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교시 추리영역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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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이상용
주연 : 유승호, 강소라

개봉 당시 이 영화에 대해 좋은 소리를 듣지 못했던 것 같긴하다. 그래서 특별히 기대는 하지 않고 보기 시작했다. 이렇게 볼 생각을 했다면 그건 유승호 때문이었겠지. 그런데 기대를 하지 않고 보니 의외로 볼만했다. 중간중간 웃음을 자아내는 장면도 있고.  

사실 말이 되는가? 어느 고등학교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났는데 4교시가 끝나기 전에 살인의 전모를 파헤친다는 게. 더구나 시체를 발견하고 흠칫 놀라는 정도라면 요즘 아이들 간이 부어도 단단히 부었다. 뭐 간이 부은 게 학생뿐이던가? 이 영화에 나온 선생들도 그다지 놀라지도 않는다. 하긴, 굳이 갖다붙이자면, 요즘 아이들 각종 컴퓨터 게임이며, 자극적인 영상물에 좀 많이 노출되어 있는가? 그런 것을 감안할 때 실제로 시체 한번 보았다고 그렇게 호들갑 떨필요는 없다고 우기고도 싶을 것이다.   

더구나 요즘 아이들이 좀 영악한가? 천재적인 힘을 발휘한다면 이런 문제쯤 거뜬히 풀 수도 있을 거라는 전재 아닌 전재가 붙었는지도 모르겠다. 리얼 타임 추리물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은 리얼리티가 떨어진다. 그래도 나는 이 영화는 한 쾌에 다 봤다. 나에게 있어 근래에 이렇게 앉은 자리에서 다 본 영화는 그다지 많지 않다. 아무리 좋은 영화라도 두 번, 세 번에 끊어서 본다. 습관이겠지만 고칠 생각은 별로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예외로 두는 것은 그날 컨디션이 좋아서도 아니고, 승호군이 나와서도 아니며, 추리극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 그나마 강도가 약해서만도 아니다. 

리얼리티가 떨어지는 건 사실이지만, 어쨌든 이 영화는 영화적 기법에 꽤 충실해 보인다. 그것이 내가 이 영화를 한 쾌에 보게 만드는 힘이었을 것이다. 미스터리가 그렇듯 이건 것 같아 마무리가 되는 듯 싶은데, 다른 것이 등장하고 또 다시 그 문제를 풀고 마무리 짓는다.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지가 얼마 안 된 것 같긴하다. 하지만 나름 그것에 충실하려고 했던 의도는 충분히 보인다.  

내가 거기에 한 가지를 더 얹자면, 어찌보면 이 영화는 오늘 날의 교육 현실을 비판해 보고자 만든 영화일 것이라는 점이다. 교육열 세기로야 세계 어디에 내놔도 뒤지지 않는 교육 강국 대한민국. 하지만 그것에 한참 못 미치는 인성교육의 문제. 그렇게 교육, 교육 하면서도 보여주는 교육만큼 강한 교육이 또 있겠는가? 하지만 우리 기성 세대들은 아이들에게 본이 되지 못한 채 점점 괴리돼 가고 있다. 학교 선생 조차 지식 전달 수단으로 전락했을 뿐 하나도 본 받을 대상이 되지 못한다. 슬픈 현실이다. 그것을 감독은 말하려 하지 않았을까? 거기에 또 하나, 왕따의 문제를 언급하는데, 이 왕따의 문제는 꼭 아이들의 문제마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어른에게도 보여지고 있다. 학창시절 때 왕따를 당했던 아이가 기성세대가 돼서도 여전히 이어오고 있다는 걸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알고 보면 그 왕따도 미운 오리 새끼는 아니었을까? 나중에 백조가 되는. 그래서 다정이(강소라)를 엔딩 부분에서 그토록 백조로 만들고 싶어했었나 보다. 나는 그게 좀 오버 같아서 껄끄럽긴 했지만.  

다정이 다친 정훈(유승호)을 문병하는데, 너 공부하는 게 재밌냐고 묻자, 정훈이 사실은 재미없다고 말한다. 그러자 다정이 정훈의 책을 창밖으로 던져 버리는 씬에서 감독은 어지간히 우리나라의 교육이 못 마땅했나 보다.  

그런데 이런 모든 것은 이해가 가긴 하는데, 어딘지 모르게 우리의 학교가 측은하다는 느낌은 지워버릴 수 없다. 그토록이나 문제인걸까? 분명 왕따의 문제, 학원 폭력의 문제는 있지만 매스컴에서 다루면 크게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건 일부의 문제고, 여전히 우리의 아이들은 자기에게 맞는 친구들과 사귀며 그럭저럭 학교를 잘 다니는 것 같기도 하다. 물론 문제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꼭 우리나라에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현대 교육을 실시하는 나라들 역시 문제가 없을 리 없다. 그래도 우리나라가 여타의 다른 나라에 비해 학습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나름 문제를 보완하려고 노력하는 학교들도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문제를 문제로만 보지 말고 그것을 확대해석하는 것도 경계해야 할 것이다.  

같은 학원물이어도 오래 전 '얄개 시대' 같은 풋풋하고 낭만스러운 이런 것이 다시 리메이크돼서 나올 법도 한데 그러질 못하고 있어 아쉽다.  

