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메레르 8 - 폭군들의 피
나오미 노빅 지음, 공보경 옮김 / 노블마인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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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작품의 시대적 배경은 1812년 일본 에도막부, 청국의 제7대 황제인 가경제의 시기와 나폴레옹이 주변국과 전쟁을 벌여 영토를 확장하던 당시의 상황이 입체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흔히 동양의 전설 속에 등장하는 용을 등장시킨 환타지 문학이다. 역사와 환타지가 만나 어느 부분이 역사인지 픽션인지 분간하기 어렵고 흥미로운 전개에 웃음과 감탄의 연발이다. 벌써 여덟 권 째이며, <테메레르> 시리즈는 아홉 권의 완결로 구성되는 작품이라 한다.


 셀레스티얼 품종의 용을 원했던 청국 황실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포튼테이트 호로 항해 도중에 폭풍우를 만나 난파를 당하게 된다. 좌초된 그 배에서 떨어져 나가사키의 해안을 표류하던 로렌스는 가네코 히로마사에게 구조된다. 먹여주고 재워주는 친절을 베풀지만, 외부인에게 의심이 많은 그들이 그냥 넘어가지는 않는다. 가네코측은 여기에 침투한 목적이 무엇이냐며 의심하고 심문하는 사이 많은 날이 흘러간다. 하지만, 로렌스는 기억이 없다. 거대한 폭풍우를 맞은 충격의 영향으로 8년의 기억이 사라진 것을 알게 된다. 자신 스스로도 더욱 놀란다. 기억을 되찾을 수 있을까.


 테메레르는 수컷 용이며, 로렌스에게 깊은 애정을 갖고 있다. 윌리엄 로렌스는 원래 해군 함장이었는데, 지금은 테메레르의 비행사이다. 그런 단짝 로렌스가 실종된 것에 애석함을 금치 못하며 아픈 몸으로 로렌스를 찾으러 가려고 한다.


 한편 로렌스는 그 곳을 하루빨리 탈출하여 영국으로 돌아가려 하지만 애타는 마음만 커질 뿐 좀처럼 기회를 노릴 수가 없어 답답해한다. 특별한 죄목을 찾지 못했음에도 풀어주지 않자, 탈출을 결심한다. 우여곡절 끝에 준이치로의 도움으로  함께 탈출하는 여정에 서게 된다. 준이치로의 도움은 의외다. 가네코를 섬기면서 낯선 이방인 로렌스를 무시하며 투덜댄 점에 비하면.


 탈출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일본 강용(江龍) 기요미즈 아씨는 문학에 조예도 깊다 영국시를 듣고 싶다고 하며, 로렌스에게 요청을 한다. 세익스피어의 희곡을 들려준다. 여기 용들은 기본적으로 사람과 의사소통은 물론 외국어도 구사한다. 기요미즈 아씨는 로렌스와 준이치로가 무사히 나가사키항으로 갈 수 있도록 등에 태우고 바다를 건넌다.


 전에 알던 무서운 용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사람을 따르고 서로 돕는다. 기요미즈의 등을 타고 바다를 이동하는 도중에 로렌스는 놀란다. 기요미즈를 발견하고 사람들은 납작 엎드려 절을 한다. 일본어로 대화를 하고 화기애애하다. 용 비행사나 용 선장도 없이 다니는 것도 더욱 놀라워한다. 영국에서라면 길들여지지 않은 용은 성격이 흉포하다고 알고 있었는데, 지금의 이 광경은 정 반대의 풍경이다. 농작물에 끼어있는 차가운 서리를 입으로 물을 뿜어내어 녹여주는 기요미즈. 거대한 용을 수호신처럼 여기는 것 같다. 마을 전체의 어려움을 해결해 준다. 이쯤 되면 파괴하는 용이 아닌 인간을 보살펴 주는 용이다.


 테메레르는 로렌스가 꼭 살아 있다고 굳건히 믿고 있다. 어쩌면 이렇게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이 있을까. 준이치로와 로렌스의 탈출의 과정은 만만치 않다. 목적지인 나가사키에 가까이 왔을 무렵 가네코와 아리카와 아씨와 맞닥뜨리게 된다. 분노의 설전이 한창일 때 무시무시한 크기의 용이 나타난다. 테메레르! 아픈 몸을 완전히 회복하고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로렌스를 구하러 날아온 것이다. 로렌스는 청국 황제의 양자이자, 왕자이고 내 비행사라며 테메레르는 호통을 친다.


