급될 뿐이다. 레비는 이것을 아우슈비츠에서 발견한 것이다. 온갖 비리와 부정을 저질러도 살아남는 것 이것이 인간의 최소한의 조건이요 최후의 마지노선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의 가치관과 잣대로 이 사람들을 판단하지만 이는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우리가 그 상황이었다면 분명 우리도 너무나 쉽게 그 길을 택했을 것이니.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이 레비의 사상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다. 이 상황을 알리기 위해 살아남는다, 증언을 위해 살아남는다는 것은 생존을 위한 비열한 행위를 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자기 기만이요 포장일 뿐이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서 노력한 것이 레비의 진심일 것이다. 이는 레비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 땅에서 오랜 세월을 살아온 민초들의 이야기이다.(이 책을 읽으며 이 땅의 민초들이 생각나는 것은 나뿐일까?) 나를 포함한 민초들의 이야기이다.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그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힘이 약하기 때문에 해양 세력에 치이고 대륙에 치이는 삶을 살았다. 위에 계신 분들은 자신들의 평안한 삶이 무너지고 이데올로기가 무너지면서, 왕권이 흔들리면서 힘들다 두렵다 하지만 민초들은 생존자체가 불확실했던 역사가 우리나라의 역사이다. 이러한 역사 속에서 900여회의 외침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한번도 다른 나라를 침략하지 않은 우리의 바보스러움을 평화로움으로 포장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을 역사적으로 교육하고 있다. 일본의 무시무시한 군사력을 자위대라는 말로 포장하고 있는것과 다를 바가 무엇인가?

친미니 반미니 외치는 모습을 보면서 대추리가 떠오른다. 강자들은 이데올로기 싸움을 하지만 약자는 이데올로기의 모든 리스크를 혼자 떠안을 수밖에 없는 구조로 인하여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하여 투쟁한다. 오직 살아남기 위하여 투쟁하는 것이다.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본인도 이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약자는 아닌가 보다. 생존을 위한 투쟁을 넘어서 다른 것을 바라보고 있으니...

인간의 조건은 민초의 역사이다. 레비는 우리 형제들이고 자매들이다. 오늘도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이며, 민중들이다. 오직 인간의 조건인 생존을 위해 투쟁하는 태안의 어민들이며 대추리의 사람들이다. 광주이며 이들을 집압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는 전경이요 군인이다. 이들이 민조요, 이것이 인간이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aint236 2007-12-21 1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의 사진은 다음 이미지 검색으로 가져왔다.
 
하류지향 - 공부하지 않아도, 일하지 않아도 자신만만한 신인류 출현
우치다 타츠루 지음, 박순분 옮김 / 열음사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하류지향?

처음 이 책을 접했을 때의 느낌이다. 상류지향도 아니고 높은 곳을 바라보는 것고 아니고 그렇다고 겸손하다는 의미도 아닐텐데 무슨 의미일까? 88만원 세대라는 책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말해서 샀는데 이건 무슨 이야기일까? 솔직히 그 의미를 모르겠다는 생각으로 책을 열었다.

 

하류지향!

다음으로 느낀 것이다. 책을 읽어가면서 하류지향이라는 말만큼 이 책의 내용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단어가 없겠구나 생각했다. 이미 우리 나라에서 친숙한 프리터족(놀랍게도 우리가 자조 섞인 말로 사용하는 프리터족도 하류지향은 아니었다.)은 물론 니트(NEET=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족에 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일본 사회의 사회적인 병폐가 심각한 수준임을 보게 된다. 한달내내 열심히 일해야 평균 임금 88만원을 받을 수 있다는 우리 나라 20대를 이야기하는 88만원 세대보다 더한 니트족들의 이야기는 끝간데 모르고 바닥으로 가라앉는 젊은이들을 발견하게 된다. 이런 젊은이들이 있었던가 생각해보면서 이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님을 깨닫고한숨을 쉰다.

니트족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생계형 알바 88만원 세대를 지나가고 있는 우리 젊은이들의 미래일지도 모른다. 열심히 일해야 자신의 가치보다 낮은 평가와 임금을 받는 일이 계속되다 보면 일본형 니트족처럼 노동으로부터 도피해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직은 살만하다. 언젠간 좋은 날이 오겠지. 조금만 참자."라는 생각에서 "이런 일을 왜 하고 있는가?"라는 생각으로 전환되게 된다면 생계형 알바에 매진하고 있는 우리네 20대들은 니트족으로 전환할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책이 남의 이야기같지 않은 이유가 바로 여기있다. 지금에서 한발만 더 나가면 하류지향으로 갈 것이기 때문이다.

 

하류지향.

