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미 시집
잘랄 아드딘 무하마드 루미 지음, 정제희 옮김 / 시공사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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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르시아의 위대한 시인이라는 루미를 언급한 이야기를 여러 권의 책에서 만나고 궁금했었다. 무려 800년 전에 태어난 시인의 시가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오늘날에도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시인이자 종교인으로 추앙받는 루미를 이제라도 만나게 된 것은 대단한 행운이다. ‘페르시아어의 코란’, ‘신비주의의 바이블이라 불리는 6권 분량의 마스나비1권을 발췌 번역한 루미 시집은 총 75편으로 되어있고 신, 고독, 사랑, 삶을 노래한 산문시다. 전통적인 신학자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신과 하나가 되기를 진정으로 원했으며 노탁발승 샴스 타브리즈를 만나 진정한 사랑을 체험하고 그와의 안타까운 이별의 그리움을 태양이나 불꽃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게 오래전에 쓰인 루미의 시이지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시였다. 종교적인 색채가 느껴지는 시도 있었고 삶에 임하는 태도를 알려주는 교훈적인 내용, 마음을 치유해 주는 편안한 시도 있었다. 이 시집을 시작으로 나머지 마스나비도 차례로 번역되어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삶에서 슬픔은 언제나 예고 없이 찾아오고 삶은 불타는 듯한 슬픔과 함께한다. 삶이 끝난다면 가도록 두어라. 하지만 아! 당신은 머물러라. 당신같이 아름다운 자가 없으니.(중략)

조개는 인내하지 않으면 진주를 품을 수 없다. 사랑으로 탐욕이란 옷을 찢는 자만이 욕심과 삶의 어려움에서 완전히 정화된다.

그러니 기쁘라! ! 사랑은 우리의 행복. ! 모든 문제를 고치는 명의. ! 헛된 오만과 긍지의 치료제. ! 우리의 플레톤이자 갈레노스.

흙으로 빚어진 육신은 사랑을 통해 하늘로 날아오르고, 신도 춤추며 온다.(P20~21)


고작 발에 박힌 가시도 빼내기가 힘든데 하물며 마음에 박힌 가시는 어떻겠습니까?

마음에 박힌 가시는 아무리 작은 가시라 해도 누군가가, 또는 누군가에게 슬픔을 준 흔적입니다.(P25)


(전략)새는 아래로 위로 납니다. 새의 그림자도 새처럼 납니다. 어리석은 자는 새의 그림자를 잡기 위해 계속해서 달리다가 곧 지치고 맙니다.

하늘을 날고 있는 새의 그림자인 줄도 모르고 그림자의 주인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림자를 향해 화살을 쏘느라 화살집이 빕니다.

우리의 삶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림자를 좇느라 화살집이 비고, 삶이 저물어갑니다.

그림자를 쫓는 사냥에 삶이 흘러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의 그림자는 당신을 보살피고 그의 그림자를 통해 당신을 보호합니다.(P35~36)


 8백 년이나 되는 오래전에 지은 시이지만 지금도 공감할 수 있는 말이다.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살아야 함에도 우리는 다른 사람의 겉모습을 좇아가며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미래의 행복을 위해 지금 이 순간의 소소한 기쁨을 놓치며 살아가는 건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 아무리 빨라도 후회는 언제나 늦는 법, 그것을 깨닫게 될 때는 세월은 벌써 저만큼 앞서가고 한숨만 남을 뿐이다.


(전략)스승을 찾으십시오. 죽음에 대한 선조들의 지혜를 알게 될 것입니다. 모든 종교가 죽음에 대해 말합니다. 당신을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해줄 것입니다.

스승을 찾지 마십시오. 모든 스승은 당신 자신입니다.

그 스승을 아는 것 또한 당신이기 때문입니다.

주체가 되어 사람들의 대상이 되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들의 방향을 따르지 말고 자신의 방향을 따르십시오.(후략)(P38~39)


  죽음에 대한 지혜를 알기 위해 스승을 찾으라한다. 성공이라는 명제 아래 앞만 보고 달려가는 세상이다. 유한한 인생임에도 언젠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이 온다는 것을 가끔 잊고 산다. 다행인지 최근 죽음을 주제로 다루는 책이 많이 회자되고 있다. 죽음을 자주 상기한다면 현재의 시간을 좀 더 충실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수많은 인간관계 속에서 살아가지만 정작 혼자 살아가는 것이기도 하다. 많은 선택과 결정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자신의 몫이기에. 스승은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스승이라는 말에 깊이 공감할 수 있다.


(전략)석류를 산다면 웃고 있는 것을 사십시오. 그 웃음이 씨앗이 되어

새로운 소식을 전해줄 것입니다.

웃고 있는 석류가 정원을 웃게 하듯 지혜로운 자와의 대화는 나를 지혜롭게 합니다.

당신이 아름다운 대리석이라면 당신 마음의 주인에게 닿아 보석이 될 것입니다.

영혼에 순결한 사랑이 흐르는 자에게 마음을 주십시오.