 하지만, 8년의 기억을 모두 잊어버린 로렌스는 승무원과 공군들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심지어 절친 단짝 테메레르에 대한 기억도 없다. 로렌스를 향한 테메레르의 우정, 애정은 진지해서 웃음이 날 지경이다. 청국과 영국이 동맹을 맺기 위한 과정에서 드러나는 아편 사건에서 수치심을 느끼는 영국인 로렌스. 사라진 기억의 조각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역사와 상상이 어우러진 환타지는 우리의 삶과 거리가 먼 이야기는 아니다. 그 속에도 정의와 인정이 있다. 선함과 악함이 공존한다. 번역 작품임에도 술술 읽혀지는 흥미로운 스토리의 전개는 역사와 상상 속에 풍덩 빠져 또 다른 상상의 나래를 펴게 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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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티네의 끝에서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양윤옥 옮김 / arte(아르테)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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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부터가 묘한 끌림이 있었다. 주인공은 천재 기타리스트 마키노 사토시와 프랑스 RFP 통신에 근무하는 기자 고미네 요코. 게다가 남자는 독신, 여자는 미국인 약혼자가 있다. 뭔가 애틋한 로멘스가 펼쳐질 듯한 분위기가 풍긴다. 음악은 사랑으로의 연결을 용이하게 해 주는 윤활유의 역할이 충실하다. 이들은 데뷔 20주년 기념 공연을 통해서 만나게 되는데, 마키노는 요코에게 연정을 품은 뒤 음악생활의 슬럼프에 빠지게 된다. 요코 또한 바그다드에서 취재 도중에 테러사건을 겪고 그 일로 인해 심각한 트라우마로 작용한다.



 메일을 통해서 언어로 친해진 이들은 파리에서 재회를 한다. 서로에게 끌리는 마음은 속에서 끓어오르지만, 사회적인 신분이나 약혼자가 있는 상황이어서인지 직접적인 확신은 멀어져가고 대화는 좀 겉도는 편이다. ‘뭔가가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은 조급함으로 바뀌어 “지구 어딘가에서 요코 씨가 죽었다는 말을 듣는다면 나도 죽을 거예요.”라는 마키노의 말로 인해 이야기는 진전을 보인다. 역시 남자 쪽에서 먼저 보이는 적극성은 여성을 꼼짝 못하게 하는, 또는 그것을 확신으로 행동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 있다. 꼭 전통을 들이대지 않더라도 말이다. 서로의 사랑은 확인되고, 요코는 기다려왔던 말이었음을 깨닫고 기쁨도 느꼈지만, 이리저리 재며 한편으로는 자신의 감정에 충실할까 생각한다. 어쨌든 마키노는 마음속에 있는 말을 시원하게 다 했다. 어떻게 요코가 받아들이지 모르지만...



 기타에 대한 나의 에피소드가 있다. 결혼 전에 통기타를 배우고 싶어서 세고비아 기타를 구입한 적이 있다. 기타교본을 구입해서 어렵게 연습을 반복해서 ‘로망스’라는 곡을 치며 신기했던 경험이 있다. 내 손 끝에서 이런 곡이 들리다니! 그 후 어찌어찌하다가 시들해졌지만. 살다보니, 우리 아들은 기타리스트가 되고.(아직은 한참 더 성장해야 하지만) 생각해 보면, 삶은 이런 우연한 일들이 속속 자리를 잡으며 인연을 만들어 가는 것은 아닌지. 비록 클래식이 아닌 일렉트릭 기타를 연주하지만, 아들 덕분에 나는 많은 곡들을 들었다.(무슨 곡인지 모르는 게 많지만) 항상 음악이 내 귀를 떠나지 않았다고 할까. 클래식에도 관심이 많은 아들은 클래식 CD 음반을 전질로 사서 듣는 공부를 엄청나게 했었다. 그래서 여기 이 책의 배경에 나오는 기타 선율과 공연 현장의 분위기가 전혀 낯설지 않다.



