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시인의 사회 - [할인행사]
피터 위어 감독, 에단 호크 외 출연 / 브에나비스타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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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작이니 벌써 25년이 훌쩍 넘었다. 그동안 영화에 나왔던 소년 티 팍팍 나던 아이들은 어느새 나이들어 중년의 아저씨들이 되었고, 키팅 선생 역을 맡은 로빈 윌리엄스는 세상을 등졌다. 슬픈 일이다. 나는 로빈 윌리엄스라면 이 영화와 <쥬만지>가 떠오르던데. 그만큼 그는 소년들의 아버지였다. 그는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소년의 영혼을 지녔다.

 

                                       

이 영화를 다시 보니 배경이 늦은 가을에서 눈 오는 겨울 사이에 찍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왜 그게 처음 봤을 땐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걸까? 포스터의 배경은 키팅 선생이 아이들에게 럭비공을 차면서 뭔가의 구절을 힘껏 외치게 하는 장면이다. 그것이 또 나름 신이 났던지 키팅 선생을 번쩍 들어 헹가레를 친다. 그리고 그 사이를 흐르던 음악은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다. 문득 문학수 기자가 말했던 소설과 영화에서의 음악의 용도(?)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그는 문학에서 음악을 얘기하려면 될 수 있으면 대중이 잘 모르는 음악으로 하라고 했다. 이를테면 하루키는 <1Q84>에서 야나체크의 심포니에타를 썼던 것처럼 말이다. 너무 잘 아는 곡을 쓰면 흥미가 떨어진다고 했다. 그런데 비해 영화는 흔히 잘 아는 곡을 써도 상관이 없고. 글쎄, 이 장면에서 베토벤의 곡이 아닌 다른 듣보잡의 음악을 썼더라면 어땠을까? 감이 잘 오지 않는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할 뿐.

 

아무튼, 그때 아이들은 얼마나 좋았을까? 평생 한 번 만날까 말까 한 선생이 아닌 그야말로 존경해마지 않는 스승을 만나 전혀 새로운 공부를 하고 있으니. 교과서에 밖힌 죽은 지식이 아니라 산 지식을 배우고, 뭔가 자아의 일깨움을 받았으니 기뻤을 것이다. 그러나 학교는 그것을 고운 눈으로 바라 봐 줄 리가 없다. 학교는 규율이라는 것이 있어 그 규율에 위배되는 걸 원치 않는다. 많은 학생들을 통솔해야 했으니 그랬을 때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을 감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교는 똑똑한 바보를 양산할 뿐이다.

 

키팅 선생의 교수법은 확실히 다른 것이었다. 하지만 산지식을 가르친다고 해서 아이들이 다 지혜로워지고 똑똑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잠자던 욕망을 깨우는 일이며, 더 많은 부조리에 휘말리도록 만드는 것이 되기도 한다.    

 

실제로 저 럭비공을 차는 장면 뒤에 닐 페리가 죽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키팅 선생님의 가르침 덕분으로 자신이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이 뭔지를 처음으로 찾은 닐 페리. 그것은 연극이었다. 하지만 그의 부모는 그가 의대에 진학해 주길 바라고 있다. 하고 싶은 공부에 대한 욕망이 강하게 분출되자 그만큼 반대 급부로 의대는 죽어도 하고 싶지 않은 일이 되어버렸다. 그가 연극 무대에 섰다는 건 생의 환희를 맛 보았다는 것이고, 그 이후의 현실은 그와는 정반대였던 것이다. 나는 처음에 이 설정이 너무 뜬금없는 건 아닐까 했다. 하지만 전혀 불가능한 설정도 아닌 것도 사실이다. 입시 전후로 해서 자살하는 수험생이 그렇게도 많은 것이 현실이고 보면.

 

아무튼 그랬을 때 사태의 책임을 져야 하는 건 자식을 강압적으로 자신의 뜻에 맞추려고 하는 그의 부모가 아니라, 아이들에게 가르치라는 교과를 가르치지 않고 엉뚱한 것을 가르친 킹팅 선생이다. 모르긴 해도 이 영화가 처음 개봉됐을 당시는 민주화의 열망이 아직 가시지 않은 그 끝자락이고 보면 영화가 갖는 울림이 더 하지 않았을까? 

 

키팅 선생의 교수법은 겉으로 봤을 땐 실패했다. 하지만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닌 것처럼, 실패할 때까지 실패는 아니다. 지금도 어디에서 어느 선생님은 키팅 선생님 같이 가르치는 선생님이 있는 것이다.    

