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신의 연대기 - 지워진 믿음의 기록
이창익 지음 / 테오리아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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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디자인이 재미있다. 새롭게 만든 건 아니고, 조선시대 민간에서 흔히 사용하던 일종의 부적 표상과도 같다고 한다. 세 마리의 물고기가 머리를 가운데로 모아 하나의 머리를 만들고, 거기에 눈이 하나가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몸이 세 개인 하나의 물고기, 일목삼신어(一目三身魚)다. 주로 눈에 뭔가 병이 생겼을 때 치유를 기원하며 만들어 붙였다고 한다. 물고기의 하나뿐인 눈에 못을 박아두고는, 내 눈의 병을 낫게 해주면 못을 빼주겠다고 위협하는 문구와 함께.



이 책은 20세기 초 우리나라(조선,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에서 유행했던 다양한 미신들을 신문이나 공식 기록물 등을 참고해 나름 정리해 준 책이다. 책에 소개되는 미신들의 수준이 꽤나 다이내믹하고 버라이어티하다.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을 때, 동네 여성들이 나서 근처 산의 신성한 곳을 향해 오줌을 싸거나, 신성한 구역에 묻힌 시신을 파내버리는 건 오히려 약과였다.


별다른 치료법이 없었던 나병에 걸린 사람들이 아이들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의 신체를 먹었다는 신문 기사는 수없이 등장하고, 몇몇 지역에서는 전염병에 걸려 죽은 아이의 시신을 땅에 묻지 않고(그러면 땅이 더럽혀진다는 미신) 줄에 매어 공중에 달아놓는 풍장이 유행하기도 했다. 우리 조상들은 얼마나 하드코어한 삶을 살았던 건지.


책의 후반 두 개 장은 당시 전국적으로 유행하던 신흥종교들을 다룬다. 수십 명의 여성을 첩으로 삼고, 교인들이 바친 돈으로 주지육림에 빠져 살았던 대표적인 사이비종교 백백교의 교주 이야기(아, 요즘도 비슷한 광인이 만든 사이비가 있지 않나)와 그 자식들과 제자들이 만든 분파들의 이야기를 쭉 따라가고 있으면 어질어질하다.





단순히 다양한 기사들을 항목에 따라 배열해 놓았을 뿐이지만, 책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왜 그런 미신들이 당시 유행했는지에 대해 나름 합리적인 추론을 해 보려고 애쓴다. 사람의 손가락을 잘라 먹고, 간과 쓸개를 빼 먹는 나병 환자들의 모습에서는 그 만큼 병이 주는 절망감이 컸음(87-88)을 읽어내고, 시신을 공중애 매달아 두는 풍장은 전염병의 급속한 확산으로 채 제대로 된 장례를 치를 수 없었던 상황(178-179)을 보는 식이다.


또, 당시 유행하던 다양한 신흥 종교에 대한 탄압에서는, ‘조선적인 종교’의 탄생을 저지하려는 정치적인 계산이 있었을 것이라고도 추론(34)한다. 일견 나름 일리가 있는 추정들이다. 사람이 사람의 신체를 먹고(사실 이건 다른 맥락에서는 극진한 효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정신병을 치료하겠다면서 죽을 때까지 복숭아나무로 만든 도구로 때리고 하는 짓을 아무 이유 없이 한 거라고 넘어가기는 쉽지 않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뭔가 이유가 있겠거니 하고 합리화하고 넘어가기엔 확실히 여기 소개된 사건들이 충격적이고 엽기적이다. 일제강점기였던 당시 일제당국에서 한 분석, 그러니까 당시 조선 민중의 비과학적이고 충분히 비판적이지 못한 사고에 기인한 것이므로, 서둘러 개화를 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쉽게 부정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의 판단을 오늘날의 잣대로만 평가하는 건 확실히 조심해야 할 부분이다. 오늘 우리의 판단에, 오늘날의 상식과 과학의 대답이 전제되어 있고, 그것에 충실한 사고의 결과가 도출되었다면, 과거에도 그건 마찬가지였을 테니까. 물론 그래도 인육은 좀...



