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병원 사용 설명서 - 병원이 우리에게 말하지 않는 불편한 진실
강주성 지음 / 프레시안북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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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내가 의대생이 아니라서 모르겠지만 의대를 졸업할 때 히포크라테스 선서라는 것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남의 나라 사람이고 하도 오래전 사람이라 정확하게 알지 못하지만 내가 아는 수박 겉핥기 식의 지식에 의하면 서양 의학의 사조로 존경받는 사람이라더라. 그의 의술에 대한 정의랄까 가치관이랄까 이것을 받아들여서 의사로서의 본분을 지키겠다는 선서라고 한다. 지금 하는 선서는 원래 히포크라테스 선서와는 내용이 많이 다르다고 들었다. 제네바 협약을 통해 동의를 얻은 선언문을 가지고 선서를 한다고 하는데 그게 위의 사진에 나온 것이다. 모든 과정을 마치고 마지막에 엄숙하게 선언한다. "이제 의사로 살면서..." 의사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어느 책에서 보았다. 나는당최 남의 나라 사람이고 잘 모르는 히포크라테스라는 사라보다 허준이라는 분에게 관심이 더 간다. 고 이은성시의 소설 동의보감 중편 157페이지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자기 아들에게 유의태가 질책하면서 던지는 말이다.

  "의원은 영달하는 길이 아니니라. 의원은 돈 버는 길이 아니니라. 영달을 꿈꾼다면 중국말 열심히 배워 역관이라도 될 것이요, 돈 버는 게 소원이거든 장사꾼으로 풀릴 일......의원은 병자를 보살피는 게 소임이다. 그것이 첫번째 소임이요 둘째도 셋째도 의원의 소임은 그것뿐!"

  "흙 파먹을 때 흙 파먹더라도 봐줘야 할 병자는 봐줘야 해. 그게 의원이랄밖에......"

  왠지 히포크라테스라는 고상한 사람의 고상한 말보다는 이은성씨가 그리고 있는 유의태란 의원의 투박한 말이 가슴에 더 와닿는 이유는 무엇일까? 꾸밈이 없기 때문일까?

  대한민국 병원 사용설명서! 프레시안의 책이라 선택했다. 의약분업을 이명박 정권이 밀어붙인다는 말을 듣고 선택했다. 강주성이란 사람을 알고 산 책이 아니다. 그만큼 의료 서비스라는 부분은 나와는 상관없는 영역이다. 그러나 이것만은 알고 있다. 의사들이 매우 거만하다는 것을 말이다. "닥터K, 노구찌, 테루"라는 만화를 보면서 이런 의사가 있겠지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내가 겪은 현실은 암담했다. 이 책을 읽기 전 읽은 TTB리뷰에 보니 손가락 끝에 날카로운 칼을 달고 달을 보라하니 칼이 두려워 손가락만 본다는 표현을 하시던 분이 있더라. 의사이신 것 같더라. 그 분의 입장에서야 의사라는 직업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늘어놓으니 불만일 밖에. 그런데 실상 이 책에는 의사를 비판하는 내용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병원과 제도를 공격하고 있을 뿐이지.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빠졌는데, 내가 알고 있는 의사들, 내가 만난 의사들은 하나같이 거만했다. 행동이 투박하고 거친 것이 아니라 거만하다. 환자의 몸은 고치면서 환자의 마음에는 비수를 꽂는다. 간단한 예를 들어볼까? 최근의 일이다. 두달이 조금 못된 달을 데리고 변원에 갔다. 배에 가스가 차는지 우유를 자꾸 토하고 먹지를 못해서 말이다. 세상이 무너질 것 같이 걱정하는 아내에게 그 대단하신 산부인과 의사 나으리는 왜 안먹이냐고 숟가락으로 떠서 억지로라도 먹이라고 혼을 내더라. 애가 먹지 못해서 왔는데, 이것저것 물어보지도 않고, 진찰하지도 않고 억지로라도 먹이라고, 토하더라도 억지로라도 먹이라고 하더라. 두달 된 딸을 데리고 말이다. 지금가지 내가 만난 의사는 이런 범주를 넘어가지 않더라. 이게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한 촉망받는 전문직 의사의 현주소이다.

  이것만이 아니겠지? 이런저런 일로 병원 한번 더 오게 하고, 조금더 비싼 것을 권하고, 무뚝뚝하게 거만한 의사들의 모습을 보면서 환자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돈 잘버는 직업, 어느 정도 지위에 오른 직업, 사회적인 명망이 따라다니는 직업이기에 선호의 대상이 될 뿐이지, 그 안에는 유의태의 일갈은 없다. 이것이 대한민국 의료의 현주소이다. 거기에다 민간보험을 들어도 안심이 안되는 보험제도. 그런데 정부는 시장의 논리로 모든 것을 결정하려 한다. 서비스라는 말 때문이다. 언제 의료가 서비스고, 교육이 서비스가 되었던가? 오랜 세월 우리 나라에서 의료와 교육은 서비스가 아닌 천직이었다. 그런데 어느순간 돈 잘버는 서비스업이 되어 버렸다. 이제 이 서비스업을 더 잘 개발하기 위해 이명박 정부는 병원을 영리법인으로 만들 준비를 하고 있다. 그나마 있는 건보도 유명무실화 하려고 한다. 의료에도 무한 경쟁의 논리를 적용하려고 하고 있다.

