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는 사도 바울의 사회적 배경과 맥락 - 천막짓기와 사도직 신행신학 시리즈
로널드 F. 호크 지음, 이성하 옮김 / 알맹e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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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기독교 시기 가장 유명한 전도자였던 바울은 텐트메이커였다. 천막을 만드는 일로 자신의 사역에 필요한 경비를 스스로 충당했다는 의미다. 그리고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아마도 이를 당대 랍비들의 전통 중 하나로 여기고 있었을 것이다. 바울은 이 전통을 따라 텐트를 만드는 기술을 배웠고, 틈틈이 일을 하긴 했지만 보다 많은 시간을 할애한 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좀 더 “고상한 일”이었을 것이라는 생각. 이게 일반적인 인식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조금 깊게 들어가 보면 이상한 부분이 하나둘 나온다. 바울은 얼마나 텐트를 만드는 데 시간을 할애했을까?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복음 전도가 우선이었고 텐트메이킹이 부업이었다면, 그 정도로만 일을 해도 정말 생계유지가 될 정도로 그 일은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직업이었을까?





이 책은 바울의 그 “부업”을 거의 “주업”의 자리로 끌어올린다. 당연히 이 과정은 세밀한 당대의 여러 문헌들에 대한 조사를 통해 구축된다. 우선, 랍비들이 따로 직업을 가지는 전통은 바울 시대 이후에 생겨난 것(아마도 예루살렘 함락과 그로 인한 경제적 곤궁에서 탈피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무언가를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생계를 위한 직업을 따로 갖는 전통은 오히려 그리스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물론 이게 절대적인 모습은 아니지만(수업료를 받거나, 유력자에게 의지하거나 심지어 구걸을 하기도 했었다), 분명 여러 그리스 교사들은 자신의 생계를 위한 일을 갖곤 했었다.


또, 그렇게 그들이 생계를 위해 일하는 작업장은 철학 강의나 토론을 위한 장소로도 사용될 수 있었다. 특히 텐트를 만드는 일처럼 시끄럽지 않은 공간은 더더욱 이런 강의실로서의 역할을 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바울은 자신이 밤낮으로 일하고 있다(cf. 살전 2:9)고 말한다. 저자는 이것이 단순히 수사적인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이른 아침부터 나가 일을 했던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아마도 이 일을 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전도도 이루어졌을 것이다. 즉 바울의 “일”은 그의 사역의 중심에 있었다.


단지 실용적 차원에서만 “일”이 중심이었던 것은 아니다. 바울은 자신이 누군가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지 않으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기 때문에 "복음을 값없이 주었다(cf. 고후 11:7)"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었다. 그의 “일”은 복음의 본질을 드러내는 중요한 요소이기도 했다는 말이다.





전체적으로 볼륨이 작은 책이었지만, 꽤나 흥미로운 내용이었다. 복음을 전하는 바울은 일을 하는 바울과 같은 인물이었다. 하루 종일 성경책만 파면서 사람들에게 전화를 돌리는 식의 사역은 적어도 성경에 나오는 형태는 아니었다. 이미 수십 년 전부터 논쟁의 대상이 되었던 “목회자 이중직” 논란도 한심한 잡담이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을 다른 일로부터 분리시켜 무슨 특별한 아우라라도 덧씌우려는 태도는 성경적이라기보다는 중세적 사고에 가까웠다.


여전히 몇몇 대형교회의 목사들은 웬만한 중견기업 대표 못지않은 풍요로움을 누린다. 반면 절대 다수의 목사들은 말 그대로 생계의 위협을 느끼는 상태고. 이런 상황에서 목회자가 이중직을 해도 되니 마니 하는 소리는 말 그대로 배부른 자들의 훈장질에 가깝다.


바울은 당대의 사회, 문화적 상황에서 최선이라고 여겨지는 선택을 했다. 그리고 그걸 성경을 통해 보는 우리는, 단지 바울의 행동을 따라할 것이 아니라, 바울이 했던 고민을 오늘의 상황에 맞춰 하면서 고민하고 선택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은 그런 새롭지만 오래된 고민을 하는 데 이론적인 도움이 될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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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빌리의 비참
알베르 카뮈 지음, 김진오.서정완 옮김 / 메디치미디어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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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뮈라는 이름은 한 번쯤 들어봤을 사람이 많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니까. 가난한 집안의 아홉 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던 카뮈는 건강 상의 문제로 교수가 되는 것을 포기하고 신문 기자 생활을 했는데, 이 책은 그가 기자 생활을 하던 시절 썼던 열한 편의 기사들을 모아 놓은 것이다.


