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처럼 신화 - 스토리텔링 세계신화 아시아클래식 7
김남일 지음 / 도서출판 아시아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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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에는 신화라면 인간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우리 인간 세계와는 좀 먼 세계의 이야기로 생각했는데,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며 다시금 들었던 생각은 신화란 알게 모르게 우리 삶에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것이다. 참 신기하다. 아스라한 기억 저편에 유년의 기억이 떠오른다. 새벽녘 어스름에 장독대 앞에서 두 손을 모아 무언가 빌고 계시던 엄마의 모습. 까맣게 잊고 있던 기억이 책을 읽으며 되살아나는 것도 경이로움이다. 그렇게 신화는 우리의 삶에 면면히 이어져 왔고 우리의 마음속 깊이 각인되어 왔던 것이다.


 과학기술 문명의 발달로 첨단을 달리고, 우주선을 발사하는 이 시대에 신화가 통하는 세상인가 의아하기도 하다. 하지만, 조금만 더 관심을 기울여보면 신화의 그림자는 여전히 우리가 사는 세상 가까이에 존재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우리의 편리한 발이 되어주는 생활필수품 자동차의 이름에 신의 이름이 들어있고, 가장 많이 팔리는 자양강장제도 바카스신의 이름이 붙어 있다. 뿐만 아니라 인도가 최근 개발했다고 발표한 대륙간 탄도미사일 아그니-5 조차도 막강한 위력을 지닌 불의 신 아그니에서 비롯되었단다. 마치 소유하는 물건에도 신의 능력을 빌어 강하고 완벽하게 되고 싶은 인간의 욕망을 반영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신화란 우리 인간세계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임을 알 수 있다.


 이 작품에서 다루는 신화는 그 수도 다양하고 폭이 넓다. 동서양의 건국신화, 영웅신화 등을 아우르며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중에는 익히 알고 있던 것도 있지만, 처음 알게 되는 이야기도 있어 신화의 세계가 이렇게 이야기가 풍부하구나, 감탄하게 된다.


 제 2신화 이렇게 읽어도 된다에서 중남미 3대 문명 중 하나인 마야 문명을 대표하는 신화 역사서 포폴 부에 전해지는 신화를 소개한다. 여기서 오늘날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공동주택 층간소음의 뿌리를 신화에서 연상할 수 있다는 것이 참 놀라웠다. 마야 문명 사회에서 공놀이 할 때의 소음을 농부들이 농지를 정리할 때 내는 소란스러움으로 해석하여 그 소음이 지하세계의 신들을 분노케 만들었다는 논리다. 이렇듯 신화의 세계를 알면 현실의 생활에서도 이웃과 다툴 일이 조금은 줄어들지 않을까 싶다. 어떤 세계를 알고 이해한다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을 가질 수 있고, 그만큼 포용력 있는 인간으로 성장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신화는 과학적인 잣대로 비교할 수 없다. 깃털이 몸속으로 들어가 임신을 하게 되거나, 유화가 햇빛을 받아 주몽을 낳는 일, 알란 고아가 달빛의 정기를 받아 임신하는 몽골 신화가 어떻게 과학적인 논리로 설명 할 수 있겠는가. 신화란, 사실이냐 아니냐의 여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쓸모가 있느냐 없느냐의 여부다. 세계적인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죽는다는 것은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을 것이다……. 거기에 두려워할 만한 것은 없다.”(p25)고 했다. ‘죽음이야말로 신화를 더욱 풍성하게 해주는 근거이며 원천임에도 간단히 무시하고 마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신화는 상징과 은유의 언어이기 때문에 과학의 사실적 언어로는 읽을 수 없다는 말에 공감이 간다.


 이 책을 통해서 새롭게 느꼈던 부분은 신들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온갖 부정적인 모습, 이를테면 질투, 근친상간, 서슴지 않고 저지르는 살인 등 도덕성의 부재에 대한 점이다. 신들은 인간 위에 군림하면서 이렇게 행동해도 되는 걸까. 먼저 모범을 보여야 하는 건 아닐까. 신화를 통해서 대립과 갈등이 무수히 존재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우리 인간세상을 들여다보며 참조 할 수 있다. 누구나 행복하고 기쁜 일만 있는 태평성대 일 수만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온갖 사술(邪術)과 무질서의 범람은 피할 수 없는 인간세상의 조건임을 알 수 있다. 신화 또한 인간의 상상 속에서 나온 이야기니 어쩌면 인간세상과 다를 바 없는 우리의 삶과 닮은꼴 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신들이 하던 노동을 대신 시키기 위해서 인간을 탄생시켰다는 메소포타미아 신화는 차라리 솔직하다.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 신을 만들었지만, 인간이 늘어나자 덩달아 불평불만도 늘어났을 것이다. 인간들이 불평하는 소리에 잠을 제대로 이룰 수 없게 되자, 인간들을 없애버리려고 홍수를 일으킨다. 가장 유명한 것이 <노아의 방주>. 가만히 생각해 보면 신화나 인간세상의 이야기나 별반 다를 것이 없는 것 같다. 인간들끼리 싸움을 벌이고 여러 가지 이념을 내세워 테러를 일으키고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는 세상이다. 신이라고 해서 따뜻하지도 않다. 오히려 불같은 성격에 한 치의 너그러움도 없다.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내세워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모두 제거한다.


