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시간들 - 이보영의 마이 힐링 북
이보영 지음 / 예담 / 201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게 억만금을 주고라도 가지고 싶은 것이 있다면 명품가방도 아니요 으리으리한 집도 아니요, 사각지대까지 관찰하며 안전운전을 해준다는 차량도 아니다. 내가 가장 가지고 싶고 품고 싶은것은 어린시절 책과 함께했다는 추억담이다.

 

내게 어린시절 책이라고 하면 국민학교때( 내 시절에는 국민학교였으니) 학교에서 책 한 질을 저렴하게 판매하는 행사를 한적이 있는데 그때 엄마가 큰 마음먹고 책을 한질 사주셨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엄마의 큰 마음에도 책을 좋아하지 않았던 탓에 읽은 기억보다도 책등으로 맞았던 기억만 남아 있다. 이후 여러번의 이사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책들이 지금 생각해보면 큰 후회로 남아있다.

 

두번째로 기억나는 추억이라곤 도서관 앞에 살던 시절이였다. 그 당시에도 책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지만 가끔 들춰보긴 해서 동생과 함께 도서관에서 책을 한권 빌렸었는데 한달동안 연체해서 (그당시 나는 몸쓸 회원이였던 것이다) 동생과 책 반납을 두고 서로 미루다가 서로 손잡고 오돌오돌 떨며 반납했던 기억만 남아있을 뿐이다.

 

이렇듯 나에겐 어린 시절은 책과함께 증발되어버린 세계로 남아있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것도 없고 특별한 추억담이 없는. 그런데 점차 사회 초년생이 되고 중년의 시기로 접어들고 인생의 문제를 책에서 찾아대고 있는 지금 책은 인생의 한 부분이 되어버렸다. 가족같은, 친구같은,  반려자와 같은, 없으면 보고 싶고 있으면 가끔 샐쭉해지는 그런 마음에 한없이 기대고만 싶은 그런 존재.

 

 

그래서인지 어린시절 책과의 추억담을 다른 사람에게서  듣고 있노라면 마냥 부럽다가도 탐이 나고 배가 아파지는건 증발되어버린 어린 시절에 대한 회한이자, 내가 품지 못한 추억에 대한 동경인지 모르겠다.

 

 

어여쁜 배우로만 알고 있던 이보영씨의 책을 읽으며 그런 미묘한 마음들이 들었다. 엄하셨던 부모님때문에 상처 받았던 마음을 정채봉 작가님의 책 『그대 뒷모습』에서 위로를 받고, 고교시절 미숙했던 사랑에 대한 환상이 엘리자베스 브라우닝의 시 『내 그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읽으며 완숙한 사랑을 꿈꾸게 되었다는 이야기들은 어린 시절 책을 좋아했다면 나도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품게 했다.

 

어느 후배가 사랑하는 책 『어린왕자』가 궁금해 다시 읽어본 책이 더없이 소중한 책이 되어버린 모습, 어느 독자에게 선물받은 『미 비포 유 』라는 소설을 통해 사랑을 재발견하고 그간 갖어온 책에 관한 편견에 생각이 닿던 모습에서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던건 그녀가 책에서 받았던 사랑과 위안이 나와 다르지 않았음을 느끼게 해주며 큰 공감을 갖게한 부분이였다. 평소 책에 줄을 잘 긋지 않던 내게 펜을 쥐어주고 색색의 볼펜으로 줄을 긋게 만들며 마음과 마음을 다해 읽겠노라 다짐해보고, 한 텍스트도 흘려버리지 말자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게해준 시간이였다.

 

독서에도 맛이 있다면 스릴러는 레몬을 베어 먹은듯 시큼하면서도 짜릿한 맛을, 사랑에 관한 소설은 된장 찌개와 같은 구수하면서도 익숙한 그러면서도 자꾸 찾아서 먹게 되는 맛을 선사하는것 같다. 그렇다면 이 책은 어떤 맛이날까 곰곰히 생각해보니 공허한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뜨끈하면서도 담백한 국물 맛이 난다고나 할까. 사랑과 성장에 관한 다양한 독서 레시피를 선사하면서도 위로의 맛이 진하게 베어나는 그런 맛이라고 말하고 싶다.