 

나의 경험을 봐도 학교 때 기억 나는 교수님은 교과서 대로 가르치는 교수님이 아니었다. 시작만 교과서 대로 가르치고 그 나머지를 현실 비판으로 꽉꽉 채웠던 교수님이셨다. 내가 볼 때 그 교수님의 학식이란 가히 석학이라 불리워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지성을 갖추고 계셨다. 하지만 듣기론 교수님은 내가 학교를 졸업하던 핸가, 그 다음 해에 학교 도서관 관장으로 좌천됐던가 그랬던 것 같다. 안타까운 건 그 분이 조금만 젊으셨더라면 교수법을 달리해서 현직을 유지하셨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러기엔 그때 교수님은 이미 초로의 나이였고, 융통성이 좀 없으셨다. 현실이란 그런 것이다.  

 

다시 한 번 닐 페리를 생각해 본다. 인생의 환희를 맛 보았을 때 돌연 죽음을 택한 소년. 거기에 생의 모순이 있고, 부조리가 있다.  

 

영화의 엔딩 장면은 다시 봐도 좋다. 영화사에 남을만한 명장면은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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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10-20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명작 영화였죠..
로빈윌리엄스의 자살소식은 좀 충격이었어요..아고야...

stella.K 2016-10-20 18:00   좋아요 1 | URL
글쎄 말입니다.
최근 고 하일성 씨도 그렇고...

근데 그 자살이라는 것도 뇌의 오류로 보는 시각이 있더군요.
이 괴로운 상태가 언제까지 계속될 거라는 착각.
그래서 그만 쉬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영원히 쉬는 쪽을 선택한다는군요.
그것도 못 되거나 자기 할 말 가슴에 담아 놓지 않는 사람 중엔 거의
없는데 적당히 착한 사람이 그런다더군요.
참, 건강하게 산다는 게 쉽지 않아요.ㅠ

hnine 2016-10-20 1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가 나름 제 인생의 영화 리스트 두번째 순위랍니다 ^^
부모는 왜 자식 인생을 부모가 재단해서 부모가 원하는 모양으로 만들어가려고 할까요.
영어 선생님께서 우리말 번역이 잘못된 예로 이 영화 제목도 예로 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
저도 stella님처럼 지금 다시 보면 또 어떤 느낌일까 궁금합니다.

stella.K 2016-10-21 07:51   좋아요 0 | URL
헙, 그럼 h님의 일순위 영화는 어떤 건지 궁금합니다.
저는 이 영화를 그냥 제 인생의 영화 톱10쯤으로 놓으렵니다.

그런데 어떤 선생님인지 그 시간 재밌었을 것 같아요.
지금도 많이 기억나시고...^^

cyrus 2016-10-20 19: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쥬만지, 후크, 죽은 시인의 사회, 굿 윌 헌팅. 어렸을 때부터 어른이 되기까지 한 번씩 본 영화들인데 로빈 윌리엄스의 존재감이 어느 정도인지 다시 한 번 느껴봅니다.

stella.K 2016-10-21 07:54   좋아요 0 | URL
맞아. 굿 윌 헌팅!
근데 내가 이 영화를 끝까지 봤는지
부분 부분 봤는지 기억이 안 나네.
그러고 보면 로빈은 소년의 아버지가 아니라 교사였네.^^

북프리쿠키 2016-10-20 1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죽은 시인의 사회를 정주행해서 본적이 없고.
찔끔찔끔 봐 왔네요~
스텔라님 리뷰를 계기로
조용할때 차분히 보고 싶네요~

stella.K 2016-10-21 07:56   좋아요 0 | URL
저도 당분간 영화 보기를 자제하려고 했는데
케이블에서 해 주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ㅎㅎ

책읽는나무 2016-10-20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등학교때 영화를 봤었는지?중학교때 봤었는지?
기억은 가물하지만 그 감동은 정말이지 짜릿하게 남아 있네요^^
저는 각자 학생들이 자신의 책상위로 올라가서 선생님을 따르는 장면이 가장 인상에 남았는데 자살 소식은 참~~~~ㅜㅜ
헌데 세월따라 다른 일부 내용들이 가물가물 하네요
요즘 옛날 영화들 다시보기 해야될 정도로 새롭게 알게 되는 장면들이 많네요^^

stella.K 2016-10-21 07:59   좋아요 0 | URL
뭐슨 영화든 처음 볼 땐 그냥 보게되는 것 같습니다.
두번째쯤 봐야 뜯어 보기가 가능하고.
대신 감동은 첫번에 보는 것 보단 덜 한 것 같고.
하지만 추억은 더 한 것 같고.
영화는 그런 것 같습니다.^^
 