선한 사랑이 없는 자에게는 마음을 주지 마십시오.

절망이 있는 곳으로 가지 마십시오. 희망은 분명 존재합니다.

어두운 곳을 향하지 마십시오. 태양은 분명 존재합니다.(후략)(P52~53)


 석류가 웃고 있는이라는 표현에 시선이 멈춘다. 알알이 잘 영글어 빨갛게 익은 모습일까. 넘치는 기쁨으로 밝게 웃는 얼굴을 활짝 핀 꽃에 비유하듯이 석류의 모습도 그렇겠지. 한 가지 걱정에 빠지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마음먹기에 따라 절망보다는 희망을 선택할 수 있다. 아침에 떠오르는 밝은 해를 바라보며 불끈 힘이 솟아오르지 않은가.

 

말은 갑자기 혀에서부터 뛰쳐나온다.

그것은 활에서 나오는 화살과도 같다.

! 아들아, 쏘아진 화살은 되돌릴 수 없다.

급류를 막으려면 수원지를 막아야 한다. 수원지를 막지 않으면

온 세상을 집어삼킨다. 온 세상을 황폐화한대도 놀랍지 않은 일이다.(후략)(P78) 


베푸는 자에게는 계속하여 풍족하게 해주시고 그들이

베푸는 만큼 채워주십시오.

인색한 자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마시고 그들이 인색한

만큼 빼앗아주십시오.

사랑에 있어 너그러운 사람은 많은 돈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목숨을 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만약 나무의 잎이 진다면 영혼의 가난함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너그러움으로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대도 그의

자비로움이 당신 손을 가득 채울 것입니다.

씨앗을 심으면 씨앗 창고는 비겠지만 밭에서 곡식이 자랍니다.

씨앗을 창고에 두기만 한다면 쥐가 와서 모조리 먹어버릴 것입니다.

세상은 이런 일들로 가득합니다. 그의 공고한 사랑을 느껴 보십시오.

(P120~121)(시 전문)


 베푸는 일은 따뜻한 관심이며 사랑이다. 누군가에게 나누어주는 일은 줄어드는 마이너스가 아니다. 나눔은 따뜻한 사랑의 전파를 타고 흘러간다. 씨앗을 심은 후 빈 창고와 밭에서 풍성하게 자라는 곡식의 모습이 대조적이다. 베푸는 일은 씨앗을 심는 일이다. 씨앗은 더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며 풍성한 사랑으로 돌아온다는 지혜를 깨닫게 된다.


(전략)우리가 열망하는 모든 달콤한 것들은 그 안에 시간의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루비가 아름답게 빛나고 광채가 나려면 수년의 햇살을 받아야 하고, 채소가 자라기 위해서는 두 달이, 장미가 자라기 위해서는 꼬박 일 년이 걸립니다.

뱀의 독이 약이 될 때가 있고 불신도 허락될 때가 있습니다.

덜 익은 포도는 떫지만 잘 익으면 아주 달콤해지고

항아리에 담겨 발효되면 훌륭한 식초가 됩니다.

현명한 자가 독약을 마시면 넥타가 되지만 미성숙한

자가 독약을 마시면 감각이 마비됩니다.(P131~132)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쓰디쓴 인내와 시간의 비밀이 필요하다는 것은 진리다.

저절로 되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성공에는 절실함과 노력이 필요하듯이 세상만사도

마찬가지다. 아름다운 보석 루비, 채소와 장미꽃도 시간을 견뎌내야 한다는 것.

엄청난 슬픔과 마음의 상처도 결국 시간이 해결해준다고 하지 않은가.

세월이 약이라는 말에서 우리는 새로운 희망으로 나아가는 존재인가보다.


(전략)부족함은 뛰어남의 거울입니다. 고난은 힘과 영광의 거울입니다. 모든 반대되는 것은 그 반대되는 것에 의해 보입니다. 식초를 먹고 나면 꿀이 달다는 것을 압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보고 완벽해지기 위해 급히 서두르는 자는 그이 곁으로 갈 수 없습니다.

그 자신이 스스로 완벽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완벽을 추구하는 자만심만큼 영혼에 고통을 주는 것은 없습니다.(P164)


 결핍 뒤에 뛰어남이 숨어있다. 어둠의 고난은 밝음으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일 뿐이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들여다보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강단 있는 마음이 있다면 원하는 자신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삶이란 비슷한 것 같다. 그토록 오래 전에 선지자들이 고민하던 것을 지금의 우리도 고민하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분명히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느 날 문득 세상에 던져진 존재라는 인간우리의 삶은 그 이유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루미의 시를 만나고 많은 부분을 공감하면서 앞으로의 삶은 어떻게 살아가면 좋을까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곁에 두고 시인 루미와 자주 만나 마음의 대화를 나누고 싶다.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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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매일 좋은 날
모리시타 노리코 지음, 이유라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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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타치(はたち), 스무 살은 얼마나 아름다운 나이인가. 스무 살의 노리코가 어머니의 권유에 의해서 다도를 배우게 된다. 틀에 가두는 듯한 다도 예법을 떠올리며 왠지 내키지 않지만, 보다 적극적인 사촌 미치코가 합세하는 바람에 그래 나쁠 것도 없지 하며 결이 다르다는다케다 아주머니를 떠올린다. 과연 어디로 튈지 모르는 스무 살의 아가씨가 다도 수업에 흥미를 느낄 수 있을까.