인생에 정답이 있으면 좋으련만, 살면 살수록 세상사는 의문투성이다. 내가 그리던 방향과 다르게 흘러가기도 하고, 사람들이 내 마음 갖지 않아서 울적해 지기도 하고, 변해가는 내 모습에 흠짓 놀라기도 한다. 그렇게 마음이 사막일 때 나는 어린왕자를 찾아간다P32

내가 어떤 상황에서 어느 나이에서 읽느냐에 따라 이해하는 폭이 달라진다는 것은 책이 지닌 신비로움 중 하나이다. 몇년 전부터 나는 어릴 때 읽었던 고전을 다시 읽는다. 마치 다른 책을 새롭게 읽고 있는 것만 같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다르기에 같은 내용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인생을 조금이라도 맛본 후에야 이해할 수 있는 책들을 그때 뭘 안다고 끌어안고 있었을까. 한번 읽은 책을 다시 읽는 일은 뜻밖에 찾아온 흥미로운 여행과도 같다P62

진짜 상처는 가슴 깊이 묻어두고 곪을 때까지 좀처럼 꺼내 보이지 못하는 법이다. 그런 상처를 나 자신이라도 외면하지 않고 안아줄 수 있을때 좀 더 행복해 지지 않을까.

부디 지친 자신에게 소중히 다가갈 수 있기를, 내가 나에게 괜찮다고 말해 주기를. 평생 나를 속여 왔구나, 정직하게 슬픔을 마주보지도 고통을 표현하지도 못했구나 라고 스스로 다독여 주기를, 나의 슬픔, 너의 슬픔을 알아봐주고 말을 건낼 때 고인물이 흐르듯 인생 또한 흘러간다P50


댓글(17)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15-06-22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62페이지에 글이 정말 공감이 가네요.
우와 어린 시절에 책을 한 질이나요?
부럽네요.
저는 헌 책방에서도 겨우 한 두권 사 보는 게 큰 호사였거든요.

해피북 2015-06-22 22:14   좋아요 0 | URL
저도 그 글귀가 참 좋더라구요^~^
정말 부끄럽습니다. 저도 어릴적 처음으로 엄마가 크~~~은 마음 먹고 사주셨는데 읽지않았던 기억이 ㅠㅠ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책을 사랑하는 아이로 돌아가고 싶어요 ~^^

비로그인 2015-06-22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예요.
책 사 주신 것은 좋지만 전집보다는 애들이 좋아하는 책을 사 주는 게 더 좋더라구요.
엄마들이 좋아하는 전집은 저희 애들도 안 봤거든요.
그래서 낱권씩 제가 자주 사 주게 되었어요.

해피북 2015-06-23 19:19   좋아요 0 | URL
저두 책을 좋아하기 시작하고 부턴 전집보다 읽어보고 좋은 책 한권씩 모으는게 더 좋은거 같더라구요 아이들 추억 속에도 오래 기억되구요 ㅋㅂㅋ

2015-06-22 23: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해피북 2015-06-23 19:22   좋아요 0 | URL
아 그러시군요! 보슬비님께도 이 책이 따뜻하게 느껴지면 좋겠어요 ㅋ 그런데 진짜 이쁘기도한데 책도 좋아한다니 배가아프긴 했어요ㅋ
이번에 딸을 출산 했다는데 책과 함께 좋은 엄마가될거 같아 부럽더라구요 ㅋㅂㅋ

2015-06-24 00: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6-24 12: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6-25 11: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6-25 12: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5-06-23 2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문학 책을 음식의 맛에 비유하면, 달콤한 코코넛 음료입니다. 두꺼운 껍질을 벗겨야 코코넛 음료를 마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껍질을 맨손으로 벗길 수 없습니다. 껍질을 벗길 수 있는 도구를 찾아야 합니다. 도구로 껍질을 손쉽게 벗기는 방법을 찾기 위해 생각합니다. 인문학도 한 번에 이해할 수 없어 어려워 보이지만, 끊임없이 생각하고 탐구하면 내가 원하던 진리를 맛볼 수 있습니다. 코코넛 열매도 마찬가지에요. 껍질을 힘들게 벗긴 뒤에 마시는 음료는 달콤해요. ^^

