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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벌레와 메모광
정민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평점 :
진보초 헌책방을 배경으로 실연의 상처를 입은 타카코가 책을 통해 치유해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 '모리사키 서점의 하루하루'란 영화를 보면, 삼촌 사토루가 헌책방에 들어온 책을 읽고 값을 책정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사토루가 사용한 인지(印紙)에는 모리사키 서점에서 사용하는 인장이 찍혀있었다.
한때 영화의 이 장면이 너무 좋아서 나도 인장에 대한 욕심이 생겼던 적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책에 흔적을 남길 수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흐뭇했지만, 책과 나를 더 결속시켜주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 같다. 그렇게 인장을 만들기 위해 며칠 동안 고심을 하던 중 인장에 넣을 마땅한 문구가 떠오르지 않았다. 이름을 넣자니 쑥스러웠기에 간서치 이덕무가 이름지은 구서재(독서讀書,간서看書,초서鈔書,교서校書,평서評書,저서著書,장서藏書,차서借書,포서曝書)나, 강세황의 그림에서 따온 향기는 멀수록 맑아진다는 뜻의 '향원익청(香遠益淸)'이란 글귀를 사용해볼까 하는 당찬 계획을 세워보기도 했다. 그렇게 얼추 문구를 생각해갈즘 이번에는 인장을 만들 마땅한 곳을 찾을 수 없어 이리저리 궁리만 하다 보니 깊던 마음은 조금씩 희미해져갔다. 그러던 어느 날 헌책방에서 우연히 구입하게된 책에서 예상치 못한 흔적을 발견하고서 나도 모르게 함박 웃음짓던때가 떠오른다.
책에서 흔적을 발견할 때면 마치 반가운 친구를 만난 것처럼 설레는 마음이 들곤 한다. 나와 같은 생각으로 책을 고르고, 또 나와 비슷한 마음으로 자신만의 '흔적'을 남긴 사람들의 마음이 느껴지는 책이라 더 살갑게 느끼곤 한다. 그래서인지 정민 교수님의 '책벌레와 메모광'이라는 책에 소개된 장서인들의 모습을 아주 흥미롭게 읽게 되었다. 책이 한없이 귀한 시절, 돈을 받고 책을 베껴주는 '용서傭書'라는 직업이 있던 그 시절에, 장서인은 그야말로 '소유권'을 나타내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렇기에 사용하는 인장에는 본관과 성명, 자와 호등이 새겨진 경우가 많았고 집안 대대로 내려져오는 가보가 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문제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진 후손들이 더이상 소유할 수 없을때 처리하는 방법을 두고 한일중 삼국을 비교해 놓은 글귀가 무척 재미있었다.
한국의 경우엔 인장을 예리한 칼로 도려냈다. 조상 대대로 내려온 책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워 흔적을 도려내고 종이를 덧대 잘려나간 글을 다시 채워 넣는 방법을 썼다고 한다. 거기에 비해 일본은 이전의 인장 위에 '소消'라고 쓴 인장을 덧찍어 말소 되었음을 표시했다고 한다. 역시 일본다운 실용적이고 간소한 성격이 엿보이는 부분이다. 마지막으로 중국의 경우에는 어지럽게 찍힌 인장이 있는 책을 더 높이 쳐주고 또 유명한 문인의 인장이 있을 경우엔 책값이 치솟기도 했다고 하는데 역시 통큰 중국 사람들의 성품이 엿보인다. 이렇게 비교해놓고 보니 우리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유교사상이 깊었는지와 또 얼마나 작은 부분에도 신경 쓰며 살고있는지를 느낄 수 있었는데, 마지막 부분에 정민 교수님의 사연을 읽게 되면서 웃지 않을 수 없었다.