  외과의사 봉다리? 종합병원? 내가 보기에 그것은 로맨스 소설이다. 현실은 오히려 하얀거탑에 가깝다. 정치와 돈과 이건이 잔뜩 끼어든 그래서 시장통 같은 곳 이곳이 병원이다. 궁금하면서도 두렵다. 이제 병원이 어디로 가려는가? 내가 상상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정말 앞으로 치료받을 목적으로 범죄하는 사람이 생길지도 모른다. 감옥에 들어가면 밥 먹여주기에 범죄하던 시절이 있던 것처럼 감옥에 들어가면 무료로 치료해주는 것을 노리고 범죄를 기도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사람 목숨을 돈으로 사고 파는 시대, 사람의 가치를 그 사람의 재산으로 평가받는 시기가 도래할지도 모른다. 아니 이미 도래했는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는 것 자체가 슬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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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례한 자들의 크리스마스 - 미국 복음주의를 모방한 한국 기독교 보수주의, 그 역사와 정치적 욕망
김진호.최형묵.백찬홍 지음 / 평사리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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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예수님께서 하루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셨다. 기도를 하시는 가운데 갑자기 예수님의 얼굴이 변하고 옷에서 빛이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갑자기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이야기를 하시기 시작했다. 이야기의 주제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에 관한 일이었다. 졸다가 일어난 제자들이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바라보고 너무 좋은 나머지 예수님게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예수님. 여기가 좋사오니 여기에 초막을 세 채 짓고 내려가지 말고 여기서 쭉 살지요." 바로 그 말을 하는 순간 산 밑에서는 한 사람이 간질걸린 자기 아들을 데리고와서 제자들에게 고쳐 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삶에 찌들고 희망이 없는 사람이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데리고 왔고 제자들이 고치지 못하자 절망하고 있었다.(눅 9:28~42)

  이 책을 아는 목사님 홈피에서 보았다. 그분이 이 책을 읽고 기록한 독후감이 기억에 남아서 허락받지 않고 무단으로 일부 옮겨 본다.

"책의 타이틀 무례한 자들의 크리스마스 중에...특별히 자는 한자로 者로 표기 되었다...뜻이야... 사람 자 이지만... 4획은 붉은 색으로 대각으로 틀려먹었다는 듯이 그려져 있고... 나는 사람자가 아니라 어려서 배운데로 "놈 자"자로 읽어지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결국 무례한 놈들의 크리스마스라고 읽어지는 나도 문제가 있는 것인지???"

  이 책을 읽어가면서 끊임없이 이 생각에 공감하게 되었다. 무례한 놈들의 크리스마스. 주인공인 예수님은 사라져 버리고 무례한 녀석들만이 남아서 먹고 마시고 즐기는 파티를 고발하는 책이다.

  한국에 기독교가 선교된지 공식적으로 120년이 되었다. 그동안 한국 교회는 놀라운 부흥을 이루었다. 내용면에서도 그렇고 물질적인 면에서도 그렇다. 기독교가 이렇게 짧은 시간에, 이렇게 큰 위상을 차지하게 된 예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이렇게 성장한 동력이 어디에 있는 것일까? 하나님의 은혜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일까? 인간적인, 문화적인 노력도 있다. 하나님의 은혜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인간적인, 시대적인 조건들을 살펴보자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 숨겨진 인간적인 욕망들을, 그리고 이로 인해 변질된 기독교의 모습을 살펴보자는 것이다.

  2007년은 참 시끄러운 해였다. "어게인 1907"을 외치던 해였다. 평양 부흥 운동의 역사가 이 땅에 다시 일어나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행사였다. 그러나 왠지 나에게는 그다지 마음에 와닿지 않는 단발성의 이벤트일뿐이었다. 여러 교파 중에서 장료교측이, KNCC와의 관계에서 한기총이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하나의 정치적인 이벤트 그 이상도 이 하도 아니었다. 단지 이것을 위해 이용당하는 평신도와 일선 목회자들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감리교 교단본부에선 "어게인 1907"을 바라보며 "거봐라. 이렇게 큰 거 터뜨릴 거에 대비해서 우린 4년 전에 어게인 1903을 했어야 했다."라는 불만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평양 대부흥의 촉발이 된 하디 선교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원산 대부흥을 너무 쉽게 지나갔다는, 그래서 장로교에게 한방 먹었다는 정치적인 계산이 깔린 안타까움이다. 뒤늦게 감리교에선 1903년 원산 대부흥운동을 조명하기 시작했다. 이유는 명확하다. 장로교와의 기다툼에서 밀리지 않겠다는 것이다. 대부흥운동이 감리교와 장로교의 기세싸움에 이용되는 웃지못할 촌극이 벌어진 것이다.