나를 찾아줘 : 일반판
데이빗 핀처 감독, 벤 애플렉 외 출연 / 20세기폭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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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빗 핀처 감독은 일단 기본은 하는 감독이라 그의 어떤 작품을 선택해도 후회하는 일은 거의 없다. 이 작품도 그랬다. 단지 인간의 이상 심리를 그로테스크하게 표현한다는 점에서 약간의 호불호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작품이 겉으로 던지는 메시지는, 남자들이여, 결혼해서 바람 피우는 걸 대수롭게 여기지 말아라. 나중에 큰코 닥칠 날 있다. 뭐 대충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지능적이기는 남자 보다 여자가 한 수 위 아닌가? 오죽했으면 여자가 한을 품으면 여름에도 서리리 내린다고 했을까. 진짜 여자 주인공 으시시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여자들이 이러지는 않을 것이다. 대부분의 부부들이 사랑이 식어지면 이혼해버리고 말지. 그래서 결혼은 이 시대에 낡고, 거추장스러우며, 비인기 종목의 장사인지도 모르겠다.  

 

대다수가 이런 생각을 하지만 또 이런 옳은 생각은 아니라는 것에 동의할 것이다. 왜 결혼은 푸대접을 받아야 하는 것일까? 하나님은 인간의 결혼을 신성한 것으로 규정하셨다. 얼마 전, 누가 그런 말을 했다. 결혼은 행복하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고. 행복하기 위해 하는 거라면 십중팔구는 행복하지 않을 것이고, 결혼은 둘의 온전한 연합이라고. 그것을 알아야 행복해진다고. 과연 그렇겠다 싶다. 결혼은 이미지가 아닌데 사람들은 자꾸 영화 같을 거란 환상을 갖는 것 같다. 환상이 크면 클수록 실망도 크다. 

 

이미지란 말이 나와서 말인데, 이 영화는 그렇게 단순하게 앞서 말한 교훈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이 영화에서 더 주목해서 봐야하는 건, 우리가 이미지 또는 조작된 언론에 얼마나 속고 있는가를 여지없이 보여 주기도 한다. 그것을 적극적으로 또 대범하게 이용했던 게 주인공 에이미이기도 하다. 또 오늘 날 어떤 식의 싸움도 이미지를 적극 활용하지 않는싸움은 없다. 그러니 누가 진실을 얘기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미국은 누가 실종되면 그렇게 영화에서와 같이 방송에도 나가고, 실시간 상황들을 보도하며, 여론을 형성하고 그러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대통령 선거 모습과 크게 다를바가 없어 보인다. 그 나라의 낙천성을 반영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영화는 그다지 우리 실정엔 맞아 보이지 않는다. 하긴 미국은 부부 중심이겠지만 우리나라는 그렇지가 못하다. 우리나라는 둘은 그럭저럭 살만한데 늘 그 주변사람이 문제다.

 

이를테면 시랜드나 처랜드 사람들 말이다. 며칠 전, 알고 지내는 지인 한 분이 평소 수수하고 고상해서 결혼생활을 잘 하고 계신 분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무슨 말 끝에 시댁 얘기를 하는데, 나는 그분이 그렇게까지 시댁으로부터 고통을 받고 사는 줄은 몰랐다. 그 고상한 입에서 욕이 떠나지 않으며 누가 자신의 시어머니를 경찰에 신고 해 주던가, 손에 칼이라도 쥐어 있다면 찌를 것만 같다고 하는 것이다. 그때 난 엄마의 지난했던 과거의 시집살이가 생각났고, 이건 그 보다 더한 리얼 드라마란 생각이 들었다. 잠재적 가해자란 말이 있는데 이건 꼭 남성에게만 해당되는 건 아닌 것 같다. 이럴 경우는 피동형 잠재적 가해자라고 해야하는 걸까?

 

물론 그렇다고 그 상황을 너무 심각하게 볼 건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얘기할 정도라면 그건 수다로 푸는 것일 게다. 우리네 아낙들이 할 수 있는 건 고작 그것 아니겠는가.

 

이럴 때 가장 이상적인 건 부부가 이민을 가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막내 작은 아버지는 결혼한지 10년이 채 되기도 전에 미국으로 일찌감치 이민을 가 부인을 시댁의 고통으로부터 지켜 주었다(이런 남자는 평생 업어주고 살 것 같다). 하긴 나의 막내 작은 엄마는 한국에 있을 때도 그다지 어려움이 없었다. 고통은 맏며느리였던 울엄마가 거의 다 받았지. 동서들이야 엄마의 고통을 들어주고, 공감해 주는 정도였지 크게 어려운 건 없었다. 그분도 그랬다. 하필 맏며느리로 들어가 그런 고통을 당하고 사는 건지. 이런 것들을 오버랩 하면서 감독이 언젠가 우리나라 결혼 실태를 좀 알고 이런 영화를 만들어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했다. 