아무튼 이 영화 이래저래 아쉬운 것이 많긴하다. 하지만 난 어디까지나 아쉽다고 말하지 형편없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감독의 좀 더 나은 차기작을 기대해 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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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11-06-29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를 책 읽듯이 나눠 보시는 스텔라님.
그거 상당히 대단한 재주인 것 같아요.
저는 한번 보다가 중단한 영화는 다시 안보게 되더라구요.

stella.K 2011-06-29 14:23   좋아요 0 | URL
ㅎㅎ 제가 주로 밤에 자기 전에 불꺼놓고 보거든요.
그러면 어쩔 수가 없어요. 보다 졸리면 자야거든요.
그런데 이 영화는 안 그랬단 말이죠.^^

노이에자이트 2011-06-29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는 방송에서도 여러번 해서 몇 번 봤습니다.조윤희 씨,박철민 씨가 교사로 나오고...그런데 저 스틸사진,유승호 씨와 강소라 씨가 교복 입은 모습이 정말 아름답군요.이쁜 교복에 멋진 몸매가 더 돋보입니다.

stella.K 2011-06-29 17:50   좋아요 0 | URL
그런데 영화에선 교복이 그다지 많이 드러나지는 않는 것 같아요.
이 영화 나름 볼만하지 않던가요? 저는 그렇던데...^^

노이에자이트 2011-06-30 17:07   좋아요 0 | URL
짧은 시간에 살인자가 누군지를 알아보려는 긴박감이 돋보였습니다.이 영화는 흥행에 실패하지만 2년 후인 올해 강소라는 '써니'에 출연하여 한을 풀게 되지요.요즘엔 일일연속극에도 나오고...여하튼 연예인은 젊어서 부지런히 돈벌어야 합니다.

stella.K 2011-06-30 18:11   좋아요 0 | URL
ㅎㅎㅎ 그렇죠. 돈 벌어야죠.
그렇구나. '써니'에 나오는군요.
써니에 대한 평가가 좋아 저도 보고 싶어져요.
나중에 볼 날 있겠죠?^^

자하(紫霞) 2011-06-30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영화가 있었군요.
아쉽지만 형편없지는 않은 영화였다...
흠, 공포영화라면 스텔라님의 리뷰를 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stella.K 2011-06-30 11:10   좋아요 0 | URL
ㅎㅎㅎ 이해 못하시겠다는 건가요?
그럼 어쩔 수 없구요.
이 영화 진짜 많이 아쉬워요. 잘 만들 수도 있었을 텐데...ㅜ

cyrus 2011-06-30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영화 처음에 봤을 땐 별 기대 안했는데 재미있더라구요,
그리고 강소라라는 배우를 처음 봤는데,, 나름 매력이 있었구요ㅎㅎ
작품성은 약간 부족한거 같은데,, 우선 여배우가 마음에 들었어요 ^^;;

stella.K 2011-06-30 18:08   좋아요 0 | URL
아하! 시루스님도 영화 보시는구나!ㅎㅎ
항상 영화 리뷰 쓰면 코멘트가 없어 영화는 관심이 없나보다 했어요.ㅋ
그렇죠? 이 영화에선 유승호보다 오히려 강소라가 빛났어요.
디테일이 살았더라면 더 좋았을텐데, 그죠?^^
 
워낭소리 - Old Partner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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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이충렬
주연 : 최원균, 이삼순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다큐 영화가 감동을 줄 수 있을 거라고 믿지 않았다. 노인과 소가 나온다니 얼마나 지루할까? 이런 선입견을 가지고 이 영화를 본 것도 사실이다. 개봉 당시 아는 누가 이 영화는 필히 돈내고 개봉관에서 보라고 했던 말이 기억이 난다. 고백컨대, 난 그의 말에 동의는 하지만 솔직히 개봉관도 가지 않았으며, 따라서 돈 내고 보지도 않았다. 지금 보니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때 일부러라도 돈 내고  봤더라면 이런 묵직하고도 유장한 다큐 영화 한 편 더 만드는데 기여하지 않았을까?   

이 영화는 한마디로 놀라다 젖어드는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놀라운 것은, 어쩌면 노인과 소가 이토록이나 늙었을까 하는 것이다. 너무 늙어 쓰러지면 다시 못 일어날 것만 같다.  노인의 깊이 패인 주름에, 소의 느리디 느린 걸음에 피곤이 드글드글하게 매달려 있다. 이제는 둘 다 쉴만도 한데 쉬질 않는다. 노인은 다른 젊고 튼튼한 소가 있는데도 이 늙은 소에만 의지하여 일을 하고, 소는 주인이 쉬지 않으니 자신도 쉴수가 없다.   

소의 나이 40년. 인간의 나이로 쳤을 때 40이지, 소 본래의 나이로 치면 80도 더 넘었을 법도 하다. 수의사가 처음엔 좀 더 살거라고 했다. 하지만 고작해야 1년. 소에겐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겠지만, 노인에게 1년은 있으나 마나한 시간은 아니었을까? 말하자면 이 영화는 그렇게 자기 생명이 1년 밖에 남지않은 소와 노인의 마지막을 찍은 영화다.  

노인의 9남매가 올망졸망 어렸을 때 와서 힘들게 농사 지으며 9남매를 키워내기까지 적어도 3분의 1은 그 소의 공이었으리라. 그렇지 않아도 사람들은 노인의 소를 칭찬한다. 아들 못지 않은 효도를 한다고. 하지만 그 소는 알 것이다. 자신이 이만큼 살  수 있기까지 노인이 얼마나 고집스럽게 옛날 방식의 농법을 고집해 왔는지를. 영화 중간중간 할머니의 영감을 향한, 소를 향한 끊임없는 불만이 마치 내래이션처럼 흐른다. 남들 다 치는 농약 한 번 치지 않고 뭐 그렇게 어렵게 농사 짓느냐고 성화다.  하지만 그 소가 그렇게 오래 노인의 곁을 지키며 일할 수 있는 것이 노인의 공임을 할머니는 알까, 모를까? 때론 그런 할머니가 보는 나도 야박스럽게 느껴지기도 하다.

