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부터 생각한 것을 이 영화에서 맞닥뜨려지는 기분이다.

사람은 무엇 때문에 사랑을 할까, 왜 하는 것일까 하는 것이다.

그 사람이 잘 생기거나 예뻐서?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단순히 그 이유라면 그 사랑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상대의 뭔가의 특징과 기능이 자신과 연관성이 있을 때 사랑은 증폭되지 않을까? 그런데 또 드는 생각은 그런 이유 때문에 상대를 사랑하는 것은 온당한 것일까? 다시 말하면 그런 이유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불온해 보인다는 것이다. 결국 그 사람에게서 그것이 없다면 사랑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결국 영혼 없는 사랑을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한다고 우긴다면, 그건 한창 달아오른 불같은 열정을 사랑하는 것은 아닐까?

 

인간은 확실히 불온한 존재다. 가끔은 사랑해선 안 될 사람을 사랑하기도 하니까. 가장 흔한 예는 친구의 애인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 영화는 바로 그런 이야기를 구한말 우리나라 가요사와 결합하여 나름 장대한 서사시를 관객에게 선사한다. 특별히 우리나라 가요에 있어서 잊힌 창법 정가를 복원했다. 아마도 이 정가는 이 영화에서 처음 접해 보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그 기교가 얼핏 중국의 경극에 나오는 창법을 연상시킨다. 아니면 일본의 게이샤들이 불렀을 법한 창법이 혼합됐으려나? 아무튼 거기서 발전해 트로트가 탄생되기도 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배경은 가수 이난영이 한껏 자신의 존재를 드높이고 있을 때다. 그녀를 좋아해 따라하려는 당시의 가수지망생들과 조선 권번 출신 기생들도 많았을 것이다. 사랑도 시대를 잘 타고 나야하는 것일까? 점점 시들어져 가는 정가를 완벽히 구사하는 소율(한효주 분)과 당시 새로운 창법에 희망이 되는 연희(천우희 분)는 잘 나가는 권번의 둘도 없는 동무다. 이난영의 작곡자로 유명한 김윤우는 원래 소율을 사랑했다. 기교로 보나 기량으로 보나 외모로 보나 무엇 하나 빠질 것이 없다. 그러나 말했다시피 정가는 지는 창법이고, 연희는 정가를 버리고 새로운 창법에 탁월한 기량을 뽐내며 그 존재감을 만천하에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혹시나가 역시나가 된다고 윤우는 연희의 노래에 매혹돼 결국 소율을 배신하고 만다.

 

윤우에게 배신당한 소율이 당시 일본 경무국장의 애첩이 되어 무소불위의 권력을 윤우와 연희에게 휘두르는데, 한을 품은 여인의 서릿발이 제법 영화의 몰입도를 끌어 올린다. 이것을 뒤늦게 알아차린 연희는 소율에게 깊은 배신감을 느끼고 헤어진 윤우를 찾으러 다친 몸으로 비오는 밤 소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길을 나선다. 그때 소율이 빗속에서 외친다. 나에겐 아무도 없다고. 우정도 사랑도 다 네가 가져갔다고. 그러자 연희는 반박한다. 네가 그렇게 된 것은 너 자신이라고.

 

보는 나는 그 지점이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너를 그렇게 만든 건 너라닛! 그처럼 무책임한 말이 어디 있는가? 친구의 애인을 뺏어 놓고. 물론 그건 온전히 연희의 책임은 아닐지도 모른다. 엄밀히 말하면 죽일 놈은 윤우인지도 모른다. 사랑할 땐 언제고 뭐 사랑할 사람이 없어 내 친구를 사랑하냐고, 사람 마음 가지고 장난하니까 재밌냐고, 내가 소율이라면 따져 묻고 싶은 대목이기도 하다. 설상가상으로 윤우와 연희가 조선을 떠나 이태리로 떠나려고 한 것을 알고, 그나마 일말의 동정심을 베풀려고 했으나 그 마음을 접은 채 연희를 더 어려운 곤경에 빠뜨리고, 결국 그 비 오는 밤 일본 헌병의 총탄 세례를 받게 한다. 나중에 윤우 역시 석방되지만 연희의 뒤를 따른다.