 

그런데 감독이 여성 관객을 의식했을까?  남편 역시 여론을 이용해 반전을 꽤 하지만 실패한다. 그건 어찌보면 당연하다. 바람 핀 주제에 반전에 성공하면 진상으로 찍힐 것이 아닌가. 앞서도 말하지 않았는가? 바람 피면 큰코 다치는 영화라고. 그런데 여자도 참 그렇긴 하다. 승률을 잡기위해 결혼하는 거 맞는 건가? 난 이 영화가 역으로 결혼은 멍청한 사람과 하는 것이 좋다고 보여질까 봐 그것도 좀 껄끄럽다. 누구도 결혼을 좋은 사람과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전에 내가 먼저 좋은 사람이 되야 한다는 전제가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모르긴 해도 영화속 부부 특히 멍청한 남편 이것을 깨닫지 않으면 평화는 없을 것이며 평생 이 무서운 여자의 노예가 되어 살 것이다. 뭐든 무임승차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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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10-12 1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영화를 즐겨 보시는군요..

stella.K 2016-10-12 19:18   좋아요 0 | URL
네. 혼자라도 열심히 봐야죠.ㅠㅠㅠㅠㅋㅋ

사실 좀 쉬었다 보려고 했는데 CGV에서 마침 하더라구요.
찜한 영화였거든요. 도대체 어떤 영환가 궁금했어요.
제 취향은 아니지만 나름 잘 만들었더군요^^.

곰곰생각하는발 2016-10-12 1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이 영화 개봉한 지가 언제인데.. 개봉을 하나요 ?

stella.K 2016-10-12 19:21   좋아요 0 | URL
ㅎㅎ 아뇨. 케이블 채널요!
요즘 하더라구요. 한동안 틀어 줄 걸요?
안 보셨으면 보세요.

곰곰생각하는발 2016-10-12 1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ㅋㅋ

2016-10-12 19: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0-12 20: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yureka01 2016-10-12 19: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젊은 시절 조강지처 버리고 첩실하고 살다가 늙어 힘빠지고 돈떨어지면 다시 조강치처 찾아오는 남자...제일 찌질한 세끼라고 명명합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6-10-12 20:18   좋아요 1 | URL
시발놈이죠, 이걸 받아주는 조강지처도 시발놈이란 생각이 드2니다..

stella.K 2016-10-13 13:31   좋아요 0 | URL
그니까요. 남자들 조강지처 컴플렉스 있다니깐요.
물론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여자에겐 기본적으로 모성애가 다 있다고 믿는 것 같아요.
엄마는 자식이 무슨 짓을 해도 다 받아 줄거라고 생각하잖아요.
이를테면 자기 와이프도 그럴 거라고 믿고 싶은 거겠죠.
아니면 엄마에게 돌아갈 텐데 그때가 되면 엄마는 없거나
힘없는 노인이 되어 있으니까...
그런 남자들 대책없죠.

기억의집 2016-10-13 09: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차라리 이혼을 하지. 참 아이러니한게 미국이나 유럽같은 서구나라는 가정이 안정되어야한다며 퇴근도 이르고 가정적이니 뭐니 떠들어되면서 이혼도 아주 일상적이더라구요. 요즘 우연히 베른트 하인리히나 여러 학자들 책 읽는데... 전처가 어쩌니 저쩌니.. 하아~ 우린 너무 지지고 볶고 사나보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얘넨 이혼하고 재혼하고 삼혼하고 아주 아무렇지도 않게 글에 쓰더라구요. 우리만 조강지처에 목 메는거 같아요~ 울 아들이 이 책 사 달라하는데 구매할까 고민중이에요. 영화는 재밌다고 책 읽고 싶어 하네요~

stella.K 2016-10-13 13:37   좋아요 0 | URL
걔네들은 개인주의고 실존적이라 그런가 봐요.
제목도 그렇잖아요.
나를 찾아 달라고. 더 이상 이 결혼에서 자신을 찾을 수 없으면
이 사람, 저 사람 자기 좋은대로 옮겨다니나 보죠.
나를 내가 찾지 않으면 누구에게서 찾겠어요?

스릴러물 좋아하면 책도 관심있을 것 같긴해요..
저도 책으로는 어떨까 궁금하긴 한데
미국 상황이고, 스릴러물을 저는 읽어왔던 게 아니라 생각만...
 
[블루레이] 캐롤
토드 헤인즈 감독, 케이트 블란쳇 외 출연 / 기타 제작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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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이 영화의 미덕은 카메라의 움직임과 음악에 있지 않나 싶다.

