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에 선 기독교 - 공적 신앙이란 무엇인가
미로슬라브 볼프 지음, 김명윤 옮김 / IVP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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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말하는 ‘공적 신앙’(원서의 원제도 “A Public Faith”다)에 관한 책이다. 우리나라에서 출판된 게 2014년이고, 원서가 나온 건 2011년이니 벌써 10년이 된 셈이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공적 신앙이 제대로 수행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개인적 차원에서의 실천 시도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공적 신앙을 위한 제대로 된 신학을 정립하고 가르치거나 하는 일은, 일선 교회에 차원에서는 아직 요원해 보인다.


그 결과 사람들은 공적인 영역에 나설 때, 자신의 신앙을 마치 외투를 벗어 벽에 걸어두듯 잠시 없는 것처럼 생각하려고 애쓴다. 공개적인 영역에서 어떤 사람의 신앙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피해야 할 일로 여겨진다. 예를 들면 “100분 토론”에서 어떤 사람이 자신의 주장을 하면서 그 근거를 윤회사상이나 구속 신앙에서 찾는다면 어떤 댓글이 달릴까?


사실 이 부분에서 기독교는 소위 무속종교보다 더 열악한 상황인데, 후자의 경우는 예능이나 종편의 유사 시사프로그램에서 종종 하나의 코너로 당당하게 자리를 차지하기도 하니 말이다.



저자인 볼프는 기독교 신앙이 지극히 내세적이고, 개인구원이나 ‘복 받는 삶’ 따위에 집중하는 ‘신비주의적 종교’가 되어가는 상황을 비판하면서 ‘예언자적 종교’로 돌아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예언자적 종교의 가장 큰 특징은 신의 이름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한다는 점인데, 오늘날의 신앙은 일종의 기능장애에 빠져 애초의 이런 목적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상황이 이렇게 된 이유를 찾아보는 일은 어렵지 않다. 유럽의 경우 “30년 전쟁” 이후 종교가 갈등의 씨앗이 될 수 있음을 처절하게 인식했고, 곧 이어지는 르네상스는 종교가 아닌 인간의 가능성에서 소망을 찾고자 하는 시도였다. 20세기에도 여전히 곳곳에서 종교로 인한 갈등이 많은 사람들을 위기로 몰아넣었고, 지난 2001년 벌어진 9.11 테러는 사람들로 하여금 종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의 정점을 찍는 사건이었다.


하지만 정말로 종교가 사람들의 공적인 삶을 해칠까? 볼프는 적어도 기독교만큼은(이건 다른 종교는 그렇지 않다는 게 아니라, 저자가 기독교인이기에 기독교에 대해서는 잘 알고 말할 수 있다는 의미다) 종교적 폭력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이 그 신앙에서 멀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신앙에 더욱 충실해지는 데서 발견될 수 있다고 말한다.


표층적이면서 열광적인 신앙은 자칫 폭력을 불러올 수 있다. 그러나 심층적이면서 헌신된 실천은 평화를 낳고 유지한다. 특히 기독교 신앙은 인간의 궁극적인 번영에 관한 비전을 가지고 있다. 인생의 목표와 의미, 그리고 어떻게 그 목적지에 이를 수 있는지를 기독교 신앙은 보여준다.



책은 크게 2부로 나뉘어 있는데, 1부에서는 공적 신앙의 필요성, 의의에 대해 설명하고, 2부에서는 어떻게 하면 앞서 살펴본 것과 같은 목표를 실천할 수 있을까에 집중한다. 다원주의 아래, 다양한 사상과 신앙이 공존하는 세상에서 기독교는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까?


저자는 적응이나 도피/고립과 같은 태도는 적절하지 않으며,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입장을 반복한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지혜를 나누고, 사랑과 용서를 기조로 다른 사람들을 대해야 한다. 기꺼이 다른 이들을 환대할 수 있도록 우리 삶의 구조를 변화시켜야 할 필요도 있다.


다만 이 부분에서 구체적인 지침, 혹은 예시라고 할 만한 것들은 조금 부족해 보인다. 특히나 이 책이 공적인 영역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를 독려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실천의 영역이 구체적이지 못하고 이론적 차원으로만 제안되는 점은 상당히 아쉽다.