 흔히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처럼 동일선상에 있다고 한다. 신화에서도 그러한 징후를 찾을 수 있다. 사체화생(死體化生)신화 라고 할 수 있는 하이누웰레 신화가 그것이다. 하이누웰레가 죽은 후 시신을 묻은 곳에서 구근이 자란다. 죽음은 또 하나의 생명을 창조한 셈이다. 인간에게 유용한 작물이 말이다. 북미 인디언들에게 가장 귀한 두 가지 작물인 옥수수와 담배의 기원에 관한 신화도 그렇다. 그렇게 죽음 뒤에 소생하는 생명, 생물의 창조 이야기가 결코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고,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왠지 무시할 수 없는 그 무엇은 인류에게 심어진 신들에의 경배가 면면히 이어져 온 때문이 아닐까. 이러한 사체화생(死體化生) 신화는 농경신화 뿐만 아니라, 세계의 무수한 창세신화 중에도 그런 모티프를 찾을 수 있다니 신기하기만 하다.


 신화가 지닌 스토리텔링은 이제 국가적인 문화유산으로도 내세울만한 무기가 된 것 같다. 서사시에 관한 한 풍부한 전승을 보이지 못했던 중국이 오늘날은 사시와 장편서사시가 풍부한 나라가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중국 내 많은 소수민족을 중국의 이름으로 포함했기 때문이다. 수 천 년 간 주변의 오랑캐로 업신여기던 그들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취한 행동이다. 장족(티베트족)<게세르>, 키르기스족의 <마나스>, <장가르>를 중국 민족의 3대 서사시로 간주하고 앞의 두 가지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했다고 하니 그 약삭빠름이 놀라울 따름이다. 또 악몽의 신화라 불리는 현대의 신화나치즘을 언급한다. ‘다른인간과 자연에 대한 자신들의 지배와 억압을 정당화하기 위한 합목적적 도구였다.


 신화는 도처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문학작품, 영화, 음악 등 우리가 누리고 있는 각종 예술 작품에 끊임없이 재현되고 있다. 사라져가거나 잊혀져가는 신화적 유산인 문화재를 되살리는데 시인, 예술가, 철학자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특히 켈트의 시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는 아일랜드 신화와 전설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쿠훌린에게 대단한 애착을 보였다. 다름 아닌, 영웅 쿠훌린을 통해 아일랜드 민중의 집단적 정체성을 환기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인문학이 시대의 흐름을 타고 되살아나듯이 신화 또한 꽃처럼활짝 피어날 것이다. 과학 문명은 첨단에 첨단을 달리고 있는 시대이지만, 인류에게서 이야기를 빼앗아 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저자의 해박하고 다양한 신화에 대한 지식에 다시 한번 놀라고, 상상의 즐거움은 덤이다. , 이건 말도 안 돼, 하면서도 몰입하는 자신을 본다. 신들은 멀리 있지 않다. 항상 우리들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다. 풍성한 상상력의 세계로 안내하는 신화의 세계에서 삶의 지혜와 의미를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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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 (무선) 웅진지식하우스 일문학선집 시리즈 5
다카하시 겐이치로 지음, 박혜성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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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구에 별로 관심이 없는 내가 작년인가 야구가 나오는 일드를 본 적이 있었다. 회사에 소속된 야구팀들이 시합을 벌이는 장면이 많이 나왔는데, 야구선수를 좋아하는 연인의 이야기가 어울려 더욱 흥미로웠다. 이참에 야구에 대해 공부해 볼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그럴만한 기회도 갖지 못한 채 이 책을 만나게 되었다. 여기서는 야구만이 아니라 별 관계없을 것 같은 생뚱한 다른 이야기도 나온다. 좀 능청스럽고 빤하다고 해야 할까. 소년이 들어서는 안 되는 좀 야한 이야기도 서슴없이 대화하는 장면이 있어 당황스럽기도 하다.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인지 감이 잘 오지 않는다. 작품의 초반부는 그래서 더욱 지루한 느낌이다. 분명히 한글인데, 의미는 모르겠고 글자만 겨우 읽어내는 기분? 이다. 내가 우리의 작가 이상의 작품을 읽고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계속 읽을 수밖에 없고. 좀 시간이 지나면 그런대로 견딜 만하다. 온통 야구 이야기다.