 마드리드 콘서트는 요코의 부재와 함께 실패로 끝났다. 연주를 멈춰버린 손은 천재 기타리스트에게 비극의 순간이었다. 리처드에게 결별을 선언하고 사랑의 확신을 얻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불안감이 있다. 음악이 인생의 근간인 마키노는 더 많은 것을 포기하고 자신을 택한 요코에게서 두려움을 느낀다. 자신이 겪고 있는 음악적 정체(停滯) 상태에서는 요코와의 사랑도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한편 리처드 쪽에서도 요코를 놓아주지 않으려는 지루한 싸움이 꼬리가 물고 늘어진다. 불안한 마음을 반영이라도 하듯 바그다드에서 겪은 일은 악몽으로 꿈에 나타난다. 이도 저도 아닌 일이 되어가는 것인가.



 잃어버린 휴대폰은 이야기의 반전을 가져 온다. 이것이 사랑하는 방법을 잊어버린 어른들을 위한 연애소설이라고?  ‘베니스에서 죽다’ 증후군을 내세운 파멸적인 사랑의 설정은 좀 그렇다. 뭔가 꼬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면 이걸 풀어보려는 노력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다면서 오로지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리겠다는 미적지근한 마키노의 태도에는 실망이다. 비현실이 된 사랑과 전쟁터의 상황 세계적 금융위기 등의 세상의 굵직한 사건들을 알려주는 현실의 이야기가 적절하게 배치되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속도감이 있다. ‘뭔가 좀 더 할 수 있었’다면 오해와 어긋남으로 점철된 사랑은 아니었을 텐데...



 이러한 경우도 진정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저자도 서문에서 밝혔지만, 우정인지 사랑인지 모호하며 모두 부질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그만 두게 되었다면. 시작하지 않았음이 오히려 낫지 않았을까. 분명히 새로 시작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한편, 사랑의 감정으로 들뜬 분위기에서 생각지 않은 상황을 맞게 되면 이성보다 감정이 먼저 작용할 수도 있겠구나 싶기도 하지만, 안타깝다. 둘 다 적극적으로 달려들어 문제해결에 노력하지 않은 것은, 그 사랑에 대해 조금은 가볍게 생각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많은 이야기를 하면서 대화가 통하는 사람도 흔치 않은 세상에. 이루어지면 좋고 아니면 말고 하는 식의 계산적인 마음이 이러한 결과를 만들지 않았을까. 마티네의 끝에 연주되는 아르페지오를 들으며, 서로의 사랑을 재확인하지만, 그 장면은 처연하다. 해프닝으로 끝나버린 사랑이라니. 중요한 건 ‘사랑했었던’이 아니라 지금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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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의 러시아 문학 강의 20세기 - 고리키에서 나보코프까지 로쟈의 러시아 문학 강의
이현우 지음 / 현암사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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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처음 러시아 문학을 접하게 된 것은 푸시킨의 시를 알고부터였다. 중학시절인가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로 시작되는 시를 자꾸만 보고 읽다가 리듬을 타고 외우게 되었다. 짤막한 그 시가 삶의 희망과 용기를 주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집에 있던 <대위의 딸>이라는 책을 본 적도 있다. 세로쓰기 방식의 책이었으며, 러시아 특유의 길고, 발음이 잘 되지 않는 등장인물들의 이름, 무슨 내용인지도 모른 채 꾸역꾸역 읽어나갔던 기억. 그 후로 19세기 러시아 문학에 해당하는 작가, 안톤 체호프, 고골, 투르게네프,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등을 몇 권씩 읽었지만, 이 책 20세기 작가에 해당하는 작가의 작품은 아직 읽어보지 못한 책이 많다.

 

  이 책에서 이 시기의 대표적인 여덟 명의 작가를 다루고 있다. 시대적 배경은 1917년 제정 러시아의 종말과 10월 혁명을 시작으로 새로운 시대로 진입하는데, 사회주의가 해체되는 1991년까지 70여 년의 역사를 다루었다. 20세기 러시아 문학은 1902년 출간된 고리키의 <밑바닥에서>부터 1973년 출간된 솔제니친의 <수용소 군도>까지이다. 마지막의 나보코프는 대표적인 러시아 망명 작가로서 독특한 위상과 의미를 갖기 때문에 이 자리에 할당했다고 한다.

 

  사회주의리얼리즘의 효시라고 평가되고 있는 작품은 막심 고리키의 <어머니>이다.

