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 걸 교리 분별하기 - 교리 차이의 경중 어떻게 볼 것인가
게빈 오틀런드 지음, 이제롬 옮김 / 개혁된실천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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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 교리란 어떤 의미일까? 좀처럼 어려운 사고를 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교리란 그저 어렵고 무슨 내용인지 잘 와 닿지 않는(그래서 별 실용성이 없는) 현학적인 진술 정도로 여겨질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교리를 예수가 전한 사랑의 메시지가 변질된 무엇이라고 생각하거나, 기독교인들을 분열시키는 원흉이라고 보기도 한다.


물론 이런 관점들은 진실의 일부를 담고 있긴 하다. 하지만 일부가 언제나 전체를 그대로 그려내는 건 아니다. 코끼리의 코와 발과 꼬리를 만졌다고 해서 코끼리 전체의 모습을 알 수는 없는 것처럼 말이다.


사실 교리는 기독교의 등뼈를 이루는 부위다. 단지 교리만 있다고 해서 기독교가 완성되는 건 아니지만, 교리가 없다면 기독교는 더 이상 기독교라고 부를 수 없는 무엇이 되어 버릴 것이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일찌감치 이 사실을 알고 있었고, 때문에 자신들이 믿고 있는 바를 정확하게 진술하기 위한 노력을 수백 년 동안 경주해 왔다.





하지만 분명 교리가 일으킨 문제도 적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교리를 붙잡고 있는 사람들이 문제였다. 이와 관련해 다양한 부분을 지적할 수도 있겠지만, 그 중에서 이 책의 저자는 사람들이 모든 교리(적 진술)를 똑같은 중요도를 갖는 것으로 착각한 것이 문제였다고 보고 있다. 어떤 교리는 기독교를 세우는 핵심적인 위치에 있지만, 또 다른 교리들 중에는 그 정도로 중요한 것은 아닌 것도 있다는 말이다.


저자는 크게 네 단계로 교리의 중요성을 구분하고, 복음의 본질에 관한 1순위 교리부터, 교회의 건강과 실천을 위해 매우 중요한 2순위 교리, 기독교 신학에는 중요하지만 그것 때문에 신자들이 나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3순위 교리, 그리고 복음을 증거하고 함께 사역을 하는데 있어 중요하지 않은 4순위 교리로 나눈다.


그럼 각각의 위치에 있는 교리는 어떤 걸까? 저자의 구분에 따르면, 1순위 교리에는 동정녀 탄생과 믿음으로 얻는 의가, 2순위 교리에는 세례의 의미와 방식, 영적 은사의 지속에 관한 견해, 남녀 간의 관계에 관한 내용 등이 포함된다. 3순위 교리의 예로는 천년왕국설(전천년설, 후천년설, 무천년설)과 창조에 관한 견해 등이 들어간다.(4순위는 굳이 언급되지 않는다.)





물론 이런 구분은 어느 정도 임의적인 부분이 있다. 애초에 이런 구분 자체를 저자가 만든 것이니까. 어떤 사람들은 세례나 성찬의 의미에 대해서 2순위가 아니라 1순위라고 주장할 지도 모른다. 창조적 진화론을 주장하는 것이 기독교를 무너뜨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그것이 3순위에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할 지도 모르겠다.


사실 꽤 쎄 보이는 느낌의 제목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 저자가 말하려는 건 오히려 애초의 인상과는 반대되는 느낌이다. 저자는 교리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교리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분열되는 것이 더 큰 문제가 아니겠느냐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이를 위해 교리들의 경중을 나누어서, 어떤 부분에서 서로 견해가 다르더라도 그것이 핵심적인 교리가 아니라면 하나 됨을 추구해야 한다고 반복해서 주장한다.


모든 문제(분열)가 낮은 순위의 중요도를 가진 교리를 지나치게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일어난 건 아니 것이다. 그보다는 서로에 대한 존중의 부족, 자신의 아는 것이 절대적이라고 생각하는 교만함, 그리고 감정의 대립 같은 인간적 관계 차원에서의 문제가 일으킨 분열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내세운 명분이 대개 교리라는 건 참 슬픈 일이다.