 

 어느 토요일 처음 가 본 다케다 아주머니의 집은 여느 집과 다른 분위기가 긴장감을 준다. 정원의 잘 가꾸어진 꽃들이며 자질구레한 장식품 없이 정갈한 방의 청결한 공기 속에서 온기가 느껴진다. 그리고 눈에 띈 액자에 쓰여 있는 의미를 모르겠는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이 이야기는 어쩌면 저 글자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하얀 안개에 싸여있던 다도의 세계가 점점 어렴풋이 윤곽을 나타내는 것, 그것을 깨닫게 되면서 인생의 참맛을 알게 된다고 할까.

 

 다도에 쓰이는 도구의 명칭이 많이 나온다. 후쿠사(ふくさ)를 다루는 법을 시작으로 수업이 진행된다. 후쿠사는 다도에서 다구(茶具)를 닦거나 받치거나 할 때 쓰는 보란다. 후쿠사는 오비에 끼웠다가 빼내어 양쪽 끝을 잡아당기면 !”하는 소리가 나는데 이 동작을 치리우치(ちり)’라고 하며 먼지를 턴다는 뜻이다. 차를 담아두는 나츠메(なつめ)’는 후쿠사로 닦아야 하는데 일본어의 ()’자 모양으로 닦으란다. 또 첫날이니까 차를 타서 대접한다면서 먼저 만주를 먹으라고 갖다 준다. 차 없이 먹으면 목이 멜 것 같아 망설이고 있으니, 어서 먹으라고 재촉한다. 먹는 것을 보고서야 차를 준비하며 녹색의 말차를 남기지 말고 마지막에는 소리를 내어 끝까지 마시라고 한다. 부끄럽게 소리를 내며 마시라니!, 후쿠사를 !” 하고 소리를 내는 것도 이상하다. 그뿐만이 아니다. 차건으로 다완을 닦은 다음 마지막에는 다완 바닥에 일본어의 ()’자를 쓰란다. “왜요?” 노리코에겐 모두가 의문투성이다.

 

이유 같은 건 상관없으니까 어쨌든 이렇게 해. 너희들은 반발심을 느낄지도 모르지만 다도라는 건 원래 그런 거니까.”(P43)

 

 이런 말씀을 하시다니 무척 당황스럽지만, 무언가 그리움이 담긴 듯한 아주머니의 눈빛을 놓치지 않는다. 저 눈빛의 비밀은 무엇일까.

 

 아직도 풀리지 않는 궁금증을 안고 데마에(てまえ)’ 수업이 시작된다. 데마에는 차를 타는 것이고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연한 차 데마에다. ‘미즈야(水屋)’에서 물항아리를 들고 오는 것으로 시작된다. 항아리를 바닥에 내려놓을 때는 새끼손가락이 다다미에 살짝 닿도록 해야 하고, 물은 튀지 않게, ‘무거운 것은 가벼운 듯이, 가벼운 것은 무거운 듯이들어야 한다. 문지방은 밟아도 안 되고 왼 발부터 들어가야 하며, 다다미 한 장에 여섯 걸음으로 걸을 것!......

 

 히샤쿠(ひしゃく)로 찻물을 뜰 때도 수많은 주의사항이 있었다. 차가운 물은 가운데서, 뜨거운 물은 바닥에서 떠야 한다. ‘풍덩소리가 나서도 안 되고 다완에 물을 따르고 히샤쿠에 남은 물방울을 털어서도 안 된다. 자연히 떨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다케다 아주머니의 계속되는 지적. 키득키득 웃기를 여러 번이었다. 다도의 세계, 과연 깐깐하구나 싶었다. 스무 살 노리코가 이것을 어떻게 견뎌 낼꼬.

 

차라는 건 말이지, ‘형태가 그 첫걸음이란다. 먼저 형태를 만들어 두고 그 안에 마음을 담는 거야.”(P49)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와 닿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아닌 게 아니라 일본의 전통적인 악습을 그대로 답습하는 모양새에 노리코는 폭발할 지경이다. 차선으로 차를 젓는 것은 쉽겠지 기대했지만, 거품을 너무 많이 내면 안 되고 초승달 모양으로 수면이 보이게 만들어야 한단다. 어떻게 달인도 아닌 내가 초승달 모양을 만든단 말인가? , 지금까지 배운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한 번 해 보겠니? 다케다 아주머니의 주문에 노리코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가 된다. 다 낡아빠진 교양과목이라고 우습게 여겼는데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새하얀 머릿속을 느끼며 노리코는 좌절한다. 이때부터 다케다 아주머니다케다 선생님이 되었다

 