해피북 2015-06-24 12:58   좋아요 0 | URL
왓! 멋진 비유예요! 코코넛은 쉽게 껍질을 벗기기도 힘들지만 달콤한 음료때문에 포기하지못하지요! 인문학과 정말 잘 어울리는 표현 같아요 쵝오~~! ㅋㅂㅋ 맛있는 점심식사 하세요^~^

2015-06-26 20: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6-26 23: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6-27 0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6-27 00: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6-27 00: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렇게 오르기 힘들다던 마(魔)의 산에 올랐다. 상.중.하 권당 480페이지라는 장대한 스케일을 옆에 끼고 2주동안 거친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오르고 나니 뭔가 뿌듯한 시간들을 만들어 놓은듯 하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다른 일을 모두 미뤄버렸다. 한번 손에서 놔버리면 다시 돌아갈 수 없을거 같은 마(魔)의 기운을 느끼며....( 독일의 역사와 철학, 그리스 신화들이 한데 어울어진 장대한 스케일이라 버겁긴 했지만 어떤 시선으로 읽느냐에 따라 맛이 달라질 수 있는 소설임은 틀림이 없다)

 

 

주인공 한스는 어릴적 병으로 부모님을 잃고 할아버지의 손에서 자라다가 할아버지 마져 병으로 돌아가시자 외삼촌의 집에서 생활하게 된다. 부유했던 부모님과 할아버지의 재산 덕분에 큰 어려움없이 생활하며 주위의 권유로 조선소에 입사하기 위해 기다리던 중 선천적인 빈혈로 3주간 요양원에서 지내고 있는 사촌 요아힘에게 문병을 다녀오기로 결정한다.

 

 

고지대에 있는 국제 요양원 베르크 호프에 도착한 한스는 요아힘과 함께 생활하는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을 알게 된다. 하지만 요양원 사람들의 첫인상은  한스에겐 큰 충격과 새로운 경험을 갖게 한다. 평소 매너라고 생각했던 모자나 지팡이를 사용하지 않고, 부끄러움과 쑥스러움이 사라진 숙녀들이 우스꽝스런 소리를 내어 한스를 놀려대는가 하면 문을 버릇없이 소리내어 닫고, 결혼한 부인들이 반지도 끼지 않고 정절의 개념도 퇴색되어 버린 공간.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 만큼이나 생각과 행동에 제약이 없는 요양원 사람들의 모습이 낯설고 새로웠던 것이다.

 

그러므로써 한스는 늘 자신은 이곳에서 3주후면 떠날 사람이라 입버릇 처럼 말한다. 외출할 일이 있으면 모자와 지팡이를 늘 챙겨다니고 좋아하는 담배는 고향에서 꼭 조달하며 요양원 사람들과 경계를 긋듯 생활한다. 그러던 한스가 점차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생겨나는데 그중 첫째 인물이 세템브리니라는 사상가다.

 

" 내 생각에는, 독설이야 말로 암흑과 추악함의 힘에 대항하는 이성의 찬란한 무기 입니다. 이보게! 독설은 비판 정신이며 비판은 진보와 계몽의 원천입니다." p123

 

" 비판하세요! 자연이 당신에게 눈과 오성을 준 것은 그 때문입니다"p128

 

진보주의자이자 비판가인 세템브리니는 요양원의 사람들을 하나같이 부유한 게으름뱅이라 치부한다. 하나같이 요양원이라는 안락한 생활에 빠져 권력과 정의, 폭정과 자유,미신과 지식, 지속의 원칙과 운동의 원칙 즉 진보적인 생각(p304)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 그런 의미에서 세템브리니는 한스를 만날 때 마다 하루 빨리 요양원을 떠날것을 재촉한다. 한스 역시 3주후면 조선소에 입사하기 위해 미련없이 떠날꺼라 생각한다.

