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
안토니오 알타리바, 킴 지음, 해바라기 프로젝트 옮김 / 길찾기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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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전형적인 문과생이다. 수학과 과학은 젬병이다. 이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확실하게 깨달은 것은 고등학생 시절이다. 10번도 넘게 봤기에 유제풀이집의 풀이방법을 달달 외울 정도였지만 숫자 몇개만 바꾸면 답을 맞출 수가 없었다. 수능시험 당시 3자리 숫자의 주관식 답을 찍어서 맞출 정도였지만(대단한 적중율이 아닌가? 999개의 숫자, 거이에 양과 음을 계산하면 거의 1/2000의 확율인데 그것을 맞추다니 지금생각해도 대단하다.) 그래도 반타작이 어려웠다. 내 내신과 수능성적의 대부분은 언어와 외국어, 그리고 사회탐구 영역이 담당했었다. 대학에 진학한 후 가장 좋았던 것은 더 이상 과학과 수학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정도?

 

  그래서 일까? 고등학생 시절 문학과 시에 탐독했다. 선생님들의 우려와 갈굼을 논술 준비하고, 언어 영역 공부를 한다는 핑계로 무마했다. 재수가 좋아서인지 몰라도 1학년과 3학년 담임은 영어 선생님이었고, 2학년 담임은 국어 선생님이었다. 공부를 썩 잘했던데다가 특히 영어와 국어를 잘했기에 문학과 시에 대한 나의 탐독이 어느 정도 용인이되었으리라. 그렇게 닥치는대로 시를 읽어가다가 김지하의 시를 만났다. 김수영의 시도 좋았고, 유치환의 시도 좋았지만 내게 으뜸은 김지하였다. "타는 목마름으로"라는 시 때문이다.

 

  타는 목마름으로

                          김지하

 

  내 머리는 너를 잊은지 모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오래

  오직 한 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마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모마음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아직 동트지 않은 뒷 골목 어딘가

  발자국 소리 호르락 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소리

  신음소리 통곡소리 탄식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 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는 벗들의 피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 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글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만세!

 

  난 이 시 때문에 사회에 대한 비판 의식을 갖게 되었다. 왠지 이 시를 읽으면서 책상에서 정독하면 안될 것 같아서 누워서 이불을 뒤집어 쓰고 몰래 읽어 보기도 했다. 이 시는 오적으로, 그리고 사회에 대한 저항으로, 운동권으로 나를 이끌었다. 그러는 동안 어느새 김지하는 내 마음으로 표상으로 바뀌었다. 기회만 있으면 저 사람을 만나보고, 그의 생각을 듣고 싶다는 간절한 소원을 품기도 했다. 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초청 강연을 준비하다가 마침 옥에서 풀려난 김지하를 강사로 모시고 싶다는 생각에 무작정 찾아가기도 했다. 물론 바쁜 그를 강사로 초빙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렇지만 그때부터 무엇인가 찜찜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현실에 대한 치열한 고민을 품었던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 이름으로 서투레 백묵으로 쓰던 그는 사라지고 생명 사상을 설파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수감 생활이 그를 더 깊은 차원의 단계로 이끌었고, 그 차원에서 생명을 주창하는 것이라 이해했다. 그렇게 내 머릿속에서 김지하는 희미해져 갔지만 타는 목마음으로라는 노래와 시는 여전히 내 마음 한켠에 김지하를 담아 두게 했다. 그리고 그 시처럼 현실에 대한 고민을 하면서,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다가 어느날 커다란 망치로 머리를 한대 맞은 것 같은 기사를 접하게 되었다. 70년대 박정희의 유신 독재 때문에 옥살이를 했던 그가,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불렀던 그가 박근혜를 지지한 것이다. 난 내눈을 의심했다. 잘못 들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의 글은 선명한 활자로 내 눈에 박혀 들었고, 그만은 변하지 않기를 바랬는데 나의 욕심이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이후 난 한켠에 담아 두었던 김지하라는 존재를 지워 버렸다. 어느 누가 말했던 것처럼 김지하는 사라지고 김광석만 남았다.

 

  리뷰를 작성하면서 김지하에 대한 이야기를 길게 늘어 놓은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난 김지하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아나키스트였던 저자의 아버지가 현실과 타협하면서 변절해가는 역사는 다른 누구의 이야기가 아니며, 외국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김지하의 이야기이고, 나의 이야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아나키스트의 길을 갔고, 함께 걸어갔던 동지 중에 어떤 이들은 신념을 지키다 죽었고, 살아 남은 이들은 현실 속에서 자신의 신념을 죽였다. 물론 주인공도 마찬가지다. 현실에 대한 두려움, 걱정,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은 신념을 희석시켜 공중으로 흩어버리고, 변화를 정당화 했다. 그리고 이런 변화는 곧 변신으로 그리고 변절로 나아간다. 신념과 삶의 간극을 메우지 못한 한 아나키스트는 결국 서글픈 선택을 하게 된다.

 

  그가 공중에 몸을 던지는 그 순간에, 땅에 떨어지는 그 몇 초라는 짧은 순간에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신에 대한 삶을 후회했을까? 아니면 변절한 자신을 혐오했을까? 그것도 아니면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간절한 소원을 품었을까?