  왜 기세 싸움이 중요한가? 바로 대선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대선에서 이명박 장로를 대통령을 만들기 위해선 교회가 힘을 하나로 결집해야 한다는 것이가. 누구나 여기에 동의했다. 문제는 누가 그 주도권을 쥐느냐는 것이다. 주도권을 쥐는 쪽이 막대한 이득을 누리기 때문이다. 권력과의 밀착을 통하여 얻게될 이득은 너무나 달콤한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까지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거치는 동안 기득권을 빼앗겨 본 경험은 이들로 하여금 더 정권에 집착하게 만들었다. 온갖 비리와 범법 행위에 연루된 이명박 대통령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면죄부를 쥐어주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예가 김진홍 목사의 쪼다 발언일 것이다. "한국에서 그 정도 위치에 오르면서 한 두가지 범법 행위하지 않았다면 쪼다야. 일을 안했다는 말이지." 목사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내가 기독교인이라는 것이 창피해지는 발언이다. 이것이 한국 기독교의 현주소이다.

  온갖 특혜를 누리며, 귀족적인 삶을 살아가며 많은 성도들에게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위치는 너무나 달콤하기에 내려놓기 힘든 것이다. 원하지 않았지만 강제로 제한당했기에(내려 놓은 것도 아니고 제한 당한 것이다.) 더 복수의 칼을 갈면서 이명박 대통령을 밀어 붙이고 있는 것이다. 성조기와 태극기가 휘날리는 이상한 집회, 한국 사람 앞에 모아놓고 마치 백악관에 들리라는 듯이 영어로 기도하는 이상한 목사, 자국 대통령을 시종일관 빨갱이로 매도하는 꼴통 보수들 이 모든 사람들이 결집하여 모이는 곳이 교회라는 사실이 마음 아플 따름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실정은 곧 교회의 실정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한단 말인가? 이명박 대통령을 왜 예수님과 같은 위치에 올려놓고 우러러 본단 말인가? 왜 내려가지 못하고 이곳이 좋사오니 하고 주저 앉아 있단 말인가? 한심할 따름이다.

  이곳이 좋사오니 외치는 그 순간에 분명 산 밑에서는 절망의 나락을 끝없이 떨어지고 있는 한 영혼이 있었다. 마귀에게 잡혀서 불위에 쓰러지고, 물 가운데 몸을 던지는 불상한 어린 영혼이 있었다. 그런데도 여기가 좋사오니 눌러앉자 말하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사회적인 약자들, 유의미한 소수들을 무시한채 권력에 빌붙어서 그들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있는 정치 목사들, 무례한 자들과 다른 것이 무엇인가? 양쪽 모두 예수님을 자기들의 이익을 위하여 이용하고 있을뿐아닌가? 반공이 복음으로 변한 이상한 기독교, 유의미한 소수보다는 권력을 차지한 소수를 더 귀하게 평가해주는 특권주의, 도무지 내려올 생각을 안하는 오만함, 하나님을 믿기 대문에 세상의 법은 무시하는 무례한 사람들이 오늘 기독교를 개독교로 만든 원흉들이 아닌가? 목사를 먹사로 만들고, 끊임없이 예수님 얼굴에 먹칠하고 있는 원흉들이 아닌가? 장로 대통령? 이미 두번의 실패를 경험하고도 여전히 그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인가? 국민의 소리에 귀막은 이명박 정부나 예수님의 소리에 귀막은 정치교회나 똑같이 무례한 者들이다.

  한국 기독교회가 다시 살아났으면 좋겠다. 낮아졌으면 좋겠다. 섬기는 모습으로 내려왔으면 좋겠다. 설교하는 대로 살았으면 좋겠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설교하면서 세습하는 교회, 하나님만 의지하라 말하면서 세상 권력에 밀착하는 교회, 정의의 하나님을 부르짖으면서 불의를 행하는 교회, "교회는 국가에 순종하라, 성경에 나와있지 않느냐?"라는 오만한 종필이 아저씨의 말에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는 교회, 유신은 하나님의 역사라 말하는 교회. 모두 사라졌으면 좋겠다. 이렇게 함으로 교회가 유지된다면 그 교회 차라리 없어졌으면 좋겠다. 예수님도 그것을 바라실 것이다. 예수님을 다시 교회의 머리로 삼고 그 말씀만 따라가면서 타협하지 않는 생명력 있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제발 내 딸은 개독교라는 소리를 안듣고 자랐으면 좋겠다. 내가 사랑하는 교회가 다시 존경을 받고 신뢰를 받았으면 좋겠다.

