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안 일본 - 일본 귀족문화의 원류
모로 미야 지음, 노만수 옮김 / 일빛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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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줄거리 。。。。。。。

 

     781년 백제에서 건너간 이주민의 후손이 낳은 야마베노가 일본의 왕이 되면서 시작된 헤이안 시대의 사회 문화 전반에 관한 개설서이다. 작가는 그 시대의 인물(1장), 식생활(2장), 종교(3장), 문학(4장) 등 여러 방면의 이야기를 그리 과장되지 않는 문체로 정갈하게 서술해 나간다. 

     마지막 장인 5장에서는 ‘겐지 모노가타리’라는 인물의 복잡한 여자관계에 관한 일본 최초의 소설을 작가가 직접 각색해 당시 귀족들의 삶의 한 단면을 재미있게 훑어갈 수 있도록 하고 있다.

 

 

2. 감상평 。。。。。。。

 

     아직 칼을 들고 설치는 사무라이들이 활개를 치던 가마쿠라 막부 시대가 시작되기 전, 조금은 더 단출하고 하지만 나름대로는 꼿꼿했던 귀족 문화가 발달했던 시대. 헤이안 시대에 관해 이 책을 읽고 든 느낌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삼국시대 정도 된다니, 대개 대륙에 비해 문화의 발전 속도가 늦기 마련인 섬나라인지라 아직 화려한(종종 일본 문화에서 볼 수 있는 좀 과장되기까지 한) 수준의 무엇은 아니지만, 평생을 시골에서 살며 자신만의 고집과 고상함을 유지하는 중년의 남자의 느낌이랄까.

     일본 사람들의 이름은 왜 이리 길고 안 외워지는 걸까. 이 책을 읽는 데 가장 어려운 점은 복잡한 이름들을 구별하는 것부터 시작됐다. 책은 나름대로 헤이안 시대라는 특정한 시대의 여러 가지 문화적 측면을 다루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역시나 과거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사서들을 참고해야 할진대, 대개의 사서들이 인물중심으로만 쓰여 있으니 자연히 그 소개서도 인물 중심으로 나온다. 사실 내 경우 좀 더 관심이 가는 부분은 음식과 생활풍속 등을 다루는 부분이었는데.

     한 사회, 특정한 시대를 이해하는 것이 어디 책 한 권으로 될까 만은, 아버지의 나라를 외국에 알리고 싶다는 알찬 결심이 그대로 묻어나오기 때문인지, 읽는 사람에게 전해지는 무엇이 있다. 다만 마지막에 실려 있는 겐지 이야기의 비중이 지나치게 커서 나머지 부분을 잡아먹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게 좀 아쉽다.(내가 보기엔 그저 부족한 것 없이 자라 이 여자, 저 여자를 건드리는 것으로 한 평생을 보낸 한량의 이야기일 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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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함께한 직장생활
데이비드 그레고리 지음, 서소울 옮김 / 포이에마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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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줄거리 。。。。。。。

 

     언제까지 빈둥거리고 있을 거냐는 아버지의 말씀에 썩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취업전선에 뛰어들게 된 로건. 하지만 첫 번째 지원하는 회사에 덜컥 입사를 하게 되었다. 그가 맡게 된 것은 조직분석. 회사의 곳곳을 돌아다니며 잘되고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찾아 내 이유를 분석해 보고하는 일이었다.

     1층부터 5층까지 각 층마다 독특한 특색을 가지고 있는 회사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로건은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 조금씩 깨닫게 된다.




 

2. 감상평 。。。。。。。

 

     전작 중 하나인 ‘예수와 함께한 저녁식사’와 ‘너무’ 비슷한 느낌의 책이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도 존재한다.

     ‘저녁식사’는 식탁이라는 장소를 통해 편안한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식탁에 참여한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 자연스럽게 주제에 접근하는 방식을 취한다. 식탁에서야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갈 수 있는 것이고, 때문에 책에 등장하는 것과 같은 종종 진지한 대화도 가능하다. 요컨대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다’ 하는 식의 자연스러움이 있었다.