 

  김지하는 지금 이 순간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후회? 혐오? 확신? 그것도 아니면 자포자기? 잘 모르겠다. 한 아나키스트가 투신한 그 순간에 무슨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고, 내게 큰 충격을 준 김지하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들이 아니니 어찌 그 속을 알겠는가? 다만 내가 너무 큰 욕심을 부렸구나라는 서글픈 자책과 함께, 더 큰 욕심이지만 품어 본다. 어찌되었던 그가 내게 줬던 도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에! 오적을 말하던 그가 오적이 되었고, 박정희를 반대하던 그가 박근혜를 찬양하게 되었지만 난 그가 다시 한번 그 시절의 모습으로 돌아왔으면 좋겠다. 비록 지금은 추락했지만 그가 다시 한번 날아 올랐으면 좋겠다. 이렇게 변절해 버린 채로 남아 있기에는 그가 느꼈던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이 너무 서글프기 때문이다. 내 욕심이지만 한번만 더 욕심을 부려보고 싶다. 내 욕심을 담아 이상의 날개를 적어 본다.

 

  나는 불현듯 겨드랑이가 가렵다. 아하, 그것은 내 인공의 날개가 돋았던 자국이다. 오늘은 없는 이 날개. 머릿속에서는 희망과 야심이 말소된 페이지가 딕셔너리 넘어가듯 번뜩였다.

  나는 걷던 걸음을 멈추고 그리고 일어나 한 번 이렇게 외쳐 보고 싶었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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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13-11-06 0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사의 가벼움이었을까요? 어쩌면 그리 깊은 생각없이 써내려간 시 한줄에 사람들이 그를 저항의 상징으로 만들었을 뿐, 그의 실체는 그저 그런 한 사람의 글쟁이였을지도 모르겠네요. 황석영씨도 가카와 함께 순방길에 올랐던 것을 보면, 가벼운 문사들에게는 그런 세속을 향한 욕구와 허영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saint236 2013-11-06 10:18   좋아요 0 | URL
그래서 어떤 이는 그를 그저 글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고싶은 욕망 덩어리라고 평하더군요

transient-guest 2013-11-07 02:31   좋아요 0 | URL
'욕망 덩어리' 아니 '덩어리'라는 표현이 지금의 그에겐 딱 맞는 듯 합니다. 거기다가 '증오'나 '술' '밥' '고기' 등등 거의 모든 단어를 붙일 수 있죠.ㅎ

숲노래 2013-11-30 2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지하 님은 책을 너무 많이 읽었어요.
이녁 장모님(박경리)처럼 흙을 만지며 풀을 손수 길러서 먹었다면
글을 쓰더라도
아마 아주 다르면서 아름다운 빛을 우리한테 남길 수 있었으리라 생각해요...

saint236 2013-11-30 20:35   좋아요 0 | URL
위에서 말했듯이 그분의 변절(모르겠습니다. 다른 분들이 뭐라할지 모르겠지만 제겐 변절이지요.)이 정말 안타깝네요. 제목대로 그만은 변하지 않기를 바란 것이 저의 욕심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숲노래 2013-12-01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걱정하거나 안타까워 하지 마셔요.
아직 살아서 글을 쓰고 강연도 하니까요.

장모님처럼 조용한 시골에서 스스로 밥을 짓는 흙삶 일구면
언제가 되든 슬기롭게 깨달을 수도 있지 않겠어요.

기다려야지요...

saint236 2013-12-01 23:29   좋아요 0 | URL
그렇다면 감사한 일이지만 요즘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요원한 일처럼 보입니다.
 
긍정의 배신 - 긍정적 사고는 어떻게 우리의 발등을 찍는가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배신 시리즈
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전미영 옮김 / 부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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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긍정적으로 사세요!

 

  살면서 가장 많이 들어본 말 중에 하나다. "부정적인 것보다는 긍정적인 것이 낫잖아. 시각을 바꾸면 세상이 달라져." 곳곳에서 긍정이 넘쳐난다. 어떻게 하면 긍정적으로 살 것인가, 어떻게 하면 세상을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곳곳에서 이러한 비결을 가르쳐 준다면서 긍정의 심리학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책들이 넘쳐난다. 신문들은 잊을만 하면 긍정적으로 사는 것이 건강하게 사는 비결이다, 병을 이기는 비결이다, 긍정적으로 사는 사람이 부정적으로 사는 사람보다 더 행복하다는 논지의 기사들을 쏟아낸다. 그리고 우리는 이 주장에 세뇌되어 긍정적으로 살기 위해서 노력한다. 긍정만이 살길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렇지만 사실일까? 바버라 에런라이크는 이 절대 진리에 도전한다. 과연 긍정이 그러한 힘을 가지고 있는가? 유방암 판정을 받기 전의 저자도 그렇게 긍정적으로 살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유방암 앞에서 이 절대 진리에 대한 의심을 품기 시작한다. 그리고 긍정의 심리학이 작동하는 원리에 대해서 깊이 파헤치기 시작한다. 정치, 경제, 문화, 심지어는 종교가지 파헤치면서 그녀는 "아니다"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오히려 긍정은 사람들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그들로 하여금 사회를 변혁시킬 의지를 빼앗아 가버린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맑스가 말했다면 저자는 긍정은 인민의 아편이라고 말한다. 박진영의 말 중에 내가 공감하는 한 가지는 희망 고문이라는 말인데 저자는 긍정을 희망 고문이라고 말한다.