 

이 영화는 굉장한 비극적 서사를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 남자의 사랑의 배신이 한 여인을 얼마만한 불행으로 몰아갈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어느 날 예의 없이 한 여인의 마음에 불쑥 들어와 놓고, 떠날 때 역시 예의 없이 떠났다. 소율이 원래 그렇게 냉혹한 여인이 아니었다. 떠날 때 미안하다. 그동안 행복했노라고 진심어린 말 한마디 했더라도 그렇게까지 불행을 자초했을까? 그게 나 아닌 내 친구였더라도 말이다. 물론 쉽지는 않겠지.

 

그러나 사랑은 확실히 마법 같은 거다. 특히 소율과 윤우가 한창 좋았을 사랑은. 마법의 시간은 언젠가 반드시 깨게 되어있다. 영원한 사랑이 어디 있겠는가? 인생이란 큰 과정 속에 사랑과 이별도 거쳐야만 할 과정은 아닌지? 우리 인간은 원래 사랑도 서툴지만 이별은 더 서툴다. 그래서 이별을 해 놓고 다시 사랑은 못할 것이라고 엄살을 떨기도 한다. 내가 어떤 식으로 사랑을 했는지를 알면, 어떤 식으로 이별을 하는지도 알아야 하지 않을까?

 

사실 윤우의 사랑은 그렇게 차원이 높거나 대단한 것이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소율도 연희도 누구하나 진정으로 사랑한 것이 아니다. 사랑한 것이라면 그 두 여인의 재주를 사랑했을 뿐이다. 거기에 조선의 마음어쩌고 뇌까리는 건 자신을 포장하기 위한 연막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영화 종반에 소율이 반쯤 미쳐서 윤우가 작곡한, 사랑, 거짓말이란 노래를 읊조리는 것은 진실이 되어버린다.

 

이 영화는 여러 가지 면에서 좋은 덕목을 많이 갖춘 영화라고 생각한다. 앞서 말했던 우리나라의 잊힌 창법 정가를 복원했고, 당대의 음반계를 엿볼 수가 있으며, 무엇보다 여인의 심리를 충실하게 표현했다. 그것은 오늘 날 이기적이고 시크 함으로 무장한 도회적 여성상과는 대조적으로, 소박하고 부끄러움으로 애인에게 어필하고자 했던 여인의 마음을 잘 표현했다. 정말 20세기 초반의 모던한 여성들은 그랬을 것만 같다. 무엇보다 사랑과 우정 그로인한 냉혹과 배신 소율 역을 맡은 한효주는 별 무리 없이 잘 소화해 냈다. 하루아침에 친구와 애인을 읽고 쓸쓸히 나이 들어간 소율의 캐릭터는 오래도록 가슴에 남는다. 노래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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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오래된 영화를 보게되는 경우는 드물다.

벌써 영화의 방식이나 정서가 너무 동떨어져 있어서 보기가 버거운 것이다.

이 영화의 제작년도는 1955년. 그나마 개봉년도는 2010년이다. 

왜 이런 영화가 60년도 더 돼서 보게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솔직히 이 영화도 제목이 특이해 선택되긴 했지만 보다가 마음에 안 들면 안 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끝까지 봤다. 그것은 영화가 오래도록 잊고 있던 기독교 신앙을 전면에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날 영화에서 신앙의 부분을 다룬다는 건 아주 오래 전에 잊혀진 방식임에 틀림없다. 혹 다룬다고 해도 풍자나 희화된 것으로나 다룰뿐이다. 또 다룬다면 너무 선교 마인드로만 다룰려고 하기 때문에 관객들로부터 외면 받기 쉽다. 

 

그런데 영화는 시종 순수하면서도 진지하다. 이게 믿음이 없는 사람들한테는 되게 지루하고 진부할 수도 있는데, 신앙인들에겐 오래도록 잊혀진 신앙에 대한 감수성과 진지함을 건드려줘서 과연 오늘 날에도 이런 방식의 영화가 먹힐 수도 있겠다는 가능성마져 보게 만들었다. 영화 진행 방식은 좀 지루하다. 그냥 작가주의 영화 계열이라고 보면 좋을 것 같다.