책 제목에도 나오는 카빌리는 20세기 초반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받고 있던 북아프리카 알제리의 한 지역의 이름이다. 변변한 자원도 없고, 무엇보다 식량부터가 부족한 가난한 마을 사람들의 삶을 옆에서 취재하면서 생생한 어조로 그 비참함을 묘사한다.


하지만 이 묘사는 선정적이지 않다. 흔히 빈곤 포르노라고 부르는, 가난을 일종의 시선을 끌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짓은 하지 않는다. 대신 작가의 글에는 분노가 배어있다. 상황을 이렇게 만들어 놓은 멍청한 정책들, 사려 깊지 못한 행정 담당자들, 그리고 곳곳에 숨어 있는 부패와 불합리한 규제들이 그 분노의 대상이다.


식민지에서 재배되는 작물에 대한 적절한 가격을 매기지 않는 당국, 산림법으로 땔감조차 채집하지 못하게 막는 당국, 바닥에 떨어진 죽은 나뭇가지를 숯으로 만들어 팔려고 나갔다가 판매 허가를 못 받았다고 모든 걸 압류 당하는 농민들, 심지어 공공사업에 참여해 받은 쥐꼬리만 한 보수에서 밀린 세금부터 원천징수해 뺏는 빌어먹을 관행들까지...





문제는 카뮈의 시대로부터 100년 가까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런 관행들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언제나 돈은 있는 사람들에게 모이고,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진 기회는 바늘구멍처럼 좁기만 하다. 온갖 규제들은 있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을 가질 수 있게 도울 뿐,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힘든 사람에게 법은 가혹하기만 하다.


책에는 이런 비참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나름의 대책을 고민해 제안한다. 단지 문제를 지적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고통 받는 사람들과 함께 지내면서 진짜 대책을 내놓았다. 이런저런 보조금은 아래로 내려가는 동안 어디론가 스며들어 정작 필요한 사람들의 손에 주어지지 않으니, 주민들에게 적절한 수입이 생길 수 있는 일자리와 산업을 만들고, 이를 지원하는 쪽으로 예산을 사용하자는 제안은 오늘날에도 의미가 있어 보인다.


카뮈는 이 현실을 차곡차곡 고발한다. 물론 그가 자신을 식민지 주민들과 동일선상에 두기 보다는 제국주의 국가 쪽에서 정체성을 찾았다는 점을 비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책 말미에 적혀 있듯, “식민 정복을 정당화할 수 있는 최소한의 구실은, 정복당한 민족이 정체성을 지키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라는 지적은 이런 한계를 지니고 있더라도 기억해 둘만한 문장이다. 오늘의 언론은 이런 결기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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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동은 쉽고 민주주의는 어렵다 - 민주주의를 오염시키는 선동의 수사학
패트리샤 로버츠-밀러 지음, 김선 옮김 / 힐데와소피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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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도서관 신간 코너에 재미있는 제목의 책이 있어서 데리고 왔다. 이 책은 특히 정치판에서 벌어지는 온갖 선동 작업이 어떤 매커니즘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왜 사람들이 그런 저질 선동에 넘어가는지, 선동가들을 만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지에 하는 내용들을 담고 있다. 책의 판형 자체가 작기도 하고, 페이지도 겨우 140페이지 정도라(그런데 가격도 14,000원;;;) 그리 어렵지 않게 읽어나갈 수 있다.



선동가들은 공통적으로 사안에 관한 정밀한 합리적 접근을 거부하고, 대신 정체성 정치에 집중한다. 쉽게 말하면, 문제가 무엇인지보다 누가 이 주장을 했는지를 더 중요하게 보는 것이다. 우리 편이 하는 말이면 무조건 옳고, 상대 편이 하는 말은 뭔가 꿍꿍이가 있다는 식이다. 흔히 이런 종류의 정체성 정치는 포스트모더니즘이 확산되면서 함께 퍼져나갔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선동가들은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다 있어왔다.