 

  긍정의 심리학의 매커니즘은 분명하다. 그가 긍정의 심리학을 말하면서 지적했던 행복 공식을 살펴보면 명확하게 드러난다.

 

  "H=S+C+V"

 

  행복(happiness)은 개인이 타고난 성향(S)과 사회적인 조건(C)과 자의적인 노력(V)의 합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의적인 노력(V)이다. 사람이 타노난 성향은 바꿀 수 없는 유전적인 것이며, 사회적인 조건(C) 또한 자기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들이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의적인 노력(V)이다. 긍정의 심리학자들은 이 자의적인 노력을 통하여 우리가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저자는 왜 사회적인 조건(C)가 불변의 조건이 되는가라면서 의문을 제기한다. 그러면서 이는 긍정의 심리학자들이 민중을 기만하는 행위가 된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보자. 어떤 사람이 구조 조정을 통하여 실직을 했다. 긍정의 심리학자들은 실직자들에게 지금 상황에 분노를 표현하지 말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고 한다. 그리고 칭얼대지 말고 새로운 일자리를 찾기 위해 자신의 생각을 바구라고 조언한다. 언뜻 보면 맞는 것처럼 보인다. 절말 그럴까? 이는 구조조정이 정당하다는 사실을 깔고 들어간다. 경영가들의 비합리적이고, 부도덕한 행태는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다. 그것을 바꾸려는 노력 또한 무의미한 것이라고 말한다. 왜 그런가? 저자는 그들의 중요한 고객들이 구조 조정을 단행한 경영인들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너무 일반적인가? 그렇다면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과거 군대에 있을 때의 일이다. 군에 입대한 이등병들을 모아 놓고 교육을 할 때 "너희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여자 친구 문제로 고민하지만 그것이 너희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가령 100명이 입대했다면 그 중 50명은 이등병이 끝나기 전에 나머지 40명은 상말 병초에 헤어진다. 그러면 10명이 남는데 그 중에 8명 정도가 기다려준 여자친구를 차고 다른 사람을 만난다. 정확한 데이터는 없지만 대체로 지금 여자 친구와 결혼까지 이어질 확율은 100명 중 2명에서 1명이다." 그러면 대부분의 이등병들이 고개를 끄덕거린다. 거의 모두가 이 사실에 동의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거의 대부분의 이등병들이 자기는 98명이 아니라 2명에 들어간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이것을 주제만 일자리로 바꾸어 놓아도 동일한 결론을 얻는다. 사람들은 사회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사실을 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2%에 들어간다고 믿는다. 긍정의 심리학자들은 이러한 경향을 더 부채질하여 확고부동한 것으로 만들 뿐이다. 맑스가 이 시대에 태어났다면 종교대신에 이러한 긍정의 심리학을 민중의 아편이라고 말했을 것이며, 박진영이 사회과학적인 소양을 가지고 있었다면 사랑 대신에 일자리 문제를 가지고 희망 고문이라는 말을 사용했을 것이다.

 

  긍정적으로 사는 것은 좋다. 그렇지만 긍정적으로만 산다면 문제가 된다. 시각은 긍정적으로 가져야 하지만 삶은 합리적으로 의심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만약 이 문제가 해결이 안된다면, 만약 정규직에 취업하지 못한다면, 만약 주택 구입을 위한 대출금을 갚지 못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대응책이 있어야 한다. 만약 이것이 개인의 수준에서 해결될 것이 아니라면 사회 시스템을 어떻게 바꾸어야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이것이 빚내서 집을 사라는 말에 속지 않는 비결이요, 증세 없이 복지를 실현하겠다는 달콤한 사탕 발림에 넘어가지 않는 비결이다. 그러나 현실은 암울하다. 이미 747은 추락했고, 깡통집들이 넘쳐남에도 불구하고, 하우스 푸어가 렌트 푸어로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 사회는 C보다는 V에 집중하고 있다. 그러면서 "괜찮아 잘 될거야"라는 노래를 흥얼거린다. 여러분 부자되세요라는 카피의 허구성을 알면서도 오늘날에도 대박을 꿈꾸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나만 아니면 되지, 난 괜찮아를 외치면서 각개 전투에 열을 올린다. 취업을 위해, 돈을 벌기 위해 인문학 책을 읽고, 스펙을 쌓고, 가난은 나랏님도 구제 못한다는 말만 반복한다.

 

  분명한 것은 우리에게 잘 살게 해주겠다는 그분은, 사람들이 걱정 없이 살게 해주겠다고 외치는 그분은, 4만 불 시대를 열면 모든 사람들이 잘 살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그분은 땅을 밟고 사는 분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전거를 타고, 그네를 타고, 휠체어를 타시는 그분들이 고무신 신고, 삼디다스 신고 발바닥에 땀나도록 자게서를 읽어 제끼는 우리의 심정을 알기나 할 것인가? 이제는 인정하자. 우리는 절대로 그네들이 될 수 없다. 그리고 합리적인 의심과 현실적인 대안을 고민해 보자.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카이사르의 말을 충분히 곱씹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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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13-11-06 0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긍정은 attitude를 그렇게 갖고 행하는 것이 중요한데, 장사꾼들은 여기서 더 나아가서 4차원적인 이론을 만들어 판거죠. 즉 개인적인 마음자세로써의 긍정이지, 방법론이나 해결책으로써의 긍정은 성립하기 어려운데도 말이죠. 특히 사회문제에 대한 '긍정'이론은 '예수'만 부르짖으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던 '주문'이론과도 같은 우민정책으로 나타나게 된 것 같아요.

saint236 2013-11-06 10:20   좋아요 0 | URL
긍정하면 만사 오케이라는 생각들이 한국 사회에서도 횡행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자게서가 곳곳에 넘치거든요.

transient-guest 2013-11-07 02:32   좋아요 0 | URL
'긍정'의 산업화와 상업화죠. 지금 '독서' 자기계발이나 자기경영 '강사'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물론 그들 모두가 '뽕꾸라'는 아니겠지만요.

