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들어 화창한 날이 드물다. 어두컴컴하고 흐린 날이 계속되니 마음도 무겁게 가라앉는다. 이럴땐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줄 차 한 잔이 간절해지는데, 거기에 향이 좋은 차라면 더할나위없어진다. 이런날은 평소 마시던 아메리카노 한 잔이 두 잔으로 늘어나고 섭취한 카페인 만큼의 열량으로 하루를 버티게 된다. 그런데 이 '카페인'이라는게 얼마나 신통방통한지. 피곤하고 기운이 다운될때 심각하게 짜증스러울때 정신이 혼미해질때, 하루를 계획하게 만들고 밀린 일을 후다닥 처리하게 만들며 짜증스럽던 기분을 한결 편안하게 만들어준다. 그래서인지 하루를 커피로 시작하는 날과 커피로 시작하지 않은 날의 차이는 어마무시하다. 일이 밀리고 밀리지 않고는 오로지 한 잔의 커피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로.
한때는 이런 커피에 빠져 다양한 기구를 사모아보기도 했다. 커피를 갈수 있는 글라인더와 커피 메이커 그리고 다양한 원두를 사다가 직접 내려마시는 행복을 누리기도 했지만, 원두를 신선하게 보관해야하는 까다로움, 글라인더로 갈아낼때의 적절한 타이밍과 적절한 추출시간등을 지켜내야하는 번거러움 때문에 직접 갈아마시던 행복도 잠시에 불과했다. 귀찮아졌고, 또 귀찮아졌다. 그저 물만 넣으면 바로 나오는 간단한 커피를 원했고 그래서 구입한게 캡슐 커피다.
돌체구스토라는 커피머신은 불편함에서 해방시켜주었다. 캡슐과 물만 있다면 집안 곳곳에서 커피향 듬뿍 느끼며 한 잔의 커피를 만끽할 수 있었다. 매일 한 잔씩 내리는 커피와 책 한 권만 있으면 어느 카페 못지 않은 편안함이 있었다. 원두를 신선하게 보관해야 한다는 걱정에서 벗어났고 늘 일정한 맛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 바로 허영만 화백의 ' 커피 한 잔 할까요?'를 읽고 나서 잠들었던 드립 커피에 대한 욕망이 슬금슬금 떠올라 머리속을 잠식하고 있다. 머신기로는 결코 누릴 수 없는 본연에 '맛'과 '향'에 대한 욕망. 추출하는 시간에 따라 맛과 향이 달라질 수 있는 커피의 오묘한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다시 꿈틀대기 시작했다. 물줄기를 점점이 내려 더치커피 효과를 누릴 수 있다는 점드립으로도 커피의 맛이 달라진다니. 어찌 황홀한 이야기가 아닐 수 있을까. 더욱이 이번 2권에서는 1권에서보다 다루는 이야기가 더 훈훈했고 공감가는 부분이 많았는데
특히 '11화 엄마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편이 인상적이다.
개구쟁이 두 아들을 둔 평범한 주부 건이엄마. 건이엄마의 일상은 매일 똑같다. 아침에 정신없이 준비해 아이들 유치원에 보내고 집안에 들어오면 널부러진 장난감과 수북하게 쌓인 집안일. 매일 반복되는 지겨운 일상에 그녀의 작은 외침,
'변화 없는 똑같은 일상, 몸이 힘든건 참을 수 있지만, 정신이 힘든 건 도저히 이겨낼 방법이 없다. 혼자 먹는 점심반찬 따위는 신경 쓰기도 싫다. 사람들은 남편이 벌어다 준 돈으로 살림하고 애 키우는게 뭐가 힘드냐고 말하지만 그건 로또 일등 담첨되면 무조건 행복해야 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그나마 나에게 위안을 주는 건 커피 한 잔.'P89
일상을 달래주던 커피 한 잔에 대한 생각을 하던 그녀는 자신을 위해 작은 변화를 주기로 다짐하고 집앞에 위치한 '2대째 커피숍'에서 커피강좌를 듣기로 한다. 하지만 저녁 8시에 시작하는 강좌인지라 남편의 도움이 절실해 남편에게 SOS를 요청해보지만 건성건성 듣던 남편은 결국 강좌를 듣기로 한 날 회식이 있다는 핑계로 늦게 퇴근하고 그녀는 참석하지 못한다. 이 부분을 읽을땐 마음에서 천불이 났다. 작은 행복도 누릴 수 없는 건이엄마의 일상에대한 화보다 여성이라는 굴레가 주는 무거움에 화가 났다고나 할까. 물론 남자들도 마찮가지겠지만 서로 조금만 노력하면 행복해질 수 있는데 왜 배려를 해주지 않는거냐며 무한한 분노를 느끼며 읽게 되었다.
늦게 들어온 남편에게 화가난 그녀. 다음 강좌에는 단단히 벼르고 있었는데 때마침 남편은 걱정하지 말라며 그녀를 안심시키고, 강좌날 초인종 소리와 함께 나타난 시어머니. 두둥. 그녀는 억장이 무너졌으리라. 잠시 누려보고 싶었던 작은 행복이 좌절되자 그녀는 속상한 마음에 집을 뛰쳐 나가고 그마져도 마땅히 갈곳없어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모습도 속상함이 가득 베어있다. 그 다음날. 자신의 잘못을 크~~~~~~~게 뉘우친 남편은 아내가 좋아하는 커피를 사다가 아이들과 함께 모닝 커피를 대접한다는 결말. 뭐....그렇다고 화가 풀리면 안되는데 건의엄마. 라며 흐믓하게 읽게 되었다.
2권에서는 이런 흐믓함과 뭉클함 그리고 커피에 대한 풍부한 지식들이 가득하다. 특히나 젤라토 위에 에스프레소를 부어먹는다는 아포카토. 사진으로만 봐도 군침이 꿀꺽 넘어가는데, 와인 세계못지 않은 커피의 세계. 신맛, 단맛, 쓴맛, 적절한 과일향을 품고서 바리스타에 의해 같은 원두라도 다른 맛을 낸다던 그 세계를 나도 접해보고 싶다는 욕망이 꿈틀거린다. 하지만. 이런 모든 일들은 '서울'에서만 느껴볼 수 있는 머나먼 이야기인가 보다. 동네 주변에는 드립 커피를 맛볼 수 있는곳이 눈에 띄지 않는다. 모두 체인점 형식의 커피숍들만 즐비할 뿐. 아.. 그래서 더욱 드립 커피 한 잔이 땅기는 날이다. 마실 수 없기에 더더욱. 마시고 싶은 뭐.. 그런날.
PS. 저 위에 있는 '다리'는 제 '다리'가 아니라는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