막심 고리키는 ‘그토록 쓰라린’의 뜻을 가진 필명이라고 한다. 대부분의 러시아 작가들이 대부분 귀족 출신이거나 사제, 의사, 상인의 아들 등 부유한 출신인 것에 반해 고리키는 ‘룸펜 프롤레타리아’였다. 어릴 때 부모를 잃고 외조부모 손에서 자라다가 외조부가 파산하자 신발 가게 점원을 비롯한 온갖 밑바닥 직업을 전전하는 가운데, 독학으로 글을 익히고 책을 읽었다. 10대 후반에는 권총 자살을 시도했다가 폐에 구멍이 나서 평생 후유증에 시달렸다고 하니 쓰라린 운명이 필명에 새겨져 있었던 셈이다.

<어머니>는 공장 노동자인 파벨이 프롤레타리아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계급의식으로 무장한 혁명적 노동자로 성장해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궁핍한 생활과 가장의 폭력 속에서도 늘 순종하고 희생하는 삶을 영위하던 파벨의 어머니가 아들이 변화 해 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주체적인 인간으로 우뚝 서는 모습을 그렸다. 또한 혁명을 위해서는 사랑을 포기하고 오직 냉정한 이성을 갖도록 유도했다. 강철 같은 인간, 차가운 인간만이 새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감동을 주기에 충분하지만, 그보다 더한 분노를 느끼도록 하는 작품이었다. 온갖 착취와 억압 속에서 희생당해온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삶을 돌아보게 하고 왜 그렇게 고통스럽게 살았는지 문제를 제기한 작품으로 볼 수 있겠다.


자먀틴의 <우리들>은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조지 오웰의 <1984>와 함께 3대 안티유토피아 소설로 꼽힌다. 그 중 <우리들>은 1924년 출간이니 가장 앞선 작품이다. 작품의 배경은 29세기 미래 사회이다. 누구도 예측하기 어려운 격변의 시기에 소련 사회의 암울하고 음울한 미래상을 보여준다.


안드레이 플라토노프는 생전에는 명성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사후에 거장의 반열에 올라 ‘20세기의 도스토예프스키’로 불린다. 혁명 이후 재회한 두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포투단 강>은 깊은 슬픔과 연민에 대한 플라토노프의 천착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주인공은 노동자인 니키타와 교사인 류바다. 니키타는 류바를 무척 사랑하지만, 자신의 신분과 맞지 않는 건 아닐까 회의를 느낀다. 그녀가 고통 받지 않도록 지켜주는 것이 삶의 목표이다. 우여곡절 끝에 혼인신고를 하고 부부가 되지만, 무늬만 부부인 채로 살아간다. 부르주아적 사랑의 방식을 초월한 사랑은 한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병석에 앓아누운 니키타가 자신이 살 수 있는지 묻는다.



“곧 나을 거예요. 사람들이 죽는 건 혼자서 아프기 때문이죠. 누구의 사랑도 받지 못하고, 하지만, 지금 당신 곁에는 내가 있잖아요.”(p97) 라는 류바의 말이 아프게 다가온다.

또 그의 대표작 <체벤구르>는 러시아에서 연극으로도 공연된다고 한다. 주인공 사샤는 친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슬퍼하고, 그의 죽음이 궁금해서 자기 다리를 묶고 배에서 호수로 몸을 던져 자살하는 내용이다. 울 일이 흔하지 않은 러시아 문학작품 중에서 이 <체벤구르>는 이러한 슬픔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라 한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닥터 지바고>는 ‘소설로 쓴 시’라고 평한다. 원래 시인으로 출발했고, 그와 작품의 주인공 지바고는 자신의 서정적 분신 관계일 만큼 파스테르나크와 들어맞는다. ‘지바고’라는 이름은 러시아어 ‘삶’의 뜻이라고 한다. 혁명을 이루고 나서 당당하게 사랑하는 이에게 돌아오려고 하는 모습은 ‘현재의 삶을 유예’하는 삶이다. 현대에도 그런 모습은 나타난다. 내일, 다음, 미래에 행복하기 위하여 ‘오늘’을 좀 대충 살고 있지는 않은지.



불가코프의 <거장과 마르가리타>는 1928년부터 사망(1940년 3월 10일) 직전까지 수정과 보완을 거듭한 작품으로 20세기 최고의 러시아 소설의 하나로 그의 손꼽히는 대표작이다. 여주인공 '마르가리타'는 괴테의 <파우스트>에 등장하는 '마르가레테'를 모델로 쓴 작품이다. 체호프와 더불어 불가코프의 작품은 현재 러시아에서 가장 많이 공연되고 있다고 한다.