BRINY 2013-11-06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횡행하는 정도가 아니라, 긍정적 사고를 강요하는 사람들이 많지요. 특히 어르신들!

saint236 2013-11-06 20:45   좋아요 0 | URL
그렇지요. 긍정의 배신이라는 제목 속에는 긍정의 강요라는 말도 들어 있지요.
 
페르시아 원정기 - 아나바시스
크세노폰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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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팟캐스트 그것은 알기 싫다를 듣다가 빵터졌던 적이 있다. 정확하게 몇회인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진행자 이용이 시민에 관해서 말하면서 그리스 중장보병을 일컬어 깨시민이라 표현했었다. 그리스의 주축은 시민으로 구성된 중장보병이었고, 전시가 되면 그들은 국토 방위 혹은 영토 획득을 위한 전쟁에서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 댓가로 그들은 자신의 정치적인 발언권을 획득할 수 있었다. 물론 이 정치적인 발언이라는 것도 페리클레스와 같은 사람들이 등장하면서 교묘하게 이용당하는 것으로 전락해 버렸지만 원칙상 그리스는 시민으로 구성된 민회가 도시의 정치적인 사안들을 결의하게 되었다. 그리스 시민들의 참정권은 피를 흘리는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었다.

 

  물론 위에서 말한 것은 아테네와 같은 민주정체를 선택한 도시들에 해당되는 것이며, 스파르타와 같은 왕정을 체택한 나라들이나, 참주제와 같이 소수에 의해 통치되는 국가들에서는 정치적인 의결이라는 것은 일부 지도층에 의해서 이루어질 뿐, 일반 시민에게까지 주어지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시민들로 구성된 중장보병들이 주축을 이루어 국방의 의무를 진다는 사실은 동일하다. 이 중장보병들은 도시 국가들의 연합으로 이루어진 고대 그리스와 터키에서 인도까지 이르는 대제국 페르시아의 전쟁에서 그리스가 승리하도록 만들었다. 경무장을 한채로 강제로 동원되는 페르시아의 군대와 중무장을 하고 진형을 갖추어서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싸우는 그리스의 중장보병의 대결은 단순히 숫자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페르시아와의 전쟁! 그리고 끊임없이 식민 도시들을 늘려가기 위해, 그리고 그리스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그리스 민족 내부의 전쟁은 그리스 중장보병을 더욱 날카롭게 훈련시키는 장이 되었고, 자연스럽게 그리스 중장보병의 전투력은 지중해 세계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페르시아를 물리친 그리스의 중장보병은 향후 이어지는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전쟁에 휘말려 더 많은 실전 경험을 쌓게 되었고, 반대 급부로 그리스 연합의 힘은 소진되었다. 그 결과 페르시아와 맞장을 뜨던 그리스의 영광은 사라져 버리고 막강한 전투력을 소지하고 있던 그리스의 중장보병은 용병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그것도 적대국 페르시아의 용병으로 말이다.

 

  페르시아 원정기는 이렇게 그리스의 자유를 지키던 자부심으로 충만했던 그리스 중장보병이 페르시아의 반란군 퀴로스의 용병으로 전락하여 고용되었고, 하루 아침에 고용주를 잃어버리고 실업자로 전락한 이들이 생존을 위해 투쟁하면서 고향으로 돌아오는 여정을 기록한 책이다. 아무리 좋게 봐줘야 위험한 전쟁을 벌이면서 이동한 기행문이고, 솔직하게 까놓고 말하면 퇴각기라고 하겠다. 그렇에도 불구하고 페르시아 원정기라는 말로 번역하는 것은 그리스 중장보병들의 입장을 반영하는 제목이라고 하겠다. 원제 아나바시스에도 불구하고 페르시아 원정기, 혹은 소아시아 원정기라고 번역한 것이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리스 중장보병의 입장을 대변하기에 충실한 제목이다.

 

  그리스 연합군의 진군로와 퇴각로를 지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쿠낙사 전투에서 그리스 군의 고용주인 퀴로스가 전사했기 때문에 쿠낙사를 기점으로 진군로와 퇴군로가 나뉘어 진다. 만약 이 책을 페르시아 원정기라고 부르고 싶다면 쿠낙사까지의 여정만을 지칭하면 되겠다.

 

 

  그리스 용병의 숫자가 처음에는 1만명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1만인의 진군이라고 부르는 것이며, 그리스 용병들이 왔던 길을 되돌아가지 않고 멀리 돌아갔던 것은 그들이 왔던 길로 되돌아 갈 경우 본인들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전투를 마치고 돌아갔을 때 병력이 6,000명이라고 하니 크세노폰은 생각보다 장군으로서의 자질이 뛰어난 것으로 보인다.

