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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못 된 세자들 ㅣ 표정있는 역사 9
함규진 지음 / 김영사 / 2009년 3월
평점 :
품절
난 역사책을 참 좋아한다. 과거를 성찰해 보면서 현재에 대해 예리하고 냉철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은 둘째로 치고, 일단 재미있다. 사람들이 살아온 이야기들, 그 안에 담겨 있는 여러가지 요소들을 살펴보는 것은 꽤나 흥미 진진한 작업이다. 마치 재미있는 추리소설을 읽는 기분이랄까? 이런 점들이 나를 역사덕후로 만들어 가는데 가끔 이런 나의 기대를 배신하는 책들이 있다. 역사적인 사실을 깡그리 무시하는 역사소설이라든지, 역사적인 사실들을 너무 간단하게 처리하고 넘어간 책들이라든지. 이런 책들을 접할 때마다 시간이 많이 아깝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는데 이 책이 꼭 그렇다.
제목이 왕이 못된 세자들이다. 권력은 너무 거대하기 때문에 부자 지간에도 나눌 수 없다는 말이 있다. 또한 너무 거대한 권력을 가졌기 때문에 그 권력의 자리에서 미끄러졌을 때에는 목숨을 부지할 수 없다는 카피는 나의 흥미를 꽤나 자극하기 시작했다.
첫페이지를 열었을 때 왕이 되지 못한 세자들도 공인이기 이전에 개인이기 때문에 개인의 심리적인 부분을 다루는 것이 중요하다는 저자의 말에 꽤나 공감하면서 기대감을 품었다. 게다가 왕이 되지 못한 세자들이 그렇게 많다는 것은 꽤나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기 때문에 이 책이 나에게 줄 감동이 무엇인지 설레는 마음을 품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그렇지만 책을 다 읽고 나 이후의 감상이라는 것은 리뷰의 제목대로이다. 왕이 되지 못한 세자들에 대해서 다룬 이 책이 나에게 전혀 감동이 되지 못했다.
첫번째 이유는 내용의 부실하기 때문이다. 11명의 세자를 다루면서 200페이지가 조금 넘는 부분을 할해한 것은 이정도면 된다는 저자의 자신감인지, 아니면 왕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만큼 사료를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지 모르겠지만 내용이 부실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가장 단적인 예를 들자면 어렸을 때 죽어서 왕이 되지 못한 세자 5명을 다루면서 50페이지가 안되는 분량을 할애한 것은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들기에 충분하다. 역사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면서 입문을 하는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읽기에는 지나치다고 밖에 할 수 없다.
둘째 이유는 내용이 너무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사도세자에 관한 부분을 다루면서 역사학자들의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을 대하는 태도를 지적하였는데, 가장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것이 이덕일씨이다. 이덕일씨는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을 철저하게 정치적인 입장에서 이해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사도 세자가 죽은 그 날을 합리적인 근거를 가지고 재구성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부분에 대해서는 한중록의 내용에 동의하지만 어느 부분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저자는 왜 어느 부분은 동의하면서 어느 부분은 동의하지 않느냐, 그것은 자기의 입맛에 맞는 부분만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겠는가라면서 비판한다. 역사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일면 사료를 대할 때에 충분히 의심하고, 점검해 보는 것이 매우 중요한 과정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러한 기본적인 것마저도 너무 심리적인 측면에 입각해서 부정한다는 것은 역사를 대하는 사람이 가장 조심해야할 태도가 아니겠는가?
저자의 말대로 조선 시대 세자 양육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면 세자 양육 시스템이 어떤 것인지 보다 자세하게 다루고, 이러한 부분들이 과거의 왕조들이 가지고 있는 시스템과 중국이나 일본이 가지고 있는 시스템과 어떻게 다르고 어느 부분에 문제가 있는지 지적하는 것이 훨씬 짜임새 있는 구성이 아니었을까하는 아쉬움을 품어 본다.
이 책에 대한 평가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콘텐츠는 충분히 매력적이나 콘텐츠를 부각시키는 방법이 적절하지 못했다고 하겠다. 만약 저자가 왕이 되지 못한 세자에 대해서 다시 다루고 싶다면 조선 왕조의 세자 양육 시스템에 대해서 보다 자세하게 다루는 것이 좋을 것으로 보인다. 표정이 있는 역사 시리즈 중에 가장 감동이 없는 책인 것 같아서 씁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