 

<고요한 돈 강>은 숄로호프의 대표작이며, 소련의 공식문학 작가로는 유일하게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숄로호프의 작품에는 가족의 비극을 그린 작품이 많다. 이 작품을 이해하려면 카자크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 카자크는 15~16세기경 귀족이나 지주들의 억압을 견디지 못한 농노들이 탈출하여 변방에서 농사를 짓고 살던 농민공동체이며 용병으로 활용되었던 군사공동체라고 한다. 피 튀기는 내전을 겪은 카자크 사람들의 슬픈 역사를 그린 사회주의 리얼리즘 작품이다. 문학을 독학으로 공부해서 이루어낸 그의 저력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솔제니친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스탈린을 비난하는 편지를 보낸 것이 적발되어 8년간 수용소 생활을 하고, 그 체험으로 수용소 사회를 고발한다. 지옥 같은 수용소에서도 어떻게든 견디며 살아간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가 겹친다. 단지 수용소 생활상을 고발하는 것으로 끝났다면 작품성의 의미는 덜 할 것이다. 거기서 살아가는 인물들의 마음가짐이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는 주인공 슈호프의 수용소 생활의 하루를 보여주고 있다. 생활력 강한 그는 좀 더 나쁜 일을 겪지 않은 것을 재수 좋았다고 생각하며 하루 일과를 마감하면서 행복감을 느끼면서 감사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든다. 비인간적인 수용소에서도 긍정적인 인간성은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이렇게 현실감 있는 묘사에서 자국민들은 충격을 느끼며 공감을 했고 작가로서도 시대의 증언을 충실히 한 위대한 작가로 불리는 것이다.



나보코프는 ‘러시아 망명문학의 대표 작가’로서, 대표작 <롤리타>는 러시아어로 작품을 내지 못하고 영어로 쓴 작품이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 고도로 계산된 트릭과 게임의 성격을 갖고 있고, 지능을 필요할 만큼 유희적인 소설도 있다. 모국어를 쓰지 못하고 영어를 써서 작품을 내야 했던 설움을 이렇게 나타냈다.

“불쌍한 나이트! 그에게는 두 시기가 있었는데, 첫 시기는 엉터리 영어를 쓰는 멍청이였고, 두 번째 시기는 멍청한 영어로 글을 쓰는 엉터리였지.”

(P256~257 <서배스천 나이트의 진짜 인생>에서)

 


  주요 작가 여덟 명의 작품 세계를 통해서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무수히 희생된 인물군상과 시대의 아픔을 엿볼 수 있다. 인간의 머리에서 짜낸 이데올로기로 동족을 죽이고 가족을 해하며 피를 부른다. 사고를 주입시키며 새로운 인간상을 만들려는 억지를 부린다. 과연 누구를 위한 혁명인가. 혁명을 일으키는 주체가 권력을 휘두르며 민중을 핍박하며 삶을 무참히 짓밟는다. 작가의 작품은 시대의 역사를 생생하게 증언한다. <우리들>, <닥터 지바고> 등 다수의 작품이 당대 독자들이 읽을 수 없었던 비공식 문학이라고 한다. 그만큼 표현의 자유를 억압받던 상황이었다. 19세기가 러시아 문학의 ‘황금시대’라면 20세기는 러시아 문학의 ‘은세기’라고 불린단다. 인간은 모든 것을 경험할 수 없기에 주옥같은 문학작품을 만나 인간 역사의 변천을 들여다 볼 수 있다는 것은 독자로서 커다란 행운이라고 생각된다. <로쟈의 러시아 문학 강의>는 러시아 문학에 입문하려는 독자들에게 훌륭한 길잡이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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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조조전 1 - 농단의 시대, 흔들리는 낙양성
왕샤오레이 지음, 하진이.홍민경 옮김 / 다연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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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탄 박종화의 삼국지 8권짜리 시리즈를 세 번 읽은 적이 있다. 삼국지를 세 번 읽은 사람하고는 말도 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듣고, 왠지 대단한 느낌으로 다가와 적어도 세 번은 읽어야지, 하고 다짐했었다. 그 후로도 차례대로는 아니지만, 자주 들춰 보았었다. 수많은 등장인물들의 얽히고설킨 이야기, 전쟁에 이기기 위한 계책, 살아남으려고 속고 속이는 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이 책의 저자 왕샤오레이는 조조의 ‘21세기 대변인’이라 불리며, 현존하는 조조의 모든 자료를 통독하며 조조의 흔적을 쫓아 10여 년간 연구했다 하니 대단한 조조 사랑의 저자라고 생각된다. 한 인물의 집중탐구 덕분인지, 살아있는 인물 군상을 느낄 수 있었다. 삼국지만큼이나 재미있다. 이전에 배경 인물로서 조조에 대한 사적인 면은 잘 알 수 없었다. 그의 아버지는 환관 조등의 양자였다. 이것부터가 벌써 파격적이다.