조금은 선정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는 내용들이 많지만, 기본적으로 당시의 역사 자료를 잘 정리해 둔 책이다. 좋은 자료로 사용될 수 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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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민주주의 - 오래된 이상과 도전
폴 우드러프 지음, 이윤철 옮김 / 돌베개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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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세계에서 어떤 형태로든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나라는 전체 국가 중 60%를 넘는다. 우리나라의 경우 100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 동안 왕정에서 식민지로, 다시 공화국과 군부독재를 넘어 결국 민주주의 국가가 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경험하는 유일한 정치제도가 민주주의인 상황에서, 우리는 정작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무엇이 민주주의를 유지시키는 핵심적인 요소인지에 대해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민주주의 원칙으로 꼽는 것이 ‘다수결의 원칙’일 테지만, 고대 아테네에서 시작한 민주주의를 연구하는 이 책의 저자는 다수결은 애초부터 민주주의의 핵심이 아니었다고 단언한다. 그럼 민주주의의 핵심은 어디에 있을까?




민주주의는 고대 그리스, 그 중에서도 아테네를 중심으로 시작되고 발전되어 왔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당시 일반적인 정치 형태는 왕정(군주정)이나 귀족정, 혹은 그와 유사한 참주정이었다. 그 중에서도 아테네 민주주의의 목표는 참주정으로부터의 자유에 있었다고 저자는 단언한다.


참주는 일종의 독재자였다. 귀족정이나 왕정에서의 통치권은 핏줄이라는 나름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사람들이 소유한다. 민주정도 마찬가지로 선거라는 제도를 통한 합법적 정통성을 중요하게 여긴다. 하지만 참주는 그런 정통성이 없이 스스로의 “능력”으로 권력을 획득하고 사용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흥미로운 건 어떤 참주들은 선거를 통해, 그러니까 다수결로 뽑혔다는 점이다. 선거를 통해 뽑힌 거면 민주정이 아니냐고 반문을 할 수도 있지만, 선거라고 해서 다 같은 선거가 아니지 않은가. 절차적인 정당성을 획득했다고 해도, 선거의 내용에 문제가 있었다면, 그게 좋은 결과라고 할 수 없다. 예를 들면 선거에 제공되는 정보가 심각하가 왜곡, 오염되어서 유권자들이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없거나, 사회적인 분위기가 매우 강압적이어서 특정한 선거 결과가 유도되거나 하는 경우를 말한다.


권력을 잡은 참주는 이제 어떤 견제도 없이 자신의 권력을 휘두르려 한다. 정적은 가차없이 탄압해서 반대파의 입을 막으려 하고, 딱히 정상적인 시스템을 따른 조언을 듣거나 하지도 않는다. 고대 아테네에는 이런 참주들이 여럿 존재했고, 그들 중 일부는 아테네의 국력을 신장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지만, 결국 아테네는 이런 참주들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다. 아마도 당장의 유익이 장기적인 유익으로 이어지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고대 아테네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단지 제도만이 아니라, 일종의 사회적 분위기, 시민 개개인의 민주적 소양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조화, 법에 따른 통치, 본성에 다른 자연적 평등, 시민 지혜, 바른 추론, 교양 교육 등이 여기에서 중요해진다. 즉, 시민들이 충분히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도록 교육을 하고, 그들이 모여 내리는 합리적 결정에 따라 통치되는 사회야말로 민주주의라는 것.


저자는 이런 민주주의의 이상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하지만 고직 십 수 만 명이었던 고대 아테네와 수백, 수천 만 명이 속해 있는 현대 국가 사이의 물리적 차이를 고려하면, 옛 방식을 그대로 오늘날로 이식하는 건 불가능하다. 어떤 식으로든 변용, 혹은 적용이 필요한데 아쉽게도 이 책에선 그 부분이 깊게 다뤄지지는 않는다.


또, 저자가 찬탄해 마지않는 민주주의가 왜 ‘옳은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별다른 답이 없다. 그저 민주주의는 옳다는 생각 뿐. 하지만 고대 아테네에서 이 민주주의는 그 도시 안에서도 수많은 피해자들을 낳았고(소크라테스는 민주주의자들에 의해 사법살해되었다), 아테네 제국 시기에는 그 범위와 강도가 훨씬 심각해지기도 했다. 저자는 그건 사람의 문제고 제도의 문제는 아니라는 식으로 빠져나가려 하지만, 어떤 일이 어떤 제도 안에서 반복적으로 발생한다면 그 제도에 뭔가 문제가 있다고 추정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어떤 제도에 문제가 있다고 해서 그 제도를 바로 폐기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일부 사람들은 그런 단순한 해결책을 선호하기도 하지만, 세상 일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으니까. 그리고 인류는 아직까지 민주주의보다 나은 정치제도를 발명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니까. 어떻게 하면 이 하자 많은 제도를 좀 더 고장나지 않게 끌고 갈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것도 필요한 일이다.


