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탠리 하우어워스와의 대화 - 신앙이 의미를 잃은 세상에서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법 비아의 말들
스탠리 하우워어스.새뮤얼 웰스 지음, 민경찬.윤혜림 옮김 / 비아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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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을 보면 알 수 있듯 이 책은 저명한 신학자 스탠리 하우어워스와 나 대화를 책으로 역은 것이다. 다만 하우어워스를 단독 인터뷰이로 삼아 진행된 인터뷰가 아니라 또 한 명의 인물이 추가된다. 하우어워스가 듀크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가르칠 당시 듀크대학교 대학교회의 교목이자 신학대학원에서 교수로 있었던(그리고 하우어워스로 논문까지 썼던) 새뮤얼 웰스가 그 주인공. 사실 이 책의 “대화”는 인터뷰어보다는 하우어워스와 웰스 사이에서 대부분 이루어진다.


아 이 둘 사이에는 또 하나의 인연도 있었는데, 바로 하우어워스가 웰스의 아들인 로리의 대부가 되어준 것이었다. 서양에서 대부는 꽤 가까운 사람에게 맡긴다는 걸 생각해 보면 이 둘 사이의 친밀함이 와 닿을까? 참고로 하우어워스는 자신의 대자인 로리에게 매년 편지를 한 장씩 썼고, 이를 모아 “덕과 성품”이라는 훌륭한 책을 쓰기도 했다.





이 책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대화는 크게 열 개의 주제로 나뉘지만, 그게 순서대로 주제가 심화되고 그런 식은 아니다. 각각의 주제는 서로 독립적이지만, 그렇다고 다른 주제를 위한 대화와 완전히 동떨어진 것은 아니었다. 전반적으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관한, 그리고 신학자와 목회자(웰스의 경우)로 살며 사역을 하는 방식에 관해, 교회와 개인적 삶 등에 관한 주제가 다뤄진다.


확실히 거장과 하는 대화에서는 많은 걸 얻을 수 있다. 직접 대화를 하는 게 아니라 그저 대화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이 점은 하우어워스만이 아니라 그의 대화 상대인 웰스도 마찬가지였다. 영국 성공회 사제로 지역 교회를 담당해 목회를 해 온 인물답게 목회적인 관점으로(그래서 상대적으로 하우어워스가 한 발 더 나아가 보인다) 대화에 참여하는데, 그 깊이가 결코 얕지 않다.


이렇게 다양한 주제를 다루는 대화를 짧게 설명하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 일상적인 편안한 대화 속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탁월한 통찰을 읽는 게 꽤나 재미있다. 예를 들면 하우어워스는 종말론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일의 중요성에 관해 말하면서, 그것은 필연성으로 이루어진 세상, 즉 어떤 일을 하면 반드시 그에 걸맞은 보상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세상과 달리, 어떤 것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라는 선물로 살아가는 방법이라고 말한다.(개인적으로 종말론을 이렇게 아름답게 설명하는 이론은 본 적이 없다)



열 개로 나뉘어있는 각각의 대화들이 그리 길지는 않다. 또, 편안한 가운데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느낌이기에 읽기에 그리 어렵지도 않다. 물론 앞서 설명한 것처럼 신학적인 깊이가 꽤나 있어서, 관련 내용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독자에게 좀 더 와 닿을 것 같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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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보는 십자군 이야기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
시오노 나나미 지음, 송태욱 옮김, 귀스타브 도레 그림, 차용구 감수 / 문학동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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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 시리즈 3권을 모두 읽었다. 과연 확실히 글쓰는 재주가 있는 작가였고, 비슷한 주제를 다룬 다른 책들보다 훨씬 더 재미있고, 자세하게 관련된 내용들을 읽어볼 수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 동네 도서관에 갔을 때 또 한 권의 책이 있다는 걸 발견했다. “그림으로 보는 십자군 이야기”. 19세기 초 십자군 역사 속 다양한 장면을 삽화로 그려낸 귀스타브 도레의 그림들을 보고 영감을 받은 시오노 나나미가 백 여 장의 그림을 싣고 여기에 간단한 설명과 지도를 붙여 전체적인 스토리를 만들어 냈다.