이런 차원에서 교리들 사이의 중요도를 구분해 보자는 저자의 제안은 꽤 울림이 있다. 단, 이 구분을 놓고 다시 싸우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기독교는 신비 위에 세워진 종교이고, 신비란 그 특성상 처음부터 우리가 완전히 파악하기 어려운 면이 있을 수밖에 없다. 어떤 하나의 해석이 유일한 것이라는 착각에서만 벗어난다고 해도, 우리(그리스도인들)는 좀 더 힘껏 서로의 손을 잡고 더 큰 일을 위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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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시대, 중세 - 폭력과 아름다움, 문명과 종교가 교차하던 중세 이야기
매슈 게이브리얼.데이비드 M. 페리 지음, 박수철 옮김 / 까치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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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중세를 “암흑의 시대”라는 멸칭으로 부르곤 한다. 암흑의 시대, 즉 아무 것도 볼 게 없고, 기억해 둘 만한 것도 없는 낙후되고 뒤떨어진 미신의 시대, 인류의 진보 역사에 도움될 게 하나 없는 무지와 야만의 시대라는 의미다. 당연히 이런 평가는 지나친 감이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걸 르네상스 초기 인문주의자들의 오만함을 보여주는 표현이라고 너무 매도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그들에게 그들이 살고 있는 시대가 그렇게 답이 없는, 절망적인 느낌으로 와 닿았다는 정도로 이해하면 어떨까.


이 책의 저자들은 바로 그런 중세에 관한 이미지를 뒤집고자 했다는 것을 제목을 보면 알 수 있다. 중세는 암흑의 시대가 아니라 “빛의 시대”라는 것. 이 책의 저자들은 중세 곳곳에서 빛을 발했던 자리들을 크게 보면 연대순으로 살펴나가면서, 중세에 관한 일종의 역사적 스케치를 진행해 나간다.




사실 이런 내용 자체야 크게 드물지 않다. 이제 진지하게 역사를 관찰하는 사람이라면 더 이상 중세를 “암흑의 시대” 같은 시대착오적인 표현으로 부르지 않을 테니까. 역시 관건은 그러면 어떻게 이 작업을 독자의 흥미를 이끌어 내면서도 학문적 성과를 충실하게 반영할 수 있느냐 일 것이다. 그리고 내가 보기엔 이 책은 두 가지 목적을 훌륭하게 달성했다.


책을 읽으며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사실을 기술하는 방식이 아름답다는 점이다. 어쩌면 책을 쓰면서, 여기에 실린 문장들을 반드시 자주 인용되게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을 했던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멋있다. 단순히 미사여구를 잔뜩 붙여서 과장스럽게 표현했다는 말이 아니다. 사안의 핵심을 분명하게 표현하면서도, 질질 끄는 식으로 이어가지 않았다는 말이다. 원문 자체가 뛰어났을 수도 있고, 번역자가 훌륭하게 작업을 했던 것일 수도 있다. 물론 둘 다일 수도 있고. 책을 읽는 입장에서 문장의 질은 의외로 중요한 요소다.


단순히 문장만이 아니다. 전체적인 구성도 나쁘지 않지만, 군데군데 박혀 있는 탁월한 통찰은 책을 읽는 맛을 더해준다. 예를 중세의 여러 민족단위의 개종에 정치적인 고려가 담겨 있었다는 사실이야 많이들 지적하는 부분이지만, 당시 민족들이 가지고 있는 두 가지 선택지―아리우스파와 가톨릭파― 중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에 따른 각각의 이익에 관해서 저자들은 이렇게 설명한다. 아리우스파를 선택할 경우 정통파에 속한 황제나 대주교, 교황들의 영향력으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둘 수 있었고, 반대로 가톨릭파를 선택할 경우 기존의 권력망에 접근할 수 있는 통로를 얻게 되었을 것이라는 내용이다. 개인적으로는 아리우스파 선택에 따른 독특한 이익 부분이 눈에 들어온다.