 배경은 1985, 만년 꼴찌 신세이던 일본의 한신 타이거스가 일본 시리즈에서 우승하는 이변이 생겼는데, 어이없게도 선수들이 줄줄이 그만두면서 야구가 세상에서 사라져버린다는 설정이다. 야구를 좋아하는 광팬들에게는 실로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겠지. 이렇게 야구가 없어진 세상에서 가상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야구에 대한 일곱 가지 단편이 들어있다. 900편 쓰기, 포르노 100편 보기에 도전하는 초등학생, 카프카야말로 열렬한 백업 포수였다고 믿는 노인이 있고, 일본 야구 창세기 기담 등 오로지 야구에 대한 기상천외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창세기 기담의 발 빠른 닭배고픈 늑대이야기는 지루할 만큼 길게 이어지면서도 재미있다. 시와 포르노가 야구와 무슨 관계가 있기에 그것에 열중하는 것일까, 의아하기만 하다. 모더니즘 소설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민 문제작이라는 평처럼 일반 소설과는 매우 다르다. 우리가 읽던 익숙한 문체의 언어가 아니다. 새로 언어를 구축했다고 할까. 읽어나가는 도중 당황스런 부분이 꽤 있다.


 야구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침대씬 이야기로 넘어간다. 그러다 약간의 철학적 사고를 엿볼 수 있는 문장이 툭 튀어나오기도 한다. 야구를 소재로 한 소위 갖추어진소설이 아닌, 마치 야구 이야기를 쓰기 위해서 쓴 글 같은 느낌이다. 마치 공부를 하다가 자꾸 딴 생각의 세계로 넘나드는 상상의 세계처럼. 위대한 작가와 철학가를 등장시키면서 거침없는 이야기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나에게 야구를 가르쳐주신 큰아버지가 곧잘 말씀하셨어요. ‘연결이 끊어지면 끝이야하고.

너는 아직 알 수 없겠지만 야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연결이야.’(P96)

연결...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돌고 돌아가는 게임의 장면을 떠올릴 수 있다. 매끄러운 연결의 동작이야말로 경기에서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 테크닉이 아닐까. 야구에 대해 문외한인 내가 이 책을 읽기 위해서는 야구 용어를 검색하여 뜻을 알아야 했다. 참으로 많은 규칙과 용어가 존재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마찬가지다. 그것들로 우리는 연결되고 사회의 시스템은 원활하게 작동하는 것이다.


 정신병원을 전전하던 소년의 큰아버지는 소년에게 야구를 가르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야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속임수란다. 이걸 할 수 없으면 일류 야구 선수하고 할 수 없다는데. 이 세상에서 야구와 관계없는 건 하나도 없다고도 하고. 이것 또한 거꾸로 말하면 야구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축소판이라고도 해석할 수도 있다. 야구선수가 되기 위해 힘든 단련을 한다. 어떤 날은 야구에 대한 ()를 두 시간 내에 900개를 짓기도 하고. 선수가 아니어도 우리는 힘든 단련을 하며 살아간다. 하루하루의 삶에서 꼭 승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서 많은 것을 참고 견딘다. 그것 또한 단련이다. 힘든 단련. 이쯤 되면 야구와 인생은 닮았다고도 할 수 있겠다.


 일단은 야구광들의 이야기임에는 틀림없다. 긴 것으로 둥근 것을 친다는 게임. 하지만, 책의 제목처럼 절대로, 우아하고 감상적이지는 않다. 단지 그들의 열정적인 야구 사랑을 제목에 담아본 것은 아니었을까 짐작할 뿐이다. 야구가 없어진 가상의 현실에서 야구에 관한 이야기를 책에서 찾아 모으는 사람, 야구를 배우기 위한 소년 등 여러 사람을 등장시켜 야구 이야기를 이어간다. 저자는 이 작품을 필립 로스의 <멋진 미국 야구>의 번역본을 읽고 이 작품의 모티프로 삼은 것 같다. 원제목은 위대한 미국 문학(The American Novel)'이었다는. 야구 규칙을 몰라도 재밌게 읽은 이 책의 팬들이 많은 모양이다. 하긴 우리가 읽는 세상의 많은 책들의 어떤 분야에 대해서 다 알고 읽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모르기 때문에 읽고 배우는 것이 아닐까. 제목과 다른 내용의 이야기가 색다른 매력이 될 수도 있겠다. 야구 이야기 속에서 일본인들의 속마음도 조금은 알 수 있지 않을까. 어떤 내용인지 궁금하다면 직접 확인해 보기 바란다. 황당한 재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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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픽 미스터리
다비드 포앙키노스 지음, 이재익 옮김 / 달콤한책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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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독자를 넘어서 자신의 책을 출간하고 싶은 꿈이 있다. 작가지망생은 차고 넘치지만, 한 권의 책으로 내는 일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래도 옛날에 비하면 자비출판의 방법도 있어서 출판 시장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확대되었지만, 순수하게 작품성을 인정받아 책으로 나오기까지는 미미하다고 하겠다. 이 작품은 책을 소재로 하여 벌어지는 미스터리다. 미스터리라고 해서 공포를 느끼는 이야기는 아니다. 미심쩍은 사건을 다른쪽 시선에서 전말을 파헤치기 위해 추적하는 이야기다.

