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를 떠나는 사람들 - 탈교회인 8인 인터뷰집
이혜성 인터뷰어 / 북오븐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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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 책은 좀 무겁다. 제목부터 심상치 않았고, 내용은 더더욱 그랬다. 이 책은 한때 교회에 몸을 담고 있었지만, 지금은 교회를 떠나 있는 여덟 명의 인터뷰이들을 인터뷰한 내용을 책으로 엮었다. 인터뷰어이자 편집자는 최소한의 질문으로 인터뷰이들의 의견이 충분히 제시되도록 애쓰고 있다.



여덟 명의 인터뷰이들이 교회를 떠난 이유는 대체로 비슷했다. 대개 교회가 보여주는 “덕스럽지 못한 모습들”이 그들에게 상처를 주었고, 그렇게 하나둘 쌓인 짐들은 결국 그들을 교회 밖으로 밀어냈다.


물론 개별적으로 들어가면 상황은 다들 조금씩 달랐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건 맨 처음 배치되어 있는, 한 때 서울의 한 교회에서 담임목사까지 했으나 지금은 무신론자가 되었다는 어떤 사람의 이야기다. 간단히 요약하면 다양한 신학적 난제들에 대해 교회가 올바른 대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인식이 교회와 성경에 관한 신뢰를 갖지 못하게 만들었고, 그런 상태로 계속 담임목사직을 수행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사임을 했던 것 같다. 이후 그런 회의감이 점점 심해졌고, 결국 신앙을 완고하게 부정하는 단계까지 가게 되었다는 것.


사실 다른 사례들에 비해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결정과정이었지만, 동시에 적어도 자신의 지적 사고에 솔직하긴 했다는 느낌을 주는 사례였다. 개인적으로는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서 다른 목적으로 계속 목회직을 맡고 있는 목사들도 많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 외에도 한 여성 사역자는 교회 내 강압적인 분위기와 여성 교역자가 갖는 한계에 지쳐서, 또 다른 이는 교회 내 분쟁에 치여서, 또는 사회적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는 교회에 실망해서 교회를 떠나왔다.





비판적으로 보면 이들 중 일부는 자신들이 바라는 이상을 모두 교회에 투영해서, 그 이상적인 모델에 이르지 못하면 다 교회가 문제인 것처럼 보고 있다. 다시 지역교회로 돌아갈 생각이 있느냐는 인터뷰어의 질문에 이들은 자신의 이상이 온전히 실현되는 공동체라면 모르겠다고 대답하는데, 사실 이건 문제를 해결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 같다. 또, 몇몇은 지나치게 “큰” 이야기를 하며 자신의 결정을 설명하는데,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 건 발을 딛고 사는 여기지 않던가.


다만, 그들에게 교회에 대한 이런 기대를 품게 한 것 또한 교회라는 걸 생각해 보면, 분명 교회도 비판을 귀담아 들어야 할 부분이 있다. 현실과 지나치게 동떨어진 이상주의는 사람들에게 더 큰 실망을 안겨줄 수밖에 없으니까. 교회가 먼저 자신이 직접 실천하지도 못하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남발했다는 말이다. 말만이 아니라 진리에 입각한 삶을 사는 모습을 보여주었어야 했는데, 솔직히 실망스러울 때가 많다.


또, 책은 개별적인 인터뷰이들의 이야기가 중심이 되어서 산발적인 교회 비판에 머문다. 아무래도 개인이 경험할 수 있는 경험의 양과 질은 한계가 있을 테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다. 결과적으로 근본적인 해결법보다는 개인적인 대책(여기에선 교회를 떠나는 것)이 유일한 대안처럼 비춰지기도 한다.


물론 교회에 속한 개개인이 전체 문제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기를 일방적으로 강요할 수는 없다. 하지만 교회는 바로 그들이 아니던가. 누군가 나타나서 완벽한 해결책을 던져주기를 바라는 영웅주의적 기대가 충족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만두는 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일까.