모르겠다. 내 생각에 이미 한국 사회는 하류지향으로 들어섰다. 하류지향의 기본 원칙은 간단하다. 교육과 노동이라는 권리이자 의무를 시장경제에 맡겨버리는 순간 하류지향의 기본원칙은 작동되는 것이다. "왜 이런 것을 배우나요? 이것이 얼마나 쓸모 있나요?"라는 질문들의 이면은 "이것을 통해 얼마나 벌 수 있나요? 돈으로 환산 가능한가요?"라는 의미라는 필자의 지적은 가볍게 들을 수 없는 이야기이다. "한국에서 이공계가 죽는다. 그리고 인문철학은 이미 죽었다." 말한다. 교사가, 의사가, 판검사가 인기 직종으로 떠오른다. 돈 많이 벌면 행복하다는 맘모니즘이 주위에 넘쳐난다. 또한 이것과 맞물려 자기 인생의 주인은 자신이라는 "자기 결정 페티시즘"이 넘쳐난다. 이 모든 것의 결과는 하류지향이다. 아무것도 안하고 있으면서도, 아무 것도 모르면서도 당당함이 넘쳐나는 사람들이 이 사회에 가득하게 되는 것이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특수가 아닌 보편으로 받아들여지는 사회, 아니 무식과 용감이라는 개념조차도 사라져 모두가 하향 편준화 하는 사회가 이미 도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제 대선을 치뤘다. 이명박씨가 대통령이 되었다. 정말 힘들었던 대선이었다. 정책은 실종됐고 개싸움이 난무한 대선. 정책은 사라지고 정파만 남았던 정치판, 의사봉은 사라지고 전기톱과 지팡이만 있었던 국회. 이러한 혼란 가운데에서 과연 우리는 무엇을 바라며 이명박씨를 대통령으로 뽑았던 것일까? 최선이 아닌 차선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북핵도, 친미도 반미도 사라지고 오직 남은 것은 경제뿐이다. 이젠 무한 경쟁의 논리로 모든 것을 덮었다. 7% 성장과 300만개 일잘기 창출이 모든 비리와 더러움을 덮었다. 아마 경제의 색깔은 검정일 것이다. 모든 것을 겊으니. 각설하고 이제 한국 사회도 경제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무한경쟁의 시대가 될 것이다. 과연 이러한 무한 경쟁의 논리에서 88만원 세대는 어디로 갈 것인가? 마음이 무겁다.

 

어쩌면 한국은 이미 하류지향의 운명을 선택하고 그 곳으로 나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추락하는 한국교회 - 교회의 미래는 한국의 미래다
이상성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7년 10월
평점 :
품절


한국 교회의 미래는 한국의 미래라는 부제에 속아서 샀다.

아프간 사태 이후 두달 쯤 되었을 때 나왔으니까 실제로 쓴 것은 한달 남짓일까? 이렇게 빠른 시간 내에 이렇게 조목조목 집어가면서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은 이상성 교수가 평소에 이 부분에 대하여 많이 고민해온 신학자라는 말일 것이다. 항상 고민을 갖고 진실하게 살려고 하는 이상성 교수의 삶의 태도에 일단 박수를 보낸다.

이 책에서는 지금 한국 교회의 모습들을 총체적인 난국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이 모든 것이 종합선물 세트처럼 모여진 것이 아프간 인질 피랍 사태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과학을 외면하는 교회, 공격적인 선교를 일삼는(어지보면 공격적인 기업 마케팅으로도 뷔춰지는) 전도, 타민족의 문화와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모든 모습들을 일컬어 한국 교회의 오만이자 잘못이며 고쳐야 할 것이라 말한다. 맞는 말이다. 한국 교회는 고쳐야 할 점들이 너무 많이 있다. 이것은 돌 선생의 일갈과는 다른 것이다. 돌선생의 일갈이야 외부인이 감나라 배놔라 하는 식의 딴지걸기식 참견이라면 이상성 교수의 지적은 자아성찰을 통한 자기 비판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본인도 이상성 교수의 말에 많이 공감한다. 그리고 이 책에서 집고 넘어간 부분들은 20살부터 시작된 대학생활을 통하여 고민했던 것들이고, 지금도 고민하고 있는 것들이며, 앞으로도 고민해 나가야 할 부분들이다.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는 이상 평생을 지고 가야할 질문들이요 불가에서 말하는 화두와 같은 질문들이다. 아직까지도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입장에서 이상성 교수의 말은 결단력 있는 일갈로 다가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필요한 책이다라고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내용에 공감이 안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이상성 교수의 태생적 한계가 아닐까? 태생적 한계라기 보다는 교수라는 신분의 한계가 아닐까?