그러면 이 책이 본편인 세 권을 다 쓴 후에 만든 것이냐 하면, 그건 또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이 책을 먼저 내고, 그 후에 본편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하지만 또 삽화에 직접 붙여 놓은 글들을 보면, 앞으로 자신이 쓰고 싶은 내용의 전체 윤곽은 이미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충분한 자료 조사를 마치고 글을 쓰기 시작하는 작가의 글쓰기 방식이 묻어 나오는 부분이다.


하지만 그건 저자의 사정이고, 십자군 역사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하는 독자라면, 단순이 여기에 짧게 실린 코멘트만을 가지고 전체적인 윤곽을 파악하는 건 쉽지 않을 것 같다. 차라리 내 경우처럼 본편을 모두 읽은 다음 이 책을 보면서 앞서 읽었던 내용을 회상하는 식이 좀 더 어울리지 않을까.



저자가 매력을 느꼈던 도판들은 판화 형식으로 제작된 것들이다. 당연히 흑백이지만, 의외로 농담이 들어가서 입체적인 느낌도 준다. 간략한 캐리커처 보다는 세밀화에 가까운 느낌의 삽화들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뭔가 역사의 한 장면을 그렸다는 느낌을 준다. 이런 그림이 잔뜩 실려 있는 책을 보면, 더구나 그 내용이 자신의 관심사와 맞닿아 있다면 뭔가 책을 쓰고 싶다는 느낌이 들기도 할 것 같다.


뭔가 새롭고 대단한 내용이 담겨 있는 건 아니지만, 가볍게 전체를 훑어보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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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기 기독교와 도시 문화 - 바울 공동체의 사회 문화 환경
웨인 믹스 지음, 박규태 옮김 / IVP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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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기독교 사회학자인 저자는 이 책에서 “바울계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을 하던 1세기 도시문화에 관한 사회학적 연구를 시도한다. 여기서 “바울계”란 바울과 그의 제자들, 그리고 그의 선교활동으로 만들어진 교회들을 두루 가리키는 표현이다. 그러면 “바울계”가 존재한다면 여기에 속하지 않은 그리스도인들도 있다는 말일까? 저자에 따르면 그렇다. 저자는 명백히 구분되는 특징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했고, 그들 중 한편에 집중한다.


분명 초기 기독교회 안에는 다양한 신앙형태를 가진 사람들이 존재했고, 이는 신약성경 안에서도 드러나는 부분이다. 그들은 아직은 ‘전통’이라고까지 부르기는 힘들어도 분명 서로 다른 신앙생활 방식을 가지고 있었고, 이 때문에 때로 크고 작은 충돌이 일어나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이방인 신자들과 유대인 신자 사이의 긴장이었다.


다만 특정한 관점을 설정하면, 이제 모든 본문을 이 관점에 따라 분리해 보게 되는 부작용이 나타나기도 한다는 점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러다 보면 결과적으로 차이는 더욱 크고, 공통점은 상대적으로 적어 보이게 된다. 저자 역시 이런 분리를 명확히 보여주기 위해 때로 성경 본문이 말하는 것보다 자신의 연구 전제에 입각한 해석을 우선하기도 한다. 이 부분은 독자들이 판단해 읽어야 할 부분.





저자가 말하는 “바울계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특징은 도시를 중심으로 살았다는 점이다. 실제로 사도행전에 실려 있는 바울의 행적을 보면 특정한 영역의 도시를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진행했다는 걸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의 편지에 실려 있는 다양한 소재들은 대부분 도시에서의 삶과 관련된 것들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해 책은 1세기 도시에서의 삶에 관한 다양한 요소들을 살핀다. 사회적 계급과 지위, 여성의 위치, 도시 간 이동 등등.


2장에서는 이들 “바울계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위치에 관한 연구가 소개된다. 흔히 말하는 것처럼 그들은 사회의 낮은 계층에 속한, 소외되고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이었을까? 저자는 다양한 자료들을 통해 이런 통설과 달리, 당시 교회에는 복잡한 사회 계층이 섞여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3장은 당시 교회의 성격에 관해, 비슷한 다른 모임들과의 비교, 대조를 통해 설명하는 내용이고, 4장은 교회 조직의 운영과 관련해 분쟁을 중심소재로 설명한다. 5장은 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의식들, 특히 세례와 성찬을 중심으로 한 의식에 관한 설명이고, 마지막 6장은 1세기 “바울계 그리스도인”이 무엇을 믿고 있었는지 다각도로 살펴본다.