     하지만 ‘직장생활’은 회사라는 배경과 주제 사이의 직접적인 관련성이 좀 부족한 느낌이다. 회사의 각 측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인생에서 서로 다른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투영하려고 했으나, 무엇보다도 책에 나오는 것과 같은 회사는 전혀 있을 법한 모습이 아니다. 지나치게 단순화되어 있고, 실제 직장생활과는 별 상관이 없는 전개가 이어져서 ‘직장생활에 관한 기독교 세계관적 접근’과 같은 근사한 내용을 생각했던 나로서는 좀 실망스러웠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용까지 실망스러웠던 것은 아니다. 저자는 사람이 사는 목적에 관해 충분히 성경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직장’이라는 배경도 단지 비유로 사용한 것뿐이라면 썩 괜찮게 녹아들어간다.(그래도 나는 못내 아쉽다)

 

     불신자들을 향해 기독교가 썩 믿을만한 종교라는 것을 알리는 것이 저자가 책을 쓰는 가장 중요한 이유인 듯하다. 하지만 덕분에 책의 권수가 늘어나는데도 주제에 있어서는 여전히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는 모습이다. 다음 책에서는 좀 더 주제의 발전이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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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
다자이 오사무 지음, 송태욱 옮김 / 서커스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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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겹겹의 가면이 붙어 있었으므로

어느 게 어떻게 슬픈 건지 확인할 수가 없었다.

 

1. 줄거리 。。。。。。。

 

     작가가 쓴 여러 개의 단편 소설들을 모아 놓은 책이다. 작가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도 담겨 있고, 어디선가 들어봤던 것 같은 민담들, 또 작가의 상상력으로 창조해 낸 이야기들이 다양하게 담겨 있다.



 

2. 감상평 。。。。。。。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평생 네 번에 걸친 자살을 시도했다는 작가가 쓴 첫 소설집. 첫 소설집인데 제목은 마치 수십 년 작가 생활을 마무리 할 때나 어울릴 것 같은 ‘만년’이다. 꽤나 복잡한 작가라는 느낌이 팍 든다.

     책의 전면에 삽입되어 있는 일본식 전통의상을 입고 있는 흑백사진(아마도 작가 자신인 듯)에서 느껴지는 포스와 ‘성장통을 앓고 있는 모든 청춘들을 위한 영혼의 바이블’이라는 멋들어진 카피문구는 책을 펴기 전부터 잔뜩 기대감을 갖도록 만들지만, 막상 책장을 넘기면서 느껴지는 건 실망감에 가까운 느낌.


     문제는 역시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은 저자의 복잡한 심경 때문이라고 할까. 작품 전체에 그런 사색과 개인적인 방황이 짙게 묻어난다. 소설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우리나라 근대초기 소설류에서 느낄 수 있는 그것과 유사하다. 지나친 심리주의나 낭만주의에 경도되어 있는, 좀 더 리얼하게 표현하면 오랫동안 들어가지 않았던 다락방 냄새랑 비슷하다고 할까.

     아무튼 현대의 독자들 중에는 썩 눈에 들어오지 않을 것 같은 느낌(나도 그 중 하나)이다. 읽는 데 참 힘들었던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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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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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전에 지니고 살았던 감정, 과거에 우리가 사는 모습을 규정하던 감정은

우리가 눈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야,

눈이 없으면 감정도 다른 것이 되어버려,

 

 

 

1. 줄거리 。。。。。。。

 

      어느 날 도로에서 신호를 기다리던 차 한 대가 신호가 바뀌었는데도 그냥 멈춰서 있다.뒤에 있는 차는 빨리 출발하라며 경적을 울려대지만, 그 차는 좀처럼 출발을 하지 못한다. 사람들이 차 밖으로 나와 가장 앞에 있는 차에 따지려고 갔을 때, 가장 앞 차의 운전자는 이렇게 외친다. “눈이 안 보여.”

 

     이 난감한 외침으로 책은 시작한다. 그냥 갑자기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곳까지 멀쩡히 차를 몰고 왔는데, 말 그대로 갑자기다. 온 세상이 그저 하얗게만 보인다는 것. 다행히 옆에 있던 사람이 차를 대신 운전해 차 주인은 집에 도착할 수 있었지만, 당장 보이지 않는 눈은 어떻게 한단 말인가. 다음 날 안과를 찾아가 봤지만 의사도 눈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말 뿐이다.