또, 중세에 수없이 건설되었던 성에 관한 일반적인 인식의 재고(대개는 나무로 만들어진 조악한 성이었다)나, 또 자주 개최되었던 공의회에는 당대 약화되었던 왕권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신앙에 기초한 일종의 대안 질서를 세운 것이라는 설명도 흥미롭다.




물론 천 년에 달하는 그 시기 전체가 환하게 밝기만 했던 건 분명 아니다. 하지만 어디 하나 빛나는 곳 없이 어둡기만 했던 것도 아니다.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그 당시 접할 수 있었던 다양한 지식의 원천으로부터 얻은 다양한 지식과 정보를 토대로 나름의 합리적 사고에 따라 살아왔다.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 낸 빛은 그 시대 곳곳에 알알이 박혀 있었다.


중세에 관한 잘못된 이미지는 단지 과거에 대한 정보 오류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다. 그건 오늘날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에도 문제를 일으킨다. 책의 서문에서 저자들은 이 부분을 제대로 지적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이미지를 중세에 투사함으로써 스스로에 대한 우월감을 가지려고 애쓴다. 그 중 하나는 중세를 어둠의 시대로만 봄으로써 근대의 이성주의적 사고의 위엄을 뽐내려 하는 식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특정한 인종이나 종교관의 우월성을 자랑하기 위한 도구로 중세를 윤색하는 것이다.


요즘에는 이런 면을 조명하는 책들이 자주 나오는 것 같아 반갑다. 그 중에서도 이 책은 퀄리티까지 좋으니 금상첨화다. 중세에 관한 전반적인 이해를 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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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는 신자에게 생기는 일
캐런 스왈로우 프라이어 지음, 홍종락 옮김 / 무근검(남포교회출판부)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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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전체가 아니라 도입을 다룬 몇 페이지만 읽었을 때, 이미 이 책이 충분히 훌륭해서 꼭 소개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만들 것이라는 걸 알았다. 도입장에 담긴 내용은 다음 아닌 어떻게 책을 잘 읽을 것인가에 관한 내용들이다. 문학은 그 자체로 덕을 구현하는 하나의 도구가 수 있으며, 어떤 작품을 잘 읽어낼 때 그것은 우리의 삶을 좀 더 덕스럽게 만들 수 있다는 주장은 우리가 왜 읽어야 하는지를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C. S. 루이스는 그의 책 “오독”에서 어떤 책이 좋은 책인지에 관해 흥미로운 실험을 하나 제안한다. 우린 흔히 어떤 전문가들이 소개해 준 책이 훌륭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이때 전문가의 역할을 하는 비평가들의 기준은 시대마다 달라지고, 종종 그 기준이 책을 읽는 바른 기준인지 의심이 들 때도 있다. 여기서 루이스는 순서를 바꿔보자고 말한다. 즉, 어떤 독자가 특정한 책을 읽고 좋은 영향을 받았다면 그 책은 좋은 책이 아니겠느냐는 제안이다.


루이스의 이 주장에는 문학이 갖는 어떤 종류의 힘이 전제되어 있다. 문학은 사람을 좀 더 나은 존재나 상태로 만들 수 있다. 물론 모든 문학이 그런 기능을 하는 건 아니다. 또 모든 사람이 그런 경험을 하는 것도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충분히 좋은 문학을 충분히 제대로 읽어낸다면, 우린 그 안에서 우리를 좀 더 나은 존재로 만들어 주는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다.


이 책의 저자가 여기서 말하려는 것이 바로 이 점이다. 사실 이건 새로운 주장은 아니고, 오히려 책에 관한 매우 오래된 관점이다. 책에서 뭔가 도덕적이고 교훈적인 것을 얻어낼 수 있다는 주장이 ‘도덕주의적 비평’ 같은 명칭으로 멸시되는 오늘날의 상황이야 말로 우려스러운 일이다.






