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프 2
캐서린 스토켓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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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좀 당혹스럽다. 이게 다인가 싶어서. 도대체 뭘 말하려고 하는지 잘 모르겠다. 뭔가를 보여줄 것 같은데 뭐가 수줍은 것인지, 아니면 뭔가의 진실을 은폐하고 있는 것인지 보여주다가 말고 자꾸 지엽적인 것에 이야기를 돌려 원점을 흐리고 만다. 이야기가 쭉 진행될 것 같으면서도 그 다음 장에선 또 다른 사람의 새로운 싯점을 보여주고 있어 서서히 짜증도 나고 한숨도 나왔다. 그렇다고 스키터와 아이빌린과 미니가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냐면 그렇지도 않다. 각각의 장은 이들 세 사람의 싯점을 서로 교차하며 보여주기는 하는데, 이 셋의 특별한 차이를 모르겠다. 이를테면 한 사람안에 여러 자아가 있어 그냥 혼자 이 사람도  됐다, 저 사람도 됐다, 혼자 독백놀이라도 하는 것 같다. 마치 다중인격인 것처럼.  

게다가 문체 또한 어쩌면 그리도 작위적인 것인지? 도대체 이런 문체는 원작자가 원래 설정한 문체를 그대로 옮긴 것인지, 아니면 번역하는 과정에서 번역자가 의도한 문체인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이런 문체 또한 책 읽기에 방해가 되서 독서의 지루함을 가중시켰다. 예를들면 이런 것이다. 이 작품은 세 여인의 이야기를 번갈아가며 보여주는데, 이야기는 일인칭 화자의 싯점에서 풀어간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시도야 이 작품이 처음은 아니다. 그전에도 다른 작가들도 필요에 따라 그렇게 한다. 그런데 이런 작품은 화자인 '나'가 주관적인 화법으로 풀어 나가는데 이 작품은 특이하게도 객관적 싯점에서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일종의 현재진행형조로. 이를테면 TV 드라마에서 가끔 보는 소재이기도 한데, 등장인물이 대사를 할 때 "나는 ...를 무척 좋아해" 이렇해도 될 대사를, 일부러 어리고 유치해 보이려고 극중 자신의 이름을 넣어서 그걸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과도 맥락을 같이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내가 보는 그것. 내가 대하는 그 사람이 전부인데 이것을 보는 또 다른 내가 그런 나를 또 주시하고 있는데 이런  지문들이 수두룩하다는 거다. 현재진행형적 문체다 보니 마치 모든 것이 의도된 양 보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예 전지적 싯점으로 쓸 일이지 뭐 때문에 이런 상투적이고 작위적인 문체를 쓰는 것일까?  

그런데 솔직히 고백을 하자면, 나는 요즘에 쏟아져 나오는 소설을 선듯 골라 읽기가 겁이 난다. 그것도 잘 썼다는 작품일수록 그것에 대한 두려움이 더하다. 도무지 나에겐 이해도 안 되고, 뭐 이런 게 다 있나 싶은 작품들에 거의 열광하는 요즘 독자들을 이해할 수가 없다. 도대체 뭘 보고 그러는 걸까? 과연 이것이 슬프게도 구세대와 신세대를 나누는 척도가 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아니면 내가 요즘 작품에 불감증인 건지, 아니면 그 작품을 읽은 다른 독자들이 조그만 감동에도 쾌감을 느끼는 감정체계가 발달이 되있는 것인지도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뭐 남이 어떻게 느끼든 그건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작가다. 현대 소설에 있어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영화적 글쓰기다. 어떤 소설들은 정말 영화의 시퀀스를 보는 것 같이 그 분할을 기술적으로 잘 나눠놨다. 그리고 이들 대부분은 무슨 믿음인지 아예 영화화 될 것을 의식하고 쓰는 작가도 많이 있다. 하지만 난 이런 작가들이 참 우습다. 한마디로 요즘 작가들은(남의 나라 작가들이나, 내 나라 작가들이나) 미안하지만 하나 같이 형식주의에 빠져있다는 생각이 든다. 소설이 무엇이냐는 정의도 없이, 무조건 재미만 있으면 다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렇게 형식만을 추구할뿐 어떠한 주제도, 교훈도 뚜렷하지가 않다. 그러다보니 독자들은 어느 때부턴가 감동과 재미를 혼동하는 것 같다. 이 작품은 누구에겐 재미를 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나 같은 경우는 재미도 없었지만). 그러나 어떠한 주제도, 교훈도 찾아 볼 수 없다. 이를테면 난 그런 책을 원한다. 우리가 고기를 먹을 때 살코기만 먹는 것은 그 고기 맛을 충분히 즐기는 것이 아니다. 단단한 뼈야 씹기가 어렵겠지만 가끔 "오도독, 오도독" 하고 뼈 씹히는 맛이 있어야 그 고기의 맛을 충분히 느끼는 거다. 소위 소설도 그런 맛이 있어야 한다. 이책을 보라. 거창하게도 두 권으로 나와 뭔가 굉장한 것을 줄 것  같지만 "오도독"하며 건질 뼈과 살코기가 있는지? 