     하지만 문제는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차를 대신 운전해 차주인을 집으로 데려다 주고 몰래 차를 훔쳐 도망갔던 사람도 곧 눈이 보이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안과의 의사도, 안과에서 만난 다른 환자들도 차례로 눈이 보이지 않게 된다. 정부는 사태가 심상치 않은 것을 깨닫고 갑자기 눈이 보이지 않게 된 사람들을 집단으로 수용할 장소를 찾는다. 그렇게 찾아낸 곳이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한 정신병원. 치료법을 찾아주겠다는 말은 했지만 사실상 정부는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는다. 군인들을 동원해 병원을 봉쇄하고 끼니를 제공할 뿐. 그것이 전부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없게 되고, 그에 따라 수용되는 인원도 점점 많아진다. 그리고 어느 날부턴가 더 이상 식사가 제공되지 않게 되고, 병원을 감시하던 군인들도 모두 사라져버린다. 모든 사람들이 눈이 멀게 된 것이다.

 

2. 감상평 。。。。。。。 

 

     줄거리 자체가 매우 흥미로운 소설이다. 어느 날 갑자기 한 도시 안의 모든 사람들의 눈이 보이지 않게 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사실 일찍부터 사람들은 이와 비슷한 상상을 해 보기를 좋아했었다. 국가의 기원에 관한 정치학자들의 논의(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니, 사회 계약설이니 하는 것들이 그 예이다)에서, 이미 사람들은 인류가 현재 가지고 있는 문명들을 만들어 내기 이전의 소위 ‘원시 사회’에서 어떠한 삶을 살았을까 라는 질문에 서로 다른 답을 하며 자신들의 논지를 전개해 왔다. 또, 인간이 최초에는 어떤 언어를 사용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갓난아이를 돌보는 사람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도록 하고 아기가 스스로 말을 할 수 있도록 지켜보는 실험도 하지 않았다던가.

     길게 보면 이 책도 그런 연장선상에 있다. 다만 저자의 독특성은 굳이 현재 인간이 가진 모든 문명적 도구들을 제거해야하는 어려운 시도를 하는 대신, 그저 모든 사람의 눈을 멀게 하는 간단한 작업으로 그 가정을 재현했다는 데 있다. 눈이 보이지 않으니 남들에게 과시하기 위한 명품 나부랭이를 몸에 걸칠 필요도 없고, 대형차와 넓은 아파트도 그 본래의 중요한 목적 - ‘나 이런 사람이요’하면서 뻐기기 위한 -을 상실해 버린다. 대신 이제 사람들에게는 먹고, 입고, 자고, 배설하는, 매우 기초적인 것들만이 중요해진다. 놀랍지 않은가, 단 하나만 제거해버렸을 뿐인데 말이다. 저자의 창의력 하나에는 박수를 보낸다.

 

     그럼 저자는 왜 이런 시도들을 했을까? 아마도 저자는 현재 인간들이 걸치고 있는 모든 종류의 허례들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을 때, 인간 본성이 드러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때문에 저자는 모두의 눈을 멀게 함으로써, 우리 모두의 본성을 발가벗기고, 바로 거기에 이야기의 초점을 맞춘다.

     모두가 눈이 보이지 않게 되자,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할 필요’가 없게 되었고, 사람들은 내키는 대로 행동을 한다. 아무데나 배설을 하고, 더러운 오물 위에서 잠을 자고, 온통 먹는 문제로만 고민이 집중된다. 여기서 인간과 동물이 다른 점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등장한다. 사람들은 그 와중에서도 자연스럽게 일종의 ‘규칙’을 스스로 만들어 낸다. 예를 들어 모두가 눈이 멀게 되자 사람들은 아무 빈집에라도 들어가 살 수 있고, 뒤에 온 사람들은 다른 곳으로 가야한다.