PS. 말이 너무 어렵다. 쓸뎁없이 어렵게 쓰는 부분이 많다. 목회자라면 모르겠지만 평신도가 읽기에는 어려움이 없지 않다. 민중 신학을 하시는 분들의 책이 어느 순간 어려워졌다. 민중 신학이 아니라 민중 신학의 이름을 빌린 엘리트 신학이다 생각이 들게 되었다. 말이 어렵기 때문이다. 결론은 쉬운데 왜 말을 어렵게 썼을까?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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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자독식사회
로버트 프랭크.필립 쿡 지음, 권영경 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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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의 서평을 쓰기 전에 먼저 두 기사를 읽었다. 예전에 읽었던 기사인데 잊혀지지가 않아서 스크랩 해 놓았던 기사들이다.

  전여옥 한나라당 의원이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가장 바람직한 정치인 상은?’이란 글을 통해 대한민국의 부자들의 95%는 젊은 날 검소와 절제와 노력으로 재산을 모은 것”이라고 주장하며 이명박 정부의 ‘강부자 내각’을 옹호하는 듯한 주장을 펼쳐 파문이 일고 있다.
  그는 11일 홈페이지에 올린 이 글에서 “부정부패로 돈을 벌었던 시절이 언제였습니까? 그 시절은 바로 그 옛날 권위주의적 정치시절이었습니다”라며 “부정부패는 우리 사회에서 지금 엄격한 잣대로 응징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전 의원은 “대한민국 부자들의 95%는 젊은 날 검소와 절제와 노력으로 재산을 모은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멸치볶음과 김치만의 도시락을 집에서 싸갖고 다니며 열심히 일하셨던 분들이 더 많다”고 썼다.
  전 의원은 한 네티즌이 쓴 ‘가장 바람직한 정치인상은?’이란 글에 대해 ‘다 부정부패 수단으로 부자가 되었다’는 인식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또 “이것은 공부 잘 하는 사람은 다 고액 과외를 하고 컨닝을 해서 성적을 좋다는 식의 논리와 다르지 않다”며 “고액과외한 학생이라고 다 좋은 대학에 가거나 좋은 성적을 내지는 않는다”고 주장했다.
                                                                                    - 2008년 5월 14일 자 중앙일보

  전여옥 한나라당 의원이 이명박 정부는 ‘우습게 보이는 실용’이 아니라 ‘무서운 실용’의 자세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전 의원은 20일 홈페이지에 올린 ‘위기 때는 낭비할 시간이 없다’라는 제목의 글에서 “자그마한 탈정치적 자세가 실용이 아니다. 철저하게 자유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가치를 바탕으로, 이념을 바탕으로 했을 때 실용노선은 강도 높은 지진에도 끄떡 없이 버틸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중국과 인도가 이제 ‘열정’과 ‘실력’으로 한국이 아니라 ‘미국 따라잡기’를 목적으로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고 있다. 이것은 분명한 위기”라며 “위기를 ‘이명박 정부의 낮은 지지율’이 아니라 ‘국제환경’에서 긴 안목으로 짚어보고 진단해야 한다”고 했다.
  이어 전 의원은 “실용이야말로 철저한 가치, 철학, 이념이란 어머니의 산통으로 이 세상에 나오는 아기와 같은 것”이라며 “즉 실용은 자유주의의 오랜 전통 아래 시장을 보호하고 지키면서 쌓아온 우리 가치가 단단해야만이 우리 사회에서 그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했다.

  존경하는 친구들, 그리고 영등포 구민 여러분안녕하세요? 오늘 점심을 먹고 국회 안을 걸었습니다. 18대를 맞이하기 앞서 17대를 정리하고 싶어섭니다.
  제게 17대는 '정권교체'를 위해 화약을 지고 불 속에 뛰어드는 심정으로 보냈던 시절이었습니다. 정권교체를 했습니다. 그러나 참 유감스럽게도 불과 석 달도 안돼 대통령은 지지율은 떨어지고 국민들은 기대에 못 미치는 '일처리'에 답답해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 어제 늘 좋아하고 아끼는 후배와 점심을 먹으며 고민했습니다. 그 후배 말하기를 - '선배-실용은 무서운 거예요'저는 그 한마디에 정신이 퍼뜩 들었습니다. '그래-실용이라는 것- 간단치 않고 무서운 것이 맞아.' 저는 즉시 맞장구를 쳤습니다. 그러면서 여러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습니다. 즉 '실용이야말로 철저한 가치, 철학. 이념이란 어머니의 산통으로 이 세상에 나오는 아기와 같은 것이다'라는 생각 말입니다. 즉 실용은 자유주의의 오랜 전통 아래 시장을 보호하고 지키면서 쌓아온 우리 가치가 단단해야만이 우리 사회에서 그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시작의 기회는 공평히 갖되 결과의 불공평은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땀과 노력을 바친 결과에 대해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미소 지으며 박수칠 수 있는 사회여야 합니다. 이명박 정부는 실용정부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용'이라는 가치를 인정받고 한국사회에서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자유주의와 시장경제에 대해 신뢰와 인정이 중요합니다. 이명박 정부의 성공을 저는 모든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바랄 것이라고 봅니다. 지금 우리는 토마스 프리드만이 이야기 한 '평평한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중국과 인도가 이제 '열정'과 '실력'으로 한국이 아니라 '미국 따라잡기'를 목적으로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 위기입니다. 위기를 '이명박정부의 낮은 지지율'이 아니라 '국제환경'에서 긴 안목으로 짚어보고 진단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우리 한국인들이 유념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위기 때는 낭비할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그마한 탈 정치적 자세가 실용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자유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가치를 바탕으로 이념을 바탕으로 했을 때실용노선은 강도 높은 지진에도 끄떡없이 버틸 수 있는 것입니다. '우습게 보이는 실용'이 아니라 '무서운 실용'의 자세로 이명박 정부는 나아가야 합니다. 위기 때는 낭비할 시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 2008년 5월 20일 자 중앙일보