 

  크세노폰은 이 책을 기록하면서 지도자의 자질에 대해서 평을 한다. 그리스의 장군들, 페르시아의 왕인 아르타 크세르크세스 2세, 그의 동생인 퀴로스를 비교하면서 퀴로스를 가장 이상적인 지도자로 평한다. 크세노폰의 인물평은 그만의 독창적인 것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의 일반적인 생각일 것이기 때문에, 이것이 궁금하면 크세노폰이 퀴로스를 평하는 대목을 살펴보면 알게 될 것이다.

 

  난 이책을 읽으면서 크세노폰의 자기 위안을 발견한다. 과거 대제국과 맞짱을 떴던 영광스러운 모습은 사라져 버리고 한낱 용병으로 전락해 버렸지만, 그는 여전히 과거의 영광을 고이 간직하고 살아가고 있다. 이는 크세노폰 뿐 아니라 당시의 그리스 지도층이 가지고 있던 일반적인 감정이었으리라. 비록 지금은 분열하여 돈을 받고 전쟁을 대신해주는 고용인의 입장으로 전락해 버렸지만, 페르시아의 지도층마저도 자신들의 전투력만은 인정해준다는 식의 서술이 책의 곳곳에 넘쳐난다. 이러한 크세노폰의 마음을 잘 알기 때문인지 번역서들이 하나같이 페르시아 원정기, 혹은 소아시아 원정기라는 제목으로 이 전쟁은 패배하여 퇴각한 것이 아니라 페르시아 원정을 잘 치르고 우여곡절 끝에 집으로 돌아온다는 의미를 부여한다. 그렇지만 냉정하게 따져보면 페르시아 원정기의 전쟁은 영광스럽지도, 주체적이지도 않다. 전쟁의 결정권자는 그들이 아니라 반란을 일으킨 퀴로스에게 있는 것이며, 그 퀴로스가 죽은 시점에서 그들은 한낱 패배한 사람들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들이 적대적인 지역을 뚫고 영광스럽게 귀환했을지라도 말이다. 제갈량이 위를 정벌하러 갔다가 일사분란하게 퇴각하여 병력의 손실을 입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제갈량은 위나라 정벌에서 실패한 것처럼 말이다.

 

  묘하게도 크세노폰의 입장은 소위 말하는 오늘날의 진보 진영과 많이 닮아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깨어 있다고, 시대를 변혁시킬 것이라고 말한다. 보수 진영에 의해 복지 이슈를 빼앗기지만 않았다면 선거에서 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과정이 어떻든 간에 선거에서 패배한 것은 사실이다. 물론 그 선거라는 것이 무리수가 많았고 반칙이 많아서 오늘날 문제가 되긴 하지만 선거에서 패한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진보진영에게 남겨진 숙제는 무엇인가? 선거 패배의 과정과 원인을 곱씹어 보고 다시는 패배하지 않을 장기적인 전략을 수립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저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 부정 선거가 없었더라면, 복지 이슈를 선점 당하지 않았더라면이라는 말로 자기 위안을 삼을 것이 아니다. 우매한 대중들이 자신들을 몰라준다고 국민을 탓할 것이 아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철저한 자기 반성이지 자위가 아니다. 국민들이 진보 진영을 지지 않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그리스 중장 보병이 막강한 전투력을 발휘한 이유는 신뢰와 이를 바탕으로 한 연대에 있다. 그리스 중장 보병도 그렇고 로마의 중장 보병도 그렇고 기본적은 동일하다. 기병의 중요성이라는 중요한 차이는 있지만 내 옆에 있는 이의 방패가 나를 보호해 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자신의 포지션을 지키는 것이 전술의 기본이다. 그리스와 로마의 중장 보병이 승리한 전쟁은 철저하게 자신의 포지션을 지키면서 대형을 흐트리지 않을 때 가능했다. 그리스와 로마의 중장 보병이 패배한 전쟁은 대개 밀집 대형이 흩어진 순간, 즉 자기 편에 대한 신뢰와 연대가 깨진 그 순간이다. 이 사실을 진보 진영에서는 눈여겨 봐야할 것이다. 과연 현재 진보 진영에는 연대가 있는가? 대안이 없지 않느냐는 이유로 고압적인 자세를 유지하는 민주당,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서 독주하는 통진당,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 진보 정의당, 오합지졸로 흩어져서 자기 목소리만 내기에 급급한 여러 진보 정당들! 신뢰와 연대가 필요한 진보진영은 이 부분을 간과하고 있고, 오히려 새누리당이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로 대변되듯이 날로 연대를 강화하고 있다.