하긴, 이제 자식들도 다 장성해 부모를 떠나간 마당에 허리 한 번 제대로 피지 못하고 늙어버렸건만, 뭐 일할 것이 남아서 그 휘청거리는 몸으로 농사일을 한단 말인가? 이제 좀 자식들의 공양을 받으며 편히 살아도 되지 않는가? 깨어질 듯한 두통을 머리에 한 짐 얹고도, 그래서 이젠 좀 쉬어야 한다는 의사의 충고를 듣고도  노인은 차마 손에서 일을 놓지 못한다. 한마디로 소처럼 일하는 노인, 노인처럼 일하는 소. 혼연일체가 된 느낌도 든다. 

        

 하지만 역시 소는 서글픈 동물임에 틀림없다. 그렇게 뼈 빠지게 일해도 누가 알아주겠는가? 지금이나, 영화를 찍었던 2006년이나 또는 그 보다 더 오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도 소들이 평안을 누려 본 적은 없다. 당시는 FTA 때문에 우리 소 값의 하락을 우려했고, 광우병 때문에 타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토록이나 열심히 일하고도 인정 받지 못한 소에게 새삼 연민이 느껴졌다. 그것은 앞서 편하게 농약 써 가며 농사 짓자는 할머니의 자조 섞인 말과 뭔가 상통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동시에 노인과 소와 배치된 느낌이기도 하다.  

이제 늙어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되었으니 팔자는 말에 우시장에도 데리고 나오지만 노인은 끝내 소를 팔지 못한다. 그만한 가격이면 후하게 쳐 드리는 거라며 팔기를 종용하는 사람들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노인은 몇 번이나  단호하게 "안 팔아!"를 팩팩 쏘아 붙여던 것은 돈이 적어서만도 아니었을 것이다.  노인의 중년부터 노년을 함께 했을 소를 어떻게 쓸모가 없어졌다는 이유만으로 내칠 수 있는가 하는 인정이며 동시에, 늙은 부모 버리는 자식들에 대한 시위를 시사하는 대목인지도 모른다.    

 

 또 어찌보면 노인의 이런 고집스러운 삶의 태도가 감독으로 하여금 영화를 찍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노동은 인간이고, 인간은 노동이라는 이 평범한 진리. 인간이 자연과 동물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함께 더불어 사는 것임을 감독은 간파했기에 그 느리디 느린 시간을 견디며 한 편의 다큐를 찍어냈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소가 죽던 그 해 12월의 추운 날의 한 장면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소가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 흘렸던 한방울의 긴 눈물과 그 소를 땅에 묻고 울지도 못하고 허탈해 하는 노인 부부의 모습은, 어느 명배우의 명연기 보다 더 진한 감동을 보여줬다. 또한 툭하고 건드리면 쓰러질 것만 같은 노인과 소에게서 쓰러지지 않는 강하고도 질긴 생명력을 카메라에 담아낸 감독에게도 마음 속으로나마 진심어린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뭐든지 빨리 빨리의 세풍 속에서도 느리면서도 유장한 한 편의 다큐를 완성하기까지 감독이 얼마나 많이 참고 인내하며 찍었을까 고스란히 느껴진다. 왜 스튜디오 이름이 '느림보'일지 알 것도 같다. 지금은 그로부터 5년 여의 시간이 지났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어떻게 사실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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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21 23: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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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22 11: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22 10: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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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22 11: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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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22 13: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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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22 13: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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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1-06-22 1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척이나 감동적인 영화였었죠.

이 영화를 보면서, 어릴 때 직접 소를 키우던 생각도 많이 나고, 소가 일할 때 풀을 뜯지 못하도록 입막음하는 장구도 몇십 년 만에 새로 보니 정말 옛 추억이 많이 떠오르더군요.

사람과 소가 저토록 한 식구처럼 서로 의지하고 살던 세월이 아마도 족히 수천년 세월은 지속되어 왔을 텐데, 이젠 더이상 '노인처럼 일하는 소'와 '소처럼 일하는 노인'은 물론이고, [노인과 소]처럼 서로 아끼고 돌봐주는 관계도 더 이상 찾기 어려울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stella.K 2011-06-22 19:22   좋아요 0 | URL
정말 노인은 이런 다큐멘터리 영화에 나올 법해요.
노인처럼 신념있게 사는 사람이 그리운 세대여요.
그건 많이 배웠다고 되는 일은 아니죠.
존경스럽기까지 하더라구요.^^

2011-06-22 17: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22 19: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여행자 - A Brand New Life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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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우니 르콩트
주연 : 김새론, 박도연(2009)

카메라가 한동안 한 여자 아이만을 쫓는다. 바로 앞에 아이의 아버지도 있고, 다른 잡다한 사람들도 있지만, 카메라는 거의 집요하리만큼 여자 아이에게서 떨어질 줄 모른다. 이렇게 약간은 기묘하게 시작되는 영화는, 또 기묘하리만큼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데가 있다.   

