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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 Happiness
영화
평점 :
상영종료
감독 : 허진호 |
주연 : 황정민, 임수정(2007) |
이 영화를 보면서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은, 사람이 건강을 잃었다는 것이 과연 꼭 불운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 영화의 남자 주인공 영수(황정민 분)은 도시에 살았던 탕아였다. 때문에 그는 간경변이란 병을 얻었고, 그병을 고치기 위해 주변을 정리하고, 시골 어느 요양원을 찾아 든다. 그랬을 때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아마도, 방만했던 자신의 삶에 대해 자책감을 느꼈을테고, 그동안 찌들었던 자신의 삶을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또한, 한적한 시골이 주는 낮설음과 어색함이 없지는 않겠지만, 차츰 익숙해지면서 오히려 시골도 사람 살만한 곳이고, 자신이 깨끗히 정화되는 느낌도 받았을 것이다. 더구나, 무슨 행운이었을까? 은희(임수정 분)를 만난 건 정말 행운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그녀가 자신의 운명을 바꿔 줄 것만 같은, 운명의 여인이었으니까. 적어도 그녀는, 과거 그가 도시의 찌든 삶을 살았을 때 같이 살았동거녀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그것만으로도 영수는 충분히 은희를 좋아할 수 있었다. 아니, 그가 병까지 얻었는데 동거녀로부터 버림까지 받았다는 건 그야말로 설상가상이었다. 그런 것을 은희가 받아 준 셈이니, 은희는 그의 베아트리체, 구원의 여인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더구나 둘은 같은 병은 아니지만 어쨌든 몸에 병을 가지고 있는 이른바 동병상련이다. 이것은 또 사람을 얼마나 친화력으로 이끄는 동력이 될 것인가?
물론 사랑이 한방에 이루어졌던 것은 아니다. 위기는 기회라고 사람들은 누누히 말하지 않던가? 하필, 요양원에서 같은 방을 썼던 간암 환자였던 석구가 더 이상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자살을 한다. 이건 또 얼마나 영수를 흔들어 놓는 충격적인 사건이었겠는가? 그랬을 때 은희는 그를 흔들림없이 잡아줬고, 위로해 줬다. 그리고 그것은 둘이 요양원을 나와 같이 사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부부처럼.
그런데 그 계기가 또 좀 생뚱맞다. 영수의 방에 거의 잠입하다시피한 은희. 마음에 있어하는 남녀가 하룻밤을 보내는 보내는 거야 당연한 건데, 우리의 요양원 원장 선생님, 은희에게 따져 묻는 장면이 좀 우습긴 하다. "너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거야?" 뭐 대충 이런 대사가 있다. 그 대사 듣고 있노라면 은근 생뚱맞다는 생각이 든다. 왠지 한사람에 의해서 저 둘의 사랑이 질 낮은 사랑으로 매도된듯 하다. 누가 보더라도 저건 섹스를 위한 섹스가 아니고, 사랑하기 때문에 섹스하는 건데 그걸 그렇게 한마디로 매도하다니. 하긴, 우리의 원장선생님, 이들의 사랑을 그동안 모르지 않았는가? 과정은 생략한 채 결과만 볼 수 밖에 없는 건 외눈박이 관심일수밖에 없다.