이 책 1권은 후한(後漢) 영강((永康) 원년(167년)을 배경으로 ‘당고지화(黨錮之禍)’(후한 말기 환제와 영제 시절, 조정을 쥐락펴락하며 기강을 어지럽히는 환관세력에 불만을 품은 사대부와 귀족세력이 서로 공격한 사건. 환관세력이 승리함. p13)인 정변이 일어나는 상황에서 조조가 도성에서 쫓겨나는 부분까지이다.



조조의 아명은 아만(阿瞞)이고 맹덕은 그의 자다. 조숭 첩의 소생으로 덕아(德兒)라는 동생이 있었다. 덕아는 인정받는 모범생이었다. 하루 종일 글공부, 책읽기를 즐겼다. 게다가 겸손하고 예의바르기까지 하다. 반면, 조조는 글공부는 가장 하기 싫어하는 일이었고, 동네에서 이름난 말썽꾸러기 대장이었다. 하지만, 그가 어떤 짓을 해도 아버지 조숭은 무조건 감쌌다.



이렇게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을 받았던 조조가 서울 낙양을 떠나 고향으로 쫓겨나는 신세가 된다. 한밤중에 몰래 싸움닭을 들고 놀러 나갔다가, 정변을 피해 달아나던, 피투성이가 된 태학생 하옹과 마주치게 된다. 사정을 들어보니 나쁜 사람은 아닌듯하여 피신을 돕게 된다. 하옹은 선물로 아만에게 청동보검을 주고, 조숭의 아들 조조임을 알게 된다. 그는 하늘의 뜻이로다. 라는 말을 반복하며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한편 곤궁한 상황에 처한 사람을 도운 것뿐인데, 도대체 왜 그렇게 노기등등한지 아버지와 숙부를 이해할 수가 없다. 이때까지만 해도 아직 어린 열 두 살이니 세상에 대한 때가 묻지 않은 순수함이 있었다고 할까. 아버지에게 처음으로 심하게 혼나고, 고향 패국(沛國) 초현(譙縣)에 살고 있는 칠숙 조윤에게 맡겨진다. 아직도 분노와 원망을 가슴에 품은채로. 그 마을엔 또 한 명의 말썽꾸러기 대장 이숙 조치의 아들 조인(曺仁)이 있다. 자신들의 근거지를 두고 하후염(夏候淵)과 하후염(夏候廉)의 하후가(家) 아이들과 조가(曺家)의 아이들의 패싸움이 벌어졌다. 이를 지켜보기만 했던 아만은 조가(家)의 아이들에게 심한 핀잔을 듣게 되고. 이 싸움을 통해서 아만은 병법에 대한 관심을 갖고 공부를 시작하는 계기가 된다.



그렇게 의욕을 갖고 집중한 결과 아만은 <손자병법> 13편을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모두 읽어낸다. <논어>도 자다가 일어나서 줄줄 외울 만큼 완벽하게 익혀 자신감을 얻는다. 드디어 하후가(家) 아이들과 대결하여, 그들의 근거지를 되찾는데, 성공을 거둔다. 그리하여 아만은 조가(家) 아이들의 자랑스럽고 믿음직한 형님이 된다.



그 후 4년이 지나고, 이제 조조는 이전의 꾀병과 술수를 일삼던 망나니가 아니었다. 준수하고 건장한 청년이 되었다. 이제 제법 조윤과 대화 상대가 된다. 그리고 가문을 영광을 위해 멀쩡한 사람이 환관이 되어야 했던 잔혹한 가족사의 비애(悲哀)를 듣게 된다. 전에는 대승상 조참의 후손이라는 사실에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지만, 이때부터 마음 한쪽 구석은 항상 열등감이 자리한다.