책을 읽는 내내 답답함이 가시지 않았다. 인터뷰이들의 이야기에 공감이 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반대로 절박해 보이는 그들의 호소에 교회가 제대로 응답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너무 공감되어서다. 대형교회들은 수평이동의 착시현상에 빠져 문제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고, 각 교단의 수뇌부는 대체로 무능하고 위기의식이 없기에 무슨 대책을 세울 것 같지도 않다.


이 문제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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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결이 바람 될 때 - 서른여섯 젊은 의사의 마지막 순간
폴 칼라니티 지음, 이종인 옮김 / 흐름출판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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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읽었던 다른 책에서 이 책이 언급되기에 손에 들게 되었다. 가끔은 이런 식으로 하나의 책이 다른 책을 소개해주는 안내자 역할을 하기도 한다. 특히 그 원래의 책이 꽤 좋은 느낌으로 와 닿았다면 그 책이 소개해주는 또 다른 책도 좋을 가능성이 높으니까, 이런 식의 독서법은 제법 괜찮은 기회다.


이 책은 겨우 서른여섯 살의 나이에 암으로 죽음을 맞이한 폴 칼라니티가 쓴 일종의 회고록이다. 돈과 명성 같은 목표를 잡기 위해 몰두하던 동기들과 달리 그는 일찍부터 뭔가 좀 더 가치 있는 일을 찾아다녔던 것 같다. 이런저런 탐색 끝에 그가 발견한 건 의사라는 일이었고, 그는 정말로 진지하게, 자신의 일을 일종의 소명처럼(당시 그는 기독교인이 아니었지만) 해냈다.


오랜 레지던트 생활을 거의 끝내고, 그 능력과 성과를 인정받아 이제 안정적인 직장과 보수, 명성을 얻을 수 있는 시기가 가까이 왔을 때, 그는 갑작스런 통증과 함께 예상치 못했던 암 진단을 받게 된다. 그리고 시작된 투병생활. 중병에 걸린 환자들에게서 가끔 나타나는 초반의 기적적인 회복기를 맞으며 몇 개월간 의사로의 복귀까지 시도했지만, 결국 몸 상태가 급격히 악화되어 버린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들은 많다. 질병은 어느 정도 인과요인이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우발적인 사건인지라, 누구한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다양한 사람들이 갑작스러운 중병에 걸려 삶의 마지막을 기록으로 남기곤 했다.


그 중에서도 이 책을 읽어볼 만한 이유를 꼽자면, 역시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이다. 사실 죽음을 가까이에 둔 사람들에게서는 의외로 삶에 대한 특별한 통찰이 자주 발견되곤 한다. 이 무슨 아이러니인지. 인간은 죽음에 가까이 갈수록 삶에 대해 좀 더 제대로 이해하게 되는 존재인가 보다.


하지만 이 책의 작가는 단지 암 선고 이후에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건 아닌 것 같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삶의 의미를 찾는 일종의 구도자 같았다. 그는 대학 시절 내내 “인간의 의미를 찾으려는 금욕적이고 학구적인 연구”(53)에 천착하면서 “반성하지 않는 삶이 살 가치가 없다면, 제대로 살지 않은 삶은 뒤돌아볼 가치가 있을까”를 물었다.


결국 그렇게 의사의 길을 걷게 되지만, 그리고 제법 훌륭한 의사로 일해왔던 것 같지만, 훗날 자신이 환자가 되면서 여전히 자신은 환자의 삶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존재였음을 깨닫고 자책한다. 하지만 이런 자책마저, 삶의 의미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서나 나오는 것일 게다.




암에 걸리면서, 작가는 바쁜 일과에서 벗어나 삶(과 죽음)에 대해 다시 한 번 깊은 고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고, 이 기간 예전에 벗어났다고 느꼈던 기독교 신앙을 다시 진지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오늘날 의학은 과학의 최첨단 어디쯤 자리 잡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작가는 과학이 형이상학적인 실재에 대해 아무 것도 말해주지 못한다는 것, 그리고 삶의 의미는 바로 그런 세계에서 찾을 수 있다는 걸 깨닫는다. 그리고 기독교의 오래된 가르침이, 삶의 본질에 관해 무언가를 담고 있음을 믿게 된다.