  조금 길지만 서평을 쓰면서 이 두 기사를 인용한 것은 일단 서평을 기록함으로 인해서 이 기사를 잊지 않기 위해서이고, 두번째로는 이 기사의 내용이, 즉 젼여옥 의원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 이 책에서 공격하고 있는 이 시대의 잘못된 룰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용은 무서운 것이다, 평평한 세계이다, 부자는 검소함으로 부를 이루었다 등등 전여옥 여사가 던지는 말들은 일반 대중들의 공격을 받기에 충분하다. 그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차치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만 경쟁을 멈추자는 사회적인 합의에 도달해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경쟁을 더 가속화하는 것이 시장의 논리요, 우리가 나아갈 길이요, 행복한 미래를 보장해 주는 유일한 수단이라는 말도안되는 논리를 지껄이고 있기 때문이다. 말이 좀 과격해졌지만 전여옥 의원의 말이 정말로 입에서 나오는대로의 지껄임 그 이상으로도 그 이하로도 들리지 않는 것은 전의원의(아니 전의원만의 문제는 아니다. 우리나라 정치인들 특히 한나라당 정치인들이 대다수 가지고있는 생각일 것이다.) 발언이 우리나라를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무한경쟁의 도박으로 몰아넣는 것을 당연시하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전 기사를 읽다가 중고등학생들의 급훈에 대하여 기록한 기사를 읽었다. "조금 공부 더 하면 남편의 얼굴이 달라진다.", "엄마가 보고 있다.", "지하철 2호선에 미래가 있다." 등등 하나같이 무한경쟁의 논리를 내포하고 있는 것들이다. 특히 지하철 2호선에 미래가 있다는 이야기가 내 가슴을 답답하게 짓누르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중고등학생들의 미래가 고작 2호선에 있다는 이야기는 학력 경쟁이라는 지위군비경재을 가감없이 적나라하게 드러내주기 때문이다. 이것이 과연옳은 일인가? 엄청난 사교육비를 쏟아가면서 일류대를 꿈꾸는 것이 과연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현상인가? 결코 아니다. 엄청난 사교육비를 감당하기 위해서 가족들이 단란히 둘러 앉을 수 있는 시간과 행복을 포기해가는 모습들은 학력경쟁이 이 시대에 선물해준 최악의 수일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일류대를 꿈꾸며 지위군비경쟁을 한다면 평균 성적이 약간 올라간 상태로 지금의 서열이 고착화될 가능성이 다분하다. 그리고 자본의 소유에 따라서 학력의 획득이 달라질 것이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이렇게 소모적인 경쟁을 할 것이라면 차라리 합의를 이끌어 내어 학력이라는 지위군축협정을 맺는 것이 더 좋은 일일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오는 기회비용들을 다른 곳에 사용하는 것이 개인을 위해서도, 사회를 위해서도 최선을 것이리라. 이것이 정부의 역할이요 교육을 담당하는 공무원들의 일이다. 그러나 정치의 논리에 의해서(전의원의 발언을 보면 알 것이다.) 교육이 흔들리고, 비지니스 프렌들리의 자세로 교육을 대하니 일류대를 위한 학력 경쟁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고 점점 더 심화되고 있다. 계속 이런 상태가 유지되고 심화된다면 지하철 2호선에 미래를 건 우리 10대들은 지하철 2호선에서 투신자살을 할지도 모른다. 승자는 2호선을 타고 다니고 패자는 2호선에 뛰어들 것이다. 학생들이 요즘 청계천에, 시청 앞에 촛불들고 나오는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보라. 숨막히다는 것이다. 승자독식의 논리를 그만 멈추어 달라는 요청이다. 그런데 정부는 단순하게 좌빨이라는 이념으로 제단하고 있지 않은가? 참으로 웃긴 일이다.

