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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인도
박완서 외 지음 / 책읽는섬 / 2018년 11월
평점 :
이 책은 보통의 여행기와 다른 느낌이 나는 여행 에세이다. 박완서 작가를 비롯하여 법정 스님 등 여러 시인들의 인도 여행담이 들어있다. 글을 쓰는 문인들이어서인지 여행에서 느끼는 바가 아무래도 다르게 다가오는 것 같다. 여행의 즐거움과 낭만보다는 성찰이 돋보인다. 아마 인도여서 그럴까. 인도하면 떠오르는 것이 광활한 땅과 문명의 속도와는 전혀 다르게 느린 시간이 느껴진다.
김선우 시인의 말을 빌리자면 결코 ‘낭만적 접근’이 허용되지 않는다고 한다. 여러 경로에서 내가 들은 바로도 정해진 시간에 척척 맞는 교통수단은 생각할 수도 없다고 한다. 제 시간에 오지 않아도 하염없이 기다려야 하고 누구를 탓할 수 도 없다. 낡고 오래되고 지저분해서 깔끔한 여행을 했던 사람이라면 어딘가 좀 불편한 점도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왜 인도는 많은 사람들이 가고 싶어 하는 곳이 되었을까. 아마도 모든 것을 속도감 있게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스템적인 사회에 신물이 나서일까. 때로는 넋을 놓고 기다려도 언젠가는 오리라 생각하며, 재촉당하지 않는 느긋한 마음의 여유를 누려보고 싶어서인지도 모른다.
인도를 여행하는 일은 어딘가 아파지는 일이다. 일단 몸이 몹시 고된 데다 맞부딪히는 풍경들은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들쑤셔 놓기 일쑤다. 도시 문명의 안락함 속에서 병들었으나 병든 줄 모르고 있던 마음의 어떤 부위를 인도는 특이한 방식으로 깨우는데, 자신의 병든 데가 보이면 여행자는 힘들어진다. 그 힘듦을 맞대면하면서 점차 자유로워지고, 아파진 후 문득 성장해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기쁨. 인도 여행이 ‘순례’라는 이름에 적합해지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리라.(P14)
낯선 여행지에서 우리는 눈에 익숙한 것과는 다르게 낯선 이들의 풍경에서 자신의 안락함과 행복, 그리고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 불평을 일삼던 일상이 그들로 인해 고마운 생각이 들면서 삶을 위안을 찾고 성숙해가는 삶, 이것이 여행의 힘이 아닐까.
여행을 하다보면 이런저런 에피소드가 생기기 마련이다. 소설가 박완서는 잃어버린 여행 가방 때문에 편치 않았던 마음을 토로한다. 아까워서가 아니다. 부끄러웠던 것이다. 겉옷이나 속옷, 양말을 많이 가져가서 갈아입고 넣어둔 옷가방인데 누군가 흑심을 품고 열었다가 개봉했을 때 실망감을 생각하고는 가슴앓이를 했다. 그 후로는 많이 가져가지 않고 그날그날 바로 빨아서 입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고. 어찌 생각하면 이미 잃어버린 가방 누군지도 모르는 손에 들어갔을 것이고 걱정한다고 찾을 수도 없으니 빨리 잊어버리는 것이 상책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 처한다면 좀 그렇겠다 싶으면서 우습기도 하고 그 마음에 공감하게 된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타지마할은 무굴 제국의 제5대 황제 샤자한의 사랑이야기가 깃들어 있는 곳이다. 법정 스님은 그림에서 보았던 건축물을 눈앞에서 확인하고 매혹되지 않을 수 없었다. 열네 번째 아이를 낳다가 죽는 ‘무무타지마할’이 샤자한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덤을 만들어달라는 유언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얼마나 사랑했으면 이럴 수 있을까. 또 하나의 타지마할을 야무나 강 건너편에 만들려했는데 아들의 저지로 좌절되고, 샤자한은 아그라성에 감금된 채 8년 후에 생을 마친다는 이야기. 권력을 위해서는 부모자식의 인륜도 저버린 인과관계로 점철되는 인류의 역사를 이야기한다. 당시 국고를 탕진한 독재 왕이었지만 지금은 가난한 인도의 국가 재정을 위해서는 두고두고 애국자가 되었다니 이것도 참 아이러니다.