기본적으로 이 책은 신앙서적보다는 신학서적 쪽에 가깝다. 그렇다고 학문적 엄밀성을 최대한 구현하기 위한 빽빽한 주석과 인용으로 채워진 건 아니지만, 이런 성격 때문에 책 본문 자체가 명쾌하기 보다는 늘어지는 느낌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이 책을 손에 들었다면 조금 놀랄 수도. 개인적으로는 책 자체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뭐 그래도 1세기 기독교가 확장되던 시절의 전반적인 사회상을 스케치 하려는 목적으로 책을 편다면 아주 소득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이런 식의 사회학적 연구가 가지고 있는 한계, 그러니까 앞에서도 언급했던 차이의 극대화를 위한 성경본문의 선별적인 선택, 그리고 임의적인 재구성 부분은 확실히 이견의 여지가 있는 부분이라는 걸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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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의 여자들 2 - 4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4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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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터스 오브 로마 시리즈의 열한 번째 책. 이번 책에서는 키케로가 집정관이었을 당시 벌어졌던, 공화정 말기의 가장 충격적인 사건인 “카틸리나 반란”이 중심 소재다. 파트리키 출신이었지만 좀처럼 성공의 사다리를 오르지 못했던 그는 자신과 비슷한 불만을 품은 사람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지방 출신으로 태생에 대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던 키케로는 그런 파트리키 카틸리나를 체제전복세력의 수장으로 몰아 결국 죽음에 이르게 만든다.


물론 여기에는 단순한 질투만 작용했던 건 아니고, 키케로 자신은 정말로 자신이 공화국 로마를 (말로) 지키는 수호자라고 여겼던 것 같다. 하지만 카틸리나의 “음모”를 입증하기에는 증거가 너무 적었고, 자신의 임기가 끝나기 전 문제를 마무리 짓고 싶어 했던 키케로는 결국 로마의 법체계를 넘어서는 초법적 방식인 “원로원 최종 권고”라는 수단을 사용한다.


“원로원 최종 권고”는 오늘날로 치면 일종의 계엄령과 비슷한 조치였다. 현행 법률보다도 상위에 있는 특별한 명령. 키케로는 이 조치를 근거로 카틸리나의 공모자 다섯 명을 기존의 법에 규정된 재판 과정 없이 살해해버렸다. 물론 그들이 아예 혐의점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온갖 편법과 불법을 저지르면서 재산을 모으고 권력을 유지해왔던 원로원 계급 대다수보다 특별히 더 부패한 것도 아니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이건 그저 동족혐오나 근친살해와 비슷한 일이었다.




문제는 이 조치가 단발성으로 그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공모자들을 죽이는 데는 성공했지만, 주모자 격이었던 카틸리나는 북쪽으로 도망쳐 병력을 모으고 있었으니까. 키케로는 최종권고를 카틸리나 사건이 끝날 때까지로 연장시켰고, 그 동안은 원로원 독재가 계속 이어지는 상황이었다. 당연히 이런 조치에 반발하던 사람들도 있었으니, 이 시리즈의 주인공 카이사르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아직 제대로 된 힘이 없었고, 오래 전 호민관 사투르니우스를 원로원 최종권고로 살해했던 사건을 들어 한 늙은 원로원 의원을 재판에 회부하는 식으로, 그 조치가 가진 법적 문제를 상기시키는 것으로 반격할 수밖에 없었다. “최종 권고”가 유효한 상황에서 원로원파는 카이사르를 제거하기 위한 자잘한 음모를 꾸미지만, 노련하게 위기를 빠져나간 카이사르는 자신이 원하던 대로 먼 히스파니아 속주의 총독으로 떠난다.