사실 이 책의 공헌은 공적인 영역에서 신앙의 자리가 치워지거나 봉쇄되는 상황에 문제가 있음을 일깨워 주는 데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점에서라면 어느 정도 소기의 성과는 있었던 것 같고. 가장 중요한 지적은 역시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실천은 부가적인 영역이 아니라 그 신앙적 본질의 영역이라는 점이다.


어떻게 하면 더 잘 믿을까에만 집중 한 채, 교회 중심의 신앙생활에 머물러 있는 상황은 아무리 봐도 이상하다. 운전면허증은 도로에 나가 차를 운전하기 위해 취득하는 것이다. 언제까지 면허장 내 연습 주행코스만 반복해서 오고가는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라도 이상하게 볼 터.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꼭 그렇게 보인다고 하면 조금 지나친 말이려나.


한 번 읽어 볼만한 책. 다만 조금 더 쉽게, 잘 풀어놓은 책이 계속 나와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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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피터의 고백 - 프란츠 카프카의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
마히 그랑 지음, 서준환 옮김, 프란츠 카프카 원작 / 늘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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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원에 전시하기 위해 밀림에서 잡아온 고릴라 한 마리가 있다. 놀랍게도 녀석은 유럽으로 실어오는 배 안에서 사람의 행동을 관찰하기를 한참, 어느 날 “안녕”이라는 사람의 말을 내뱉는다.


곧 이 신기한 원숭이는 서커스단에 팔려서 공연을 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가지고 있는 좀 더 큰 (경제적인) 잠재력을 알게 된 사람들에 의해 대도시로 옮겨와 사람의 교육을 받기 시작한다. 어느 덧 5년 만에 성공한 유명인이 된 그가, 학술원의 회원들 앞에서 자신의 진화 과정을 담담하게 회고한다는 내용의 이야기.



흥미로운 소재다. 사람이 된 원숭이라... 작가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자 한 걸까. 이 책은 그래픽 노블로, 원작은 프란츠 카프카가 쓴 소설이다. 만화처럼 구성되어 있는데, 대사가 그리 쉽거나 간단하지 않다. 책 전반에 걸쳐서 뭔가 부조리하고, 조금은 이상하기도 한 그런 느낌을 주기도 한다.(생각해 보면 이게 카프카 소설의 특징인 것 같기도 하고)


아마도 이런 ‘이상함’의 가장 큰 이유는 사람처럼 말하는 원숭이라는 주인공 때문일 것이다. 비슷하면서도 이질적인 존재인 유인원이 사람의 옷을 입고 말하는 건 동물원의 공연장에서는 지극히 평범하면서 유쾌하기까지 한 모습이겠지만, 그게 우리의 일상 속에서 일어난다면(그와 비슷한 배경을 지닌 소설 속 캐릭터라면) 확실히 조금은 어색할 것 같다.


당연히 소설 속 사건(5년 만에 고릴라가 인간처럼 되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작품의 내용 역시 이런 특별한 일이 어떤 과학적 매커니즘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굳이 설명하지 않는다. 어차피 작가도 독자고 이게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보는 거니까. 그리고 이런 불합리한 사건에 관한 묘사 속에 당연히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담겨 있다.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주인공 피터가 굳이 인간처럼 사고하려고 애쓴다거나, 인간처럼 보이기 위해 노력하는 것 자체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그저 담담하게, 자신의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이 진화의 과정에 무슨 역사적인 의미라든지, 철학적 사유가 들어갈 자리를 없애 버린다. 학술원에서의 그의 마지막 멘트는 그저 이런 삶도 있다는 걸 알리고 싶었다는 것뿐이었다.


강연 내내 피터는 인간의 ‘자격’이라든지 ‘조건’이라든지 하는 게 실은 별거 없다는 식으로 말한다. 피터는 자신의 진화를 자유를 향한 열정이나 도전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반대로 애초에 자신은 자유를 갈구해 본 적도 없다고 말한다. 그저 창살 안에 갇힌 답답함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었을 뿐. 그가 인간의 행동을 따라했던 건 다시 갇히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피터는 스스로 “인간 사회에서 중간쯤 되는 문화적 수준”을 체득했다고 말한다. 그 수준이란, 너무 현란하지도 않고, 너무 빈약하지도 않은 사고 수준에, 여흥을 적당히 즐길 줄 알고, 별다른 소란을 피우지 않으면서 순리대로 적응해 나가는 지극히 평범한 삶이다. 피터가 그렇게 살아갈 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다시 우리에 들어가지 않을 수 있었다.