 

 

        

                               

 

 <분노의 날>은 17세기 마녀사냥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글쎄.. 영화의 구성상 전반부는 마녀사냥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하나의 예시를 보여주는 것 같다.

 

노르웨이 한 마을에서 벌어진 한 초로의 여인을 마녀사냥의 희생양으로 삼았던 재판에 가담한 엄격한 목사 압살론. 그에겐 젊은 후처 안느가 있다. 이들 부부는 애정없는 결혼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신학교를 다니는 아들 마틴이 잠시 집을 다니러 와서는 안느와 사랑에 빠진다. 안느는 마틴을 사랑하면 할수록 남편 압살론이 죽기를 바란다.

 

그런데 앞서 마녀 재판에서 그렇게도 살기를 바랐던 초로의 여인이 죽으면서 그에 대해 저주를 쏟아 부어서일까? 또는 애정 없는 아내의 독한 말 때문일까 압살론은 아는 사람의 임종 예배를 다녀 온 후 심장마비를 일으켜 갑자기 죽고 만다. 한편 손자와 새 며느리가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을 알게된 압살론의 어머니는 아들의 장례식에서 복수라도 하겠다는 듯 새 며느리를 마녀로 몰아 재판에 넘기려 한다.   

 

이 구도를 보면서 감독은 누구를 위한 마녀재판이냐고 묻는 것도 같다. 얼핏 보면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집안 싸움처럼 보이기도 하고, 언제나 그렇듯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걸 보여주려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건 이 영화를 낮게 보는 것이고, 마녀사냥을 통해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희생 되었는가를 돌아보게 만들고, 종교의 허울로 압살론이나 그의 두 여인이 보여준 사랑과 동정없음. 사랑은 없고 권력만 있는 종교가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가져오는가를 영화는 잘 보여준다. 더구나 영화는 누가 마녀인가를 더불어 묻고 있기도 하다. 그건 역시 관객의 몫이다. 전편 <오데트>는 따뜻한 인간애를 담고 있지만 이 영화는 다소 무거우면서 묵시적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지금까지 잔 다르크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가 한 둘이 아닌가 보다. 내가 처음으로 본 영화는 뤽 베송이 연출한 것을 오래 전 보았고, 얼마 전엔 잉그리트 버그만이 언제 이런 영화에도 나왔나 호기심에 보기도 했다. 두 영화 모두는 잔 다르크의 일대기를 다뤘다면, 이 영화는 잔 다르크의 재판 과정에 온전히 포커스를 맞춘다. 더구나 영화는 무성 영화고, 대사는 그다지 많지 않으면서 음악으로 채운 당시로선 꽤 실험적인 시도를 보여주고 있다. 

 

잔 다르크가 어떻게 죽었는지 그 재판 내용은 짐작으로도 알 수 있으니 생략하고, 뭐 그런 독설과 허위로 가득찬 재판에서 신앙을 잃지 않고 꿋꿋하게 죽어간 어찌보면 순교자 잔 다르크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관점은 달리해 보면,  그녀는 남자들에 의해 죽었다고 말할 수 있다. 

 

시골출신의 조그만 소녀가 신앙 하나로 군대를 이끌고 전투에 나간다는 게 말이 되는가? 전쟁의 승패와 상관없이 그 사실 자체가 남자들로선 꽤나 굴욕적이었을 것이다. 재판 역시 남자로만 이루어져있고 온갖 중상모략이 난립한다. 그중 잔 다르크에게 동정을 보내는 이성적인 남자도 없지는 않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그녀를 이해하는 것 같지는 않았고, 그저 죽어가는 영혼에 대한 연민이 그 나머지를 채우고 있는 듯하다. 또 뱀 같이 혀를 날름거리며 어서 그녀가 죽기를 바라는 남자들의 표정이 굉장히 사실적이다. 

 

물론 잔은 화형을 면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구차한 목숨 하나 구한다고 있던 죄가 없어지는 건 아니다. 종신형이다. 그럴 바엔 위증을 한 것을 자백하고 죽어 하나님 품에 안기겠다는 것으로 바꾼 것이다. 대단한 신앙이란 생각이 든다. 