 

 이야기의 도입은 미국 작가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작품 <임신중절>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남자 주인공인 도서관 사서가 나오는데 그 도서관은 출판사들이 거절한 모든 책을 받는다는 내용이다. 그의 생각은 열혈 독자에 의해 누구도 원하지 않은 책들의 도서관은 실현된 모양이다. 정말일까 의심스럽기도 하지만,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것을 모티브로 하였을까. 프랑스 브르타뉴 지방에 크로종 시립도서관이 생긴다. 재미있는 구성으로 몰입하며 읽을 수 있다. 대사도 얼마나 맛깔 나는지 읽다가 쿡쿡 웃게 한다. 출판되지 못한, 그러니까 거절당한 원고를 모두 받아준다는 기상천외한 프로젝트를 계획한다. 이 도서관의 관장인 구르벡이 그 프로젝트의 기획자다. 이 아이디어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고, 산티아고 순례길을 방불케 하는 여정이 이어진다. 그렇게 십 년이 지나면서 천 권에 달하는 원고가 쌓인다. 구르벡은 원고에 파묻혀 지내가다가 중병에 걸려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아내가 있었는데, 단 몇 주 만에 집을 나가고. 아무도 왜 나갔는지 모르며, 소문만 무성한 가운데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진다. 구르벡이 이 미스터리의 열쇠를 쥐고 있는 걸까. 궁금증이 폭발하며 다음 장을 넘기느라 바쁘다.

 

 어릴 때부터 꿈꾸던 출판사 편집자로 일하는 델핀은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지닌 매력적인 아가씨다. 작가들과 함께 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감을 느낀다. 그런 그녀는 젊은 작가 프레드 코스카의 데뷔 소설을 발견하여 강렬한 촉을 느끼면서 둘은 연인 사이로 발전한다. 이들의 관계는 급속도로 진전하여 프랑스 서쪽의 땅끝 마을 델핀의 고향으로 휴가를 보내러 갔다가, 크로종 도서관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뼛속까지 편집자의 임무에 충실한 델핀이 그렇게 흥미로운 프로젝트를 흘려 들을 리가 없다. 단짝이 된 프레드와 함께 탐방한 도서관에서 걸작을 발견했다며, 흥분한다. 책 제목은 <사랑의 마지막 순간들>이며, 글쓴이는 앙리 픽. 여기서 가장 백미는 사랑의 마지막 순간을 푸시킨의 임종 순간과 교차시켜 묘사했다는 것. 푸시킨의 <예브게니 오네긴>이 언급된다. 이 작품을 보니 발레리나 강수진이 떠오른다. 강수진의 은퇴작인 <오네긴>은 러시아의 문호 푸시킨의 소설 <예브게니 오네긴>에 차이코프스키의 서정적인 음악을 더한 <오네긴>으로, 자유분방하고 오만한 오네긴과 순진한 시골 처녀 타티아나의 비극적인 사랑을 담은 작품이라고 한다. 이처럼 실명으로 언급되는 작가와 작품의 이야기도 지적 호기심을 불러 일으킨다.

    

 앙리 픽은 평생을 피자 요리사로 살다가 2년 전 죽은 인물로 밝혀진다. 미망인 마들렌 할머니와 딸 조세핀을 만나 인터뷰하며 야단법석이다. 설마 진짜 앙리가 소설을 썼을까 의아해 하다가 달리 방법이 없으니 모두 믿는 분위기로 휩쓸린다. 언론, 방송의 홍보 효과를 얻은 이 사건은 엄청난 파급력으로 당사자들과 주변을 흥분시킨다. 고전문학을 읽다보면 주인공이 갑자기 생각지도 않던 친인척의 거대한 재산을 상속받는 상속자가 되는 꿈같은 횡재가 종종 들어있다. 이 경우도 마찬가지다. 정황상으로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고인(故人)이 소설을 남겼다니, 믿기 어렵지만 작품의 내용에서 자신들의 자취를 찾아낸다. 이건 내 이야기다 라며 짜 맞춘다. 약간의 억지가 엿보이는 장면이다. 이런 상황이면 집 나갔던 남편도 돌아온다. 바로 조세핀의 전남편 마르크. 아내를 배신하고 떠난 마르크의 속셈은 뻔하다.

 

 한편, 믿기 어려운 이 사건을 삐딱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있다. 한때 악명 높은 문학평론가로 일했던 기자 출신 루슈가 등장한다. 여러 단서를 모으기 위해 조세핀에게, 또 조세핀의 가게로 찾아가는 등 진실을 밝히기 위해 열정적이다. 앙리의 친필 편지를 입수하는 순간 어느 정도 사건의 실마리를 찾아낸 듯하다. 이것은 어떤 반전으로 이어질까.

