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을 오래 전 읽은 적이 있다. 그런데 영화로 나왔다기에 엊그제 챙겨 보았는데 어쩜. 내용이 정말 생소했다. 이런 내용이었어...? 새롭다. 이 책을 읽었을 때는 작가가 한 자 한 자 찍어내듯 글을 쓴 것 같다고 하면서 극찬을 아끼지 않고 별점도 후하게 5점 만점에 5점을 줬더랬다. 그런 내가 영화는 처음 보는 영화인 양 하다니. 나의 기억력도 점점 퇴색해 가는가 보다.
알고봤더니 영화는 청소년의 왕따에 의한 자살과 남겨진 사람들이 어떻게 변화해 가는가를 상당히 밀도있게 그렸다. 처음엔 내용이 칙칙하고 어두워 그다지 볼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것은 또 내가 말짱한 정신이 아니어서일 수도 있다. 맑은 날 맨정신으로 다시 보니 아, 정말 괜찮은 영화구나 싶다.
등장인물의 대삿발이 예술까지는 아니어도 정말 입에 착착 달라 붙는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천지가 죽고 만지와 어머니만 식사하는 자리에서 만지가 엄마는 벌써 천지를 잊은 것 같다고 했을 때 엄마 역의 김희애가 받아치는 대사가 참 그럴싸 하다. "가슴에 묻어? 못 묻어. 콘크리트를 콸콸 쏟아붓고, 그 위에 철물을 부어 굳혀도 안 묻혀. 묻어도, 묻어도, 바락바락 기어 나오는게 자식이야. 미안해서 못 묻고, 불쌍해서 못 붇고, 원통해서 못 묻어." 하는. 나 같으면 뭐라고 했을까? 니가 나 되 봤어? 엄마 마음이라는 게 뭔지 넌 아직 엄마가 아니어서 모를 거다. 그런 널 데리고 무슨 얘기를 하겠니? 하는 하찮은 말로 딸의 입을 막지 않았을까?
그런 대사는 또 있다. 보신각에서 화연 엄마에게 일침을 가하는 장면. "사과하실 거면 하지 마세요. 말로 하는 사과는요 용서가 가능할 때 하는 겁니다." 더구나 상대가 받을 생각이 없는데 하는 사과는 의미가 없다고 했던가? 나는 사과했는데 저 여편네가 안 받아줬다고. 말하면 그만인 사과는 안하느니만 못하다는 뭐 그런 의미 있는 대사.
영화를 보면서 친구 사귀기 정말 어려운 세상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옛날엔 유유상종이랬다고 비슷한 사람끼리 친구 먹기도 좋은 세상이었는데 왜 천지가 사는 세상은 왜 그리도 친구 사귀기가 어려운 걸까?
내가 천지만할 땐 한 반에 인원이 6,70명이었더랬다. 그 안에선 일진이 있어도 크게 부각이 되지 않았고, 친구 선택의 폭이 나름 넓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은 한 반의 인원이 3, 40명을 넘지 않고 경쟁에 내몰리다 보니 친구 사귀기가 쉽지 않다. 더구나 콩 뛰고 팥 뛰듯한 사춘기 시절에 마음을 터놓을 친구를 사귄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모름지기 인간관계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섞이고 물들어야 하는데 말인다.
이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사춘기 아이들도 나름 세상을 사느라 힘들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도 부모들은 그 속도 모르고 네가 뭐가 부족해서 내 속을 썩이내고 혼내키면 정말 섭섭하다.
그런데 친구 사귀기가 뭐가 그렇게 어려운 걸까? 영화를 보고 있노라니 우린 어렸을 적부터 친구 사귀기를 특별히 교육 받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남녀가 만나 거사를 치루고 자식을 만드는 건 자연스럽게 살면서 터득하는 거라고 봉건적 사회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친구도 자주 얼굴 맞대고 지내면 다 친구가 되는 줄 안다. 왕따는 어떻게 생기는 걸까? 사람들은 의식하든 못하든 저 사람은 나의 친구가 되고 안 되고 줄긋기를 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잉여 또는 사각지대의 사람이 있게 마련이지. 특별히 성격상 자기를 어필할 줄 모르는 내성적인 사람이 왕따에 내몰리는 것 아닌가?
하긴 그런 것이 아니더라도 왕따는 어떻게 해도 생기려면 생긴다. 옛날 사춘기 시절엔 공부 잘하고 얼굴 잘 생긴 사람은 불변의 존재로 건드리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공부 잘한다는 이유만으로 왕따 만들고, 얼굴 잘 생기면 그 이유만으로도 왕따가 되기도 하는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인간관계는 참 웃긴다. 왕따 만들었던 사람이 어디가선 왕따를 당하기도 한다지 않는가? 영화는 살아 남은 자는 어떻게 천지를 죽음으로 몰아갔는가를 실감있게 그린다. 그러면서 살아 있는 자 역시 상처가 많은 존재임을 드러낸다. 그러니까 우리 다 같이 서로를 보듬어 안자라는 다소 계몽적이고 도식적인 면도 없지는 않아 보인다. 그래도 볼만 하다.
원작이 좋아 그만한 영화가 나올 수 있었겠지만 원작 보단 영화가 더 잘 만들지 않나 싶기도 하다. 추상박의 유아인은 아무래도 원작엔 없는 인물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한데 유아인이 상대적으로 이 영화에선 그다지 비중이 크지 않아 조금 아쉽긴 했다. 하지만 나름 감초 연기를 잘했다고 생각한다. 엄마 역의 김희애도 예전엔 조금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연기가 자연스럽지는 않다고 생각했는데 언제부턴가 그녀를 보는 게 편안해졌다. 그래도 이 영화에서의 중심축은 역시 김희애와 함께 만지 역의 고아성이었다고 생각하는데, 난 이 다소 쌀쌀 맞으면서도 도도한 그러면서도 속 깊은 그녀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별점은 세 개 반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