여기엔 인간의 장점, 혹은 특별한 점이라고 꼽는 창의성이나 철학적 사유, 도덕이나 윤리 등이 전해 보이지 않는다. 그런 것 없이도 충분히 인간 사회는 돌아간다는 말일까? 그렇다면 작가는 그런 것들에 관한 인간의 허위의식을 지적하고 있다고 봐야할 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니들 사는 걸 보면 딱히 특별해 보이지도 않는데 뭘 그렇게 뻐기고 있냐 라는 식의.



물론 이건 작가가 만들어 낸 이야기 속 인간 사회가 그렇다는 것이다. 실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그런 형이상학적인 가치들을 빼놓고서는 제대로 돌아갈 수 없다. 문제는 그런 것들을 신경 쓰지 않고 오직 자아에 갇혀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일으키는 사고와 그 피해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지, 그런 가치들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게 아니다.(실제로 우린 이 부분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사람들을 향해 분통을 터뜨릴 때가 적지 않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저 평범한 중류층의 사람들의 삶 속에서 그런 가치들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은 또 그냥 흘려들을 수 없는 부분이다. 그건 인간을 흉내 내는 고릴라와 별반 다를 게 없는 삶일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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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2-06-10 2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노란가방 2022-06-11 16:32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
 
선릉 산책
정용준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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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제목을 보고 손에 든 소설집이다. ‘선릉 산책’. 딱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이고, 소설 속 선릉역 인근은 내가 가장 자주 돌아다니는 지역이다. 소설 속 인물들이 돌아다녔던 거리의 풍경을 읽으면서, 기억 속 내가 봤던 골목들 어디쯤일까 하는 상상이 자연스럽게 떠올라서 좀 더 몰입이 됐다.


이 책은 일곱 편의 중편 소설을 모아 놓은 소설집이다. 표제이기도 한 ‘선릉 산책’은 그 중 세 번째로 실려 있는 작품. 각각의 이야기들은 등장인물도 내용도 독립적인데, 한 가지 공통적인 소재가 있는 것 같다. 모두 어딘가를 ‘걷고’ 있다는 점이다. 생각해 보면 삶이라는 게 그렇게 계속 어딘가로 걸어가는 일이기도 하니까... 어쩌면 소설 속 ‘걷는 일’은 ‘살아가는 일’이기도 했던 것 같다.



일곱 개 이야기 속 인물들과 그들이 마주하는 사건들이 모두 개성이 있다. 다들 삶의 무거운 무게를 어깨에 지고 누군가와 함께 길을 걷고 있는데, 아무리 대화가 진행되어도 그 문제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무슨 벽에 부딪힌 건 아닌데, 뭔가 좀처럼 서로의 생각이 만나지 않는 달까.


예를 들면, 표제작이기도 한 ‘선릉 산책’ 속 주인공은 아는 형의 부탁으로 하루 아르바이트를 대신하게 된 인물이다. 그가 하게 된 일은 토요일 오전부터 오후까지 발달장애를 갖고 있는 한 소년과 함께 선릉역 인근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 겨우 하루 동안의 시간이지만, 그리고 정상적인 의사소통도 어려운 시간이었지만, 그렇게 둘이 함께 선릉역 인근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조금씩 마음을 열고 공감을 이루는 이야기일 거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작가는 여기에서 변주를 준다.


소년의 보호자로부터 세 시간만 더 맡아달라는 연락이 온 것. 갑작스러운 연락을 받고 주인공은 급격히 짜증이 치솟았고, 어둑해질 무렵 공원 어딘 가에서는 동네 양아치 청소년들과 사건도 발생한다. 서로 친해진 줄 알았던 두 사람 사이에는 다시 투명한 장벽이 생겨버린다. 우리가 누군가를 ‘이해한다’고 말할 때 거기에 담긴 무게는 얼마나 가벼운지...