 

이렇게 감독은 종교란 관점에서 인간의 허위 의식을 까발렸다는 점에서 영화계의 종교개혁가, 존 칼빈이나 루터를 연상케도 한다. 요즘 우리나라 영화에선 종교을 희화화 하는 경향이 간혹 보이곤 하는데, 그건 안 다루느니만 못하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옛날 영화라고 무시하면 안 된다. 드레이어는 영화 철학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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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13 16: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9-13 16: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9-13 16: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9-13 16: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9-13 16: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9-13 16: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09-13 1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즐거운 추석 보내세요. ^^

stella.K 2016-09-14 13:16   좋아요 0 | URL
그래. 너도 추석 행복하게 보내라.^^

페크pek0501 2016-09-13 2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도 받으시고...ㅋ 축하드려요.

추석 연휴 잘 보내세요...

stella.K 2016-09-14 13:16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언니도 즐거운 추석 되세요.^^
 

오랜만에 다시 보았다.

상영관에서 본 기억이 나는데 그때는 프랑스 영화를 그닥 좋아하지 않을 때였고, 무엇보다 남세스러운 장면이 많아서 눈을 어디다 둘지 몰라 그저 빨리 끝나주기를 바라면서 본 기억이 난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 교회 청년부 친구들과 본 것 같은데, 거기엔 형제들도 끼어 있었다. 그래서 더 더욱 영화가 빨리 끝나주길 바랐고, 끝나고 뒤풀이에서도 영화 얘기는 많이 못했던 것 같다.

지금 같았으면 어땠을까?

 

 

지금은 카운터 테너란 음역이 있어 거세할 필요는 없게 되었지만 옛날엔 그렇지 않았나 보다. 다시 보기 시작을 하면서 문득 당대의 여성들이 파리넬리의 노래를 듣고 쓰러질 정도라면 우리나라 사극에 내시들을 그렇게 그리는 건 희화됐을 거란 짐작은 충분하다.

 

왕의 승은을 입은 건 좋긴 하지만 왕의 밤은 늘 한정되어 있고 그 외로운 숱한 밤을 왕의 여자들은 어떻게 보냈을까? 정사에는 없으나 야사에는 있을 법한 상상력이 건드려진다. 음양의 법칙에 의해  이성에 끌리도록 되어 있다고는 하나 이성도 이성 나름이고, 취향 나름일 것이다. 거세를 했어도 여성성이 많은 남성이 여성에게 어필되지 않을 거라고 누가 말하겠는가? 그러니 그 옛날 궁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다시보니 이 영화는 한마디로 예술과 에로시티즘의 절묘한 교합이란 생각이 든다. 윤리니 도덕을 따질라치면 결코 볼 수 있는 영화는 아니고, 18세기 유럽이 지금보다 성적으로 깨끗했을 거라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예술은 원래 에로시티즘을 업고 발전해 오지 않았는가. 

 

역시 영화의 압권은 파리넬리가 헨델의 '울게 하소서'를 불렀을 때가 아닌가 한다. 파리넬리가 노래를 부를 때마다 객석의 여자들이 쓰러졌다는 걸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잘 모르겠다. 근데 뭐 여자는 한 장의 편지에도 쓰러지는 위대한 존재가 아니던가. 예전에 레이프 가렛이었나? 클리프 리처드 내한 공연 때였나, 너무 열광한 나머지 속옷을 벗어 휘날렸다는 얘기가 전설처럼 전해져 오는데 18세기 여인들이 쓰러지는 건 일도 아니었겠지. 그런데 그가 노래를 부를 때 딴청을 했던 여자가 뒤늦게 감동을 받는다는 설정이 어딘가 모르게 작위적이란 느낌도 든다. 파리넬리가 '울게 하소서'를 불렀을 때는 나도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파리넬리가 진짜 역사적 인물이었는지 허구인지 의문이 갔다. 그의 형이 마약으로 아픈 동생을 낫게 해 줬다는 것도 왠지 석연찮고, 엔딩 때 파리넬리가 사랑하는 여자에게 동생을 대신하여 임신을 시켜주고 떠나는 장면도 웬지 구라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찾아 봤더니 파리넬리는 카를로 브로스키의 예명이고, 실존 인물이다. 