 

 미스터리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찡한 감동도 있다. 아버지 생전에는 그다지 친밀감도 느끼지 못했던 조세핀은 과거를 떠올린다. 아홉 살 때 받은 편지를 찾으면서 많은 음반을 뒤적이고 거기서 추억을 되새긴다. 부친 사후(死後)에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소설을 쓴 아버지가 위대하게 느껴진다. 이렇듯 물질만능의 태도 또한 여실히 드러난다. 진실의 여부는 안중에 없고 세상을 다 얻은 것 같다. 평범한 사람들이 예상치 않은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되면 우쭐하면서도 남의 옷을 입은 듯 마음은 불편하다. 마들렌과 조세핀도 차츰 평정을 되찾으려 한다. 진실을 알아야겠다며. 구르벡의 뒤를 이어 도서관장이 된 마갈리 등 주변 인물들의 긍정적인 방향으로의 심경의 변화도 흥미롭다.

 

 결국 초반에 잠깐 출현했다가 죽은 구르벡은 미스터리를 제공한 셈인가. 그것을 집요하게 파헤치려는 루슈. 루슈와 조세핀의 조합은 의외로 잘 어울린다. 애써 찾은 진실을 외면하고 적절한 선에서 현실과 타협하고 안주하려는 인간의 본성 역시 들어있다. 구르벡은 왜 자신의 이름으로 하지 않고 앙리의 이름을 빌렸을까. 단 몇 주를 함께 살았던 마리나를 사랑했지만, 붙잡지 못한 그 안타까운 마음을 책으로 남겼고,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하는 마음에서였을까. 풀리지 않는 궁금증을 안고 벌써 후반부에 다다르게 된다.

 

 몇 개의 반전으로 이렇게 마무리되는 건가 싶었는데...

, 이건 또 뭐지? 더 큰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서 인간의 이기심이 보인다. 책으로 성공하고 싶은 작가와 작품을 발굴해서 유명세를 타고 싶어 하는 편집자를 비롯한 출판계의 인물들.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더니, 트릭이 들어 있었다. 여우가 자기 꾀에 넘어간다고 하는 상황과 흡사하다. 영문도 모른 채 이들의 마케팅 전략에 평범한 마들렌 할머니와 딸 조세핀은 휘말렸던 것인가. 책 한 권을 베스트셀러로 만들기 위해 온 역량을 쏟는 출판사와 평론가 영업대리인들의 역할을 보는 것은 흥미로웠다. 잊을만하면 표절 시비에 휘말리는 사건이 나온다. 이것은 더 큰 사건이다. 실제로 이러한 이야기가 있을까, 의아하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될 미스터리다.  단지 재미있게 읽고 약간의 교훈과 감동의 여운이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순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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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노래
레일라 슬리마니 지음, 방미경 옮김 / arte(아르테)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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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장면은 아기가 죽었다.’는 처참한 상황에 쇼크 상태의 어머니가 절규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 사건이 왜, 어떻게 발생했는지, 의문을 갖고 하나씩 단서를 찾는 구성으로 되어있다. 문장은 간결하면서도 거칠다고 할까. 격정, 혐오감이 배어 있다. 보모 루이즈는 아이들에게 공포심을 유발하는 놀이를 하며, 아이들은 즐거워한다. 화가 프랑크의 그림은 고통으로 꼼짝하지 못하거나 황홀감에 마비된 여자들의 몸이었고, 그것은 그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루이즈의 남편 자크와 루이즈는 타인의 고통, 공포를 보며 그것을 즐긴다. 이렇게 가학적이고, 분노를 간신히 참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불안감이 느껴진다. 이는 다름 아닌 등장인물들의 내면이 누군가를 향해 분노와 혐오로 펄펄 끓고 있기 때문이다.


 폴과 미리암 부부에게 딸 밀라와 아들 아당이 있다. 특히 둘째 아당은 미리암에게 집에서의 안온한 삶을 떠나지 않아도 되는 핑계일 만큼 아이들을 돌보는 모성애로 언제까지나 행복할 줄 알았다. 언젠가부터 그 시간이 길게 느껴지기 시작하고, 편안한 행복감이 삐걱거린다. 시어머니와도 마음이 맞지 않아 매 순간 언제든 난투극으로 이어질 조짐을 보일 정도라니. 부모의 지원도 없이 어렵게 학업을 마치고 법관이 되었을 때 그 기쁨, 처음 변호사복을 입었던 순간이 되살아난다. 남편을 시기하고 아이들을 걸림돌로 느끼기 시작한다. “얘들이 날 산 채로 잡아먹는구나.’ 마음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 어디선가 불행한 일이 불쑥 터질듯해서 내내 불안한 느낌이다.