그렇게 모든 이야기 하나같이 말끔하게 끝나는 건 아니지만, 또 그렇다고 영 어영부영 밋밋하고 찝찝하게 끝나기만 하는 건 아니다. 각각의 이야기는 나름의 결말이 있는데, 그게 썩 공감이 되는 측면이 있다. 아마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정도의 결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싶은.


이야기가 너무 어렵지도, 그렇다고 가볍거나 하지도 않다. 읽던 도중 다른 생각이 들거나 하지 않게 재미도 있고. 이야기를 쓸 줄 아는 재능있는 작가 같다. 다음에 또 만날 기회가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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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의 방식 - 서로 기여하고 번영하는 삶에 관하여
베론다 L. 몽고메리 지음, 정서진 옮김 / 이상북스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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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은 인류가 가지고 있는 분류학 기준에서 생물로서는 가장 하위에 있는 것들이다. (플랑크톤이나 바이러스를 어떤 식으로 분류하느냐에 따라 조금은 다르겠지만) 일반적으로 우린 인간과 같은 포유류, 그 중에서도 영장류를 가장 고등한 위치에 올려놓고, 파충류와 양서류를 그 아래에, 다시 다양한 종류의 식물종들을 그 아랫단에 배치한다. 소위 진화론적 분류체계다.


때문에 우리는 식물에 관해 모르는 게 많다. 적어도 나와 비슷한 정도는 되어야 상대에 대해 좀 더 진지하게 관심을 두는 인간의 특성이다. 식물은 조용해서 (당연히) 말을 하거나, 최소한 고양이나 개처럼 울부짖지도 않고, 우리에게 애교로 보이는 행동을 보이지도 않는다. 뭔가 불편하다고 해서 어딘가로 떠나버리지도 않고 그저 조용히 홀로 말라버릴 뿐이다. 무슨 독초를 먹지 않는 이상, 좀처럼 식물에게 ‘공격당하는’ 일도 없다(사실 이것도 엄밀히 말하면 우리의 공격에 대한 방어기제다).


식물은 조용할 뿐만 아니라 느리고 재미가 없다. 그리고 기르는 동안 할 일도 별로 없다. 하루 종일 보고 있어도 뭔가 변화가 일어나는 모습을 보기가 쉽지 않다. 물론 좀 더 긴 텀을 두고 관찰한다면 분명 달라지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겠지만, 이 바쁜 현대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하지만 미생물학자인 저자가 쓴 이 책을 보면, 식물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조용하고, 정적이고, 재미없는 이웃이 아니다. 자신이 살아가는 장소를 스스로 바꿀 수 없는 식물은, 대신 환경에 적응해서 살아남을 수 있는 다양한 조치들을 취한다(1장). 같은 종이라고 하더라도 자라는 장소에 따라 선택하는 전략은 다르다. 심지어 식물은 종종 자신이 처한 환경을 변화시키기도 한다(4장). 화산이 터지고 대규모 산불이 나 황폐화된 땅도, 일단 식물이 자리 잡기 시작하면 점차 생태가 회복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식물의 뿌리와 미생물 사이의 공생 관계는 이 부분에서 열일을 한다.


뿐만 아니라 식물은 생존을 위해 다른 개체와 경쟁을 하기도 하고(2장), 때로는 협력을 하기도 한다(5-6장). 우리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어떤 종들은 상당히 넓은 지역에서 땅 속 뿌리들이 연결되어 서로에게 필요한 영양소 같은 것들을 주고받는다. 일부 식물들은 다른 종들 끼리 성장에 유리한 도움을 주고받기도 한다.


꽤나 역동적인 식물들의 세계에 관한 이야기는 읽는 재미가 있다. 화려하지만 연약해 보이는 꽃들, 온통 잘 구분이 되지 않는 그린 컬러의 옷을 입고 그저 ‘배경’으로만 작동하는 것 같았던 풀과 나무들도, 실은 굉장히 치열하게 생존을 위한 도전과 싸움을 하고 있었다. 이건 뭐 쉽지 않는 게 없다.