작가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아내가 남긴 후기 가운데 반가운 이름이 보인다. 바로 C. S. 루이스다. 그녀는 루이스가 아내를 먼저 떠나 보낸 후 쓴 책인 “헤아려본 슬픔”의 한 구절을 인용한다. 사별은 결혼의 자연스러운 단계 중 하나라는 것. 참 울림이 많은 문장이다.



옛 라틴어 격언 중 “메멘토 모리”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기억하라는 의미다. 그리고 그렇게 죽음을 기억할 때 우리는 삶을 좀 더 잘 살아낼 수 있는 것 같다.


삶과 죽음에 관한 훌륭한 통찰이 많이 담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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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한 것이 없는 사람에게 왜 복음이 필요한가? - 풍요의 시대를 사는 이들이 복음대로 사는 법
윌리엄 윌리몬 지음, 이철민 옮김 / IVP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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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이 퍽 길다. 제목을 지은 사람이 할 말이 많았나 보다. 원래 이 책은 저자인 윌리엄 윌리몬이 한 교회에서 했던 설교문들을 모아 엮은 것이라고 한다. 사역 초창기에 이런 설교를 했다니,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옛말은 여전히 통하는 것 같다.



교회 안에서도 꽤나 익숙한, 전형적인 간증 레퍼토리는 한결같다. 한 때 자신은 꽤 성공적인 위치에까지 올랐지만, 어떤 이유로 그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실제적일 수도 있고, 심리적인 문제일 수도 있다) 되었다. 그리고 바로 그 때 예수님을 만났고, 모든 것이 회복되었다.


저자는 여기에서 질문을 던진다. 과연 기독교는 이렇게 비참하고, 박탈당하고, 약하고, 소외된 사람들“만”을 위한 종교인가. 기독교 신앙을 가지기 위해 우선 비참해질(문자적으로든, 상징적으로든) 필요가 있는가. 우리는 억지로 자신이 불쌍한 위치라는 것을 끊임없이 되뇌어야 하는가.


이런 고정관념이 갖는 문제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선 성경은 우리가 예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를 찾으셨다고 말한다. 그 연장선상에서 우리가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시작한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인가를 결단하시는 것에서 모든 것은 시작한다. 끊임없는 자기 비하와 감정적 회개의 요구는 진정한 회개가 무엇인지 잊어버리게 만들뿐더러, 이제 회개 이후의 은혜 안에서의 삶을 상대적으로 덜 강조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 책의 주제와 관련해서 앞서의 접근법이 갖는 결정적인 문제 중 하나는, “(경제적으로나 정서적으로) 강한 사람”에게는 이런 방식이 잘 통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기존의 교회는 그들을 어떻게든 “무릎을 꿇리려고”(그래야 하나님의 필요를 인정할 테니까) 애쓰기만 하는데, 그들은 정말로 딱히 부족한 게 없기 때문에 이런 요구를 수용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또, 그저 번영의 복음만을 외쳐온 얄팍한 공동체에 대해서도 이들은 별 흥미가 없는데, 그들은 이미 충분히 번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강한 사람에게는 강한 사람의 방식으로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건 은혜에서 시작한다.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 은혜의 소산임을 알려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건 자연히 감사의 자세로 이어진다.(당신은 죄인입니다로 시작하는 접근방식과 어떻게 다른지 주목하자)


물론 그들에게도 부족함이 있다. 사실 그들이 가진 것들에도 한계가 분명히 있다. 지식은 다함이 없고, 조직의 위계 정점에 올라간 사람은 자신이 생각보다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오로지 자기 자신을 위해 돈을 모으기만 하는 사람은 정작 쓸 수가 없다. 즉, 그들의 강점이 잘못 사용되면 약점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 점에 관해서 기독교는 분명 해 줄 말이 있다.