  부익부 빈익빈이라는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이 이미 우리 사회에도 심화되어 가고 있다. "유전무죄 무전 유죄", "돈이 돈을 번다.", "이대로(IMF시절 부자들이 높은 금리가 유지되기 바라며 외쳤던 건배구호)" 등 승자독식의 논리를 표현하는 이야기들이 너무나 많다. 경쟁을 긍정적인 것으로 바라보고 경쟁해서 무엇인가를 성취하고 싶어하는 소박한 우리들의 꿈은 정말 말 그대로 소박한 것이다. 정당한 경쟁과 정당한 소득이라는 이야기는 이미 유토피아적인 환상이 되어 버린지 오래다. "현실은 달라요." 어느 개그맨이 이야기했던가? 맞다. 현실은 다르다. 적당한 경쟁은 사라져 버린지 모래다. 무한경쟁의 시대, 전부 아니면 전부의 시대가 도래했다. 아주 조금의 차이로 승자와 패자가 갈리고 자본의 획득과 상실이 결정될 것이다. 여기에 패한 사람은 아무리 많은 재능과 지식과 조건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사회에서 도태될 것이다. 그들은 아주 근소한 차이로 패배했기 때문이다. 패자부활은 과거에나 있었던 이야기이다. 놀며 데모하며 낭만을 꿈꾸던 대학생활은 없어졌다. 6년 공부하면 대학생이 되어서 편히 놀수 있다는 선생님들의 사탕발림은 사탕발림으로 끝났다. 우리는 무한 경쟁의 시대에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젠 멈춰야 한다. 적당한 경쟁은 사회를 발전시키는 활력소가 되지만 무한경쟁은 적자생존의 정글을 우리 시대에 도래시킬 뿐이다. 여기에서 오는 엄청난 지위군비증강의 모습들은 엄청난 사회비용을 요구할 것이다. 이 비용들은 발전적인 모습이 아니라 서로를 상쇄하는 소모적인 경쟁에 사용될 것이다. 멈추는 것이 중요하다. 멈춘다면 대안이 생길 것이지만 멈추지 않는다면 파멸이 있을 뿐이다. 간단한 예로 지금 사교육에 쏟아붇는 돈들을 대학기부금으로 돌린다면 저가의 등록금으로 대학을 다닐 수 있을 것이다. 민간 보험에 쏟아붓는 돈을 건보에 돌린다면 우리는 건보하나만으로 거의 모든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시장의 논리를 만능으로 생각하는 정치인들이 국회를 장악했다. 자유 시장을 옹호하는 사람들, 시장경제를 주창했던 사람들조차 인정했던 단점을 바라보지 못하고 시장의 논리에 따르면 모든 것이 잘될 것이다 생각하는 사람들이 국회를, 청와대를 장악했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나를 좌빨이라 부르겠지? 그러나 내가 좌파라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 고등학교를 정상적으로 졸업하고, 정치경제를 배운 사람이라면 누구나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이 상식이 통하지 않고 있다. 그러니 사회는 점점 경쟁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All or Nothing"의 법칙이 절대 법칙이 되어 가고 있다. 도박은 금지하면서 승자독식은 장려하는 모순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니 가슴이 답답할 수밖에.

PS. 이 책이 경제 경영으로 분류되어 있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승자독식의 사회는 경제 경영이 아니라 사회과학으로 분류함이 옳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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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교회 - 권력에 중독된 한국 기독교 내부 탐사
김지방 지음 / 교양인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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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렐루야! 미국이 철수하지 못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금란교회 김홍도 목사)”

  “대한민국이 공산주의 마수에 적화되려는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의 손길은 미국을 통해 나타났습니다. 존경하는 부시 미합중국 대통령 각하께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김한식 목사)

  미국 사람들이 했을 법한 이야기들을 한국 사람들이, 그것도 대형 교회의 명망있는 목사들이 했다고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다. 이들이 한국 사람인지, 미국사람인지 잘 모르겠다. 태극기와 성조기를 나란히 들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미국의 오만함을 정당화 해주는 모습이 미국이 아닌 대한민국에서, 그것도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서글픈 이야기이다. 자국의 대통령은 빨갱이라 몰아 붙이면서 미국의 자선을 구걸하는 말도 안되는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대한민국에 너무나 많이 살고 있다. 참 가슴 아픈 현실이다.