여기서 자연히 그러면 우리(인간)가 배울 점도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떠오르는데, 이 책의 저자 역시 그런 식으로 논의를 이끌어 간다. 각각의 장 말미에는 그 장에서 설명한 식물의 특성과 거기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을 짧게 언급하는 식의 구성을 반복한다. 식물학과 인문학의 결합이랄까.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는 식물의 모습에서 저자는 시간을 들여 자신이 처한 상황을 분석하고 적절한 전략을 세워야 한다는 교훈을 읽어낸다. 생존을 위해 다양한 위험부담을 감수하는 전략을 취하는 데에서는, 우리가 가진 자원과 에너지를 전략적으로 사용해야 할 필요성을 배우는 식이다.


물론 이런 식의 적용점을 찾아내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여기에서 저자가 이끌어 내는 사회적 전략, 인간관계에서의 교훈 같은 것들은 식물을 관찰하기 전에도 이미 우리가 알고 있었던 것들이다. 다른 말로 하면, 저자는 이미 알고 있는 교훈을 식물들의 모습에 덧씌워서 말하고 있다는 뜻이다.


식물은 우리에게 그런 전략이나 교훈, 혹은 도덕법칙을 가르치지 않는다. 그건 동물도 마찬가지다. 식물(혹은 어떤 동물 종)이 이렇게 하니까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식의 논리 전개는 딱히 당위성을 입증하기가 어렵다. 사실 그것들이 그런 능력을 지니고 있는지부터가 의문이지만. 사실 우리는 뭔가를 몰라서 제대로 안 하는 게 아니지 않던가.



그러나 이와는 별개로 책 자체는 좋다. 무엇보다 표지도 예쁘고, 평소 잘 알 수 없었던 식물들의 다양한 모습들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는 측면에서도 만족스럽다. 조금은 과하게 큰 이야기로 넘어가려고 시도만 하지 않았다면 좀 더 높은 점수를 주었을 것 같다. 따뜻한 봄볕을 맞으면서 읽기에 딱 적합할 것 같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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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의 정치적 권리 선언
앨러스데어 코크런 지음, 박진영.오창룡 옮김 / 창비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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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도 동물을 학대하는 사건에 관한 뉴스가 심심치 않게 들린다. 개나 고양이 같은 동물을 고문하거나 죽이는 사이코패스 성향이 보이는 인간들부터, 경제적 이익을 위해 열악한 상태에서 동물들을 사육하는 업자들, 각종 끔직한 동물실험을 서슴지 않는 사람들까지 그 경우도 다양하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당연히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 불쾌한 감정이 들 것이다. 누군가 그런 일을 하는 것을 알게 된다면 어떤 식으로든 막으려(적극적으로 나서든지, 누군가에게 알리든지) 할 것이고. 하지만 그걸로 충분할까?(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법적 처벌수위도 그다지 무겁지 않다)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법들이 필요하겠지만, 이 책의 저자는 법을 제정함으로써 일을킬 수 있는 변화에 집중한다. 동물보호, 혹은 동물복지에 관한 법인데,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나아간 입장이다.



저자는 현재의 동물복지 관련 법률이 충분치 못하다고 주장한다. 이건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그 처벌수위가 현저히 낮아서 제대로 된 범죄예방효과가 있는지조차 미지수다. 저자는 여기에 좀 더 근본적인 문제를 지적한다. 현재의 법률은 동물을 인간에 비해 낮은 지위에 있는 것으로 상정하고 있다는 게 문제라는 것.


방법은 동물들에게 일종의 ‘법적 인격’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여기에 예상되는 반대의견을 하나하나 반박해 나간다. 예컨대 법적인 의무를 질 수 있는 존재에게만 이런 지위를 부여해야 한다는 의견에 대해서는, (지적) 장애인이나 어린 아이 같은 경우에는 그런 의무를 묻지 않음에도 법적으로 인격을 부여하고 있지 않느냐고 되받아치는 식이다.


물론 동물들에게 법적 인격을 부여한다고 해서, 모든 종류의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예컨대 고라니에게 참정권을 부여한다거나 할 필요는 없다. 대신 저자가 말하는 건 ‘성원권’이다. 동물들도 인간과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서의 지위를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 물론 이건 단지 법조문 몇 개로 보장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좀 더 적극적으로 동물들의 지위를 보장할 수 있는 전담 입법위원(의원)를 배정하는 식의 조치도 필요하다고 저자는 덧붙인다.



