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젊은 날의 숲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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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에게 있어 화두는 늘 '남자'였다. 

가끔 그런 책을 만난다. 작가가 남잔데 작품 속 주인공이나 화자를 여자로 쓰는 경우. 또 그와 마찬가지로, 작가는 여잔데 남자로 쓰는 경우. 그럴 경우 난 그 책을 의심부터 하고 본다. 여자를 잘 알고 쓰는 걸까? 또는 남자를 잘 알고 쓰는 걸까? 그냥 주인공을(또는 화자를) 그렇게 산정할 뿐 그것이 꼭 서로 다른 성을 잘 알아서 쓰는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성(性)을 바꿔서 쓰는 것일까?  그럴 때 작품의 완성도는 얼마나 더 할 수 있는 것일까?

늘 남자에 관해서만 쓰는 것으로 알려진 작가가 나를 놀래켰던 작품이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언니의 폐경'과 '화장'이란 작품이었다. 그 두 작품을 읽으면서 작가 김훈이 여자에 관해서 쓴다는 것이 놀라웠고,  여자를 이렇게까지 세밀하게 쓰는 것에 다시 한번 놀라웠다. 그런 작가가 이 작품에서 또 한번 여자를 등장시켰다.  그런데 그것이 장편이어서 그럴까? 앞의 두 작품은 군더더기 없는 단편인데 반해, 이 작품은 뭔가 모르게 버거워 보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말하자면,  세밀하지만 다분히 우회적이고, 여성성을 대표하는 감성적인 면이 생각보다 그리 많이 드러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전작들은('칼의 노래'나 '남한산성'의 경우)  초라한 남자의 공허하고도 처연한 울림이 있었지만, 이 작품은 뭐랄까 결코 뜨겁게 덥혀지지 않은 아니 다 식어버린 밥상을 대하는 듯한 느낌이랄까?  

작가를 떠올리면 늘, 가부장과 마초를 떠올리게 된다. 실제로 그는 가부장이란 말은 인정하지만, 마초는 아니라고 못 박았다.  사실 '가부장'이란 여성에겐 다소 권위적이고 위협적일수도 있지만 그런 요소를 제거한다면, 자신의 가정을 지키고 다스린다는 신사적 의민데 어찌 그것을 '마초'와 견줄수있냐며 정색을 했다. 마초는 남자적 허세가 아니겠냐며. 듣는 순간 그도 과연 맞는 말이다 싶다. 하지만 이 작품을 비롯해 그의 일련의 작품들은, 나라를 지키지 못하는 또는 가정을 지키지 못하는, 나약하고 회의하는 남자다. 그리고 그것이 김훈 문학의 화두란 생각이 든다.  

관조적인 문체 

이 작품 역시 남자를 비껴가지 않는데, 이 전의 작품들은 남자가 화자가 된데 반해 이 작품에선 여자 조연주가 화자가 됐다는 것은 김훈 문학에 변화가 있다는 말일 것이다.  사실 앞서 두 편의 단편은 여자가 여자를 말하고(언니의 폐경), 남자가 여자 대해 말하는(화장) 형식을 취하지만, 이 작품에선 여성의 시선으로 남자를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늘 그렇듯 관조적이다.  김훈의 문학은 늘 그랬다.  여타의 작가들은 인간의 욕망을 한 자락 펼쳐 보이고 그것을 끝간데 없이 밀어붙이다 산화해 버리거나 또는 어느 지점에선가 돌이키고 선회하고마는(그것은 분명 작가 자신과의 타협일터)   지점에서 끝나 버리는데, 김훈의 문학은 그렇지가 않다. 오히려 인간의 욕망을 산화해버린 그 지점에서 시작하고,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실패한 그 지점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인간은 얼마나 나약하며, 한 주먹거리도 안 되는 거냐고 거듭거듭 말하고 있다.  하다못해 그의 소설에선 그 흔한 성애 장면 조차 나오지 않던가, 나오더라도 아주 건조하게 나올뿐이다 (칼의 노래). 이 작품에선 분명 누군가와의 성교로 아기를 임신했을텐데도, 여자는 끝내 임신한 채로 자살한 것으로 나오는 한 인물이 있다.   그처럼 그의 일련의 소설들엔 여자의 자리는 여간해서 없다. 사실 생각해 보면 여자에 대해 썼다는 '언니의 폐경'이나 '화장'도 정말 여자에 대해서 썼을까? 이쯤되면 의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  '언니의 폐경'은 여자의 싯점에서 여자에 대해 쓴 것처럼 보이지만 폐경에 대해 썼다는 점에서 여성의 끝자락에 관해 쓴 것이고, '화장'은 남편의 싯점에서 자기 아내를 통해 자신의 지난 삶을 반추하는 식이다. 그러니 그 외피만 달라졌을 뿐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이 작품 역시 그렇다. 여기선 단 두 여자만이 나올뿐이다. 화자인 조연주와 그녀의 어머니. 그나마 조연주는 직업상 전방부대에 예속했다. 거기서 남자들 특히, 안실장과 그의 아들 신우를 관찰하고, 죄수의 신분인 아버지를 생각한다.   어머니는 귀찮으리만큼 연주에게 전화를 해 아버지에 대한 끊임없는 보고로 일관한다. 그리고 그 안엔 아버지를 받아들이지도 못하면서 내치지도 못하는 어머니의 우유부단한 심정이 작품 전반에 건조하게 나타나 있다. 즉 작가는 이 두 여자를 통해 끊임없이 남자를 관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처음에 제기했던 '세밀하지만 다분히 우회적'이라는 건 어찌보면 그럴수밖에 없는 장치처럼도 보인다.  다시 말하지만 이 작품엔 여성이란 애초부터 자리하고 있지 않으니까 여성성도 없는 것이다. 또한 작가 자신이 말했던 것처럼, 여자를 모르기 때문에 감성적이지도 않다.  그러므로 김훈의 문학은 '남자의 문학'인 동시에 '관조의 문학'이다.    