책은 소설을 소개하면서 그 안에서 한 가지의 덕에 관한 감상/혹은 묵상을 읽어나가는 식으로 이루어져있다. 첫 네 개의 장에서는 분별과 절제, 정의와 용기라는 네 가지 기본적인 덕목을, 두 번째는 믿음과 소망, 그리고 사랑이라는 세 가지 신학적 덕목을, 마지막 3부에서는 정결과 부지런함, 인내, 친절, 겸손이라는 다섯 개의 천국의 덕목을 다룬다.


소개되는 책들도 흥미롭다. “톰 존스의 모험”, “위대한 개츠비”, “두 도시 이야기”, “침묵”, “로드”, “천로역정” 같은 유명하면서도 깊은 이야기들이 선정되어 있다. 읽어 본 책도 있지만, 이름만 알고 있던 책들도 적지 않았다. 여기 나온 책들은 한 번씩 찾아 읽어봐야겠다. 그리고 내가 진행하는 독서 모임에서 여기에 소개된 책들을 하나씩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저자는 매우 노련하게 이야기들을 풀어낸다. 각각의 전체적인 줄거리를 소개하면서 그 안에 담긴 도덕적 코드를 능숙하게 읽어내고, 나아가 그리스도인들이 갖춰야 할 오래된 덕목들에 관해 설명한다. 단순히 소설 속 캐릭터가 이렇게 말했다 정도가 아니라, 작품 전반에 깔려 있는 관점까지 읽어내니, 소개된 책들을 좀 더 깊이 읽고 싶은 사람에게도 도움이 된다. 개인적으로는 책 속에서도 인용되었던 두 명의 저자인 『덕과 성품』의 스탠리 하우어워스나 C. S. 루이스가 떠오르기도 했다.(이 정도면 개인적으로 최대의 찬사다)


어떻게 보면 여기에 실려 있는 열두 가지의 덕목들은 고대로부터 이어져온 도덕적 가치들이다. 오래된 것을 무조건 낡고 효용이 다한 것쯤으로 여기려는 현대적인 태도를 넘어서려면, 단순히 이런 것들이 얼마가 가치 있는지를 설파하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그 방식에 있어서도 새로워질 필요가 있다. 이 책은 여기에 좋은 예가 될 듯하다.



책 읽기를 사랑한다면, 그리고 문학이 단순한 심심풀이 이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즐겁게 읽을 수 있을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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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초승달 동맹 - 우리가 알지 못했던 기독교 이슬람 연합 전쟁사
이언 아몬드 지음, 최파일 옮김 / 미지북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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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중세 서양사를 보는 여러 프레임 중 하나가 “기독교 vs 이슬람교”라는 대립구도다. 십자군이라는 종교에 기초한 대규모 군사원정이 있었던 시기이기도 하고, 유럽은 교황권과 황제권 사이의 질긴 투쟁이,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는 이슬람 내부의 복잡한 세력다툼이 있던 시대이기도 했으니까.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두 세력이 지속적으로 대립(하기만)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긴 하다.


그런데 이런 관점에는 그런 역사적 사실만 영향을 주는 건 아닌 듯하다.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무슬림들에 대한 반감이 더 크게 영향을 끼쳤을 지도 모른다. 9.11테러와 그에 이어진 이라크 전쟁과 아프가니스탄 전쟁, ISIS를 비롯한 다양한 이슬람 무장테러단체들의 만행들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이슬람은 과격하고 호전적인 존재라는 인식이 굳어져버렸고, 이런 인식이 과거를 바라보는 데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이런 통념이 사실과는 좀 거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실은 그 시기 기독교인과 무슬림들은 같은 편에 서서 함께 싸우는 일도 잦았다는 것. 앞서 읽었던 비슷한 제목의 책(『십자가와 초승달, 천년의 공존』)에서도 크게 보면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사실 추천을 받아 구입했는데, 비슷한 제목의 책이 나와 그냥 두 권 다 사버렸다), 그 책이 주로 문화적 차원에서의 교류를 다뤘다면, 이 책은 군사적 차원에서의 교류가 중심이다.