얼마 전 한 포털 사이트에서 아시안게임 축구 경기 응원 페이지에 이상한 결과가 있었다. 분명 우리나라 페이지인데도 우리를 응원하는 것보다 중국팀을 응원하는 비율이 90% 가까이 나왔던 것. 알고 보니 해당 페이지는 로그인이 없이도 얼마든지 응원 버튼을 누를 수 있었고(대부분의 스포츠 응원 페이지가 그렇다. 나도 내가 응원하는 야구팀의 응원버튼을 마음 내키는 대로 누르곤 한다), 두 개의 외국 서버에서 자동클릭을 하는 프로그램을 돌린 것으로 밝혀졌다.


뭐 여기까지는 별 시답잖은 것들이네 하고 넘기면 그만이다. 축구 응원버튼을 누가 더 많이 눌렀는지가 뭐 그리 중요한가. 하지만 대한민국의 집권 여당측 인사들이 우르르 몰려나오더니 그 포털 사이트에서 여론조작이 행해지고 있다면서 무슨 대단한 범죄라도 저지른 양 수사해야 한다고 입에 거품을 물기 시작한다. 여기서부터는 정확히 선동으로 넘어가는 순간이다.


여론조작과 스포츠 응원 버튼 사이에는 어떤 개연성도 없다.(당연히 의혹을 제기한 선동가들도 당연히 근거를 대지 못했다. 그냥 그런 게 있다는 선동 멘트만 반복할 뿐) 양쪽의 매커니즘 자체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이건 마치 우리 동네 편의점에 불이 났으니 옆 동네에 있는 카페가 위험하다고 주장하는 꼴이다. 무슨 말이냐고? 난들 이해가 되겠냐고.





사실 더 이해가 되지 않은 이런 선동가들의 말을 철썩 같이 신뢰, 아니 신봉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점이었다. 책의 내용 중에는 이와 관련한 부분도 보인다. 자신의 지도자가 기이한 언행을 보일수록 그에게 카리스마적 리더십이 생기고(보통사람은 생각할 수 없는 일까지 하다니 역시 대단해!?) 그런 사람에게 자신의 권력을 넘겨줌으로써 오히려 스스로 더 강해진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지도자가 자신이 한 말에 대해 정확성을 기하거나, 논리적 함의나 결과에 대해 인정하는 방식으로 책임을 지거나, 책임감 있게 행동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무책임한 행동을 하는 것이 지도자가 가진 권력을 보여주는 방식 중 하나라고까지 받아들여진다. 우리는 이런 사회를 독재사회라고 부르고, 북한이나 러시아, 벨라루스 같은 나라들에서 그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그리고 꽤나 가까운 곳에서도)


당연히 이런 사회는 큰 문제를 안게 된다. 건전한 비판과 반대가 허용되지 않는 조직이나 사회는 발전의 동기도, 의욕도 생길 수 없으니까. 하지만 일단 이렇게 선동가들이 득세하기 시작하면, 사회는 급격히 흔들리기 시작한다. 상황이 그렇게 돌아가면 이제 선동에 동참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배신자 소리를 듣거나 의심을 사게 될 테니까. 악화는 양화를 구축하기 마련이다.




저자는 분명 미국과 러시아의 상황을 깊이 인식하면서 이 책을 써 내려간 것 같다. 구체적으로 트럼프나 부시 부자, 그리고 푸틴 같은. 그런데 상황이 상황인지라 이게 그냥 먼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로 쉽게 여겨지지 않는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 이 책의 제목이 다시 한 번 등장한다. 어순은 바뀌었지만 내용은 동일하다. 민주주의는 어렵고, 선동은 쉽다. 선동은 다른 편의 사람들과 숙의를 해 가며 해결책을 찾아가는 것보다 그들을 공격하면서 느끼는 쾌감을 더 즐거워할 때 발생한다. 당연히 이런 분위기에서 민주주의는 성숙할 수 없다. 민주주의란 단순히 다수결이 아니니까.