또 하나, 책 속의 참주에 관한 설명이 인상적이다. 선거로 뽑힌 참주가 독재자가 될 때, 시민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책에 소개되는 참주의 특징이 오늘 우리의 최고권력자와 크게 다르지 않은 걸 보고 씁쓸해진다. 결국 시민들의 무지함과 무능력이 이런 참주를 국가의 원수로 뽑아 놓은 셈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다양한 고민들을 해 볼 수 있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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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오가 모든 걸 덮은.


보통 여간해서 이런 식의 일본말을 굳이 사용하지 않는 편이긴 하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는 바로 이 단어가 떠올랐다. “가오”. 사실 일본어 의미를 직역하면 “얼굴”이라는 뜻이지만, 우리나라에선 이 단어가 뭔가 폼을 잡는, 허세가 잔뜩 들어간, 하지만 자신은 그걸 모르고 굉장히 진지하게 뽐내는, 뭐 이런 의미로 사용되는 것 같다. 이 영화가 딱 그랬다.


영화 초반부터 일본을 배경으로 하더니, 야쿠자 비슷한 무리가 등장해서 장검을 휘두르거나, 심지어 활을 쏜다. 21세기에, 그것도 총으로 무장하고 달려드는 적에게 칼과 활이라니... 심지어 여기 등장하는 활은 일본 전통식 활도 아니다. 사람 키만큼 크게 만들어야 겨우 반발력을 확보할 수 있는 그런. 뭐 이건 좀 발전했다 이건가. 그러려면 차라리 총을 쏘라고.


심지어 오사카 콘테넨탈 호텔에 쳐들어오는 적들이 입은 옷은 무슨 전국시대 무사의 복장과도 비슷하다. 최고위원회는 그 동네 분위기를 맞춰 복장까지 지정해주는 패셔니스타들이란 말인가. 여기에 견자단이 출연했을 때부터 익히 예상되었던 중국 전통의 판타지스러운 동작들까지.


원래 존 윅 시리즈의 백미는 사실적인 격투 움직임과 특유의 탄창 속 총알까지 계산한 총격전 같은 게 아니었던가. 특히 롱 테이크로 이어가는 특유의 촬영 방식도 그렇고. 물론, 이전에도 살짝 오글거리는 건카타적 움직임 뭐 그런 게 있긴 했지만, 그 정도는 이런 액션 영화에서 충분히 허용되는 수준으로 보였다. 그런데 이번엔 그냥 그 도가 좀 지나치지 않았나 싶다. 그냥 이번이 마지막이다 싶어서 온갖 가오를 다 잡은, 그래서 오히려 피식 웃음이 터지는 그런 영화였다.





법의 무거움.


이 시리즈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역시 독특한 세계관이다. 1편부터 4편까지 동일하게 이 설정은 이어진다. 킬러들만의 세계가 있고, 그 세계는 목숨을 걸고라도 지켜야 하는 서약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심지어 주인공도 이 서약을 깨뜨리겠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고, 어떻게든 그 규칙 안에서 살 길을 찾기 위해 애쓴다. 물론 너무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감이 있긴 하지만.


이번 영화에서도 그 설정은 계속 이어간다. 존은 최고위원회의 일원을 살해하는 큰 문제를 일으켰지만, 어찌어찌 다시 서약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고자 한다. 이번 영화의 빌런인 그라몽 후작이 존을 제거하려는 방법도 어찌됐건 그 규칙 안에서 하는 일이다. 물론 좀 막무가내인 면이 있긴 했지만.