 미리암이 일을 하기 위해 보모가 필요했고, 루이즈를 집에 들이게 되는데. 다루기 힘든 밀라를 제압하고, 밀라의 생일파티에 친구들을 초대하여 아이들을 홀리듯 데리고 논다. 보모로서 역할 외에도 가사도우미 역할까지 훌륭하게 해낸다. 점점 빨리 와서 점점 늦게 간다. 시키지 않은 일까지 완벽하게 해내는 것을 불편해 하면서도 루이즈는 이제 이들 부부에게 없어서는 안 될 만큼 절실하게 필요한 존재가 된다.


 ‘삶은 이런저런 책무와 완수해야 할 계약, 잊으면 안 될 약속의 연속이 되었다. …… 그들은 그렇게 일에 치인다는 것이 곧 성공을 알리는 징표이기라도 한 듯, 끊임없이 정신이 없다는 말을 한다. 그들의 삶은 용량을 초과해서, 남은 자리는 겨우 잠을 위한 것일 뿐, 무언가를 응시할 자리는 전혀 없다.’(P149~150)


 폴이 너무 바빠서 아이들과 같이 하지 못하는 것을 미리암이 걱정하자, 그래도 루이즈가 있지 않느냐며 안도한다. 미리암도 변호사로 승승장구하고 있으며 전적으로 육아와 살림을 맡고 있는 루이즈 덕분에 행복감을 느끼는 분위기다. 폴의 어머니는 돈 욕심과 허영의 노예가 되었다고 통탄하지만. 두터운 신뢰감을 쌓아 가족 같은 존재가 되어 함께 그리스에서 휴가를 즐기게 된 루이즈는 처음 맛보는 아름다운 황홀감에 계속 이들과 같이 살고 싶은 꿈이 생긴다. 하지만, 정신없이 달려가는 삶은 방심한 사이에 어떤 틈을 노리고 독버섯처럼 무성해지는 무언가를 눈치 채지는 못한다. 제 살 속에 파고 든 손톱이 생채기를 내듯이, 루이즈는 어느새 그들의 삶 속에 너무 깊이 박혀 있었다.

 

도자기 인형처럼 예쁘고 차분한 태도와 우연히 들은 루이즈의 노래 소리는 아주 아름다웠다. 오래 지내다 보면 처음에 간과했던 본연의 모습이 하나 둘 눈에 들어오기 마련이다.어느날 갑자기 루이즈에게 국고에서 온 빚독촉 편지, 루이즈의 너무 완벽하고 예민한 행동 등은 이들 관계에 틈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또한 화장 사건이라든지, 다 먹고 버린 통닭뼈를 깨끗이 닦아서 장식으로 올려놓은 기이한 행동으로 인해 혐오감은 더욱 커지고 해고 시키려는 결심에 이른다.


 예민한 루이즈가 이런 분위기를 눈치 채지 못 할 리가 없다. 남편으로부터 폭력의 상처와 빚을 떠안은 그녀에겐 어떤 것도 위안이 되어주지 못한다. 평생을 자신을 위해 요리를 해 준 사람이 없었다. 빚을 해결하기 위해 발버둥 치느라고 딸 스테파니는 불쌍한 사고뭉치 망나니가 되고. 모든 술책을 동원해서 루이즈를 만나러 온 에르베에게도 마음이 끌리지 않는다.


 ‘그녀는 그가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서 두 눈은 뚫어져라 그 손을 바라보고 있다. 남자의 손, 자리 잡는 손, 시작하는 손, 앞으로 더 많은 것을 원할 손, 본색을 잘 감추고 있는 얌전한 이 손.’(P238) 어쩌면, 이렇게 간결한 문체 속에 예리함을 담고 있는지 경탄할 지경이다. 남자에게 덴 상처가 있는 루이즈의 심상은 꿰뚫어 보고 있다. 루이즈의 머릿속에는 오직 그녀의 몸을 숨길 둥지, 따스한 은신처 하나 마련하는 것이었다. 점점 루이즈의 마음은 강박관념으로 복잡해진다. 자신의 왕국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이 처한 상황을 말끔히 해결하려면 아기가 절실하다.


누군가 죽어야 한다. 우리가 행복하려면 누군가 죽어야 한다.’

이러니 벌을 받을 거야. 사랑할 능력이 없으니 벌을 받을 거야.’(P273)

이렇게 루이즈의 머릿속은 이 후렴구와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 작품이었다. 극한 상황에 처하면 쥐도 고양이를 문다는 말이 있다. 극심한 가난과 고통은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양심마저 앗아간다. 안으로, 더 깊은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서 주변을 살필 수 없다. 사실 이야기의 정황상 끔찍한 이 사건을 막을 수도 있었다. 기이한 행동에 대한 의심을 품고 좀 더 신경을 썼더라면... 미리암은 특히 루이즈를 너무 믿는 구석이 있었고, 그녀가 누구인지도 자세히 알아보지도 않고 주위의 평판에만 의지한 잘못도 있다. 결국 그들만의 세계에 다가가지 못한 루이즈...