물론 역사를 보면 한 나라의 정치 발전은 직선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르락내리락, 발전과 후퇴를 반복하면서, 크게 보면 서서히 발전해 오긴 했다. 하지만 얼마든 급격한 후퇴를 할 수도 있는 법이라.... 최근 온라인을 뒤덮고 있는 온갖 혐오의 선동 글들을 보고 있으면 그냥 한숨만 나온다. 이미 특정한 정치인들만이 아니라 너무 멀리, 그리고 깊숙이 전이되어버린 상태인 것 같아서 말이다. 우리에겐 희망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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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알드 달 베스트 단편 1
로알드 달 지음, 정영목 옮김 / 교유서가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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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내 취미 중 하나는 집에 있는 책들을 아무 거나 집어서 읽는 일이었다. 아주 어렸을 때는 어린이용 백과사전을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읽으며 놀았고, 어느 집이나 한 질쯤 있는 동화 전집이나, 조금 커서는 청소년용 학습백과사전을 마찬가지로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읽으며 놀곤 했다.


그러다가 종종 내가 읽으라고 둔 책은 아닌데, 어디선가 알 수 없는 경로로 집에 들어온 녀석들을 발견할 때가 있다. 부모님이 집에서 책을 즐겨 보시는 편이 아니셨으니, 집에 오고 가던 사람 중 누군가가(삼촌이었나?) 놓고 간 것으로 추정된다. 10대에는 그런 책들도 손에 잡히는 대로 읽곤 했다. 그 중에 일명 민담집들이 있었다. 누가, 언제 만들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옛날이야기를 모아놓은 책인데, 유머러스하고, 조금은 야하고(선정적인 건 아니다), 뭐 대단할 건 없는 편한 이야기들이었다. 대체로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오늘 따라 이렇게 옛날이야기를 길게 시작하는 건, (이미 눈치 챘을 수도 있지만) 바로 이 책이 꼭 그런 민담집과 비슷한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건 정확히 작가가 누구인지가 밝혀져 있는 이야기라는 차이가 있지만, 전반적으로 상황의 역전에서 오는 해학과 옅은 선정성, 좋은 글솜씨가 적당히 어우러져 있는 재미있는 작품이다.


모두 여덟 편의 짧은 중단편 소설들이 모여 있는데, 각각의 이야기는 독립적이어서 서로 겹치는 부분이 별로 없다. 전체적으로 똑똑한 체 하는 주인공이 나중에 한 방 뒤통수를 맞는다는 플롯이지만, 일종의 인과응보적인 결론은 이런 종류의 이야기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틀이니까. 그건 남자도, 여자도 될 수 있고, 나이가 많을 수도, 적을 수도 있다. 시대적 배경은 비슷하지만, 구체적인 상황은 이야기마다 꽤나 다르다. 어느 시골 마을부터 호화로운 유람선 위, 그리고 도시의 한 구석까지.


여기서 책의 줄거리를 설명하는 건, 뒤에 이 책을 손에 들 사람에게 실례일 듯하다. 어느 정도 예상이 되긴 하지만 그래도 나름의 반전을 보는 게 이 책을 보는 맛일 테니까. 기회가 된다면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볼 만하다. 잠시의 여유를 느끼게 해 줄 수 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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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정제 이산의 책 17
미야자키 이치사다 지음, 차혜원 옮김 / 이산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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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왕조는 만주족 누르하치가 세운 후금에서 시작되어 300여 년 동안이나 지속된 중국의 마지막 왕조다. 역대 중국 왕조 중 원나라를 포함하는 몽골제국 다음으로 영토가 넓었고, 현대 중국 영토의 기초가 되기도 했던 나라다.


하지만 그 중요성에 비해 우리에겐 그리 익숙하지 않은 나라이기도 하다. 두 차례의 호란과 관련해 우리나라와도 연결이 되긴 하지만, 딱히 그 왕조가 어땠는지에 대해서는 그리 인기 있는 주제는 아닌 듯하다. 이런 상황에서 이 책의 주인공인 ‘옹정제’가 누구인지 한 눈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그나마 다른 중국 황제들과 달리 흔히 부르는 이름이 OO제로 끝나는 세 글자라는 점에서 청나라 황제구나 했을 정도. 이 책은 청나라의 다섯 번째 황제인 옹정제의 일생을 다루고 있다.



책의 내용은 정사 기록에 충실하다. 흥미로운 건 이런 책이라면 왠지 중국의 학자가 썼을 것 같은데, 의외로 일본 학자가 쓴 책이라는 점이다. 사실 일본이 이런 종류의 역사나 인문학 등의 분야에서 상당히 앞서나가고 있는 나라이긴 하니까 뭐 이상할 것까지는 없겠지만.