' 반대로 내게 자신의 서명을 담아 처치 곤란한 책을 보내오는 경우도 적지 않다. 연구실이 워낙 옹색한데다 도저히 봐줄 수 없는 민망한 책도 많아서 중간에 한 차례씩 내다버리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때 가장 신경쓰이는 것이 그 안의 서명 부분이다. 이게 잘못해서 헌책방에 흘러나가기라도 하면 훗날에 내 자식이 돈이 궁해 팔아먹었다고 사람들이 생각할 게 아닌가. 서명한 본인이 어쩌다 보게 되면 내가 그랬던 것처럼 두고두고 앙심을 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책을 내다버릴 때는 슬그머니 내 이름이 있는 면을 잘라내게 된다. 준 사람의 명예도 지켜주고, 내 이름도 욕보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p22
다른 사람들의 시선도 신경쓰이고 또 책을 건네 준 사람에게 미안한 마음이야 느낄 수 있지만, 역시나 책에서 흔적을 지워내야했던 교수님의 모습은 영낙없는 조선시대의 선비들과 같아 귀여움(죄송합니다 ㅜㅜ)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교수님의 그런 걱정을 조금만 거둬주시기를 살며시 바라게된다. 요즘이야 워낙 책이 흔해져서 인장을 찍는 일도 거의없고, 또 인장을 찍거나 책에 흔적을 남기면 값이 뚝 떨어지는 탓에 책 한 권을 읽어도 조심스럽게 읽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가끔씩 만나게 되는 책방에서의 흔적들은 망망대해와 같은 지구상에서 잠시 있었던 '인연'의 흔적을 나타내주는 것만 같아서 반가움과 소중한 느낌을 받게 된다. 자신의 이름을 새겨넣은 인장을 찍거나, 작가에게 사인을 받았던 순간의 기록이나, 누군가를 생각하며 선물했던 마음이나, 학창시절을 추억해줄 번호나 또 낯선 여행길에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줬던 순간의 기록들이 어찌 소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떤 개인적인 사정으로 책방에 흘러들어왔는지 알길이 없지만, 같은 이름을 가진 수 만권의 책 중에서 길들여진 단 한 권의 책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면 정말 멋지지 않을까? 그러니 그 옛날 조선시대의 인장이 '소유자'를 나타내기 위한 수단이었다면, 오늘날의 장서인은 스쳐지났던 '인연'을 나타내는 소중한 기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윌리엄 포크너는 헌정 사인이 담긴 자신의 책을 헌책방에서 발견 한 후, '다시 존경을 담아서'라고 써서 되보내주었다는 일화가 있다는데 그 마음 역시 모르지 않지만, 나는 윌리엄 포크너와는 달리 그런 '흔적'들을 발견할 때마다 소중히 간직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마치 잠들어 있던 책에 생명을 느낄 수 있고 어떤 사연이 담겨진 책마냥 기묘한 느낌도 들기때문이다. 아! 그렇다고 책에다 낙서는 하지 마시기를! 엄연히 낙서와는 다를지니!! '책벌레와 메모광'은 1부와 2부로 나뉘는데 1부에는 책벌레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중에 역시 눈에 띄는건 간서치 이덕무에 관한 이야기가 많다. 2부에서는 메모의 중요성에 대한 언급이 많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메모를 적을때 '계통과 체계를 가지고 적어라'는 부분이었다. 매일 책을 읽고 좋았던 문장을 필사하면서도 체계적으로 정리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는 뜨끔한 가르침을 받은 기분이었다. 역시나교수님의 글을 꾸준히 읽던터라 반복되는 구절도 많고 익숙한 문인들 이야기가 많았지만 읽어도 읽어도 따끔한게 정민 교수님의 책인거 같다. 알아도 안하고 몰라서 안하는 얍삽하고 게으른 내 마음에 놓는 일침(가르침). 그게 정민 교수님이라 말하고 싶다.
' 나도 새로 다산의 편지나 증언첩을 찾게 되면 우선 붓으로 원문을 또박또박 베껴 쓰는 것으로 분석을 시작한다. 어지러운 흘림 글씨 상태로는 머리에 들어오지 않던 글이 옮겨 쓰는 과정을 한 번 거치고 나면 신통하게도 행간의 맥락까지 선명하게 잡힌다. 베껴쓰기 공부의 위력은 해보지 않고는 잘 알수가 없다. 일단 손 글씨로 베껴 쓴 뒤에 거기에 붉은 먹을 찍어 구두를 떼고 메모를 한 뒤, 그 다음 컴퓨터에 입력해서 번역을 하는 순서다. 초서의 단계를 그저 건너뛰면 글의 내용도 수박 겉핡기로 대충 읽고 마는 경험을 수 없이 했다.'p107
' 빠른 것이 늘 좋지는 않다. 생각은 누구나 한다. 하지만 그 생각을 아무나 적지는 않는다. 적을때 생각은 기록이 된다. 덮어놓고 적기만 할게 아니라 계통과 체계를 가지고 적으면 그 효과가 배가 된다.p149
'천재는 없다. 다만 부지런한 기록자가 있을 뿐이다. 요즘도 같다. 처음에는 덮어놓고 적다가 차츰 분명한 방향과 목적을 가지고 적어나가면 된다. 적기만 하면 안되고 중간 중간 갈무리 해서 하나의 체계속에 정리해두는 것이 더 중요하다.p155
'사소한 관찰과 메모에서 공부가 시작된다. 조각의 정보가 하나의 체계로 갖춘 정보로 발전하려면 긴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하다. 퍼즐 조각이 꽤 모여 전체상을 드러날 때까지는 인내와 집중이 요구 된다'p1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