  한기총을 필두로 하여 이름만 댔다하면 알 수 있는 사람들이 시청 앞 광장에 모여서 코메리카를 주장한다.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갚는다는 미명하에 청나라를 대적하였던 조선 말의 그 고루한 사고들이 여전히 우리 가운데 충만하다. 6.25전쟁의 은혜를 갚는다는 미명하에 영원한 미국의 우방, 아니 미국의 한 주이고 싶은 코메리칸들이 이 땅에 넘쳐난다. 성조기를 흔들면서 기도하는 목회자들의 모습은 많은 젊은이들로 하여금 신앙을 버리게 만든다. 소자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느니 차라리 연자 맷돌을 목에 걸고 바다에 빠지라던 예수님의 말씀을 그렇게 잘 알고 있으면서도 많은 젊은이들을 실족시킨다. 신앙을 버리게 만들고, 기독교를 개독교로 만들어 버리는 모습들이 도무지 내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일하기보다 개인들의 정치적인 야망과 권력 획득을 위해 교회가 발벗고 나섰다. 평소 교회가 정치에 뛰어 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나이지만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이다. 정교분리를 외치는 것은 사실 비겁한 타협이라고 주장하는 나이지만 이건 아니다. 교회가 권력 획득을 위해 정치에 뛰어드는 것은 진정 잘못된 모습이다. 교회가 세상을 떠나고, 정치에 무관심하다면 그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다. 아무도 대변해 주지 않는 사회적인 약자들을 돌아보고 그들을 위하여 가진 모든 것들을 투자하는 것이 교회가 가져야 하는 모습이다. 내가 아는 한도내에서 예수님은 그렇게 행하셨다. 사회적인 약자, 전통의 피해자들, 문화와 관습에 매여 신음하는 민초들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까지 버리신 분이 예수님이다. 예수님의 제자를 자처하는 교회라면,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이렇게 살아야 한다. 사회적인 약자들을 위해 가진 것들을 다 쏟아붓고 그것이 해결된다면 모든 것을 버리고 뒤편으로 물러나는 것, 이것이 세상을 향한 교회의 진정한 모습이다.

  그러나 요즘은 그렇지 않다. 영광의 자리에만 자신을 드러낸다. 사회적인 약자가 아니라 극소수의 기득권자들을 위해서 존재한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들을 정당화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이 한다. 이명박 대통령이 대선 후보자였을 때 기존 대형 교회에서 했던 일들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면죄부를 주는 것이 아닌가? 장로 대통령 만들겠다는 일념하에, 거기에서 떨어질 떡고물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이름과 축복을 남발한 것이 기존 교회의 모습이 아니던가? 그리고 이 때문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오기를 거부하였던가?

  더군다나 방향이 잘못되었으면 스킬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나마도 없다. 아마츄어리즘의 극치가 한기총의 정치력이 아니던가? 협상도 모르고 타협도 모르고 무식하게 자신들의 정치적인 견해를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하는 모습이 아마츄어리즘이 아니던가? 기독당은 물론이요, 한기총을 필두로 정치에 뛰어든 많은 기독교인들의 모습이 아마츄어리즘이 아니던가? 그렇기에 정치인들에게 이용당하고 팽당하는 것이 교회의 현실이 아니던가? 그렇게 많은 물적 자원, 인적 자원을 쏟아붓고도 개독교라고, 자신들만 안다고 비난 맏는 것이 아마추어리즘이 만들어낸 현상이 아니던가?

  정치를 외치겠다면, 사회 가운데 교회가 뛰어들겠다면, 겸손한 모습으로 프로 정신을 가지고 뛰어들라. 자세는 한없이 겸손하게, 약자를 살펴보고, 맡겨진 역할이 끝났다면 역사의 뒤편으로 조용히 사라지라. 그리고 시대적인 일이 있을 때, 하나님의 뜻이 있을 때 다시 나오라. 결코 자신의 욕심에 하나님을, 예수님을, 십자가를 소품으로 사용하지 말라. 그리고 실력을 배양하라. 협상의 기술, 전문적인 정치력, 기술을 갖춰라. 이것이 진정한 POLI-CHURCH의 나아갈 길이다. 마지막으로 아모스 선지자의 글을 인용함으로 우리 교회가 사회 가운데에서 제대로된 역할을 감당하길 소망한다.

  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아모스 5:21~24)

PS. 부끄럽다. 평신도인 저자도 이런 글을 쓰는데, 목회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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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라딘 - 십자군에 맞선 이슬람의 위대한 술탄
스탠리 레인 풀 지음, 이순호 옮김, 정규영 감수 / 갈라파고스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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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나는 군대에 있었다. 시간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보러갔던 이유는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십자군 원정에 대해 다룬 영화이기 때문이다. 온갖 문학의 모티브를 제공했던 십자군 전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리만큼 현대에는 영화화되지 않은 소재이다. 기대를 가지고 보았던 영화였지만 화면외에는 볼만한 것이 없었던 영화였다. 발리안이라는 대장장이와 시빌라 공주의 로맨스가 주축이 된 영화로 십자군 전쟁은 그저 빌려온 배경일 뿐이다. 그저 마지막에 살라딘이라는 이슬람 군주가 나와서 이들을 유럽으로 돌아가게 허락하고 예루살렘을 접수한다는 내용으로 끝을 맺는 영화라는 것만 기억할 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킹덤 오브 해븐"이라는 영화가 떠올랐다. 그래서 영화를 검색해 보다가 그 때 그 왕이 누구였구나 하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병에 걸려서 죽은 볼드윈 4세, 살라딘, 이벨린의 발리앙을 그렇게 재해석해서 한편의 소설을 만들 수 있다는 서양 사람들의 재치에 놀랐고, 십자군 전쟁이라는 역사에 대해서 그만큼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이 부럽기도 했다. 우리는 십자군 전쟁에 대하여 피상적으로 알고 있을 뿐이다. 이슬람에게 빼앗긴 성지를 탈환하기 위해 교황이 유럽의 제후들을 충동질했고 종교적인 열심으로 일어났던 많은 제후들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려가면서 성지 탈환을 위해 싸웠다는 것, 그리고 결국 그 노력은 실패로 끝났다는 것이 전부이다. 이 모든 것은 서양의 시각에서 기록된 것들이다. 성지 탈환이라는 말 자체도 서양의 시각이다. 역사를 보고, 배우는 과정에서 제일 조심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인데 이 책은 여기에 대한 반동으로 살라딘이라는 걸출한 이슬람의 술탄을 전면에 내세운 책이다.