천하의 정의롭고 의로운 선비들은 환관, 외척 세력을 증오하고 있는데, 아버지 조숭과 조치, 조정 세 형제는 환관 세력과 결탁하여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현실. 아버지가 환관 왕보에게 돈을 바치면서 아들의 앞날을 부탁하는 것을 엿들으며 비굴함을 느낀다. 강한 수치심을 느끼면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마음. 두 번의 살인, 효렴으로 천거되어 관직을 얻은 일. 잘못을 하고도 아무 벌을 받지 않고 승승장구 한다. 조조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시시비비를 공정하게 처리함으로써, 명성이 자자해진다. 잘못이 있는 자를 탄핵하는 상주문을 올리지만, 아버지 조숭의 손에 다시 들어오고, 이로 인해 도성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된다. 나름 잘 해보려고 했지만, 조조 부자가 정반대편의 관점으로 일하고 있으니 이것 또한 요지경이다.



조조에 대한 야누스의 얼굴을 보여준다.

비굴함과 수치로 얻은 관직에서 정의를 구현한다는 것이야말로 야누스적인 일이 아닐까. 조조만이 아니다. 현 시대를 살고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도 야누스의 얼굴을 가진 것은 아닐까 싶다. 어떤 일이 정의로운지는 알지만, 그것을 실천에 옮기려면 대단한 용기와 자기희생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섣불리 나설 수 없다. 그렇게 현상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말이 통용되는가 보다.


'그저 두루뭉술하게 골고루 인맥을 쌓으며 양다리를 걸쳐놓으면 별 문제가 없을 걸세'(P258)


어쩜 그렇게 오래된 삼국지 시절의 이야기 속이나 현실이나 똑같은지 모르겠다. 이 말처럼 적나라하게 삶의 처세를 말 한 것이 또 있을까. 시대는 달라졌어도 삶의 모습은 똑같다. 한 사람의 고결한 성품도 비리가 판을 치는 세계에서 눈엣가시가 된다. 수많은 군상의 삶의 모습에서 현재의 삶을 돌아다 볼 수 있다. 지금도 칼만 들지 않은 전쟁터나 다름없다. 시기를 불문하고 인간은 살아가고 대대손손 이어진다. 살아남기 위해 어떤 처세로 임해야 할까를 고민한다면 이 책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아직 서막에 불과하다. 여기까지는 조조 나름의 정의편에 서고자 노력한 흔적이 보이지만, 도성에서 쫓겨나는 계기로 어떻게 변할지 궁금하다. 백 퍼센트 야누스의 얼굴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임기응변에 능신, 난세의 간웅이라는 조조는 다음엔 어떤 말과 어떤 얼굴로 독자를 사로잡을까.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제작사로부터 상품을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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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계월전 문학동네 한국고전문학전집 19
조광국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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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재미있는 소설을 누가 지었을까. 남자보다 더 뛰어난, 문무와 덕성까지도 겸비한 여성호걸의 이야기다. 옮긴이만 나오는 걸 보면 작가는 따로 있는 것 같은데 따로 작자는 밝히지 않는다. 처음엔 조선시대의 땅에서 일어난 이야기인 줄 알았다. 시대와 배경이 명나라 헌종 임금 시절 형주 구계촌으로 나온다.


 보통의 영웅소설의 구조가 충실히 들어있는 이야기다. 다만 주인공인 영웅이 남자가 아닌 여자라는 점이 다르다. 출생부터 부모의 늦은 나이에 선녀의 꿈을 꾸고 잉태되어, 다섯 살이 되었을 때 부모와 이별을 겪는다. 아버지는 도적 장사랑의 난을 만나 붙잡히고, 어머니와 계월은 피난을 가다가 붙잡혀서 다섯 살 계월은 이불에 싸여 강물에 던져진다. 이를 보국의 아버지 여공이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해서 자신의 아들과 같이 친자식처럼 키운다. 잘 키워서 훗날 영화를 볼 생각에. 일곱 살이 되었을 때, 곽도사에게 두 아이를 맡겨서 공부도 시키고 무술도 익히게 한다.


 계월은 얼마나 영특했는지, 한 자를 가르치면 열 자를 알았다. 용병술과 온갖 술법을 배우면, 검술과 지략이 당대에 이길 자가 없었다. 계월은 스스로 이름을 평국으로 바꾼다. 여기에 곽도사는 바람과 비를 부리는 술법까지 가르쳤다. 평국은 이것을 삼 개월 만에 마스터했는데, 보국은 일 년을 배워도 통달하지 못한다. 이 얼마나 통쾌한 일인가. 여자의 실력이 출중하게 그려냄으로써 벌써 남자의 우위에 있는 영웅임을 표현했다.