어쩌면 공산당 독재가 이루어지고 있는 현대 중국에서 왕조 시대의 역사에 대한 실증적이고 비판적인 연구가 제대로 진행되기 어려웠을 수도 있겠다 싶다. 역사마저 현대 공산당 통치의 우월함을 선전하는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 게 작금의 중국 학계 현실이니까.


학문적인 책이지만 그 내용이 또 아주 딱딱하지는 않다. 한 사람의 일대기를 이야기 식으로 풀어나가고 있으니 오히려 술술 읽혀 나간다. 몇 개의 주제로 장을 구성하고, 곳곳에 저자의 평가와 설명이 더해지는데 이게 그리 눈에 거슬리지도 않는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행적은 제위 계승 과정이다. 직전 황제인 강희제는 무려 서른다섯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위 계승 과정에서 황태자가 두 번이나 폐위되는 불상사가 발생한다. 이 과정에서 치열한 후계다툼이 벌어졌고, 제위를 이어받은 것이 후궁 출신이었던 옹정제였다.


즉위 후 그는 황권에 경쟁자가 될 것으로 여겨지는 형제들과 공신들을 집요하게 핍박해 죽음으로 몰아가는데, 이 부분만 보면 치졸하기 그지없어 보이기도 하다. 하지만 끝이 좋으면 다 좋다고, 그가 열성적으로 통치하는 중후반 내용을 보면 또 평가가 급히 달라진다. 옹정제는 말 그대로 워커홀릭의 전형이었고, 소수민족 출신의 황제가 대륙 전체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늘 고민했던 성실한 인물이었다. 덕분에 그의 치세 동안 부정부패가 줄고, 각종 부당한 일들이 개선되기도 했고.


그런데 이 정도로 넓은 땅을 다스리기에는 황제 한 사람의 탁월함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청대에는 몇 개의 성들을 묶어 총독들을 임명했고, 그 아래에는 다양한 관료들이 층층이 존재했다. 결국 통치는 관료조직을 통해 하는 건데, 이 조직은 나름의 방식과 동기에 따라 움직이고 있기에, 황제 같은 절대군주로서도 이들을 완벽하게 움직인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저자는 여기에 제법 깊은 고찰을 더하는데, 이 부분이 또 읽어볼 만하다. 민주화된 오늘날에도 대통령 한 명이 바뀐다고 해서 나라가 완전히 바뀌지는 않는다. 물론 겉으로 드러나는 많은 면들에 변화가 생기기는 하겠지만, 결국 나라 운영은 소위 ‘늘공’이라고 불리는 관료들의 손을 통해서 이루어지니까.


독재의 역사에 대한 기억 때문에 중앙집권에 대한 경계가 강해지면서 이런 권한은 더욱 퍼지게 되는데, 그만큼 개혁도 힘들어 지는 면도 있다. 지방의 경우 토호들의 입김이 훨씬 더 강하게 미치곤 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정치라는 게 어렵다.




분명 옹정제는 대단한 개혁을 이루었지만, 그의 통치는 겨우 10년을 넘겼을 뿐이었다. 기본적으로 너무 많은 일을 해서 과로사 한 게 아닌가 싶지만, 저자는 또 여기에 독특한 해석을 더한다. 개혁이란 기본적으로 이전의 관행과 제도를 바꾸는 일이다. 개혁이 좋고 의미 있다는 걸 안다고 해서, 마음 깊숙한 곳부터 개혁에 동의한다는 뜻은 아니다. 당장은 기세에 눌려 좀 바꾸는 것처럼 할지 모르지만, 그런 게 영원할 수는 없다.


저자는 그의 개혁이 효과를 거둘 수 있는 시간이 10여 년이 아니었겠느냐고 말한다. 그가 죽은 뒤 나라를 이어받은 건륭제는 아버지의 정책 중 상당부분을 이전의 관행으로 되돌린다. 당시 관료사회가 그런 개혁을 오랫동안 참아낼 수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다시 한 번 개혁이라는 게 얼마나 힘든지 보여주는 부분이다. 동서양의 유능한 영웅들이 개혁이 아닌 혁명을 택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을 지도 모르겠다.


강력한 전제군주제에서도 힘든 개혁이 오늘날 권력의 파편화를 특징으로 하는 민주사회에서 얼마나 가능할까 회의적이다. 이 어려운 일에 단지 개인적 탐욕이 아닌 이유로 뛰어드는 사람들에게 경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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