무엇보다 이 작품은 '블론드'하다. 즉 '백인 취향의 백치미'란 말이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과연 이 작품에 열광할 필요가 있을까? 이야기의 발상부터가 허무맹랑하지 않은가? 1960년대 아직도 흑백인종차별이 팽배한 시절, 기자 아니면 작가가 되길 소망하는 스키터가 뭘 가지고 회사의 상사와 독자의 눈을 사로잡을 이야기를 써 볼까 고민하다, 두 유색인 여인(미니와 아이빌린)의 이야기를 써서 세상에 꼼수를 던진다는 말 아닌가? 그걸 두고 용기라고 할 수 있을까? 그걸 정의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이 진짜 용기가 돼고, 진짜 정의가 되려면 스키터는 그 보다 오래 전부터 유색인들에 대한 사랑과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저 관계의 친밀함이나 호기심 정도만 가지고는 안된다. 그래서 백인들이 유색인을 멸시하고 차별할 때마다 그 마음에 저항의 마음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끌어 올릴 수 있어야 했다. 하지만 고작 화장실을 따로 쓰는 것에 대한 문제 의식 정도만으로 유색인에 대한 글을 쓰겠다는 의지는 솔직히 철부지의 모험이지, 의식있는 사람이 세상을 바꾸겠다는 의지로는 보이지 않는다.  

더구나 스키터가 그 두 유색인 여자들에 대해 무엇을 어떻게 썼는지가 구체적으로 나와있지가 않다. 그런 상황에서 어쨌든 책이 나오고 독자들의 반응을 예의주시하다 이야기는 어처구니 없게도 끝나 버린다. 도대체 뭐하자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그런 문체의 악재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뭔가가 나와줄 줄 것을 기대하고  끝까지 완독을 결행했지만, 결과는 완전 참패다. 결국 이야기는 처음부터 그렇게 모험(그것도 반쪽짜리)에 대한 어설픈 해프닝 정도만 보여줄 작정이었나 보다. 그리고 시대가 시대이니만치 마르틴 루터 킹과 존 케네디의 암살을 양념으로 넣어 구색 맞추기를 했다.  

한마디로 난 이런 식의 백인우월주의가 마뜩치 않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오래 전 보았던 <파워 오브 원>이란 영화를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물론 그 작품은 영화적으로 봤을 때 흠잡을 때 없는 작품이긴 하다. 그러나 조금만 눈을 새롭게 떠보면 그 영화는 백인우월주의의 또는 영웅주의의 또 다른 작품이다.  왜 백인만이 유색인종을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더구나 이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1960년이고, 그 보다 100여년 전에는 링컨의 노예해방을 위한 선언과 전쟁이 있었던 즈음이기도 하다. 링컨의 정신은 높이 살만하지만, 과연 노예해방은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이 맞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노예해방의 남북전쟁은 사실 알고보면 흑인 노예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저 그들을 사이에 둔 힘과 힘의 전쟁이었단 생각밖에는 들지 않는다. 그렇지 않고서야 100년이 흐른 상황에서도 유색인들은 신분은 자유로워졌을지 몰라도 사회적 제약은 전보다 더 심해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가정부가 고작이 아니겠는가? 게다가 남편은 술주정뱅이고, 화장실도 마음대로 쓸 수 없다. 그것은 그들에겐 또 다른 구속이 있었다. 그것은 신분 또한 자유하지 못하다는 걸 반증하기도 한다. 

사실 진정한 노예해방이 일어나야 한다면 그들의 정신과 복지 또한 해방이 일어났어야 한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링컨은 무턱대고(?) 무력으로 노예들을 해방시켜 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가르치고, 일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고, 군사 훈련도 시킨 후 그때야 비로소 전쟁을 하든 해방을하든 했어야 한다고 본다. 물론 돌이킬 수 없는 먼 과거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 결과 신분의 해방만 주었을뿐 유색인들은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가지도 못한 채 약탈을 일삼거나 새로운 노예계약에 참여하는 꼴을 면치 못했던 것 아닌가?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건, 지금까지 유색인에 대한 백인의 인종차별을 그린 작품이 이전에도 있을진데 같은 백인이 쓴 작품과 흑인이 쓴 작품이 다를 것이라는 것이다. 예를들면 알렉스 헤일리의 <뿌리> 같은 경우, 원작이나  영화나 그 리얼리티가 선명하게 살아있다. 그런데비해 백인이 아무리 이 문제를 다루더라도 그건 늘상 앞서 말했던대로 백인우월주의나, 영웅주의 형식에서 벗어나질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블론드 하고, 정말 묘한 조합이다. 

그런데 진짜 모르겠는 건, 이 50년전 이야기가 오늘 날 2011년과 무슨 연관이 있어 보인다는 건지 모르겠다. 인종차별은 그때나 지금이나 늘 있어 온 거고, 문체의 현대성을 들어 굳이 이 작품의 위대성을 강조하는가 본데, 이런 주례사도 알고 보면 다 백인들이 쓴 거 아닌가? 과연 작가가 등장시킨 유색인들도 이 주례사에 동의했을지 의문이다.   

자, 이만하면 난 이 작품에 대해 감동할 수 없는 이유를 다 밝혔다고 생각한다. 그러고도 이 작품을 사서 읽고 감동할 독자가 있다면 그건 온전히 그 사람의 몫이긴 할 것이다. 난들 어쩌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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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12 12: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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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12 13:0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