사실 조금은 강해 보이는 제목에 비해, 저자가 제시하고 있는 대안은 조금은 평범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책에서 여러 차례 반복해 지적되고 있는, 현재의 복음제시 방식에 문제가 있는 것도 분명해 보인다. 정말 우리는 누군가를 정서적으로 약한 상태로 몰아넣는 것이 기독교의 복음을 제시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여기는 것 같다.


문제는 이런 접근이 사람을 그저 “집단”이나 어떤 “덩어리” 정도로 뭉뚱그려버린다는 점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찾아온 모든 청년들에게 가진 재산을 다 팔아 나누어주라고 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한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을 불러 자신을 따라오게 하셨지만, 바로 그 근처에서 그분에게 고침을 받은 어떤 사람은 그분을 따라다니는 것을 허락받지 못하기도 했다. 요컨대 그분의 처방은 사람의 상황과 처지에 따라 다 달랐지만, 우린 빨간 약 하나면 모든 병이 나을 수 있다는 식으로 밀어붙이고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조금 다른 상황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조금은 다른 고민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공감한다. 다만 이 부분에 있어서도 좀 더 정교한 고민과 해답을 제시하기 위한 노력이 추가적으로 필요할 것 같다. 그런데 이 책에 실린 설교가 나온 지 40년이 지났지만, 과연 이 부분에서 뭔가 제시된 것 같지는 않다는 게 함정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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맷 데이먼이 이런 역을?


맷 데이먼 하면 떠오르는 전형적인 이미지가 있다. 탄탄하게 다져진 근육질 몸을 바탕으로 화끈한 액션(이 경우엔 주로 총을 사용하지만)을 보여주는 인상이랄까. 물론 그가 언제나 액션영화만 찍는 건 아니지만 이번 영화에서는 그 동안의 이미지와는 꽤 많이 다른 느낌의 배역을 맡았다.


맷이 연기하는 빌 베이커는 전형적인 미국 중하층 백인이다. 전에는 석유시추회사에서 일을 했지만, 최근에는 그나마 일자리도 잃어버린 상황. 뭐 대단한 사상이나 의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말이 많거나 활발한 성격도 아니다. 이야기가 좀 더 전개되면서 알려진 내용이지만 아내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어쩌면 이 일에 맷의 책임도 얼마간 있을 지도 몰랐다.


그에게는 딸이 하나 있다. 아빠에 대한 실망을 넘어 내심 경멸감 비슷한 걸 가지고 있었던 딸은 대학에 들어갈 나이가 되자 충동적으로 프랑스 유학을 떠난다. 그저 집에서 멀어지고 싶다는 이유로. 거기에서 자신이 레즈비언이라는 걸 깨달았는지 웬 아랍 출신의 여자동기와 동거를 하다가, 그 동거녀의 살인사건에 연루되어 교도소 생활을 5년째 하고 있었다.


영화는 빌이 그런 딸을 면회하기 위해 프랑스로 가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딸은 자신이 억울한 누명을 썼다면서 재수사를 요청하는 편지를 변호사에게 전달해 달라고 말하지만, 변호사는 사건을 맡을 수 없다고 거절한다. 딸의 결백을 믿지만 말도 안 통하는 이국에서 빌 같은 아버지가 뭘 할 수 있을까.





비호감 딸.


곤경에 처한 딸을 구하려는 아버지라는 구도는 익숙하다. 테이큰 시리즈부터 시작해서 다양한 영화들에서 비슷한 구도를 취한다. 딸을 곤경에 빠뜨린 사람들이나 세력은 굉장히 강하게 등장하기에, 아버지는 전직 무슨 특수요원이라든지, 심지어 범죄조직의 킬러라는 식의 힘숨찐 캐릭터로 나오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아버지는 앞서 말한 것처럼 지극히 평범하다. 단지 겉으로 드러난 설정만이 아니라 속까지(?) 그렇다. 이국의 교도소에 갇힌 딸을 구하기 위해서 그가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다. 이리저리 수소문을 해서 딸이 진범으로 지목한 사내를 발견하지만, 시원한 해결을 이글어내진 못한다.


