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의 배신 - 긍정적 사고는 어떻게 우리의 발등을 찍는가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배신 시리즈
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전미영 옮김 / 부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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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긍정적으로 사세요!

 

  살면서 가장 많이 들어본 말 중에 하나다. "부정적인 것보다는 긍정적인 것이 낫잖아. 시각을 바꾸면 세상이 달라져." 곳곳에서 긍정이 넘쳐난다. 어떻게 하면 긍정적으로 살 것인가, 어떻게 하면 세상을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곳곳에서 이러한 비결을 가르쳐 준다면서 긍정의 심리학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책들이 넘쳐난다. 신문들은 잊을만 하면 긍정적으로 사는 것이 건강하게 사는 비결이다, 병을 이기는 비결이다, 긍정적으로 사는 사람이 부정적으로 사는 사람보다 더 행복하다는 논지의 기사들을 쏟아낸다. 그리고 우리는 이 주장에 세뇌되어 긍정적으로 살기 위해서 노력한다. 긍정만이 살길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렇지만 사실일까? 바버라 에런라이크는 이 절대 진리에 도전한다. 과연 긍정이 그러한 힘을 가지고 있는가? 유방암 판정을 받기 전의 저자도 그렇게 긍정적으로 살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유방암 앞에서 이 절대 진리에 대한 의심을 품기 시작한다. 그리고 긍정의 심리학이 작동하는 원리에 대해서 깊이 파헤치기 시작한다. 정치, 경제, 문화, 심지어는 종교가지 파헤치면서 그녀는 "아니다"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오히려 긍정은 사람들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그들로 하여금 사회를 변혁시킬 의지를 빼앗아 가버린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맑스가 말했다면 저자는 긍정은 인민의 아편이라고 말한다. 박진영의 말 중에 내가 공감하는 한 가지는 희망 고문이라는 말인데 저자는 긍정을 희망 고문이라고 말한다.

 

  긍정의 심리학의 매커니즘은 분명하다. 그가 긍정의 심리학을 말하면서 지적했던 행복 공식을 살펴보면 명확하게 드러난다.

 

  "H=S+C+V"

 

  행복(happiness)은 개인이 타고난 성향(S)과 사회적인 조건(C)과 자의적인 노력(V)의 합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의적인 노력(V)이다. 사람이 타노난 성향은 바꿀 수 없는 유전적인 것이며, 사회적인 조건(C) 또한 자기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들이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의적인 노력(V)이다. 긍정의 심리학자들은 이 자의적인 노력을 통하여 우리가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저자는 왜 사회적인 조건(C)가 불변의 조건이 되는가라면서 의문을 제기한다. 그러면서 이는 긍정의 심리학자들이 민중을 기만하는 행위가 된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보자. 어떤 사람이 구조 조정을 통하여 실직을 했다. 긍정의 심리학자들은 실직자들에게 지금 상황에 분노를 표현하지 말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고 한다. 그리고 칭얼대지 말고 새로운 일자리를 찾기 위해 자신의 생각을 바구라고 조언한다. 언뜻 보면 맞는 것처럼 보인다. 절말 그럴까? 이는 구조조정이 정당하다는 사실을 깔고 들어간다. 경영가들의 비합리적이고, 부도덕한 행태는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다. 그것을 바꾸려는 노력 또한 무의미한 것이라고 말한다. 왜 그런가? 저자는 그들의 중요한 고객들이 구조 조정을 단행한 경영인들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너무 일반적인가? 그렇다면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과거 군대에 있을 때의 일이다. 군에 입대한 이등병들을 모아 놓고 교육을 할 때 "너희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여자 친구 문제로 고민하지만 그것이 너희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가령 100명이 입대했다면 그 중 50명은 이등병이 끝나기 전에 나머지 40명은 상말 병초에 헤어진다. 그러면 10명이 남는데 그 중에 8명 정도가 기다려준 여자친구를 차고 다른 사람을 만난다. 정확한 데이터는 없지만 대체로 지금 여자 친구와 결혼까지 이어질 확율은 100명 중 2명에서 1명이다." 그러면 대부분의 이등병들이 고개를 끄덕거린다. 거의 모두가 이 사실에 동의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거의 대부분의 이등병들이 자기는 98명이 아니라 2명에 들어간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이것을 주제만 일자리로 바꾸어 놓아도 동일한 결론을 얻는다. 사람들은 사회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사실을 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2%에 들어간다고 믿는다. 긍정의 심리학자들은 이러한 경향을 더 부채질하여 확고부동한 것으로 만들 뿐이다. 맑스가 이 시대에 태어났다면 종교대신에 이러한 긍정의 심리학을 민중의 아편이라고 말했을 것이며, 박진영이 사회과학적인 소양을 가지고 있었다면 사랑 대신에 일자리 문제를 가지고 희망 고문이라는 말을 사용했을 것이다.