영화의 분위기는 시종 스산하다. 겨울을 배경으로 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시대적 배경 역시 80년대 또는 그 이전을 배경으로 해 다소 퇴락한 느낌도 든다.   

여기 한 여자 이이가 이제 막 자기 아버지에 의해 버림을 받으려고 한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는 어느 식당에서 아빠를 위해 노래를 불르며 행복한 마지막 한 때를 보내고 있다. 왜 버림을 당해야 하는지에 관해선 알 수가 없다. 나중에 이 아이는 한 의사와의 면담에서 자신이 버려진 이유를 설명하기도 하지만, 그 말 역시 정확하지는 않다. 하긴, 아이를 고아원에 버리는 부모의 사정이야 굳이 말 안해도 알만하지 않을까? 중요한 것은, 부모가 자기 아이를 버렸다는 사실이 아니다. 영화는 이 버림 받은 아이의 심경을 고아원이란 한정된 공간 안에서 보여주는 것에 있다.  

서러워라, 버림 받는다는 것은! 보통의 성인도 누군가로부터 배신을 당하거나, 실연을 당하면 슬픔과 아픔에 숨이 턱턱 막힐진데, 이제 세상에 태어난지 9년밖에 되지 않은 조그만 계집 아이가 자기 아버지로부터 버림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전까지의 그 저항은 얼마만한 것일까? 감히 상상이 가질 않는다.  그  조그만 어깨에 지구 전체의 무게를  짊어진 무게와 같은 것이리라. 얼마나 슬플까?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 그게 보는 나로 하여금 절절히 느껴지게 만드는 건, 확실히 주인공 진희 역을 맡은 김새론의 연기의 힘일 것이다.  

사람이 죽음을 인정하는 몇 가지 심리적 단계가 있다고 한다. 그처럼 사람이 누군가에게로 부터 버림을 받았을 때 그것을 인정하기까지 심리적 몇 단계를 영화는 여과없이 보여주고 있다. 확실히 그 첫단계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리라.  누구도 자신이 자신을 버리기 전까지 진짜 버림받은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만큼 자신을 배신한 사람을 철저히 믿는 것이도 하고. 낯선 환경을 견딜 수 있는 것도 언젠가 여기서 나를 구원해 줄 누군가가 있다는 믿음 때문일 것이다. 그처럼 나는 비록 비천한 고아원에 맡겨졌지만 언젠가 다시 아빠가 자신을 찾으러 올 것이라는 믿음이 이 아이에게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새로운 외부 환경은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너도 별 수 없는 고아라는 것을 인정하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나는 너희와 달라. 내 몸에 손데지 마!' 이렇게 외치며 현실을 인정하기를 강하게 거부한다.  

그러나 그렇게 부정하면 부정할수록 아빠(구원자)에 대한 믿음이 점점 힘을 잃어간다. 영화에서는 고아원에 와서 밥도 먹지 않고 버티던 주인공 진희가 할 수 없이 어두운 부엌으로 들어가 밥솥에 눌어 붙은 누룽지를 눈물과 함께 뜯어 먹는 장면이 나온다. 그 눈물 섞인 누룽지를 먹는다는 건 어떤 의밀까? 지금까지 먹지 않고 버틴 건 아빠에 대한 간절한 원망(願望)과 현실을 인정하기 싫은 강한 저항이겠지만, 허기진 배를 누룽지로 채우는 것은, 현실을 인정하고 거기서 새로운 삶의 길을 모색해야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정도 맞아서 고아원 아이들과도 일정 정도 마음을 열고 사귀기 시작하며, 고아원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여러 자질구레한 일들을 평범한 어린 아이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겪게 된다. 이를테면 고아원의 맞언니 예신의 폴폴거리는 연애 감정과 실연에 대한 아픔도 지켜보고, 입양되어 가는 친구의 모습도 봐야했으며, 처음으로 사귄 숙희와 그때까지 알지 못했던 여성의 생리도 보게 되며, 새의 죽음도 보게 된다. 이것은 또 어찌보면 현실에 어쩔 수 없이 적응해 가는 진희의 내면을 에피소드식으로 보여주는 것도 같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한 가지 흐름만을 갖지 않듯, 어린 아이의 마음 역시 천갈래, 만갈래로 나뉠 수 있고, 흩어질 수 있다. 그렇게 잘 적응할 것만 같은 진희도 사실은 현실을 완전히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몸은 고아원 철창 대문 안에 있어도, 마음은 늘 사랑하는 아빠가 오지 않는다면 찾아라도 가겠다는 탈출을 꿈꾸는 것이다. 그래서 실제 탈출도 해 보고, 시위도 하며, 원장에게 떼를 써 보기도 하는 것이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고, 원하는 것처럼 탈출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철창문이 열어 있다고 해서 맘대로 나갈 수 있는 것도 이니다. 그때의 절망감은 처음의 저항과는 또 달라서 거친 반항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선물로 들어 온 자기 몫의 인형을 발기발기 찢는 것도 부족해, 친구의 인형도 그렇게 망가뜨려 놨으니 말이다.   그것은 극도의 분노의 표출이기도 하다.