두 여자의 심리를 포착하듯 카메라는 그리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없고 내내 불안하고 우울하다. 그것을 받혀주기라도 하듯 음악 역시 그것을 동시에 표현해 주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영화는 1950년대 보수주의가 득세하던 시절이다. 그런 시대에 자유로운 동성애가 가당키나 했겠는가? 그러니 이 두 레즈비언의 불안하고 우울할 수밖에 없다. 또한 그것이 언젠가 터져 나올 욕망을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틸다 스윈튼과 헷갈리고, ‘벤자민 버튼의 시계는 거꾸로 간다에 나왔던) 캐롤 역의 케이트 블란쳇의 연기는 가히 우아하며, 압도적이다. 비록 사회에선 인정받지 못하는 사랑을 하지만 그것마저도 당당하다. 물론 나중에 이것이 그녀의 발목을 잡혀 사랑하는 딸을 이혼한 남편에게 빼앗기는 불운을 겪기도 하지만 사랑하는데 거침이 없다.

 

그런데 영화 진행이 노련하긴 한데 마지막 엔딩이 왠지 석연치가 않다. 그렇게 끝나는 건 도대체 뭐란 말인가? 자기 집에 파티가 있으니 오라고 해 놓고 정작 레스토랑에서 남자들 속에 고고한 한 마리 학처럼 앉아 있으니 말이다. 마치 자신의 애인인 테레즈가 와서 볼 거란 걸 계산에 넣은 듯한 그 표정. 그랬을 때 테레즈가 무엇인가를 느끼고 생각해 주길 바랐던 걸까?

 

이 영화 미덕이 하나가 더 있다. 전자의 미덕은 영화 기술에 관한 거라면 이번엔 인물에 관한 미덕이다. 바로 캐롤!

 

캐롤의 테레즈와의 부적절한 관계가 들통 나 아이를 빼앗기게 될 처지에 놓여는데 법정에서도 당당했다. 남편과 이런 진흙탕 싸움에서 딸에게 상처를 주지 말아야 할 것과 이 때문에 아이를 만날 권한이 박탈이 되어도 자신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이와 만날 거라며, 자신의 동성애와 어머니로서의 권한은 별개임을 선포한다. 당당함으로 똘똘뭉쳤다. 선택은 어떤 비난을 무릎쓰고라도 당당함에서 나오는 것이며, 자기 선언 역시 여기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해지면 우선순위가 결정되고 그것에 따라 운명은 헤쳐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사실 보수적인 사회에서 보잘 것 없는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다. 물론 캐롤이 여느 여성에 비해 조금 더 많은 것을 누리고, 소위 있는 집 귀부인이라는 정도지 사회나 법을 좌지우지 할 정도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선택했다. 자신의 아이를. 그것은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버리는 취사선택이 아니다. 무엇을 최선으로 하고 그 다음 무엇을 차선으로 할 것이냐의 문제다. 엄마가 된 이상 자신의 불행과 부조리함을 딸에게 짐 지우지 않겠다는 그 선택. 그러므로 그녀가 테레즈를 사랑한 것은 자신이 한 아이의 엄마인 것 보다 앞서지 않는다. 물론 테레즈의 입장에선 아쉬울 수도 있을 것 같다. (비록 부적절할지라도)사랑이 전부일 것 같고 그래서 용기를 낼 것 같은데 알고 봤더니 자신은 사랑하는 사람의 전부가 아니었다.

 