 

  정치가 깨시민의 자기 위안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지금 진보 진영에게 필요한 것은 깨시민으로서의 딸딸이(이 말을 쓸까 말까 고민하다가 쓴다.)가 아니라 통렬한 자기 반성과 신뢰와 진정을 바탕으로 한 연대이다. 그들이 크세노폰의 입장에 멈추지 않기를 간절히 소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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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13-11-06 0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가하는데 의의가 있는 것은 초등학교의 운동회 뿐인 듯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딸딸이'는 이제 그만이라고 말하고 싶군요.ㅎㅎ 그나저나 이런 책도 있었군요. 읽어보고 싶네요.

saint236 2013-11-06 10:21   좋아요 0 | URL
그리스 로마 고전을 천병희씨가 꾸준하게 번역하시더라고요. 다른 것은 몰라도 가독율에서만큼은 천병희 역을 추천합니다.

transient-guest 2013-11-07 02:33   좋아요 0 | URL
정확한 번역으로 정평이 나 있는 분인 것 같습니다. 전집을 갖추는게 또 하나의 꿈이죠.

oren 2013-12-10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여러 고전에도 자주 등장하는 유명한 책이라서 저도 언젠가는 한번 읽어봐야겠다고 마음 먹고 있는 책인데, saint님께서 멋진 리뷰를 올려주셨군요. 잘 읽고 갑니다. 이달의 리뷰로 선정되신 것도 축하드리고요.

saint236 2013-12-10 14:3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전 이달의 리뷰라기에 뭔 소리지 하다가 11월 확인해 보고 알았습니다. 요즘은 천병희 님의 또 다른 번역서들에 입맛을 다시고 있습니다. 천병희 님의 번역은 일단 가독성만큼은 좋으니까요

[그장소] 2013-12-30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계속 읽고싶어서 들여다보는데..
노란방"은 어쩐지 눈을 자꾸 고단케합니다.
정독을 하고팠는데..속독해버게 만든달까요..
그것이 조금' 아주조금 아쉬운..^^;-부족한 소견였어요.....

saint236 2013-12-31 16:15   좋아요 0 | URL
ㅎㅎ 알았습니다. 다시 예전으로...^^
 
미생 1~9 완간 박스 세트 - 전9권 - 아직 살아 있지 못한 자 미생
윤태호 글.그림 / 위즈덤하우스 / 2013년 9월
평점 :
품절


  미생이 완결되었다. 처음에는 웹툰인지 모르고 시작했던 만화인데 9권이 완결되었고, 기념으로 끼워주던 책꽂이는 나에게 이 책을 다 소장해야할 그럴듯한 이유를 제공해 주었다. 이제 9권을 다 쳤으니 그동안 미뤄두었던 리뷰도 작성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시작을 했지만 쓰다가 임시로 저장해 놓고 벌써 3주가 넘었다. 바쁜 일도 있었지만 생각이 정리가 되지 않아서였다. 아직 생각이 완전히 정리가 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정리를 되었기에 리뷰 작성에 도전해 본다.

 

  바둑에 대해서 문외한인 나에게 미생은 상당히 낯선 용어이다. 내게 미생이란 선덕여왕에서 정웅인이 연기했던 캐릭터를 먼저 떠올리게 만드는 이름이다. 미생을 마지막까지 다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미생이라는 단어의 정립이 쉽지가 않아서 인터넷을 검색해봤다. 그리고 위키피디아에서 찾아낸 그림과 설명으로 미생이 무엇인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위키피디아의 미생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내 나름대로 해석한 것이 때문에 글씨가 완전히 같지는 않다.)

 

 

  먼저 위의 그림을 보자. 좌측과 우측 모두 흑돌이 백돌에 포위되어 있다. 그렇지만 둘 사이에 결정적인 차이가 있는데 좌측은 백과 흑이 모두 집을 만들어서 흑돌이 더이상 뻗어나갈 방법이 없다. 그렇지만 우측의 형국에서는 아직 나갈 방법이 있다. 다음 그림을 보면 이해가 된다.

 

 

  백돌이 2와 4의 공간에 돌을 채워서 집을 만들려고 하는 사이에 혹은 그곳을 포기하고 좌측에 1,3,5를 두면 백돌 세개를 포위하게 된다. 이것을 완생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완생은 되지 못햇지만 완생이 될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는 수를 미생이라고 한다. 동안에백이 빈 공간을 채우는 사이에 흑이 우측 상단을 포기하고 좌측에 석점을 두어서 백을 포위한다면 흑이 백 석점을 꼼짝 못하게 가두어 완생이 된다. 이렇게 완생은 되지 못했지만 완생이 될 가능성이 있는 수를 미생이라 한다. 첫번째 그림에서 미생이 완생이 되면 두번째 그림처럼 변하게 된다.

 

  완생이 될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지만 아직 완생이 되지 않은 미생!

 

   작가가 이 만화에 붙인 미생이라는 제목은 기가 막히다. 프로 바둑 기사의 길엣 실패하고 비정규직으로 취업한 장그래! 신입사원으로 좌충우돌 샐러리맨의 길을 걸어가는 그의 동료들! 그들은 아직 무엇인가를 이루지 못했지만 앞으로 무엇인가를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미생이다. 그렇지만 그들의 삶이 완생이 될지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 그들의 인생은 혼자서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대로 차곡차곡 진행하는 그러한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국의 흐름이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는 것처럼 인생이란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는 미지의 생물과 같기 때문이다. 미완성, 완성이라는 말 대신 미생, 완생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도 바둑과 인생의 이런 비슷한 점 때문이 아닐까? 게다가 각 에피소드의 제목들이 착수, 요석과 같은 바둑 용어로, 그것도 대국의 흐름에 따라서 사용하고, 그 용어에 어울리게 에피소드가 진행됨을 보면서 작가의 천재성에 감탄한다. 아울러 인생과 바둑의 유의미한 유사점을 보면서 인생을 배우기 위해서 바둑을 배워야한다는 말의 의미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만화를 읽어가면서 결코 행복해지지가 않았다. 만화를 통하여 많은 인생의 지혜를 배우는데, 위안을 얻기도 하고 용기를 얻기도 하는데 만화의 긑이 다가올수록 씁쓸하다. 장그래의 계약 기간이 만료되기 때문이다. 비정규직, 계약직, 시한부 목숨 등등 여러가지 수식어가 붙는 일자리가 장그래의 포지션이다. 그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아무리 대단한 실력과 열정을 가지고있어도 그는 한낱 계약직이다. 그냥 쓰고 버린다. 잠시 빌려 쓰는 존재일 뿐이다. 난 여기에서 상상이 아닌 현실로 돌아온다.

