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된 죽음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8
장-자크 피슈테르 지음, 최경란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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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블리오 문학이란 장르가 있다고 한다.  

이를테면 책을 소재로한 문학을 일컫음인데 당장 생각나는 대표적인 작품을 꼽자면 '장미의 이름'이 아닐까? 그밖에도 '꿈꾸는 책들의 도시'나 '바람의 사나이'등이 이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작가의 작품은 뭐가 있을까? 오래전에 <TV 문학관>에서 김탁환의 '서러워라 잊혀진다는 것은'의 원작을 방영한 것을 최근에 본적이 있는데 정말 재미있게 봤다.  

솔직히 우리나라가 책을 참 안 읽는 민족 중 하나라는데 과연 이런 고급한(?) 문학을 구사하는 작가가 있을까 싶었는데 보면서 과연 김탁환이다! 찬탄을 자아냈다.(그도 그럴 것이 드라마는 좀 아쉬웠다.) 그후 이걸 책으로 읽어 볼까해서 인터넷 서점 사이트에서 찾아 봤더니 절판되었다고 한다. 언제나 하는 말이지만 우리나라는 알려진 책 보다 안 알려진 책들이 너무 많고 이미 알려졌더라도 그것의 책으로거의 생존은 참 짧은 것 같다. 그래 어쩌자고 그 책이 절판이 되었더란 말인가? 정말 서럽다. 잊혀진다는 것은!(물론 헌책방 같은데 가면 아직은 구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지만) 

이야기가 약간은 다른쪽으로 흘러갔다. 이번에 읽은 이 책 '편집된 죽음' 역시 상당히 재밌고 흥미롭게 읽힌다.  

이야기는 영화를 보는 듯하고 더구나 스릴러적 요소를 가미하고 있어(작가는 스릴러가 아니라 서스펜스라고 하긴 하지만) 다음 장을 기대하게 만든다.  

게다가 이건 복수극이다. 과연 이런 완벽한 복수극이 있을 수 있을까 싶게 기가막힌 운도 따라준다. 너무 완벽해 현실에선 존재할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물론 그래서 사람의 로망을 채워주기도 하지만. 이 채울길 없는 인간의 로망을 책이나 영화가 채워주지 않는다면 무엇이 채워 줄 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잘난 사람의 복수는 쾌감이 반감이 된다. 이 책의 주인공처럼 어딘가 찌그러져 있고, 열등감을 가지고 있으며, 뭔가 당하기만 하는 인물이다. 그런 사람이 뭐든 완벽해 보이고 잘나 보이는 사람한테 하는 복수가 좋아 보인다. 왜냐구? 대리만족의 쾌감이 있으니까.  

세상에 잘난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평범하거나 평범 이하의 삶을 사는 사람이 훨씬 많은데 문제는 그 몇 프로 되지 않는 인간이 평범 내지는 평범 이하의 사람을 가지고 놀고 짓밟는다는 것이다. 그랬을 때 자극을 받는 것은 그들의 정의감이다. 정의란 이름으로 그 잘난 사람을 응징하는 것이다.  

사실 엄밀히 말해서 이 책의 주인공도 우리가 볼 때 꼭 평범하다고는 할 수 없다. 그가 가진 기술 중에 '위조문서 전문가'가 포함되어 있다. 아무나 갖는 능력은 아니지 않는가? 그러고 보면 이 놈의 '평범'이라는 것도 절대적인 것은 아니고 상대적일 뿐이다.  

사람은 어떤 막다른 골목이나 위기의 순간에 자신이 가진 능력을 새롭게 발견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 같다. 주인공 에드워드도 애인 야스미나가 죽은 것이 그의 친구이자 적인 니콜라의 짓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면 어떻게 자신에게 복수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을까?  

역시 이 작품의 압권은 주인공의 복수의 과정이다. 유려한 심리 묘사와 책의 위조 과정이 마치 영화를 보듯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렇지 않아도 어느 영화 감독이 영화화 했다고 하는데 과연 그럴만하다 싶다. 기회가 되면 영화로 보고 싶은데 아직 영화로 보기엔 다소 요원한듯도 하다.(언제 방영했었나? 아는 분은 연락 바람이다.) 

그런데 이 작품의 단점을 굳이 꼽자면 허리우드 냄새가 나도 너무 많이 난다는 것이다. 프랑스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적 글쓰기 보단 아예 허리우드적 글쓰기를 작정한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작품은 다분히 나르시즘적이다.(차라리 아예 작가를 나르시스트라고 해야하려나?)  

솔직히 나는 친미도 아니고 반미도 아닌데 영화나 글쓰기만큼은 허리우드적이 되는 것을 지극히 경계하고 싶은 사람중의 한 사람이다.  

물론 세계적인 것이 무엇이냐는 것에 나름 고민을 갖는 건 나쁘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허리우드적인 것이 꼭 세계적인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런데 왜 소설이나 영화가 허리우드를 쫓을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오히려 세계화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이것은 내가 시나리오를 공부한 탓이기도 하다. 시나리오를 공부해 보라. 허리우드 작법을 거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나는 그것의 좀비가 되어 이 모양이 되는 것이다. 아는 것이 병이라고나 할까?ㅋ)  

그래도 뭐 일단 '재밌다'는 점에선 이의를 달 수 없을 것 같다. 그렇다고 '허리우드표는 재밌는 것' 또는 '재밌는 건 허리우드' 뭐 그런 공식이라면 문제는 여전히 남을테지만 어쨌든 재밌는 건 사실이다.  

왜 더운 여름엔 이런 류의 소설을 읽으라는 건지 이제야 알 것도 같다. 강추할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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