여기서 생각해 봐야할 것은 사랑을 운명이나 전부로 보지 말고, 우선으로 놓고 보라는 것이다. 내가 여자에 대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 중 하나는, 여자는 사랑에 빠지면 모든 것을 버린다는 말이다. 자식도 가정도 다 버리고 사랑을 쫓아간 단다. 멋있는얼핏 들으면 멋있는  같기도 하다. 그리고 인생 어느 한 때 있을 수 있는 모험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건 철없을 때나 여자가 힘을 갖지 못했을 때 도피 행각으로 있을 수 있는 행동일 뿐이다. 또한 그것은 여자는 생각할 줄 모른다는 것을 반증하려고 누군가 꾸며낸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사회가 보수적이라는 것은 여성으로 하여금 생각이나 선택을 못하도록 차단한다는 말도 될 것이다. 그러므로 여자를 더 옭아매는 것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폭력에 노출된 여자가 계속 그렇게 당하기만 하면 내가 맞을만한 일을 했기 때문에 맞는다고 하지 않는가. 빠져나올 생각을 못하는 것이다. 여자는 어떤 시대 어떤 불행과 위기에 처하더라도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테레즈는 나이도 어리고 아직 사회경험이 많지 않다. 그런데 비해 캐롤은 나이도 많고, 결혼과 이혼을 통해 좀 더 현실적이 됐다. 캐롤도 한때는 사랑이 전부일 거라고 생각해서 결혼을 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 반대로 정략에 의한 결혼일지도 모르고. 그래서 테레즈와 사랑의 도피 행각을 벌이는 영화라면  말 그대로 진부한 동성애 영화가 되는지도 모르겠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고 하지 않던가? 이혼은 정상적으로 이루어졌고, 딸과의 면접교섭권도 확보 됐으며, 그 아이는 또 자라 엄마를 이해해 줄 날이 있을 것이다. 캐롤은 당시엔 딸 때문에 테레즈를 버린 것 같았으나, 이혼하고 넓은 집이 생겼는데 같이 들어와 살지 않겠냐고 권함으로 그녀에 대한 의리를 저버리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앞서 얘기했던 마지막 엔딩 장면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레스토랑에서 고고하게 테레즈를 기다렸던 건 캐롤의 오만함을 드러낸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보다는 그 레스토랑 문을 함께 나서기 위한 수순 아니었을까? (열린 결말은 뭔가를 유추해야 해서 피곤하긴 하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우선 순위를 정할 줄 아는 여자쯤으로 해 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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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6-10-17 14: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당당함. 제가 갖고 싶은 것 중 하나입니다. 이것 하나 갖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닐 때가 있어요.
왠지 위축될 때가 있거든요.
어쩌면 주부들이 불륜을 저지르지 않고 살려는 게 그 당당함 때문인지 몰라요.
불륜을 저지르며 살면 당당함을 잃고 죄의식을 느끼며 살아야 하거든요.
그런 걸 치르기 싫은 거죠. 도덕적인 이유 때문 다음으로 당당하게 살고 싶은 이유도 바르게 사는 데 한몫을 할 거라고 봅니다.

stella.K 2016-10-17 14:38   좋아요 0 | URL
맞아요. 이 영화 동성애란 편견만 빼면 꽤 괜찮게 잘 만든 영화예요.
솔직히 그 상황이면 자신이 약점 잡혀서 설설기고
어떻게 할지 몰라했을 텐데 주인공이 아주 대차서 마음에 들더군요.
도덕의 정의 보다 사랑의 정의가 더 앞서고 있구나 싶구요.

근데 이 페이퍼가 무플인 걸 아시고...
고맙슴다.^^
 
더 테너: 리리코 스핀토 - 아웃케이스 없음
김상만 감독, 유지태 외 출연 / 이오스엔터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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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이 누군가 했더니 <마담 뺑덕>을 연출한 감독이다. 그 밖에 몇 편의 영화를 더 연출했는데 생략한다. <마담  뺑덕>을 연출했다니 그의 변신이 좀 놀랍기는 하다. 그 영화는 좋게 말해서 퇴폐미의 극치를 보여줬다고나 할까? 그런데 비해 이 영화는 오페라의 화려함을 무기로 삼았으니.

 

그러고 보니 두 영화의 공통점은 또 있다.감독은 '구원'을 얘기하고 있다. <마담 뺑덕> 같은 경우 그렇게 퇴폐에 쩔었어도 한 여자에 의해 구원 받는 감독의 갈망을 드러냈다. 오죽했으면 끝까지 악녀여야 할 뺑덕이 사실은 마음의 심층 밑바닥엔 선함이 깔려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래서 남자가 어떤 나쁜 짓을해도 복수하지 못하며, 선함 그러니까 여성 특유의 모성본능으로 감싸 안을 수 있다고 믿고 있는 모양이다. 그 영화의 마지막 엔딩 장면을 보면서 허탈하다 못해 헛웃음이 나왔던 것을 기억한다. 

 

옆에 있었으면 작은 소리로 말해 주고 싶었다. "저기요, 나쁜 남자는 그냥 나쁜 남자예요.. 나쁜 남자를 구원해 줄 선한 여자는 없어요."라고. 자기도 구원하지 못할 자신을 누구더러 구원해 달란 말인가. 혹시 감독은 다시 유아기로 돌아가 엄마의 젖을 빨로 싶었던 건 아닌지 의문스러울 정도였다.

 

       

 

이 영화는 일단 오페라를 스크린 안으로 끌어들였다는 점에서 봐 줄만하긴 하다. 100년만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테너에게 붙이는 찬사가 '리리코 스핀토'라고 한다. 이 영화는 성악가 배재철 씨의 실화를 다룬 것이다. 그렇게 잘 나가던 테너가 어느 날 갑자기 갑상선암으로 쓰러져 하루 아침에 목소리를 잃고, 암흑 같은 시간을 보내다 좌절을 딛고 일어선다는,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성공신화가 주요 모티프다.