 이 작품 여성작가의 공쿠르상 수상작은 처음 만나게 된 작품이다. 여성 작가의 시선으로 여성들에게 민감한 육아 문제와 자아실현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이름을 찾으려는 사람들의 심리와 분위기를 밀도 있게 그리고 있어서 한층 더 공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또는 각국의 내전으로 인해 유럽으로 유입된 난민들이 기존 사회에 투입되어 불협화음의 상황을 빚게 되는 사회의 단면도 짐작할 수 있다. 또 사회적으로 취약한 계층을 위한 복지의 미비는 생활의 불안정을 야기하고, 범죄로 이어질 수 있는 현실성도 보인다. 스릴러 같기도 하고 우화 같은 느낌도 드는 이야기, ? 라는 궁금증을 가지고 속도감 있게 몰입할 수 있는, 결코 달콤하지 않은 현실의 슬픈 자화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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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터의 요리사들
후카미도리 노와키 지음, 권영주 옮김 / arte(아르테)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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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에는 전쟁에 관한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서 단순히 아군이 이기는 장면에 환호를 하며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 내렸지, 그 이상의 생각은 해 보지 못한 것 같다. 이 작품을 만나고 전쟁이란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바꾸어 놓는지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전쟁에 임해서는 어떻게든 적을 죽여야만 내가 살 수 있다. 적을 죽이는 것에 대해 어떤 일말의 양심적 거리낌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 주인공의 입을 빌려 적을 죽인, 즉 살인을 했다는 자책감을 이야기하는 장면은 인간적인 성숙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군대와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요리사들을 주된 배경에 내세워 전장(戰場)에서 겪는 다양한 사건과 에피소드를 바탕으로 많은 것은 생각거리를 안겨준다.

 

 193991일 하켄크로이츠의 상징인 나치스 독일군이 폴란드를 침공하고, 프랑스의 항복으로 나치스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 이탈리아와 일본은 독일과 동맹을 맺으면서 두 번째 세계대전의 구도로 들어간다. 이렇듯 유럽은 나치스 하에서 혼란한 상황이었고 미국은 대공황으로 경제적으로 힘들고 어수선한 상황이었다. 194112월 일본군이 하와이 진주만에 정박 중이던 미국 전함을 폭격, 미국은 참전을 결정하였고 수많은 젊은이들은 자유와 정의를 위해 싸우자는 슬로건하에 너도 나도 지원하는 분위기가 감돌았다. 이 작품은 세계 최대 전쟁인 나치 독일과 연합군의 전쟁사와 허구를 가미하여 탄생한 전쟁 소설이라 하겠다.


 ‘먹는 것이 살아가는 낙이었던 티모시()(‘키드로도 불린다)은 가족의 만류가 있었지만, 할머니의 응원에 힘입어 입대를 결심한다. 얼룩덜룩 자국이 남아 있는 낡은 레시피 공책을 가지고. 배치를 받은 기지에서 조리병 증원 모집 공고를 보고 마음이 동하는데, 사실 군대 내의 조리병은 무시당하거나 미움을 받는 분위기였다. 어쨌든 마음이 간절하다보면 누군가 끌어당긴다. 팀이 밥을 먹는 것을 보고 에드워드(에드)는 조리병을 권유하고, 오등 특기병이 되어 미 육군 제101 공수사단 제 506 낙하산 보병연대 제3대대 G중대 관리부 소속 조리병이 된다. 팀과 에드, 디에고, 라이너스 이들은 절친이 되어간다. 이들의 첫 임무로 194466일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투입되어 C-47 수송기에서 강하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 코탕탱 반도에 낙하하여 보급 물자 확보, 사령부 및 구호소 설치 지원, 대원들의 식사 관리의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는 한 가운데 적의 대공포화가 작렬하는 절체절명의 상황이다.


 전쟁터와 기지 내에서 기이한 사건들이 벌어진다. 낙하산을 모으는 라이너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600상자나 되는 분말 달걀, 네덜란드 민가에서 벌어지는 얀센 부부의 죽음, 유령을 보았다는 디에고... 기이한 이 사건들을 상부의 손을 빌리지 않고 동료들끼리 해결을 해 나가는 구성이다. 하나씩 하나씩 드러나는 사건의 전모에서 군대 조직 내의 비리나 군인의 아픔이 나타난다.