처음 책 제목인 “동물의 정치적 권리 선언”을 처음 봤을 때, 문자 그대로 읽히지는 않았다. 뭔가 알레고리적 표현이나 우화적 문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로 동물에게 ‘정치적 권리’를 부여해야 한다는 내용일 줄이야.


동물들이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한 저자의 깊은 공감력에는 박수를 치고 싶다. 특히 우리와 가까이 지내는 동물들에 관해 좀 더 특별한 감정을 갖게 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인 것이다. 저자는 철저하게 법적 논리로 동물들에게 ‘성원권’을 부여해야 하는, 정확히 말하면 부여할 수도 있는 근거를 제시하려고 애쓴다. 그리고 이런 논리 전개는 어느 정도 수긍이 되는 면도 있다.


다만 뭔가 개운치가 않다. 인간과 동물의 경계가 그 정도로 희미한 것일까? 인간의 인간됨(법적 인격을 부여하는 근거)은 그저 법조항을 만들기 나름일까? 물론 인간과 동물의 차이라는 게 진화의 정도와 방향의 문제일 뿐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이런 결론에 이르기가 좀 더 쉬울 것 같긴 하다. 언뜻 단지 법률 자구의 문제처럼 보이지만, 이건 실은 세계관 차원의 문제다.

그리고 법이라는 게 생각만큼 정교하게 제정할 수도, 적용하기도 어렵다는 점도 기억해야 할 것 같다. 물론 없는 것보다야 있는 게 낫겠지만, 실제 적용에 있어서는 수많은 ‘겹침’의 공간들이 존재하고, 해석을 통한 유보나 양보의 시간도 마주할 수밖에 없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의 운전자가 한 무리의 양떼와 한 사람의 인간 중 어느 쪽으로 핸들을 트는 것이 정당할까. 처벌의 선은 어디까지가 합당할까. 동물의 복지를 신장시키기 위한 전담 국회의원이 필요하다면, 같은 논리로 장애인의 권익을 위한 의원이나 소상공인, 자영업자, 학생, 어린이, 학교 밖 청소년, 미혼모를 위한 전담 의원들을 뽑지 말아야 할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책은 동물의 복지, 지위 향상에 관한 내용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인간의 본질에 관한 질문이 좀 더 강하게 떠오른다. 여전히 동물에게 법적 지위, 특히 정치적 권리를 부여해야 한다는 주장은 지나치게 감상적인 주장으로 느껴진다. 그것이 정말 동물들이 ‘원하는’ 일인가? 우리는 쉽게 동물들을 의인화하지만, 사실 아직 동물들의 의식세계에 관해 모르는 게 너무 많다.


이에 대한 C. S. 루이스의 견해가 떠오른다. 루이스는 동물에게는 자아가 없기에, 앞서 일어난 고통과 지금 당하는 고통 사이를 연결시킬 수 없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동물에게 고통은 지금 이 자리에서 느끼는 감각 차원의 문제지, 그것으로 인해 자신의 삶을 후회하거나 회의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물론 이건 그러니까 동물을 학대해도 좋다는 뜻이 아니다. 최근 벌어지는 동물 학대 사건들을 보면, 루이스의 추측이 맞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얼마나 많은 동물들이 지옥 같은 경험을 날마다 겪고 있는지..


동시에 루이스는 어쩌면 반려동물, 혹은 인간과 가까운 동물들의 경우에는 자아 비슷한 것이 형성될 수 있지 않겠느냐고 상상의 범위를 조금 넓히기도 한다. 이 점에서 그는 기독교적 해석을 가미하는데, 마치 그리스도로 인해 인간이 새로운 인식과 본질을 얻게 된 것처럼, 인간을 통해 자연이 구원 비슷한 것을 얻게 될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우리가 만나는 동물들 또한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다.


사실 문제는 인간이 동료 인간을 충분히 존중하지도 않는다는 게 더 크지 않을까 싶다. 동료 인간을 인격적으로 대하는 사람이 동물을 향해서는 잔혹하게 대할 가능성이 낮을 테니까(물론 언제나 예외는 있다). 법도 중요하지만 기본적으로 타인을, 다른 생명을 대하는 의식이 개선되어야 하는 것도 그 못지않게 중요해 보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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