 이후로도 다도 연습은 계속되고 선생님의 새해 첫 다회를 비롯하여 밖에서 열리는 다회를 접하면서 식견을 넓혀간다. 또 그 다회에서 발견한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의 액자, 많은 다인들과 다도구를 접견한다. 다도를 배운지 벌써 3년이나 되었지만 아직도 실수투성이다. 어떻게든 다도 수업에 빠질 이유를 찾으면서도 결국은 가서 위안을 받는다. 예전엔 거들떠보지도 않던 화과자의 매력에 푹 빠지고, 다도에는 그동안 잊고 있던 4계절이 오롯이 들어있음을 깨닫는다. 보이지 않던 꽃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고 이제 족자를 마주하게 된다. 차를 최고로 즐기는 법은 족자에 있다는 선생님의 말에 눈이 둥그레진다. 계절에 따라 바뀌는 데마에를 반복하며 화과자를 먹고, 도구를 만지고, 꽃을 바라보고, 이윽고 족자에서 바람과 물, 눈이 흩날리는 신기한 경험을 하고 오감으로 자연을 느끼게 된다.

 

 몇 번의 슬럼프를 넘기면서도 점점 다도에 빠져드는 노리코의 이야기가 많은 위안을 주었다. 무엇엔가 쫓기듯이 살아야 하는 일상의 피로와 복잡한 마음속을 말끔히 닦아주는 느낌이 들었다. 빨리 무엇을 결정해야 하고 목표를 달성하고 성장하지 않으면 도태된다는 생각에 우리는 스스로를 감옥에 가두며 살지는 않았는지. 일종의 신부수업이라는 고정관념, 쓸데없이 비싸기만 한 부자들의 권위주의나 허영심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다도를 하는 장면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처음엔 점 같았던 서툰 동작이 아름다운 선으로 이어진다. 느릿하지만 온 마음을 그 곳에 집중하는 선과 그 여백이 참 아름다웠다. 몇 년간 계속되는 아르바이트, 취업도 연애도 마음대로 되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노리코는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찾아간다. 그때까지 이해되지 않고 뿔뿔이 흩어져 있던 데마에의 여러 과정이 퍼즐 조각 맞추어지듯이 환해지기 시작한다.

예를 들면 진한 차는 카페인이 많이 들어있어서 위를 보호하기 위해 만주를 먹거나 가이세키(

)로 빈속을 채우는 것 등 다도의 흐름이 합리적으로 이루어져 있었다는 것에 감탄한다.

 

세상은 밝고 긍정적인 것만 가치가 있다고 여긴다. 하지만 애초에 반대가 존재하지 않으면 밝음도 존재하지 않는다. 빛과 어둠이 모두 존재할 때 비로소 깊이가 태어난다.

어느 쪽이 좋고 어느 쪽이 나쁜 것이 아니라 어느 쪽이든 저마다 좋은 것이다. 인간에게는 그 양쪽이 모두 필요한 법이다.’(P236~237)

 

비오는 날에는 비를 듣는다. 눈이 오는 날에는 눈을 바라본다. 여름에는 더위를, 겨울에는 몸이 갈라질 듯한 추위를 맛본다. 어떤 날이든 그날을 마음껏 즐긴다.

다도란 그런 삶의 방식인 것이다.’(P256)

 

 비가 오면 비를, 눈이 오면 눈을 느끼고 추위도 더위도 마음껏 느끼는 것. 자연의 흐름을 그대로 느끼는 삶이라면 안 좋은 날은 하나도 없다. 세상에! 그거였다.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날마다 좋은 날.

 

  노리코가 다도를 통해서 소리의 미학을 느끼고 냄새의 기억으로 후각이 눈뜨며 성장하는 과정을 보면서 우리의 인생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엔 뭐가 뭔지 몰랐는데 25년이 지나서야 어렴풋이알게 되었다면서 긴 안목을 가지고 현재를 살아라.”는 차의 가르침을 말한다. 다 읽고도 감동의 여운이 남아 행복한 마음으로 충만해졌다. 영화로 보면 어떤 느낌일까 몹시 궁금하다. 너무 빨리 앞서 가려고만 하지 말고 지금의 자신을 들여다보면 어떨까. 막연하게 꿈꾸던 것이 확실하게 보이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조용히 귀를 기울이면 무엇을 원하는지 내면의 소리가 들려올지도 모른다.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지금을 살아가고 아름다운 계절의 변화를 오롯이 느끼며 사는 삶,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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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인도
박완서 외 지음 / 책읽는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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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보통의 여행기와 다른 느낌이 나는 여행 에세이다. 박완서 작가를 비롯하여 법정 스님 등 여러 시인들의 인도 여행담이 들어있다. 글을 쓰는 문인들이어서인지 여행에서 느끼는 바가 아무래도 다르게 다가오는 것 같다. 여행의 즐거움과 낭만보다는 성찰이 돋보인다. 아마 인도여서 그럴까. 인도하면 떠오르는 것이 광활한 땅과 문명의 속도와는 전혀 다르게 느린 시간이 느껴진다