이번 책의 핵심은 “원로원 최종 권고”의 적법성이다. 키케로는 공화국을 수호하기 위해서라면 일종의 편법을, 아니 법적 근거가 없는 특별 조치를 감행해도 상관없다는 뒤틀린 확신을 갖고 있는 인물로 묘사된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캐릭터를 현대에도 흔하게 발견할 수 있다. 자신이 법 위에 존재한다는 특권의식으로 가득 찬 채, 혹은 자신이 나라를 구하고 있다는 망상에 빠져 온갖 권력기관을 동원해 반대파를 탄압하면서도 아무런 죄책감을 갖지 않는 소시오패스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카이사르가 호헌파였으냐 하면 그런 건 아니었다. 그 역시 당시의 현존 체제의 불완전성을 느끼고 그걸 해속하기 위해 나섰으니까. 역사를 아는 우리야 훗날 그가 공화정을 무너뜨리고 종신 집정관이 되어 사실상 제정을 수립한 인물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 뭐. 하지만 그런 결단은 어쩌면 기존의 원로원 계급이 그를 궁지로 몰아넣었다고 볼 수도 있고.


쉴 새 없는 정치적 대립과 머리싸움을 보는 맛이 있는 시리즈. 다음 권 이야기가 기대되는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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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19
막스 베버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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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 분야의 고전이다. 흔히 고전이라고 불리는 책들을 볼 때면 이런저런 선입관을 가지게 되는데, 옛날식 사고의 한계로 인해 명확한 근거가 제시되지 않은 채로 단정적인 결론을 내리려 하거나, 오늘날의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철 지난 내용들일 수 있다는 생각이 대표적이다.


사실 이 책을 손에 들기 전에, 이미 이 책에 대한 비판적인 관점을 담은 책을 먼저 읽었던 지라, 처음부터 좀 비판적인 관점을 가지고 문장들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무엇하나 오류가 있으면 단번에 잡아내면서 ‘그럼 그렇지’, ‘역시’ 같은 말을 할 준비를 한 채로. 그런데 저자는 앞서의 내 선입관을 상당부분 흔들어버리면서 자신의 논지를 전개해 나간다.


우선 가장 눈에 들어왔던 부분은 쉽게 단정적인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이 부분은 번역의 이슈일 수도 있지만, 저자는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면서 이 주장이 어떤 한계 안에서 주장되는 것인지, 또 자신의 주장과 상충되는 것 같은 다른 의견들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점을 폭넓게 인정한다. 사실 이렇게 써 내려가는 문장들을 읽다보면 우선은 공격적인 태도도 좀 누그러질 수밖에 없다.


또, 많은 고전들이 오늘날의 글쓰기 방식과는 좀 달라서 읽어가는 데 어려움을 느끼게 만드는데 반해, 이 책의 경우 (물론 확실히 예스러운 글쓰기 방식이 묻어나오긴 한다) 의외로 핵심 주제를 파악하는데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건 글의 구성이 괜찮았다는 의미다.




책의 내용은 익히 잘 알려져 있다. 저자는 근대 자본주의의 탄생과 발전에 프로테스탄트의 윤리(노동관)가 큰 영향을 끼쳤다는 내용을 주장한다. 여기에서 저자는 프로테스탄트가 나오기 이전에도 자본주의가 이미 존재했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이전의 자본주의와 이후의 자본주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는데, 그 기준은 탐욕의 무제한적인 허용을 추구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인 것 같다.


무제한적인 탐욕은 분명 자본주의 발전의 한 동인일 수도 있으나, 필연적으로 전체 시스템에 무리를 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개신교의 노동관을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인 ‘금욕주의’는 이런 문제를 제어하는 기능을 했다는 것이다.


저자가 이 책에서 꼽는 개신교 노동 윤리는 주로 칼뱅주의와 그 영향을 짙게 밭은 청교도 쪽이다. 재미있는 건 이런 윤리는 애초의 칼뱅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이다. 어떤 주장이든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특정한 요소가 강조되거나 약화되면서 극단화되는 경향이 있는데, 그건 칼뱅주의도 마찬가지였다.


예컨대 저자가 말하는 개신교 노동윤리의 핵심 중 하나는 예정론인데, 정작 칼뱅 자신은 이 예정론을 자신의 신학의 말미의 ‘송영’으로 사용하는 감이 있었다. 하지만 이후 칼뱅주의자들은 이 주장을 핵심의 영역으로 끌고 들어왔고, 이것이 근대 자본주의를 발전시키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는 주장이다.