모두가 법에 복종하고, 규칙을 어기는 사람들을 가혹하게(대개는 죽음으로) 처벌하는 세상은 공정하고 정의로울 것 같지만, 영화 속 세상이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다. 기본적으로 그 법은 최고위원회가 가진 권력을 지키기 위한 법이고, 그 세계의 구성원들인 킬러들을 서로 싸움붙여 돈 이외의 다른 데로 눈을 돌리지 못하게 만들기 위한 법이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어느 순간 영화 속 규칙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 캐릭터들의 진지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조금 우습게 보이기도 한다. 해가 뜨기 직전에 약속된 결투 장소에 도착해야 한다는 규칙이 그토록 중요하다면, 그 규칙을 지키기 위한 부칙이 필요한 법이다. 그래야 규칙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노력이 헛되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영화 속엔 그런 거 없다. 그냥 능력 있으면 살아남는 거고, 능력이 없으면 죽는 거다. 아, 능력주의라는 비틀린 공정을 말하는 건가.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에도 그런 법을 좋아하는 양반이 있다. 입만 열면 공정을 운운하는데, 실제로 그의 통치행위는 별로 공정해 보이지도, 그렇다고 정의롭거나 따뜻하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오로지 하이테이블의 안위만을 걱정하는 느낌이랄까.





이젠 보내줄 때.


매트릭스 4를 봤을 때도 느꼈지만, 이번 존 윅 4를 보면서도 동일한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이젠 주인공 역인 키아누 리브스를 좀 보내줘도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 내일 모레면 환갑을 맞는 이 배우가 이런 액션에 도전을 한다는 건 훌륭한 일이지만, 그 결과물이 생각만큼 멋지지 않다. 물론 환타지스러운 중국 무협영화와 같은 합을 맞추라는 건 아니지만, 이젠 동작이 너무 느려 보이는 것도 사실이니까.


사실 그뿐 아니라 이젠 이 시리즈도 좀 보내줘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매트릭스 4야 모두가 인정하는 최악의 실망스러운 스토리로 스스로 시리즈의 생명을 끊어버렸지만, 존 윅도 이번이 아마 마지막이 되지 않을까 싶다. 스토리는 너무 단순하고, 그걸 덮어버릴 화려한 액션도 이제 약발이 다 떨어진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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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극의 문자를 찾아서 - 문자 덕후의 발랄한 세계 문자 안내서
마쓰 구쓰타로 지음, 박성민 옮김 / 눌와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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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거의 70억 명에 달하는 전 세계 인구들은 약 6천 가지의 언어를 사용하는데, 그 중 현재 사용되고 있는 문자는 채 100개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그 절반쯤 된다고 한다). 그래도 적지 않은 수이다 보니 우리가 평소에 접하기 힘든 문자들도 많다. 이 책은 그런 세계의 여러 문자를 소개하는 내용이다.



이렇게 보면 굉장히 어렵고 딱딱한 책일 것 같지만, 막상 읽어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너무 가벼운 느낌마저 줄 정도. 그건 저자가 책에서 문자를 소개하는 방식에서 바로 알 수 있는데, 이 책에서 저자가 주로 관심을 보이는 부분은 글자의 “모양”이다. 어떤 문자에 직선이 많은지, 곡선이 많은지, 특징적인 가로선이 있는 인도 쪽 문자들이나 마치 무슨 그림 같은 마야 문자 등등. 거의 모든 항목을 그 문자가 가진 모양에서 받는 인상을 풀어내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그 모양에 대한 설명이라는 것도 무슨 학술적인 근거가 있고 그런 게 아니라, 정말 말 그대로 저자의 개인적인 느낌과 감상뿐이다. 예를 들면 왠지 날카롭게 생긴 티베트문자는 뾰족뾰족해서 위험하다거나, 캄보디아에서 사용하는 크메르문자의 모양이 왠지 빨래를 널어놓은 것 같다는 식.


아, 방금 이 책의 또 하나의 특징을 설명했는데, 저자가 말 그대로 유머에 대한 강박증이라도 있었는지, 모든 항목에 이런 식의 아재 개그를 넣고 있다는 점이다. 아재요, 유머 그렇게 쓰는 거 아니에요.





너무 책에 대한 혹평만 했나 싶어 그래도 이 책의 장점을 하나 꼽아 보자면, 전 세계의 독특하고 다양한 문자들을 한 자리에서 구경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평소에 이런 생소한 문자들을 애써 주의를 기울여 보지 않았던 차에, 서로 영향을 준 비슷한 문자들을 모아 볼 수도 있었고.