 김선우 시인의 말을 빌리자면 결코 낭만적 접근이 허용되지 않는다고 한다. 여러 경로에서 내가 들은 바로도 정해진 시간에 척척 맞는 교통수단은 생각할 수도 없다고 한다. 제 시간에 오지 않아도 하염없이 기다려야 하고 누구를 탓할 수 도 없다. 낡고 오래되고 지저분해서 깔끔한 여행을 했던 사람이라면 어딘가 좀 불편한 점도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왜 인도는 많은 사람들이 가고 싶어 하는 곳이 되었을까. 아마도 모든 것을 속도감 있게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스템적인 사회에 신물이 나서일까. 때로는 넋을 놓고 기다려도 언젠가는 오리라 생각하며, 재촉당하지 않는 느긋한 마음의 여유를 누려보고 싶어서인지도 모른다.

 

인도를 여행하는 일은 어딘가 아파지는 일이다. 일단 몸이 몹시 고된 데다 맞부딪히는 풍경들은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들쑤셔 놓기 일쑤다. 도시 문명의 안락함 속에서 병들었으나 병든 줄 모르고 있던 마음의 어떤 부위를 인도는 특이한 방식으로 깨우는데, 자신의 병든 데가 보이면 여행자는 힘들어진다. 그 힘듦을 맞대면하면서 점차 자유로워지고, 아파진 후 문득 성장해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기쁨. 인도 여행이 순례라는 이름에 적합해지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리라.(P14)

 

 낯선 여행지에서 우리는 눈에 익숙한 것과는 다르게 낯선 이들의 풍경에서 자신의 안락함과 행복, 그리고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 불평을 일삼던 일상이 그들로 인해 고마운 생각이 들면서 삶을 위안을 찾고 성숙해가는 삶, 이것이 여행의 힘이 아닐까.

 

 여행을 하다보면 이런저런 에피소드가 생기기 마련이다. 소설가 박완서는 잃어버린 여행 가방 때문에 편치 않았던 마음을 토로한다. 아까워서가 아니다. 부끄러웠던 것이다. 겉옷이나 속옷, 양말을 많이 가져가서 갈아입고 넣어둔 옷가방인데 누군가 흑심을 품고 열었다가 개봉했을 때 실망감을 생각하고는 가슴앓이를 했다. 그 후로는 많이 가져가지 않고 그날그날 바로 빨아서 입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고. 어찌 생각하면 이미 잃어버린 가방 누군지도 모르는 손에 들어갔을 것이고 걱정한다고 찾을 수도 없으니 빨리 잊어버리는 것이 상책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 처한다면 좀 그렇겠다 싶으면서 우습기도 하고 그 마음에 공감하게 된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타지마할은 무굴 제국의 제5대 황제 샤자한의 사랑이야기가 깃들어 있는 곳이다. 법정 스님은 그림에서 보았던 건축물을 눈앞에서 확인하고 매혹되지 않을 수 없었다. 열네 번째 아이를 낳다가 죽는 무무타지마할이 샤자한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덤을 만들어달라는 유언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얼마나 사랑했으면 이럴 수 있을까. 또 하나의 타지마할을 야무나 강 건너편에 만들려했는데 아들의 저지로 좌절되고, 샤자한은 아그라성에 감금된 채 8년 후에 생을 마친다는 이야기. 권력을 위해서는 부모자식의 인륜도 저버린 인과관계로 점철되는 인류의 역사를 이야기한다. 당시 국고를 탕진한 독재 왕이었지만 지금은 가난한 인도의 국가 재정을 위해서는 두고두고 애국자가 되었다니 이것도 참 아이러니다.


 수행자답게 크리슈나무르티의 자취를 찾아간 법정 스님은 첸나이의 베산타비하르에서 마지막 강연의 주제였던 죽음에 대해 사유한다.

 

죽음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모든 것과의 단절입니다. 죽음은 날카로운 면도날로 당신을 당신의 집착으로부터, 당신의 신으로부터, 당신의 미신으로부터, 편안하려는 욕망으로부터 잘라 버립니다. 참으로 산다는 것은 당신이 집착하고 있는 모든 것을 버릴 때만 가능합니다. 그래야 하루하루가 새로운 날이 됩니다. 당신은 날마다 죽으면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P81,84)

 

 ‘날마다 죽으면서 다시 태어나는 삶은 지난 날 보다는 현재에 초점을 맞추라는 이야기로 다가온다. 어제의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니라는 말이 있다. 살아서 여행을 하고 죽은 자들의 역사를 들여다보는 일은 나 자신의 길을 확인해보는 일이기도 하다. 돌아오기 위해 떠난다고도 한다. 우리는 살아있기에 살아있는 기쁨을 느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여행은 삶을 풍요롭게 하는 멋진 도구다. 현실이 그리 녹록치 않더라도 여건을 만들어서 여행의 즐거움과 유익함을 누려야 하리라.