그런데 아버지만 다른 게 아니라 딸의 모습도 많이 다르다.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곤경에 빠져서 아버지의(그리고 관객의) 동정을 이끌어 내는 가련한 캐릭터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지만, 이 영화의 딸은 아버지가 모르는 프랑스어로 변호사에게 보낸 편지에는 “아버지 따위는 무능해서 믿을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가석방 휴가를 나와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는 룸메이트를 만나서도 비슷한 말을 던진다. 심지어 나중엔 마치 아버지 때문에 자신이 교도소에 갇힌 양 증오의 말을 쏟아낸다. 정이 가지 않는 캐릭터.


그렇다 보니 나중엔 굳이 저런 딸을 구해야 하는지 하는 당위를 묻는 질문까지 나온다. 심지어 영화 말미 밝혀진 진실까지 더해지면.... 얘는 그냥 폐급이다.





씁쓸한 뒷맛.


물론 부모와 자식의 관계란 좀처럼 끊기 어려운 일이다. 빌은 딸의 무고를 밝히기 위해 돌아다니던 중 도움을 받게 된 버지니와 그녀의 딸인 마야와 가까워지면서, 나중에는 그 집에서 함께 살기 시작한다. 처음엔 단순한 룸메이트였지만 나중엔 동거하는 사이로 바뀌기까지 하고.


그런데 이 버지니 캐릭터도 또 비호감이다.(이 영화에 등장하는 여성은 마야만 제외하고 다들 이렇다) 처음엔 빌과 함께 그의 딸이 얽힌 사건의 증인을 찾는 과정에서 만난 한 증인과 대화를 하는 장면에서, 그가 아랍계에 대한 차별적인 말을 하자 혼자 흥분해서 (통역도 중단 한 채) 뛰쳐나온다. 그러면서 저런 인종차별주의자와는 대화도 할 수 없다고 선언하면서.


나중에 그녀가 빌과 헤어진 결정적인 이유도 빌이 딸인 마야에게 거짓말을 하도록 시켰다는 이유에서다.(심지어 직전에 빌은 딸 사건의 용의자를 임의로 납치해 감금하고 있었는데, 이건 언급하지도 않는다) 물론 딸의 교육을 위해서라고도 할 수 있지만, 하룻밤의 잠자리를 하고 아이까지 낳았던 그녀가 거짓말을 그렇게 문제 삼는 독특한 윤리관을 갖고 있는 게 쉽게 이해는 안 간다.


그렇게 조금은 평범한 작은 행복이 깨져버린 빌은, 딸이 지목한 용의자로부터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는다. 실은 딸이 자신의 동겨녀를 집에서 내쫓아 달라고 자신에게 요청했다는 것. 그러니까 딸도 결백한 게 아니었던 것. 물론 자신은 죽일 줄은 몰랐다지만. 하지만 빌은 자신이 얻은 용의자의 머리카락을 전직 경찰에게 (돈과 함께) 제공함으로써, 딸의 이른 석방을 이끌어 낸다.


어디 하나 시원하게 문제를 해결하는 영웅의 모습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저 현실의 문제에 눌려있는 주인공 빌과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주변의 여자들, 심지어 범죄까지도 묻고 넘어가려는 삐뚤어진 자식 사랑의 모습만 보인다. 시종일관 조용하게 진행되는 영화의 결말 부분은 그래서 약간은 허탈하고 씁쓸하다. 이렇게 가도 되는 걸까, 저 부녀는 과연 앞으로 관계를 회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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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니발 - 로마의 가장 위대한 적수
필립 프리먼 지음, 이종인 옮김 / 책과함께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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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니발은 고대 카르타고의 유명한 장군이다. 그는 선대의 유지를 이어 로마를 굴복시키는 것을 일생의 사명으로 여겼고, 마침내 오늘날의 스페인에서 기른 병사들을 이끌고 육로로 이동해 그 유명한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 반도로 들어간 인물이다. 단지 들어가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이후 무려 15년 동안 이탈리아 곳곳을 누비며 로마인들을 두려움에 떨도록 만들었던 독보적인 장군이었다.