     하지만 이것은 정작 자신의 생명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을 때만이 가능한 규칙이라는 점에서 제한점을 갖는다. 사람들은 먹을 것을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위협하고, 속이기를 주저하지 않고, 음식을 향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양보 없이 달려들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대로 깔려 죽기도 한다. 부패하고 무능한 공무원과 정치인들의 모습은 책 속에도 그대로 등장한다. 또, 사람들은 자기 것을 차지하기 위해 무한히 서로 다투고 투쟁한다. 뿐만 아니라 책 속에는 단 한 사람의 이름도 등장하지 않는데, 이는 현대인의 익명성과 무관심을 보여주는 듯하다.

     이 모든 것을 통해 저자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이게 바로 여러분의 본 모습입니다.”

 

     하지만 그런 중에서도 서로를 경쟁자가 아닌 공동체로 보고자 했던 한 그룹의 모습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그들 모두가 개인으로 있을 때는 큰 힘을 발휘할 수 없는, 그래서 눈앞의 이익만을 쫓아 사는 사람들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눈이 멀고 나서야 비로소 서로에게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서로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사람으로 인식하자 좀 더 먼 전망을 보게 되었고, 현재의 어려움을 이겨나갈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된다. 아마도 이 책의 주제는 여기에 있지 않을까. ‘동료 인간들에 대한 진지한 관심과 사랑, 연대의식이 이 사회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힘 가운데 하나이다’라는.

     오랜만에 멋진 책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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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교육학 - 민주주의와 윤리 그리고 시민적 용기
파울로 프레이리 지음, 사람대사람 옮김 / 아침이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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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실 ‘올바르게’ 생각하는 사람이야말로,

비록 가끔씩 잘못 생각하는 일이 있기는 해도,

‘올바른’ 생각하기를 가르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1. 줄거리 。。。。。。。 

 

     『페다고지』로 유명한 브라질의 교육학자인 프레이리의 책이다. 그는 이 책에서 교육의 본질을 ‘자유’라는 주제로 엮어 내고 있다.

 
     프레이리는 인간을 ‘결정된 존재’가 아니라 ‘형성하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존재이므로 스스로의 노력에 따라 실제로 무엇인가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의 교육에 관한 정의가 등장한다. 교육이란 단지 지식을 쌓는 것이 아니라, 아직 완성되지 않은 인간이 완성으로 가는 과정이라는 것.


     자연히 이런 의미의 교육에는 ‘대화’가 중요해진다. 특히 교사는 단순히 자신의 지식과 정보를 학생에게 입력시키는 사람이 아니고, 가르치는 동시에 배우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이 가진 생각이 틀릴 수도 있다는 전제를 잊지 말아야 한다. 동시에 그는 학생으로 하여금 세상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 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 학생에게 가르치는 내용과 학생이 처한 상황을 연결시켜 가르쳐야 한다.(프레이리는 이를 ‘정치적’이여야 한다는 말로 표현한다)

     특히 프레이리는 세계의 억압 받는 사람들을 위한 교육을 강조하고 있는데, 그들이 받는 억압은 소위 하늘이 내린 것이 아니라 억압적 질서를 옹호하는 사람들에 의한 것이며 참 교육은 그런 억압적 질서로부터의 진정한 자유를 목표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자연스럽게 ‘자유의 교육학’이라는 책의 제목을 떠올리게 한다.




 

2. 감상평 。。。。。。。   

 

     『페다고지』를 워낙에 흥미롭게 읽었던 터라 이 책 또한 기대감을 가지고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단순한 교사나 교육학자라기보다는 교육사상가에 가까운 저자였기에 책에 등장하는 개념들이 읽기에 쉽지만은 않았지만, 한 번 흐름을 타기 시작하니 또 그리 어렵지 않게 읽어나갈 수 있었다.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 중 하나는 교육에 관한 저자의 정의이다. 단지 체제에 순응하는 군중을 만들기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되며, 진정으로 자신의 삶을 결정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는 자유로운 시민을 길러내는 하나의 정치적 작업이어야 한다는 것이다.(물론 여기서 말하는 ‘정치적’이라는 말은 우리나라에서 익히 통하는 ‘막무가내 식의 아집’이라는 말이 아니라 ‘현실 참여적’이라는 의미이다.) 말 그대로 자유의 교육학이다.