 

바라나시는 시바의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많은 신이 함께 공존한다. 신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온갖 인간들도 공존한다. 성자로부터 마약쟁이, 깔끔한 공무원으로부터 양아치까지, 사제로부터 장사꾼까지, 온갖 사람들이 바라나시라는 독특한 오케스트라를 연주하고 있다. 신과 인간의 공동체가 이곳에 있고, 선과 악의 공동체가 여기에 있으며, ()과 속()의 공동체가 이 땅에 있는 것이다.(P103)

 

 승려이자 시인인 동명은 바라나시의 풍경을 잔잔하게 이야기한다. 갠지스 강의 화장터에서 타오르는 시체들, 그 옆에서 한 쌍의 개가 교미하는 장면 등 낯설면서도 편치 않는 상황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진다. 삶의 터전에는 삶과 죽음이 공존한다는 것, 그 진리를 확인하는 장면이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즐거운 시간 속에서도 삶과 죽음은 반복된다. 더 이상 죽음이 나와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앎으로써 오늘을 더 행복한 삶으로 만들 수 있다.

 

 

 

 

 

 

 

 문인수 시인은 인도에서 본 검은 눈에 대한 인상을 풀어간다. 깊고 검은 눈, 표정 없는 미인들의 검은 눈. 일행에게 눈총을 받으면서도 예찬을 멈추지 않는다. 나 또한 이 부분에서 웃음으로 공감했다. 비록 사진이나 영상을 통해 본 것이지만 깊고 커다란 눈은 아름답고 신비스러움으로 다가왔었다.

 

그 지독한 소음과 매연, 무질서가 뒤섞여 들끓는 도시라는 지옥, 혹은 극빈의 함정 속에 버려진 사람들. 그들은 모두 누구인가. 그러나 그런 도가니 속에서도 사람들은 여전히 살아 있었고, 살아있는 사람들의 더없이 깊은, 검고 아름다운 눈이 있었다. 방치된 소와 개와 염소와 돼지들과 함께, 싸이클 릭샤에서 외제 세단에 이르기까지 온갖 차량들이 들끓는, 그것들과 함께 어디론가 하염없이 흐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중략) 천천히 통과하고 있는 거리는 바로 생의 고통 한 마당인 것 같았다. 그러나 일절, 비명도 엄살도 분노도 저항도 없이 그저 무표정한 얼굴들. (중략) 오래 견디는, 아니 참으로 오래 기다려 온 그 깊은 눈의 아름다움은 특히, 인도 여인들한테서 완성되고 꽃 피는 것 같았다.’(P122~123)

 

 저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여행을 한다. 여행지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이런저런 고생을 경험하기도 하면서 우리는 성숙해간다. 무엇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여행의 느낌은 달라질 것이다. 내게도 미지의 세계인 나의 인도는 훗날 어떤 느낌으로 다가올지 몹시 궁금하다. 많은 이들이 동경하는 인도라는 나라에 대해 어느 정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여러 가지 불편한 점이 많은 여행지임에도 문인들의 나의 인도는 고향의 향수처럼 그리움이 물씬 느껴졌다.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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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린 해부학자입니다 - 기린 덕후 소녀가 기린 박사가 되기까지의 치열하고도 행복한 여정
군지 메구 지음, 이재화 옮김, 최형선 감수 / 더숲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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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내가 해부학에 특별히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저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어두면 번역 공부에 도움이 될까 해서였다. 역시 들어보지 못했던 해부학에서 사용되는 낯선 용어가 많이 나왔지만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또 한가지 흥미를 끌었던 것은 보통 사람이라면 엄두도 못 낼 만큼 커다란 동물인 기린을 해부하는 학자가 여성이라고 해서 놀랐고 기대감으로 몰입하며 읽었다. 역시 읽어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 만큼 재미있었다.

 


 저자 군지 메구는 어려서부터 동물을 좋아했는데 가장 좋아했던 동물이 기린이었다. 도쿄대 1학년 때 자신이 가장 좋아하고 평생 즐기면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겠다고 결심한 후, 운명처럼 엔도 히데키 교수를 만나게 되면서 기린 연구가 시작된다. 열아홉 살에 처음으로 해부를 시작하며 지금까지 30마리의 기린을 해부하며 연구에 몰두해 온 10년의 기록이다. 아무리 기린이 좋다고 해도 기린의 사체를 해부하는 것은 별개일 것 같은데, 기린 연구자로 살아오면서 많은 동물과 기린과 함께 한 이야기에서 학문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맨 처음 해부를 하기 위한 과정에서 필요한 도구와 순서를 구체적으로 설명해준다. 먼저 동물원의 직원이 기린의 부고를 알리면 사체가 반입되고 해부를 하고 골격 표본 제작의 순서로 마무리된다.

 


 이 책을 읽다보니 염상섭의 표본실의 청개구리가 떠올랐는데 기린을 해부한다니 얼마나 당찬 여성 과학자인지 비교할 수도 없다. 다 자란 기린은 키가 4~5미터에 무게는 800kg에서 1,200kg나 되는 특성상 몇 개의 부위로 나뉜 사체를 받는단다. 아무리 조각난 사체라도 그것을 옮기는 것은 중노동이 따로 없었다. 그리고 사체가 상하기 전에 해부를 하기 때문에 기린 부고가 오는 즉시 모든 약속을 취소하고 달려가야 한다.