 곽도사는 평국의 재주는 이 세상에서 으뜸이라며, 황성에서 과거시험이 있으니 부디 역사에 이름을 빛내라고 한다. 두 아이의 나이 이제 열다섯 살. 과거시험에 합격하였는데, 평국은 장원이고 보국은 부장원이다. 보국은 절대 평국을 이길 수 없다. 천자의 부름을 받고 평국은 한림학사, 보국은 부제후가 되고 천리준총마 한 필씩 선물로 받는다. 안타깝게도 이렇게 기쁜 영광을 부모와 나눌 수 없음에 계월은 눈물이 마르지 않는다.


 첫 번째 임무, 도적의 침입으로 위기에 처한 천자를 구하라는 도사의 명으로 서달의 난을 평정한다. 평국은 대원수가 되었고 보국은 대사마 중군장이 되었다. 용맹이 얼마나 뛰어났던지 여자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벽파도에 도적을 해치우러 갔다가 부모를 만나고, 잦은 전쟁으로 피곤해져서 병이 들어 여자임이 밝혀진다. 천자의 명으로 둘을 결혼을 시킨다는데... 이를 어길 수 없는 평국은 남자로 태어나지 못했음을 분하게 여겨 눈물을 흘린다.


 마음에 없는 결혼은 했지만, 평국의 지위와 권력은 여전히 유지된다. 오히려 보국이 눌려 지내며 불만이 불쑥 고개를 들지만 어쩌지도 못한다. 남편의 애첩이 예를 보이지 않자 군법으로 다스려 처형하고, 적진에서 포위된 남편 보국을 필마 단신으로 쳐들어가 구해서 오는 장면 등은 스릴 있고 박진감 넘친다. 복숭아 빛 예쁜 얼굴에 남자 못지않은 용맹까지 가졌으니, 어이 남편을 두려워 할 것인가. 위기에 빠졌다가 목숨을 구한 천자도 심정은 마찬가지다. 한편으로는 기쁘고, 한편으로는 두려워한다. 남자가 여자가 되었으니, 또 보통 남자가 못하는 일을 여자가 당당하게 해치우고 있으니 불편한 심정이야 이루 말할 것이 없다.


 그리하여 천자의 신임은 더욱 두터워지고 이들 부부도 3남 1녀의 아이를 모두 영민하게 키워내고 부귀영화를 누렸다는 이야기이다. 요순시대와 같은 태평성대를 누리게 되었으며, 이러한 좋은 이야기를 기록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는 것으로 이야기는 맺는다.


 이 이야기 속에 페미니즘 관점이 보인다. 원래 계월은 결혼하고 싶지 않았다. ‘평생 부모 슬하에 있다가 죽은 후에 다시 남자가 되어 공자와 맹자가 가르친 행실을 배우고자’ 하였다. 하지만 천자의 명을 어길 수 없어서 지시대로 보국을 남편으로 맞이했다. 여성적인 삶을 거부하고 남성적인 삶을 살았다. 왜 그러한 선택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이러한 점은 남편 보국과 대립이 될 수밖에 없다. 남자의 입장에서 보면 여자는 조신하게 가정에 있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해야 하는데, 그 몫을 온전히 ‘즐겨서’ 하는 이는 계월이었다. 제3자의 입장인 천자, 조정신하, 여공, 홍무, 곽도사 등은 그것을 인정했다는 것이 흥미롭다. 남자의 삶이냐, 여자의 삶이냐를 이분법으로 생각하지 않고, 계월이 남성적인 삶을 사는데 도움을 준 셈이다.


 그리고, 이야기의 끝부분을 보면 둘째 아들의 성을 ‘홍씨’로 하여 초나라 태자로 보낸 이야기가 나온다. 이 부분은 지금도 그렇지만, 조선시대에는 더더욱 파격적인 생각이다. 고전소설 속 허구의 세계를 통해서 현재도 여전히 문제가 되고 있는 양성에 대한 관점을 볼 수 있었다. 당시의 신분사회, 입신양명의 길이 차단된 여성의 삶에서 한 번쯤 탈피하여, 남성 우위에 서서 통쾌한 삶을 영위하고자 하는 분분했던 마음이 작품으로 표출된 게 아닌가 생각해 본다.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제작사로부터 상품을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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