……전쟁터만큼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의 경계가 모호한, 연옥 같은 장소는 없잖냐. 6월에 강하했을 때부터 우리는 각자 사신을 등에 지고 신의 재판을 기다리고 있어. 나도, 너도, 적들도 다들 이미 유령이나 다름없다고. 진짜가 걸어 다녀도 이상할 거 없지.”(P349)


 유령의 소리를 듣고 하루하루 두려움에 의기소침하는 디에고. 이 사건에는 병사의 공포심과 고독이 있었다. 오로지 명령에 의해 움직일 뿐 아무런 선택권이 없는 군대다. 다치고 아파서 구호소에 들어가면 일시적으로 전선을 벗어날 수 있지만, 피냄새가 진동하고 아픔에 절규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숨을 거두는 모습을 보는 일은 또 다른 고문이다. 전쟁터는 연옥이며 구호소는 연옥에서도 가장 어두운 밑바닥, 지옥과의 경계에 있다는 말이 아픔으로 다가온다. 싸울 수 없게 되니까 상처를 내고, 죽지 않을 만큼만 자해를 해서 본국으로 송환되기 위해서. 유령의 소리는 바로 그런 병사의 자해 소동으로 매듭을 짓는다.


……돌아갈 수 있을까.”

당연하지. 돌아가지 않으면 안 돼.” 던힐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단언했다. 평소답지 않게 말수가 많았다. “가족이 웃을 수 있는 건 렌즈 저편에 네가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야. 네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면 이런 사진은 영원히 못 찍게 될 거다. 그러니까 살아야 해.”(p331)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전쟁은 사람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는다. 가족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종전(終戰)의 기약이 알 수 없는 두려움은 체념을 부르기도 한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든 힘없고 가난한 사람은 전쟁터로 내몰린다. 약간의 충성심과 치기어린 혈기도 있었겠지만, 결국은 돈에 이끌림을 받는다. 제각각 사연을 품은 채로 만난 이들은 가족보다 더 가까운 사이가 된다. 내가 죽거나, 네가 죽을 수 있는 곳이 전쟁터다. 부상을 당해서 구호소에서 죽어가기도 한다. 눈을 뜨면 팔, 다리가 붙어 있나 확인해야 했으며, 붙어 있으면 안도감을 느낀다. 겹겹이 쌓여 있는 시체 더미, 살을 에는 듯한 추위, 배고픔을 함께 겪은 우정은 아름답기도 하지만, 참담하기도 하다. 눈앞에서 죽어가는 동료를 바라보아야 하는 아픔이다. 먼저 보낸 수다쟁이 오하라, 안경잡이 에드. ‘만약이라는 말은 후회와 한탄의 또 다른 이름이다. 생사를 같이 했던 형제 같은 전우를 잃은 상실감에 목이 메인다. 죽고 싶지는 않지만 혼자 외떨어지는 게 싫어서, 구호소에 가기 싫고 동료들과 함께 총을 들고 싸우는 편이 훨씬 낫다는 말도.

 

닥터 브로콜리는 칠판에 아무렇게나 갈겨썼다. ‘열등 인종(운터멘슈)’. 유대인. 그리고 침략국에서 선별된 사람들이다. 녀석들은 평범하게 살던 사람들의 생활을 어느 날 갑자기 빼앗고 노예로 부리면서 그들이 재배한 식량을 독차지한다. 침략이란 곧 스스로를 배불리기 위해 피지배자에게 굶주림을 떠넘기는 행위다.(p353)


인간이 존재하는 한 전쟁은 없어지지 않아.”(후략)(p485)


 고래(古來)에도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 크고 작은 전쟁이 끊임없이 자행되고 있다. 인간이 인간을 살상하고 수백 수천 년 된 문화 유적지를 파괴한다. 자신들의 이념을 강요하려는 인간의 이기심과 탐욕이다. 소중한 생명을 하찮게 생각하는 인간 경시의 현실이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전쟁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말이 무섭게 파고든다. 틀린 주장이었으면 좋겠지만, 어쩌면 맞는 말인지도 모른다. 오랜 역사에서부터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을 보면.

 

 작가는 각국의 이해관계로 인해 생긴 정의가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 것인지 보여주고 싶었다는 의도로 집필했다고 한다. 이 작품을 리얼하게 묘사하기 위해 많은 서적, 웹사이트, 영상 작품을 집요하게 파고들었고, 본문에 등장하는 독일어는 독일인에게 감수를 부탁했으며, 군사 용어나 미군, 독일군의 에피소드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또 하나의 나의 느낌은 독일을 비롯한 추축국에 속한 일본, 일본인의 한 사람으로서 양심적 거리낌이 이 작품을 쓰는 작은 계기도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미스터리한 사건을 하나하나 해결해 가는 스토리의 구성은 놀랄 만큼 재미있다. 전쟁터의 젊은 군인의 이야기로 유쾌 발랄한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고, 전쟁으로 인해 인간과 인간의 삶은 어떻게 바뀌는지 보여주는 감동의 휴먼 드라마였다. 아직도 남아있는 인종차별 문제를 비롯하여 어린 나이에 입대하여 전쟁터의 다양한 사건, 사람들을 보면서 내면이 성숙해가는 성장소설의 단면도 보여준다. 삶은 계속 이어질 것이고, 전쟁도 삶의 한 부분이라면 어디서든 있을법한 이야기다. 현실에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닌 이상 깊이 있는 울림을 주는 전쟁터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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