 

그런 그에게 예기치 못한 사건이 발생하는데 다름아닌 짝사랑을 하게 된것. 그것도 세상에서 통용되지 못할 쇼샤 부인에 대한 사랑이자 첫사랑인 히페를 닮은 그녀에게 빠져드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 즉 그녀의 존재와 자신의 존재 사이에는 넘기 어려운 심연이 가로 놓여 있어서 자신도 인정하는 어떤 비판에 맞닥뜨릴 때 그것을 견딜 수 없으리라는 확신에는 흔들림이 없었던 것이다"p279

 

 

쇼샤 부인으로 말할것 같으면 그녀는 유부녀다. 거기에 투박스러운 손가락에 결혼 반지도 끼지 않고 두 어깨가 훤히 내보이는 망사 옷을 즐겨 입는 그녀를 한스가 사랑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이 생활했던 공간(평지)이였다면 통용되지 못했을 병들고 나이도 많고 식당에서 문을 쾅닫아 매너라곤 모르고 요양원 베렌스 고문관과 그림을 핑계로 어떤 관계가 있었을꺼라 끊임없이 의심하면서도 한스는 쇼샤 부인을 사랑하게 되었다. 거기에 3주후면 떠나기로 했던 한스의 몸에 병이 있다는 진단까지 내려져 요양원에 남게된 상황이니 그야말로 한스는 온 힘을 다해 쇼샤 부인의 사랑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

 

 

" 어떤때는 한스 카스토르프가 그녀 앞을 걸어가게 되어 그녀의 시선을 뒤통수로 느끼게 되었다. 그럴때면 그는 팔 다리를 잡아 당기는 듯 한 통증과 등줄기에 개미가 기어가는 듯한 가려움을 느꼈지만, 그녀 앞에서 뽐내고 싶은 소망에 그녀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어느것에 속박받지 않고 자기 혼자 힘차게 살아가는 것처럼 행동했다."P281

 

 

한때 교양없다 생각했던 부인을 사랑하게된 한스는 쇼샤 부인과 자주 마주칠만한 사건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부분이 내가 읽은 마의 산에서 가장 인상 깊은 부분이였다. 누군가 나에게 편견은 어떻게 사라지는가 라고 묻는다면 나는 이 부분을 들춰 말해주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편견이란 관계없음에서 생겨난다고. 나와 관계없는 사람들이 내는 소음에 몰상식한 행동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과 나쁜 감정들이 '관계가 있음'으로 해서 사라져가는 모습을 한스를 통해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스가 그토록 싫어했던 모습들에 관심을 갖고 사랑이라는 감정이 싹트면서 더이상 편견으로 자리잡지 않는 모습은 분노사회를 치닫고 있는 우리가 꼭 한번쯤 생각해볼 문제가 아닐까. SNS의 발달로 지극히 개인화 되어가는 사회에서 가상세계가 아닌 현실세계에서의 관계맺음, 인연 맺기가 왜 중요한 일이 되는지 생각해볼 만한 시간이였다. 물론 이 장대한 소설의 중심이 편견에 관한 이야기는 아닐지라도 이 소설이 품고 있는 다양한 '맛'중에 하나임은 틀림없다 생각이 든다.

 

 

일전에 신영복 선생님의 책에서 읽은것인지 들은 이야긴지는 잊어버렸지만 한 일화가 떠올랐다.  윗집에 사는 아이가 너무 뛰어다녀서 선생님은 화가났었다고. 그러던 어느날 우연히 놀이터 앞에서 만난 아이에게 아이스크림을 먹자고 하며 이것 저것 물어보게 되었다고 한다. 좋아하는 일이나 싫어하는 일, 꿈에 관한 이야기등 아이와 대화를 나눈 이후부턴 아이의 뛰는 발소리가 더이상 소음으로 들리지 않고 아이의 개구진 얼굴이 떠올라 흐믓했다는 일화를 들었는데  나는 한스가 쇼샤 부인으로부터 변화해가는 과정에서 신영복 선생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던듯 싶다.