 

실제로 이탈리아엔 카스트라토 양성 학원이 있었다고 한다. 거세된 남성은 보통의 남자 보다 몸이 크다고 한다. 그렇다고 모든 거세된 남성이 카스트라토로 성공하는 건 아니고, 수술의 비위생적 환경 등 여러 가지 부작용으로 교황청에서 패쇄를 명령해 이후 사라졌다고 한다.  

 

영화는 프랑스 영화가 아니라 프랑스, 벨기에 등이 합작한 이탈리아 영화라고 봐야할 것 같다. 감독도 이탈리아 사람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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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07 16: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9-07 17: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09-07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창 시절 음악 수업 시간에 많이 틀어주는 영화 : 파리넬리, 아마데우스, 불멸의 연인

중고딩 시절 음악 수업 시간에 파리넬리, 아마데우스 중 한 편이라도 본 사람들 많을 걸요. ^^

stella.K 2016-09-07 17:17   좋아요 0 | URL
그렇지. 앞의 두 편은 나도 봤는데 불멸의 여인을 봤는지
안 봤는지 기억이 안 나네. 봤나? 그거 베토벤 이야기 아냐?ㅋ

cyrus 2016-09-07 18:02   좋아요 0 | URL
네. 저는 이 세 편 영화를 음악 시간에 다 봤어요. ㅎㅎㅎ

yureka01 2016-09-07 1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단 멜로디가 떠 오르네요....^^.

stella.K 2016-09-07 18:40   좋아요 1 | URL
네. 그 노래 슬프기도하고 몽환적이기도 하고,
뭔가 빠져들게 만들죠. ㅠ
 

<살인의 추억>을 다시 한 번 보았다. 개봉 당시 보고 이제 본 것이니 다시 보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다.

세상의 모든 영화는 아니어도 적어도 예전에 괜찮게 보았다고 하는 영화들은 두 번 이상은 봐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전에 보지 못했던 장면과 대사와 그것들이 주는 의미가 새롭게 다가온다.

 

<살인의 추억은>을 처음 봤을 땐 그 내용을 따라가느라 바뽰던 것 같다. 그후 난 뭐 때문인지 시나리오 대본집까지 사서 봤던 것 같다. 근데 하나도 기억에 없다. 그걸 왜 샀는지도 잘 모르겠다. 분명 유명해서 샀을 것 같긴한데...

 

이 영화를 처음 보고, 몇년 후 대본집을 샀을 때만해도 봉준호 감독이 그렇게 유명한 감독인 줄은 잘 몰랐다. 그러다 8년 전쯤  얼떨결에 시나리오 학원을 다닌 적이 있는데 그곳에서 봉준호 감독은 거의 신으로 통했다. 당시 내가 배웠던 선생님도 영화 감독이셨는데 그분은 거의 시간마다 "밥은 먹고 다니냐?"를 입버릇처럼 말씀하시곤 하셨다.

 

그땐 그 대사가 이 영화에서 씌였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 모르진 않았을 것이다. 선생님이 시간마다 떠올린 대사였는데 어찌 모를 수 있겠는가. 단지 확인을 안해 봤을 뿐. 그런데 이번에 확인하고 새삼 그 선생님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인상은 물론이고 인품이 좋으셔서 시나리오에 뜻이 있었다면 한 번 정도는 더 그 선생님에게서 배웠을지도 모른다.

 

사실 그래 볼 생각이었다. 그 선생님께 배웠던 5개월 남짓한 기간 동안 워크숍 작품 하나 

완성 못하고 종강을 맞은 게 좀 아쉬웠다. 그래서 순수 창작은 그렇고 당시 내가 좋아했던 소설 하나를 각색해서 다시 한 번 도전해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근성이 없었던 건지, 정신을 차렸던 건지 그때 이후 시나리오 공부는 더 이상 하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 선생님은 작품에 들어가게 되서 당분간 학원을 떠나게 됐다는 사이트 공지를 보았다. 그런데 또 얼마 후 선생님은 다시 복귀해 시나리오를 가르치고 계셨다. 선생님의 작품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어 본 적이 없으니 모르긴 해도 부침이 많은 영화판에서 선생님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오셨던 것 같다.