 


 첫 해부를 위해 도쿄대 박물관 해부실에서 기린 니나를 마주한 군지는 망연자실한다. 겨울인데 해부실의 온도는 영상 10도다. 사체가 부패할 우려가 있으므로 난방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열악한 환경을 감수해야 하는 것도 기린 연구에 대한 열정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첫 해부는 무력감만 남겨주었다. 교과서에서 배운 기린 몸의 구조와 근육 이름에 연연하다가 눈앞에 있는 기린의 몸을 제대로 관찰하지 못했다는 실수를 인정하게 된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기린의 목뼈에 대해서 연구하기 시작한다.

 

 

<기린의 척추 구조>

 

 

 이 연구의 핵심은 기린의 경추 8개설이 맞느냐 아니냐이다. , 이미 나온 논문의 요점인 기린의 제1흉추는 원래 제 7경추이다.”는 내용을 증명하는 것이다. 여러 기린을 해부하는 과정에서 제1흉추가 움직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안고 해부를 거듭하다가 목과 몸통이 절단되지 않은 기린을 처음으로 해부하면서 어느 정도 확신을 얻는다. 하지만 더 확실한 증명을 얻기 위해 아오이의 새끼를 해부하고 CT스캐너를 이용하여 결국 밝혀낸다. 원래 포유류의 경추는 최소 2억년 전부터 7개로 알려졌다고 한다. 하지만 기린은 7개의 경추 아래에 있는 제1흉추가 목 운동의 거점 기능을 하고 있기 때문에 기능적으로는 ‘8번째 목뼈인 셈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저자는 이 결과를 논문으로 만들어 세상에 발표함으로써 일본학술진흥회 이큐시상을 수상하게 된다.

 


다 자란 기린의 목 길이는 평균 2미터라고 한다. 포유류는 경추가 7개로 정해졌는데 기린의 목은 어떻게 그렇게 길어진 것일까, 어떤 구조의 변화가 일어난 것일까, 의문을 갖고 시작된 연구는 결실을 맺으며 기린 박사가 된다. 기린의 사체를 해부하고 표본을 만들고 하는 일련의 과정을 들여다보니 정말 좋아하지 않고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더욱 더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자세와 태도가 무척 순수하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하나의 장이 끝날 때마다 재미있는 읽을거리에서 해부를 하는 과정에서 있었던 에피소드나 기린에 대한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들어있다. 기린 하면 한 가지 종류만 있는 줄 알았는데 4종류나 있다는 걸 알았다. 2016년 독일과 아프리카의 국제 연구 조직이 수많은 기린의 DNA를 채취해 유전자 특징을 조사해본 결과 4개의 집단으로 나눌 수 있었다고 한다. ‘그물무늬기린’, ‘마사이기린’, ‘남부기린’, ‘북부기린으로 일본의 동물원에서 사육 중인 기린은 앞의 두 종류뿐이라고 한다. 다음에 동물원에 갈 기회가 있다면 유심히 관찰해봐야겠다.

 

 

기린의 종류에 따라 무늬가 다르다.

 

 

 저자는 어머니의 모습을 통해 지식을 몸에 익히는 즐거움을 배웠다고 한다. 평범한 전업주부였던 어머니가 50세 정도에 문화센터에서 향 만들기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향의 역사에 대한 책을 읽고 나아가 전문적인 과학책까지 읽어나가더니 지금은 조향사가 되어 향 만들기를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어렸을 때부터 기린을 좋아했던 자신은 기린 연구자가 되었다. 학자는 아니지만 학자와 같은 자세를 지닌 어머니가 연구자로 살아가는 중요한 기본기를 다져주었다고 하는 부분에서 뭉클한 감동이 일었다. 그리고 다소 엉뚱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하는 번역 공부는 기린을 해부하는 걸 새로 배우는 것보다는 훨씬 쉬운 일이지 않나, 그러니까 중단하지 말고 열심히 해보자. 는 생각 말이다. 그만큼 무언가 열심히 해 보고 싶다고 결심하게 하는 동기부여도 해 주는 이야기다. 저자는 내가 좋아하는 것이 가장 옳은 것이라고 했다. 어쩌면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열정적인 해부학자의 이야기를 통해서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자세와 태도를 점검해 보는 시간이 되리라 생각한다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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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베개 책세상문고 세계문학 28
나쓰메 소세키 지음, 오석륜 옮김 / 책세상 / 2005년 4월
평점 :
절판