부부로 사는 건 또 얼마나 수고를 필요로 하는 것인가? 이제까지는 요양원에서 모든 숙식이 가능했지만 이제부터는 모든 것을 자급자족해야 한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게 됐는데 그게 무에 그렇게 힘들겠는가? 이대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영수는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행복은 오래가지 못한다. 서울에서 자신의 뒤를 봐줬던 친구와 전 동거녀가 다녀간 뒤로 영수의 마음이 차츰 변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또한 그 무렵 그는 발목 잡았던 병에서도 완치되었다. 바로 그 지점이 내가 처음에 말했던, 병들었다고 해서 꼭 불운한 것이냐고 물어보게 되는 지점이라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건강이 누구에게는 오히려 영혼의 독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영수가 병에서 완치되자 그동안 고개숙이고 있던 그의 모든 욕망이 되살아난 것이다. 그리고 방탕했던 옛 시절을 그리워하고, 의식을 했던 안했던 결국 그 시절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여기서 또 묻게 되는 건, 인간은 왜 어두운 것을 좋아하느냐는 것이다. 충분히 좋게, 건강하게, 희망적으로 살 수도 있는데 까닥 한발만 잘못 들어서도 인생은 파멸로 치닫고, 그런 자신을 돌아보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반대로 인간이 행복을 추구하려는 그것을 들여다보면 알 수 있을 것도 같다. 사실 행복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니다. 노력해야 하는 것이고, 약간의 구속도 있다. 이런 행복을 가꾸려는 노력없이는 행복은 결코 오지 않는다. 하지만 이 수고가 모든 사람에게 가능한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행복을 가꾸려고 너무 노력한 나머지 자신을 소진시켜 행복을 잊고 사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행복이란 무엇인가? 사랑하는 마음도 언제나 오래 가는 것은 아니다.
영화에서, 영수가 은희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 된 것은 아주 사소한 것이다. 이를테면, 은희가 밥을 너무 늦게 먹는다는 것. 그리고 은희의 폐를 관리하기 위해 힘들 게 내뱉어야 하는 안된 숨소리. 이 사소하고, 깊이 이해해 줘야할 것들이 그녀를 멀리하고 싶은 것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만 눌려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해 기분전환을 위해 둘은 놀이공원을 찾았는다. 하지만, 회전목마를 탄 영수를 볼 때 더 이상 행복하지 않다는 걸 알고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은희의 표정은 또 얼마나 딱한 것이겠는가?
사실 은희는 폐의 40%를 잘라낸 폐병 환자다. 그러므로 그녀는 어떠한 경우에도 숨이 차서는 안된다. 하지만 이 사실이 그녀에겐 가장 행복할 때와 가장 불행할 때 자각된다. 전자는 영수와 숙소에서 사랑을 나눌 때이고, 후자는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배신을 당할 때이다. 배신의 고통이 너무 심해 차라리 마구 뛰다가 죽길 바란다.
행복은 그렇게 이 두 남녀에겐 오래 가지 못했다. 사랑하지만 영수를 거부해야 했던 은희도, 자기 자신의 선택임에도 불구하고 함께 살던 집을 그 스스로 나와야 했던 영수도 가련하고 측은하기는 마찬가지다. 그건 제3자인 관객이 봐도 뜯어 말리고 싶은 장면이다. 하지만 영화는 이 지점쯤에서 또 묻는 것 같다. 이번엔 관객에게. 행복은 어디에 있는 것 같냐고?
1년쯤 흐르고, 영수는 폐인이 되어 어느 노숙인 수용소(?)에서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을 때, 옛 요양원 원장으로부터 은희가 곧 죽을 거라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그녀의 병상에 갔을 때 하염없이 울기만 한다.
이 영화는 인간의 행복에 대해 말하려는 게 아니다.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은 존재인가를 역설적으로 말하는 실존주의 영화란 생각이 든다. 인간은, 젊은 날에 젊음을 모르고, 사랑할 때 사랑을 모르는 존재다. 그렇듯, 행복할 때 행복을 모르는 존재다. 이 영화는 한편의 수채화 같고, 잔잔한 단편소설 을 보는 것 같다. 난 그런 허진호 감독의 영화를 좋아한다. 임수정의 힘들이지 않는 연기도 좋고.
그런데, 결론은 뭐란 말인가? 결국 행복이란 자족하기를 바라는 마음. 바로 이 순간을 즐기려는 마음. 그것이 행복은 아니겠는가? 영화를 보면서 생각해 봤다. 하지만 정말 그렇게 살기는 또 얼마나 어려운가? 매일 실감하면서 산다. 이것 자체도 행복이라고 말하면 할 말 없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