자신은 너무 어려 고아원 철창을 나가 아버지를 찾을 수 없으니, 원장을 시켜 자신이 예전에 살던 집에 아버지가 여전히 살고 계신지, 살고 계신다면 자신을 데리러 와 달라고 부탁한다. 원장은 할 수 없이 진희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지만, 실제로 진희가 예전에 살았던 그 집을 갔다왔는지 확인할 수는 없다. 단지 거기에 아버지가 살지 않으며, 이사 갔다는 말을 담담히 전한다. 그래야 또 진희가 포기할 건 빨리 포기할 테니. 그 사실을 알았을 때 그 아이는 땅을 미친 듯이 파기 시작한다. 정말 그 땅에 자신을 생매장이라도 할 모양인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죽기 위해 판 것이 아니다. 그속에 실제로 눕긴 했지만, 진희의 그 행위는  더 이상 아버지를 기다리지 않기 위한, 나아가 더 이상 부질 없는 희망에 목숨 걸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또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줬던 건, 아이들 사이에 은밀히 행해져 온 화투패 놀이에서 다음 날의 운세를 점치는 행위를 경멸하는 것에서 나타나기도 한다. 그것은 또한 진희의 죽음과 부활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 어찌보면 이 이야기는 그렇게도 뛰어넘게 되길 바랬던 고아원 철창 대문을, 누군가의 양녀가 됐을 때 가볍게 나갈 수 있는 것을 깨닫기까지의 지난한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군가의 양녀가 되기까지는 바로 되는 것은 아니였다. 프랑스행 비행기를 타기까지 진희의 방황과 불안은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누군가의 양녀가 되고나서도 불행할건지, 행복할건지를 모르는 진희의 불안한 미래를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엄밀히 얘기해서 인간 누구도 버림을 받지 않는 사람은 없다. 단지, 너무 어린 나이에 그것을 경험한다는 것이 굉장히 큰 묵직한 울림으로 전해온다.   

이 이야기는 감독의 자전적 영화라고 한다. 그러니까 감독의 어린 시절 프랑스로 입양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작품으로, 아이의 불안한 심리를 사실감있게 묘파한 수작이다. 

주인공 역을 맡은 김새론의 연기가 상당히 인상적이다. 김새론은 확실히 연기의 감각을 아는 아이인 것 같다. 가히 연기 천재라는 다코다 페닝을 능가한다는 느낌이 든다. 이 배우의 연기를 주목해 볼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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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1-06-17 0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스텔라님 글 많아서 좋아요. 이 영화를 보기에 제 마음이 너무 흘러넘칠듯 차 있어서 늘 패스,패스하곤 했는데 새론양이 흙덮은 스틸컷에는 헉하고 마음이 철렁해져요. 이제 봐도 될 것 같아요. 되게 좋다고 하던데 스텔라님 리뷰는 사실적이라 짐작할 수 있게 되었어요. 꼭 볼게요.^^

stella.K 2011-06-17 11:04   좋아요 0 | URL
에효..매일 글을 쓴다는 게 이토록 힘든 것인지도 몰랐어요.
잘 쓰는 것도 아니면서...ㅜ
꼭 보세요. 감독이 나름 긍정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
저는 보기 좋았어요. 독특하게 찍기도 했구요.^^

hnine 2011-06-17 0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 영화 보고 상당히 맘에 들었던 기억이 나요. 그 애 이름이 진희였지 맞아, 이러면서 읽어내려 오다보니 그때 기억이 새롭네요.
제목을 '여행자'라고 붙인 것도 마음에 들었고요. 마지막 장면도 인상적이었어요. 이 특별한 느낌을 영화에 입힐 줄 안 감독은 도대체 누굴까 궁금해하면서 극장을 나왔었지요.

stella.K 2011-06-17 11:48   좋아요 0 | URL
진희가 입고 있는 옷에 눈이 많이 갔어요.
이 리뷰 쓰고 우연히 프레이야님 리뷰를 보다가
감독이 우리랑 생년이 같고, 의상을 전공했다고 하더군요.
느끼셨는지 모르겠지만, 의상이 복고적이면서도 현대미를
가지고 있잖아요.
이 영화는 그야말로 진희를 위한, 진희에 의한, 진희의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기 위해서 그 나머지의 톤을 거의
고루 분배를 했다고 볼 수가 있지요.
마치 화룡정점과 같은 영환거 같습니다.
hnine님의 서재 이미지처럼.^^
 
행복 - Happiness
영화
평점 :
상영종료


감독 : 허진호
주연 : 황정민, 임수정(2007)

이 영화를 보면서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은, 사람이 건강을 잃었다는 것이 과연 꼭 불운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 영화의 남자 주인공 영수(황정민 분)은 도시에 살았던 탕아였다. 때문에 그는 간경변이란 병을 얻었고, 그병을 고치기 위해 주변을 정리하고, 시골 어느 요양원을 찾아 든다. 그랬을 때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아마도, 방만했던 자신의 삶에 대해 자책감을 느꼈을테고, 그동안 찌들었던 자신의 삶을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또한, 한적한 시골이 주는 낮설음과 어색함이 없지는 않겠지만, 차츰 익숙해지면서 오히려 시골도 사람 살만한 곳이고, 자신이 깨끗히 정화되는 느낌도 받았을 것이다. 더구나, 무슨 행운이었을까? 은희(임수정 분)를 만난 건 정말 행운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그녀가 자신의 운명을 바꿔 줄 것만 같은, 운명의 여인이었으니까.  적어도 그녀는, 과거 그가 도시의 찌든 삶을 살았을 때 같이 살았동거녀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그것만으로도 영수는 충분히 은희를 좋아할 수 있었다. 아니, 그가 병까지 얻었는데 동거녀로부터 버림까지 받았다는 건 그야말로 설상가상이었다.  그런 것을 은희가 받아 준 셈이니, 은희는 그의 베아트리체, 구원의 여인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더구나 둘은 같은 병은 아니지만 어쨌든 몸에 병을 가지고 있는 이른바 동병상련이다. 이것은 또 사람을 얼마나 친화력으로 이끄는 동력이 될 것인가? 