책은 크게 다섯 개의 장면을 중심으로 설명을 한다. 첫 번째는 한창 레콘키스타가 벌어지고 있던 11세기 이베리아 반도다. 첫 번째 이슬람 왕조였던 우마이아 왕조가 이베리아반도 중남부를 차지한 이후, 북부 산악지역으로 밀려난 기독교 세력이 끊임없이 남부의 무슬림들을 몰아내기 위해 싸워왔던 것 같지만, 실은 양측 사이에 길고 질긴 협력의 역사가 있었다는 것. 특히 이슬람 세력이 약화된 후에는 기독교국가들이 일종의 보호비를 받으면서 쪼개진 이슬람 자치국을 도와주기도 했다는 이야기가 흥미롭다.


두 번째는 13세기 이탈리아 반도 중심에 무슬림들의 집단 거주구역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당시 이탈리아 남부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프리드리히 2세가 지배하고 있었는데, 북아프리카와 가까워서 일찍부터 그곳의 무슬림들이 많이 이주해 있던 시칠리아의 안정을 위해, 그곳에 살던 무슬림들을 집단으로 내륙의 루체라로 이주시켰고, 여기에서 황제의 군대를 위한 무기를 제조하거나, 군에서 직접 싸우기도 했다는 것.


세 번째는 좀 더 동쪽으로 위치를 옮겨 동로마제국 후반기를 다룬다. 제국 말기 동로마제국은 소아시아에서 치고 올라오는 이슬람 세력에 맞서 싸우고, 또 북쪽에서 내려오는 세르비아나 헝가리와도 싸워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수행 중이었는데, 여러 황제들이 왕실의 여성들을 이슬람 세력가들에게 시집을 보내곤 했다는 것.(당연히 군사적 교류도 많았다) 그 수가 하도 많아서, 왕조 자체가 자주 바뀌었던 동로마 제국의 상황에서 오히려 무슬림의 지도자 쪽이 혈통적으로 더 황제의 자리를 주장하기에 적합했다는 구절이 기억에 남는다.


네 번째는 16세기다 종교개혁과 그 후속 전쟁으로 복잡했던 유럽을 크게 위협했던 오스만 제국의 빈 포위전을 다룬다. 이것이야 말로 기독교와 이슬람 사이의 정면충돌로 보이지만, 좀 더 세밀하게 살펴보면 오스만군에도 기독교인들이 적잖게 있었고, 빈을 돕는 군사세력 중에서도 무슬림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마지막은 크림 전쟁이라고 불리는,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 사이의 충돌을 다룬다. 19세기가 되면 오래된 나무가 서서히 죽어가든 오스만 제국도 거의 무너질 즈음이었는데, 러시아의 서진을 염려한 서방국가들이 그런 오스만을 도와 러시아와 맞서 싸우게 되었고, 당연히 이슬람 중심의 오스만군과 영국이나 프랑스에서 온 기독교인들이 함께 싸웠다는 말이다. 사실 이 부분으 앞서의 이야기들에 비해 기본적으로 임팩트가 살짝 적긴 했다.




두 종교 사이의 이 오랜 군사적 교류들의 이야기를 보노라면,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그건 평소부터 자주 두 종교인들이 접촉할 수 있는 지역에서 이런 교류들이 잦았다는 것. 뭐 당연한 말처럼 보이지만, 그동안 우리는 그 접촉의 형태가 대립과 충돌, 그리고 정복의 형태로만 나타난다고 봐왔지만 실상은 좀 달랐던 것이다.