결핍에서 완성으로       

애초에 작가가 작품 속에서 여자에게도 어떤 식으로든 의미를 부여했더라면 그의 문학은 생명을 낳았을지도 모르겠다. 원래 여성에게는 자궁이 있다는 점에서 생명의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더라도 남자와 여자가 합일을 이루었을 때 생명은 탄생한다고 하지 않는가?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작가는  여성에겐 그다지 큰 의미도 역할도 주지 않았다. 생명 보단 죽음을 말하는 게 더 익숙하고, 충만 보단 결핍을 말하는 게 더 익숙해 보인다.  

그 부자에게 아내이며 어머니인 여성의 존재가 없기 때문이었을까. 아마 그렇기도 하겠지만, 그 닮은꼴 부자의 결핍은 생명으로 태어난 것들의 근원적인 결핍이어서, 본래부터 결핍 속에서 태어나서 거기에 익숙해진 사람은 그 결핍에 젖어서 살 수는 있지만 그것을 감지할 수는 없었고, 그들 부자의 결핍은 그 결핍을 인식하는 능력조차 결여된 결핍이었다. 그리고 한 개인의 생명이 아니라, 거기서부터 유전적으로 파생되어나온 또다른 생명이 그 결핍의 운명을 답습함으로써, 그 결핍은 완성되어 있었다. 그것이 그 아버지와 아들의 닮음이었다.(241p) 

 하긴, 꼭 김훈 작가가 아니더라도 세상의 대부분의 작가는 희망 보단 절망을 얘기하고,  기쁨 보다는 고통을, 드러난 것 보단 드러나지 않는 것을 말하기 좋아한다. 그것은 거의 모든 작가의 생래적 특성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왜 글을 그렇게 쓰냐고 묻지 않는다. 싫으면 안 읽으면 그만인 것이지 그들은 그들 나름의 방법으로 자신의 문학을 완성해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김훈 작가 역시도 자신만의 방법으로 문학적 세계를 완성에 가는데, 그야말로 그는 결핍에서 충만으로 이루어 가는 것이 아니라, 결핍 그 자체를 완성해 가는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어찌보면 어줍잖은 충만, 명확하지 않은 확신, 불안한 행복, 그런 얼치기적 언어로 된 글은 쓰고 싶지 않은 그의 자존심 같은 것은 아닐지? 그런 것 보단 작가가 알고 깨달은 결핍, 공허, 허무 등을 말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그것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작가도 독자도.

작품, 다르게 보기 

사실 작가의 작품들은 뛰어난 문체에도 불구하고, 허무주의를 짙게 깔고 있어서 읽고나면 한동안 우울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럼에도 매번 그의 새로운 작품이 나올 때마다 다시 읽기를 감행하지 않으면 안되게 만든다(그것은 왜 그런지 알 수 없으며, 남자 보단 여자가 더 읽기를 스스로에게 강요하지 않을까?).  중독이다.  그렇게 읽으니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작가는 왜 그리도 남자 이야기만을 하는 것일까? 물론 남자이기 때문이라고 간단히 말해버릴 수도 있겠지만, 이쯤 작품을 대하고 보니 남자를 이해하는 새로운 시각이 열린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남자 이야기 또는 아버지 이야기를 할 때 일정한 패턴 내지는 이데올로기가 있다는 것이다. 작가는 확실히 이것의 또 다른 측면에서 남자를 이야기 하고, 아버지를 이야기 하고 싶어했던 것 같다.  왜 남자는 힘, 영웅 등 지구를 떠받히는 존재로 그리느냐는 것이다.  남자도 얼마나 연약한 존재고, 모든 위험을 할 수만 있으면 피하며, 자유롭고 싶어하는지를 작가는 매번 새롭지만 일관 되게 조명해 왔다. 그것은 남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마음 이기도 하다.  