 

  긍정적으로 사는 것은 좋다. 그렇지만 긍정적으로만 산다면 문제가 된다. 시각은 긍정적으로 가져야 하지만 삶은 합리적으로 의심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만약 이 문제가 해결이 안된다면, 만약 정규직에 취업하지 못한다면, 만약 주택 구입을 위한 대출금을 갚지 못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대응책이 있어야 한다. 만약 이것이 개인의 수준에서 해결될 것이 아니라면 사회 시스템을 어떻게 바꾸어야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이것이 빚내서 집을 사라는 말에 속지 않는 비결이요, 증세 없이 복지를 실현하겠다는 달콤한 사탕 발림에 넘어가지 않는 비결이다. 그러나 현실은 암울하다. 이미 747은 추락했고, 깡통집들이 넘쳐남에도 불구하고, 하우스 푸어가 렌트 푸어로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 사회는 C보다는 V에 집중하고 있다. 그러면서 "괜찮아 잘 될거야"라는 노래를 흥얼거린다. 여러분 부자되세요라는 카피의 허구성을 알면서도 오늘날에도 대박을 꿈꾸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나만 아니면 되지, 난 괜찮아를 외치면서 각개 전투에 열을 올린다. 취업을 위해, 돈을 벌기 위해 인문학 책을 읽고, 스펙을 쌓고, 가난은 나랏님도 구제 못한다는 말만 반복한다.

 

  분명한 것은 우리에게 잘 살게 해주겠다는 그분은, 사람들이 걱정 없이 살게 해주겠다고 외치는 그분은, 4만 불 시대를 열면 모든 사람들이 잘 살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그분은 땅을 밟고 사는 분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전거를 타고, 그네를 타고, 휠체어를 타시는 그분들이 고무신 신고, 삼디다스 신고 발바닥에 땀나도록 자게서를 읽어 제끼는 우리의 심정을 알기나 할 것인가? 이제는 인정하자. 우리는 절대로 그네들이 될 수 없다. 그리고 합리적인 의심과 현실적인 대안을 고민해 보자.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카이사르의 말을 충분히 곱씹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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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13-11-06 0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긍정은 attitude를 그렇게 갖고 행하는 것이 중요한데, 장사꾼들은 여기서 더 나아가서 4차원적인 이론을 만들어 판거죠. 즉 개인적인 마음자세로써의 긍정이지, 방법론이나 해결책으로써의 긍정은 성립하기 어려운데도 말이죠. 특히 사회문제에 대한 '긍정'이론은 '예수'만 부르짖으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던 '주문'이론과도 같은 우민정책으로 나타나게 된 것 같아요.

saint236 2013-11-06 10:20   좋아요 0 | URL
긍정하면 만사 오케이라는 생각들이 한국 사회에서도 횡행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자게서가 곳곳에 넘치거든요.

transient-guest 2013-11-07 02:32   좋아요 0 | URL
'긍정'의 산업화와 상업화죠. 지금 '독서' 자기계발이나 자기경영 '강사'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물론 그들 모두가 '뽕꾸라'는 아니겠지만요.

BRINY 2013-11-06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횡행하는 정도가 아니라, 긍정적 사고를 강요하는 사람들이 많지요. 특히 어르신들!

saint236 2013-11-06 20:45   좋아요 0 | URL
그렇지요. 긍정의 배신이라는 제목 속에는 긍정의 강요라는 말도 들어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