오히려 그런 일상적인 접촉이 없었던 사람들 사이에 더 격렬한 적대감이 나타나는 것 같다. 상대와 직접 만날 일이 없으니 얼마든지 과격한 말을 내뱉기도 하고, 그런 오류를 교정해 줄 경험을 전혀 하지 못하니 시간 지날수록 확증편향이 심해진다. 이건 유튜브에 악플이 범람하는 이유와도 관련이 있는 것 같다.


물론 저자도 여러 번 짚고 넘어가듯, 그렇다고 해서 이 시기 양측의 협력관계가 아름답고, 정의롭고, 완전히 서로 호혜적이기만 한 관계였던 것처럼 미화할 필요까지는 없다. 실제로도 그렇지 않았고. 다만 우리가 서로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갖고 만나려 하지 않는다면, 결국 한없이 고립된 채 모두를 적대시하는 일종의 자폐상태에 스스로 빠져버리고 말 것이라는 역사의 교훈을 주는 데 이 책은 충분히 도움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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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23-07-22 03: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흥미있는 책이네요. 오랫만에 알라딘 들어왔다가 인사하고 갑니다.

노란가방 2023-07-22 08:22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 오랫만이시네요.
 
문폴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 할리 베리 외 출연 / 아이브엔터테인먼트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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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영화 느낌.


1990년대 말엔 다양한 지구멸망 시나리오를 그린 영화가 나왔다뭐 이런 영화가 그 때만 나온 것도 아니고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있었지만또 세기말적 분위기가 짙게 드리우면서 그런 영화들이 꽤나 유행했던 것 같다리뷰를 쓰면서 찾아보며 알게 되었지만지금 말하려는 두 개의 영화, “아마겟돈과 딥 임팩트가 같은 해(1998)에 개봉했다고 한다.


두 영화는 뭔가 설정이 비슷하다선후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모두 지구를 행해 거대한 소행성이 날아오고 이로 인해 지구가 멸망할 지도 모른다는 위기상황을 영화의 배경으로 하고 있다그 중에서도 아마겟돈은 날아오는 소행성에 우주선을 타고 착륙해구멍을 뚫고 그 안에 폭탄을 장착해 터뜨린다는 아이디어를 담고 있다이 영화에서 영감을 받은 건지는 확실치 않지만실제로 각국의 우주관련 연구기관에서는 비슷한 실험을 하고 있다고도 한다.


새 영화에 관해 리뷰를 하면서 왜 이 오래된 영화를 길게 물고 빼느냐역시 영화를 보는 내내 비슷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20년도 훨씬 더 지난 영화의 느낌이 그대로 살아있는 2020년대 영화라니... 물론 모든 창작물이 완전한 새로운 창작일 수는 없다지만이건 뭐.. 분명 CG야 그동안 흘러온 세월만큼 발전한 느낌이 있다하지만 전체적인 감성이나 이야기를 풀어가는 과정은 이제는 좀 촌스럽게 느껴질 정도다.


어느 날 갑자기 달이 지구를 향해 나선형 하강을 시작하고그로 인해 각종 문제들(주로 달의 인력 때문인 듯)이 발생하고웬만한 기업 회의실 정도밖에 안 되어 보이는 나사 기지에서는 별다른 대책을 내지 못하는데미국 국방부에서는 수많은 핵미사일을 날려 달을 폭파시키겠다는 한심한 계획만 내고(달이 없어지면 급속한 환경의 변화로 인류는 아마 얼마 가지 못해 멸망할 가능성이 높다), 결국 한 검증되지 않은 아마추어 천체관측자의 말을 따라 달로 향하는 로케트(그것도 박물관에나 있었던)를 타고 날아가는이게 최선인가요?






달이 초거대구조물이었다고?


영화의 가장 큰 상상력이라면 역시 달이 초거대구조물이라는 발상이다아마추어 천체관측가인 KC 하우스먼은 어느 날 달의 궤도가 정상범위를 벗어나고 있음을 깨닫고그것이 달이 엄청나게 큰 인공구조물일 가능성을 보여주는 거라고 해석한다당연히 그의 말은 나사 관계자에게 제대로 전달되지도 않고 잊힐 뻔하지만우여곡절 끝에 결국 나사에서도 달 궤도의 변경을 깨닫고 그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는 내용.