 

성공신화야 늘 성공 못한 인생이 수두룩한 것을 생각하면 반은 먹어주는 이야기 아닌가. 거기에 무엇으로 양념을 칠 것인가인데, 사실은 성공 신화도 너무 흔한 시대이고 보면 그 이야기가 그렇게 감동스러운 건가, 아니 성공만이 전부인가에 대해 의구심이 남는 것도 사실이다.

 

왜 영화는, 주인공이 노래를 못 부르게 됨으로 인해서 그동안 성공에만 집착하다 그렇지 않은 다른 인생의 길도 있음을 보여주지 못하는 걸까? 주인공은 성공도 잘하고, 좌절도 잘하며, 또 금방 희망도 잘한다. 갈등은 짧고,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건 거의 없다. 과연 이 인물에 공감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앞서 구원 얘기를 했는데, 구원은 과연 천운일까? 그런 의문도 남는다.

 

그도 그럴 것이 주인공이 모든 것을 포기하려고 했을 때, 친구처럼 지내는 일본의 오페라 기획자 코지를 통해 일본의 어느 의학자를 만나게 되고 그를 통해 목소리를 회복하게 된다. 물론 있을 수 있는 설정이고 동시에 흔치않은 기회다. 그래서 천운인 것이고. 이런 기회는 늘 무대에서 1000%에 가까운 기량을 뽐낼 줄 아는 사람에게나 주워지는 거지 일반인에게 주워질 기회는 아니다. 그렇게 구원은 어느 특정인에게만 주어질 것처럼 영화는 보여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구원은 만인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나중에 주인공이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렇게 말하지 않던가, 암으로 쓰러질 때 왜 내 생명을 거둬가지 않았냐고. 난 그게 참 가식적으로 느껴졌다. 왜일까? 늘 아픔과 고난의 연속 속에서 그런 독백은 처절해 보이지만, 늘 성공가도를 달렸던 사람이 그러는 건 동정은 하지만 진정한 공감까지는 한참 걸려 보인다.  

 

그런 의학적 노력도 한계는 있어 예전의 완벽한 목소리를 재현해내지 못하는데, 이 부분에서 영화는 조금이라도 인간적이길 바랐던 것 같다. 인간은 역시 완벽하지 못한 존재니 이젠 이 천재 테너의 노래를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들어 달라고 주문하는 것 같다. 그렇다. 예술의 울림은 기술이 아니라 진심이다. 진정 가슴을 열고 느껴야 예술이 되는 것이지 아무리 기술적으로 완벽해도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의미를 담고 있는 마지막 엔딩 장면은 다분히 쇼적이다. 

 

그래서 말씀인데, 난 이제 감독이 각본을 맡겠다고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이 영화는 다분히 삼천포행 영화가 됐다. 영화의 미장센이나 영상미는 외국 어느 영화에 못지 않은데 스토리는 영 맥을 못 춘다. 영화의 볼거리가 꼭 스토리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박박 우기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 볼 줄 아는 사람은 안다. 그런 영화일수록 속빈 강정이란 걸. 얼마나 공을 들였을지 짐작은 가는데 스토리가 좋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예술은 가슴이라고 말은 하면서 정작 관객의 가슴까지는 도달을 못했다. 예술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유지태도 연기를 잘하긴 하지만 내가 그다지 좋아하는 배우는 아니고, 오히려 차예련이 차분하게 연기를 잘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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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10-08 17: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나쁜 남자는 좋은 여자의 손길로 구원받는다는 서사.. 정말 질리지 않습니까 ?

stella.K 2016-10-09 15:18   좋아요 1 | URL
그러니까요. 영화는 감독의 것이라고 하는데
이 감독 구원을 얘기하는 것 같긴한데
구원이 왜 나쁜남자나 신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나
가능한 것처럼 얘기하는지 모르겠어요.

근데 남자들 이런 조강지처 콤플렉스 있지 않나요?
젊었을 때 방탕하다 죽을 때 조강지처가 눈 감겨주길 바라는...
그게 또 이야기의 원형이지 않습니까?