이 책은 그 한니발의 일대기다. 어린 시절 바알 신전에서 아버지에 의해 로마에 대한 복수를 다짐했던 유명한 이야기부터, 코끼리까지 동원한 채로 알프스 산맥을 넘고, 그 유명한 칸나에 전투에서 수만 명의 로마군을 몰살시키고 로마 성벽 바로 앞까지 갔던 이야기... 하지만 결국 로마를 굴복시키지 못한 채 본국에서 벌어진 마지막 전투(자마 전투)에서 스키피오에게 패하는 이야기까지...(내용은 그의 죽음까지 나온다)





말 그대로 한니발의 일생을 차분하게 정리했다는 느낌을 준다. 그에 관해 얻을 수 있는 정보야 새로운 뭔가가 발견되지 않는 한 대개 한정적이고, 그걸 어떻게 정리하느냐의 문제인데 나름 성실하게 정리해 놓은 듯. 다만 비슷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2권 쪽이 재미도, 그리고 오히려 전문성도 좀 더 높아 보인다는 게 아니러니하달까.


물론 학자와 작가의 글쓰기 방식에 차이가 있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겠지만, 이 책의 저자가 한니발 전문 연구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글을 맛깔나게 쓰는 좋은 작가도 아니라는 점이전반적인 평점을 떨어뜨린다. 예컨대 책의 영문제목은 “Rome's Greatest Enemy", 즉 로마의 가장 위대한 적수(한니발)인데, 한니발이 어째서 로마의 ‘위대한 적’이었는지는 단순히 설명으로 서술할 게 아니라, 보여주는 방식을 쓰는 쪽이 훨씬 흥미가 높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점에 있어서 시오노 나나미의 책이 훨씬 더 낫다.


그렇다고 책 전체에 걸쳐서 당시 상황에 대한 탁월한 통찰이 자주 발견되는 것도 아닌지라 굳이 읽어야 할 필요성을 찾기가 어려웠다. 물론 몇 가지 사소한 정보들을 새롭게 알게 된 부분은 있다. 예를 들면 저자는 한니발 전쟁 당시 이탈리아 반도의 여러 도시들이 로마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한니발에 편에 섰다고 말하는데, 이건 로마빠인 시노오 나나미의 책에서 보이는 일사불란한 로마연합의 이미지를 깨준다. 또, 한니발 사후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북아프리카 출신의 황제인 셉티미우스가 한니발을 자신의 선조로 보고 그의 무덤을 복원했다는 내용은 새로웠고.


다만 저자는 한니발이 로마를 굴복시키지 못했던 것은, 로마가 당시의 일반적인 전쟁 관례와 달리 엄청난 피해를 입고도 항복하지 않았기 때문, 즉 로마가 당시의 전쟁 규칙을 어겼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데, 이건 좀 빈약한 설명 같다. “한니발이 이기지 못했던 것은 로마가 항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는 게 어떤 새로운 의미가 있는 건지..





책 표지가 멋있다. 개인적으로 이 책에 주는 점수에서 1점은 표지 디자이너의 공이다. 영문판 원서 표지도 동일한 이미지(검은 코끼리 위에 올라탄 고대 장수, 아마도 한니발?)를 사용하지만, 한글판 쪽이 영문 폰트라든지 배색이 훨씬 감각적이다. 영문판 쪽은 그냥 외국 나가면 흔히 볼 수 있는 페이퍼백 느낌의(실제로 페이버백이긴 하다) 허전한 표지랄까.


고대 로마사를 좋아한다면 나쁘지 않게 읽을 수 있긴 하겠지만, 본격적인 전사(戰史) 연구서도, 그렇다고 고대 문명사에 대한 전문적인 안내서도, 실감난 묘사가 들어간 소설도 아닌 좀 어정쩡한 포지션이라는 게 아쉬운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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