여기에 나노로봇 군체들로 그려지는 비인류 지성체가 등장하면서 달이 외계인이 만든 거대한 기지일 가능성을 보여주는데직접 로켓을 타고 달의 내부에 형성된 금속제 구조물들까지 보여주면서 이런 예측이 맞나 싶을 즈음이야기는 훨씬 더 복잡하게 꼬여간다알고 보니 달은 인류의 오래 전 조상들이 만든 인공구조물이었고그들은 자기들이 만든 AI가 자의식을 갖게 되면서 도리어 멸종되고 말았다는 것그 AI가 다시 지구의 인류를 멸망시키기 위해 달을 움직이고 있다는 건데.... ...


달이 알고 보니 지구 침략을 위한 비밀기지라는 설정은 우리나라엔 지난 2012년 개봉한 핀란드 영화 아이언 스카이에서도 볼 수 있었다이쪽은 히틀러가 전쟁에서 패하기 전에 달로 로켓을 쏘았고그 후손들이 나치적 삶을 달 기지에서 이어오고 있다는 설정의 블랙 코미디 영화였는데상황은 훨신 말이 안 되어 보이긴 해도 또 블랙 코미디만의 위트가 느껴져서 재미있게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런 종류의 웃음마저 주지 않는다달 전체가 위장된 인공구조물이라는 설정은 애초부터 말이 안 되어 보였고그건 차라리 지구 전체에 추진기를 달아 통째로 멀리 옮기겠다는 내용의 중국영화 유랑지구류의 허풍과도 비슷해 보인다영화를 보는 내내 이걸 어떻게 봐야 하는 건지 보는 사람을 전전긍긍하게 만드는.




빈틈투성이.


억지로 억지로 이야기를 끌고 오긴 했는데그 사이사이의 설정이 빈틈투성이다많고 많은 사람 중에 왜 하필 주인공 세 명이 우주선에 타야 하는지도그 중 두 명이 하필 이혼한 전처와 전남편일 이유는 무엇이며그래도 그 두 사람은 우주인으로 활동해 본 경력이라도 있는데관련 훈련이 전혀 없었던 아마추어 천체관측가가 나머지 한 자리에 앉아 있는 이유는그가 새로운 가설을 제기해서어쩌면 인류의 마지막 희망이 될 수 있는 로켓 발사에 그런 모험을 하는 이유는 영화이기 때문일까?


그런데 그렇게 달에서 문제를 해결한 것도 정작 주인공들이라기 보다는 그들의 오래 전 조상들그러니까 AI의 반란을 초래해서 멸망했던 조상들이 남긴 프로그램이었다주인공 일행이 타고오다 완전히 망가진 우주선을 순식간에 수리할 수 있는 기술력까지 가지고 있었던(근데 왜 망했어..).


더구나 그렇게 달에서 벌어지는 일도 뭐 하나 제대로 되어가는 게 없는데위기감을 조성하려고 했던 건지 중간 중간 나오는 지구의 가족들 이야기는 또 얼마나 어설픈지주인공 커플이 이혼을 했다고 잔뜩 삐뚤어지기로 작정한 아들내미나그 아들내미와 지구가 멸망해 가는 와중에서도 썸을 실현하는 중국계 보모 여자애는 또 왜 나오는 건지(영화의 제작에 중국 자본이 합작 형태로 참여했다고 한다이게 원인은 아니었겠지?)


많은 재난영화가 그렇지만그냥 정신없이 인물들의 관계가 뻗어나가고 우연의 일치가 일어나고극단적으로 단순한 사람들이 잔뜩 등장하는 영화호감가는 인물이 별로 없다는 게 이 영화의 가장 큰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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