수행자답게 크리슈나무르티의 자취를 찾아간 법정 스님은 첸나이의 베산타비하르에서 마지막 강연의 주제였던 ‘죽음’에 대해 사유한다.
“죽음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모든 것과의 단절입니다. 죽음은 날카로운 면도날로 당신을 당신의 집착으로부터, 당신의 신으로부터, 당신의 미신으로부터, 편안하려는 욕망으로부터 잘라 버립니다. 참으로 산다는 것은 당신이 집착하고 있는 모든 것을 버릴 때만 가능합니다. 그래야 하루하루가 새로운 날이 됩니다. 당신은 날마다 죽으면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P81,84)
‘날마다 죽으면서 다시 태어나는 삶’은 지난 날 보다는 현재에 초점을 맞추라는 이야기로 다가온다. 어제의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니라는 말이 있다. 살아서 여행을 하고 죽은 자들의 역사를 들여다보는 일은 나 자신의 길을 확인해보는 일이기도 하다. 돌아오기 위해 떠난다고도 한다. 우리는 살아있기에 살아있는 기쁨을 느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여행은 삶을 풍요롭게 하는 멋진 도구다. 현실이 그리 녹록치 않더라도 여건을 만들어서 여행의 즐거움과 유익함을 누려야 하리라.
‘바라나시는 시바의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많은 신이 함께 공존한다. 신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온갖 인간들도 공존한다. 성자로부터 마약쟁이, 깔끔한 공무원으로부터 양아치까지, 사제로부터 장사꾼까지, 온갖 사람들이 바라나시라는 독특한 오케스트라를 연주하고 있다. 신과 인간의 공동체가 이곳에 있고, 선과 악의 공동체가 여기에 있으며, 성(聖)과 속(俗)의 공동체가 이 땅에 있는 것이다.(P103)
승려이자 시인인 동명은 바라나시의 풍경을 잔잔하게 이야기한다. 갠지스 강의 화장터에서 타오르는 시체들, 그 옆에서 한 쌍의 개가 교미하는 장면 등 낯설면서도 편치 않는 상황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진다. 삶의 터전에는 삶과 죽음이 공존한다는 것, 그 진리를 확인하는 장면이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즐거운 시간 속에서도 삶과 죽음은 반복된다. 더 이상 죽음이 나와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앎으로써 오늘을 더 행복한 삶으로 만들 수 있다.


문인수 시인은 인도에서 본 ‘검은 눈’에 대한 인상을 풀어간다. 깊고 검은 눈, 표정 없는 미인들의 검은 눈. 일행에게 눈총을 받으면서도 예찬을 멈추지 않는다. 나 또한 이 부분에서 웃음으로 공감했다. 비록 사진이나 영상을 통해 본 것이지만 깊고 커다란 눈은 아름답고 신비스러움으로 다가왔었다.
‘그 지독한 소음과 매연, 무질서가 뒤섞여 들끓는 도시라는 지옥, 혹은 극빈의 함정 속에 버려진 사람들. 그들은 모두 누구인가. 그러나 그런 도가니 속에서도 사람들은 여전히 살아 있었고, 살아있는 사람들의 더없이 깊은, 검고 아름다운 눈이 있었다. 방치된 소와 개와 염소와 돼지들과 함께, 싸이클 릭샤에서 외제 세단에 이르기까지 온갖 차량들이 들끓는, 그것들과 함께 어디론가 하염없이 흐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중략) 천천히 통과하고 있는 거리는 바로 ‘생의 고통 한 마당’인 것 같았다. 그러나 일절, 비명도 엄살도 분노도 저항도 없이 그저 무표정한 얼굴들. (중략) 오래 견디는, 아니 참으로 오래 기다려 온 그 깊은 눈의 아름다움은 특히, 인도 여인들한테서 완성되고 꽃 피는 것 같았다.’(P122~123)
저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여행을 한다. 여행지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이런저런 고생을 경험하기도 하면서 우리는 성숙해간다. 무엇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여행의 느낌은 달라질 것이다. 내게도 미지의 세계인 ‘나의 인도’는 훗날 어떤 느낌으로 다가올지 몹시 궁금하다. 많은 이들이 동경하는 인도라는 나라에 대해 어느 정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여러 가지 불편한 점이 많은 여행지임에도 문인들의 ‘나의 인도’는 고향의 향수처럼 그리움이 물씬 느껴졌다.
*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