근데 오늘 서재 사진 좋군요.
부러운 재주입니다.^^

cyrus 2016-10-08 20: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나쁜 남자는 착한 여자의 도움으로 구원을 받지 못하면 실패의 원인을 착한 여자 탓으로 여길 겁니다.

stella.K 2016-10-08 21:49   좋아요 1 | URL
ㅎㅎ 생각해 보니 그러네.
그러니 착한 여자가 나쁜 남자에게 간택 당하는 일은
없어야 해. 나쁜 남자는 더 나쁜 여자를 만나 자신의 죄가
얼마나 중헌지,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알아야 해.
그거 밖엔 길이 읎다.
어디서 그런 동화를 쓰냐? 말도 안 되지.ㅠㅋ

곰곰생각하는발 2016-10-12 19:00   좋아요 2 | URL
나쁜 남자는 항상 착한 여자를 좋아하는데.... 참 씹새끼스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염치가 없습니다..ㅎㅎ
 
케스
켄 로치 감독, 데이빗 브래들리 외 출연 / 무비스톤 / 2011년 3월
평점 :
품절


오래 전에 감독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이란 전쟁 영화를 꽤 인상적으로 본적이 있다.

그래서 이 영화 역시 기대를 가지고 봤는데 기대엔 좀 못 미치긴 하지만 나름 괜찮은 영화란 생각이 들기는 한다.

 

 

좀 오래된 영화인듯한데 주인공 소년이 매 기르면서 주위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나름 잘 묘사해 냈다. 그 매의 이름이 케스다.

 

그런 척박한 환경에선 뭐든 한 가지에 취미와 관심을 갖는 것이 좋긴 할 것이다.

그 때문에 학교에선 문제아로 인식되었던 캐스퍼가 관심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동급생들과의 갈등과 형과의 갈등은 여전하다.

특별히 학교 상황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좋게 그려지는 법이 없다.

또한 이런 영화가 다 그렇듯 누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즈음 방해꾼이 등장해서

영화는 다소 싱겁게 끝난다.

이 영화에서의 훼방꾼은 공교롭게도 주인공 소년의 배다른 형이다.

소년과 늘 티격태격하는 사이인 형이 동생을 응징하겠다고 어느 날 케스를 죽여버린 것이다. 이런 건 좀 뻔해보이는 클리셰 같기는 하다.

 

 

그럼에도 영화는 주인공을 비롯해 아이들의 연기가 볼만하다.

꾸미지 않고 자연스럽다. 

특히 주인공을 맡은 데이빗 브래들리가 소년이었을 때의 연기가 참 인상적이다.

다소 어눌하면서도 거친듯한 연기 그러면서도 뭔가의 연민을 갖게하는 

눈빛이 어린 제임스 딘을 보는 것도 같다.

 

영화가 감독 특유의 감성이 베어있다. 특히 배우들의 발음이 유난히 딱딱하게 들려

처음엔 독일 영환가 했다. 하지만 자세히 들어보니 영어고, 영국 영화다.

말하자면 영어의 독일식 발음 같다고나 할까?

 

독특한 건 또 있다. 학생들이 선생님께 체벌로 손바닥을 맞을 때 우리는 두 손으로

맞는데 그 아이들은 왼손, 오른손을 따로 맞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한 대로 계산하지만

그쪽 선생님은 왼손, 오른 손을 따로 계산해 두 대로 계산 한다는 것. 그러면 훨씬 덜 아플 것이다. 그런 걸 보면 확실히 우리나라 교실 교육은 좀 비열하고 가혹한데가 있다.

 

굳이 추천을 해야하는 건지 나로선 판단이 서질 않지만 탈허리우드 영화를 원한다면

한 번쯤 봐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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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10-05 14: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책인줄 알았는데 영화였군요.영화리뷰 좋습니다^^..

stella.K 2016-10-05 15:16   좋아요 1 | URL
영국의 영화운동인 프리시네마 계열의 영화로
노동자의 애환을 다룬 좌파 영화라네요. 69년도 작인가 하니
꽤 오래된 영화죠.
당시로선 꽤 잘 만든 영화였을 거란 생각이 들긴해요.
하지만 지금 보면 다소 아쉬움이 남네요.
그래도 전 유럽 영화를 좋아하는 편이라 그럭저럭 봐 줄만 했습니다.^^

cyrus 2016-10-05 16:27   좋아요 1 | URL
To. yureka님 / 영화 원작이 베리 하인즈의 소설 <케스-매와 소년> 맞을 겁니다. ^^

stella.K 2016-10-05 16:59   좋아요 0 | URL
아, 그게 소설이 있었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도 소설을 원작으로 했잖아.
켄 로치 원작이 아니면 영화를 안 만드나 보군.

2016-10-06 00: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0-06 13: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태우스 2016-10-06 21:58   좋아요 1 | URL
어머 그, 그런 심보는 아니었어요. 다만 아직 책을 완독하지 못해서요 ㅜㅜ
다 읽으면 리뷰 쓸거에요!! 기다려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