현장을 무시하는, 현장과 동떨어진 신학을 거부하면서 현장과 가까운 신학을 이야기하는 친구들에게 "신학이 현장에 맞추는 것이 옳은가, 현장이 신학에 맞추는 것이 옳은가?"일갈했다는 그의 일화를 통하여 신학자들의 오만함을 다시한번 느끼게 된다. 내가 가르침을 받은 교수들도 마찬가지다. 우리 나라에서 손에 꼽는 학문의 자유를 추구하던 학교가 이제는 교단의 눈치를 보면서 지내다가 분열한 모습을 보면서, 그리고 학문에 성실하지도, 그렇다고 자기 양심에 진실하지도 않은 교수님들을 보면서, 진실한 선생님들이 학교에서 퇴출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다시한번 신학의 오만함과 무기력함, 그리고 약삭빠름에 실망하게 된다. 내가 유학의 꿈을 접은 데에는 이러한 모습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다.

신학의 출생이 무엇인가? 현장에서부터 바른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출발한 것이다. 원래 신학과 신앙은 원래 쌍둥이다. 그런데 이들이 이젠 남남으로 변해 버렸다. 아니 서로 우위를 잡으려는 헤게모니 싸움을 시작했다. 신앙은 돈과 조직이라는 파워로, 신학은 권위와 명예라는 파워로 서로 싸움을 벌이고 있다. 한국 교회의 추락은 여기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서로 하나되지 못하고 헤게모니 다툼과 권력 쟁취를 위한 음모 속에서 한국 교회는 추락하는 것이다.

이상성 교수가 말한 여러가지 가운데에서 몇 가지를 기억해 보자면 타 종교를 무시한 선교를 지양하자는 말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타종교를 무시하지말고 그들을 이해하자는 종교다원주의의 사고는 아직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많은 선배들이 종교 다원주의를 부르짖고 옹호하였지만 현장에서의 모습은 그렇지 않다. 나도 종교 다원주의를 공부했지만 예수를 빼버린, 구원론을 포기하고 선교를 포기한 기독교의 의미는 무엇일까? 물론 예수천당 불신지옥의 구호를 외치는 것이 선교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교묘한 사탄의 방해요 비기독교인을 기독교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우매한 행위이다.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의 핵심을 포기하는 것은 하향 평준화요 세계화를 부르짖는 모습과 똑같은 것이 아닐까?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다. 공감하는 부분도 있고 비판하는 부분도 있고. 이젠 책을 읽는다는 거시 재밌다는 생각을 갖게 되면서 한편으로는 한국 교회의 밝은 미래를 그려본다. 이러한 책들이 많이 나와서 기독교인들을, 한국 교회를 자극했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4 - 헤라클레스의 12가지 과업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4
이윤기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영화계에 이런 말이 있다.

"원작보다 나은 속편은 없다."

영화를 좋아하는 본인으로서는 매우 공감하는 말이다.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를 보면서 갖게 된 생각이 딱 이것이다. 지금가지 1~3권과 그리스에 길을 묻다 가지 보았는데 그 중에 가장 가볍운 책을 꼽으라면 단연코 4권을 꼽겠다. 헤라클레스라는 영웅에 집중한 것은 좋지만 집중이 심층적인 것이 되지 못하고 여기저기 조금씩 건드려 놓은 느낌이 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내가 책을 보면서 그 속에 감추어진 저자의 생각을 읽어내는 눈이 부족한 것인지 아니면 지금가지의 인기에 기대어 살짝 가볍게 여긴 것인지? 아무튼 1~3권까지에서는 신화를 작가의 눈으로 해석하고 이야기해 주었기에, 그래서 마치 그리스 로마 신화의 본고장을 여행하면서 가이드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고 상상의 나래를 펴는 느낌을 갖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4권에서는 현저하게 이것이 약하다. 단순히 그리스 로마 신화를 현대어로 풀어서 전해주는 그런 느낌은 무엇일까?

솔직히 올림푸스 가디언을 보는 것보다 못하다 느끼는 것은 나만인가?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이렇게 생각한다면 저자는 확실하게 전편들보다 수고를 덜한 것이리라.

전작들과 비교하여 변하지 않은 것은 비주얼이다. 세계 명작과 동상들을 통하여 여러가지 신화의 볼거리들을 제공해 주는 것은 변함이 없다. 만약 이마저도 약화되었다면 정말 돈이 아까웠을 것이다.

헤라클레스에 관한 신화를 알고 싶다면 가벼운 마음으로 이 책을 읽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헤라클레스에 관한 신화를 알고 싶어서 이 책을 읽을바에는 솔직히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는 것이 낫지 않을까? 헤라클레스의 이야기를 예술계의 거장들이 어떻게 해석했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면 큰 의미로 다가오겠지만 말이다.