 

  나도 어느 분이 작성한 리뷰의 제목처럼 미생(未生)이 완생(完生)이 되고 미생(美生)되기를 희망하지만 "이렇게만 하면 정규직이 될 수 있는 것일까요?"라는 장그래의 현실로 돌아온다. 그리고 미생이 이 시대의 또 다른 희망 고문임을 발견하게 된다. 잘만 되면, 노력만 하면, 성실히만 일하면 정규직이 될 수 있어, 혹은 비정규직보다 더 많이 벌 수 있어 등등 온갖 희망이 섞인 달콤한 말을 쏟아내면서 열정을 착취하는 구조가 미생이 담고 있는 현실이 아닐까? 미생의 내용 중 가장 현실적인 부분들은 가장 씁쓸하고도 비정한 부분임을 떠올린다면 만화책을 읽어가는 것이 무척이나 괴로운 일이 된다.

 

  우리는 미생과 완생의 사이에 서 있다. 미생에 훨씬 가까운 위치에 서 있다. 모두 완생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지만, 이 시대 우리에겐 완생이 될 가능성의 극히 희박하다.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멈추어야 할 것인가? 완생을 향한 꿈마저도 포기해야 하는 것일까? 완생을 꿈꾸는 것은 희망일까, 고문일까? 너무 사치한 것일까? 이런 저런 고민 끝에 장그래도 사라지고, 오과장도 사라지고, 김대리도 사라지고, 장그래의 쓸쓸한 표정과 말 한마디만 남는다.

 

  "미생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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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13-10-31 0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우 현실적인, 그러니까 우리 사회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완결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긍정의 주문의 외우고 달려들어도 99%의 경우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죠. 더구나 수도권에 모든 것이 집중된 한국의 구조에서는 더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데, 한국의 현실에서 젊은 사람이 수도권을 떠나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겠지요. 이곳에서 보면, 서울이나 부산이나, 전주나 강원도나 다 한국인데 말이죠.

saint236 2013-10-31 11:14   좋아요 0 | URL
요즘 긍정의 배신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해보게 되더군요. 한국에서 서울은 다른 도시와는 다른 위치를 가지고 있죠. 모든 자본과 인력을 빨아들이는 블랙홀과 같은데 서울 시립대의 반값 등록금은 졸업후 서울에서 일할 인력을 키우는 하나의 방법이지요. 그런데도 이 사실을 잊고 서울 시민의 돈으로 지방 학생을 키운다며 반대하시는 분들은 도대체 무슨 심보인지 모르겠습니다.

transient-guest 2013-11-02 01:36   좋아요 0 | URL
솔직한 저의 표현으로는 서울이라는 도시는 한국이라는 국가에 있어 암 덩어리 같습니다. 너무 커져서 절개해도 죽을 수 있고, 절개하지 않으면 이대로 고통을 받으면서 천천히 죽어가는...지방분권시대라고는 하지만, 핵심산업과 기관은 모두 서울에 집중되어 있죠. 지방 거점도시를 바탕으로 발전을 시켜야 하는데, 이게 다 기득권과 관련이 있어서 어렵지요...

saint236 2013-11-02 13:23   좋아요 0 | URL
농담처럼 하는 말이지만 통일이 된 이후에나 가능하지 않을까요?
 
왕이 못 된 세자들 표정있는 역사 9
함규진 지음 / 김영사 / 2009년 3월
평점 :
품절


  난 역사책을 참 좋아한다. 과거를 성찰해 보면서 현재에 대해 예리하고 냉철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은 둘째로 치고, 일단 재미있다. 사람들이 살아온 이야기들, 그 안에 담겨 있는 여러가지 요소들을 살펴보는 것은 꽤나 흥미 진진한 작업이다. 마치 재미있는 추리소설을 읽는 기분이랄까? 이런 점들이 나를 역사덕후로 만들어 가는데 가끔 이런 나의 기대를 배신하는 책들이 있다. 역사적인 사실을 깡그리 무시하는 역사소설이라든지, 역사적인 사실들을 너무 간단하게 처리하고 넘어간 책들이라든지. 이런 책들을 접할 때마다 시간이 많이 아깝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는데 이 책이 꼭 그렇다.

 

  제목이 왕이 못된 세자들이다. 권력은 너무 거대하기 때문에 부자 지간에도 나눌 수 없다는 말이 있다. 또한 너무 거대한 권력을 가졌기 때문에 그 권력의 자리에서 미끄러졌을 때에는 목숨을 부지할 수 없다는 카피는 나의 흥미를 꽤나 자극하기 시작했다.

