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순수의 시대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08
이디스 워튼 지음, 손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1월
평점 :
이디의 워턴은 이 작품으로 처음 만났다. 왠지 제목에 대한 끌림으로 지난 2월에 읽기 시작했는데 재미가 없어서 내려놓았다. 마치 프루스트의 작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는 듯한 지루한 느낌이 몰려왔기 때문이다. ‘가문’과 ‘격식’ 문제에 대한 전문가라는 등장인물이 나오고 전반적인 묘사가 그랬다. 그러다가 최근 읽다 만 책 마무리는 해야지 싶어서 다시 잡았다. 예상과 달리 초반의 지루함을 보상하듯 은근히 재미있어서 몰입하며 읽었다. 소설에서 흔히 나오는 삼각관계를 그린 소설이지만 주인공 뉴런드 아처의 시선과 그의 심리묘사를 따라 읽어가는 묘미가 있다. 워턴은 이 작품으로 여성 최초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고 하는데 무엇보다도 남자 주인공의 속마음을 엿볼 수 있어서 흥미로웠다. 당시 뉴욕 상류층 사교계 남성들의 대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작품에 대한 역자 해설도 작품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등장인물의 이름에 대한 해석도 흥밋거리를 안겨준다. 이 작품은 연애소설도 되지만 비극적 요소도 가미되었다고 했다. 흔히 비극이라 하면 슬픈 이야기나 주인공의 고통을 떠올리기 쉬운데, ‘정보의 부족이나 무지로 인한 오판’ 때문에 주인공이 가혹한 결말을 맞는 것도 비극의 범주라 한다.
이야기의 배경은 1870년대 초 뉴욕 오페라 극장의 공연장 분위기를 묘사하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이를 통해서 당시 뉴욕 상류층의 생활습관이나 문화, 관습을 엿볼 수 있었다. 간단히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뉴런드 아처는 약혼자 메이와 결혼을 앞두고 있던 어느 날 메이의 사촌 올렌스카 백작부인이 음악당에 나타난다. 자유분방하고 파격적인 옷차림, 하고 싶은 말을 참지 못하고 시원하게 내뱉는 성격의 그녀를 처음에는 못마땅하게 생각했는데 어쩐 일인지 점점 마음을 뺏기고, 그녀와 함께하는 삶을 꿈꾸지만 평행선을 달리게 되는 이야기다.
아처는 왜 그런 인생을 살게 되었을까.
실질적으로 단독 주인공인 뉴런드 아처는 자신이 뉴욕 상류층 보통 남자들보다 지식이나 예술 면에 훨씬 더 뛰어난 안목을 지녔으며, 누구보다 더 많은 책을 읽었고 깊이 생각했으며 세상 구경도 많이 한 뉴욕을 대표하는 존재라는 우월감이 있었다. 또 당시 사회적 분위기를 상기할 때 좀 열린 사고방식의 소유자였고, 여성들이 자유롭게 살지 못하는 것에 대해 어떤 연민을 느꼈다. 그런데 확고한 실행력이나 배짱은 좀 부족해 보인다. 올렌스카 백작부인(엘런)을 향한 마음이 열렬했음에도 엮어지지 않았다. 몇 번이나 단둘이 있는 시간이 있었고 둘이 함께 도망가려고 결심까지 했는데 그럴 때마다 방해자가 나타난다. 그 방해자는 어쩌면 당대의 통념이나 분위기였을지도 모른다. 남편과 이혼을 하고 자유롭게 살고 싶은 엘런을 친척들은 가만히 두고 보지 않았다. 온갖 수단 방법을 찾아서 개입하고 남편에게 돌아갈 것을 종용한다. 그것은 강압적이지도 않고 원만하게, 그리고 우아하고 성대하게 송별식을 치르며 그런 분위기를 따를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마치 상류층의 행동방식은 이래야 한다는 것처럼.
여기에 약혼자 메이는 어떤 인물일까. 뉴욕 사교계에서 누구나 신붓감으로 탐을 내는 미모와 재력을 소유한 집안의 딸이다. 약간 순종적이고 전통적인 관습에 따라 규칙을 지키려는 보수적인 성격이다. 되바라진 성격도 아니어서 아처와 사이가 좋아 보인다. 그런데 아처는 은근히 메이를 무시한다. 나이 차가 많아서일까.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고 모든 방면에 뛰어난 자신과는 좀 안 어울리는 건 아닌가, 손해 본 듯한 느낌이다. 어떻게든 엘런과 함께하는 멋진 인생을 꿈꾸었건만 마음만 바빴지 아무 소득도 없이 ‘무미건조한 삶’을 살았다고 회고하는 장면에 이른다. 온순하게 생각했던 메이가 사실은 아처 자신의 머리 꼭대기에 있었음을 알게 된다. 메이도 이미 세상을 떠났고 누구도 엘런과 함께 하는 삶을 말리는 사람도 없게 되었는데 아처는 지척에 있었음에도 엘런을 만나지 않고 발걸음을 돌린다.
겉으로 보기에는 누구보다 듬직한 가장으로 명망 있는 시민으로 살아왔지만 아처 자신에게는 허탈한 인생이었다. 그런데 알고 보면 그런 인생을 살게 된 오류는 아처 자신에게 있었다. 엘런을 향한 열정과 욕망만 있었지 연인의 참모습이나 그녀를 이해하려는 시도는 없었다. 메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에게 사랑을 다해 교육하고 헌신적으로 가정을 꾸려가는 것에 대해 감사하거나 행복해하지도 않았다. 현실을 살면서도 엘런에 대한 환상만을 진정한 현실로 여겼다. 한마디로 허깨비를 쫓는 인생이었다. 어쩌면 아처는 열정과 자신감으로 당당했지만, 당시 상류층의 통념이나 도덕 윤리에서 벗어나는 것에 용기가 없어서 그랬을까.
주인공 아처의 인생을 볼 때는 허탈한 감도 있지만, 메이의 인생은 모든 걸 획득한 인생이었다. 한 가정을 이룬 부부지만 한쪽은 승자였고 한쪽은 패자였다. 이런 아이러니라니. 이디스 워턴은 유복한 미국 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나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등 유럽에서 살았던 만큼 풍요롭게 살았지만, 결별과 이혼의 고통으로 얼룩졌던 시절도 있었다. 당시의 고통을 메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깨끗이 치유하려는 ‘씻김굿’의 요소도 다분히 짐작할 수 있다. 메이는 겉보기와 달리 거짓 임신으로 엘런을 떠나게 하고 아처의 바람기를 막고 끝까지 가정을 지키도록 야무지게 처리했다. 엘런과 아처는 여러 번의 만남이 있었음에도 자꾸만 어긋났다. 정신적으로 메이와 엘런 어느 쪽에도 진정한 사랑과 행복을 경험하지 못한 아처에게 연민이 느껴졌다. 아무것도 모르고 착하기만 한 것 같았던 메이에게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부끄러움과 미안한 마음이 교차한다. 아처에게 미안하지만 좀 웃기고도 살짝 안쓰러웠다. 삼각관계 삼부작이라는 나머지 두 작품도 읽어봐야겠다. 유한한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행복할까. 후회 없는 인생은 없을 것이다. 이 작품을 읽으며 나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더불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져봐도 의미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