    

물론 사랑이 한방에 이루어졌던 것은 아니다. 위기는 기회라고 사람들은 누누히 말하지 않던가? 하필, 요양원에서 같은 방을 썼던 간암 환자였던 석구가 더 이상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자살을 한다. 이건 또 얼마나 영수를 흔들어 놓는 충격적인 사건이었겠는가? 그랬을 때 은희는 그를 흔들림없이 잡아줬고, 위로해 줬다. 그리고 그것은 둘이 요양원을 나와 같이 사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부부처럼. 

그런데 그 계기가 또 좀 생뚱맞다. 영수의 방에 거의 잠입하다시피한 은희. 마음에 있어하는 남녀가 하룻밤을 보내는 보내는 거야 당연한 건데, 우리의 요양원 원장 선생님, 은희에게 따져 묻는 장면이 좀 우습긴 하다. "너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거야?" 뭐 대충 이런 대사가 있다. 그 대사 듣고 있노라면 은근 생뚱맞다는 생각이 든다. 왠지 한사람에 의해서 저 둘의 사랑이 질 낮은 사랑으로 매도된듯 하다. 누가 보더라도 저건 섹스를 위한 섹스가 아니고, 사랑하기 때문에 섹스하는 건데 그걸 그렇게 한마디로 매도하다니. 하긴, 우리의 원장선생님, 이들의 사랑을 그동안 모르지 않았는가? 과정은 생략한 채 결과만 볼 수 밖에 없는 건 외눈박이 관심일수밖에 없다.  

 

 부부로 사는 건 또 얼마나 수고를 필요로 하는 것인가? 이제까지는 요양원에서 모든 숙식이 가능했지만  이제부터는 모든 것을 자급자족해야 한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게 됐는데 그게 무에 그렇게 힘들겠는가? 이대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영수는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행복은 오래가지 못한다. 서울에서 자신의 뒤를 봐줬던 친구와 전 동거녀가 다녀간 뒤로 영수의 마음이 차츰 변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또한 그 무렵 그는 발목 잡았던 병에서도 완치되었다. 바로 그 지점이 내가 처음에 말했던, 병들었다고 해서 꼭 불운한 것이냐고 물어보게 되는 지점이라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건강이 누구에게는 오히려 영혼의 독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영수가 병에서 완치되자 그동안 고개숙이고 있던 그의 모든 욕망이 되살아난 것이다. 그리고 방탕했던 옛 시절을 그리워하고, 의식을 했던 안했던 결국 그 시절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여기서 또 묻게 되는 건, 인간은 왜 어두운 것을 좋아하느냐는 것이다. 충분히 좋게, 건강하게, 희망적으로 살 수도 있는데 까닥 한발만 잘못 들어서도 인생은 파멸로 치닫고, 그런 자신을 돌아보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반대로 인간이 행복을 추구하려는 그것을 들여다보면 알 수 있을 것도 같다. 사실 행복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니다. 노력해야 하는 것이고, 약간의 구속도 있다. 이런 행복을 가꾸려는 노력없이는 행복은 결코 오지 않는다. 하지만 이 수고가 모든 사람에게 가능한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행복을 가꾸려고 너무 노력한 나머지 자신을 소진시켜 행복을 잊고 사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행복이란 무엇인가? 사랑하는 마음도 언제나 오래 가는 것은 아니다.  

영화에서, 영수가 은희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 된 것은 아주 사소한 것이다. 이를테면, 은희가 밥을 너무 늦게 먹는다는 것. 그리고 은희의 폐를 관리하기 위해 힘들 게 내뱉어야 하는 안된 숨소리. 이 사소하고, 깊이 이해해 줘야할 것들이 그녀를 멀리하고 싶은 것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만 눌려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해 기분전환을 위해 둘은 놀이공원을 찾았는다. 하지만, 회전목마를 탄 영수를 볼 때 더 이상 행복하지 않다는 걸 알고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은희의 표정은 또 얼마나 딱한 것이겠는가?            

사실 은희는 폐의 40%를 잘라낸 폐병 환자다. 그러므로 그녀는 어떠한 경우에도 숨이 차서는 안된다. 하지만 이 사실이 그녀에겐 가장 행복할 때와 가장 불행할 때 자각된다. 전자는 영수와 숙소에서 사랑을 나눌 때이고, 후자는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배신을 당할 때이다. 배신의 고통이 너무 심해 차라리 마구 뛰다가 죽길 바란다.  

  

행복은 그렇게 이 두 남녀에겐 오래 가지 못했다. 사랑하지만 영수를 거부해야 했던 은희도, 자기 자신의 선택임에도 불구하고 함께 살던 집을 그 스스로 나와야 했던 영수도 가련하고 측은하기는 마찬가지다. 그건 제3자인 관객이 봐도 뜯어 말리고 싶은 장면이다. 하지만 영화는 이 지점쯤에서 또 묻는 것 같다. 이번엔 관객에게. 행복은 어디에 있는 것 같냐고? 

1년쯤 흐르고, 영수는 폐인이 되어 어느 노숙인 수용소(?)에서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을 때, 옛 요양원 원장으로부터 은희가 곧 죽을 거라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그녀의 병상에 갔을 때 하염없이 울기만 한다. 