 

  첫페이지를 열었을 때 왕이 되지 못한 세자들도 공인이기 이전에 개인이기 때문에 개인의 심리적인 부분을 다루는 것이 중요하다는 저자의 말에 꽤나 공감하면서 기대감을 품었다. 게다가 왕이 되지 못한 세자들이 그렇게 많다는 것은 꽤나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기 때문에 이 책이 나에게 줄 감동이 무엇인지 설레는 마음을 품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그렇지만 책을 다 읽고 나 이후의 감상이라는 것은 리뷰의 제목대로이다. 왕이 되지 못한 세자들에 대해서 다룬 이 책이 나에게 전혀 감동이 되지 못했다.

 

  첫번째 이유는 내용의 부실하기 때문이다. 11명의 세자를 다루면서 200페이지가 조금 넘는 부분을 할해한 것은 이정도면 된다는 저자의 자신감인지, 아니면 왕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만큼 사료를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지 모르겠지만 내용이 부실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가장 단적인 예를 들자면 어렸을 때 죽어서 왕이 되지 못한 세자 5명을 다루면서 50페이지가 안되는 분량을 할애한 것은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들기에 충분하다. 역사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면서 입문을 하는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읽기에는 지나치다고 밖에 할 수 없다.

 

  둘째 이유는 내용이 너무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사도세자에 관한 부분을 다루면서 역사학자들의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을 대하는 태도를 지적하였는데, 가장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것이 이덕일씨이다. 이덕일씨는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을 철저하게 정치적인 입장에서 이해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사도 세자가 죽은 그 날을 합리적인 근거를 가지고 재구성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부분에 대해서는 한중록의 내용에 동의하지만 어느 부분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저자는 왜 어느 부분은 동의하면서 어느 부분은 동의하지 않느냐, 그것은 자기의 입맛에 맞는 부분만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겠는가라면서 비판한다. 역사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일면 사료를 대할 때에 충분히 의심하고, 점검해 보는 것이 매우 중요한 과정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러한 기본적인 것마저도 너무 심리적인 측면에 입각해서 부정한다는 것은 역사를 대하는 사람이 가장 조심해야할 태도가 아니겠는가?

 

  저자의 말대로 조선 시대 세자 양육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면 세자 양육 시스템이 어떤 것인지 보다 자세하게 다루고, 이러한 부분들이 과거의 왕조들이 가지고 있는 시스템과 중국이나 일본이 가지고 있는 시스템과 어떻게 다르고 어느 부분에 문제가 있는지 지적하는 것이 훨씬 짜임새 있는 구성이 아니었을까하는 아쉬움을 품어 본다.

 

  이 책에 대한 평가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콘텐츠는 충분히 매력적이나 콘텐츠를 부각시키는 방법이 적절하지 못했다고 하겠다. 만약 저자가 왕이 되지 못한 세자에 대해서 다시 다루고 싶다면 조선 왕조의 세자 양육 시스템에 대해서 보다 자세하게 다루는 것이 좋을 것으로 보인다. 표정이 있는 역사 시리즈 중에 가장 감동이 없는 책인 것 같아서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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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13-10-10 1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다가 보면 아무리 경험이 쌓여도 가끔씩은 제목에 낚이는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위의 정리를 보니 저자는 이덕일씨와 같은 '재야'사학자를 비판하는 입장이거나 학파에 속해 있는 것 같네요. 환빠도 문제지만, 무조건적인 비판은 더 큰 문제입니다. 가뜩이나 역사교육이 위축되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우기. 세인트님께서 총대를 멘 덕분에 저는 제목에 낚여 이 책을 읽지는 않겠군요.

saint236 2013-10-10 13:13   좋아요 0 | URL
역사학 서적을 편찬하기에는 묘한 구석이 있긴 합니다. 꽤 많은 역사 관련 서적을 저술하였지만 서울교대 윤리교육과 교수입니다. 게다가 성대에서 행정학을 전공하고 대학원에서는 정치 외교학 박사를 했네요. 역사학 관련해서는 어느 학파에 소속되었다고 하기가 민망할 정도이네요.

transient-guest 2013-10-11 03:08   좋아요 0 | URL
이덕일씨, 혹은 그 이전의 박은식이나 신채호 선생을 비판하는 글이나 책을 보게되면 저자들이 의외로 역사학과는 관련이 없는 사람들인 것을 봅니다. 이 저자분은 academic survivalist인가요? 학사-박사-현직-저술이 각자 다른 분야네요...

무해한모리군 2013-10-10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흥미로운 주제인데 엉성한가보네요.
저도 역사, 특히 실패한 영웅의 이야기가 늘 관심사예요.

saint236 2013-10-10 23:19   좋아요 0 | URL
주제를 뒷받침하는 설명이 너무 간결하다는 것이 흠이죠.

순오기 2013-10-26 0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관심대상이었는데 많이 엉성한가 봅니다.
역사를 파고드는 학자가 그리운 시절~~~~~~ ㅠ

saint236 2013-10-26 12:03   좋아요 0 | URL
역사를 입문하기 위함이라면 모를까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졌던 사람이라면 많이 허전하지요. 표정이 있는 역사 시리즈 가운데에서는 처지는 족에 속한다고 생각이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