나 역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아버지의 빈자리를 느낄 때마다 느꼈던 건 가정과 사업을 이끌어가시느라 얼마나 힘드셨을까가 무시로 생각 났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아버지의 모습은, 내가 어렸을 때 전날의 숙취가 채 가시지 않은 얼굴로 우연히 마주치게된 아버지의 기도하는 모습이었다. 물론 아버지가 가끔은 만취 상태인 경우가 있고 그런 때가 되면 기도는 좀체로 하시지 않는데, 그날따라 무엇 때문인지 그러고 계셨던 것이다. 뭔가 큰 일이 아버지에게 닥친 것 같았다. 하지만 차마 물어보질 못했다. 그때 이후 아버지는 다시 평정을 되찾으신 것으로 봐서 위기는 넘기신 것 같기도 한데, 그런 때가 그 이후에도 몇 번은 더 있었던 것 같다. 그럴 때마다 모든 것을 팽개치고 싶으셨던 때가 얼마나 많으셨을까? 남자에게는 저마다의 동굴이 있다는데 결혼과 동시에 그 동굴이 흔적없이 사라지고  가장의 책임만이 남는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 책임을 아는 남자는 그렇게 많지는 않아보인다. 어떻게 해야하는지는 배우지 않아도 자연히 안다고 생각한다. 자식을 낳아보면 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을 몰라 처음부터 가장이 되지 못한 아버지들이 얼마나 많은가? 

남자와 여자가 합일의 경지에 이르면 생명을 잉태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것이 얼마나 불안한 것이고 결핍된 것인가? 결혼은 남자와 여자가 만나 완성을 향해 나가는 거라고 하지만, 무엇을 위한 완성이고, 어디로 가는 완성인지 모른다. 설혹 완성을 향해 간다고 해도 그 과정에서 어느 한쪽이 먼저 죽게 되어 있고,  같이 살비비고 살면 남성성과 여성성이 마모가 돼 완성에 이르지 못한다. 그래서 이 작품의 경우, 어머니는 아버지를 이인칭으로 보지 않고 낮선 벌레 보듯하며 시도때도 없이 딸에게 전화해 그 관찰한 바를 보고하고 있지 않는가? 이토록이나 삶은 스산한 것이다. 그렇게 애정없는 결혼 생활에도 아버지가 돌아가니 어머니가 불쌍하다고 운다. 깨달음은 죽음의 순간에 온다더니 아버지가 불쌍한 존재임을 어머니는 그때 깨닫는가 보다. 이렇게 작가의 결핍을 완성시키며 나가고 있고 그것은 아직 끝나지 않는 현재진행형이다. 

작품 사이 사이 나오는 곤충과 꽃들에 관한 이야기가 재밌다. 또한 아버지의 장례 장면중 화장해 타고난 뼛가루를 고슬한 밥에 소금과 함께 묻혀 새의 먹이로 주는 사찰 의례가 독특하고 새로웠다. 작가의 이런 공부와 노력이 더해져 나름 작품을 읽는 맛이 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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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0-12-28 2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핍을 인정하고 그걸 무엇으로 채우려고 애쓰지 않는 것,
그게 김훈의 글에 늘 느껴져 스산한 풍경을 떠올려줍니다.
저도 별 넷으로 했지요.^^
연말 무던히 잘 보내고 계신지요.
갈수록 가고 오는 시간에 무덤덤해짐을 느껴요.ㅎㅎ

stella.K 2010-12-30 14:17   좋아요 0 | URL
이번 작품은 좀 그랬지요?
반복적인 문장도 많고.

그러게요. 제가 프레이야님께 좀 소원했죠?
죄송해요.ㅜ

양철나무꾼 2010-12-30 0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님도 이 책에서 그의 결핍을 읽으셨군요~^^

stella.K 2010-12-30 11:04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그런데 이 작품을 보니까 비로써 그의 문학이
하나로 정리가 되더라구요. 결핍의 문학이었고, 관조의 문학이었다는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