당연히 한글에 대해서는 어떻게 써놨을까 궁금해 가장 먼저 찾아봤는데, 간략한 사실에 대한 서술 말고 별다른 감상도 없다. 이쪽은 드디어 아재개그가 다 떨어진 걸까. 반면 일본 문자인 가나에 대해서는 굉장한 찬사를 붙이고는, 막판에는 문자가 없는 민족들에게 그들의 말을 적을 수 있는 문자로 가나를 추천하자는 말까지 (물론 반쯤은 장난으로 유쾌하게) 덧붙인다. 근데 가나는 모음 표현이 너무 부족해서 힘들 거예요.



성인보다는 초등학생이나 중학생 정도에게, 세계의 다양한 문자들을 가볍게 소개하는 책이라고 보면 또 뭐 아주 나쁜 것만은 아니다. 개중에 문자에 관심이 생긴 사람들은 좀 더 전문적인 책을 찾아보면 되는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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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와 결혼한 쥐에게 일어난 일
아나 크리스티나 에레로스 지음, 비올레타 로피즈 그림, 정원정 외 옮김 / 오후의소묘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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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도서관에 갔다가 제목이 흥미로워서 뽑아든 책이다. 큰 판형의 그림책이어서 선 자리에서 금세 다 읽어버렸다.



이야기는 깔끔한 한 쥐를 주인공으로 한다. 어느 날 청소를 하던 중 동전을 발견한 쥐는 그 동전으로 양배추를 구입해 작고 예쁜 집을 마련한다. 그러자 많은 동물들이 쥐에게 청혼을 했고, 번번이 거절을 하던 쥐는 하필 노래를 잘 한다는 이유로 작고 약한 고양이와 결혼을 한다.


문제는 그 이후 발생한다.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 상처를 입은 쥐를 위해, 상처를 꿰맬 실을 구하러 떠난 고양이는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거대한 고양이가 되어 돌아왔다. 그리고 아내의 입에 난 상처의 피를 핥는 순간... 너무 맛있었다.





결말이 약간 끔찍하다. 옛날이야기들 중에는(이 동화는 스페인의 오래된 이야기를 새롭게 각색한 것이라고 한다) 의외로 이런 잔인한 면이 있다. 오래된 이야기들에는 각각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의 의도가 어느 정도 개입되기 마련이다. 한때 이 이야기는 순종적인 여성을 길러내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기도 했다고 한다. 원래 이야기에는 ‘잘난 체 하는 쥐’가 주인공이었고, 주인공의 그 잘난 체가 문제를 일으킨 원인이라는 명확한 스토리.


그런데 이 책의 작가는 이 옛 이야기에 살짝 각색을 더한다. 잘난 체 하던 쥐는 깔끔하고 청결한 쥐로 바뀌면서 부정적인 이미지가 사라졌고, 자신을 깔끔하게 가꾸면서 집까지 마련한 능력 있는 존재로 바뀐다. 이야기 속에서 그 쥐가 했던 유일한 잘못은 나중에 자신을 잡아먹을 고양이를 남편으로 선택한 것 뿐. 결국 이야기는 남편의 폭력에 희생된 여성의 구도를 띤다.


이런 해석을 뒷받침 하는 건, 책에도 실려 있는 작가와 그림작가의 말이다. “고양이 발톱 사이에서 생을 마감해야 했던 모든 쥐들에게”(글 작가), “이것은 사랑, 학대, 젠더, 사회, 폭력에 관한 이야기다.”(그림 작가) 대충 느껴지지만 작가들은 완전한 페미니즘 동화로 원래의 이야기를 바꿔놓은 셈이다.



다만 이야기가 충분히 잘 바뀌었는지는 확실치 않은데, 여전히 쥐가 남편을 선택한 어리석은 기준(노래를 잘하는 것)을 정하는 데는 누구의 강요나 영향 없이 본인이 정한 것이었다. 또, 고양이가 쥐를 잡아먹는 건 본성이지 교화의 차원이 될 수도 없는 부분이다. 호랑이에게 토끼와 사이좋기 지내야 하니 풀만 먹으라고 강요하는 것이 또 다른 폭력인 것처럼.


원래 존재하던 이야기에 어떤 의도를 갖고 지나친 윤색을 가해 원작을 훼손할 경우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는 최근 디즈니에서 만든 인어공주 실사영화를 둘러싼 논란에서 충분히 드러나기도 했다. 젠더와 사회, 폭력과 학대의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면(이런 주제는 충분히 다룰만 하다), 좀 더 신선한 새로운 이야기를 잘 만들어서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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