     하지만 오늘의 우리나라의 교육 상황은 프레이리가 지적하는 것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치닫고 있다. 정부의 교육정책은 단지 학생에게 지식만을 쌓는 ‘은행 저금식 교육’을 지향하고 있고, 교육은 더 이상 교육이 아니라 단순한 훈련으로 전락해 버렸다. 이런 ‘훈련’의 결과인지 최근 일부에서는 ‘좌편향 교육에 대한 시정’이라는 어이없는 주장(자기들은 꽤나 중립적이라는 착각에 빠져 실은 우편향으로 치닫는)을 실제로 믿는 사람들까지 생겼다.

     이런 교육의 붕괴는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결국 현재의 왜곡된 사회구조는 시간이 갈수록 고착화되어 더 이상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변화를 일으킬 수 없는 악한 상황으로 전락해갈지도 모른다. 학대와 억압을 받는 사람들은 점점 그 정도를 더해갈 것이고, 최악의 경우는 (상상하기 싫은) 폭력과 분쟁으로 이어질지도 모른다.

     문제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쉽게 자기 입맛에 맞게 바꾸는 교육에 있다.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에게서 그 ‘가능성’의 현실화를 위한 중요한 양분이 교육인데, 그 가능성의 실현으로 현재 자신이 누리고 있는 특권을 잃을까 염려하는 사람들이 교육 정책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으니 말은 다 했지 뭐.

 

     가르침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가르친다는 것은 무엇인지, 교육과 그것의 실현, 그것이 지향하는 바, 현실 참여적인 교육의 개념, 그리고 억눌리고 약한 사람들에 관한 관심까지 참 여러 가지를 생각해보게 만드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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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빵맨 2008-12-04 0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aulo Freire는 저도 참 존경하는 교육사상가입니다. 제가 공부하고 있는 학교에서는 모든 학생들이 읽어야 하는 필독서가 되었고요. 미국 내의 교육대학원들은 Freire의 교육에 대한 이해가 mainstream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그는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제가 이해하기로는 한국의 '전교조'도 Freire의 철학으로부터 시작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물론 지금의 전교조는 학생들의 '의식화'를 등한시하고, 학생들로 하여금 사회정치적 행동을 실천할 수 있도록 의식화하는 대신 교육의 민주화라는 자신들의 어젠다를 교사들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비판을 받는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Freire 당시의 브라질은 글을 읽고 쓸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대통령 선거에 대한 투표권을 주지 않았다고 하네요. 그런 이유에서 좁은 의미에서는 문맹자들로 하여금 '정치적'인 영향력을 가질 수 있도록 문맹교육을 실시하는 것으로 부터 나왔고, 서방에서는 보다 넓은 의미에서 교육과 의식화를 통해서 특히 소수자들에게 정치적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교육으로써 자리를 잡고 있는 것 같아요. 가르침과 축복을 통해서 왜곡된 사회구조를 고착화시키는 종교가 되어버린 기독교가 잃어버린 사회 정의의 목소리를 해방신학이라는 렌즈를 통해서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아요. 저는 Freire를 읽으면서 해방신학을 도매금으로 비난했던 제 자신을 되돌아보는 기회가 되었답니다. ^^

노란가방 2008-12-04 22:08   좋아요 0 | URL
미국에서는 그 정도의 대접을 받고 있군요. 고무적인 일입니다.
우리나라 교육당국자들은 무조건적으로 미국을 추종하면서
그런 부분은 왜 안 본받는지..

프레이리와 해방신학이라.. 생각해보지 못했던 부분이네요.
WCC쪽에서 일하기도 했던 걸 보면 분명히 뭔가 관련이 있었겠죠.
종교의 사회적 책임에 관해서는 저도 누구보다 강조하고 있는 부분이랍니다.
특히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관련해서 말이죠.
재미있게도 이런 생각을 가지고 가르치다보니 자연스럽게 프레이리식의 교육방식을 사용하게 되더군요. 역시 탁월한 사상가 중 한 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