 

 

한스의 변화로 부터 소설은 읽는 동안 유쾌해졌다. 더이상 모자나 지팡이에 연연해 하지 않고, 더이상 고향에서 담배를 조달하지 않는 모습은 그가 얼마나 많은 편견들을 떨쳐 냈는지 느끼게 하는 부분 이였다. 또한 쇼샤부인의 사랑을 얻기 위한 한스의 눈물겨운 여정과 사촌 요하임의 뜨거운 눈총에도 불구하고 결국 잠시동안의 사랑의 결실을 맺은 한스. 하지만 하루밤의  꿈과 같은 한스의 사랑은 쇼샤 부인이 떠나면서 잠시

깊은 내면의 세계로 접어든다. 삶과 죽음에 관한 끊임없는 생각들,  독일의 사상이나 역사성 철학적인 부분을 담당하는 세템브리니가 나프타라는 새로운 사상가와 대립하면서 그려지는 다소 무겁고도 장대한 이야기를 쏟아내 묵직한 맛을 내며 수동적인 삶에서 능동적인 삶으로 변화해가는 모습이 잔잔하게 그려져 그 맛을 더한다.

 

 

마지막권에 이르러 사촌인 요아힘의 죽음과 나프타의 광기 어린 죽음으로 점차 어두운 먹구름을 드리우는 다보스 요양원은 더없는 혼란과 섬뜩한 모습들이 그려진다. 쇼샤 부인의 재등장과 함께온 페퍼코른이라는 인물에 대한 경외심으로 잠시 밝은 빛을  띄는가 싶던 소설은 페퍼코른 마져 자살이라는 어두운 구름을 형성 시키며 깊은 심연 속으로 가라 앉는다.

 

 

『마의 산』은 폐렴을 치료하기 위해 입원중인 부인을 문병하기 위해 3주간 방문했던 요양원을 배경으로 실제 체험담을 그린 소설이다. 토마스 만 역시 문병 기간중에 폐병의 진단을 받고 입원을 권유 받았다고 하는데 한스 카스트로프의 모습이 토마스 만의 모습과 겹쳐 색다른 맛을 선사하기도 했다. 소설의 집필기간 (1913년~ 1924년) 중에 일어난 1차 세계대전의 영향 때문인지 소설의 마지막 부분엔 한스가 자발적으로 전쟁에 참전하는 모습으로 한스가 처음 다보스 요양원에 왔을때 삶을 주체적으로 살지 않았던 모습과 대비되며 이 소설이 성장적 요소도 포함하고 있음을 상기 시킨다.

 

 

마지막 권에 잠시 등장하는 '영'의 존재는 너무 섬뜩한 나머지 이 부분만 따로 떼어 소설을 써도 재밌었을것 같다는 생각도 해본다. 하지만 나같은 '심신 미약자'들은 가급적 하권의 325페이지 '수상쩍은 이야기' 장은 가장 밝은 시간에 읽기를 권한다는....

 

 

우리는 시간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순전히 시간 그 자체를? 정말이지, 아니다. 그것은 바보 같은 시도일 뿐이다.(시간이 지나갔다. 시간이 경과했다. 시간이 흘러 갔다) 이런 식으로 계속 진행되는 이야기를, 건전한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결코 이야기라 부를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똑같은 음이나 화음을 한 시간동안 미친듯이 계속 울려 대고서 그것을 음악이라고 말하거나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이야기는 시간을 채우고, 시간을 (품위있게 메우며>, 시간을 잘게나누고, 무엇인가 내용을 지니게 하며, 무엇인가 시작하게 한다는 점에서 음악과 흡사하기 때문이다.P89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죽음은 존재하지 않으며, 죽음이 찾아오면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와 죽음 사이에는 어떠한 현실적인 관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죽음은 우리와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기껏해야 우주와 자연과 어느정도 관계할 뿐이다. 그 때문에 모든 생명체는 죽음을 아주 태연하게, 무관심하게, 무책임하게, 이기적인 순진함으로 바라보는 것이다.P71