 <풀베개>라는 나쓰메 소세키의 책을 며칠 전부터 읽고 있었다. 화자는 도쿄에서 온 서른 살의 남자이고 화가이다. 그동안 읽은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마음>, <도련님>등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몰입도가 좀 약하고 도중에 문장을 놓치고 산만해지기도 했다. 왜 그럴까 생각해 봤더니, 화가 등 예술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와 그들의 감성을 알아차리지 못한 나의 부족함이리라. 오늘(1.29일) 날씨 온통 잿빛의 하늘, 그리고 약한 빗방울 흩날리는 이런 날은 마음이 차분해져 이러한 작품을 읽기엔 제격이라 생각이 든다. 들뜬 기분으로는 몰입할 여지가 없다. 겉돌던 초반의 분위기를 지나서 마음에 드는 문장을 두 세 번씩 읽고 필사하면서 조금씩 화가인 화자의 마음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이 작품은 1896년 문학에만 전념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후 그 해 연말에 오아마 온천을 여행하며 소재를 얻어, 1906년에 발표한 것이다. <나쓰메 소세키 사전> 등 여러 자료를 참고하여 옮긴이와 나쓰메 소세키의 가상 인터뷰 대화도 흥미롭다. 여기서 <풀베개>라는 제목은 여행을 상징하는 한다는 것과 자연속의 ‘비인정(非仁情)’-(각주: 인간의 의리나 인정 따위에서 벗어나 그것에 구애되지 않는 일을 가리킨다.)-의 경지를 상징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하이쿠적 소설’이라는 평가를 받는 만큼, 자연을 섬세한 시각으로 바라보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거나, 시적으로 형상화한 수법을 작품 전반에서 볼 수 있다.



 산길을 오르면서 눈에 들어오는 여러 풍경들을 섬세하게 묘사한다. 하이쿠에도 그 모습을 담는다. 가는 도중 마부도 만나고 찻집 할머니를 만난다. 시호다 온천장의 사연도 듣게 된다.



 ‘저무는 봄의 색깔은 곱고 아름다워, 잠시 어스름한 문을 환영으로 채색하고, 눈부실 정도의 허리띠는 금란(金?)인가. 산뜻한 옷감이 오락가락, 날이 저무는 색깔은 창연한데 고요하고 적적한 건너편, 요원한 저쪽으로 점차 사라진다. 찬란한 봄별이 새벽녘에 보랏빛 짙은 하늘 저 멀리 빨려 들어가는 풍경이다.’(p93)



 화자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같은 장소를 배회하는 여인의 모습을 슬며시 지켜보면서 말도 못 붙이고 안달한다. 화자의 안달하는 마음을 그 여인은 알리도 없다.

온천장의 나미라는 이름의 여자는 결혼했다가 전쟁으로 남편의 은행이 망해서 다시 친정 나코이로 되돌아 왔는데, 사람들을 이를 두고 인정이 없다느니 박정하다느니 여러 가지 말이 많았다. 약간 정신이 이상하다고도 했다. 화자가 욕탕에서 몸을 담그고 있는데, 나미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들어왔다가 갑자기 나가기도 한다. 그림을 그리려고 이곳에 왔지만, 아직까지 한 점도 못 그리고 있는데...



 나미는 “내가 몸을 던져서 둥실 떠 있는 것을, 괴롭게 떠 있는 장면 말고요. 편안하게 죽어서 떠 있는 장면을 예쁘게 그려 주세요.” 라고 거침없이 말 한다.



 가가미가 못에 빨간 동백꽃이 뚝뚝 떨어진다. 하나 둘 꽃송이가 떨어진다. 요전에 온천장의 나미가 말했던 농담처럼 아름다운 여자가 떠 있는 장면을 그리면 어떨까 생각한다. 가가미가 못(연못)은 오래 전 온천장 시호다가의 아가씨가 투신을 했는데, 그때 거울(かがみ[鏡],가가미)을 가지고 있어서 ‘가가미가 못’이라고 부르게 되었단다. 하지만, 평소 나미의 얼굴에 떠 있는 사람을 얕잡아 보는 미소와 자유분방함이 넘치는 그 태도와 표정으로는 ‘인간 이상의 영원이라는 느낌’을 내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고통, 증오, 질투, 분노, 원한의 표정이 아닌 ‘동정’의 정서만이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그림이라고. 나미의 표정 속엔 이러한 ‘동정의 정념’이 전혀 나타나지 않아서 화자는 불만스러워 한다.



 그러다가 마지막 장면, 나미의 사촌 동생 규이치가 전쟁터로 떠나는 것을 배웅하는 기차의 차창으로 이혼한 전 남편의 얼굴을 보게 되고 망연해 하는 그녀의 얼굴에서 ‘애련함’의 느낌을 떠올려 마침내 그림을 완성하게 된다.



 이 작품에는 한문과 중국의 학자, 문장가, 그리고 일본의 화가나 문장가, 하이쿠, 노(のう[能])-(각주: 일본의 대표적인 가면 음악극이다. 노가쿠(のうがく[能?])라고도 한다.)- 등과 서양의 화가나 문인들이 다수 등장하는데, 그들에 대한 배경지식이 있다면 작품을 이해가 한결 수월하고, 그에 대한 감동도 배가 될 것이다. 앞서 언급한 작품과는 다른 느낌의 작품, 자연에 대한 섬세한 묘사와 화가의 눈에 비친 아름다움의 정서를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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