  십자군 전쟁이 초기에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고 예루살렘 왕국을 설립할 수 있었던 것들을 이슬람 왕국이 무너져 군웅할거의 시기를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군웅할거의 시기를 마무리짓고 본격적으로 예루살렘 왕국과 십자군과 대적하였던 사람이 바로 살라딘이다. 살라딘이라는 이름은 귀에 참 많이 익은 사람이다. 게임은 물론이고, 영화 문학 작품에도 이슬람을 이야기할 때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사람이다. 이 살라딘에 관해 전기 형식으로 기록한 책인데 보면서 이런저런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된 것이 좋았다. 리처드 왕과 살라딘이 호적수였다는 사실도, 킹덤 오브 해븐에서 처럼 한 컷으로 등장할 정도로 비중이 작은 인물이 아님을 이 책을 통하여 알았다.

  그렇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살라딘 재해석에는 실패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구 역사에 대한 반동으로 이슬람의 입장에서 살라딘을 해석하고자 한 의도는 칭찬받을만 하지만 너무 감정적인 면에 치우친 경향이 있다. 역사를 해석 함에 있어서 한 인물을 너무 깎아 내리는 것도 문제이지만 너무 추켜 올리는 것 또한 문제인데 이 책은 살라딘이라는 역사적인 인물을 영웅 만들기에 급급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현실적인, 인간적인 살라딘의 모습이 느껴지지 않는다.

  살라딘의 군사적인 능력 또한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리처드 왕과 싸우고, 십자군들과 싸우면서, 이슬람의 또 다른 와지르들과 싸우면서 그렇게 많이 퇴각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살라딘의 군사적인 능력이 많이 부족했음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오로지 살라딘이 관대해서, 다툼을 좋아하지 않아서라고 기록하고 있다.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전쟁터에서 목숨걸고, 땅을 걸고 싸우는 사람이 적에게 관대하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자기 군사를 죽이는 리처드가 보병으로 싸우다 죽는 것이 안타까운 나머지 말을 보내주었고 자기 병사들을 무찌르도록 도와주었다는 일화조차도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왜 그렇게 이슬람 군사들이 살라딘의 말을 안들었을까? 이유는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군대는 덕장보다도 지장을 따르기 마련이다. 지장을 따르는 것이 덕장을 따르는 것보다 더 살아날 확률이 크기 때문이다. 둘다 겸비하면 좋다지만 목숨걸고 싸우는 군대라면 둘 중의 어느 한 곳을 선택해야 할 때라면 단연코 지장일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살라딘을 기록하면서 덕장임을 계속 강조하고 있는데 군사적인 재능이 없는 살라딘의 단점을 그렇게 감추어 버리는 얄팍한 속임수이다. 십자군 전쟁을 바라보는 서구의 얄팍한 속임수에 발끈하여 감정적인 대응을 하다보니 똑같은 실수를 저질러 버리는 것이 이 책의 저자가 행하고 있는 실수이다.

  마지막으로 책이 참 안넘어간다. 역사책을 두번 연속 읽으면서 이렇게 안넘어가는 역사책은 오랫만에 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번역이 정말 조잡하게 되어 있다. 여기저기 가지치기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원문에 충실하려한 탓인지 독서를 방해할 정도이다. 학생들에게 숙제 내주고 그것을 그대로 모아 살짝 다듬어 책을 낸 듯한 생각을 잠시 해봤다. 또 이 책의 원저자 또한 그리 대단한 작가는 아닌 것 같다. 책을 읽으면서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거지? 왜 이리 쓸데없이 논점을 빗나가지? 문맥은 왜 이리 꼬아놓은 것이야? 왜 횡설수설해?"라는 생각을 너무 자주 하게 되었다. 심심풀이로 한번쯤은 읽어볼만한 책이지만 몇번을 읽을 책은 아니다. 역사에 감정이 개입하면 안된다는 또 하나의 반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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