 

지금은 또 그 보다 세월이 한참 더 많이 흘렀으니 이제 영화 같은 건 감히 만들 생각을 못하시는 걸까? 그때나 지금이나 후배 감독들이 치고 올라오는데 무슨 수로...  모든 건 때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선생님도 전성기가 있으셨겠지.

 

선생님껜 차마 진지는 드시고 계시냐는 말은 못할 것 같다. 그렇게 묻는 건 예의가 아니지 않는가. 그냥 지금 평안하신지, 건강은 하신지 여쭙고 싶긴 하다. 어쩌다 이런 옛 추억을 떠올리게 되었을까?

 

봉준호 감독은 봉테일이란 별명이 있을 정도로 디테일의 완벽을 추구하는 감독으로 유명하다. 당시 선생님은 늘 말씀하셨다. 시나리오는 과학이라고. 이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그말이 실감이 난다.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아귀가 딱딱 맞는 것이 서늘할 정도다.

 

어찌보면 이 영화는 수컷의 동물적 감각에 대한 영화 같기도 하다. 다 잡은 사냥감을 눈 앞에 두고 결국 그 누구도 가질 수 없는 동물의 안타까운 포효를 듣는 것도 같다. 악에 대한 응징, 정의에 대한 수호.뭐 이런 것까지 읽히지는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화성 연쇄 살인 사건이란 모티프에서 나온 영화가 아닌가. 만일 그 사건이 영구미제가 아닌 해결된 사건이라면 영화도 달라졌겠지. 아무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너무나 완벽해서 영화의 교과서로 쓰일만 하다.

 

 

미제의 사건을 다뤄 처음 봤을 때는 그렇게 긴 영화일 거라고 생각 못했던 것 같다. 이제 보니 러닝타임이 2 시간이 넘는 영화였다.

좋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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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08-16 1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밥은 먹고 다니냐는 아마 시나리오에 없었을 겁니다. 송강호 애드립이라고 하더군요..

stella.K 2016-08-17 13:43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그런데 이미지 또 바꾸셨군요.
이 이미지가 좋은 것 같아요. 귄해요.ㅋㅋ

cyrus 2016-08-16 2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워낙 유명한 영화라서 그런지 검색하면 영화를 해석한 글들이 엄청 많아요.

stella.K 2016-08-17 13:46   좋아요 0 | URL
아직도 그런가...? 이 영화 10년도 더 된 영환데.

yamoo 2016-08-18 0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봉 감독이 유명해 지기 전에 2번 봤습니다. 제가 갖고 있던 한국 영화의 편견을 날려준 고마운 영화죠^^

영화가 뜨니, 이 영화를 분석한 책들도 엄청나더이다~ 이 영화가 들어간 평화 평론집은 쌔고 쌨구요~ㅎ

stella.K 2016-08-18 13:11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평론집이 있는 줄 몰랐어요.
그쪽엔 별로 관심이 없으니...
 

 

하도 많이 들어 본 이름이라 내가 프랑스와 오종 감독의 작품을 한 작품이라도 본 줄 알았다. 그런데 이 작품이 처음이다.

 

이 작품 그야말로 발칙하고 조금은 충격적이다. 그나마 이야기가 시종 위트함을 잃지 않아서 그럭저럭 보는대는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위트함 때문에 과연 그럴수도 있겠다 싶다. 그 그럴수도 있다는 것의 전제는 성 정체의 경계가 무너지면이란 전제다.

 

이미 유럽 같은 나라는 남성과 여성을 태어나면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선택하도록 한다고 들었다. 그러니까 남자라고 해서 남자로 자라는 것이 아니고, 여자라고해서 여자로 자라는 것이 아니다. 남자라고 해도 자신이 자신을 느낄 때 여자라고 판단되어지면 여자인 거고, 여자도 자신이 남성성이 더 많으면 남자로 살아갈 수 있다는 거다. 나로선 잘 용납이 안되는 부분이긴 하지만 이미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고 있으니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럴 경우 문제는 없겠느냐는 것이다.