죽음의 모험은 삶속에 포함되며, 그런 모험이 없는 삶이라면 이미 삶이 아닐거야P478


이성은 죽음 앞에서 어리석은 존재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이성이란 덕에 지나지 않지만, 죽음은 자유와 방종, 모험, 무형식 쾌락이기 때문이다.P479

나라가 다르면 풍습도 다르다는 말이 있다. 여행객이 여행지의 민족이 지닌 풍습이나 가치 기준을 비웃는다면, 그것은 자신의 교양없음을 드러내는 것과 같다P398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15-06-22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엄청난 독서를 하셨군요. <마의 산>을 두 권짜리가 아닌 세 권짜리를 읽으셨다니! 열린책들 책 활자가 작은 편이라서 오랫동안 읽으면 눈이 금방 피로가 오던데 해피북님은 어떠셨는지 궁금하군요. ^^

해피북 2015-06-22 21:51   좋아요 0 | URL
맞아요! 맞아요! 맞아요X100 을 쓰고 싶을 정도로 활자가 작더라구요 ㅎㅎ 어쩜 cyrus님은 그리 잘아시는지! 역시 책성애자다우세요. 이 책들이 방대한 양도 양이지만 한 페이지 가득찬 글씨 덕분에 숨막히는 느낌도 들긴했어요. 꽉꽉 채워진 지면인지라 읽어도 읽어도 속도가 나지 않는 정말 마(魔)로 가득한 책이였다는 ㅎㅎㅎ 그래도 한스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읽었더니 포기하지 않고 읽을 수 있는 시간이였답니다~~^^

2015-06-23 0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6-23 19: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의 산 - 하 열린책들 세계문학 219
토마스 만 지음, 윤순식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성장적 요소가 포함되었지만, 명쾌히 설명되지 않았다는점이 아쉽다. 세템브리니와 나프타의 사상이 워낙 방대해 읽는동안 힘들긴 했다. 끊임없이 제기되는 삶과 죽음, 마지막에 이르러 `영`의 존재는 소름끼치도록 오싹함을 남겼고 그 부분만을 따로 떼어 글을 써도 좋을만큼 세밀한 구성이 인상적.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slmo 2015-06-22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뜸하신것 같더니 (아닌가, 내가 뜸했었나~?@@) 세권이나 되는 장편을 읽으시느라 그랬구나~^^
더워요, 잘 지내시죠~?^^

해피북 2015-06-22 21:53   좋아요 0 | URL
으앗!! 양철나무꾼님 정말 날카로우신 관찰력에 깜짝 놀랐어요 으흐흐! 맞아요 요 책들 읽느라고 북플도 자주 못들어오고 좀 그랬어요 ㅜㅜ 조금만 방심하면 책으로 돌아가지 못할거 같은 느낌에 ㅎㅎ 읽고난 지금 홀가분하면서도 뭔가 벅찬기분이랍니다 ㅋ

저는 정말 잘 지내고 있었답니다. 감사해요!! ㅋㅁㅋ~~ 꿀밤 보내세요!!
 
마의 산 - 중 열린책들 세계문학 218
토마스 만 지음, 윤순식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요양원 사람들과 자신은 엄연히 다른 사람이라 구분짓던 한스가 쇼샤부인을 짝사랑하게 되면서 편견과 생각이 점차 변화해가는 과정이 재밌게 그려진 작품. 스승격인 세템브리니와 나프타의 철학적인 사상들(형식과 자유,정신과 육체,명예와 치욕)을 만나면 골치가 아팠지만 포기할 수 없던 시간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의 산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217
토마스 만 지음, 윤순식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토마스 만의 경험이 녹아들어 한층 세밀한 구성이 일품인 작품. 어린 시절의 한스카스트로프가 경험한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들이 다보스 요양원을 방문하면서 한층 깊어지는데 사촌 요아힘과 함께 요양원에서의 생활이 주축이 되는 소설엔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을 만나며 성장해가는 과정이 인상적.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