다음 권에서는 다시 초심으로 돌아갔으면 한다. 이윤기씨의 팬으로서, 그의 이야기꾼의 감성이 다시 살아나기를 소망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부의 미래 - 앨빈 토플러 (반양장)
앨빈 토플러 지음, 김중웅 옮김 / 청림출판 / 2006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부의 미래(앨빈 토플러/청림출판)

 

"모든 사항을 고려 했을 때, 이것도 한 번 살아볼 가치가 있는 환상적인 순간이다. 미지의 21세기에 들어온 것을 뜨거운 가슴으로 환영한다!"

 

부의 미래를 끝맺는 말이다. 앨빈 토플러의 미래에 대한 시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다.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을 가진 앨빈 토플러는 미래의 부는 시간과 공간과 지식에 의하여 형성되고 창출될 것이라 말한다. 모든 것들은 변화를 하고 있으며 이러한 변화 가운데에서 시간과 공간과 지식을 잘 이용하는 것이 절대 빈곤을 퇴치하고 인류에게 새로운 미래를 제공하는 대안이 될 것이라 말한다.

 

  여러가지 생소한 단어들이 많이 나온다. 동시화(모든 과정들을 일련의 시간 과정 가운데에서 적합하게 조정하는 과정들 도는 행위), 비동시화(일련의 과정 가운데에서 조정되지 않아서 나타나는 파국들이나 현상들), 무용지식(우리가 습득하는 지식은 숙달된 당시에는 이미 과거의 것이 되어 쓸모없는 지식이 되어버리다.), 프로슈머(생산과 소비를 같이 하는 비화폐 경제의 일들로 화폐경제에 편입되기도 하고 화폐 경제를 변형시키기도 한다.) 등 생소한 단어들이 너무 많이 나온다. 처음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에는 이러한 단어들을 익숙하게 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물론 책을 다 읽은 지금도 위에 정의한 단어들은 나의 정의일 뿐이다.

 

  생소한 단어를 대충 정리하고 나자 토플러가 하고자 하는 말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부는 변화하는 과정 가운데에서 창출될 것이며 이것들을 가능하게 하며 가속화 하는 것은 IT와 컴퓨터, 통신, 등 첨단 과학 기술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오직 과학만이 자기를 부정하고 개선시켜나갈 여지가 있는 이유에서다. 이것들을 보면서 역시 과학 기술을 최우선의 가치로 여기는 지식인 혹은 과학만능주의자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 같아 씁쓸하다. 그리고 이것이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과학에 대한 환상을 심어줄 것인지...

 

  또한 토플러는 미국은 세계를 제패하는 제국주의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도 분열을 앓고 있는 실험실이라 말했다. 미국을 제국주의로 몰아가는 많은 사람들을 비판하면서 그들은 변화라는 체제와 여기에 대한 저항이라는 사회적인 면을 무시했기 때문이라 비판한다. 그러나 교묘한 논리 가운데에 미국의 제국주의를 옹호하고 변호한다고 느끼는 것은 나뿐일까?

 

  부의 미래는 미래의 부의 창출 시스템이 혁명적으로 바뀌어 갈 것이며 그 가운데에서 절대 빈곤을 퇴치하는 시스템에 대한 선구적 시각을 제공해 주는 책이다. 지금가지 나왔던 토플러의 책들을 읽었다면 토플러의 말이 무엇인지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씁쓸한 마음이 드는 것은 모든 것을 부의 잣대로 평가하는(본인은 아니라 말하지만 교묘한 논리 가운데에 숨어 있는 것은 부가 모든 기준의 절대치가 된다는 것이다.) 토플러의 부에 대한 긍정적인 기대감 때문일 것이다. 막연한 기대감, 반대 급부에 대해서는 눈 감고 있는 막연한 부에 대한 기대감이 토플러의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가치관의 근거이다.

 

  "미래는 점점 부를 추구하는 시스템으로 돌아갈 것이다. 이것은 이미 국가의 손을 떠난 것이다. 당장 이라크 전쟁만 해도 미국의 힘보다는 민간 기업과 NGO의 힘이 더 강하다."는 논리를 통하여 미국의 패권을 교묘하게 포장하는 모습, "필요한 부분에 대해서는 재세계화를 해야 할 것이며 실제로 재세계화는 기업에 의해서 지금도 이루어 지고 있다."는 논리는 세계화를 꾀하는 미국의 논리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 아닐까? 그것도 세련되게 미국과 미국에 있는 민간 기업은 별개라는 말을 하면서.

 

  만일 부의 미래라는 책이, 미래의 부에 관한 책이 남미나 인도를 포함한 제 3세계에서 나왔다면 어땠을까? 같은 제목이지만 매우 다른 내용이지 않았을까? 훨씬 더 미국을 공격하고 세계화를 공격하는 내용이지 않았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