 

  

서로 너무 친해서 어렸을 때 피의 맹약을 하는 것도 철없을 때 한 때 그럴수도 있다하지만 그런 건 어리석은 일이며 가급적 하지 않는 것이 좋은 것 같다. 그것은 영원한 친구없을뿐더러 자신의 운명을 올가매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너무 우정, 우정해도 언젠가 둘 중 하나는 먼저 떠나게 되어 있다. 그때 그 공허함을 무엇으로 메울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하필 죽은 친구의 남편이 여성 복장에 집착을 보이면서 자신의 성 정체성을 여성으로 하기를 원한다.

 

프랑스는 이미 성이 개방된 나라다. 동성애는 이미 자연스러운 거고, 트랜스젠더를 원할 수도 있고 그걸 굳이 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여자가 남자 복장을 하는 건 어느 정도 봐 줄 수 있더라도 남자가 여장을 하는 건 그 나라도 별로 자유롭지는 못하는가 보다. 그래서 주인공의 친구의 남편은 수시로 여자와 남자를 오간다. 친구는 이미 세상을 떠나고 친구의 남편은 자신이 여자인 것 같다고 그러고, 주인공은 친구의 남편을 좋아하는데 자신이 이 사람을 여자로 좋아하는지 남자로 좋아하는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결국 그래서 온전한 섹스에도 이르지 못한다. 

 

이 영화는 해피엔딩이긴 한데 그 과정이 극적이긴 하지만 억지스럽지는 않다. 그러니까 주인공이 친구의 남편은 온전한 친구로 받아들이기까지의 과정을 발칙하면서도 나름 유쾌하게 그렸다. 친구의 남편으로 나오는 로망 뒤리스의 연기가 일품이다. 그는 남자역을 자연스럽게 한다. 당연하다. 그런데 여자역은 더 잘한다. 남자들이 대체로 하이힐을 못 신는데 로망 뒤리스는 영화를 위해 연습을 많이 했는지 하이힐 신고도 여자 보다 더 멋지게 거리를 활보하고, 여자다운 몸짓도 능수능란하다. 나는 보수적인 사람이라 이렇게 성정체를 다루는 영화가 익숙치는 않다. 하지만 영화와 상관없이 늘 새로운 무언가에 도전하는 감독의 정신은 높이 사 줄만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은 역시 뭔가 걱정스러운 여지는 있다. 둘은 좋아서 친구가 되기도 하고 애인이 되기도 한다지만, 친구의 아이는 자기 부모를 어떻게 인식을 할까? 엄마로? 아니면 아빠이면서 엄마로? 이런 시대 아이들도 엄마와 아빠를 굳이 따로 구분하지는 않게될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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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08-12 1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종 영화 보면 알모도바르 영화와 느낌이 약간 비슷한 구석이 있지 않습니까 ?
오종 영화 나왔을 때 한동안 재미있게 보긴 했었는데..
이젠 딱히 어느 장르에 환장하고 그런 때는 지났나 봅니다..
잘 안 보게 되네요..

stella.K 2016-08-12 15:41   좋아요 0 | URL
그렇죠. 영화를 보는 것도 다 때가 있나 봐요.
저도 끝까지 보게되는 영화가 별로 없어요.
그나마 이 영화는 끝까지 보게 되더라구요.
나름 재밌었어요. 내 취향은 아니지만...^^

기억의집 2016-08-12 1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 글 읽으니 생각나는 게.. 우리 옆동네 아파트에 여장아저씨 있어요. 근데 그게.... 참 이 영화의 남자처럼 여자처럼 보이는게 아니고(전 이 영화 안 봤는데 스텔라님이 여자인척 잘 연기한다길래) 우락부락한 남자 모습 그대로 여자분장을 해요. 키도 작고 몸은 우락부락한 남자가 화장은 찐하게 하고 미니스커트에 망사스타킹 그리고 이 남주처럼 하이힐을 신고 다니는 것을 종종 봅니다. 솔직히 첨엔 받아들이기 힘들더라고요. 남자가 여장차림을 하니깐. 그런데 뭐 어쩌겠습니까. 내 이웃아저씨가 여자처럼 살겠다는데... 지금은 차라리 여성호르몬을 맞지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여성 호르몬 맞으면 우락부락한 근육이 금방 사라진다는데...맞으면 지금처럼 남자처럼 들 보이지 않을까하는. 이 생각도 차별이긴 하지만 주변 시선이 곱지 않아서. 아저씨 나이가 오십은 넘어보이는데.. 나름 본인도 정체성에 고민 많았겠지요????