이 영화는 인간의 행복에 대해 말하려는 게 아니다.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은 존재인가를 역설적으로 말하는 실존주의 영화란 생각이 든다. 인간은, 젊은 날에 젊음을 모르고, 사랑할 때 사랑을 모르는 존재다. 그렇듯, 행복할 때 행복을 모르는 존재다. 이 영화는 한편의 수채화 같고, 잔잔한 단편소설 을 보는 것 같다. 난 그런 허진호 감독의 영화를 좋아한다. 임수정의 힘들이지 않는 연기도 좋고. 

그런데, 결론은 뭐란 말인가? 결국 행복이란 자족하기를 바라는 마음. 바로 이 순간을 즐기려는 마음. 그것이 행복은 아니겠는가? 영화를 보면서 생각해 봤다. 하지만 정말 그렇게 살기는 또 얼마나 어려운가? 매일 실감하면서 산다. 이것 자체도 행복이라고 말하면 할 말 없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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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SHIN 2011-04-30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행복이 뭐였더라?' 하고 잠시 패닉 상태가 되었습니다. -_-;
아, 그러고보니 어릴 때는 행복하게 보냈던 것도 같습니다.
지금은 늘 궁금합니다. 내가 추구하는 행복은 무엇인가. 나는 행복이란 게 뭔지나 알까?

비몽사몽에 댓글을 달고 있어서 뭔 소린지 모르겠군요..^^;

stella.K 2011-05-01 19:13   좋아요 0 | URL
오랫만이어요. 엘신님.^^
이러구 저러구 필요없구요, 그냥 추천만 해 주세요.ㅋ
근데 임수정 좋지 않아요? 난 좋던데.^^
 
비포 선라이즈 - Before Sunrise
영화
평점 :
상영종료


감독 : 리처드 링클레이터
주연 : 에단 호크, 줄리 델피

벌써 15년 전쯤에 만들어졌던 영화다. 나는 뭐 때문이었는지, 개봉 당시에 보지 못하고 이제서야 봤다. 그런데 이 영화 지금 봐도 너무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지금 보게 되서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개봉 당시에 봤다면 '뭐 영화가 이래?'하며 시큰둥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지금 이 영화를 보고 난 느낌은 왜 그리도 아련한지.  

우리가 가끔 옛날 사진을 보는 것은 추억 때문일 것이다. 그런 것처럼 지나간 시절의 영화를 보는 것은 그 영화속에서 옛 추억을 음미하며, 시간을 더듬어 보고 싶은 욕망 때문일 것이다. 

    

15년 전이면 나도 저 주인공들만큼이나 젊었다.  그래서 그만큼 감정이입이 잘 되는 느낌이다. 영화를 볼 때만큼은 나도 저 남녀 주인공의 나잇대로 돌아가 그때를 음미해 보고 싶어진다. 특히 그때의 느낌과 정서를. 그리고 생각한다. 영혼도 나이를 먹는 걸까? 하고.   

마침 영화 가운데 저 둘이 나누는 대화가 잊혀지지 않는다. 여자가 말했다. 자신은 아주 많이 늙어서 사람을 대하고 있는 것 같다고. 그에 반해 남자는, 자신은 지금도 13살인데 어른인 척하고 사람을 대하는 것 같다고.  나는 그들의 말에 공감한다. 더 공감하기론 남자의 말에 더 공감하지만.  어느 때, 나는 10대 시절을 너무나 또렷이 기억하는데(그것은 그때 있었던 일뿐만 아니라 그때의 감정, 정서까지도) 지금 나는 그때에 비해 너무 많은 나이를 먹었다고 생각하면 아찔해지곤 한다.  

아무튼, 저들의 대화를  이렇게 듣고 보면 영혼은 아주 어린 아이였다가도, 아주 늙음을 자유자재로  고무줄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영화를 볼 때 놀라운 것은, 여행길에 만난 두 남녀가 하루동안 나누는 사랑 이야기를 보여준다는 것에 있다.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데 얼마나 걸릴까? 물론 각 개인마다 다르겠지만, 몇분에서 몇 개월 또는 몇년씩 걸리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얼마 걸리지 않는다. 적어도 이들이 기차에서 내려 어느 레코드 가게에서 서로가 고른 레코드를 골라 부스에서 음악을 들어 볼 때다. 둘은 음악을 듣다 서로 키스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다. 물론 거기선 하지 않지만.  

이 영화가 지금 봐도 좋은 것은, 사실 그 시절에도 CD가 없었던 것도 아닌데, CD를 고르는 것이 아니라 추억의 LP판을 고른다는 것이고, 그것을 역시 턴테이블로 듣는다는 것에 있다. 낭만적이고, 추억이 고스란히 돼 살아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나는 모든 건 감정이입이 되도 키스만큼은  감정이입이 잘 안 된다. 어느 영화에서, 잉그리드 버그만이 그런 대사를 했던 기억이 난다. 키스할 때 코를 어디에 둬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것이 아닌 것처럼, 설마 코 때문에 키스를 못할까?  하지만 나이들어 가면서 그 욕망도 점점 사라진다.  하게 되더라도 아주 형식적이고, 기계적인 키스만하게 되고. 흔히 말하는 뽀뽀 정도. 그나마 그것도 할 생각을 못하게 되는 때가 온다. 그래서일까? 그 둘의 키스가 왠지 좋아보이지만은 않는다. 역시 키스도 젊을 때 한 때 할 수 있는 것인가 보다. 물론 또 모를 일이다. 황혼에 사랑이 가능한 것처럼, 황혼의 키스도 가능할 수도 있지 않을까?  비록 몸은 늙어도 영혼은 늙지 않는다면 몸은 구속 받지 않게될 것이다.  

