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라딘 - 십자군에 맞선 이슬람의 위대한 술탄
스탠리 레인 풀 지음, 이순호 옮김, 정규영 감수 / 갈라파고스 / 2003년 11월
평점 :
품절


 

  2005년 나는 군대에 있었다. 시간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보러갔던 이유는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십자군 원정에 대해 다룬 영화이기 때문이다. 온갖 문학의 모티브를 제공했던 십자군 전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리만큼 현대에는 영화화되지 않은 소재이다. 기대를 가지고 보았던 영화였지만 화면외에는 볼만한 것이 없었던 영화였다. 발리안이라는 대장장이와 시빌라 공주의 로맨스가 주축이 된 영화로 십자군 전쟁은 그저 빌려온 배경일 뿐이다. 그저 마지막에 살라딘이라는 이슬람 군주가 나와서 이들을 유럽으로 돌아가게 허락하고 예루살렘을 접수한다는 내용으로 끝을 맺는 영화라는 것만 기억할 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킹덤 오브 해븐"이라는 영화가 떠올랐다. 그래서 영화를 검색해 보다가 그 때 그 왕이 누구였구나 하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병에 걸려서 죽은 볼드윈 4세, 살라딘, 이벨린의 발리앙을 그렇게 재해석해서 한편의 소설을 만들 수 있다는 서양 사람들의 재치에 놀랐고, 십자군 전쟁이라는 역사에 대해서 그만큼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이 부럽기도 했다. 우리는 십자군 전쟁에 대하여 피상적으로 알고 있을 뿐이다. 이슬람에게 빼앗긴 성지를 탈환하기 위해 교황이 유럽의 제후들을 충동질했고 종교적인 열심으로 일어났던 많은 제후들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려가면서 성지 탈환을 위해 싸웠다는 것, 그리고 결국 그 노력은 실패로 끝났다는 것이 전부이다. 이 모든 것은 서양의 시각에서 기록된 것들이다. 성지 탈환이라는 말 자체도 서양의 시각이다. 역사를 보고, 배우는 과정에서 제일 조심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인데 이 책은 여기에 대한 반동으로 살라딘이라는 걸출한 이슬람의 술탄을 전면에 내세운 책이다.

  십자군 전쟁이 초기에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고 예루살렘 왕국을 설립할 수 있었던 것들을 이슬람 왕국이 무너져 군웅할거의 시기를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군웅할거의 시기를 마무리짓고 본격적으로 예루살렘 왕국과 십자군과 대적하였던 사람이 바로 살라딘이다. 살라딘이라는 이름은 귀에 참 많이 익은 사람이다. 게임은 물론이고, 영화 문학 작품에도 이슬람을 이야기할 때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사람이다. 이 살라딘에 관해 전기 형식으로 기록한 책인데 보면서 이런저런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된 것이 좋았다. 리처드 왕과 살라딘이 호적수였다는 사실도, 킹덤 오브 해븐에서 처럼 한 컷으로 등장할 정도로 비중이 작은 인물이 아님을 이 책을 통하여 알았다.

  그렇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살라딘 재해석에는 실패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구 역사에 대한 반동으로 이슬람의 입장에서 살라딘을 해석하고자 한 의도는 칭찬받을만 하지만 너무 감정적인 면에 치우친 경향이 있다. 역사를 해석 함에 있어서 한 인물을 너무 깎아 내리는 것도 문제이지만 너무 추켜 올리는 것 또한 문제인데 이 책은 살라딘이라는 역사적인 인물을 영웅 만들기에 급급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현실적인, 인간적인 살라딘의 모습이 느껴지지 않는다.

  살라딘의 군사적인 능력 또한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리처드 왕과 싸우고, 십자군들과 싸우면서, 이슬람의 또 다른 와지르들과 싸우면서 그렇게 많이 퇴각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살라딘의 군사적인 능력이 많이 부족했음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오로지 살라딘이 관대해서, 다툼을 좋아하지 않아서라고 기록하고 있다.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전쟁터에서 목숨걸고, 땅을 걸고 싸우는 사람이 적에게 관대하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자기 군사를 죽이는 리처드가 보병으로 싸우다 죽는 것이 안타까운 나머지 말을 보내주었고 자기 병사들을 무찌르도록 도와주었다는 일화조차도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왜 그렇게 이슬람 군사들이 살라딘의 말을 안들었을까? 이유는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군대는 덕장보다도 지장을 따르기 마련이다. 지장을 따르는 것이 덕장을 따르는 것보다 더 살아날 확률이 크기 때문이다. 둘다 겸비하면 좋다지만 목숨걸고 싸우는 군대라면 둘 중의 어느 한 곳을 선택해야 할 때라면 단연코 지장일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살라딘을 기록하면서 덕장임을 계속 강조하고 있는데 군사적인 재능이 없는 살라딘의 단점을 그렇게 감추어 버리는 얄팍한 속임수이다. 십자군 전쟁을 바라보는 서구의 얄팍한 속임수에 발끈하여 감정적인 대응을 하다보니 똑같은 실수를 저질러 버리는 것이 이 책의 저자가 행하고 있는 실수이다.

  마지막으로 책이 참 안넘어간다. 역사책을 두번 연속 읽으면서 이렇게 안넘어가는 역사책은 오랫만에 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번역이 정말 조잡하게 되어 있다. 여기저기 가지치기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원문에 충실하려한 탓인지 독서를 방해할 정도이다. 학생들에게 숙제 내주고 그것을 그대로 모아 살짝 다듬어 책을 낸 듯한 생각을 잠시 해봤다. 또 이 책의 원저자 또한 그리 대단한 작가는 아닌 것 같다. 책을 읽으면서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거지? 왜 이리 쓸데없이 논점을 빗나가지? 문맥은 왜 이리 꼬아놓은 것이야? 왜 횡설수설해?"라는 생각을 너무 자주 하게 되었다. 심심풀이로 한번쯤은 읽어볼만한 책이지만 몇번을 읽을 책은 아니다. 역사에 감정이 개입하면 안된다는 또 하나의 반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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