예정론은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을지 그렇지 않을 지가 이미 정해져 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각자는 자신이 구원을 받기로 예정되었는지 확신할 수 없었고, 여기에서 일종의 예정 판별법이 생겼다. 내가 어떤 일을 열심히 했을 때 그것이 성공적인 성과를 거둔다면(즉 많은 돈을 벌게 된다면) 그건 (구원으로) 예정 받았다는 증거가 아니겠느냐고. 사실 칼뱅이 들었다면 무슨 황당한 소리냐고 반문했을 만한 이야기지만(cf. 60), 아무튼 그런 식으로 칼뱅의 주장은 사용되었고, 이 또한 근대 자본주의 발전에 중요한 동인이었다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다만 이 모든 주장을 하는데 있어서 과학적인 통계나 분석 작업이 부족했다는 점은 지적될 수밖에 없다. 책 전체에 걸쳐서 통계 비슷한 내용이 나오는 건 처음의 몇 개의 장뿐이었고, 그 중 하나는 헝가리의 개신교인과 가톨릭교인들 사이의 각급 학교 진학률과 관련되어 있는 내용이었는데, 물론 종교에 따라 어떤 분야에 관심을 더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줄 수 있는 통계이긴 하나, 헝가리는 일반적으로 자본주의 발전에서 그리 중요한 역할을 한 지역은 아니다.


또, 저자 자신도 언급하듯이, 어떤 지역에서 소수파는 상대적으로 정치보다는 경제 쪽으로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49), 그리고 근대 자본주의가 발달한 지역들은 애초부터 어느 정도의 자본이 축적되어 있는 지역이라 자본주의 발달에 유리한 정황을 가지고 있었고, 그 후에 개신교를 받아들인 것(독일의 경우)라는 주장(43)도 무엇보다 저자의 주장에 대한 강한 반론의 논리를 제공한다.


그리고 또 하나, 책에서는 언급되지 않지만 생각해 볼만 한 부분은, 어떤 지역이 특정한 종류의 개신교가 지배적인 상황이 되었다는 것과, 그 지역에 속한 사람들이 그 신앙에 충실한 삶을 살았다는 주장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에를 들면 영국 국교회인 성공회가 주류였던 시대 영국의 시민들이 정말로 일상생활에서도 국교회 신앙에 충실하게 살았을까?


오히려 남아 있는 여러 자료들에 의하면 당시 시민들의 교회 출석률부터가 매우 낮았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신학적인 내용에 무지하거나, 오히려 교회를 조롱했다고 한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어떤 지역의 주류 신앙에 따라 그 지역의 자본주의 발전이 달라졌다는 저자의 주장의 타당성은 상당 수준 감소할 수밖에 없다.




책 후반으로 갈수록 두드러지는 면은, 이 책이 사회학 분야의 고전이기는 하지만 그 내용은 오히려 역사신학 쪽에 가깝다는 느낌이었다. 특히 개신교 각 분파들의 주장에 관한 세밀한 비교와 대조, 그 차이점들에 대한 높은 수준의 고찰 같은 면들은 훌륭하다. 사실 이 책이 근대의 다양한 개신교 분파들의 노동윤리에 관한 연구라는 주제를 담고 있었다면 오히려 신학 쪽에서는 더 높은 평가를 받았을 지도 모르겠다.(물론 “사회학 분야의 고전” 쪽이 좀 더 유명해 지는 데 유리했겠지만)


이 책의 주장과 관련해 많은 종류의 오해들이 양산되는 경향이 있다. 그 중 하나가 개신교를 받아들인 나라는 경제가 발전했다는, 책의 결론을 아주 살짝 비튼 주장이다. 이 주장은 다양한 차원에서 저자와는 상관이 없는데, 우선 저자가 책에서 꼽는 프로테스탄트 윤리는 전체 개신교회중 매우 일부(후기 칼뱅주의의 영향을 받은 청교도적 신앙)에 한하며, 다른 종류의 금욕주의적 개신교 분파들은 비슷한 노동윤리를 만들어 내지 못했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그 개신교 윤리를 만들어낸 신앙도 시간이 지나면서 상당히 변화를 겪었기에, 오늘날 그 신앙의 후예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신앙이 그 나라의 경제발전에 영향을 주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이 책의 주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더라도, 저자가 말하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의 기여는 특정한 시기, 특정한 지역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는 정도로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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