이렇게 이들은 영화에서 엄청나게 키스를 많이 하지만, 섹스는 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에로틱이 아닌 플라토닉이다. 남녀가, 그것도 피끊는 청춘이 사랑을 하는데 어떻게 섹스를 하지 않을 수 있을까? 맥 빠져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영리하게 잘 만들어졌다. 보여줘 봤자 아주 잘 보여주지 못 할 것이라면 슬쩍 눙치고 넘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 결과 19금은 면했으며, 15세 등급을 받고, 미국내 모처에서 '죽기전에 꼭 봐야할 영화'에 그 이름을 등재시켰으니 영리하달 밖에.  

영화는 때로 누구나 보여줄 수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 보다, 보여 줄 수 없는 것을 보여주거나 아예 안 보여주는 것이 유리할 수도 있다. 그때도 유행이었을  프리 섹스의 시대에 플라토닉 러브는 얼마나 시대착오처럼 보여질 수 있겠는가? 하지만 감독은 과감하게 그것을 보여주고, 저 남녀로 하여금 사랑을 무형의 타임캡슐 속에 집어넣고 봉인한 채 헤어지게 만든다. 물론 그들은 6개월 후에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한다. 그런데 여자가 다시 기차에 몸을 싣는 순간, 나는 정신이 들듯, 과연 저들은 정말 사랑을 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사랑을 하면 하룻밤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잖는가?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과연 저들이 다시 만나기로 한 6개월 후에도 사랑을 확인할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하지만, 그 무엇도 옮고 그른 것은 없다.  사실 저들의 나이 땐 인생을 관조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기성세대 특히 부모세대의 사랑을 비판하고, 자신들의 과거의 철부지 사랑을 얘기하며 내린 결론이었을 것이다. 물론 저들은 사랑을 시작했으니, 그러해왔던 것처럼 한동안은 뜨겁게 타오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해서 사랑을 혹사시키지는 말자고 했을 일일지 모를 일이다. 오래도록 서로를 사랑하는 이 마음을 가지고 헤어지자고 했을 것이다. 누구는 이게 무슨 사랑이냐고 할지 모르고, 또 누구는 이것도 엄밀히 말하면 사랑이라고 할 것이다.  

어제 라디오를 들으니, 한 진행자가 그런 멘트를 한다. 망각만큼 완벽한 기억은 없다고. 사람의 기억은 완벽하지가 않아서 기억할 때마다 왜곡되고 뒤틀려 버리기마련이므로 망각속에 집어 넣으면 기억은 그대로인채 보존되는 것이다. 참 역설적이지만 맞는 얘기다 싶다. 그런 것처럼 저들의 사랑도 그런 건 아니겠는가? 사랑하게 됐다고 모든 것이 완벽해지는 것은 아니다. 사랑하면 또 그만큼 오해하고, 갈등하고, 미워해야 한다. 그들은 그렇게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 하나만을 가지고 헤어지게 되길 바랬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난 왠지 이들의 사랑이 일견 대견하게도 느껴지는 것이다.  사람 사는 모양은 똑같다고 해도, 다른 식의 삶은 가능한 것인가에 대해 의문을 던지는 것이 인간이다. 그리고 그것은 나이먹고 퇴화의 과정을 거치면 못하는 것이고, 가능하면 젊을 때 가능하다.  

모처럼 좋은 영화를 봤다는 생각이 든다. 이 영화는 대사가 좋은 영화다. 귀에 밟히는 대사들이 많았다. 이 영화의 후편이 나왔다고 하는데, 왠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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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11-04-21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참 좋아했던, 그래서 여러번 보았던 영화예요!

후편은 10년뒤에 만들어졌지요.
기대를 많이 갖고 보았는데, 생각보다는 별로였습니다.
이 영화가 너무 좋았기 때문에 기대가 컷던 탓인 것 같아요.
함께 본 아내는 좋았다고 하더라구요.(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요.)

stella.K 2011-04-21 14:43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형만한 아우가 없다고,
전편만한 후편이 없다는 속설을 못 깰까요?
근데 왠지 저는 보고 싶어지네요.^^

네오 2011-05-04 0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잘 읽었습니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이 영화를 2006년 7월의 디브디로 봤네요~ 11년이 지난 후의 영화라며 마음놓고 보다가 커다란 충격의 휩싸여 그 이후 아마도 이 영화를 50번 넘게 본거 같네요~ 너무나 아름다운 사랑이야기 였습니다~(대본집도 구입해서 그 대사대사 하나하나 외우고 있었던 시절이^^) 제가 지금 왜 이 영화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있냐면 지금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사랑을 카피하다>가 이 영화가 유사해서요~ 중년업그레이드버전이라고 할 만하더군요~ 이 영화도 물론 좋습니다~

stella.K 2011-05-04 11:08   좋아요 0 | URL
오, 네오님, 대단하십니다.
무려 50번을 넘게 보시다니!
이 영화 참 괜찮았어요. 그죠?
별것 아닌 것 같은데도 여운이 참 짙게 남아요.
<사랑을 카피하다>도 이런 류군요. 나중에 한번 꼭 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