stella.K 2016-08-12 15:54   좋아요 0 | URL
와, 전 영화에선 봐도 아직 실제로 본적은 없어요.
그런데 그런 사람 영화로 봐도 좀 편치는 않는데
실제로 보면 어떨까요? 기억님도 좀 괴로우시겠어요.
전 저 영화에서 저 남자 배우 좀 훈련 받았다고 생각해요.
몸짓이 여자 뺨치겠더라구요.
실제로는 기억님이 보신 사람들이 더 많을 거라고 봐요.

기억의집 2016-08-12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어렸다면 괴로울 것 같은데... 이것저것 읽다보니 저런 분들은 본투비더라구요. 그렇게 태어난 분들인데... 받아들여야한다고 생각이 들어요. 혹 워렌의 싸울 기회 읽어보셨어요? 그 책속에 워렌이 상원의원이 되기 위해 유세할 때 유세 모임중에 겉보기에 만만치 않아보이는, 공화당같이 보이는 한 백인남자가 트렌스젠더에 대해 물은적이 있어요. 그러자 워렌이 트렌스젠더라도 우리 사회에서 받아들여야한다고 평등할 기회를 줘야한다고 그런 식으로 말해요. 워렌은 이 남자가 공화당원일 거라 생각하고 자기를 공격하는 말을 하려는 줄 알았는데 그 남자가 자기 아들이 트렌스젠더라고 그런 말 해줘서 고맙다라는 대목이 나와요. 저는 진화생물학책도 드문드문 읽어서인지 지금은 받아들이게 되더라구요....

stella.K 2016-08-12 16:19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하긴 우리가 그들을 뭐라고 할 권리는 없죠.
하지만 전 아직 그런 쪽으론 아는 바가 없어선지 솔직히
그들을 이대로 봐줘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게되요.
취향의 문제라면 어떻게 못하는데 일종의 호르몬 같은 병의 문제라면
치유가 가능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동성애도 권리를 주장하긴 하지만 또 동성애서 다시 돌아가는 사람도
있다고 들었어요.
영화에서도 보면 의사를 찾아가 보라고 설득하기도 하죠.
그런 걸 보면 프랑스도 완전히 성개방이 된 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다양함을 존중해야 한다고는 하지만 그 다양함을 받아들이기엔 버거울 때도
있어요.

기억의집 2016-08-12 1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화관련책 읽어보면 호르몬조차 명령할 수 있는 유전자의 명령 같더라구요.

yamoo 2016-08-18 0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꼭 보도록 하겠습니다! ㅎ
영화 `플루터에서 아침을`이라는 영화가 있지요...명작입니다.

영화를 안 봐 정확하지는 않지만 스텔라 님의 영화 리뷰만으로는...저 로망 뒤라스는 CD를 연기한 듯합니다. CD는 트랜스젠더와는 완전 다르죠. 자신의 성 정체성을 정확히 인식하면서도, 이성(여성)의 복장을 탐하는 성향을 일컫습니다. 여자 옷을 입으면 완벽히 여성처럼 행동하지요..ㅎㅎ 우리나라에도 이런 성향을 가진 사람이 1만 여명을 헤아린다고 합니다..ㅎ

stella.K 2016-08-18 16:40   좋아요 0 | URL
아, 맞아요. 저도 예전에 플루토에서 아침을` 본적 있어요.
보기전엔 약간의 선입견이 없지 않았는데 의외로 잘 만들어서
재밌게 본 기억이나요.

진짜 그런 사람이 있더라구요. 그걸 CD라고 하는군요.
맞아요. 로망 뒤라스가 그 연기를 한 거죠.
그런데 남성적 매력이 물씬한데 여장만 하면 여성역을 너무나 잘 소화하더라구요.
재능있어요.
우리나라에도 적지 않군요. 하여간 야무님은 모르시는 것이 없으십니다 그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